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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야

  • 작성일 2026-08-01

  내 마음이야


이갑수


  퇴근하고 싶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신나는 음악을 듣는다. 눈을 감고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린다. 졸업, 제대, 여행, 생일파티, 800만 원 복권 당첨, 첫 키스…… 아니 첫 키스는 빼자. 그리고 명상을 한다. 생각을 비우고 차분하게. 절대 조금이라도 우울해선 안 된다. 어제도 제시간에 퇴근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 회사가 정부의 근로자 지원프로그램 시범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지난달부터 퇴근하기 전에 우울증 지수를 체크 한다. 보건복지부가 대학 연구소와 산학협력으로 개발했다는 ‘뉴진’이라는 우울증 측정기는 헬스장의 인바디 측정기처럼 생겼다. 악력기처럼 생긴 손잡이를 잡고 발판 위에 올라서면 우울증 지수가 100분위로 표시되는데, 우울증 지수가 50이 넘는 사람은 상담을 받으러 가야 한다. 어떤 원리로 우울증을 측정하는 건지는 모른다. 아무리 사람의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몸을 측정해서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몸을 통하지 않고는 마음을 알 방법이 없으니 둘 사이의 어떤 메커니즘을 알면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시범 사업이 끝나고 일반에 공개가 되면 측정 원리도 밝혀질 테니 기다리면 곧 알게 될 일이다. 

  - 80.00 

  오늘도 실패다. 점점 더 올라가고 있었다. 첫날에는 51이었고, 그날 상담은 5분 만에 끝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신기한 체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 요즘 기분은 어때요? 

  강 박사의 첫 질문은 항상 똑같다. 

  -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그냥 괜찮습니다. 

  처음 그 질문은 받았을 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 무감각한 것도 우울증세일 수 있어요. 일단 지켜봅시다. 

  강 박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지난 한 달간 나를 지켜본 결과는 부정적일 게 분명하다. 내가 상담을 받으며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수치가 올라가고 있으니까.


  정시에 퇴근하는 직원들을 부러워하며 상담실로 올라갔다. 내 앞에 대기자는 일곱 명, 네 명은 자주 보는 얼굴이고, 세 명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우울증 지수가 높아서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다들 정말 우울해 보였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표정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상담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로 강 박사의 얼굴이 보였다. 이 지원프로그램은 경력형 일자리 사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은퇴한 의사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효과도 있으니까. 정부 입장에서는 두 가지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좋은 정책이었다. 강 박사도 대학병원에서 정년 퇴임한 정신과 전문의다. 강 박사는 슬램덩크에 나오는 안 감독님을 닮았다. KFC의 샌더스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흰 양복 대신 흰 가운을 입고 있다는 것 빼면 정말 똑같았다. 강 박사를 보면 치킨이 먹고 싶었다. 

  - 요즘 기분은 어때요? 

  자리에 앉자마자 강 박사가 모니터의 차트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전에 없이 표정이 심각했다. 우울증 지수 80.00은 어느 정도 위험한 걸까. 

  - 아주 좋아요. 아무래도 기계가 잘못된 것 같아요. 요즘 기분이 아주 좋고 행복하거든요. 

나는 최대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튜브에서 ‘기분 좋아 보이게 웃는 법’을 검색하고 화장실에서 몇 번 연습해 봤다. 

  - ‘뉴진’의 임상시험에는 저도 참여했습니다.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지만, 큰 오류는 보고된 적이 없어요. 

  강 박사가 말했다. 

  - 저는 진짜 우울하지 않아요. 정말입니다. 

  내가 말했다. 

  - 억지로 즐거운 척하는 것도 우울증세일 수 있어요. 무엇보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지난 한 달간, 지각을 3회 했고, 업무 처리 속도와 성과도 많이 떨어졌어요. 지난달, 작년 같은 달과 비교해도 명확하게 보이는 변화예요. 

  강 박사가 모니터를 돌려 보여주면서 말했다. 모니터에는 지난 한 달간의 내 회사생활을 데이터로 환원해놓은 기록들이 있었다. 나는 회사에는 그런 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도, 그 기록이 강 박사에게 제공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억울하다고 항변하려다가 그만뒀다. 말해봐야 상황만 더 악화시킬 것 같았다. 저런 종류의 사람들을 나름 잘 알았다. 회사에도 많으니까.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임원들과 같은 유형이다. 그들은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지원프로그램 시범 사업은 3개월이라고 했으니 두 달만 더 버티면 끝날 일이었다. 

