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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자의 기록

  • 작성일 2026-10-01

  공유자의 기록


이서수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가 나를 데려간 곳은 엉뚱하게도 낡은 정자 앞이었다. 아버지는 육모정이 있는 그 땅을 세 조각으로 잘라 친구들과 나누어 가졌던 사실을 내게 처음 알려주었다. 사다리꼴 모양의 땅 둘레에 소나무와 중국 단풍나무, 벚나무가 띄엄띄엄 심겨 있었다. 파란 셔츠를 입은 아이가 정자 마루 끄트머리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며 발끝으로 축구공을 굴렸다. 그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여 부근에 사는 아이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 사람이 삼분의 일씩 갖고 있어. 그러니까 이 땅의 삼분의 일이 네 몫이라고.

  아버지에게 땅이 있었는지도 몰랐기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내게 증여할 생각이라는 말이 더욱 놀라웠다. 아버지가 다른 가정을 만들면서 우리의 관계는 소원해진 지 오래였다. 한편으론 번듯한 건물이 아니라 낡은 정자가 지어진 땅을 물려받게 된 사실이 약간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자 앞은 너른 공터였고 지도 앱을 통해 확인한 주변엔 초등학교와 파출소, 보습학원과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정자를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지으면 가치가 얼마나 오를지 궁금했다.

  정자는 저대로 내버려 둬. 그건 지켜.

  아버지가 내 속내를 읽은 듯이 말했다. 나는 미약하게 항의했다. 

  땅을 이렇게 놀리는 사람이 어딨어?

  놀리는 게 아니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잠시 말이 없던 아버지가 입을 뗐다.

  올해 우리가 자식들에게 땅을 증여하기로 다 같이 합의를 봤어.

  왜 그런 결심들을 하셨는데?

  그냥 때가 된 거지. 

  상념에 잠긴 표정을 짓던 아버지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하더니 갑자기 일이 생겨 빨리 돌아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땅에 대한 설명이나 해명이 더는 없었다. 나는 의구심을 삼키고 정자와 나무를 한 프레임 안에 담아 사진을 찍었다. 그러곤 어색함을 적당히 감추며 아버지와 정자 앞에서 헤어졌다. 해마다 한두 번씩 오가던 안부 연락마저 뜸해지던 때였기에 서울로 함께 돌아갈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생전에 재산을 미리 처분하려는 아버지의 태도가 못내 마음에 걸렸던 나는 결국 한 통의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 혹시 어디 아파?

  ―건강해.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분명 건강했던 것 같고, 나는 언젠가 그 땅에 대해 아버지와 길게 얘기할 기회가 다시 있을 줄 알았다. 3년이 훌쩍 흐르고 겨울 산행을 나선 아버지가 실족사로 세상을 뜰 줄은 까맣게 모르고서. 

 

*


  부고장엔 그들이 아버지의 자식으로 되어 있었다. 내 이름이 없는 온라인 부고장을 들여다보다 장례식에 가지 않을 결심을 세웠다. 그러곤 동네 성당으로 가 나름의 작별 인사를 했다. 자식에게 지은 죄가 있긴 하지만 좋은 곳으로 가시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빌었다.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의 안식을 위해 켜둔 초를 바라보다 아버지의 봉헌초도 마련해 불을 밝혀 두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친족의 도리로 그 정도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새 초가 보이지 않아 나는 스스로 초가 되어 아버지 생의 일면을 조용히 밝혔다. 악연인지 인연인지 도통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강소정입니다. 

  상대는 내가 증여받은 땅에 대해 의논할 게 있노라고 말했다. 강소정은 공유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다른 공유자인 성우현과 함께 내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만나 땅에 얽힌 갈등을 풀 생각이라면서 나를 긴히 불러냈다. 마치 장례식에 참석할 핑계만 찾고 있던 사람처럼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새로운 유형의 가족이 많아졌어요. 

  내 상황을 의식한 듯 강소정이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하나가 붕괴되고 다른 하나가 생겼죠. 

  내 말에 강소정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성우현은 종이컵을 구기며 잠시 딴청을 피웠다. 우리는 사십 대 중반으로 나이가 서로 비슷하고 약지에 반지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땅이 말이죠, 문제가 좀 있습니다. 

  성우현이 먼저 본론을 꺼내며 입을 뗐다. 그러자 강소정이 탁자를 살짝 내리치며 말했다. 

  그쪽이 우릴 먼저 속였잖아요. 

  강소정 씨도 우릴 속인 건 마찬가지잖아요. 

  그들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든 누구도 속이지 않은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요청하자 두 사람은 서로의 잘못을 앞다투어 폭로했다. 성우현은 노점상에게 땅을 빌려주고 우리 몰래 임대료를 받았고, 강소정은 정자 아래를 파헤쳐 기둥이 기울어지게 만들어놨다.

  정자가 기울어졌다고요? 

  아버지와 그 마을에 간 지 한참이나 지났기에 변화가 있었더라도 몰랐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저들은 그 땅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했구나. 나는 그간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았는데. 뒤미처 자괴감이 조금 밀려왔다. 증여세는 면제받았으나 2백만 원이 안 되는 취득세는 내야만 했고, 절차를 마친 뒤 권리를 획득하고 나서도 사용 방식은 골몰하지 않았다. 지분이 나뉘어 있는 데다 아버지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땅을 개발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두라던 당부가. 이어지는 그들의 얘기를 더 들어보았더니 강소정의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고, 성우현의 아버지는 투병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아버지들 대신 자식들이 조문을 온 거였다. 나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다 성우현에게 물었다. 

  임대료를 얼마나 받았어요? 

  남의 잘못을 고자질할 때와는 다르게 성우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연이어 강소정에게 물었다. 도대체 정자 밑을 왜 파헤친 거냐고. 그러자 뜬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래전 자신의 증조모가 정자 아래에 뭔가를 묻었다는 것이다. 

  뭐를 묻었는데요? 

  그건 알려줄 수 없다고 강소정은 잘라 말했다. 그러나 집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값진 보물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토막토막 이어진 모호한 말로 그런 의미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무엇이 묻혔는지 자세히 밝히면 우리가 훔쳐 갈까 봐 경계하는 것 같았다. 부자들의 비밀이란 참으로 독특하구나. 놀란 표정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한 끝에 입을 열었다. 

  성우현 씨는 임대료를 얼마나 받았는지 소상히 밝히고 우리에게 임대 수익을 배분해주세요. 그러면 그간의 잘못에 대해선 묻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강소정 씨는 정자가 기울어져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으니…….

