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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릴 떠난 채식주의자와 불을 끄는 돼지들

  • 작성일 2026-05-01

  우릴 떠난 채식주의자와 불을 끄는 돼지들


김아인


1


  산길의 고지를 넘자, 훅 안개가 끼는가 싶더니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권은 전조등을 상향으로 바꾸고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밤 기온이 뚝 떨어지는 늦여름이면 곧잘 있는 일이었다. 권은 턱을 당기고 운전대를 단단히 잡았다. 좁은 2차선 도로에 굴곡마다 급커브를 도는 가파른 산길이었다. 늦은 새벽에 비까지 더해지면, 아무리 익숙히 오가는 길이라 해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권은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시 반이었다. 이대로면 집에 들어가는 건 세 시나 되어서일까. 권은 어금니를 맞붙이며 나오는 하품을 흘려보냈다. 왠지 평소보다 몸도 찌뿌둥하고, 눈도 뻑뻑한 기분이었다. 권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걸어가든 기어가든, 일단 굴러가곤 있다는 게 중요했다. 회사 차량─주행거리 36만 킬로미터의 다마스 트럭이 말썽을 피우거나, 도로가 끊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권은 눈살을 찌푸렸다. 축축한 기억 하나가 머릿속 깊은 곳에 얽혀있는 배관 속을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 지나갔다. 권은 그것이 뒤로 남긴 끈끈한 발자국을 되짚어 다시 한번 그 냄새와 습기를 떠올려냈다. 그리고 자신이 그걸 잊고 있었던 게 아니라, 단지 그 무게에 익숙해져 있었을 뿐이란 걸 깨달았다.


2


  권의 별명은 권이었다. 권. 태극권. 영춘권. 북두의 권. 사실 그가 다니는 곳은 주먹질과는 거리가 먼 유도 도장이었지만, 또래 아이들에겐 별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권이었고, 전혀 다른 곳에 가도 권이었고, 유도가 뭔지 알 만큼 아는 이들 사이에 속해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는 권이었다.

  권이 유도를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열여섯은 선수를 목표로 하고 운동을 시작하기에 이른 나이는 아니지만, 그에겐 소질이 있었다. 우선 신체적 조건이 좋았다. 체격이 크고, 힘과 유연성이 좋았다. 처음 찾아간 도장의 관장이 한 말에 따르자면 균형감각이 굳세고 순발력도 탁월했다. 하지만 진짜 소질은 따로 있었다. 권은 상대 선수의 사전정보를 바탕으로 전략을 짜거나 여러 파훼법을 미리 염두에 두지 않아도, 본능에 따라 승리를 위한 최적의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관장은 그걸 두고 재능의 영역에 있는 감각이라고 말했다. 머리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이 그런 본능적인 감각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란 거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너는 생각하기 시작하면 굼떠져. 알겠어? 그 순간의 판단을 믿고 바로바로 움직이라고. 너는 그게 맞아.”

  권은 그 말을 따랐다. 그는 반년 만에 청소년부를 떠나 성인부에 들어가게 됐고, 일 년이 좀 더 지나선 체급과 나이를 통틀어 지역 내에 붙을 만한 상대가 없게 되었다. 다른 학교나 시설, 다른 지역과의 교류를 할 때도 주목받을 만큼 두각을 드러냈다. 관장은 권을 자랑스러워했고, 권도 자부심을 느꼈다.

  추천으로 체육대학에 입학한 후, 권은 더 많은 시간을 유도에 쏟아부었다. 자잘한 성과는 있었다. 도 대회에서 몇 번인가 입상했고 커다란 도장에 사범으로 스카우트되어 코칭도 맡았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한 명의 선수로서는 답보 상태가 지속됐다. 처음에는 슬럼프라고, 누구라도 얼마간은 겪는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상태가 일 년이 넘기자, 권도 상황이 생각한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 이젠 글렀죠. 하루에 열 시간씩 도장에 처박혀 기계처럼 운동만 하는데도 그 모양이면, 그게 그른 거지. 안 그래요? 무식하게 몸만 쓰지 말고, 이거,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라는 것도 해보라고요, 좀.”

  그렇게 말한 건 권이 한동안 호감을 가지고 있던 대학의 후배였다. 후배는 그 말을 마치고는 권이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다른 자리로 옮겨 가 버렸다. 권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후배의 얼굴과 말투에선 취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아예 마음에 없는 소리가 아니란 것도 알 수 있었다. 권은 술잔을 내려다봤다. 한 시간도 전에 채운 소주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건강에도 안 좋고, 다음 날의 운동 컨디션을 망치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권은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길 그렇게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후배와 말 한마디라도 섞어보고자 마시지도 않는 술을 앞에 두고, 누가 반기지도 않는 학과 행사에 참석해 앉아 있는 꼴이라니. 우스웠다.

  권은 술집을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행선지를 말하고, 차창에 기대어 앉아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가로등과 빌딩의 야경을 바라봤다. 후배의 말이 귀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기계처럼. 기계? 내가 그랬나? 권은 대학 생활을 돌이켜봤다. 뜸하긴 해도 간혹 대회에서 성적도 올렸고, 상금과 도장에서 일한 월급으로 건실하게 등록금과 생활비도 내고 있었다. 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솔직히 목표보단 조금 부진하지만, 언젠가 기회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학의 성적은 바닥. 친한 동기나 선후배도 없었다. 특별한 취미도 없고, 유행하는 것도 몰랐다. 미루지 않고 다녀온 군대에서도 지루한 행정 잡무를 본 게 고작인지라 이야깃거리도 없었다. 유일하게 말이 이어지는 곳은 도장뿐이었다. 문제를 지적하고, 보완점을 제시하고, 질문을 받고…… 하지만 그건 대화가 아니었다. 근육의 열기와 땀이 식고 양말을 신은 발로 거리로 나오면, 권은 좀 외로웠다. 외롭고, 좀 서글펐다. 어딜 가든 생각이라 할 수도 없는 새카만 사고의 뭉텅이가, 가시덤불처럼 머릿속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몸 안을 할퀴고 찔러댔다.

