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새해
- 작성일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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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새해
주나영
우기 막바지인 3월 아침, 조식당에 안까지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직원은 사다리에 올라 창에 붙은 검은 시트지를 문질렀다. 들뜬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눌렀지만 쉽게 붙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해서 창을 가려야 하나 싶었다.
어젯밤 체크인할 때 받은 안내문 상단에는 영어로 ‘침묵의 날(녜삐 데이)’이라는 낯선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루 동안 발리의 불빛과 소음을 줄이며, 투숙객의 호텔 외부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안내문을 건네던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새해 첫날을 아주 조용하게 보내는 풍습이 있거든요.”
나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호텔 직원들은 목소리를 낮췄고, 손님들도 주변을 살피며 말을 줄이는 듯했다. 사다리 위의 직원은 테이프를 한 조각 더 잘라 시트지 가장자리에 붙였다. 그래도 한쪽이 다시 들뜨자 시트지 한 장을 떼어 사다리 아래로 내려보냈다. 창의 절반쯤이 드러났고, 유리 바깥 면을 따라 빗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은 케이지-프리 에그 화이트 오믈렛을 주문했다. 쉰을 넘긴 뒤부터 식단과 운동에 부쩍 엄격해졌다. 디종 머스터드 병을 열어 숟가락으로 접시 귀퉁이에 덜어 놓은 뒤, 오믈렛을 잘라 찍어 먹었다. 면도를 공들여 한 듯 턱끝이 말끔했다.
맞은편에 앉은 혜리는 빵 바구니에서 올리브 치아바타를 집어 들더니 박혀 있는 올리브만 손끝으로 빼 먹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어깨에 들러붙어 있었다. 머리를 귀 뒤로 넘길 때마다 손가락에 물기가 묻었다. 나는 냅킨 상자를 혜리 쪽으로 밀었다가 멈추었다. 혜리는 이미 옆에 놓인 냅킨으로 손끝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커피는 식어 있었다.
혜리는 남편과 전처 사이의 딸이다. 남편은 나보다 열다섯 살 많고, 혜리는 나보다 열다섯 살 어리다. 혜리가 초등학생 때 엄마와 함께 호주로 건너간 뒤, 남편은 일 년에 한두 번 혜리를 만났다.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빠짐없이 선물을 보냈다.
남편이 서재에서 혜리와 영상 통화를 하는 날이면 나는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를 조금 줄였다. 주방에 갔다가 웃음소리가 들리면 물병만 꺼내 돌아왔다. 통화가 길어지는 날에는 먼저 씻고 침실로 들어갔다. 남편은 통화를 마친 뒤 혜리의 학교생활과 새로 키우기 시작한 동물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나는 그가 보여 준 사진을 몇 장 넘겨본 뒤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혜리는 빵에서 올리브를 하나 더 빼 입에 넣었다. 남편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혼인신고를 했지만 결혼식은 혜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미뤄 왔다. 결혼식은 석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사흘 정도 쉬고 오자고 한 것도, 한국과 호주의 중간쯤인 발리에서 혜리를 만나자고 한 것도 남편이었다. 출발 전날 밤, 남편은 서재에서 청첩장이 든 봉투를 가져왔다. 구겨지지 않도록 얇은 파일 사이에 끼워 여행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혜리는 아보카도 스프레드를 빵 위에 고르게 펴 발랐다. 한입 베어 물자 빵 껍질이 바스러져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남편은 부스러기를 한쪽에 모아 냅킨 위에 털어냈다. 테이블을 정리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교환학생 신청한 건 어떻게 됐니?”
“됐어요.”
“어디였지?”
“필라델피아요.”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혜리가 알려 준 학교 이름을 검색한 뒤 위성 지도로 주변을 살펴보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캠퍼스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까지 걸리는 시간과 겨울 평균 기온도 찾아보았다.
“거기 겨울에 꽤 춥던데.”
“호주도 추워요, 겨울엔.”
“얘는 늘 이래. 호주도 겨울이 있다고 우겨. 그건 겨울도 아닌데.”
남편이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호주의 겨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물잔만 들었다.
“덜 추워도 겨울은 겨울이죠.”
혜리는 빵을 한입 더 먹었다. 남편은 안내문을 펼쳐 테이블 가운데 놓았다. 프로그램 일정과 시설 이용 시간이 적혀 있었다. 오전에는 차낭사리 만들기와 요리 수업이, 오후에는 요가가 예정되어 있었다. 오후 여섯 시 이후부터 다음 날 오전 여섯 시까지는 시설과 식당이 문을 닫았고 객실 안에서도 조명을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했다.
남편은 시간표를 훑어보다 요가 옆에 동그라미를 쳤다. 휴대전화 달력을 열어 시작 시각을 입력하고, 스파 예약 시간과 겹치지 않는지 확인했다. 그는 여행을 갈 때마다 식사와 이동 시간을 십오 분 단위로 적어 두었다. 계획이 바뀌면 취소선을 긋는 대신 일정을 새로 입력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병원 엘리베이터였다. 나는 대학병원 간호사였다. 야간 근무를 마친 날이면 직원 식당에서 커피를 사 들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피곤한 날이면 사람이 많은 엘리베이터는 그냥 보내기도 했다.
“같이 가요.”
닫히던 문밖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열림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남편이 들어왔다. 당시 그는 미국계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층수 버튼을 누른 뒤 나를 돌아보았다.
“퇴근하는 거예요?”
“네.”
그는 내가 내릴 층을 물었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근처에 새로 생긴 메밀집 이야기를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게 이름은 듣고도 바로 잊었다.
“뭐 하고 싶은 건 없어?”