  강소정이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잘랐다. 

  기둥만 살짝 기울어졌어요. 그 동네 주민들은 여전히 잘 쓰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오던데 그대로 방치해 두면 위험하지 않겠어요?

  제 잘못만은 아니에요. 낡은 걸 보수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뒀잖아요.

  보수 비용은 누가 냅니까. 성우현이 딴지를 걸었다. 셋이 나눠 내면 된다고 내가 답하자 두 사람은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좀 힘든 상황이에요. 오죽했으면 집안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말만 믿고 땅을 팠겠어요?

  붕어빵 팔아서 얼마나 남겠습니까. 공공근로도 탈락하고 어려운 형편이라고 해서 빌려드린 거예요. 임대료 그거 몇 푼 안 돼요. 

  두 사람은 사뭇 당당한 자세로 자신들을 변호했다. 나는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나 역시 여유가 부족하긴 마찬가지였으니까. 대학 선배가 창업한 반려동물 장례 업체에서 일한 지 올해로 3년째였다. 어떤 죽음이든 평일만 골라서 발생하진 않기에 적은 연봉을 받으면서 주말에도 일했다. 부족한 나머지는 일에 대한 보람과 자부심으로 채우면서. 그럼에도 어디서든 헛똑똑이로 보이지 않으려 애써왔고. 나는 작심하고 말했다. 

  그 땅에 대한 건 뭐든 함께 의논한 끝에 결정해야죠. 그게 당연하지 않아요? 

  두 사람은 각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강소정의 그늘진 얼굴을 살피다 정자 밑에 보물을 묻었다는 말의 진위가 뒤늦게 궁금해졌다. 그토록 소중한 걸 무슨 이유로 금고 깊숙한 곳이 아닌 공지에 묻는단 말인가.

  그건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강소정이 증조모 얘기를 더듬더듬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의구심을 드러내자 마지못해 입을 여는 듯했다. 강소정의 말에 의하면 당시엔 정자가 아니라 증조모의 집이 지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가족 모르게 마당에 보물 상자를 묻었다. 그러다 해방 직후 큰 오해를 사는 바람에 좌익 세력에게 집을 빼앗겼고, 충격으로 정신을 놓아버려 보물을 묻은 사실을 가맣게 잊고 말았다. 그 뒤로 손바뀜을 여러 번 겪은 집은 다양한 건물로 변모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정자로 바뀌었다. 훗날 증조모가 남긴 기록장을 발견하며 보물의 존재를 알게 된 강소정의 아버지가 친구들과 함께 그 땅을 샀다.

  얘기를 다 듣고 나서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강소정의 아버지는 왜 진즉에 보물 상자를 찾아가지 않았을까. 땅을 사자마자 그것부터 되찾았어야지.

  그게 사실…… 파봤지만 없더래요.

  나와 성우현의 얼굴이 비슷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강소정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자 밑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먼저 확인한 걸 나중에 가난으로 절박해진 딸이 재차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러느라 오랜 역사를 견디며 위태해진 정자의 축을 건드려 결국 기울어지게 만들었다는 결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소주를 따서 종이컵에 한가득 따랐다. 그제야 가족이라 말할 수도 없는 그저 친족일 뿐인 사람의 장례식장에서 긴 시간 체류하고 있다는 자각이 밀려왔다. 소주를 한 번에 둘러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못 먹는 술이긴 했으나 너무할 만큼 입안이 썼다. 

  공동 소유의 땅에 보물이 묻혀 있다면 나눠 가져야 옳지 않나?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택시에 올라타고 나서야 뒤늦게 그런 의문이 들었다.

 

*


  ―성우현입니다. 보내주신 조의금 잘 받았습니다. 알려드릴 게 있어서요. 지난번에 강소정 씨가 말 안 한 게 있어요. 강소정 씨의 증조모가 친일파였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알려주셨어요. 그러니까 보물 상자가 있더라도 친일 행각으로 모았을 게 틀림없죠. 당연히 강소정 씨 집안으로 가면 안 되는 재산입니다.

  ―국고로 환수되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그건 아니고, 기울어진 정자를 보수하는 데 써야 한다고요. 마을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잖아요.

  ―강소정 씨가 동의하실까요?

  ―그 사람한테 뭘 기대합니까. 우리끼리 해결하죠.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붕어빵 노점 임대료는 언제 정산해주실 건가요? 

   

  ―성우현 씨, 이틀이나 지났는데 답장이 없으시네요. 

   

  ―성우현 씨, 제 전화를 계속 피하시는군요. 

 

*  

 


  이즈미? 이즈미였나? 

  오른편에 앉아 있던 노인이 큰소리로 물었다. 가느다란 청색 비녀를 쪽머리에 단단히 꽂은 노인의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정자 마루에 앉아 있는 사람은 우리뿐이니 아무래도 혼잣말인 듯싶었다. 아니면 그의 눈에만 보이는 대상에게 묻는 말인지도. 그런 일도 가능하다는 걸 이젠 안다. 

  한 달 전 어느 고객이 회사로 불쑥 찾아왔다. 절차에 따라 반려묘의 장례를 치른 지 보름이 지나서였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고양이 검보가 살아 있다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에게 따져 물었다. 그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 같은 부서 동료인 정인 씨를 비롯해 타 부서 직원들과 대표까지 모여 머리를 맞댔다. 저게 무슨 말이지? 전 과정을 참관하셨을 거 아니야. 대표의 말대로 염습과 입관, 화장에 이르기까지 검보의 보호자는 모든 단계를 참관했다. 유골함과 수의도 가장 좋은 걸로 하셨던 분이에요.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아실 텐데……. 정인 씨의 말에 다들 표정이 더욱 착잡해졌다. 고객이 잠깐 전화 받으러 나간 사이 나는 마음속에 맴돌던 말을 꺼냈다. 20년 가까이 키웠잖아요. 저 말을 믿진 못해도 이해할 수는 있어요. 대표가 공감한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럼 고연 씨가 홈캠으로 고양이 좀 보여달라고 해봐. 지금 집에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시니까. 

