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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

  • 작성일 2024-05-01

   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해?


   난 나무를 못 봐.

   난 나무를 몰라.


   난 나무를 정말 모르는 걸까?


   난 나무를 정말 못 보는 걸까?


   내가 어릴 때 엄마가 날 나무에게 데려갔어. 내게 나무를 만지게 했어. 줄기, 나뭇가지, 잎. 


   나무는 재미없어.

   나무는 말을 못 해. 

   나무는 빨간색이 아니야. 


   “날 나무에게 데려가지 마.”


   난 나무를 알고 싶지 않아.


   내가 알고 싶은 건 오직 하나. 


        

   8 


   “모습이 그려져.”


   그녀 앞에 놓여 있는 작은 돌.


   섬.


   “가지 마.”


   “아직 가지 마······.”



   9


   “내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 


   난 내 얼굴을 본 적 없지만 내 얼굴이 가장 예쁘다는 걸 알아.

   내 얼굴에서 가장 예쁜 데는 눈. 

   내 눈은 반달.   


   어릴 때 내 손가락이 자꾸 내 눈을 찔렀어. 엄마가 내 손에 장난감 수갑을 채웠어. 손가락이 자꾸 눈을 찌르면 눈이 꺼지니까.


   내 예쁜 얼굴이 보고 싶지는 않아. 

   거울이 내 얼굴을 봐. 

   내 예쁜 얼굴을 보고 거울은 점점 예뻐져, 딱딱해져.


   “아, 나는 내가 너무 좋아.”


   “아, 나는 내가 가장 좋아.” 


   “아, 나는 나를 너무 좋아해.”


   심장도 빨간색.


   빨간 집을 그리고 나서, 나는 화가가 되려는 꿈을 버렸어. 

   나는 스무 살이 되고 싶었어. 그리고 정말로 스무 살이 됐어.



   10


   지금은 내가 가장 좋진 않아.

   내가 싫은 건 아니야. 

   내가 좋지도 않지만 싫지도 않아. 


   자주 머리가 아파, 어지러워.  


   긴 낮. 

   그보다 긴 밤.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새벽 3시, 아빠가 출근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잠들지 못할 때도 있어. 


   안 돼, 안 돼······.


   스무 살이 되고, 내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말이 안 나와. 내가 너무 좋다는 말이 안 나와요.



   11


   “나는 나가고 싶어.”


   “나는 나가고 싶어.”


   (그녀의 등 뒤 문이 열린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노래는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여.”


   “노래는 보라고 하지 않아.”



   12


   난 날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싶어. 


   난 날 아무 곳으로도 데려가지 못해. 


   새처럼.



   13


   모습이 그려져.


   모습이 그려진다는 게 뭔지 몰라, 몰라.


   숲에 가고 싶지 않아. 

   숲에서 내가 뭘 해? 


   다른 집에 가고 싶어. 


   다른 집에는 사람들이 있어. 


   다른 집에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는 얘기를 나눌 거야. 


   “사람은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 



   14


   스무 살이 되고, 불편한 내 몸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 

   내 몸이 싫은 건 아니야.

   난 춤을 추고 싶어.


   아무도 원망하지는 않아. 


   내가 슬퍼······. 


   슬픔이 오면 그냥······ 그냥······.


   열여덟 살 때부터 슬픔을 느끼기 시작했어. 


   슬프다는 감정이 자주, 문득 와. 


   슬픔이 오면 그냥······ 그냥······.


   나는 설레고 싶은데, 날 설레게 하는 게 없어.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15


   슬픔이 깊어져······.


   오직 사랑.


   사랑을 하고 싶은데 못 하니까.


   나는 사랑이 하고 싶은데······. 


   나는 사랑을 해야 하는데······. 


   노래를 들어 주고, 노래를 불러 주고, 함께 노래를 듣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노래, 노래, 노래······ 그게 사랑.


   (그녀의 얼굴에서 터지는 웃음)


   잘생긴 남자하고 사랑이 하고 싶어. 

   목소리가 잘생긴 남자가 잘생긴 남자. 중저음에, 부드럽고, 달달하고······ 노래를 잘해야 해.    


   사랑은 날 설레게 해.


   (그녀의 얼굴에서 터져 넘치는 웃음)


   “아, 목소리가 너무 좋아.”