그는 안내문 위에 펜을 올려놓고 혜리를 보고 있었다.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
혜리는 안내문을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남편은 요리 수업과 차낭사리 만들기 사이에서 망설이다 차낭사리에 표시했다. 혜리는 남은 빵 가장자리를 조금씩 뜯어 먹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발끝으로 의자 다리를 건드렸다. 낮은 마찰음이 몇 번 났지만 남편은 안내문을 들여다보느라 듣지 못한 듯했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조식당을 빠져나갔다. 직원은 마지막 남은 창에 새 시트지를 붙였다. 시트지 아래에 공기가 들어갔는지 손바닥으로 가운데부터 바깥쪽까지 여러 번 밀어냈다. 창이 가려지자 테이블 위의 물잔에 비치던 빛도 줄었다.
*
스파로 향하는 복도는 야외 정원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비는 그쳤지만 처마 끝에서는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졌다. 정원 곳곳에 야자잎으로 만든 작은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밤새 비를 맞은 꽃잎 몇 장이 바구니 밖으로 흘러나와 돌바닥에 붙어 있었다. 직원 하나가 빗자루로 물기를 쓸어내다가 바구니 앞에서는 방향을 바꾸었다.
남편은 헬스클럽으로 갔다. 나와 혜리는 스파 안으로 들어섰다. 마사지사가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낮은 나무 테이블 위에는 작은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마사지사는 주전자를 기울여 노란빛이 도는 차를 따르고 우리 앞에 한 잔씩 내왔다. 혜리는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가 삼켰다.
“발 씻은 물맛 나요.”
나는 찻잔을 가까이 끌어왔다. 가느다란 허브잎 몇 줄기가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마사지 전에 따뜻한 걸 마시면 좋대.”
“그럼, 다 드세요.”
혜리는 자기 잔을 내 쪽으로 밀었다. 찻잔 두 개가 부딪치며 작게 소리를 냈다.
우리는 어떤 마사지를 받을지 메뉴를 들여다보다가 티베트산 샌드 테라피와 아로마 오일 테라피를 함께 받기로 했다. 방 한쪽에서 마사지사가 모래를 금속 통에 붓고 히터 위에 올렸다. 통을 옮길 때마다 모래알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옆에 쌓여 있던 잡지 한 권을 집어 든 혜리는 몇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한 페이지에서 손을 멈추더니 활자의 오른쪽 끝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왜 이 잡지는 양쪽 정렬을 안 했지.”
혜리는 브리즈번의 작은 잡지사에서 아르바이트로 영상 편집과 인터뷰 녹취 같은 일을 했다. 남편은 잡지사의 이름과 발행 부수, 대표자의 경력까지 찾아보았다. 잡지사 홈페이지에서 지난 호의 표지를 차례로 넘겨보기도 했다. 혜리가 맡은 영상이 어느 것인지는 찾지 못했다.
마사지사가 아로마 오일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왔다. 유칼립투스, 라벤더, 페퍼민트, 베르가모트. 우리는 병을 하나씩 들어 향을 맡았다. 뚜껑 안쪽에 오일이 묻어 손가락이 미끄러웠다. 내 코에는 향이 모두 비슷하게 느껴졌다. 나는 ‘시트로넬라’라고 적힌 병을 집었다.
“이건 해충 퇴치 스프레이 냄새잖아요.”
“그래? 그럼 넌 뭐로 할 거니?”
혜리는 병을 두 개 번갈아 맡았다. 페퍼민트를 제자리에 놓고 라벤더를 집었다.
“라벤더요. 요즘 잠을 잘 못 자서요.”
혜리는 직원에게 병을 건네고 묻은 오일을 휴지로 닦았다. 나는 시트로넬라를 내려놓고 베르가모트를 집었다.
방에는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어 침대 옆에 놓고 엎드렸다. 얼굴 받침대의 구멍 아래로 바닥에 놓인 대나무 바구니가 보였다. 마사지사가 수건을 펼쳐 등에 덮은 뒤 뜨거운 모래를 부었다. 모래알이 어깨에서 허리선을 따라 흘러내리자 열기와 무게가 함께 몸을 눌렀다. 모래가 닿지 않은 부분은 서늘했다. 마사지사는 너무 뜨거우면 말해 달라고 했다. 나는 얼굴 받침대 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2년 전 겨울, 아빠는 세상을 떠났다. 그 겨울, 나는 저녁마다 엄마의 이메일을 출력해 병실로 가져갔다. 아빠는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를 켜고 종이를 무릎 위에 펼쳤다.
‘기억나니.’
엄마의 이메일은 언제나 같은 문장으로 시작했다. 아빠는 첫 문장을 소리 내어 읽다가 어느 순간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그때마다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보았다. ‘기억나니’라는 말 앞에서 좀처럼 떠올릴 장면을 찾지 못했다. 편지에는 대개 우리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엄마가 겪은 일들이 적혀 있었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한 뒤 미군 부대 우체국에서 일하다가 미군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내가 일곱 살 때였다. 대학 시절 한 차례 얼굴을 본 뒤 우리는 오랫동안 소식을 끊고 지냈다.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은 아빠가 췌장암 판정을 받은 무렵이었다. 엄마는 투병 기간 내내 병원비를 보냈다.
“왜 병원비를 내려고 하세요?”
“그러고 싶어서 그래.”
엄마는 그 말만 되풀이했다.
밤샘 근무를 마친 날이면 나는 진단서와 병원비 영수증을 봉투에 넣어 은행으로 갔다. 문이 열리기 전에는 현금인출기 옆 계단에 앉아 번호표 기계에 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청소 직원이 계단을 닦으러 오면 봉투와 가방을 챙겨 맞은편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이상하게도 그 짧은 이동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해외 송금 신청서에는 병원 주소와 계좌번호를 매번 다시 적어야 했다. 한 칸이라도 틀리면 직원은 새 용지를 건넸다.