  상담실로 돌아온 고객에게 대표가 지시한 대로 증거를 요청했다. 고객은 아무런 동요 없이 휴대폰 앱을 켜서 홈캠에 찍힌 화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당연하게도 우리 중 검보를 본 사람은 없었다. 화면을 확대해 살펴보던 중 식탁에 놓인 검보의 유골함만 발견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집에 검보가 살아 있다는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한밤에 집안의 불을 모두 끄고 침대 아래를 들여다보면 노란빛을 발하는 한 쌍의 눈을 볼 수 있다면서. 검보는 온몸의 털이 검었고, 그는 어둠 속에서만 검보의 눈을 보았다. 지속되는 항의에 지쳐버린 동료들은 그를 유령 집사라고 부르며 뒤에서 은근히 놀려댔다. 측은지심이 발동한 내가 그를 전담으로 맡겠다고 나섰다. 

  맞지, 그게 맞아.

  노인이 중얼거리며 자답하더니 누렇고 검버섯 핀 작은 손으로 정자 마루를 쓸었다. 오랜만에 본 정자는 성우현의 말대로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그런데 누군가 기울어진 기둥에 굵은 밧줄을 칭칭 감아 왼편 소나무 둥치에 동여매놓은 상태였다. 누우려는 정자를 일으켜 세워 어딘가로 향하려는 나무의 고행처럼 보이는 장면이었다. 

  이즈미라고 그랬어, 대흑주를.

  계속되는 노인의 혼잣말에 호기심이 생겨 챗GPT를 슬쩍 켜서 물어보았다. 이즈미는 샘물, 대흑주는 집의 중심 기둥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노인이 이어 말했다. 

  대궐 같은 집을 다시 지었다니까.

  노인이 갑자기 붕어빵을 굽고 있는 할머니를 돌아보았다. 할머니는 아무런 대꾸 없이 밀반죽을 붓고 까만 틀을 묵묵히 뒤집기만 했다. 연락 없는 성우현을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직접 확인하러 왔더니 여전히 붕어빵 노점상이 있었다. 그 옆엔 뽑기를 파는 할아버지까지 있었다. 나는 답장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성우현에게 그들의 임대료를 물어놓았다.

  아무리 대궐 같으면 뭘 해. 

  이번엔 노인이 나를 휙 돌아보더니 말했다. 얼굴에 접어놓은 책장처럼 주름진 곳이 많았다.

  응? 대궐 같으면 뭘 하냐고. 귀신이 사는데. (노인이 히죽 웃는다.) 동생을 데리고 그 집에 갔지. 걔가 피곤했는지 까무룩 졸아. 나중엔 아예 바닥에 누워 자데. 그래서 집주인하고 소곤소곤 얘기하다 다른 방으로 갔어. 집주인이 청자를 보여준대서. 나중에 나 혼자 그 방으로 돌아갔더니, 잠든 동생 위에 소복을 입은 여자가 서 있어. (갑자기 노인이 손뼉을 세게 친다. 그 바람에 내가 깜짝 놀란다. 반응이 흡족한 듯 노인이 신나게 말을 쏟아낸다.) 귀신이지, 귀신! 그게 내 동생 위에 꼿꼿하게 서 있어. 귀신이 갑자기 치마를 훌러덩 걷는데 거기가 민둥해. 인형처럼 아무것도 없어. 동생이 눈을 번쩍 뜨더니 귀신을 와락 껴안아. 내가 얼른 달려가서 둘을 떼어놨지. 그래도 얘가 끝까지 안 깨어나. 안 되겠다 싶어서 집주인한테 도장을 가져오랬지. 구멍이 하나는 막히고 두 개는 뚫린 옥도장. 집주인이 그것 때문에 나한테 꼼짝을 못 했어. 내가 그런 물건을 팔았으니까……. (갑자기 기력이 빠진 듯 노인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이마에 도장을 꾹 눌러 찍었더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와. 그래서 얼른 그 집에서 데리고 나왔지.   

  노인이 말을 마친 뒤 이쪽저쪽을 돌아보았다. 이쪽엔 나, 저쪽엔 붕어빵 굽는 할머니가 있었다. 수그렸던 고개를 들어 올린 붕어빵 할머니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계집 장사하는 데였잖아, 여가. 그 소리 하는 거지? 궁궐은 무신. 하꼬방이었지. 

  할머니의 시선은 다시 성형 틀로 무심히 향했다. 계집 장사라니 그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붕어빵 한 봉지를 사면서 물었다. 

  옛날에 여기가 집창촌이었어요? 

  단호하고 명확한 끄덕임이 돌아왔다.

  언제요?

  이번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잠시간 기다리다 돌아섰다. 내가 물려받은 땅이 어떤 곳이었는지 자세히 알아내려면 토지 변천사와 마을 역사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 끝에 당혹스러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면……. 눈길이 기울어진 기둥으로 향했다가 밧줄로 연결된 나무로 옮겨갔다. 정자를 이끌고 어딘가로 가려던 나무는 이제 둥치에 묶인 끈을 죄다 풀어버리고 싶은 눈치였다. 나무가 힘겨워하는 것 같았다. 정자만이 아니라 정자가 지어지기 전의 역사도 이끌고 가야 해서. 

  노인이 말없이 손을 내밀어 붕어빵을 한 개 건네드렸다. 머리부터 베어먹는 노인을 바라보다 나도 손에 쥐고만 있던 붕어빵을 꼬리부터 조금씩 베어 먹었다. 기름지고 고소했다. 달고 짠 팥이 혀를 자극했다. 붕어빵을 먹는 동안 공기 중에 달콤한 냄새가 실려 왔다. 뽑기 할아버지가 덜 마른 설탕 반죽 위에 신중한 손길로 모양 틀을 내려놓고 있었다. 기다란 막대에 고무줄로 감아둔 바람개비가 천천히 돌아갔다. 멈추는가 싶다가도 다시 빙글빙글 돌았다. 붕어빵을 다 먹어갈 때쯤 성우현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답장이 왔다.


  ―제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입원 중이었습니다. 임대료는 이번 달부터 받지 않기로 했어요. 뽑기 할아버지한테도요. (1+1 임대료였습니다.) 재수 없는 말이지만 그 땅에 뭔가가 들러붙었대요.

 

  생뚱한 말을 해놓고는 자세한 설명이 한 줄도 없었다. 무슨 뜻인지 물은 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강소정에게 문자를 그대로 복사해서 전송했다. 이 땅에 대한 화제는 무엇이든 함께 나누기로 했으니까.

 

  ―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전부 다요.

 

  뭘 알고 있었는데요. 강렬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동시에 피로감이 밀려왔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천히 마른세수를 했다. 잠시 머리를 쉬고 싶었다. 눈이 시큰거리고 뻑뻑했다. 예상 밖의 이야기에 긴장한 데다 유령 집사를 상대했던 날들의 탈진감이 겹친 탓인 듯했다.

