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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순응

  • 작성일 2026-10-01

  암순응


박선우


  스트레칭의 마지막 단계는 아기 자세다. 

  우선 바닥 매트에 두 무릎을 꿇고 발뒤꿈치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며 앉는다. 상체를 숙이면서 두 손을 머리 위로 곧게 뻗는다. 그러면 어깨의 삼각근과 등허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얕은 신음이 절로 나온다. 그대로 이마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것. 그리하여 더는 내려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

  자세를 갖춘 뒤에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속으로 하나, 둘…… 서른까지 세다 보면 몸의 뒤틀린 부위들이 바로잡히는 게 느껴진다.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에 끼워 맞춰지는 기분. 신체가 교정되는 감각은 정신 상태로도 이어진다.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듯하다.

  힘이 다하면 매트 위에 드러눕는다. 두 눈을 감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뱉어낸다. 몸이 이완되는 감각에 집중한다. 그러면 호흡이 잦아들면서 주변의 모든 것이 서서히 멀어져감을 느낄 수 있다. 아득해지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도. 어느 순간에는 나 역시도.

  스트레칭을 마친 후에는 몸을 일으켜 방문 앞으로 간다. 나는 번번이 문손잡이를 쥔 채 망설이다가 문을 열어젖힌다. 거실로 나가면 가죽 소파에 길게 누운 아버지가 보인다. 올해 일흔넷의 아버지는 한 손을 이마에 올려둔 채 나지막이 코를 골고 있다. 더는 염색을 할 수 없어 백발이 성성해진 머리카락과 고목 껍질처럼 버석하고 거무스름해진 얼굴, 움푹 파인 볼, 살집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앙상해진 팔다리로 맥없이 축 늘어져 있다.

  매일 아침 나는 그 모습을 본다. 

  하루가 다르게 기력을 잃으며 쇠약해지는, 무시로 잠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헤어나질 못하는 아버지를 마주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더디게 흐르다 못해 한순간 뚝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현실과 유리되면서 내가 아버지의 세계에, 그러니까 산 자들의 세계에서 죽어가는 자들의 세계에 휩쓸려 들어와버린 것만 같다. 


*


  “이대로면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사실 겁니다. 항암을 하시면 6개월에서 1년쯤이고요.”

  혈액종양내과 허 교수는 아버지의 검사 결과를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초진을 맡았던 소화기내과 전문의와 위암센터 외과의가 입에 지퍼라도 채운 양 말을 삼갔던 것에 비하면 훨씬 나았고, 어쩐지 속 시원한 감정마저 들었다. 처음으로 상급종합병원 의사에게 신뢰감을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허 교수의 소견에서 새로운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전이성 위암 말기 환자의 여명’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느낀 속 시원함은 아버지가 시한부 환자임을 누군가 육성으로 선언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동안 가족은 물론이고 지인들조차 쉬쉬해온,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그러니까 네 아버지는 얼마나 남은 거니?”―공식적으로 논할 수 있게 된 후련함 말이다. 그래, 내가 의사에게 원하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 우리가 환자에게 도저히 꺼내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대신해 주는 것 말이야.

  허 교수는 아버지의 경우 항암이 완치를 목적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짚고 넘어갔다. 앞으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건 병세의 악화를 지연시키는 정도이지, 발병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가기란 아예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그 순간 허 교수의 발언이 아버지에게 가했을 잔인한 충격과 상관없이 나는 그를 향한 호감이 한층 두터워지는 걸 느꼈다. 그래, 어쭙잖은 위로나 희망 고문 따위 집어치워. 부디 의사라면 진실만을 이야기하라고. 

  “결정은 환자분의 몫입니다만 저희는 항암을 해보시길 권합니다. 그래야 본인에게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요. 받아보시고, 원치 않으시면 언제든 그만두셔도 됩니다.”

  그건 내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지레 겁먹고 도망치지 말자는 것. 도저히 견디기 어려우면 그때 관두자는 것. 나는 허 교수가 마음에 쏙 들었다. 마침내 믿고 따를 만한 의사를, 기대고 의지할 만한 어른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주변에서 이런저런 사례를 보거나 듣고 항암에 대한 거부감이 크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 옛날이야기예요. 요즘에는 구토를 심하게 하거나 머리카락이 빠지는 식의 부작용은 흔치 않습니다. 너무 걱정하실 것 없어요.”

  그 대목에서는 약간 의아한 감정이 들었다. 암 병동 대기실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릴 때마다—예약 시간에 맞춰 와도 매번 두 시간 넘게 기다렸다—털모자를 눌러쓴 환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으니까. 그들은 창백한 피부에 바싹 여윈 몸으로, 3월 초의 포근한 봄 날씨에도 실내에서 두툼한 패딩 점퍼를 입고 있었다. 보호자 없이는 혼자 화장실에 다니지도 못했고, 몇몇은 손등에 링거를 꽂은 채 휠체어 신세를 지기도 했다.

  “보통 항암을 하시면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약물을 투여받으실 텐데요. 제가 진행하는 연구에 들어오시면 해외 신약을 투약하실 수 있습니다. 혹시 연구에 참여하실 의사가 있을까요?”

  아버지와 나는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신약의 효과가 더 좋은지, 연구에 참여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허 교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으며 우리를 향하던 자세에서 우측 모니터 쪽으로 부드럽게 몸을 틀었다.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시면 연구간호원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책상 위 서류들을 한데 모아 정리했고, 무슨 볼일이 더 남았냐는 듯한 얼굴로 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나와야 했다.

  그때 연구고 뭐고 다 집어치우라고 했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눈매가 순하고 온화한 인상의 연구간호원은 복도 끝 상담실로 우리를 데려갔다. 허 교수님한테 들어서 다 아시죠, 하면서 사전스크리닝시험 대상자 동의서에 아버지의 서명을 대여섯 차례 받았다. 서류 작업이 끝나자 연구 대상이 되려면 유전자분석 검사를 선행해야 하는데, 이 비용은 환자 측에서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얼만데요?”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검사여서요. 150만 원 정도요.”

  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자 연구간호원은 익숙한 반응이라는 듯 차분하게 답했다.

  “신약 치료가 1회에 400만 원 정도예요. 그걸 감안하시면 큰 금액이라 볼 수 없죠.”

  “하지만 검사 결과가 부적합이면…… 그냥 돈 날리는 거잖아요?”

  연구간호원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러곤 결과가 적합일 경우 아버지가 무상으로 받게 될 고가의 검사와 약 이름들을 조곤조곤 나열했는데, 난생처음 듣는 용어가 많아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중에서 나는 일부를 용케 알아듣고 물었다.

  “대상자 중 절반이 위약을 투여받는다는 게 뭐예요?”

  이번에도 연구간호원은 빙긋 웃기만 했다. 동의서를 한 부 복사해 드릴 테니 집에 가서 읽어보시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받아보니 깨알 같은 글자들로 가득 채워진 스무 장 남짓의 서류 뭉치였다. 


  병원에 다녀오고 이틀이 지나서야 나는 동의서를 완독할 수 있었다. 요지는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다른 약물과의 병용이 승인되지 않은 신약을 대상자 중 절반에게만 혼합 투약하여 결과를 비교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연구 대상이 되어도 절반의 확률로 신약을 투여받지 못할 수 있었다. 다른 절반의 확률로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아직 승인하지 않은 요법으로 신약을 투여받을 터였다. 