옆 침대에서 모래가 사각사각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혜리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마사지사가 괜찮으냐고 묻자 혜리는 영어로 조금 뜨겁다고 대답했다. 잠시 후 금속 그릇에 모래를 덜어내는 소리가 났다.
엄마에게 결혼 소식을 전한 날, 나는 병실 앞 복도에서 전화를 받았다.
“홀리 쉿. 네가 스텝맘이 된다는 거니?”
엄마는 헛웃음을 섞어 말했다.
“나는 DD의 아들들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엄마는 미군 남편을 DD라고 불렀다. 더블 디보스(Double Divorce)의 줄임말이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DD의 아들들 이야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머릿속에 낯선 사람들의 가계도가 잠깐 그려졌다.
“여긴 지금 아침이야. 그 사람들 인생을 생각하니 아침부터 기운 빠지네.”
어느 날 엄마는 DD가 요즘 잠에서 잘 깨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나는 병원 컴퓨터 앞에 앉아 엄마에게 ‘FAST 체크리스트’를 적어 보냈다.
Face: 웃을 때 양쪽 얼굴이 대칭인지. Arm: 한쪽 팔에 힘이 빠지지 않는지. Speech: 말이 어눌하지 않은지. Time: 하나라도 이상하면 즉시 병원으로 갈 것.
엄마는 DD를 거실 카우치에 앉혀 놓고 웃어 보라고, 두 팔을 들어 보라고, 아무 말이나 해 보라고 했다.
“아, 아이 엠 오케이.”
DD는 아이리시 억양이 강했고 말을 시작할 때 조금 더듬었다. 엄마는 체크리스트를 프린트해 냉장고에 붙여 두었다고 했다. 말하기 항목에는 처음 동그라미를 쳤다가 옆에 물음표를 덧붙였다. 나중에는 DD가 원래도 그렇게 말한다는 문장을 아래에 적어 놓았다.
마사지사가 낮게 “턴”이라고 말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침대 가장자리를 짚고 돌아누웠다. 등에 얹혀 있던 모래가 옆구리 쪽으로 흘러내렸다. 옆 침대의 혜리는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맡의 수건이 한쪽 귀를 덮고 있었다. 마사지사가 수건을 바로잡으려 하자 혜리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고개를 들었다. 나는 혜리 쪽을 보다가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결혼 준비를 시작한 뒤에도 나는 혜리를 부를 일이 거의 없었다. 남편과 대화할 때는 이름을 썼고, 혜리에게 직접 말할 때는 호칭 없이 문장을 시작했다. 배 안 고프니, 몇 시에 나갈래, 수건 더 필요하니. 이름을 불러야 할 때면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는 가끔 혜리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들여다보았다. 코알라를 안고 있는 사진, 제티 난간에 기대 바다를 보고 있는 뒷모습, 오렌지차를 마시며 메리 올리버의 시집을 읽는 옆얼굴. 사진 아래에는 친구들이 남긴 짧은 문장과 이모티콘이 이어졌다. 나는 영어로 적힌 댓글을 몇 개 읽다가 혜리가 답한 문장까지 내려보곤 했다. 아는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최근 몇 달 동안은 게시물이 거의 올라오지 않았다. 마지막 사진은 서점 진열대였고, 날짜는 넉 달 전이었다. 나는 며칠에 한 번씩 새 게시물이 올라왔는지 확인했다.
마사지사가 혜리의 발목 아래에 수건을 말아 받쳤다. 혜리는 자세를 고쳐 누우며 발가락을 오므렸다가 폈다. 나는 말을 걸려다가 입안이 말라 있는 것을 느끼고 침을 삼켰다. 에어컨 바람이 얼굴 위를 지나갔다. 천장 선풍기는 꺼져 있었고, 날개 끝에 먼지가 붙어 있었다.
*
차낭사리 만들기 프로그램은 로비 옆 개방형 라운지에서 열렸다. 낮은 테이블 위에 야자잎과 가는 대나무 조각, 붉은 꽃과 흰 꽃, 노란 꽃, 잘게 자른 잎사귀가 놓였다. 다른 투숙객들은 한 자리씩 간격을 두고 떨어져 앉았다. 테이블 앞에는 대화할 때 목소리를 낮춰 달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다.
헬스클럽에서 나온 남편은 티셔츠 등판이 땀에 젖어 보였다. 샤워할 시간이 없었다며 목에 수건을 걸친 채 우리 옆에 앉았다. 그는 야자잎 바구니를 들어 접힌 선을 따라 한 번 더 눌렀다. 남편은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좋아했다.
발리로 떠나기 전부터 그는 여행 가방을 몇 번이나 다시 싸고 풀었다. 가방 안에는 혜리가 어릴 때 좋아했다는 보드게임과 배 모형 프라모델이 들어 있었다. 보드게임의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그는 두 물건의 자리를 몇 번이나 바꾸었다. 나는 그 시절의 혜리를 모른다. 가방은 이미 물건으로 꽉 차 지퍼를 닫기 힘들었다. 남편은 새로 산 닌텐도 게임기를 빈틈에 밀어 넣고 지퍼 손잡이를 몇 번 당겼다.
“이런 것도 좋아하겠지?”
남편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문가에 기대 팔짱을 낀 채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두 주 전 남편 회사 근처 가게에 그릇을 주문해 두고 퇴근길에 찾아와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아직 그릇을 가져오지 않았다. 나는 가방 밖으로 삐져나온 셔츠 자락을 안으로 밀어 넣고 가방 위를 눌러 주었다. 그릇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강사는 야자잎을 접어 네 귀퉁이를 만드는 법을 보여주었다. 남편은 접힌 선을 다시 눌렀다. 그의 바구니는 금세 모양이 잡혔다. 혜리는 한쪽 모서리를 접다가 야자잎을 찢었다. 새잎을 집지 않고 그대로 대나무 조각을 꽂았다. 나는 붉은 꽃과 흰 꽃, 노란 꽃을 따로 모아 두었다. 남편이 내 쪽 꽃을 집으려다 손을 멈췄다. 내 바구니에는 이미 꽃이 놓여 있었다. 그는 혜리 앞에 남은 꽃을 집었다. 혜리는 손에 잡히는 대로 꽃잎을 올려놓고 잎사귀를 몇 장 얹었다. 강사는 테이블 사이를 돌며 완성된 바구니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남편이 혜리의 바구니를 가리켰다.