  죽은 고양이가 살아 있다고 주장했던 것 말고도 유령 집사에겐 이상한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인 내게 챗GPT와 나눈 대화를 자주 공유해주었다. 자신에 대한 데이터를 많이 제공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으나 당혹스러움이 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채팅 내용을 읽어보았더니 챗GPT 역시 나처럼 우회적으로 그를 설득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상태를 나보다 더욱 잘 알았음에도 치유 효과는 없었다. 그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대론 그를 도울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리곤 대처 방식을 바꾸었다.

  ―고객님은 지금 할루시네이션에 빠지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AI만이 아니라 인간도 그럴 수 있어요.

  처음으로 응대 규칙을 어기고 사적인 생각을 전달했다. 회사를 대표하는 직원이 아니라 자연인 나고연으로서. 유령 집사는 메시지를 읽고도 아무 답변이 없었다. 채팅을 종료해도 괜찮은지 묻자 그제야 답변이 왔다.

  ―검보는 이 집에 있어요. 검보의 시간이 이 장소에 묶인 거예요.

  ―그렇다면 둘 중 하나를 택하면 어떠실까요? 검보의 시간 속에서 함께 살아가거나 다른 집으로 이사하거나요.

  ―당연히 여기서 함께 살아야죠.

  ―그럼 그렇게 하세요. 

  ―정말로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검보가 떠나지 않는데 보호자님이 어떻게 떠나시겠어요.

  ―맞아요. 그 말이 정말 맞아요.

     

  그게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다. 신기하게도 더 이상 검보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없게 되자 그때부터 그의 말을 진심으로 믿기 시작했다. 검보가 그 집에 있다고. 죽은 뒤에도 그곳에 마냥 머무르고 있다고.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여기에 이대로 있겠습니다, 하고. 잊고 있던 회사 기밀이 떠올랐다. 원보호자가 해외에 머무르는 동안 임시보호자가 맡아 키우던 개가 갑자기 사망한 사례였다. 줌 화면을 통해 원보호자가 염습과 입관, 추모식을 참관했으나 끝날 때까지도 화장로가 비지 않아 잠시 개를 안치실에 보관해 두었다. 그런데 그 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임시보호자와 원보호자 모두 화장로 배웅은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해온 차였다. 보호자를 속이는 게 가능한 상황이 되자 우리는 실종―혹은 분실―을 비밀에 부치고 화장 시각을 거짓으로 기록했다. 먼 곳에 있어 수목장을 택한 원보호자는 나무 아래에 묻힌 생분해유골함이 텅 빈 상태였음을 영원히 모를 것이다. 당신의 죽은 개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절대로 할 수 없었던 동료들과 나는 원보호자의 나라로 개가 떠났을 거라는 상상을 위안으로 삼았다. 

  죽은 뒤에도 한 장소를 자유롭게 택해 머무르며 좀처럼 떠나지 않으려 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방법이 있나. 딱히 없지 않나. 그저 함께 있는 수밖에. 나는 가끔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욕을 조금 할 때가 있지만 저승의 아버지가 무언가를 하려는 기미를 느끼게 되더라도 설득하거나 막을 생각이 없다. 그런 건 못 막는다. 붉은 팥이나 굵은소금, 잘린 돼지머리나 깨끗한 정화수로 막는 건 한계가 있고 두려움이 외려 더욱 깊어지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난 여기서 이렇게, 당신은 이승인지 저승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당신이 마음먹은 대로 존재하는 수밖에. 

  붕어빵을 마저 다 먹었더니 기운이 점점 차올랐다. 노인이 손을 탁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별다른 말도 없이 떠났다. 붕어빵 할머니는 손바닥에 해바라기씨를 한 움큼 올려놓고 한 알씩 천천히 집어 먹었다. 뽑기 할아버지는 앉은 채로 졸기 시작했다. 부리를 터는 새처럼 한 번씩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나는 그제야 가방에 든 모종삽이 떠올랐다. 

  슬그머니 모종삽을 꺼내어 들고 정자 마루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곤 파헤쳐진 곳으로 예상되는 지점을 푹 찔러보았다. 거기만 흙의 색이 진하고 감촉이 보드라웠다. 두 다리를 쭉 뻗어 자세를 다시 안정적으로 잡고 엎드려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똑바로 세워서 묻어놓은 듯한 도장을 발견했다. 꼭지엔 타오르는 불길이 저부조로 조각되고 인면엔 글자나 그림 대신 구멍만 두 개 뚫려 있었다. 누가 이런 걸 여기에 묻었을까. 께름칙한 예감이 들어 도장을 주머니에 넣고 정자 밑에서 기어 나왔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을 때 성우현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덧붙인 답장이 왔다.


  ―땅을 팔면 더욱 크게 탈이 난답니다. 정자에 뭐가 들러붙기도 했지만 저한테 정자가 들러붙기도 했대요. 오죽 몸이 아팠으면 용한 점쟁이를 찾아갔겠습니까.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여하튼 점쟁이 말로는 20년은 더 기다려야 된대요. 그전까진 그게 떨어지지 않을 거라면서. 아무래도 동티 같습니다. 두 분도 조심하세요. 저도 그 땅을 빌려주고 나서 갑자기 안 좋은 병에 걸렸어요. 중요한 시위가 있는데 거기도 계속 못 가고 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곧바로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그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아무것도 못 하겠다더니 전화도 못 받는 걸까. 이번에도 문자를 그대로 복사해 전달하자 강소정이 더욱 기이한 답장을 보내왔다. 땅 때문에 두 사람 다 기묘한 일에 휘말린 것처럼 보였다. 공유자인 나도 덩달아 불안하고 심란했다. 아직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계속 그럴지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지분만이 아니라 재앙 역시 나누어 짊어질 운명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강소정의 문자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저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과거를 지금의 몸으로 다시 살고 싶지 않지만 역사는 그런 거더라고요. 끝나지 않아요. 단절된 현재로 못 돌아와요. 저절로 그렇게 돼요. 빈말이 아니라 여러분도 제 입장이 되어보면 알 거예요.     