   16


   나는 노래를 부르며 살아야 해.


   나는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야 해.


   나는 사람들과 말을 나누며 살아야 해.


   나는 사람들과 사랑하며 살아야 해.



   17


   “나는 기다려.”


   빨간색, 심장, 태양, 열정—.

   달이나 별은 모르겠어.


   누가 날 찾아왔으면······.


   스무 살이 되고, 기다림이 시작됐어. 



   18


   나는 밤보다 낮이 좋아.

   낮에는 빛이 있어.

   낮에는 손님은 와.


   밤이 되면 손님이 가버려.


   나는 손님을 기다려.


   아무도 안 와.

   아무도 안 와.


   “나는 그냥 앉아 있어.”



   19


   그렇게 밤이 오고, 


   나는 내 방에 거울처럼 딱딱하게 고여 있어요.


   딱딱하게, 딱딱하게,

   세상에 바람이 불어. 


   나무, 벽, 굴뚝, 버스, 의자, 신발, 사다리, 자전거······ 내가 본 적 없는 것들이 바람에 날아가는 소리가 들려.


   노래를 듣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바람은 내 방에도 불어. 

   바람이 날 흔들어.


   딱딱하게, 딱딱하게,

   나는 출렁여. 


   딱딱하게, 딱딱하게,

   나는 가라앉아. 


   내 얼굴은 거울이 돼. 


   그리고 문이 열려.


   내 얼굴에 엄마가 자신의 얼굴을 비춰 봐.


   내 얼굴에 동생들이 자신들의 얼굴을 비춰 봐.


   내 얼굴에 아빠가 자신의 얼굴을 비춰 봐.


   그리고 문이 닫혀.


   고요한 밤.

   우울한 밤.


   딱딱하게, 딱딱하게,


   나는 거울보다 더 딱딱해져.



   20


   나는 바다 앞에 누워 있어.   


   나는 바다보다 커.


   나는 바다보다 깊어.



   21


   “만지고 싶지 않아.”


   “안 아파.”


   “두렵지 않아.”


   “내게 보이지 않는 걸 만지는 게 두렵지 않아.”



   22


   날다? 


   날아가다?


   날아가는 소리는 알아.


   “그리워.”


   “사람이 그리워.”


   “나와 얘기 나눌 수 있는 사람.”

 


   23


   바다에는 바다만 있어.


   바다는 색깔이 없어.

   바다는 모습이 없어.

   바다에는 소리들이 있지만 노랫말이 없는 소리들이야.


   바다에는 빛이 있어.


   엄마는 날 바다에 데려가고 싶어 해. 

   바다에 날 띄우고 싶어 해. 


   바다는 날 만져. 

   바다는 날 보지 못해. 


   24


   내가 아기 때, 

   빛조차도 못 볼 때, 

   밤에도 눈을 감으려 하지 않았대. 


   아무도  


   나는 눈을 감아.


   눈을 감는다는 건 보고 싶지 않다는 거야.


   보고 싶지 않다는 건 뭘까?


   보고 싶다는 걸 뭘까?


   “내 마음을 받아 주세요.”


   보고 싶었어. 


   보면 심장이 뛰었어.


   열다섯 살에 처음 사랑을 했어. 짝사랑이었어. 한국사와 사회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었어. 선생님을 보면 심장이 뛰었어.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학교에 가는 게 즐거웠어요.

   선생님이 아프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팠어. 

   공개수업시간에 친구들과 다른 선생님들 앞에서 고백했어. 

   “내가 선생님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내 마음을 받아 주세요.” 


   스무 살이 되면 사랑을 할 줄 알았어. 



   25


   그녀 앞에 굽은 강처럼 놓인 나뭇가지.


   “노래는 내게 보라고 하지 않아요.” 


   나뭇가지는 흐른다,

   흐르다,

   그녀 앞으로 되돌아온다. 



   26


   나는 노래를 좋아해.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 노랫말이 있는 노래. 

   듣기만 해야 하는 음악 싫어. 


   노래는 만지지 않아도 느껴져요.


   슬픈 노래는 날 울려, 슬픈 영화는 날 울리지 않아.  

 

   사랑은 오지 않고, 

   하루가 와,

   매일이 와, 

   인생이 와.


   내 인생이 와.


   보이지 않아, 만져지지 않아,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아. 