“여기 다시 접으면 될 것 같은데.”
혜리는 찢어진 부분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남편은 손을 거두었다. 혜리는 묻은 잎가루를 털고 바구니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완성한 차낭사리를 호텔 정원에 놓으러 갔다. 남편은 자기 것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혜리는 바구니를 한 손에 들고 걸었다. 비가 지나간 돌길은 미끄러웠다. 직원은 향을 하나씩 꽂아 주고 다음 사람을 불렀다. 바람이 불자 향 연기가 옆으로 흘렀다. 걸어가는 사이 꽃잎 하나가 돌길에 떨어졌다.
수영장에서 물이 넘치는 소리와 멀리서 문이 닫히는 소리, 직원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에는 지나쳤을 작은 소리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돌계단 아래에는 방금 놓아둔 차낭사리들이 그대로 있었다. 직원 둘이 다른 바구니들을 한쪽으로 옮기며 정원을 정리했다. 우리는 계단을 올랐다.
*
남편은 점심에도 닭가슴살이 올라간 샐러드를 골랐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혜리는 태블릿을 꺼내 잡지사에서 만든 영상을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한 외국 배우가 가방 안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실크 수면 안대, 노이즈 캔슬링 헤드셋, 월트 휘트먼 시집, 데일리 다이어리, 타로 카드, 모든 음식에 넣어 먹는다는 핫소스가 차례로 테이블 위에 놓였다. 남편은 영상이 끝날 때까지 말없이 보았다.
“가방에 웬 잡동사니가 저렇게 많아?”
“재밌잖아요. 남의 인생 뒤지는 기분도 들고.”
혜리가 웃으며 영상을 처음부터 틀었다. 나는 화면보다 혜리 얼굴을 더 보았다.
“배경음악이 큰 거 아니야?”
“편집장이 정한 거예요.”
남편은 더 말하지 않았다. 포크로 닭가슴살을 같은 크기로 잘라 한쪽에 모아 두었다.
혜리는 지난주 버스를 타고 펭귄을 보러 갔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옆 차에서 누군가 창문을 내리고 소리를 질렀고, 기사가 갓길에 버스를 세웠다고 했다. 타이어가 펑크 나 있었다. 기사는 트렁크에서 예비 타이어를 꺼내 아스팔트 위에 쪼그려 앉아 바퀴를 갈았다. 승객 몇 명은 버스 밖으로 내려 휴대전화를 들여다봤고, 어떤 사람은 기사 옆에서 공구를 건네주었다. 혜리는 창밖만 보며 버스가 빨리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해가 지기 전에 펭귄들이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놓칠까 봐서였다.
남편의 업무용 휴대전화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다른 손으로 혜리의 손등을 덮었다.
“듣고 있어.”
혜리는 손등 위에 놓인 그의 손을 한 번 내려다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한 시간쯤 늦게 도착했는데도 다행히 볼 수 있었어요. 생각보다 되게 작더라고요. 사람들이 사진 찍느라 앞에 몰려 있어서 잘 안 보였는데, 한 마리가 사람들 사이로 갑자기 걸어왔어요.”
남편은 포크를 내려놓고 물잔을 들었다.
“사진은 안 찍었어?”
“찍었는데 흔들렸어요.”
혜리는 휴대전화에서 사진 몇 장을 찾아 보여주었다. 모래사장 끝에 검은 점처럼 펭귄들이 서 있었다. 사진을 넘길수록 흔들린 사진 뿐이었다.
DD를 처음 만난 집에서는 야구 중계가 끊이지 않았다.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나는 미국 횡단 여행을 했다. 동부에서 서부로 이어지는 긴 여정의 중간쯤, 나는 엄마를 찾아갔다. 엄마와 DD는 수확이 끝난 옥수수밭 너머로 눈이 끝없이 이어지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굽이진 시골길 끝의 집이었다. 그곳에 머무는 며칠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바닥까지 푹 꺼진 낡은 카우치에 몸을 파묻고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 것뿐이었다. 어느 채널을 틀어도 야구 중계가 나오곤 했다.
내가 떠나는 날 아침, 엄마와 DD는 나무 식탁에 나란히 앉아 시리얼을 먹고 있었다. DD는 평소 먹던 제품 대신 엄마가 다른 시리얼을 사 왔다며 투덜거렸다.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게 그거지, 뭐가 다르다고 그래.”
“위트빅스는 모서리가 각졌는데 위타빅스는 살짝 둥글잖아. 위타빅스에는 설탕도 2그램이나 더 들어 있다고. 이게 어떻게 같아?”
엄마는 DD 앞에 놓인 시리얼 그릇을 가져가 숟가락으로 한입 크게 떠먹었다.
“잘게 자른 신문지 맛이야. 어차피 똑같아.”
“아니지, 이건 흙에서 자란 귀리 맛이라고.”
DD는 그릇을 다시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오늘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어제 성당 안 갔어?”
“갔어. 근데 내가 말을 시작하려는데 마크 신부님이 그러더라고. 네가 말하기 전 하느님은 이미 다 안다고. 그 말을 들으니까 고해성사할 맛이 안 나서 입을 닫고 있었지.”