  모호한 내용을 한 줄씩 해석하는 동안 속도를 높인 버스가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버스가 다시 정자 마을로, 마을의 과거와 그로부터 더 먼 과거로 빠르게 달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차창 밖 풍경이 내가 살던 시대와 더욱 동떨어져 보였다. 현재가 흐려지면서 현재가 아닌 것들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

  

  비만 오면 거리엔 군데군데 흙탕물 웅덩이가 생겼다. 폭우가 내릴 땐 깊이가 장딴지까지 잠길 정도는 되었다. 길이 아니라 함정이나 다름없었다. 웅덩이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도 이부수는 머리만 젖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악착같이 우산을 썼다. 비에 젖는 걸 유독 싫어하는 습성을 친일 행각과 연관 지어 생각했던 사람은 그의 남편밖에 없었다. 남편은 아내의 업이 심히 난처하고 쪽팔렸다. 행정의 중심이 인근의 다른 마을로 옮겨가고 있는 때였으나, 여전히 그 마을은 넓고 아름다운 강을 끼고 있어 곡물을 비롯해 온갖 물자를 운송하는 요지였다. 그리고 능이 있었다. 값비싼 부장품이 잔뜩 묻힌 무덤들이. 

  그 마을에도 바다를 건너와 식민지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무리 지어 살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시가지 근처에 목조 건물을 지어 부드러운 미닫이문을 달고 방바닥엔 다다미를 판판하게 깔고 집의 중심 기둥에 이즈미라는 이칭을 짓고서 샘물처럼 부가 솟아나기를 아침저녁으로 기도했다. 골동품 수집가이자 지주인 그의 눈에 식민지 소작농들은 꽤 음흉해 보였지만 먹고사는 일에 관심이 많은 건 매한가지일 거라는 마음으로 대하다 보면 드물긴 해도 마음이 통하는 것 같은 순간도 있었다. 특히 이토 도미를 대할 때가 그러했다. 도미는 도굴꾼을 다루는 일은 물론이고 거래를 중개하는 일에 능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순위였고, 자신과 가문을 부가 지켜준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도미와는 말이 잘 통했다. 그는 도미가 서운해하지 않을 만큼의 몫을 늘 챙겨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함께 일하기가 어려운 여자였으니까. 눈치가 빠르고 계산은 그보다 더 빨랐으며 어떤 상황에서든 영민함을 드러냈다. 성명을 바꾸는 정책을 따르며 서둘러 이부수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토 도미가 된 것도 그랬다. 그러나 그가 그간 아무도 손대지 못했던 무덤을 열자고 제안했을 때 뜻밖에도 도미는 주저했다. 그는 이유를 물었다.

  그 무덤은 석수가 지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석수인지 석귀인지 알 수 없다지요. 

  석귀라 하면?  돌로 만든 귀신입지요. 손을 댄 이들은 죄다 화를 입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그는 무덤을 열고 싶은 욕구가 더욱 간절해졌다. 그래서 평소보다 부장품을 배로 더 떼어주겠다고 말했고, 도미는 결국 그의 뜻을 따랐다.

  그가 탐내던 무덤이 열리던 날, 하늘에서 전례 없는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거리의 흙탕물 웅덩이는 정강이까지 잠길 정도로 깊게 파였다. 강한 빗줄기가 지상의 모든 걸 때리고 부수고 쓸려 보냈다. 벼락이 내리칠 때마다 허술한 담장들이 우르르 무너졌다. 그는 미열과 들뜬 불안에 시달리며 집에서 소식을 기다렸다. 이즈미를 바라보며 열렬한 기도를 올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날만 예외적으로 우산을 쓰지 않은 도미는 폭우를 온몸으로 맞으며 무덤 앞에서 짧게 위령제를 올렸다. 빗물에 부장품이 손상될 테니 맑은 날에 다시 시도하는 게 나았으나 그날이 아니면 불가능하리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도미는 도굴꾼들에게 무덤을 최대한 훼손 없이 열고 연도를 지나 묘실까지 손님처럼 걸어 들어갈 계획이라고 알렸다. 석귀가 정말로 무덤 입구를 지키고 있다면 그것부터 온전하게 들어내고 일을 시작해야 뒤탈이 덜할 것 같아서였다. 이내 도굴꾼들이 무덤 입구의 단단하게 다져진 흙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위쪽의 막음벽돌 한 장을 빼내자 무덤 안에서 하얀 입김 같은 차가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옆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빗물 소리가 시끄러웠지만 도미는 꼭 무덤의 한숨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두려움을 떨치며 서둘러 아치형 널문을 통과해 널길로 걸어 들어갔다. 지표를 뚫고 내려온 소나무 뿌리가 뒤엉킨 천장 아래 무덤 주인을 새긴 묘지석이 보였다. 그 뒤에 붉게 칠한 입을 벌린 진묘수가 있었다. 사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서인 듯 몸통은 붉은 진사로 칠해졌고 오른쪽 뒷다리가 부러진 채였다. 도망치지 못하게끔 일부러 부러뜨린 뒤 무덤에 넣고 봉하는 관습 때문일 거라고 동행한 학자가 알려주었다. 

  사람들이 이것을 석귀라고 하였던가. 

  널길 중앙에서 말로만 듣던 진묘수를 처음 본 도미가 작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다 그만 빗물에 미끄러져 본의 아니게 진묘수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작은 수문장이 무덤 벽에 머리를 쾅 부딪히곤 빙그르르 돌다가 무덤방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스르르 멈추었다. 

  이즈미를 붙잡고 기도를 올리던 일본인은 늦은 기별이 당도하자 앞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마주한 도미의 얼굴이 어딘가 약간 달라져 있었다. 촛농을 발라놓은 것처럼 표정이 뻣뻣하고 눈빛은 불 꺼진 장작처럼 차갑고 어두웠다. 그는 찜찜한 마음이 들어 원래 약속했던 것보다 더 많은 보물을 내어주었다. 액땜해야 한다는 직감이 들어서였다.

  일본인의 마당으로 옮겨진 진묘수는 몸을 녹색으로 물들이며 잠들어 갔다. 바깥 공기가 무덤 속보다 습할 리가 없음에도 채색된 몸은 빠르게 색이 바랬고 삽시간에 이끼가 돋아났다. 그는 능에서 훔쳐 온 석물들을 자기 집 뒷마당에 가져다 놓았다. 그곳은 빛이 잘 들지 않아 반그늘이 졌고, 빛에 드러난 가장자리 석물의 얼굴은 인상을 찌푸린 듯 침통해 보였다. 