  집에 도착해 이불 속에 웅크린 뒤에도 권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뭐가 문제였을까. 그냥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살고자 했을 뿐인데.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그런 걸 수도 있었다. 그럼 더 열심히 해야 하나? 기계처럼? 애초에 기계 같지 않고 사람처럼 산다는 게 뭘까.

  유도를 그만둔 날, 권은 평소처럼 학생들의 대련을 지도했다. 팽팽하게 오가는 공격과 수비의 흐름에 집중하며 그들의 결함을 지적하고 알맞은 피드백을 고민해야 했지만, 권은 한동안 멍하게 그들의 움직임을 구경하기만 했다. 문득, 그는 그 광경이 자신을 지긋지긋하도록 불쾌하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다. 긴장감에 정신이 피로하고, 투지에 숨이 막혔다. 갑자기 그 모든 게 서로를 공격해 바닥에 누르고 승리를 쟁취하려는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행위인 것 같았다. 권은 마음이 굳는 걸 느꼈다. 단지 도복을 입고, 서로의 몸에 힘을 가하기 전에 인사와 악수를 주고받았다고 해서 폭력이 아닌 걸까. 기술이 있고 전략이 있고 규칙이 있고 합의가 있다고 해서 폭력이 아닌 걸까. 물론 아니었다. 아니라고 봐야 했다. 그게 약속이었다.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건강한 운동일 뿐이라는 약속.

  하지만 권은 납득할 수 없었다. 만약에, 상대의 관절을 공격하고 바닥에 쓰러트리려는 움직임들이 축구의 킥이나 헤딩처럼 단순히 그 스포츠를 이루는 요소일 뿐이라면, 나는 왜 지금껏 실력 차이가 크게 나는 상대에게 무심코 그 강도를 낮췄을까. 확실히 득점할 수 있는 빈틈을 발견하고도 간혹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은 걸까. 권은 그 답을 알았다. 규칙과 약속이 그 행위를 변호해 준다 해도, 그의 심리까지 변호해 주진 않기 때문이었다.

  그게 바로 그의 약점이었다. 나약해 빠진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 권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게 싫었다. 경기에서 이긴 후 어딘가 절고, 아파하는 상대에게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미는 게 힘들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졌다. 더 빠르고 강해질수록, 조르고 짓누르는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상대의 몸에 나는 멍은 더 짙어지고 고통의 신음은 더 커졌다. 권은 그걸 견딜 수가 없었다. 후배의 말대로 자나깨나 유도를 했지만, 그는 기계가 아니었다. 그리고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관장이 시킨 대로 생각 없이 무자비하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게 지난 몇 년간 점점 커지기만 했던 슬럼프의 정체였다. 그런 것도 모르고 살았다니. 그런 간단한 사실을 깨닫는 데 십 년이나 걸렸다니. 부끄러웠다. 껍데기일 뿐인 몸이 가진 소질에 눈이 멀어, 더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본성을 외면해온 꼴이었다. 권은 숨을 내뱉었다. 입안이 썼다.

  그날 저녁 권은 출근부에 붙어있는 자신의 이름표를 떼 쓰레기통에 버렸다. 납득할 수 없다면, 납득하지 못한 사람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쓰던 캐비닛 열쇠를 빈 사무실에 두고, 도장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3


  공장은 고향 읍내에서 십오 분가량 벗어난 곳에 있는 산업단지,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으로 들어간 완만한 산기슭에 있었다. 권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몸을 움츠리며 겉옷을 여몄다.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아스팔트가 깔린 부지 바로 너머로 바짝 산줄기의 숲이 우거져 있었다. 굵직한 나무들이 일제히 바람에 떨렸다. 마치 최소한의 문명도 끊기는 경계선 같았다.

  공장은 크지 않았다. 외벽을 회색 골강판으로 덧댄 복층 작업장과 그 옆에 붙어있는 컨테이너 하우스 사무실이 전부였다. 수건 공장이라고 들었지만, 제품 생산 공장이라면 당연히 보여야 할 게이트나 지게차, 팔레트 같은 것들도 없는 게 생각보다도 작업의 규모가 단출한 듯했다. 사무실 문을 두드리자, 육십 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늙수그레한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권은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어제 전화드렸던 사람인데요. 납품 업무…….”

  남자는 소리 없이 ‘아’ 하는 입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8, 9평쯤 되어 보이는 사무실 안에는 다용도 서랍과 예스러운 철제 책상, 검은색 가죽 소파, 유리 탁자, 서류 캐비닛, 전기난로 따위가 중구난방 놓여 있었다. 자신을 공장장이라고 소개한 중년 남자는 권이 건넨 이력서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옆으로 치웠다.

  “운전은 괜찮게 하시나?”

  1종 보통면허를 딴 게 반년 전이었으니 실력이 괜찮다고 말하긴 힘들었지만, 권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공장장은 그러면 됐다며 두꺼운 안경을 벗었다.

  “사실 잘할 필요도 없어. 그냥 괜찮게만, 사고 안 낼 정도만 하면 돼. 어려운 일 아니니까 경력이나 나이도 안 따지고. 맡은 일 성실히 하고, 성격 모난 데 없고, 진득하게 있을 확실한 사람이면 충분해.”

  공장장이 일어나 공장 안쪽으로 나 있는 덧창을 열고 뭐라 소리 높여 말했다. 잠시 후 남자 직원 한 명이 사무실로 올라왔다. 인수인계를 맡을 전임자라고 했다. 그는 권과 대충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곤 자신을 따라오라며 앞장서 나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공장의 뒷마당이었다. 조그만 트럭 한 대가 뒷번호판을 보이며 서 있었다. 전임자가 트럭의 지붕을 퉁퉁 두드렸다. 서로 인사해요. 오래 볼 사이인데. 권은 꼼짝도 하지 않고 차를 바라봤다. 권은 그 차종을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옆에서 본 조그만 농수산물 시장의 배달원이 몰던 그 차였고, 중학교 교문 앞에서 몰래 장사하던 노인의 붕어빵 기계가 들어있던 그 차였고, 그의 외삼촌이 땀에 젖은 작업복을 벗지도 않고 등받이를 젖힌 조수석에 누워 곯아떨어지던 그 차였다. 2003년형 2세대 다마스. 그게 그 원박스카의 이름이었다.