엄마는 DD가 말하는 동안 시리얼 상자 귀퉁이를 가위로 잘라 냈다. 나는 엄마가 작은 틴케이스에 오려 낸 종잇조각을 넣는 모습을 바라봤다. 시리얼 상자에 붙어 있던 야구 경기 초청 응모권이었다.
아침을 다 먹은 뒤 엄마는 틴케이스를 열어 안에 들어 있던 사진 몇 장을 꺼냈다. 엄마와 DD는 사진 한 장을 함께 들여다보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사진 속에는 어린 나와 강아지 한 마리가 서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우리 집에 와 크리스라는 이름을 얻은 미니어처 슈나우저였다. 흰 눈썹 때문에 어려서도 늙어 보였다. 산책만 나가면 꼬리를 쉬지 않고 흔들었다. 나는 공원에서 크리스에게 “앉아”, “일어서”, “돌아”를 시켰다. 크리스는 내가 손짓을 하면 비둘기 떼를 향해 달려갔고, 흩어지는 새들 사이를 한 바퀴 돌고는 내 곁으로 돌아왔다. 사진 속의 크리스는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엄마가 떠난 뒤에는 집 안 물건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식탁 다리에도 이빨 자국이 남았고, 방문 아래쪽 나무도 군데군데 패였다. 아빠는 문을 새로 달자는 말을 여러 번 했지만 끝내 그대로 두었다.
엄마는 사진을 원래 순서대로 맞춰 넣고 틴케이스 뚜껑을 닫았다. 야구 중계에서는 배트에 공이 맞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직원이 저녁 도시락 신청 여부를 물었다. 식당은 여섯 시에 문을 닫고 그 뒤로는 객실 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설명했다. 나는 메뉴판을 끝까지 읽지 않고 아무거나 괜찮다고 했다. 혜리도 같은 말을 했다. 남편은 메뉴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도시락 하나는 닭고기로, 하나는 생선으로 바꿔 달라고 했고, 디저트는 과일로 가능한지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이 주문 내용을 확인하고 메뉴판을 가져갔다.
남편은 휴대전화 달력을 열어 받을 시간을 입력했다. 혜리가 화장실에 간 사이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직원이 빈 접시를 치우며 물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창가 자리에서 아이 하나가 숟가락을 떨어뜨렸고,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식당 안에 짧게 울렸다. 남편은 그쪽을 한 번 보더니 식탁 위에 놓인 안내문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
호텔에서 프라이빗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은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졌다. 비가 그친 뒤라 돌계단 곳곳에 작은 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남편은 목과 얼굴의 땀을 수건으로 닦았다. 계단 중간쯤에서 뒤를 돌아본 남편은 혜리가 두 계단쯤 뒤에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
해변으로 이어지는 길은 밧줄로 막혀 있었다. 남편은 고정 장치를 풀고 파라솔을 펼쳤다. 우리 셋의 머리 위로 둥근 그늘이 생겼다. 그는 빈 선베드 세 개를 끌어와 나란히 놓았다. 나는 선베드 위에 수건을 깔고 구겨진 부분을 손바닥으로 여러 번 쓸어 폈다. 혜리는 선베드 모서리에 걸터앉아 발로 모래를 헤집었다. 이내 한 줌 집어 올렸다.
“뭐야, 아까 티베트 모래 같은데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티베트 모래가 따로 있어?”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선크림을 팔에 바르기 시작했다. 남편이 선베드 등받이를 세우자 혜리가 잠시 일어났다. 남편이 등받이를 한 칸 올린 뒤 한 번 눌러 보고 자리에 앉았다. 혜리는 다시 앉아 발바닥을 서로 비벼 모래를 털어냈다. 마사지를 받으려고 묶어 두었던 머리를 풀고 비치백에서 플라스틱 상자를 꺼냈다.
“다음 달 콘서트 가는데 팬끼리 팔찌를 나눠 갖기로 했거든요.”
혜리는 가느다란 실에 구슬을 하나씩 꿰기 시작했다.
해변 직원이 코코넛과 과일, 크렘 브륄레를 가져왔다. 혜리는 코코넛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었다. 나는 스푼 끝으로 크렘 브륄레의 설탕막을 깨뜨렸다. 남편은 비치백에서 보드게임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여는 순간 돼지 모양 주사위가 작은 테이블 위로 굴러떨어졌다.
“이게 아직도 있어요?”
남편은 주사위를 집어 혜리에게 건넸다. 혜리가 주사위를 굴리자 돼지가 옆으로 쓰러졌다. 옆으로 누우면 1점, 네 발로 서면 5점이었다. 코나 귀로 서면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우리는 돌아가며 주사위를 던졌다. 남편은 점수를 휴대전화 계산기에 입력했다. 혜리는 두 번 연속 높은 점수가 나오자 손뼉을 쳤다.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 돼지 흉내를 내자 혜리는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나는 책을 펼쳤지만 같은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남편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계산기 화면을 지웠다. 남편은 배 모형 상자를 꺼냈다. 가느다란 나무판과 돛대, 실, 금속 부품이 칸마다 나뉘어 있었다. 남편은 설명서를 펴고 부품 번호를 확인했다. 혜리는 코코넛 안쪽의 흰 과육을 스푼으로 긁어 먹으며 남편을 보았다. 남편은 나무판 두 개를 맞추다가 유학 시절 만난 프랑스 여학생 이야기를 꺼냈다. 이름을 못 알아들었더니 그 여학생이 학교 앞 카페에서 에클레르를 가리키며 자기 이름을 말했다고 했다.
“이름이 클레르였거든. 에, 클레르.”
혜리는 입가에 묻은 코코넛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 여자랑 사귀었어요?”
남편은 나무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못 사귀었지. 넌 남자 친구 있니?”