  강 박사가 맞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우울하다. 요즘 유독 더 회사에 오는 게 싫고, 일에 집중 못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건 전부 다 제시간에 퇴근을 못 해서 그런 거였다. 우울증 지수 같은 걸 체크 하지 않고, 상담을 안 받고 바로 집에 가던 시절에 나는 아무 문제 없이 잘 살고 있었다. 우울 지수가 높아서 퇴근을 못 하고, 퇴근을 못 해서 더 우울하고, 악순환이었다. 

  - 혹시 취미가 있나요? 퇴근 후에는 주로 뭘 해요? 

  강 박사가 물었다. 

  - 농구를 봅니다. KBL. 

  내가 대답했다.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보며 치킨에 맥주 한 캔을 마시는 것은 나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요즘은 상담 때문에 4쿼터가 시작할 즈음이나 경기가 종료된 후에야 집에 도착한다. 다시 보기가 있지만, 이미 끝난 경기를 보는 것은 맥이 빠지는 일이었다. 

  - 보통은 야구나, 축구를 많이 보는데, 비인기 종목을 좋아하는군요. 평소에 다른 사람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이 있나요? 

  강 박사가 말했다. 안 감독님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까 괜히 더 서운했다. 슬램덩크의 명대사들이 스쳐 지나갔다. ‘농구가 하고 싶어요.’, ‘감독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나요? 난 지금입니다.’

  - 아뇨. 어릴 때부터 농구를 좋아했습니다. 여전히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내가 말했다. 농구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중계도 지상파 방송국이 아니라 티빙에서만 해줄 정도니까. 그렇다고 모두가 인기 있는 스포츠만 봐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식의 논리라면 동계 올림픽 같은 것은 없어져야 한다. 

  - 일단 약을 처방해 줄게요. 자기 전에 먹어봐요. 회사에 공식적으로 업무 조정을 요청할 거예요. 일이 줄어들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업무를 하게 될 수도 있어요. 

  강 박사가 말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프린터에서 처방전이 인쇄되고 있었다. 

  - 선생님 약은 먹을게요. 일은 그냥 그대로 하게 해주세요. 갑자기 업무가 바뀌면 그게 더 힘듭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는 다급히 처방전을 건네주려는 강 박사의 손을 붙잡았다. 

  - 이게 제 진단과 처방이에요. 권한과 의무이기도 하구요. 가볍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나라는 한해 자살하는 사람 숫자가 만 오천 명 정도 됩니다. 하루에 40명씩 죽고 있어요. 우울증은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예요. 국가와 회사, 저 모두 유 과장님을 도와주려는 거예요. 

  강 박사가 말했다. 도움이 필요 없는데,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도와줄 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걸까. 강 박사가 말한 숫자들도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건 인간이 아니라 인구를 통치하는 사람들의 관점이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주말 내내 잠만 잤다. 대충 치워놓은 배달 용기들 위로 날파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창문을 연 적이 없는데 어디로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않으면 우울증이 오는 것처럼 음식을 먹고 치우지 않으면 벌레가 꼬인다. 벌레는 틈이 없어도 들어온다. 

  다이소에서 산 전기 파리채로 날파리를 잡았다. 몇 마리가 전기에 타 죽으면서 쥐포 굽는 냄새가 났다. 배가 고팠다. 

  빵과 커피로 대충 아침을 먹고 출근 준비를 했다. 아직 출발도 안 했는데, 벌써 퇴근하고 싶었다. 

강 박사의 권한은 내 생각보다 강력했다. 내가 기존에 하던 업무는 절반가량 줄었다. 그나마도 중요하지 않은 것들만 남았다. 당분간 회의에 참여하지 말라는 통보도 받았다. 마냥 놀게 할 수는 없으니 인턴 교육 관리라는 새 일을 주기는 했지만, 경영기획팀인 내게 인사팀 업무를 맡긴 것은 적당히 보조나 하라는 의미였다. 


  약이 효과가 있는지 더 이상 우울증 지수는 올라가지 않았다. 

  - 80.00 

  하지만 내려가지도 않았다. 나는 매일 상담을 받으러 갔다. 

  - 요즘 기분은 어때요?

  저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 

  - 그냥 똑같습니다. 