  나는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다시 한번 읽고 나서도 둘 중 어느 편이 아버지에게 나은 방향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런 세부 조건을 미리 알았더라면 내가 아버지를 연구에 참여시키려 했을지도 알 수 없었고, 아버지가 이에 응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전스크리닝시험이 환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연구자를 위한 것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고, 어째서 아버지가 말기 암 판정을 받고 죽음을 앞두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르모트가 되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던져진 주사위나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나는 유전자분석 결과가 나오기까지―2주에서 3주를―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기다리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의사가 선언하지 않았던가. 항암 없이는 3개월에서 6개월 남았다고. 그러니 이렇다 할 의학적 처치 없이 마냥 대기해야 하는 3주란 아버지에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이자 낭비처럼 여겨졌다. 건강한 사람의 3주와는 전혀 다른 양감의 세월이었고, 아버지는 자신이 의료적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으며 심지어 버림받았다는 기분마저 느꼈다(만약 당신이 아파트 주차장이나 쓸고 닦는 계약직 경비원이 아니라 유력 정치인이나 재벌이었어도 병원에서 이런 대접을 받았을지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고 나중에 토로했다). 당시에 나는 그런 심중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유전자분석 결과를 진득이 기다리지 못하고 대체의학에 빠져들고 있음을 뒤늦게야 알았다.

  아버지는 큰이모의 소개로 어떤 여자와 남자를 만났다. 그들에게 한 시간 넘게 붙잡혀 말기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약제와 전열 기구를 소개받았다. 여자는 자신이 10년 전에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는데, 바로 이 약제와 전열 기구를 사용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이 문제를 엄마와 상의했다. 그런데 큰이모에게 이미 감화된 엄마는 그거라도 해야지 않겠느냐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수술도 안 된다며? 항암해봤자 치료도 아니라며? 손 놓고 가만히 있을 거야? 그냥 죽을 거야? 아버지는 며칠간 심사숙고했고, 최종 결정을 내리기 직전에야 내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우리가 유전자분석 결과를 기다린 지 열흘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건네준 카탈로그를 넘겨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두어 페이지를 읽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애써 침착한 어조로 순 사기꾼들이네요, 라고 말했다. 누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문만 퍼지면 꼭 이런 인간들이 꼬인다고, 몸 아픈 환자가 마음도 약해진 틈을 타 어떻게든 주머니를 털어내려고 달려드는 협잡꾼들이라고 덧붙였다.

  “가격도 보세요. 경찰에 신고하기 애매하게 200만 원, 300만 원씩이잖아요. 시한부 환자가 속는 셈 치고 사들이기에 얼마나 적당해요?”

  아버지는 내 말을 묵묵히 듣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매도할 게 아니야. 네가 그 여자를 직접 봤어야 해. 대장암에 걸리고도 살아남은 그 여자를 말이야. 얼마나 생기 넘치고 건강해 보이던지.”

  나는 기가 막혀 한동안 이마를 짚고 있었다. 대체 그 여자는 뭘 어떻게 했기에 아버지를 홀랑 속여넘긴 거지? 내가 아는 아버지는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지적 소양은 부족해도 본능적인 감각만은 예리하게 발달한 사람이었다. 수상쩍은 의도를 품은 이들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단칼에 뿌리치는 단호함도 지니고 있었다. “뭔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더라고. 그래서 다 집어치우라고 했지.” 위험을 감지하는 촉이 무학의 아버지를 평생 지켜준 보호 장치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말기 암에 걸린 아버지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닌 듯했다.

  나는 흥분하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거듭했다. 그렇지만 정작 입을 열었을 땐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분노를 쏟아내고 말았다. 나는 시한부 환자에게 이런 농간을 부리는 것들이야말로 악질 중 최악질이라고 성토했다. 쓰레기 중에서도 구제 불능의 폐기물들이며,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아 뒈져야 할 잡것들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아버지, 차라리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세요. 어디 영검한 절에 들어가서 몇백만 원짜리 제사를 지내시든가요. 그거랑 뭐가 달라요? 여러분, 여기 말기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약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어느 병원에서도 이 약제를 알거나 처방하는 의사는 없지요. 모두가 알음알음 소개를 받아 남몰래 말기 암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이걸 먹고 암을 쫓아내십시오. 의사는 당신을 포기했지만 우리는 끝까지 당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전열 기구로 암세포를 태워 죽이십시오. 암아, 물러가라! 사탄아, 물렀거라! 훠이 훠이. 세상에, 아버지…… 이런 데 현혹되시면 안 돼요. 말기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약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요. 제발 그 사실을 받아들이세요. 다른 환자들이 바보 멍청이여서 항암 치료를 받는 게 아니라고요.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짓이에요.”

  내가 거의 울부짖다시피 하자 아버지는 쓰디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다 알아.” 

  아버지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창밖을 건너다보다가 한숨을 뱉기도 했다. 그러곤 조용히 돌아서서 안방으로 향했다. 나는 그것으로 이 사태가 정리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약제와 전열 기구를 구입했다. 언제부터인가 흰 가루가 든 스틱형 파우치를 두세 개씩 가져다가 500밀리리터 병에 쏟아부은 뒤 물과 섞어 마셨다. 그 탓에 걸핏하면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카탈로그의 설명에 따르면 ‘독소가 빠지는 과정’ ‘치유 효과’라고 했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에는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서 가슴과 배 사이에 전열 기구를 올려놓았다. 책처럼 펼쳐지는 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적외선과 열기를 가리기 위해 수건을 여러 장 펼쳐 그 위를 덮기도 했다. 

  이후에도 사기꾼들은 수시로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왔다. 약제의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한 번에 두세 개로는 부족하다고, 대여섯 개씩 타 먹으라고 종용했다. 하루에 세 번이던 복용 횟수도 여섯 번이나 여덟 번으로 늘리라고 부추겼다. 아버지는 그들의 닦달에도 매번 네, 네, 하면서 깍듯하게 응했고 통화를 마칠 즈음에는 정중한 어조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고, 이렇게 좋은 약과 치료 기구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약간 돌아버릴 것 같았지만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즈음 되니 아버지가 다 알면서도 속아 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사기꾼들에게 기꺼이 당해주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이제는 당신에게 별 의미도 없는 돈 따위 줘버리고―나중에야 알았는데 총액이 천만 원쯤 되었다―허울뿐이더라도 희망을 가져보기로 한 것 같았다. 약제와 전열 기구가 실제로 무슨 효능을 지녔는지는 상관없었다. 아버지는 그저 희망이 필요할 뿐이었다. 아무도 아버지에게 그것을 주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그것과 비슷한 무엇도 주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의사도, 아들도 당신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다른 데서 돈 주고 사 왔을 뿐이었다. 살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아버지에게 그것은 절실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서. 한 줌의 삶일지라도 무탈하게 건사해내기 위해서.


  며칠 후 연구간호원에게 전화가 왔다. 유전자분석 결과 아버지가 연구 대상으로 적합하다는 소식이었다.