혜리는 대답 대신 두 손바닥을 포개 물고기가 헤엄치듯 앞으로 내밀었다.
“대디, 투 딥.”
남편은 웃으며 더 묻지 않았다. 다시 나무판을 맞췄다. 혜리가 상자 안에서 매끈하게 깎인 나무 고리 하나를 집었다. 설명서를 내려다본 뒤 갑판 가장자리의 작은 홈에 끼워 넣었다. 방향이 반대였다. 남편은 그 부분은 그대로 둔 채 다른 부품을 집어 조립을 이어갔다.
파도는 일정한 간격으로 밀려왔다. 밀려온 물이 모래를 적셨다가 빠져나갔다. 해변 끝에서 직원 하나가 선베드를 닦고 있었고, 다른 직원은 파라솔 각도를 돌렸다. 혜리는 선베드에 등을 기대고 이어폰을 꼈다. 잠시 뒤 눈을 감았다. 이어폰 한쪽이 머리카락 사이로 빠져 있었다. 나는 펼쳐 둔 책 위에 손을 올렸다. 남편은 완성되지 않은 배를 테이블 위에 두고 시간을 확인했다. 선베드 옆에 놓인 슬리퍼를 신고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남편이 자리를 뜨자 파라솔 아래에는 혜리와 나만 남았다. 남편은 다른 투숙객들 사이에 서서 강사의 동작을 따라 했다. 강사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혜리는 코코넛을 옆으로 밀고 팔찌 상자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투명한 칸마다 크기가 다른 구슬이 담겨 있었다. 실을 꺼내 손목에 둘러보았다가 길이를 가늠했다. 나는 책장을 넘겼다.
여행 전날 남편과 설거지를 마친 뒤 휴대전화 메모장에 적어 둔 목록을 떠올렸다. 주말마다 하던 크리켓, 대회까지 나갔다던 카약, 밤마다 찾아다녔다는 이름 모를 동물. 그런데 찾으러 다녔다는 동물 이름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포섬이었다.
“아빠한테 들었는데.”
나는 책에서 눈을 뗐다.
“어릴 때 밤마다 포섬을 찾으러 다녔다며.”
혜리의 손끝이 멈췄다. 매일 나간 것은 아니라고 하며 실 끝을 손가락 사이에 쥐었다.
“누군가를 잊고 싶을 때마다 나갔어요.”
혜리는 실을 당겼다가 놓았다. 아빠는 손전등을 포섬 눈에 바로 비추지 말고 발밑으로 낮춰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새 구슬을 집어 실을 꿰려 했지만 끝은 번번이 가장자리를 스쳤다. 나는 누구를 잊으려 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어떤 색이 필요한지 물었다. 혜리는 작은 검은색 구슬을 찾아 달라고 했다. 나는 책을 덮고 투명한 구슬 사이에서 하나를 골라 혜리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혜리는 구슬을 눈 가까이 들어 보더니 확인한 뒤 실에 꿰었다. 포섬을 자주 봤느냐고 묻자 대부분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도 계속 나갔어?”
“아빠가 조금만 더 가 보자고 했으니까요.”
오늘은 없을 수도 있다면서도 아빠는 늘 한 바퀴만 더 돌아 보자고 했다고 덧붙였다. 결국 못 찾는 날에는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멀리서 요가 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다 중심을 잃고 옆 사람의 어깨를 짚었다. 상대가 놀라 돌아보자 남편은 한 손을 들어 보였다. 혜리가 그쪽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포섬이 나타나지 않는 날이면 둘은 잔디에 누웠다고 했다. 밤인데도 잔디는 미지근했고, 주머니 속 초콜릿은 녹아 손과 입가에 달라붙었다. 손에 묻은 것은 그대로 핥아 먹었다고 했다.
해는 아직 수평선 위에 있었지만 바람에 서늘한 기운이 섞였다. 선베드 끝에 놓여 있던 비치 타월을 집어 혜리 쪽으로 내밀었다.
“추우면 덮어.”
혜리는 말없이 타월을 받아 어깨에 둘렀다. 양쪽 끝을 가슴 앞으로 여민 뒤 다시 실을 집었다. 토끼는 세 마리나 보았지만 포섬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그래도 괜찮았다고 했다.
“잔디 냄새도 나고, 초콜릿도 다 녹고요.”
혜리는 구슬을 손안에 쥐었다.
“아빠도요.”
혜리는 구슬과 실을 함께 상자 안에 내려놓고 뚜껑을 닫았다. 고무줄을 두 번 감아 묶었다. 남편은 여전히 요가를 하고 있었다. 혜리는 더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
“아빠는 제가 결혼식에 갈 거라고 생각하죠?”
나는 혜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혜리의 시선은 바다에 머물렀다.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은 아니었다. 남편이 기다렸다는 말을 해 줄 수도 있었다. 여행 전부터 혜리가 올 거라고 믿었다는 말도. 나는 무언가를 하지 않음으로써 지켜지는 평형이 있다고 여기는 편이었다. 모래 위에 떨어진 조개껍데기를 발끝으로 밀었다.
혜리가 나를 돌아봤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해변에서는 여섯 시까지 객실로 돌아가 달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영어 안내가 끝나고 현지어 안내가 이어지는 동안 파도가 밀려와 모래 위를 얇게 적셨다.
멀리서 남편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그의 윤곽이 선명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발등에 붙은 모래를 손으로 털어냈다. 선베드 옆에 놓인 슬리퍼를 발로 끌어당겨 신었다. 남편이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산스크리트어라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
그는 수건을 비치백 안에 밀어 넣었다. 먼발치에서 직원들이 파라솔을 하나둘 접기 시작했다. 길게 드리워졌던 그늘이 모래 위에서 차례로 걷혔다. 그 자리로 수평선 쪽에서 밀려온 볕이 낮게 고였다. 우리는 말없이 해변을 걸어 나갔다.