   27


   나는 바다 앞에 누워 있어.


   나는 바다보다 높이 있어.


   나는 바다보다 멀리 있어.


   멀리······.


   그만큼 


   가까이······. 


   보고 싶다는 갈망이 없었어. 보는 게 뭔지 모르니까······ 보인다는 게 뭔지 모르니까······ 모르면서······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나는 스무 살. 


   보고 싶어······.



   28

 

   내가 빨간 크레파스로 그린 집에는 빨간 심장이 있어. 

   창문도, 문도, 지붕도 없지만 

   내 빨간 심장이 빨갛게, 빨갛게 넘쳐나.


   빨갛게, 빨갛게,

   빨간 심장이 넘쳐나 빨간 집이 돼.


   내 빨간 심장이 뛰어, 빨간 집이 뛰어.


   빨간 집은 비를 맞아도 빨개.

   빨간 집은 눈을 맞아도 빨개.


   빨간 집은 꺼지지 않아,

   차가워지지 않아. 


   빨간 집에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빨개져.

   빨간 집에 다녀가는 나비들이 빨개져. 


   구름이 흐르다 빨간 집에 닿으면 빨간 심장이 돼.



   29 


   노래가 없어. 


   듣기 좋은 소리가 없어.


   나는 엄청 솔직한 여자. 

   나는 단순한 여자.

   나는 살아 있는 여자. 

   나는 노래할 줄 아는 여자.

   나는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

   나는 사랑을 고백할 줄 아는 여자.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내 심장을 흙 위에 놓아요.

   내 심장을 나무 위에 놓아요.

   내 심장을 숲속에 놓아요.

   내 심장을 달 옆에 놓아요.


   아직 가지 마······.


   멀다는 게 뭔지 몰라, 

   가깝다는 게 뭔지 몰라. 


   나무는 그냥 멀리 있게 둬.



   30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너무 좋은데 슬플 때가 있어.


   나만 외로워.

   나만 느끼네. 

   나만 몰라.


   나만 몰라, 몰라.



   31.


   “돌은 초록색일 거야.”


   “돌의 나이는 일곱 살? 여덟 살?”


   “까끌까끌하고 삼각형이야.”


   “돌은 산에 있었어, 계곡에 있었어, 나무 밑에 있었어.”


   “누가 돌을 만들지 않을까?”


   “누가 돌을 만들었을까?”

 

   “누가 돌을 나무 밑에 가져다 놓았을까?”



   32


      (그녀의 엄마) 마음을 비워.

      (그녀) 그게 돼?

      (그녀의 엄마) 넌 집착하고, 생각하고······.



   (그녀의 오른쪽 눈에 눈물방울이 맺힌다.) 


   당신을 만나서 감사해. 그 말을 하고 싶어······.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어요.


   사랑······.



   33


   “서랍 속에 있을 거야.”


   “서랍 속에 있었어.”


   “서랍 속에 있는 거 봤는데······.”



   34. 나뭇가지


   “난 나무 막대기라고 부를래.” 


   “나뭇가지보다 나무 막대기가 어울리는 것 같아.”


   “초록색이었을 것 같아.”



      (그녀의 엄마) 비바람에 흔들리고 꺾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그녀) 난 안 아파.


      (그녀의 엄마) 난 마음이 아파.

      (그녀) 난 안 아파.




   “나무 막대기에 아무것도 앉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빈 채로 있었으면 좋겠어.”


   “처음엔 새가 와서 앉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니까······.”



      (그녀의 엄마) 초록 잎이 돋아나고 꽃도 피었으면······.

      (그녀) 빈 채로 있었으면 좋겠어. 



   “1년 후에 나무 막대기는 없을 수도 있어. 누가 가져가서 그걸 깎아서 뭘 만들었을 수도 있어.”


   “누가 가져가서 뭘 만들려다 버렸을 수도 있어. 뭘 만들기에 나무 막대기가 너무 작으니까.”


   “난 나무 막대기 갖고 싶지 않아.”


   “내게 나무 막대기를 가지라고 하면 내 방 서랍 속에 처박아 둘 거야.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으니까.”


   “나무 막대기를 그냥 가져다 놨으면 좋겠어.” 


   “나무 막대기가 원래 있었던 곳에.”


   “나무 밑에.”


   “나무는 숲에 있어.”