  도미의 보물 상자들엔 무덤을 열고 긁어낸 부장품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처분은 나중에 신중하게 할 생각이었다. 눈에 띄게 부자 행색을 하며 거리를 나다니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앞으로 들이닥칠 시대의 변화가 또다시 어떤 파란을 몰고 올지 살펴보고 그때 가서 필요한 양만큼 유용할 생각이었다. 도미는 자신의 신중함을 스스로 높이 샀다. 그 기질은 진귀한 보물을 알아보는 감식안과 더불어 일본인들이 부흥시킨 골동품 산업의 거대한 와류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훔쳐 온 보물 중엔 인뉴에 미상의 동물이 조각된 옥도장도 있었다. 인면에 뚫린 세 개의 구멍 중 하나만 막혔는데, 노승을 비롯해 식견 높은 학자를 찾아가 물어도 용도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전각에 관심이 깊었던 도미는 인장 문화를 연구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지만 시류에 올라타 골동품 거간으로 살아가느라 좀체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인장을 찍는 행위는 돈과 권력을 가진 자가 불로 지져 만든 낙인보다 더한 것,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표식을 남겨두는 일이라는 생각을 빈번하게 했고 그만큼 자주 인장에 미혹되었다. 그래서 훔쳐 온 보물을 자세히 적어놓은 비망록의 책엽마다 붉은색 인주를 묻힌 인장을 꾹꾹 눌러 찍었다. 각각의 보물에 소유자의 표식을 남기는 것처럼. 붉은색의 기운이 액을 막아주리라 굳게 믿고서.

  시간이 흘러 일본인들이 살던 집을 버려두고 황급히 패망한 조국으로 돌아갔을 때 다시 이부수가 된 도미, 한때 도미였음을 숨긴 이부수는 남편과 함께 빈집의 뒷마당으로 달려가 실수로 걷어찼던 진묘수를 수레에 싣고서 집으로 왔다. 그때부터 진묘수가 이부수의 신이 되었다. 그러나 신도 집과 보물을 잃어버리는 일은 막아주지 못했으니, 이부수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진묘수의 부러진 다리를 붙여줬어야만 했다고 깊게 탄식했다.

  세월이 지나 보물 상자가 묻혔던 자리 위에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으나 원인 불명의 진동과 균열로 하루아침에 폭삭 무너지고 말았다. 다시 그 자리에 건물이 지어지고 증축되고 개축되다 수많은 방이 벌집처럼 들어찬 말끔하지 못한 몰골을 오래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숨 막히는 검은 연기와 뜨거운 불길에 건물이 집어삼켜졌다. 1층 구석방에 갇혀 있던 여자는 장판을 걷고 땅 아래에 쑤셔 넣었던 담요를 끄집어냈다. 믿음을 갖고 싶을 때마다 두들기고 깨뜨리고 파헤쳤던 방바닥 일부가 사라진 자리였다. 집요하게 들러붙어 호미로 땅을 팠던 수년간의 성과로 여자는 작은 땅굴을 얻었다. 굴을 더 깊이 파 들어가자 커다란 상자가 나와 멈췄던 상태였다. 잠시 망설이던 여자는 침입해 오는 시커먼 연기를 보고는 호미로 잠금쇠를 내리쳐 깨부순 뒤 상자 속으로 몸을 말고 들어갔다. 손만 내밀어 뚜껑을 닫자 묵직한 빛을 내며 반짝이는 금 장신구와 청자 향로, 청동 거울과 옥도장이 여자의 몸 위로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며 기어올랐다. 머지않아 여자도 화석이 되어 상자 안에서 곤히 잠들었다.


* 

        

  남쪽에서 올라온 가을 태풍이 정자 마을을 관통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기울어진 정자를 걱정하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강소정에게 수차례 연락해봐도 묵묵부답이었다. 정자 복구를 닦달하는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러다 한밤중에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선 성우현 씨랑 자기 집안을 욕했느냐고 따져 물었다.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강소정은 고분과 진묘수, 도굴과 골동품 사업, 증조모의 비망록에 대해 한참을 떠들어댔다. 취한 탓에 발음이 많이 꼬여 있어 절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이나 자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으나 나중엔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긴 사연은 가급적 메일로 보내주시면 좋겠다고 덧붙이며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다. 

  급한 업무들을 처리하고 혼자서 정자 마을에 가보려 했을 때 수도권이 태풍 영향권으로 들어섰다. 난간의 구조물이 떨어져 차량이 파손되고, 입간판이 붕 떠올라 행인의 몸을 후려치는 걸 눈앞에서 목격한 뒤 창을 모두 닫고 집안에 들어앉아 태풍이 지나가길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검보의 장례식이 떠올랐다. 

  장례식은 반려동물이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을 보호자로부터 전달받아 제단에 놓아두는 절차가 있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사용하던 그릇을 조심스럽게 배치하고, 미리 전달받은 사진으로 만든 영상을 모니터에 재생시키면 그때부터 추모실은 죽은 반려동물의 세계가 된다. 축소된 우주가 된다. 베드에 누운 반려동물은 꺼져 가는 태양이고 엉엉 우는 보호자는 그 주위를 맴도는 행성 같은.

  이 공간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검보가 생각날 때마다 여기로 오게요. 

  추모실을 천천히 둘러보던 유령 집사가 말했다. 나는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속으론 저 많은 물건―캣타워와 캣휠을 포함해 여덟 박스나 되었다―을 다 챙겨온 대단한 집사임에 감탄했다. 수의를 입은 검보가 추모실이 아닌 생전에 살던 공간에서 보호자와 작별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일 정도였다. 내 옆에 서 있던 정인 씨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전날에 그는 검보 케이스를 계기로 추모실에 반입하는 물건의 중량을 제한하자는 의견을 회의 안건으로 올렸다. 동물복지인증 반려동물 간식 사업을 준비하며 모든 걸 중량으로 계산하는 습관이 든 대표는 이번에도 중량으로 계산해서 추가 요금을 받으면 되는 문제 아니냐고 간결하게 답했다. 그런 일들을 당연히 모르는 유령 집사는 혼잣말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여기에 있었으면, 내내 있었으면……. 

  그의 말을 듣다 보니 뜻이 점점 모호하게 느껴졌다. 검보가 화장로로 옮겨지지 않고 여기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는 걸까, 검보를 위한 추모실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보존되기를 바라는 걸까. 내가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정인 씨가 입을 열었다. 

  여긴 임시적인 작별 정거장일 뿐이죠. 검보 입장에선 집이 가장 편할 겁니다.