  강 박사도 일단은 더 나빠지지 않는 것에 만족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기분이 나빴지만, 생각해보면 일이 줄어든 것은 잘된 일이었다. 적게 일하고 월급은 똑같이 받는데 나쁠 것은 없었다. 강 박사가 들으면 또 우울증세라고 할 수도 있지만, 직장인은 모두 월급 루팡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새로 하게 된 인턴 관련 업무가 조금 난감하고 귀찮은 일이기는 했다. 내가 담당하게 된 인턴은 총 다섯 명, 남자 넷, 여자 한 명. 전부 스물아홉 살 동갑이었다. 신입사원도 아니고 인턴인데도 생각보다 다들 나이가 많았다. 내가 구직활동을 할 때보다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는 의미였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인턴 기간이 끝나고 정직원이 될 기회를 얻는다고 했다. 정직원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정직원이 될 기회를 준다는 것은 또 뭔가 싶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서 잘해줘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다가 인턴들은 우울증 지수 체크를 하지 않고 바로 퇴근한다는 말을 듣고 그냥 객관적으로 내가 맡은 일만 하기로 했다. 찌질한 것 같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는 제일 부러운 게 인턴들이었다. 

남자 넷에 여자 한 명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자 인턴이 눈에 띄었다. 이지윤. 이름만큼이나 평범한 인상이었다. 남자들이 모두 군필자인 것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나이가 있는 편이었고, 실제로 인턴 경력도 제일 길었다. 우리 회사가 벌써 네 번째였다. 인사관리는 처음이지만 경험상 이런 경우 둘 중에 하나였다. 

  지독히 운이 없거나, 뭔가 문제가 있거나. 

  원래도 남자 직원이 많은 회사라 다른 상사들도 이지윤 인턴한테 더 관심을 두는 것 같았다. 며칠 지켜보니 원래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립밤만 바르고 출근을 했는데, 여자 상사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건넸다.

  - 지윤 씨, 어디 아파? 안색이 안 좋아 보여. 

  그런 식의 말을 몇 번 듣자, 그녀는 다음날부터 완벽한 메이크업에 오렌지 레드 계열의 립스틱을 바르고 출근했다. 확실히 전보다 생기있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걱정해주는 척 간섭하는 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나라에서 국민 개개인의 우울증까지 관리하는 마당에 회사가 직원들의 안색에 신경 쓰는 게 특이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지윤 인턴이 체한 것 같다며 잠시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팀장이 침통을 꺼냈다. 

  - 따면 바로 나을 거야. 이리 와 봐. 

  팀장은 한의대를 지망했지만, 수능 수리 영역 31번 문제를 틀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공대에 간 원한으로 불법 시술을 일삼는 무면허 침술사가 되었다. 뭘 알고 찌르는 건지는 몰라도 아주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나도 손목을 삐었을 때, 팀장에게 침을 맞은 적이 있는데 하루 만에 부기가 빠지고 통증이 가라앉았다. 

  팀장은 서류철 끈으로 이지윤 인턴의 엄지를 친친 감은 후에 침으로 찔렀다. 핏방울이 크게 맺혔다가 터졌다. 

  - 피 검은 거 봐. 어때 시원하지?

  팀장이 우쭐한 표정으로 물었다. 

  - 네.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에는 전혀 괜찮은 것 같지 않았지만, 이지윤 인턴은 그렇게 대답했다. 다른 손가락까지 구멍이 날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 이지윤 인턴.

  나는 소화제를 들고 탕비실로 들어가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이지윤 인턴은 원망 어린 눈빛으로 돌아봤다. 아픈데 병원도 마음대로 못 가게 하는 회사라는 게 나도 미안했다. 하지만 직급이 높을 뿐 나도 크게 다를 것 없는 처지였다. 

  - 언제부터야?

  내가 물었다. 

  - 뭐가요?

  이지윤 인턴이 되물었다. 

  - 피 대신 커피가 흐르게 된 거. 

  내가 말했다. 한 방울뿐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이지윤 인턴의 손가락에서 나온 것은 피가 아니라 커피였다. 

  - 대학교 졸업 학기부터 그랬어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이지윤 인턴이 말했다. 

  - 우리 삼촌이 그랬거든. 

  내가 말했다. 삼촌은 마지막 고시 낭인이었다. 사법고시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고시원에서 육법전서를 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 삼촌은 어떻게 되셨어요?

  이지윤 인턴이 물었다. 자신의 미래를 묻는 것 같은 간절한 목소리였다. 