  “정말 잘된 일이에요. 보통 3분의 2는 탈락하거든요.”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그렇군요, 라고 답한 뒤 아버지가 더 이상 병원 치료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3주 가까이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고,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이다. 연구간호원은 이 소식을 허 교수에게 전했고, 허 교수는 아버지가 항암을 포기하더라도 병원에 와서 마지막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알려왔다. 의료 행정 절차상 끝맺음을 지어야 하며, 훗날 호스피스 입원 시 필요한 서류들을 챙겨 주겠다고 했다.

  고민 끝에 아버지는 병원으로 향했다. 그날도 우리는 택시를 타고 강남으로 넘어가 북적이는 대기실에서 두 시간 넘게 진료 순서를 기다렸다. 내가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 아버지는 주변의 암 환자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러곤 다시는 병원에 오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거듭 밝혔다.

  “저것 좀 봐라. 사람 몸에 여기저기 바늘을 꽂아놓고, 튜브에 연결해서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저희 내킬 때 오라 가라 하고……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이런 걸 원한 적 없어.”

  그렇지만 허 교수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전처럼 사근사근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그는 다소 권위적이고 딱딱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아버지를 쥐락펴락했다(이런 경우가 처음도 아닌 듯 매서운 겁박과 달콤한 회유에 능란했다). 결국 아버지는 연구에 다시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새끼손가락까지 걸었다―진료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패잔병 같은 얼굴로 택시에 올라타서는 기절하듯 잠들었고, 집에 도착해서도 한동안 거실 소파에 누워 일어나질 못했다. 저녁 식사로 전복죽을 반 그릇 먹고 나서야 기운을 좀 차리더니 아니라고, 역시 항암 따위 하고 싶지 않다고 중얼거렸다. 급기야 당장 병원에 전화해서 모든 예약을 취소하라며―밤 10시였다―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사정하듯이 말했다.

  “쉽게 결정하실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아요. 아무래도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식은 안 돼요. 이제 용단을 내리시고 더는 번복하지 마세요. 누가 뭐라 해도 갈팡질팡하지 마세요. 옆에 있는 사람까지 환장하게 만들지 마시라고요.”

  아버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알겠다고, 다시는 헷갈리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병원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이튿날 허 교수는 연구간호원을 통해 허탈함과 노여움을 전해왔다(“황당” “뒤통수를 맞은” 같은 어휘가 섞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작성하여 보내준 의무기록사본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어쩌면 모든 환자를 떠나보낼 때 그렇게 쓰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사사로운 앙심을 담아 분풀이하듯 써 갈긴 문장들처럼 보였다. 


• 향후 절차


치료 계획 없음. 약물 처방 중단함.

연구 대상 불합격.

앞으로 본원 방문하지 마세요.

OPD F/V(외래 후속 관리): 필요 없음

작성자: 허민호


끝



*


  (여기까지 쓰고 두 달쯤 지났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026년 5월 30일이었다. 죽음은 갑작스러웠지만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예상했다고 해서 죽음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병원에 다니지 않게 된 후로 아버지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눈에 띄게 살이 빠졌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와 시간도 줄어들었다. 오래지 않아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누워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글을 쓸 의지를 내기는커녕 틈틈이 메모조차 남기기 어려웠다. 좀처럼 책상 앞에 앉아서 뭘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겪는 일을 모조리 옮겨 적어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실제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마치 글이란 걸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사람처럼 글을 쓸 수 없었다. 추측건대 나는 어쩌면 무의식중에 메모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기를 기록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그래야 온전히 망각할 수 있을 테니까. 

  글을 쓸 수 없었던 시기에 나는 특정한 주제의 책을 찾아다녔다. 부친이 죽어가는 과정을 쓴 작가의 글을 수소문했다. 나와 같은 시련을 겪어낸 이의 흔적을 애타게 읽고 싶었다. 그것만이 나를 위로할 수 있을 듯했다. 그것만이 나를 다시 쓰게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이 시기를 한 권의 책으로 남긴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았다. 아버지의 쇠락과 임종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 낱낱을 담아낸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제야 나보다 앞서 아버지를 잃었던 이들에게도 나처럼 강렬한 무력감이 엄습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그런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글자도 써 내려가기 어려운, 어두컴컴한 동굴 속을 정처 없이 헤매는 듯한 상태 말이다. 

  장례를 마치고 한 달쯤 지나서야 나는 다시금 책상 앞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글을 이어 쓰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문장을 적어넣기까지는 몇 주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아직도 나의 일부가 동굴 속을 배회하는 듯했으니까. 사위가 불분명해 갈피를 잡기 어려웠으니까. 그럼에도 썼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아버지를 잊고 지내려 노력했다. 항우울제와 수면유도제의 복용량을 더는 늘릴 수 없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는 그뿐이었다. 머릿속에서 아버지를 지워버리는 것. 방문 너머의 아버지를 망각하는 것. 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호스피스 대기자 명단에 아버지의 이름을 올리고 돌아온 저녁이었다. 그날도 나는 방에서 머릿속의 아버지를 밀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잠들기 직전까지 유튜브로 시답잖은 영상이나 줄줄이 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으로도 막을 수 없는 날카로운 고함이 문밖에서 들려왔다. 허둥지둥 나가보니 엄마가 큰 소리로 화를 내며 거실 바닥을 걸레질하고 있었다. 일순 악취가 코끝을 찔렀다. 아버지는 성인용 기저귀를 착용한 채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엄마는 조금 전에 자신이 목격한 장면과 진동하는 구린내의 경위와 남편에 대한 증오를 두서없이 쏟아내며 이렇게는 못 산다고, 정말 못 살겠다고 소리쳤다. 

  나는 충격을 받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거동이 어려워지면서 외출은커녕 화장실 가는 일도 겨우겨우 해내고 있었다(조금이라도 경로를 단축하기 위해 거실 소파에서 지내겠다고 자처했다. 그렇지만 실상은 엄마가 더 이상 아버지와 한 침대를 쓰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도 있었다). 아버지가 화장실에 가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악전고투라는 표현이 절로 떠올랐다. 우선 소파에 바로 누운 자세에서 옆으로 몸을 돌리는 데만 안간힘을 써야 했다. 아버지는 두 손으로 간신히 시트를 짚었고, 오장육부를 쥐어짜듯 신음을 토하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깁스라도 한 듯 뻣뻣해진 두 다리를 옮겨서 거실 바닥을 디딘 후에는 얼마간 심호흡하며 정면만 주시했다. 벼랑 끝에서 몸을 던지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당장에라도 넘어질 것처럼 휘청대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때마다 나는 막 걸음마를 뗀 아기를 지켜보는 심정으로 곁에 서 있었다(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아버지가 도움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 언젠가는 그 애처로운 몸부림마저 불가능해지리라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고꾸라지실 줄이야. 그날도 아버지는 사투를 벌이듯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어렵사리 걸음을 옮기던 중 거실 한복판에서 용변을 보고 말았다. 속옷과 바지를 입은 채로 말이다. 정확히는 몸 안에서 그것들이 밀고 나오는 힘을 더 이상 당신의 의지로 막아내지 못했다. 