  태풍이 지상의 모든 걸 후려친 날에 잊고 있던 그 말이 떠올랐다. 그제야 유령 집사가 왜 우리 회사에 지속적으로 컴플레인을 걸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집이 가장 편할 거라는 말은 굳이 안 해도 됐을 텐데. 정인 씨는 유령 집사의 말을 후자로 해석해 받아들였다. 추모실이 보존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을 사려 깊지 못한 방식으로 전달하면서.     

  언젠가 회의 자리에서 대표는 반려동물의 장례를 업체에 맡기는 고객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가 제공하는 건 장례 서비스만이 아니라 작별의 정거장이기도 합니다. 보호자들은 이곳에서 반려동물을 정식으로 떠나보내고 텅 빈 집으로 돌아가요. 그러니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매일 고민해야겠죠. 다들 노력할 수 있으시죠?

  나는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정인 씨도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태풍이 지나간 뒤에 기온이 한층 낮아졌다. 나는 약간 도톰한 외투와 정자 아래에서 발견했던 도장을 옷장에서 함께 꺼냈다. 터미널 근처의 도장 가게를 지도 검색으로 찾아보았더니 가까운 거리에 한 군데 있었다. 버스 출발 시각을 염두에 두고 일찍 집을 나섰다. 

  때마침 도장 가게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내가 건넨 도장을 살펴보던 가게 주인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떤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낙인용은 아닌 것 같다면서 뜻밖의 정보를 알려주었다. 

  벽조목으로 만든 도장이에요. 인공으로 만든 게 아니라 진짜로 벼락을 맞은 대추나무요. 색도 아주 잘 나와서 이 정도면 무척 귀한 건데 어디서 발견하셨다고요?

  정자 아래서요. 그런데 왜 벼락 맞은 나무로 도장을 만들어요?

  벽조목은 귀신을 내쫓고 복을 부른다고 해서 애호가들이 있어요. 목상한테 그런 나무가 나오면 알려달라고 미리 말해놓기도 하고요.

  만이천 원을 주고 산 제 인감도장도 이것과 비슷한데요. 

  그건 가짜 벽조목이겠죠. 벽조목을 찾는 사람이 있으니까 죽은 나무에 고압 전류를 흐르게 해서 벼락 맞은 자국을 만들어내기도 해요. 물론 대량으로 생산할 땐 착색 같은 단순한 가공을 거치지만요. 만 원대라면 그런 도장일 겁니다. 

  주인에게 감사하다고 말한 뒤 도장을 챙겨 가게를 나왔다. 귀신을 내쫓는 도장이라니. 도장을 묻어 둔 사람은 그 자리에 귀신이 출몰하는 이유를 알고 있을까. 나는 아직 그 이유를 모르기에 도장을 정자 아래에 다시 가져다 두고 싶지 않았다.

  정자 마을로 향하는 버스에선 눈을 붙이지 못했다. 창 너머 풍경이 온통 잿빛이었다. 도로변에 심겨 있는 수목은 물론이고 방음벽과 옹벽마저 지치고 낙심한 몰골이었다. 낙석방지망에서 빠져나온 돌멩이가 도로변에 흩어진 광경을 보며 정자가 무너졌을 게 틀림없다고 비관하다가 마을로 들어섰다.

  그러나 정자는 그 자리에 있었다. 놀랍게도 기울어졌던 기둥이 바로 선 채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강풍이 기둥을 밀어내 그렇게 되었다고 보기엔 미심쩍었다. 정자 기둥은 바로 선 반면에 기둥과 연결된 밧줄을 허리에 감고 나아가는 듯 보였던 소나무가 왼편으로 더욱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예전에 찍어놓은 사진을 살펴보았더니 차이가 확연했다. 지금의 나무가 더 많이 기울어졌다. 위태로운 정자를 이끌고 가기 위해 애쓴 탓일까. 이해할 수는 없으나 어쩐지 믿어보고 싶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을 때 이메일 도착 알림이 왔다. 강소정에게서 날아든 것이었다.


  정자 마을에 잘 도착하셨을까요. 그날은 죄송했습니다. 속상해서 술을 좀 많이 마셨어요. 

  고연 씨, 혹시 계영배라는 술잔을 아세요? 저는 예전에 박물관에서 아르바이트했을 때 그걸 처음 봤어요. 계영배에 술을 가득 따르면 모조리 아래로 흘러버리기에 항상 적당한 양만 따라야 합니다. 과욕을 경계하라는 의미가 담겼어요. 그러나 저는 그런 의미보다는 가득 찼을 때 모조리 사라지는 현상을 시간순으로 연결한 도구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순리대로라면 가득 찬 뒤엔 조금 흘러넘치고 멈춰야 하는 법인데, 모조리 다 사라지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잖아요. 

  성우현 씨가 저희 집안을 헐뜯은 걸 알고 있어요.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저희 집안 재산은 가득 찼을 때 모조리 사라졌고 지금도 그 원리가 계속 반복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그 땅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정자가 아니라 다른 게 그 땅을 채우고 있었다면 또다시 모조리 잃게 되었을 겁니다. 전 이제 알아요. 그러니 그 땅에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마세요. 물론 제가 보물 상자를 찾겠다고 파헤치기는 했으나 그 사이에 벌어진 일들로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말했던 제 증조할머니의 비망록 얘기를 기억하시나요. 1971년에 발견된 왕릉에서 나온 진묘수가 증조할머니의 비망록엔 1940년대에 등장합니다. 이처럼 선행되어야 할 것들이 뒤에 나오고, 훗날 알려진 것들이 먼 과거에 불쑥불쑥 튀어나와요. 엉망으로 감아놓은 실타래처럼 비망록의 시간이 엉켜 있어요. 그뿐 아니라 진묘수 같은 보물을 뒷마당에 무심히 보관했다는 의심스러운 기록도 섞여 있습니다. 왜일까요. 저는 얼마 전에 그 비밀을 알게 됐어요. 비망록의 매 장마다 찍힌 증조모의 인장이 곧 친일이자 반민족 행각의 명백한 증거임을 알았던 저희 집안사람들이 기록 자체를 허위로 만들고자 손을 댔던 것입니다. 거짓 기록을 덧대어 입혔어요. 상상으로 쓴 이야기처럼요. 그런데 왜 태우지 않고 덧입히기를 택했을까요? 치부책이나 다름없으니 불태우는 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요. 저는 그 이유를 생각하던 중 불시에 깨달았습니다. 증조할머니는 집안의 수치이기도 하지만 시대와 떨어뜨려 놓고 보면 일견 대단한 사람이기도 했다는 것을요. 남들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겠지만, 저는 증조할머니가 당대의 특정 산업에서 활약했던 대단한 여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여성이 그 시대에 그 정도의 일을 해냈다는 건 놀라운 면도 있지 않나요? 그래서 비망록을 없애지 못한 게 아닐까 싶어요. 거짓 사실을 덧입히더라도 그걸 쓴 사람은 적어도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 있었으니까요. 일부의 진실은 남기고 싶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건 참고로 알아두세요. 제가 친일파 후손이라고 욕할 자격이 과연 성우현 씨에게 있을까 싶어요. 그 사람이 열성적으로 참여한 시위가 뭔지 아시나요? 그쪽에선 꽤 유명한 유튜버입니다. 자기보다 몇 배는 더 큰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며 거리에서 외치는 영상이 온라인에 숱하게 떠돌고 있어요. 제 정치적 성향은 그 사람과 다릅니다. 저는 여성과 약자를 위하는 나라를 진심으로 바라는 국민이에요. 판단은 나고연 씨에게 맡길게요. 진실을 여러 측면에서 아는 것과 한 면만 아는 것은 다르니까요.