  “이게 납품 차량인가요?”

  권의 굳은 말투에 직원이 눈썹을 찡그렸다.

  “왜요? 뭐 잘못됐나?”

  아뇨. 아뇨. 권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 말대로였다. 잘못된 건 없었다. 조그만 공장에 어울리는 조그만 납품 차량이었다. 애초에 업무 차량으로 대단한 걸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불쑥 덮친 실망감이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차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자신을 향한 실망이었다. 그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려온 모든 선택에 대한 실망. 그가 이곳에 타의에 의해 서 있는 게 아니었다. 삶에 기회가 적었기 때문도 아니고, 피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고, 불운과 실수가 겹쳐서도 아니었다. 잘못된 게 없다니. 늘 최선이라 믿고 자신 있게 선택해왔던 갈림길이 그를 데려다 놓은 곳이 이런 원박스카 앞이라는 게, 잘못된 일이 아닐 리가 없었다. 다만 그 모든 잘못을 스스로 쌓아왔고, 이젠 자기 힘으로는 무엇 하나 돌이킬 수 없어 이런 상황에서도 뭐 하나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었다. 직원이 권의 어깨를 두드렸다.

  “금방 익숙해져요. 그냥 지루함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하면 돼. 올해 몇이라고 그랬지?”

  권이 나이를 말하자 그가 미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하면 알 만한 나이네. 일이란 게 다 그렇잖아요. 일만 그런가? 사는 게 다 그렇지. 안 그래요?”

  권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이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그것참 꼴사나운 말이고, 꼴사나운 자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리 틀리지도 않은 말이리라 생각했다. 그럼, 하며 직원이 권에게 차 열쇠를 건넸다.

  “운전 한 번 해볼까요?”

  주행 코스는 산업단지를 조금 벗어나, 끝없이 펼쳐진 밭을 따라가는 마을 길이었다. 바닥이 시멘트라 거칠긴 해도 경사가 없고 차도 다니지 않아 쉬운 코스였다. 하지만 권은 주행 내내 잔뜩 몸을 움츠리고 긴장했다. 운전을 하는 게 몇 달 만이었고, 처음 모는 차가 낯설기도 했다. 핸들과 클러치의 감도가 지나치게 뻑뻑하고, 변속 타이밍도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뭔가 달랐다. 그전까지 몰아본 차들이 차 문을 닫고 차체에 들어간 순간 도로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진 느낌을 줬다면, 때문에 차가 그를 싣고 움직이는 속도가 무한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면, 이 차는 그렇지가 않았다. 권은 그제야 그 차의 형태를 ‘원박스’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든 면이 얇은 철판으로 된 상자 안에 들어가, 고개만 내민 채 차도 한가운데에 덜렁 버려진 기분이었다. 마치 두꺼운 갑옷으로 무장하고 나가야 할 백병전에 양철 양동이 하나만 덜렁 뒤집어쓰고 뛰어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도록 권은 양철 양동이를 뒤집어쓴 채 더듬더듬 일을 해 나갔다. 일 자체는 복잡하고 어려울 게 없었다. 실수할 거리도 별로 없고, 혼자 일하니 눈치 볼 사람도 없었다. 아침에 출근해 제품이 나올 때까지 운전석을 젖히고 누워 기다리다, 차에 싣고, 수량을 체크하고, 반장에게 보고하고 출발해, 한참 운전하다, 밥때가 되면 차를 세워놓고 도시락이나 빵을 먹고, 다시 운전하고, 운전하고, 그렇게 도착하면 물품을 옮기고, 확인받고, 서명하고, 되돌아 나와 운전해, 또 한참을 가다 배가 고파지면 남은 음식으로 때우거나 휴게소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계속 운전해 동네에 돌아올 때쯤이면 보통 늦은 밤이나 새벽이었다. 그러면 집에 돌아가 아침까지 자거나, 간혹 너무 늦어 잘 시간이 부족할 땐 씻기만 하고 나와 공장 옆에 주차해 놓고, 새벽부터 납품할 물건이 나올 오전까지 차 안에서 눈을 붙였다. 그게 일과였다.

  어느 날 권은 다마스 지붕에 양치컵을 올려놓고 보닛에 기대 이를 닦다가, 자신이 그 차 안에서 사는 거나 다름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마스 트럭과 ‘오래 볼 사이’라고 한 전임자의 말이 이해됐다. 하지만 다른 말─이 일이 지루함과의 싸움이라는 표현은, 조금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싸움보다는 불편한 공생을 해 나간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지루함보다 그를 괴롭히는 건 외로움이었다. 공장. 도로. 납품처. 아무도 없는 집. 외로움을 해소해 줄 장소는 한 곳도 없었다. 그중 어디에도 권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어딘가에는 있나? 권은 칫솔을 입에 문 채 타이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권은 가끔 그렇게 스스로에게 잔인한 질문을 하는 자신이 미웠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자신이기 때문에, 권은 이야기할 사람도 미워할 사람도 자신밖에 없었다.


4


  권이 처음으로 최희를 만난 건 회식 자리에서였다. 공장장의 막내딸이 세 번의 재수 끝에 서울권 의예과에 합격한 기념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최희는 다른 세 명의 여자 직원들과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아 있었다. 권은 고기를 뒤집으며 그녀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저분 신입인가요? 옆에 앉은 반장에게 묻자, 일한 지 보름쯤 됐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참. 안쪽에서 일하는 친구니까 권 씨는 처음 보겠네. 왜, 마음에 들어요?”

  반장이 소리 죽여 킬킬 웃더니 그녀를 손짓해 불렀다. 직책에 위아래는 없어도 선배니까 얼굴은 알아둬야지. 그녀가 권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스물다섯이고, 이름은 최희라고 했다. 권도 얼떨결에 고개를 푹 숙여 인사받았다.