*
나는 객실에 들어오자마자 커튼을 닫고 발코니 조명을 껐다. 남편은 방 안의 조명까지 꺼 둔 채 침대 옆 스탠드 하나만 남겼다. 우리는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혜리는 볶음밥 속 당근만 골라 한쪽에 모았다. 남편은 닭고기 껍질을 떼어 상자 귀퉁이에 놓았다.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화면도 켜지 않은 채 내려놓았다. 한동안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혜리가 포크 끝으로 당근을 굴렸다.
“학교에서 크리켓 수업을 했는데 규칙을 끝내 모르겠더라고요. 친구들이 뛰면 저도 그냥 따라 뛰었어요.”
나는 예전에 남편이 혜리는 크리켓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걸 떠올렸다. 그 말을 듣고 중계를 찾아봤다. 지루해서 몇 번이나 졸다 깼는데도 경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화면 속 선수들은 해가 질 때까지 비슷한 동작을 반복했다. 언제 끝내려고 저러지. 결국 채널을 돌렸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아 텔레비전을 다시 켰는데도 여전히 경기는 끝나지 않고 있었다.
남편이 혜리를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빠지지 않고 했으니까 그렇게 보였나 봐요.”
“그게 크리켓이지. 끝날 것 같다가도 계속되는 거.”
남편은 빈 도시락 상자를 차곡차곡 포개 쓰레기통 옆에 세워 두었다. 혜리는 볶음밥을 떠 천천히 씹었다. 나는 물만 마셨다. 방 안에는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만 남았다.
DD는 보일러를 고치러 지하실로 내려갔다. 떠날 채비를 마친 나는 DD에게 인사를 하려고 지하실 계단을 내려갔다. 찬 공기에 목도리를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DD는 덮개를 연 보일러 앞에 허리를 굽히고 앉아 공구함을 뒤적이고 있었다. 시멘트벽에 기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지난 경기 하이라이트가 흘러나왔다. 지역 정비소의 겨울 타이어 할인 광고가 지나가고 야구 시즌권 선예매 안내가 이어졌다.
나는 계단 마지막 칸에 걸터앉아 두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목 안으로 들어왔다. 보일러 밸브 아래에는 양동이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반쯤 찬 상태였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었다. 바닥에는 물이 얇게 번져 나갔다. DD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추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DD는 장화 끝으로 작은 고무 매트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나는 그 위에 발을 올렸다. 발끝이 조금 덜 시렸다. 라디오에서는 지난 시즌 홈런 장면이 흘러나왔다. DD는 보일러 옆면에 손을 대 보았다. 공구를 내려놓고 다시 밸브를 돌렸다. 관중의 환호성이 지하실 안을 채웠다. 엄마는 DD가 보일러를 고치는 날이면 라디오를 밤새 켜 둔다고 했다. 조용하면 더 추워진다고.
“야구 시즌은 언제 시작해요?”
겨울이 언제 끝나는지 알고 싶어서 물었다.
DD는 렌치를 내려놓고 보일러 소리를 잠깐 들었다. 낮은 진동이 일정하게 이어지자 고개를 끄덕였다.
“곧, 곧 시작해.”
나는 계단에서 일어났다. 작별 인사를 건넸다. DD는 허리를 펴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작업용 장갑을 벗어 뒷주머니에 꽂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다 마주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갑지 않았다.
남편은 코냑이 담긴 잔을 내려놓았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남편은 협탁 위에 놓인 봉투를 바라보다가 집어 들었다.
“이거.”
남편은 봉투를 혜리에게 내밀었다. 혜리는 손을 뻗지 않았다. 남편의 팔은 허공에 머물렀다. 스탠드 불빛만 봉투 위에 옅게 번졌다.
“와 줬으면 좋겠어.”
혜리는 그제야 봉투를 받아 자기 이름이 적힌 앞면을 내려다보았다. 봉투를 뒤집어 봉해진 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커튼 아래로 스며들던 빛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복도에서 카트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몸을 앞으로 숙여 혜리를 불렀지만 혜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남편은 더 말하지 못했다. 미니바에서 코냑을 한 병 더 꺼내 잔에 따랐다. 침대 끝에 앉아 한 모금 마셨다.
혜리는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에코백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화면 밝기를 줄인 뒤 오전에 보여준 영상을 다시 띄웠다. 재생 버튼은 누르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재생 막대를 밀었다. 몇 장면은 끝까지 보지 않는 듯했다. 나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자를 끄는 소리에 눈을 떴다.
“저 방에 갈게요.”
혜리는 태블릿을 에코백에 넣었다. 테이블 위 봉투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집어 들어 함께 챙겼다. 남편도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문까지 따라가지는 않았다.
“잘 자.”
혜리는 멈춰 섰다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는 오래 남지 않았다. 남편은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도시락 상자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남편이 포개 두었던 상자들이 어긋나 쓰레기통 뚜껑이 닫히지 않았다. 남편은 말없이 다가와 튀어나온 모서리를 아래로 눌러 넣었다. 뚜껑을 끝까지 닫았다.
작은 스탠드만이 방을 밝히고 있었다. 스탠드를 끄자 창과 벽의 경계도 사라졌다. 남편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몸을 뒤척일 때 침대가 조금 흔들렸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깨어 있었다. 손을 뻗어 침대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매트리스 끝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엄마가 보낸 메일이 떠올랐다. ‘DD가 세상을 떠났어.’로 시작하는 메일을 하루가 지나서야 열었다. 엄마는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적었다. 마지막에는 ‘공항에 나와주겠니.’라는 한 줄이 덧붙어 있었다. 공항에서 만난 엄마는 여행용 가방 하나만 들고 있었다. “미국 생활이 남긴 전부야.” 집에 돌아온 뒤에도 나는 메일함을 열어 엄마가 미국에서 보낸 지난 메일들을 다시 읽었다.