  당황한 아버지는 그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고―그럴 수도 없었고―차마 내게 도움을 청하지도 못해서 10분 가까이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기만 했다. 결국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엄마에게 발각되었고, 호되게 야단을 맞았으며, 더러워진 속옷과 바지를 빼앗긴 뒤 강제로 기저귀를 착용하게 되었다(그리고 숨을 거두는 날까지 입게 되었다). 

  그 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수건에 물을 적셔 와 아버지의 야윈 허벅지와 종아리, 발가락 사이에 묻은 배설물을 닦아내는 것뿐이었다. 그동안 아버지는 두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뼈와 가죽만 남은 듯한 아버지의 몸을 조심스레 닦는 동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벌써 염습(殮襲)이 시작된 듯했다. 나는 엄마처럼 그 상황에서 비롯한 감정을 언어화할 수 없었고, 무슨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머릿속이 물에 흠뻑 젖은 솜뭉치처럼 묵직했고, 그 상태는 며칠이나 지속되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항암을 포기했던 건 순전히 내 탓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의사라는 존재를 믿고 싶었던―기대고 싶었던―나는 아버지를 신약 연구에 집어넣기 위해 허 교수와 연구간호원의 심기를 되도록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불쑥 치밀어오르는 의혹과 우려를 무시했다. 유전자분석 결과를 얌전히 기다렸다. 

  그 외에도 내 잘못은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항암에 대한 결정을 번복하지 말라고 다그쳤다. 정체불명의 약제를 과다 복용하고 전열 기구를 사용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다른 병원을, 다른 의사를 찾아보려 하지 않았다. 어느 시점 이후로는 손을 떼고 물러나 있었다. 몸으로는 매일 같이 아버지의 병시중을 들었으나 심적으로는 점점 뒤로 물러서기만 했다. 한 걸음 혹은 두 걸음, 어쩌면 세 걸음 뒤로…… 그래, 나는 지쳐 있었다. 연초에 아버지의 암 소식을 접한 이후로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으니까. 모든 병원 일정에 동행하고, 약을 챙기고, 나날이 황폐해지는 육신을 지켜봐야 했으니까. 단 하루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죽음은 산 사람의 일상에 구멍을 낸다는 말이 떠올랐다. 언제부터인가 내 삶은 구멍투성이였다. 무언가가 계속 빠져나갔다. 

  그러니 나는 불식간에 끝을 바라게 됐다. 아버지도 많이 괴로우실 텐데, 이렇게 살아봐야 사는 것도 아닐 텐데, 이쯤에서 그만…… 이제 그만…….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있었다는 걸 여기에 적어둬야겠다.)


  한참 후에야 나는 많은 수의 환자 가족이 이런 식으로 자책한다는 걸 알았다. 심지어 장례식을 치른 뒤에도 말이다. 이랬다면 어땠을까. 저랬다면 어땠을까. 아버지가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끝까지 반대했다면 어땠을까. 이 약이 아니라 저 약을 복용했다면 어땠을까. 애초에 A 병원이 아니라 B 병원에 갔다면 어땠을까. C 의사가 아니라 D 의사를 예약했다면 어땠을까.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끊임없는 상상과 집착, 그리고 후회.

  이 무렵 내 휴대전화 속 SNS 피드에는 암 관련 정보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하루는 스크롤을 내리다가 국내 모 병원에 중입자로 암을 치료하는 기기가 최초로 도입되었으며, 이미 가동 중이라는 영상을 보았다. 전산화단층촬영기와 유사하게 생긴 치료기 안에 환자가 마취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으면 기계가 온몸을 스캔한 뒤 암세포만을 정밀 겨냥해 중입자를 발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두 번, 3분 정도의 치료를 꾸준히 받으면 개복 수술이나 통증 없이 암세포를 깨끗이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영상에서는 네발 달린 초소형 기계들을 체내에 주입하는 방식이 소개되었다. 작은 거미처럼 생긴 로봇들이 내장 기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종양을 발견하는 즉시 네발로 꽉 끌어안아 특수 이온을 발휘해 암세포의 활력을 정지시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영상들이 화면에 나타날 때마다 홀린 듯이 보았다. 혹여 놓친 건 없는지 반복 재생했다.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댓글 창을 열어보았다. 그곳에는 ‘이런 걸 믿으십니까? 전부 가짜입니다’ ‘제가 겪어봐서 아는데 이 치료는 국소 부위의 암에만 적용 가능합니다. 초기에만 해당하고요’ ‘우리 어머니께서 이 치료를 받으시고 내장에 상처가 생겨 이튿날 아침 피를 토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절대로 받지 마세요’ ‘저는 면역력 관리에 좋다는 황칠뿌리진액을 복용하고 PSA 수치가 90퍼센트 가까이 떨어졌어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면 DM 주세요’ 같은 내용이 가득했다.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 무지와 게으름으로 인해 아버지가 첨단의 의료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에 시달렸다. 이제라도 영상 속 치료를 받는다면 아버지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진위를 알아보곤 펑 하고 터지는 듯한 허무함도 느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서야 나는 이런 식으로 불시에 농락당하는 것이 환자―그리고 환자 가족―의 삶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 줄기 빛의 발견! 그러나 전부 허튼소리로 밝혀짐! 상용화되지 않은 기술!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 그리하여 한풀 꺾이는, 소생 불가능할 정도로 뿌리째 뽑혀버리는 의지. 진한 탈력감의 반복, 반복……. 이렇듯 세상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퍼뜨려 대는 낭설들이 환자와 환자 가족의 내면을 소리 없이 갉아먹는다고 말이다. 


*


  괴로운 와중에도 나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다. 그중 하나가 텔레비전을 같이 보는 일이었다. 종일 거실 소파에서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텔레비전만 보는 아버지에게 나는 그 일이 모종의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텔레비전을 혼자서 보는 것과 누군가와 함께 보는 일은 분명히 다른 경험이니까. 그래서 나는 평소라면 조금도 눈여겨보지 않았을 프로그램들을 아버지 발치에 쪼그려 앉아 말없이 시청했다.

  아버지는 TV조선, JTBC, 채널A의 애청자였다. 그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같이 텔레비전을 시청하다 보니 나는 아버지가 특별한 목적이나 기호 없이 세 개의 채널을 습관적으로 맴돌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가끔은 프로그램이 끝난 뒤 흘러나오는 광고를 하염없이 지켜본다는 것도 말이다. 처음에는 리모컨이 지척에 있음을 잊어버리셨나 싶어 아버지 손에 그것을 쥐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중의 리모컨을 몇 번 움켜쥐었다가 툭 내려놓았을 뿐 주방 세제, 미백 화장품, 공기청정기, 골프웨어, 갱년기 영양제 광고가 잇달아 방영되는 와중에도 채널을 돌리지 않았다. “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나이 든 채로 살기 싫잖아? 미래를 위한 토털 케어, 에스트로업. 당신을 더 사랑하라.” 그래서 나는 그것들도 잠자코 시청했다.