  권은 소개가 끝나고 돌아간 뒤에서 최희의 테이블을 곁눈질했다. 최희는 천천히 소리 없이 먹었고, 대화에 직접적으로 끼어들지 않으면서도 분위기에 맞춰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모든 행동이 과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옆에 앉은 그들조차, 그녀가 고기를 한 입도 먹지 않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느라 그런 건가 싶었지만, 그도 아니었다. 간혹 고기를 집기는 했지만, 끝내 그녀의 입으로 들어가는 건 밥이나 밑반찬, 은근슬쩍 고기를 빼놓은 상추쌈뿐이었다.

  식사 후, 권은 회식인 줄 모르고 차를 가져왔다고 둘러대며 2차로 향하는 무리를 빠져나왔다. 큰길로 나오자 먼저 사라졌던 최희가 정류장에 서 있었다. 권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다가가 태워다주겠다고 말했다. 최희는 처음에는 요령 있게 미소를 지으며 거절하더니 권이 그래도, 하고 재차 권하자 머뭇거리다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가 권한 거지만, 막상 차에 누군가 타자 권은 기분이 묘해졌다. 그 공간 안에 누군가와 같이 있는 감각이 익숙하지 않았다. 지난해 전임자와의 연습 주행 이후로 처음이었다. 

  붐비는 식당 골목을 빠져나가 한적한 도로로 접어든 뒤 권은 곁눈질로 최희를 바라봤다. 최희는 처음 오는 곳을 보듯 주의 깊게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권은 시끄러운 에어컨 강도를 내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기 별로 안 좋아해요? 손도 안 대던데.”

  최희가 작게 헛기침했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 네, 그냥 좀…….”

  “아예 안 먹어요? 평소에도?”

  “네.”

  “그럼 채소만 먹는 거예요? 그러면 채식주의자인가?”

  최희는 잠시 턱을 집어넣고 정면을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거창한 거 아니에요. 그냥…….”

  최희는 시선이 마주치자 재빨리 눈을 돌리고 당황한 듯 눈꺼풀을 꾹꾹 눌렀다. 건너는 사람 없는 횡단보도의 흰 노면 표시선이 깜빡이는 신호등 빛에 녹색으로 물들었다.

  “그냥 체질이에요. 알레르기 같은 거.”

  최희의 방어적인 말투에 권은 숨을 죽였다. 그는 차창에 희미하게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봤다. 실수한 걸까. 잘 모르는 사람에게 사적인 질문을 받는 건 곤란한 일이었다. 복잡한 이야기일수록 그랬다. 어디까지가 적당한 선인지 알 수 없으니까. 대답이 짧으면 예의가 없는 것 같고, 그렇다고 길어지면 자신에게는 부끄러운 민낯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임에도 남에게는 소화하기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됐다. 상대의 흥미를 잃은 눈빛. 화제를 돌리려 들썩거리는 입가. 이야기를 멈춘 순간 찾아오는 혐오스러운 정적. 권은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이들이 부러웠다. 상대가 느끼는 불쾌감의 이유를 자신의 결함에서 찾지 않고 산다는 게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권은 그런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노력은 반복과 고통을 동반하는데, 권은 그 짧은 지옥들조차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권은 최희도 그와 같이 느끼는 인간일지 궁금했다. 아니, 그랬으면 싶었다. 그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저는 중학생 때부터 유도를 했는데…….”

  최희가 말을 끊었다.

  “파란 불이에요.”

  권은 떨던 다리를 딱 멈췄다. 그녀 말대로 파란불이었다. 어어, 그러네. 권은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권은 침묵했다. 덜컹거리는 다마스 안에 에어컨 바람처럼 스며든 어색한 공기가 숨이 막혔다. 실수였다. 고작 몇 시간 전에 처음 만났고, 조금 전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내색까지 한 참이었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상대라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도 않은 게 당연했다. 다시 차가 신호에 걸렸을 때, 권은 최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이야기하다 마세요?”

  “예?”

  “유도하셨다면서요. 더 얘기해주세요.”

  그녀는 눈을 피하지도, 입을 들썩이지도 않았다. 흔한 예의상의 미소도 없었다. 멍하게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권을 보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을 것 같아요. 몸이, 뭐라고 해야 하지. 무겁고 단단한데, 날렵해 보여요.”

  권은 멀거니 눈을 깜빡였다. 운동과 무관한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이성에게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작스레 부끄러웠다. 권은 그녀 말대로 실력은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더듬거렸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만둔 거예요?”

  “납득이…… 이해하기가 어려운 게 있어서요.”

  “그게 뭐였는데요?”

  “그냥,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얘기해주세요. 아직 이십 분은 더 가야 되잖아요.”

  권은 운전대를 만지작거리며 지난 일들을 떠올려봤다. 처음 간 도장. 관장의 말. 학과 술자리. 후배. 그가 지도하던 학생들의 연습 경기. 최희는 더듬더듬 이어지는 권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다가, 어느 순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아요.”

  “정말요?”

  “네. 정말이에요.”

  어느새 차는 최희가 말했던 골목에 도착해 있었다. 권은 괜히 사이드브레이크를 만지작거렸다.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겨우 몇 시간 전에 만난 사람이 세상에서 그에 관해 가장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권은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이상 시간을 내 달라는 말을 꺼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둘은 차에서 내려 어색함이 가시지 않은 인사를 나눴다. 권은 씁쓸해진 채 차에 다시 올라탔다. 시동을 걸려다 손을 멈칫했다. 차창 너머로, 최희가 몇 걸음 걸어가다 멈춰 선 채 돌아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잊고 갔나 싶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자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다.

  “저, 실은 알레르기 같은 거 아니에요. 아버지가 돼지를 키워서, 그게 싫어서 어릴 때부터 안 먹었어요. 겨우 그런 거예요. 그냥…… 시시하죠?”

  권은 더듬거리며 그렇지 않다고,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인 것 같다고 말했다. 최희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땐 예민하고, 모든 게 내 중심이니까 그럴 수도 있는데, 근데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근데 어쩔 수가 없어요. 축사는 불이 나서 망했고, 아버지는 죽어서…… 인제 와서 그만두면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뭔지 알 것 같아요?”

  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뒷걸음치듯 눈만 끔벅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비약이 너무 심했다. 권이 입술만 벙긋거리고 있자 최희는 얼굴을 돌리고 몸을 빼냈다. 태워줘서 고마워요. 권은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최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권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어두운 골목을 들여다봤다.