   “숲은 멀어.”


   “나무는 더 멀어.”


   “나무는 집에 없어.”


   “난 숲에 가고 싶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이 나무 막대기를 가져다 놓으려 함께 숲에 가자고 하면 갈 수도 있어. 숲에 가고 싶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가자고 하면······.”



   35.


   “실은 빨간색이야.”


   “난 묶는 걸 안 해봤어.”


   봄······ 설렘······ 기쁨······ 즐거움······.


   “내 손가락들이 묶는 건 못 해도 묶여 있는 걸 풀 줄은 알아.”



   36


   노래 가사 제목은 ‘고백’이야.


   (그녀의 오른쪽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흐른다.)


   나는 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그리고 난 안 아파.


   그리고 오늘 밤 나는 노래 가사를 쓸 거야.  


   오늘 밤, 그런데, 


   나는 왜 나에 대해 생각을 안 할까?



1) 선천성 점맹과 지체장애가 있는 ‘최다원’ 씨와 인터뷰 후 쓴 소설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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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소설

불법주차

불법주차 김숨 벌써 20분 가까이 상훈은 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차를 세워 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서였다. 골목들이 원체 불길에 오그라든 먹장어처럼 좁고 구불거리는 데다, 평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곳에는 차가 대 있었다. 어쩌다 차가 대 있지 않은 곳에는 큰 화분이나 ‘주차금지’라고 휘갈겨 쓴 고무통 따위가 초소병처럼 지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녀간 게 이태 전이던가. 정초 즈음이었고 이슥한 밤이었다. 대낮에 그가 광선이 사는 동네를 찾은 건 처음이었다. 다녀갈 적마다 먹지 같은 어둠에 덮여 있던 골목 후미진 곳까지 가을빛에 적나라하게 까발려 있었다. 체기 올라오듯 슬슬 짜증이 치미는 그의 시야에 미장원 앞 자투리 공간이 들어왔다. 그는 그곳으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미장원 유리문을 막지 않으려 신경 쓰면서 차를 세웠다. 어수선한 미장원 안을 흘끔 살핀 뒤 차 시동을 껐다. 조수석에 던져 둔 잠바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전화번호목록을 살피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저, 상훈이요. 네…… 근처예요. 집 근처라니까요, 잠깐 들를까 하는데…… 집 근처요. 왜요? 갑자기 찾아오면 안 돼요? 네, 지금요, 지금…… 네…… 집 근처라니까요. 준헤어 앞이에요. 미장원이요. 네…… 집 아니에요? 암튼 지금 집으로 갈게요. 얼굴도 좀 보고 할 얘기도…….” 그가 안전벨트를 풀자마자, 검은 앞치마를 두르고 통굽 샌들을 신은 여자가 미장원 유리문을 드르륵 밀고 밖으로 나왔다. 당장 차를 빼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차창을 반쯤 내리고 여자에게 사정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잠깐만 댈게요.” 여자는 그러나 더욱 완강하게 손짓을 했다. “차 댈 데가 없어서 그러는데 20분만…….” 여자가 미장원 안으로 들어가더니 빨래건조대를 들고 나왔다. 여차하면 그것을 차 앞유리로 던질 듯 그를 쏘아보았다. “정말 어지간하지 않아요?” 그러나 노인네는 일언반구 없었다. 흘끔 돌아보았지만 운전석 의자 뒤에 따개비처럼 웅크리고 있어 모습마저 잘 보이지 않았다. 골목을 빠져나가자 왕복 6차선 도로가 나왔다. 도로변에 바짝 차를 댔다. “어쩔 수 없잖아요. 골목에는 차 댈 데가 없으니…….” 웬만하면 도로변에는 차를 세우지 않으려고 그렇게나 골목을 헤매고 다닌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엊그제 도로가에 잠깐 차를 세웠다가 주차위반 과태료 딱지를 뗐다.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를 사고 거스름돈을 건네받는 사이 주차단속원이 나타나 단속을 했다. 그는 혹시나 CCTV나 주차단속원이 없는지 주변을 살핀 뒤 시동을 껐다. “금방 올 테니까, 아버지는 차 안에서

  • 2012-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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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양서토

    "내 예쁜 얼굴을 보고 거울은 점점 예뻐져, 딱딱해져."

    • 2024-06-09 12:44:33
    양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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