  - 카페를 차렸어. 

  내가 말했다. 

  - 장사는 잘 되나요?

  - 망해서 여수로 내려갔어. 

  이지윤 인턴은 실망한 표정이었다. 몸 안에 커피가 흐르는 것과 커피 장사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떡볶이를 많이 먹는다고 떡볶이집을 차려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니까. 삼촌은 사교성, 친화력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장사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즉결심판을 하듯 주문을 받는 카페가 잘 될 리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커피가 맛이 없었다. 

  - 비밀로 해주세요. 이상한 애로 보이기 싫어요. 

  이지윤 인턴이 말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부탁하지 않아도 굳이 말하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 내가 조퇴 처리해 놓을 테니까. 병원 가 봐. 갔다가 바로 퇴근해. 오늘까지 해야 하는 업무 있으면 알려주고. 내가 대신해 놓을 테니까. 

  내가 말했다. 

  - 진짜요? 

  이지윤 인턴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 응 진짜. 이 정도 권한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봐. 

  이지윤 인턴은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 병원에 갔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는 당연한 일을 하는데 누군가에게 감사해야 하는 회사라는 곳이 새삼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우울증 지수는 그대로였고 나는 강 박사를 만나러 갔다. 대기실에 줄이 길었다. 내 앞에 열다섯 명이나 있었다. 이 시범 사업의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우울한 사람이 계속 늘어나면 잘 관리되고 있는 걸까. 

  - 요즘 기분은 어때요? 

  강 박사가 물었다. 

  - 우울합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다음날, 이지윤 인턴이 고맙다며 커피를 건넸다. 텀블러에 담아서 주는 걸 보면 사 온 게 아니라 직접 만들어온 모양이었다. 콜드브루인 것 같았는데, 뚜껑을 열자마자 커피 향이 진하게 올라왔다. 원액인가 싶을 정도로 색도 진했다. 시음 삼아 한 모금 마셔봤는데, 충격적일 정도로 맛이 있었다. 정말로 그랬다. 지금까지 마셨던 모든 커피를 부정하는 그런 맛이었다. 

  이 년 전인가 일본 출장을 갔을 때, 환전해간 돈이 남아서 한 잔에 5만 원 하는 글리치커피를 사 먹은 적이 있는데, 그때 느꼈던 최고급 원두의 풍미나 뒷맛, 은은한 산미보다 더 깊은 맛이었다. 맛이 너무 특별해서 혹시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설마 싶었다. 묘한 중독성도 있어서 삼십 분마다 텀블러를 열고 한 모금씩 마셨다. 커피가 줄어드는 게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47.77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뉴진’ 위에 올라갔는데, 그런 수치가 나왔다. 다시 해봐도 똑같았다. 한 달 만에 정시 퇴근이었다. 퇴근길에 치킨을 포장하고 캔맥주를 샀다. 집에 오자마자 농구 중계를 켰다. 내 고향 원주의 유일한 프로 스포츠 구단 DB프로미, 나의 최애 선수 등 번호 17번 이선 알바노. DB는 승리했고, 이선 알바노는 트리플 더블의 맹활약을 했다. 거기에 치킨과 맥주, 모든 게 완벽했다. 스트레스가 풀리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중간에 깨지도 않고 꿈도 없이 푹 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머리도 맑고 몸 상태도 너무 좋았다. 김치볶음밥에 계란 프라이였지만 오랜만에 아침도 만들어 먹었다. 출근하면서 집에서 지하철까지 가는 길에 화단이 새로 생겼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날씨도 좋았고,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도 밝아 보였다. 


  나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설레는 마음으로 ‘뉴진’ 위에 올라갔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기대하며 수치를 봤는데, 엉뚱한 숫자가 나왔다. 

  - 70.00 

  기계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깨끗이 세탁한 셔츠를 정성스럽게 다려입고 나왔는데, 커피를 쏟아 커다란 얼룩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라진 건 커피뿐이었다. 나는 이지윤 인턴을 ‘뉴진’ 앞으로 불렀다. 

  - 혹시 이거 해본 적 있어? 

  내가 물었다. 

  - 아뇨. 인턴은 안 해도 된다고 하던데요. 

  이지윤 인턴이 대답했다. 

  - 한 번만 해볼 수 있을까? 

  - 왜요?

  -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부탁 좀 할게. 