5


  권은 가드레일 뒤에 서서 경사면을 내려다봤다. 마을 어귀의 언덕진 지대에는 여전히 불탄 축사의 골격이 남아 있었다. 흰 철판으로 된 벽면 곳곳이 검게 그을리고 입구 주변 나무 기둥 몇 개가 내려앉아 있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온건한 편이었다. 권은 전날 한참이나 검색해 찾아낸 인터넷 기사의 내용을 떠올렸다. Y읍 돼지 축사서 화재. 소방 당국에 의해 두 시간 만에 진화. 수억 상당 재산 피해. 천이백 마리 폐사. 화재의 원인은 농장주 최 씨의 부주의였으며, 최 씨는 전신에 2,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에 이송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권은 불이 번지기 시작하는 축사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그때 돼지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 때묻은 몸뚱이를 버둥거리며 우리를 벗어나려 노력했을까? 연락받은 소방차가 도착해 깨진 창문으로 물줄기를 퍼부었을 때, 그중 몇 마리나 살아서 그걸 뒤집어썼을까? 죽음이 닥쳐왔다는 걸 알긴 했을까? 태어났을 때부터 갇혀 살던 돼지들에게 축사는 언제까지나 안전한 공간이었을 터였다. 권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다마스로 돌아가 시동을 거는데 전화가 울렸다. 반장이었다. 권 씨, 출근 아홉 시였던가? 권이 그렇다고 말하자,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삼십 분만 일찍 나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할 얘기가 있는데, 일단 사무실로 와서 말해요. 권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공장으로 출발했다.

  “요즘 공장에 쥐가 나왔는데. 알았어요?”

  사무실에 들어가 앉자, 반장이 불쑥 말했다. 권은 꺼림칙한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다. 겨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치고는 말투가 조심스러웠다. 권은 곁눈질로 사무실 한쪽에 서서 장부를 뒤적이고 있는 공장장을 보았다. 왠지 모르지만, 그도 암묵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이 들었다. 권은 먹을 것도 없는데 왜 쥐가 나왔을까요, 하며 목을 긁적였다. 반장도 따라 공장장의 뒷모습을 힐끗 보며 그것도 그런데, 하며 말끝을 흐렸다.

  “지난주에 쥐를 잡으려고 끈끈이를 몇 개 놨거든요. 근데, 그게…….”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까놓고 말할게요. 권 씨, 전에 회식 자리에서 소개해 줬던 최희 씨. 잘 아는 사이 아니지?”

  권은 입술을 물었다. 그리 묻는다면, 그 방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잘 알지도 몰랐다. 하지만 충분한가. 잘 아는 사이라고 할 만한가. 권은 잠시 고민한 뒤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정도까지는….”

  “그치? 그러니까 그냥 있는 대로 말할게요. 그 친구가, 저기, 아래에서 좀 일이 있었나 봐. 좀 전에 말한 그…… 끈끈이 놓은 거에 쥐가 한 마리 잡히긴 했는데, 그게 새끼였나 봐. 쪼그만 거. 그래서 좀 덜 징그러우니까, 왜, 아래 여자들 무리, 느낌 알지? 막 불쌍하다고 호들갑을 좀 떨었나 봐. 그러다가 분위기가, 다들 허허 웃으면서, 어떻게, 산에다 풀어줄까 하는 식으로 갔던 모양인데…….”

  반장이 말을 흐리며, 거북한 듯 큼큼 헛기침을 했다.

  “거기서 그, 최희 그 친구가 불쑥 나와서 다 보는 앞에서 그냥, 막, 응? 막 밟아서 죽여버렸다는 거야. 이딴 쥐, 씨팔 뭐가 불쌍해서 그러냐면서. 어차피 잡아 죽이려고 놓은 덫이면서, 뭐라고 했댔지, 가식 떨지 말라 했다던가……. 응? 믿겨져요? 성격 참, 좀 마음에 안 들어도 사회생활이란 게 있는데…….”

  권은 말문이 막혔다. 반장이 다시 공장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그 사건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얘기가 나온 게 있는데……. 그, 최희 씨가 원래 이쪽에 문제가 좀 있는 사람이라고.”

  반장은 자기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누가 들어서 아는 사람이 있었나 본데, 여하튼 정신과 진료도 받은 적 있고……. 뭐 어디다 불을 질렀다는 얘기도 있고. 아무튼 그래요. 불 지르고 이랬다는 건 과장이라 해도, 아무튼……. 알 만하잖아. 분위기가 영 그래. 그래서……. 이것 좀 봐줄래요?”

  권은 반장이 밀어놓은 종이를 들여다봤다. 여러 사람의 필체로 이름과 서명이 적혀 있었는데, 얼핏 봐도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의 과반수 이상인 것 같았다. 공장장과 반장, 회식 때 최희 옆에 앉았던 세 명의 이름도 있었다.

  “요새는 무슨 법이니 뭐니 해 갖고, 응? 일방적으로 자를 수도 없으니까, 잘 말해서 그만두게 하려는데, 만약 그쪽에서 싫다고 나오면 이런 거라도 있어야 얘기가 편해질 것 같아서. 아무리 그래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나오는데…….”

  권은 말없이 종이를 들여다보다, 눈을 들어 반장을 쳐다봤다.

  “근데 그 얘기들이 진짜인지 잘…… 그러니까, 확실하지 않은 거잖아요.”

  “그게 문제라고.”

  공장장이었다. 그는 어느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권은 그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늙고 음험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입가를 봤다. 입술 밑에 벌건 양념장 같은 게 묻어 있었다. 일이 바빠 점심을 급하게 먹은 것도 아닐 터였다. 말할 때마다 입술이 움직이며 자국이 들썩거렸다.

  “처음 들어올 때도 누누이 말한 건데, 학력 없고, 경력 없고, 뭐 다 좋다 그거야. 그런데 사람은 확실해야 한다고.”

  “그래요. 맞아. 솔직히 머릿수? 그런 건 상관없어. 한두 명 빠져도 금방 구하니까.”