  하루는 근래의 해외 토픽을 다루는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아버지와 함께 보았다. 중년의 남성 진행자는 포르투갈의 유명 축구 선수가 식스팩을 자랑하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공개했다는 둥, 경매 낙찰가 47억 원의 참치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생선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는 둥, 빌보드 1위를 차지한 모 가수가 콘서트를 마친 후 금연 구역에서 흡연을 일삼다가 적발되었다는 둥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보들을 세상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소식인 양 열띤 목소리로 쏟아냈다. 그 호들갑만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는데 토픽 중 하나로 끔찍한 사고를 언급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모 테마파크에서 ‘360 빅 펜듈럼’이라는 놀이기구가 공중에서 회전하던 중 오작동을 일으키며 추락했다는 소식이었다. 탑승객 중 스물세 명이 중경상을 입었는데, 그중 세 명은 안전장치가 풀리면서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고 했다. 당시의 현장을 담은―휴대전화로 촬영한 저화질의―영상이 이어졌고, 아버지와 나는 놀이기구의 원형 회전부가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릴 때 탑승객 두 명이 하늘로 휙 날아가는 모습을―모자이크 처리되긴 했다―목격했다. 맙소사. 저런 사고를 겪은 것만으로 평생의 트라우마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런 순간이 촬영되어 누군가의 휴대전화에 남을 뿐 아니라 지구 반대편 사람들에게까지 구경거리로 전해지다니. 나는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고 더 이상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안색을 살폈는데, 아버지는 심상한 얼굴로 텔레비전을 응시할 뿐이었다. 

  프로그램 중간에 붉은색 자막으로 긴급 속보가 뜨면서 미국이 이란의 소형 공격정 여섯 척을 격침했고, 이란은 호르무즈해협의 선박들을 향해 10여 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와도 아버지는 여전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이에게 가까스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이들과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이들은 과연 어떻게 비칠까. 그에 대한 답을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 같았다.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사건 사고를 예사로이 보아 넘겼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 이어지는 광고를 시청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어느 것도 아버지를 놀라게 하거나 기쁘게 만들지 못했다. 분통을 터뜨리게 하지도, 눈물짓거나 실의에 빠트리지도 못했다. 나는 그제야 아버지가 나와 같이 텔레비전을 보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언제였던가. 그런 식으로 지내다가는 너도 위험해진다고, 가끔은 기분 전환을 하라는 조언에 주말 외출을 한 적이 있었다.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이라는 미술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빛이 무지개색으로 분해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스펙트럼과 통합을 의미하는 신테시스(synthesis)를 결합한 명칭이라 했다. 그렇지만 전시는 70여 명의 작가가 내놓은 작품들을 오직 퀴어라는 맥락으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듯 보였다. 아무래도 신테시스는 구현되지 못한 듯했고, 그것은 큐레이터의 소망이나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던 중 인상 깊은 순간을 마주했다. 평소에는 경비실이나 창고로 쓰일 법한 공간에 구현해놓은 〈이웃, 사촌〉이라는 작품을 관람할 때였다. 활짝 열어놓은 철제문부터 안쪽의 모든 벽면, 창문에 이르기까지 제각기 다른 크기로 인화된 사진들이 한가득 붙어 있었다. 이미지들은 특정한 의도나 순서 없이 일부러 무분별하게 배치된 듯 보였다. 해설을 읽어보니 개인이 이루는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관계를 원가족, 대안가족이라는 이분법 없이 이웃사촌이라는 개념으로 재구성하고 싶었다고 쓰여 있었다. 실제로 사진들은 긴 세월에 걸쳐 작가가 촬영한 혈연가족, 연인, 반려동물, 친구, 활동가들의 면면을 두루 담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살피다가 하나의 장면에 오래 머물렀다. 누가 봐도 전시된 사진 중 가장 이질적인 것으로, 작가의 부모로 추정되는 노부부가 정면으로 찍힌 이미지였다. 그들은 어느 무덤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검회색 대리석 묘비에 음각으로 새겨진 함자와 생몰 연도로 짐작건대 작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묻힌 자리인 듯했다. 노부부는 그곳에서 각자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뭔가를 나직이 읊조리고 있었다. 묘비에 집사라는 칭호도 새겨진 것으로 보아 성경 구절이라도 외는 듯했다. 

  그 모습.

  조부모의 묘지를 찾은 부모를 마치 무덤의 관점에서 촬영한 듯한 게이 작가의 사진이 내게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유년 시절 강제로 끌려다녔던 성묘의 순간들이―내 안에 남아 있는 줄도 몰랐던 이미지들이―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그것들이 눈앞의 사진 위로 고스란히 겹치는 듯했다. 찰나에 불과했으나 나는 벌초에 끌려온 어린아이가, 부모와 함께 묘소를 방문한 게이 작가가, 죽은 조부모가, 무덤이 될 수 있었다. 그 순간 신테시스라는 개념은 이런 식으로 구현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우리가 잠시나마 한데 포개질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어이없고 반가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보름 정도 지났을 때 호스피스에서 연락이 왔다. 회사에서 미팅을 진행하느라 전화를 놓쳤는데 마침내 빈자리가 생겼다는 소식이 분명했다. 그제야 나는 장례식과 이후의 절차들을 챙기느라 호스피스에 연락하기를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연결은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전화가 오면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드디어 자리가 났군요. 그렇지만 제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네…… 오래 못 버티셨죠. 먼저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런데 내가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내 입으로, 목소리로, 어떻게 그런 말을…….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벌써 2주나 지났는데,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버지를 한 번 더 돌아가시게 하는 일인 듯 여겨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호스피스에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나도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볕 좋은 어느 날이었다. 부엌 식탁 앞에 앉아서 혼자 아침 식사를 하는데 등 뒤로 누군가 지나가는 듯한 기척이 났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인근 지하철역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엄마는 이미 출근한 뒤였고,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서 가늘게 코를 골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인기척일 수 없었다. 착각이겠지. 그런데 식탁 건너편에 놓인 냉장고 문에―유광 코팅이 되어 있어 흐릿하게나마 맞은편을 비추는 면에―거실을 홱 가로지르는 검은색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져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볼 수밖에 없었고, 허무맹랑하다고 여기면서도 저승사자가 찾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어쩌지 못했다. 

  오늘이라고?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심지어 불공평하다고까지 여겼다. 그즈음 아버지는 극도로 쇠약해진 채 호스피스 입원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직 제힘으로 유동식을 섭취할 정도는 되었다.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발음이 어눌해지고 눈동자가 연푸른색으로 변했으나 컨디션이 양호할 땐 기저귀를 갈아주는 엄마와 언성을 높여가며 다툴 정도로 기력이 좋았다.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석 달은 더 사시겠네, 아니, 반년은 거뜬하겠어,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이란 사건이 늘 예측을 빗나가는 식으로 찾아온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때 누군가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내 또래의 남자가 허, 하고 짧게 조소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코골이만 낮게 되풀이될 뿐 달라진 건 없었다. 아마도 열어둔 창문에서 흘러든 소리일 거라 여기며 나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떨쳐냈다. 그렇지만 방금 들은 것이 도통 산 사람의 목소리 같지 않다는 기분이―거의 확신이―들었으므로 출근 준비하는 내내 아버지가 오늘 운명하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돌이켜보면 이 무렵의 나는 집을 나설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윽고 나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평소와 다름없이 아버지에게 저 가요, 라고 인사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자다가도 두 눈을 스르르 뜨고 한 손을 들어 올리거나 바람 빠진 듯한 음성으로 어, 하면서 나를 배웅하곤 했다. 다행히 그날도 아버지는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나는 그 순간 아버지가 우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를 떠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죽음이란 친애하는 이들과 한데 모인 자리에서 어느 순간 홀연히 일어나 침묵과 무(無)의 땅으로 뚜벅뚜벅 향하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채비를 마치고 차례로 떠나가는 뒷모습을 혼자 남아 끝까지 지켜보는 일 같다고 말이다. 