오늘은 버스 안에서 글을 쓴단다. 나는 플레즌트 힐에 있는 집에서 오후에는 가정부로, 저녁에는 보모로 일을 해. 두 집은 걸어서 십 분 정도 떨어져 있어. 그 동네는 언덕이라 내려올 때 조심해야 해. 이름은 플레즌트인데 뭐가 그렇게 즐겁다는 건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뒤돌아보면 낮게 깔린 회색 하늘뿐인데 말이야. 올해 아이오와의 겨울은 재앙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혹독해. 그런 추위를 너는 아마 상상도 못 하겠지.
오늘, 이 버스도 어딘가 고장 난 모양이야. 버스 안에는 청소 용역 업체 직원들과 가정부들이 대부분이야. 우리는 서로 얼굴은 알아. 이름은 모르지만. 사람들은 우리를 도메스틱 워커라고 불러. 엔진은 꺼져 있고 창문은 꼭 닫혀 있는데도 차창 틈으로 겨울 공기가 스며들어와. 의자를 조금도 뒤로 젖힐 수 없어. 좌석 간격이 그만큼 좁거든.
앞좌석 남자가 사탕 상자를 뒤로 내밀었어. 나는 어떤 색을 고를지 한참 들여보다 노란 사탕을 골랐어. 노란색은 네가 좋아하던 색이었으니까. 상자는 버스 안을 한 바퀴 돌았고, 승객 모두가 사탕을 하나씩 입에 넣을 때까지도 버스는 출발하지 않았어. 긴 지연 끝에 출발한 버스가 다시 멈췄어. 밖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사슴을 들이받은 것 같더라. 가여워라. 제때 제자리에 있지 못했구나.
노란색은 내가 좋아하던 색이 아니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발을 끌어당겼다. 어디선가 낮은 기계음이 들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눈을 떴다. 어둠은 그대로였다. 남편의 숨소리만 일정하게 들렸다.
물을 마시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은 끝까지 닫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컵을 찾다가 테이블 모서리에 손등을 부딪쳤다. 손등을 감싸 쥐었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벽 아래 비상등만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혜리의 방은 그쯤이었다. 나는 그쪽을 보았지만 어느 문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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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8-01
문장웹진 소설
하인즈하인즈 박우연 도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누운 채로 바라본 아킬레스건이다. 분리형 원룸의 미닫이문 너머, 도해는 냉장고 앞에 서 있다. 잠옷으로 입는 헐렁한 티셔츠 밑으로 뻗어 나온 맨다리. 그럴 때면 나는 잠시 내가 누운 곳이 어딘가에 대해 생각했고 곧 도해의 침실 바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먹어?” 언젠가 도해의 등을 향해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도해는 냉장고 문을 닫은 뒤에야 돌아보며 대답했다. “유산균.” 찬장에서 컵을 꺼내다 말고 도해는 바닥에 누워있는 나를 흘낏 보았다. 너도 먹을래? 아주 잠깐이었지만 명백한 사이를 둔 채 날아든 질문에 나는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섬유유연제 없이 빨아 방 안에서 말린 뻣뻣한 수건이 목 뒤쪽에서 까끌거렸다. 도해는 원룸에 옵션으로 딸린 싱글 침대에서 혼자 자고 싶어 했기 때문에 나는 늘 바닥에 얇은 요를 깔고 수건을 말아서 베고 잤다.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자 하인즈는 언제나처럼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고 도해가 유산균을 물과 함께 두 번에 나누어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냉장 보관이 필수인, 한 박스에 육십 캡슐이 든 그 유산균은 하루에 한 번 두 캡슐을-되도록이면 공복에-먹어야 했다. 그 계산대로라면 도해는 한 달에 유산균 값으로만 월급의 십분의 일 가까이를 써버리는 거였다. 그때 나와 도해는 대학가에 있는 바에서 일하고 있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저녁 여섯 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 최저시급이 사천팔백육십 원이던 시절이었고, 열 시부터는 야간 수당이라는 명목하에 칠천이백구십 원을 받았다. 가끔 주말 근무자가 대타를 부탁할 때 생기는 수입과 주휴수당, 손님이 주는 팁까지 모두 긁어모아도 월급은 백이십만 원이 채 안 됐기 때문에, 십이만 원짜리 유산균은 실로 불가사의한 지출이었다. 전공 교과 성적이 뛰어나지 않은 경영학과 학생이 보기에도 그랬다. 장이 안 좋은 편이야? 내가 묻자 도해는 한쪽 입술만 움직여서 웃었다. 그리고 비밀이라도 알려주듯이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이게, 힘이 되거든. 그러고는 몇 개의 단어를 입속에서 굴렸다. 힘이랄지, 배짱이랄지, 든든함이랄지……. “왜, 억울한 시비가 붙거나 말도 안 되게 나쁜 일이 생길 때 있잖아.” 도해는 자신의 배꼽 언저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럴 때 내 뱃속에 십이만 원짜리 유산균이 같이 있다고 생각하면, 몇천억 마리나 되는 애들이 날 위해서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 언저리에서 실존적인 힘이 솟는 느낌이야.” 실존적, 이라는 단어를 도해는 좋아했다. 딱히 철학적인 사유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도 늘 그 표현을 썼다. 내가 도해처럼 쿨한 언니 같은 느낌으로 머리를 자르고 싶다고 했을 때도 도해는 정색하며 말했다. 어떤 스타일인지, 좀 더 실존적으로 묘사해 봐. 나는 도해를 비사이드(B-side)라는 이름의 바에서
- 박우연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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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서 이 소설을 볼 때 먹었던 딸기 우유가 어느 딸기 우유보다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