  반장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뭐, 거부를 하면 할 말은 없지마는. 그래도, 기왕 이렇게 된 거, 남은 사람들끼리는 단합해야지. 안 그래요? 괜히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찔리고 그래서 안 써도 의미 없어.”

  권은 반장이 건넨 펜을 든 채 굳었다.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런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누군가를 쫓아낸다는 것도, 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찬동했다는 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권은 오래전 도장을 떠나며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납득하지 못한 사람이 떠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떠나야 한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곳을 떠나야 하는 걸까. 그렇게 떠나고 또 떠나서, 대체 어디까지, 얼마나 먼 곳까지 밀려가야 하는 걸까.

  권은 다마스를 생각했다. 너무도 외롭고 힘들 때마다, 시동과 블랙박스를 꺼놓고 뒷자리에 굴러다니던 남는 수건을 얼굴에 뒤집어쓴 채 조용히 고름을 짜듯 눈물을 짜내곤 하던 순간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시간이 가져다주던 고요한 평화를 떠올렸다. 그건 그가 이 세상에서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고통일지도 몰랐다. 또, 그가 유일하게 견디기로 선택한 고통이기도 했다. 권은 고개를 들었다. 반장도 공장장도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권은 떨리는 손으로 펜을 잡고, 명단에 이름을 적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요.”

  반장이 서명한 종이를 얼른 챙기며 권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게 좋게 가자고. 아무리 일터여도 다 인간관계고, 저기, 다 같이 가는 건데, 응? 안 그래요?”

  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죠. 맞습니다. 권은 그를 향해 억지로 웃어 보이려 했다. 잘 안될 줄 알았는데, 하려 하니 경멸스러울 만큼 활짝 웃을 수 있었다.


6


  전조등이 빗줄기를 뚫고 최희의 뒷모습을 비췄다. 차도 잘 다니지 않는 산길이었고, 최희는 우산도 쓰지 않고 있었다. 대체 어디부터 걸어온 건지, 귓속까지 전부 젖은 듯한 모습이었다. 권은 차를 세울지 고민했다. 아마 반가운 재회가 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읍내로 들어가려면 적어도 두 시간은 걸어야 했다. 날이 더워 큰일이야 나지 않겠지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권은 비상등을 켜고 망설이듯 속력을 낮춰 최희의 옆에서 따라갔다. 차창을 내리자, 눈이 마주쳤다. 최희는 걸음을 늦추며 작게 고개를 숙여 아는 체를 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탈래요?”

  최희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소매로 얼굴을 닦아냈다. 그녀는 잠시 길의 끝을 보고, 다시 권을 바라본 뒤,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사실 좀 막막했거든요.”

  “우산은요?”

  “안 가져왔어요. 하필 버스도 끊기고.”

  권은 조수석에 들어와 앉은 최희에게 남은 수건을 꺼내 건넸다. 빗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도로 위 깊은 웅덩이를 지날 때마다 차체가 기우뚱거렸다. 새로 포장한 도로에 접어들고 나서야 권은 머리를 닦고 있는 최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한 뼘은 길어진 것 같았다.

  “……퇴근하는 길이에요?”

  “네. 원래 이 길로 막차 버스가 가는데……. 거기도 주변에 아무것도 없거든요.”

  “너무 멀지 않아요?”

  최희가 수건을 뒤집어쓴 씁쓸하게 웃었다.

  “가릴 처지가 아니거든요. 쫓겨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죠.”

  쫓겨나지나 않으면. 권은 괜스레 혀 아래에 침을 모았다.

  “미안해요. 그, 명단…….”

  “아니에요. 미안해할 거 없어요. 쥐한테 그럴 때…… 욱하긴 했어도, 그 정도 각오는 했으니까요.”

  “그래도 방화니 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꺼내선…….”

  권은 최희를 슬쩍 바라봤다. 그녀는 젖어서 뭉친 앞 머리카락을 툭툭 털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침묵이 오갔다. 그 무언에 권은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최희가, 자신이 그런 불길함을 느끼리란 것을 알면서도 선뜻 변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권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사실이에요?”

  최희는 눈앞 차창에서 박살 난 빗자국들이 끝없는 사선을 그리는 걸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방울마다 반사된 가로등 불빛에 그녀의 얼굴이 우그러져 보였다. 권은 조심스럽게 눈을 돌렸다.

  “왜 그랬는데요?”

  “덜 자랐을 때였으니까요.”

  그리고 그녀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몸도, 생각도.

  “한창 채식에 몰두할 때였어요. 처음으로 관련해서 사고 싶은 책이 있어서 서점에 간 날이었어요. 계산대에서 돈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뭔가, 웃긴 짓을 하고 있다는…… 그렇잖아요. 이런 책을 사려고 내미는 지폐도 아버지가 돼지를 키워서 번 돈. 내가 입고 있는 옷도 돼지를 키워서 번 돈으로 산 거. 내가 다니는 학교도, 먹는 채소들도, 쓰는 물도 전기도, 덮고 자는 이불도. 다 돼지를 키우고 팔고 도축해 고기로 만들지 않았으면 없었을 것들이었던 거예요. 내 입에 직접 넣지만 않았을 뿐이지, 제 몸을 이루는 세포 하나, 제가 하는 생각 하나까지도 전부 결국엔 돼지의 고기랑 피랑 뼈로 이루어진 거나 다름없더라고요.”

  소리 없이 최희의 가슴이 크게 들렸다가 내려갔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어요. 근데, 전 그걸 잠자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무언가 이 고리를 완전히 끊어낼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축사에 불을 지르는 거였어요?”

  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권은 그 무언도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부정의 뜻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한참 만에 최희가 입을 열었다.

  “원래는 그냥 내보내기만 할 생각이었어요. 밤에 몰래 축사에 숨어 들어가서, 연결된 우리를 다 열었어요. 그런데, 한 마리도 나오질 않더라고요. 그냥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고. 한심하고 화가 났어요. 태어나서 그만큼 화가 났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멍청하게 불을 질렀어요. 갇힌 건 몰라도 뜨거운 건 알 테니까. 도망가겠거니 싶어서.”

  최희가 힘없이 웃으며 창에 머리를 기댔다.