  그날 나는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고, 인근 아파트 단지의 외곽을 따라 걸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동안 내 키만 한 울타리를 훌쩍 넘어 자라난 장미 덩굴들을 일별했다. 가시 돋은 줄기와 청청한 잎들 사이로 탐스럽게 만개한 진홍색 꽃이 가득했다. 어느덧 5월 중순이었다. 저승사자 따위는 얼씬도 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과 싱그러운 향기가 넘실대는 출근길이었다. 그곳을 지나치는 동안 내게는 더 붉어질 수도, 더 만발할 수도 없을 만큼 활짝 핀 장미들이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못해 생명 그 자체로 보였다. 한편에서는 목숨이 위태로이 꺼져가는데 다른 곳에서는 삶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구나 싶었다. 그 간극이 고작 서른 걸음 남짓이라는 사실에 출근하는 내내 마음이 서걱거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생일에 대해서도 말해야겠다. 마지막 생일 말이다. 

  토요일 오전이었다. 그날 나는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 이유로 엄마와 악을 써가며 다투었다. 바락바락 대들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끝내 가방을 꾸려 집을 나섰다. 근처 카페로 피신하여 한참 밀려 있던 회사 업무나 처리할 작정이었다. 

  그 무렵 엄마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병간호로 인해 매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휴지 조각만 봐도―“대체 나보고 어디까지 치우라는 거야?”―다짜고짜 소리를 질러댔다. 나 역시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던 차여서 엄마의 날 선 태도에 번번이 감정적으로 대응했다(“그럼 내가 치워야겠네? 나중에는 엄마가 싼 똥도 내가 치워야겠네?”). 그러니 그날 엄마와의 언쟁이 다소 격렬했던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내가 씩씩거리며 가방을 메고 현관으로 향하자 거실 소파에 누운 아버지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갈라지는 음성으로 겨우 말했다.

  “가지 마라.”

  오후에 아버지의 지인들이 찾아와 조촐하게나마 생일 파티를 해주기로 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그것도 탐탁지 않았다. 생일 파티라니? 정작 당사자는 한 입도 먹지 못할 케이크를 눈앞에 들이밀며 촛불을 끄라고 권하는 일이, 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박수 치며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는 일이, 애써 웃음 짓고 쾌활한 척 구는 일이 상상만으로도 곤혹스러웠다. 더구나 그즈음의 엄마와 나는 사람들이 문병하겠다며 집으로 찾아오는 일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때마다 집 안을 구석구석 대청소해야 했고―악취가 제일 문제였다―아버지의 몰골을 어떻게든 괜찮아 보이도록 꾸며야 했으니까. 그 짓을 하는 데만 서너 시간 중노동을 해야 했는데, 사람들은 무시로 잠드는 아버지와 5분 이상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엄마와 나는 그들의 방문을 막을 명분이 없어서 괴로웠다. 생전 연락도 없다가 난데없이 찾아와 눈물이나 한바탕 쏟고 가는 이들을 뒤에서 경멸하다시피 했다(“왔으면 걸레나 좀 빨아주든가” “네 아빠 목욕이나 한번 시켜주든가” “도움은커녕 일거리만 만드네, 진짜”). 그런 이유로도 나는 집을 떠나 있고 싶었다(아니, 나는 그냥 다 싫었던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아버지와 관련된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아주 멀리멀리).

  “가지 마.”

  아버지가 한 번 더 만류했을 때 나는 주저하는 목소리로―그렇지만 분명하게 반항심을 담아―말했다.

  “저도 할 일이 있어요.”

  나는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한순간도 머뭇거리거나 뒤돌아보지 않고 동네의 한적한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정말로 일을 했다. 다른 생각은―아버지와 생일 파티, 탈진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엄마, 죽음,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은―조금도 하지 않고 한나절 내내 그랬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다. 저도 할 일이 있어요, 라니? 대체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저물녘 집으로 돌아와 보니 현관문 옆에 재활용 쓰레기로 내놓은 빈 케이크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반으로 접힌 고깔모자와 타다 남은 초가 든 봉투도 함께였다. 예정대로 아버지의 생일 파티가 치러진 듯했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현관에 들어섰는데 거실 소파 위에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타이밍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서둘러 내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방문을 열자마자 내 침대에 누워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간만에 외출복 차림이었다. 가족끼리 외식하러 나갈 때 즐겨 입던 흰색 셔츠와 청바지, 가죽 벨트를 맨 모습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아버지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책상 앞으로 걸어가―아버지를 등진 채―가방을 풀기 시작했다. 노트북과 텀블러를 꺼내놓았고 카디건을 집어 들어서는 의자에 걸쳐두었다. 그때 아버지가 등 뒤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잘 왔어.”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별안간 콧등이 시큰해져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생일을 망쳐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가까스로 몸을 돌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사이 아버지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가늘게 숨을 들이쉬고 뱉으며 혼곤한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마치 내가 뒤늦게 도착한 마지막 생일 선물이고, 그것을 받아 비로소 편안해진 듯한 얼굴로. 나는 조용히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가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잘 왔어. 그 한마디를 잊지 못할 것 같았다.


*


  오래지 않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러니까 평소처럼 거실 소파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가 이렇다 할 기미조차 없이 생을 마감했을 때 나는 건넛방에 있었다. 토요일이었고, 오후 2시쯤으로 기억한다. 

  그날 나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책을 읽다가 침대 위에서 까무룩 잠들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야 깨어났고 아버지를 살펴보러 거실로 나갔다(두 시간마다 기저귀를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멈춰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코 고는 소리도, 호흡하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입을 살짝 벌린 채 숨이 멎어 있었다. 

  나는 당혹하여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버지의 코 밑에 집게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도 믿기지 않아 가슴팍에―살집이 하나도 없어 흉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한쪽 귀를 얹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정지해 있었고,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엉거주춤 서서 그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휴대전화를 찾으러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화장실로 향했고 소변을 보면서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라고 되뇌었다(다시 생각해도 왜 화장실에 가서 오줌부터 누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버지에게 돌아가 한 번 더 호흡과 심장 박동을 확인했다. 그리고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경찰에 신고했다. 외출한 엄마에게도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다.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아버지의 두 눈을 감겨드렸다. 한동안 눈꺼풀을 지그시 누르고 있어야 했다. 몇 번을 시도해도 입은 닫히지 않았다. 9분 후 덩치 좋은 경찰관 네 명이 헐레벌떡 집에 도착했다. 들것과 제세동기를 든 구급대원들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현관에 들어섰다. 한 구급대원이 아버지의 상태를 빠르게 살피더니 내게 심폐소생술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원하지 않는다고, 가족 모두가 이미 합의한 사항이라고 답했다. 얼마 후 안경을 쓴, 호리호리한 체형의 형사가 도착했고 그는 내게 아버지가 돌아가실 즈음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간의 병세를 조목조목 따지더니 병원 서류를 보여달라고 하면서 나를 심문했다. 과학수사대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대로 비닐 방호복과 마스크, 장갑을 낀 차림새로 나타났다. 그들은 내게 동의를 구한 뒤 아버지의 옷을 전부 가위로 잘라냈다. 벌거벗은 몸을 샅샅이 검사했고, 그중 한 명은 플래시를 터뜨리며 집 안을 여기저기 촬영했다. 가장 나중에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검안의는 과학수사대가 아버지 몸에서 특별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자 시신을 살펴보지도 않은 채 사망진단서를 써 주겠다고 했다. 장례식장으로 원본 문서를 10부 보내줄 테니 비용부터 치르라며 계좌번호가 적힌 명함을 내밀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검안의에게 35만 원을 송금했다.