  이지윤 인턴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어려울 것 없다는 듯 손잡이를 잡고 발판 위에 올라갔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상사의 부탁은 명령과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 00.00

  말도 안 되는 숫자였다. 사람이 전혀 우울하지 않은 게 가능한 걸까.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 저 같은 사람은 우울할 틈도 없나 봐요. 

  이지윤 인턴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 혹시 어제 준 커피… 

  나는 진짜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설마가 맞았다. 내가 어제 마신 커피는 이지윤 인턴의 피에 물을 섞어서 만든 콜드브루였다. 

  - 그 콜드브루가 진짜 맛있거든요. 

  이지윤 인턴이 그렇게 말했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맛이 있건 없건 나는 그 커피가 필요했다. 피로 만든 커피니까. 블러드 콜드브루라고 불러야 할까. 우연일 수도 있지만, 블러드 콜드브루를 마시고 우울증 지수가 내려갔으니, 다시 한번 시도해볼 이유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 혹시 한 잔만 더 부탁할 수 있을까? 내가 꼭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내가 말했다. 

  - 내일 갖다 드릴게요. 

  이지윤 인턴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 아니, 지금 아니 오늘 퇴근 전에 꼭 필요해. 

  - 지금 없어요. 회사에 피를 뽑아서 들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 내가 약국에서 주사기 사 올게. 제발 부탁 좀 할게. 내가 꼭 보답할게. 

  이지윤 인턴이 낮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도 퇴근이 걸려 있으니까. 


  이지윤 인턴은 내가 사 온 주사기로 탕비실에서 즉석으로 블러드 콜드브루를 제조해줬다. 방금 뽑은 피로 만들어서 그런지 맛과 향이 더 진했다. 나는 천천히 두 모금을 마시고 바로 ‘뉴진’ 위에 올라갔다. 결과는 내 생각대로였다. 수치가 10이나 내려갔다. 마시고 재고, 마시고 재고를 반복했다. 마실 때마다 계속 수치가 내려갔다. 

  이지윤 인턴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고 매일 커피를 한 잔씩 만들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아니 한 잔에 오만 원씩 사겠다고 했다. 

  - 인턴 평가에 최고점 주신다고 약속해 주시면 팔게요. 

  이지윤 인턴이 역으로 그런 조건을 제시했고,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수락했다. 누가 정규직이 될 기회를 얻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객관적으로 다섯 명 중에 누가 더 뛰어나거나 부족한 것도 없었다. 

  나는 무사히 정시에 퇴근을 하고 농구를 봤다. DB프로미가 졌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시합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거니까. 

  - 괜찮아. 다음 경기가 있잖아. 

  나는 박수를 쳤다. 전에는 없었던 혼잣말 하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


  커피값으로 한 달에 125만 원을 썼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숨이 막히는데 돈을 내고 숨을 쉴 수 있다면 누구나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다. 주기적으로 시계나 게임기 같은 것을 사는 다른 직원들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한 모금에 30분, 한 잔에 하루, 내가 커피를 50잔 먹는 사이에 인턴 기간도 근로자 지원프로그램 시범 사업도 끝나가고 있었다.

  - 어깨 아파? 침 좀 놔줄까? 

  기획안을 쓰다가 기지개를 켜는데 팀장이 다가와 그렇게 물었다. 요즘 아픈 사람이 없어서 침술사로서의 본능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 다음에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나는 어깨를 풀면서 말했다. 

  - 그보다 잠깐 얘기 좀 할까. 

  팀장이 말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윗분들 심기나 회사 분위기 같은 것을 슬쩍 전해줄 때 팀장이 종종 쓰는 방식이었다. 

  팀장은 옥상 정원의 흡연실로 나를 데려갔다. 

  - 담배 끊지 않으셨어요? 

  내가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팀장은 담배를 끊은 지 7년이 넘었다. 

  - 그놈의 우울증 기계 때문에 이거라도 없으면 제때 퇴근을 못 해. 

  팀장이 말했다. 다들 저마다의 블러드 콜드브루로 이 시기를 견디고 있구나 싶었다. 

  - 그보다 이지윤 인턴이랑 친한 것 같던데. 

  팀장은 담배를 반쯤 태우더니 재떨이에 비벼 끄고 딴청 하듯 말을 꺼냈다. 

  - 네 뭐 인턴 관리하다 보니 조금. 그냥 커피 메이트죠. 