  “근데 다 실패였어요. 불이 너무 크게 번졌거든요. 정신을 차리니 제가 나갈 길도 없었어요. 죽겠구나 싶었어요. 진짜로. 그대로였으면 돼지들이랑 같이 타 죽었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나온 거예요?”

  “아버지가…….”

  최희는 자신의 말이 입을 빠져나가는 속도에 놀란 것처럼 잠시 말을 끊었다가, 낮고 느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원래 화재 센서가 울리자마자 소방서에 전화해야 했었는데, 제가 집안에 없으니까 그 길로 바로 달려온 거예요. 눈치를 챈 거죠. 제가 해오던 짓이 있다 보니. 너무 일찍 누가 왔다가는, 불을 지른 게 저라는 게 걸릴까 봐도 그랬고요.”

  말의 내용과 달리, 권의 눈에 최희는 조금도 감상에 젖어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 무덤덤하기만 했다. 가끔 몸의 깊은 곳에서 통증이 오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곧은 눈썹을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그래서 그 길로 돼지는 다 죽었고, 아버지도 전신 화상에 병원에서 몇 주 동안 앓다가, 패혈증으로 죽었어요.”

  권은 침묵했다. 최희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코웃음을 내뱉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겨요. 돼지를 내보내면, 그다음에는? 어차피 사람 풀어서 금방 다시 잡아넣을 게 뻔하잖아요. 괜히 고생하는 사람만 생기고. 아무 의미도 없거든요, 사실. 근데 그땐 그런 뒷일까진 생각도 안 한 거예요. 처음부터 상관도 없었던 거죠. 그냥 내보낸다는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었으니까. 그 행위를 하면 적어도 마음은 편해질 것 같았으니까요.”

  최희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벌을 받은 게 아닐까 싶어요. 그 오만 때문에. 어차피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같이 짊어지고 있는 짐을 내던지고 혼자 편해지려고 해서요. 고작 입에 고기 몇 조각 안 넣은 걸로 자기 죄를 털어냈다고 믿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자기가 죄를 응징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믿고…….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묵묵히 받아들이고 버텨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권은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왜 아직도 고기를 먹지 않는 거예요?”

  최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머리로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는데…….”

  “그런데요?”

  “모르겠어요. 저도 납득을 못 했나 봐요. 그렇게 오랫동안 답을 찾아 헤맸는데, 그렇게 찾은 답이 애초에 답이 없다는 거였다니.”

  긴 시간 정적이 오갔다. 권은 전방에만 시선을 둔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에 사이드미러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고, 뒤창에 뿌옇게 김이 서려 룸미러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연신 차를 두드리는 축축한 여름비가 권의 정신까지 녹여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문득, 권은 브레이크를 밟았다. 다마스는 처음에는 급격히,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브레이크를 푼 권의 발에 맞춰 천천히 멈춰 섰다. 짧은 와이퍼가 연신 닦아내고 있었지만, 차창을 통해 보이는 광경을 또렷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산비탈이 무너지며 쓸려온 대량의 흙더미가 도로 위에 쌓여있고, 도로의 한편은 우그러진 가드레일과 함께 깊숙이 유실되어 있었다. 지붕을 두드리는 여전한 빗소리와 와이퍼가 끼릭거리는 소리, 다마스의 엔진 소리만이 뒤섞여 둘 사이를 오갔다.

  “돌아갈 거예요?”

  최희가 조용히 물었다. 권은 시계를 확인했다. 열두 시 이십 분. 돌아가자면 한 시간 가까이 왔던 길을 되짚고 돌아가, 다른 국도로 빠져 거기서 또 한참이나 빙 돌아가야 했다. 그것도 평소의 날씨에나 가능한 시간이고, 이런 궂은 날이면 두 시간은 걸릴 터였다. 권은 이마를 짚었다. 집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급격히 피로해졌다.

  밖에서 운전석 창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권은 화들짝 놀랐다. 흐려진 창문을 내리자, 어느 틈에 차에서 내렸는지 최희가 빗속에 서 있었다. 어느 정도 말랐던 머리카락이 다시 새카맣게 젖어가고 있었다.

  “왜, 왜 나갔어요? 어쩌려고요?”

  “어쩌긴요. 걸어서 가면 되죠. 같이 가요.”

  “비 오는데요? 게다가…… 차는 어쩌고요.”

  “비 좀 맞으면 어때서요. 한여름인데. 게다가 차는 어차피 도로 수습될 때까지 한 대도 못 지나갈 텐데, 저쪽 갓길에 하룻밤 대놔도 되잖아요.”

  최희가 다가와 열린 창문에 손을 얹었다. 젖은 손을 타고 들어온 빗방울이 그의 바지 위에 떨어졌다. 권은 짙은 색으로 번져가는 자국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권은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저는 그냥 여기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침묵이 지나갔다. 최희가 창을 짚고 있던 창백한 손을 내밀어 운전대 위에 있던 그의 손을 잡았다. 축축하고 차가웠다.

  “알겠어요. 잘 지내요.”

  최희의 손이 빗속으로 사라졌다. 권은 빗물이 흐르는 차창 너머로 최희가 유실된 도로를 건너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최희는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하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최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권은 비로소 힘을 빼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다마스의 천장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권은 손에 잡힌 수건을 집고, 조용히 얼굴에 덮었다. 최희가 머리를 닦았던 수건인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화끈거리던 얼굴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끼며, 권은 다시 한번 불길 사이에서 소방차의 물을 뒤집어썼을 많은 돼지들의 몸을 생각해 봤다. 최희와 악수한 그 손으로 공장장의 사무실에서 펜을 쥐었던 감촉을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손이 최희를 밀쳐내고, 멀리 쫓아내 버리기 위해 죄책감 없이 움직일지 생각했다. 권은 불길 속에서 최희를 구한 그녀의 아버지의 손을 생각했다. 권은 젖은 수건 밑에서 계속 생각했다. 수많은 생각이 쉬지 않고 그의 머릿속을 네 발로 걸어 다니도록, 설사 그렇게 걸어도 아무런 답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계속 뒤로 축축한 기억을 남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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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우리
  • 2026-07-01