  그러고 나서는 모두 떠났다.

  북적이던 집이 한순간에 텅 빈 듯했다. 나는 고요해진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들이 열어두고 간 현관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흰색 천에 덮인 아버지 곁으로 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형사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모든 상황을 조리 있게 설명하는 나를 예의 주시했다. 나는 형사가 그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려왔다는 걸 아는 듯했다. 나 같은 인간을 수없이 봐온 것 같았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도 할 말이 없을 듯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지? 천벌이 무섭지도 않았나!” 두 손을 등 뒤로 꺾이고 수갑이 채워져도 마땅한 기분이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중에 알아보니 형사가 나를 심문했던 이유는 자택 사망이라는 정황 탓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주삿바늘에 찔리고 콧줄에 매여 있어야만 정상적인 죽음이라 여겼다. 본인이 살던 집에서 잠들 듯 영면에 이르는 경우는 타살 의혹을 전제로 한 수사와 검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심문은 절차에 불과했다.)


  시신과 함께 장례식장에 도착한 이후로는 끝없는 선택과 지불뿐이었다. 영정 사진과 상복, 꽃 장식, 빈소 용품, 모바일 부고장, 조문객을 위한 밥과 국, 반찬, 음료수, 술, 수의, 관, 장의차, 화장터, 유골함, 봉안당 선정에 이르기까지 온갖 세부 사항과 견적을 끊임없이 논하고 결정해야 했다. 매 순간 기막혀하면서도―“관 속에 생화 장식을 추가하는 데 50만 원이라고요?” “무슨 유골함에 금칠을 하고 300만 원을 받아요?”―군말 없이 값을 치러야 했다. 음식을 서빙해준 도우미와 장례지도사, 장의차 운전사, 운구요원, 봉안당까지 따라온 친척들에게 찔러줄 현금 봉투까지 따로 마련해야 했다(누구에게 얼마를 어떤 식으로 줄지도 상의해야 했다). 

  상을 치르고 며칠 지나서야 엄마와 나는 장례 절차에 얼마를 쏟아부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름 합리적으로 굴었다고 여겼음에도 총지출이 2천만 원에 가까웠다.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인 영수증들을 추리면서 나는 이게 다 뭐였을까, 하고 생각했다. 사람이 병에 걸려서 죽어갈 때뿐 아니라 죽고 난 후에도 사방에서 주머니를 털어가는구나 싶었다. 돈이 아깝다기보다 아버지가 정말로 이런 것을 바랐을까, 하고 자문하게 되었다. 과연 이것이 아버지가 원하는 이별 방식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이런 절차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장례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치러졌으면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죽음도 내가 바라는 형태로 겪어낼 수 있었으면 싶었다.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척 어른들이 내게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어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너는 울지도 않니.” “결혼을 해야지. 누구 만나는 여자 없어?” “너는 왜 설날이나 추석에 놀러 오지를 않냐. 무슨 불만 있냐.” “앞으로 어머니한테 잘해야 해.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응?” “작가라며? 책도 냈다며? 어디서 팔아?” “머리카락 좀 잘라라. 남자가 이게 뭐니.” “어릴 때랑 하는 짓이 똑같네. 계집애같이 구는 거 말이야.” “이럴 때 며느리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네 아버지도 그걸 바라셨을 거야.”

  나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네,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적당히 웃어넘겼다. 다들 못 본 사이―적어도 18년 이상―놀랄 만큼 노쇠한 모습이었고, 놀랄 만큼 한결같은 태도로 나를 대해서였다. 그들의 눈에 나는 아직도 어린애였다(서른여덟 살 먹은 어린애). 제 앞가림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핏덩이, 철부지, 애송이, 코흘리개, 애새끼……. 나는 훗날 엄마의 장례식을 치를 때 그들 가운데 몇 명이나 살아 있을까 생각했다. 생전에 몇 명이나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때도 나를 이렇게 어린애처럼 대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네, 네, 하면서 바보처럼 웃어넘기는 와중에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후로 얼마나 많은 서류에 아버지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었는지 모르겠다. 공적으로 아버지를 대행하여 아버지란 존재를 지우는 일이었다. 사망 신고를 하는 과정에서는 주민센터 직원의 권유로 아버지의 금융 거래 내역을 전부 확인해보기로 했다. 덕분에 나는 3주일에 걸쳐 근로복지공단, 금융투자협회, 예금보험공사, 저축은행중앙회, 여신금융협회, 한국예탁결제원, 생명보험협회, 대한지방행정공제회,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과학기술공제회, 삼림조합, 군인공제회에 이르기까지 별별 기관으로부터 아버지의 상속 재산이 한 푼도 없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아야 했다. 

  법무사는 집의 소유권을 엄마 앞으로 돌리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기본증명서와 말소자 주민등록초본, 친양자 입양관계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 제적 등본까지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도 몰랐던 사실이 밝혀지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가족 모르게 진 빚도 없었고, 따로 모아놓은 재산도 없었다. 생전에 딴살림을 차린 적도 없었고, 숨겨놓은 자식은커녕 배다른 형제도 없었으며, 부모가 셋이거나 넷이지도 않았다. 나는 그토록 많은 공적 서류를 통해 아버지의 출생신고일부터 평생에 걸친 전입 이력, 그동안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고종사촌들의 이름과 혼인 여부까지 알 수 있었지만 아버지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새로이 알아내지 못했다. 서류 어디에도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닌 듯한 기록은, 예상치 못한 비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죽어서도 내가 알던 아버지일 뿐이었다.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서글픔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거실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엄마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이제는 거리에서 아버지 또래의 남자가 힘없이 걸어 다니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날 것 같다고 말이다. 사나흘에 한 번은 꼭 그런 노인을 목격한다면서, 세상천지에 그런 이들이 널린 것만 같다고 했다. 

  나는 엄마와 비슷한 일을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 겪었다. 정확히는 아버지가 죽어가던 시기에 경험했다(사실 그런 노인들은 도처에 늘 있었는데 그동안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회색의 추레한 차림으로 지팡이를―혹은 등산 스틱이나 보행 보조기를―짚고 다녔다. 비쩍 마른 몸으로 걷는 건지 제자리에서 바들바들 떠는 건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좁은 보폭으로 힘겹게 움직였다. 그때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행인들의 무관심 속에서 그들은 항상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더딘 속도였지만 필사적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묻고 싶을 정도였는데, 내가 그런 의문을 품거나 말거나 노인들은 등이 동그랗게 젖을 정도로 안간힘을 쓰며 걸었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사망 신고가 수리된 후에야 나는 남자들을 만나러 다녔다. 성욕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무기력했던 시기가 마침내 종료된 듯했다. 그렇지만 위안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이 형편없었고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일정한 패턴의 체위를 고집하거나 자기만 만족스러우면 그만이라는 듯 굴었다. 무엇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다 좋다고 하면서 오직 삽입과 왕복 운동에만 열성을 보였다. 섹스가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듯했다. 