  내가 말했다. 

  - 나도 그 친구 괜찮은 것 같은데, 다들 평가도 좋구.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어서 말이야. 커피 마시면서 남자 친구가 있는지, 있으면 일찍 결혼할 생각인지 넌지시 좀 물어봐. 회사 입장에서는 뽑아 놨는데, 결혼한다고 바로 그만두면 좀 그렇기도 하고. 육아휴직 같은 문제도 있고. 

  팀장이 말했다. 

  - 사생활을 인턴 평가에 반영하면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내가 물었다. 

  - 공식적으로 물어볼 수가 없으니까. 넌지시 알아봐 달라고 따로 불러서 부탁하는 거겠죠? 유 과장님? 왜 이래? 많이 친해? 

  팀장이 그렇게 말하면서 내 어깨를 쳤다. 손바닥에 침이라도 숨겨놓은 건지 어깨가 따끔했다. 

  - 네,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물어본 적은 없지만, 이지윤 인턴한테 애인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퇴근 후에는 컴퓨터 관련 자격증과 외국어 학원을 다닌다고 했으니까. 연애할 시간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인이 있다고 해도 취업이 늦은 만큼 결혼도 늦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아주 진하게. 


  팀장과의 비공식 회동을 하고 돌아오자 강 박사가 나를 호출했다. 퇴근 시간도 아니고 근무 중에 상담실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늘 사람으로 가득 차 있던 대기실이 텅 비어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강 박사를 보는 것도 거의 두 달만이었다. 강 박사는 여전히 안 감독님을 닮은 인자한 모습이었다. 요즘 자주 먹은 탓인지 치킨이 당기지는 않았다. 

  - 어서 와요. 앉아요. 긴장할 것 없어요. 오늘은 상담이 아니라 개인적인 면담이니까. 

  강 박사가 말했다. 상담과 면담의 차이가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일단 차트를 보고 있지 않았다. 

  - 우울증은 무서운 병이에요. 이렇게 극적으로 좋아지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보통은 악화되지 않게 잘 관리하는 게 최선이죠.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강 박사가 말을 이었다. 

  - 다 박사님 덕분입니다. 처방해 주신 약도 도움이 된 것 같고. 

  내가 말했다. 

  - 정말 다른 이유는 없나요?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강 박사가 물었다. 뭘 알고 묻는 것 같은 표정 같기도 했고, 그냥 하는 말 같기도 하고 미묘했다.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블러드 콜드브루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 사실 반도체 관련 주식을 좀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 많이 올라서 그래서 기분이 좋아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커피를 자주 마십니다. 그거 말고는 뭐 별다른 게 없습니다. 

  뭐라고 말해야 잘 넘어갈까 고민하다가 그렇게 얼버무렸다. 주식을 산 것은 사실이었고, 요즘 점심시간에 직원들의 최대 화두도 주식 이야기니까. 

  - 특별한 사례라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이 될 수도 있어서 물어본 건데, 솔직히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면 괜찮아요. 무엇보다 유 과장님이 잘 지내서 다행이에요. 

  강 박사가 말했다. 시범 사업의 결과를 토대로 ‘뉴진’을 보완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 저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속으로는 ‘앞으로 살면서 다시는 마주치지 맙시다.’ 하고 되뇌었다. 


  어쩌면 이지윤 인턴도 나를 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지윤 인턴은 남자 친구가 없고, 일찍 결혼할 생각도 아닌 것 같고, 어쩌면 비혼주의일지도 모른다고 보고했지만, 팀장은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정규직을 한 명도 뽑지 않았다. 


  이제는 인턴 관련 업무를 하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어느새 새 인턴들이 들어와 정규직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를 위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요즘도 나는 종종 회사에 있으면서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우울하기 때문인지,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를 잘 모르겠다. 다만, 출근했으니까. 퇴근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직장인은 원래 그런 게 아닐까. 

  그래도 견딜 수 없으면 커피를 마신다. 커피 맛에 눈은 떴는지 커피를 고르는데 조금 까다로워졌다. 얼마 전에 회사 근처에 새 카페가 문을 열었다. 테이크아웃만 가능한 곳인데, 지나가다 가격표를 보니 가격이 꽤 비쌌다. 

  익숙한 얼굴이 주문을 받는다. 

  - 주문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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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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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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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해원
    감동했어요

    너무 재미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

    • 2026-08-01 10:50:20
    해원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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