문장웹진 소설

굳은 모양을 보면

굳은 모양을 보면 정미래 여상길 씨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새가 그냥 새인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참새라거나, 아니면 그냥 어떤 새. 그런데 여상길 씨가 대뜸 직박구리네요, 했다. “네? 직박구리요?” “작년 봄인가. 웬 새 한 마리가 요 안으로 휙 들어오더니 안 나가고 버티더라고요.” 여상길 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마우스를 딸깍거리기 시작했다. 무심코 그의 모니터를 보았는데, 바탕화면에 무언가 빠르게 불어나고 있었다. 그가 기계적으로 새 폴더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가마우지, 오목눈이, 동고비… 내 시선은 아랑곳없이 그는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한 번 더 누르고 ‘새 폴더(N)’를 클릭했다. 공교롭게도 직박구리라는 이름의 폴더가 툭 튀어나왔다. 나는 두 가지 생각에 잠겼다. 이 황량한 오피스 빌딩 안에서 그 텃새가 대체 뭘 먹고 1년 넘게 연명했나. 그리고 여상길 씨는 어떻게 그게 직박구리라는 걸 알았나. 조류학자도 아니면서. 설마 매일 저렇게 새 폴더를 만드는 것도 다 조류의 학명을 외우기 위한 학습 활동의 일환이었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 날, 그 새가 어느 층 타일 위에 배를 깔고 퍼져 있는 걸 목격했다. 영락없이 죽은 것 같았지.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명복을 빈다, 직박구리. 속으로 삼가 조의를 표하려던 찰나 녀석이 꽁지깃을 살그머니 털었다. ✹ 몇 해 전, 내가 맡고 있던 슈팅 게임의 한 맵에서 뜻밖의 해프닝이 벌어진 적이 있다. 공들여 설계된 전장, 그 살풍경을 평화로이 가로지르던 비둘기. 그 사이에서 누군가 찾아낸 것이다. 지면에 내려앉은 비둘기를 밟으면 새가 공중으로 날아오른다는 사실을. 제 몸집의 몇 배나 되는 유저의 캐릭터를 등에 태우고— 버그였다. 하지만 유저들은 그걸 전략으로 삼았다. 새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 시야를 확보했다. 멀리 있는 적들을 탕! 탕! 신나게 쏴 죽였다. 버그가 패치된 날, 개발팀에선 그 폐허에 ‘새를 밟지 마시오!’라는 벽보를 곳곳에 붙였다. 누구에겐 빤하게 잘못된 오류가 또 누구에게 가서는 더없이 괜찮은 전술이 되었던 순간. 나는 그때 세상일이란 게 참 모호하고, 또 그래서 이상하게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경한 감각에 휩싸였더랬다. 나는 새삼스럽게 ‘오픈캠프’를 휘— 둘러보았다. 아무 일 없이 주 40시간을 버티는 것. 그것이 이곳, 오픈캠프의 최종 퀘스트였다. 열린 야영지라니. 듣기에는 그럴듯했다.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 같기도 한 게. 하지만 사실은 권고사직이 난무하는, 구조조정과 생존 사이의 막간 스테이지일 따름이었고… 오픈캠프로 발령이 난 넉 달 전에. 인사팀의 안내에 따라 변경된 자리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가장 먼저 보인 건 누군가의 휑한 정수리였다. 포니테일로 묶인 머리카락이 그의 고갯짓에 따라 애처롭게 달랑거렸다. 보아하니 사내 네임드 여상길 씨였다. 이미 한

  • 정미래
  • 2026-07-01

문장웹진 소설

Midnight Coffee Club

Midnight Coffee Club 나일선 광학적 미디어의 역사는 사라짐의 역사이고 그것이 이제 내게도 사라질 자유를 주고 있다. -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 찾는 사람에겐 보여, 목소리, 믿고 있기 때문에 들려, 쓰는 일보다 더 하고 싶었던 건 얘기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 일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선 써야 했고 자신이 만들어낸 목소리와 대화하는 것, 그런 걸 소설이라 불렀지. 목소리가 선명해질수록 현실과는 점점 멀어져 어느 순간 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 사람과 만날수록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아,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건 그 갈망이 오랫동안 나를 지켜주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너무 열심히 찾았기에 서로를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건지도,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도 길었기에 함께 지내는 법을 몰랐던 것 같아. 미친 사람처럼 자기 안의 모든 것을 다 말해야만 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자신의 전부가 되어주길 바라거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 것 같아. 그게 우리가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었으니까.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과 같이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우리가 만나기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라고 말하는 순간 다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더 이상 살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도 만날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아, 이제 네가 내 앞에 있었고 우린 함께 있으니까, 모두가 포기한 질문들 앞에서 목소리는 내게 말했지. 더는 아무것도 찾지 않아서 들려, 더는 믿지 않기에 보여, 모든 감정이 다 지나가고 난 자리에 언제나 내가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잃어버릴수록 무언가를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고, 어디서든 혼자일 수 있었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연결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 같아, 듣는 방법을 몰랐기에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가 내게 말해주었지. 오랫동안 서로를 생각한다는 건 연결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어가는 또 다른 방식이다. RB의 소설에서 이런 부분은 꼭 나를 위한 것 같다. 읽고 있으면 항상 그와 커피를 마시거나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꼭 RB가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라도. 그에겐 소설이 있었고 나에겐 무엇이 있나? 나중에 보니 노이도 나와 같은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고 세 번째인가, 네 번째쯤 봤을 때 노이는 패밀리 레스토랑 윙키스에서 RB의 소설을 읽고 있는 나를, 극장에서 청소를 하는 나를, 주크박스를 차에 싣는 나를, 묘지 근처를 산책하는 나를, Noodle Express에서 팟타이를 포장하는 나를 봤다고 했다. 그중 어디까지가 나였을까, 나도 모르는 내가 노이의 기억 속에는 있었고 그런 게 좋았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내가 어쩌면 더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전에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는 노이를 본 적이 있고 그때는 이름도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언젠가 노이와 대화를 하게 될 날이 올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었지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노이는 RB의 소설이 좋

  • 나일선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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