  그럴 때면 나는 천장을 보는 자세로 누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내 위에서 헐떡이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시간을 보냈다. 암순응이 된 눈으로 천장의 벽지 무늬를 살피기도 했다. 그러다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보고 계세요? 나도 모르게 그랬다. 다 보고 계시냐고요.


  한동안은 회사와 집만 오가며 지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던 중 조문을 와주었던 이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감사 인사를 전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초여름의 어느 주말이었다. 그날 나는 오직 의무감으로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하필이면 약속 장소가 영등포의 타임스퀘어였다. 전철에서 내려 길고도 혼잡한 지하 통로를 걷는 동안 나는 수백 명의 인파를 헤치며 나아갔다. 그 와중에 어깨를 부딪치거나 신발의 앞코를 짓밟히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이와 뒤얽히는 게 오랜만이었는데, 다들 일말의 걱정이나 근심조차 없이 생기 넘쳐 보이는 모습이 놀랍기만 했다. 

  타임스퀘어에 도착하자 환한 조명과 반질반질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 색색의 간판, 진열장에 가득 채워진 신발과 옷, 가방, 귀금속 따위가 차례로 보였다. 사방에서 뭔가를 굽고 튀기는 냄새, 웅성거림, 쾌적한 실내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에어컨 바람도 밀려왔다. 서로 장난을 치면서 웃는 여학생들, 한가로이 유아차를 밀고 다니는 부부, 계단참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다가 갑작스레 괴성을 지르는 남자아이의 모습까지. 그제야 나는 산 자들의 세계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로 다시 돌아왔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눈앞의 세계가 이전에 내가 알던 것과 동일하게 여겨지진 않았다. 뭐라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달랐고, 그것은 내가 변했기 때문인 듯했다. 


*


  며칠 전에는 귀가하여 저녁 식사를 하는데 엄마가 고추를 먹어보라며 접시를 내밀었다. 아버지가 심어놓은 고추가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다고, 조금 전에 실해 보이는 몇 개를 따 왔다고 했다.

  “아빠가 이걸 어디에 심었는데?”

  “옥상 화단에. 거기 상추도 있고 호박도 있어.”

  나는 입안에 든 밥을 오물거리면서 아버지가 언제부터 농사를 지었느냐고 물었다.

  “농사는 무슨. 순전히 재미로 씨 뿌려놓은 거야. 몇 년 전부터 그랬어.”

  그제야 나는 빌라 옥상에 세탁한 이불을 널러 갈 때마다 본 풍경을 떠올렸다. 진초록색 방수 페인트가 칠해진 바닥 한구석에 네 평 남짓한 면적의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누가 관리하는지 따위를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식사를 마친 후 엄마와 함께 옥상으로 올라가 보니 화단이라기보다 텃밭처럼 생긴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한가운데 우뚝 선 감나무 주위로 고추와 호박, 상추, 이름 모를 식물들이 잔뜩 우거져 있었다. 엄마는 넓적한 호박잎들 사이로 손을 쑥 집어넣더니 내 주먹만 한 열매를 들어 올렸다. 

  “이것 좀 봐라.”

  “오, 크다.”

  “조금만 더 커지면 호박무침 해 먹자.”

  나는 허리께까지 자라난 상추들을 내려다보면서, 길게 솟아오른 줄기가 수십 갈래로 나뉘며 틔워낸 꽃망울들을 가리키면서 이게 정말로 내가 아는 상추가 맞느냐고 물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픽 웃었다. 

  “네 아빠가 없으니까 제때 수확할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웃자란 거야. 내버려 둬. 어디까지 자라나 보게.”

  “엄마는 상추에서 꽃 핀 거 본 적 있어?”

  나는 작디작은 노란빛 꽃봉오리에 코를 가져다 대며 물었다.

  “향기도 나려나?”

  “글쎄.”

  엄마는 고개를 젖혀 감나무의 우듬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문제는 저거야. 무슨 병이 들었는지 죽어가고 있어.”

  그러고 보니 감나무 둥치뿐 아니라 가지에도 회청색 이끼 같은 것이 잔뜩 끼어 있었다. 잎사귀는 대부분 연갈색으로 말라붙은 채였고, 몇몇에는 검은색 반점도 보였다. 

  “약이라도 좀 치지.”

  “그러게.”

  엄마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동안은 네 아빠가 알아서 했는데……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솔직히 하고 싶지도 않고.”

  엄마는 앞으로 화단을 관리할 사람이 없으니 올해 자라난 작물들만 수확한 뒤 전부 죽게 내버려두자고 했다. 다 죽으면 그때 사람을 불러서 감나무를 베고 땅을 아예 갈아엎자고. 그 말이 어쩐지 조금 선득하게 들려서 나는 그러자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 화단을 맡아보겠다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나 역시 엄마처럼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솔직히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다만 노란빛으로 움튼 상추의 꽃망울들이 활짝 핀 모습을 보고 싶기는 했다. 그런 건 한 번도 본 적 없었으니까. 

  “올라온 김에 물이라도 좀 줘라.”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고무호스를 가져다가 수도꼭지에 연결했다. 물을 틀자 쉭쉭거리는 소리와 함께 호스가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나는 그 끝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눌러서 물줄기를 사방으로 뻗어 올렸다. 

  “재밌어?”

  엄마가 넌지시 물었을 때 나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요즘 비도 안 오는데, 네가 가끔 물 줄래?”

  그 질문에도 나는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주고 싶을 때만 주던가.”

  엄마는 그렇게 말한 뒤 먼저 옥상을 떠났다. 나는 화단 구석구석까지 물줄기를 쏘아 올렸다. 수분을 머금고 조금씩 생기를 되찾아가는 이파리들을 보면서, 검게 젖어든 흙바닥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면서 내가 언제까지 이 땅에 물을 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언젠가는 주지 않겠지. 옥상에 올라와 보지도 않겠지. 화단의 식물들은 모두 죽고 말 것이다. 결국 감나무는 베이고 땅은 갈아엎어질 것이다. 새로운 땅에는 아무도 씨를 뿌리지 않을 것이다. 

  그게 뭐 나쁜가.

  나는 수도꼭지를 잠근 뒤 호스를 빼내어 동그랗게 감기 시작했다. 한 바퀴 감을 때마다 호스에 남아 있던 물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사이 해가 뒷산으로 넘어가면서 주변 풍경은 어슴푸레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사물들의 윤곽이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나는 옷자락의 물기를 털어내며 옥상 문으로 향했다. 문손잡이를 쥔 채 망설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이 불자 감나무의 마른 잎들이 맥없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자디잔 꽃봉오리들이 어지러이 일렁이다가 멈췄다. 나는 고개를 젖혀 거뭇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안부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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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선우
  • 201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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