  

  이메일을 다 읽고 나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나보고 무슨 판단을 내리라는 걸까. 강소정의 후손들이 조상의 악행을 부풀려 화려한 업적처럼 바꿔놓았다는 것인데, 아무리 거짓이 섞여 있다고 한들 그 기괴한 심리를 내가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각자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는 진실에 발목 잡혀 살아갈 뿐인데. 나 역시 그랬다. 정작 내가 가장 관심 있는 일은 나와 얽히게 된 땅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었다. 강소정의 증조모가 묻은 보물은 누가 가져갔는지, 불이 난 건물에서 도망치지 못한 여자는 몇 명인지, 그 사건은 자세한 기록으로 남겨졌는지를. 그리고 기울어진 나무와 바로 선 정자가 이 장소에서 하려는 일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인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일 뿐인지를. 이 땅에 대해 알게 될수록 모르는 것도 많아졌다. 어쨌든 강소정의 주장을 받아들여 정자를 그대로 두는 건 위험한 선택이다. 안전 관리 조치를 소홀히 해 사고가 발생하면 소유주로서 책임을 져야만 하니까. 게다가 주민들이 이용하는 정자였다. 그러므로 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하는 절차라도 셋이서 함께 밟아야 했다. 공유자인 우리는 이 땅으로 인해 긴밀하게 얽혀 있다.

  붕어빵 할머니와 뽑기 할아버지가 리어카에 장비를 담아 함께 밀고 왔다. 장사 준비를 시작하려는 그들에게 다가가 나무가 언제부터 저만큼 기울어졌는지 물었다. 할머니는 대꾸 없이 나무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새소리가 크게 들려올 정도로 침묵이 길고 적막이 깊었다. 나를 잠깐 돌아본 할머니의 눈빛엔 의문도 확답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나무 앞으로 서슴서슴 걸어가더니 뒷짐을 진 채로 나무를 바라보았다. 순간 나뭇잎이 강물에 쓸려가는 것처럼 한 방향으로 소란하게 당겨졌다.

  하루아침에 저렇게 됐어.

  아니야. 계속 당기고 있었어. 매일매일. 

  두 사람의 말은 달랐다. 우리는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가려내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나무를 바라보다 이윽고 흩어졌다. 나는 내 땅의 경계 밖으로 걸어 나가 기울어진 나무와 정자를 한 프레임 안에 담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공유자들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일부러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런 뒤에 정자 마루에 앉아 가만히 쉬면서 기다렸다. 정자는 그러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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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소설

베일

베일 윤해서 ∴ 배달을 끊을 수 없다. 이번 달에만 12번째 같은 메뉴를 시켰다. 분리수거 배출일은 월요일이다. 월요일 18시부터 23시까지만 재활용 쓰레기를 배출할 수 있다. 일주일치 쓰레기를 모아 월요일 밤에 내다 버린다. 조명을 환하게 밝힌 주차장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커다란 이케아 봉투 가득 플라스틱 용기를 들고 온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그 사람과 말없이 번갈아 비닐, 플라스틱, 종이, 캔을 분리 배출한다. 내가 이번 달에만 열두 개째 버리고 있는 똑같은 플라스틱 뚜껑 아래 색색의 플라스틱이 가득하다. ∴ 두 개의 점이 있다. 점을 번갈아 본다. 어떤 움직임이 점을 만들 때 점에 내려앉는 건 뭘까. 같은 크기의 점을 찍을 뿐인데. 무엇이 점과 점 사이에 차이를 만드나. ∴ 면허 갱신 안내 문자를 받았다. 최근 6개월 내 찍은 사진이 있어야 하고,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증명사진을 찍는 일은 언제나 불편하고 어색하다. 어딘가 제출했을 최초의 증명사진을 앨범에서 발견했는데, 5살의 나는 입을 꼭 다물고 뭔가를 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증명사진을 찍을 때마다 흑백사진 옆에 모아두었는데 조금씩 다른 사진 속 얼굴이 모두 흑백사진 속 얼굴과는 기묘하게 닮아 있다. 내가 사진관을 선택할 수 있게 된 후로는 계속 같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몇 년 만인지 그 사이 사진관은 이사를 했다. 큰길가에서 골목 안쪽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하고 찾아갔는데 이전 사진관 크기의 절반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 의자와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왼쪽으로 조금 갸우뚱. 이런 지시를 하던 사장님이 답답했는지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이리저리 조금씩 움직였다. 보정을 거친 사진 속 나는 거울로 매일 보던 나와 달랐다. ∴ 금을 넘는 데 몰입하던 때도 있었다. 충동이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면서.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거나 휴대전화를 없애고 오래 걷거나 새벽까지 놀이터에 앉아 있거나. 보고 싶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 토끼 머리 위에 쌓인 먼지를 털고, 알람이 울리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토끼는 세 마리. 접시 하나를 들자고 매끈한 토끼 셋이 두 손 모으고 있다. 예외는 있을 수 없어 사이좋게 나란히. 어떤 날 접시 위에 사과를 올리고 토끼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아래층 사람이 천장을 두드리기 시작해서 팔 아프겠다, 생각하다가. 아래층 천장 위에 웅크리고 깜빡 잠들었다. 해가 지려는지 집은 어둑하고 에어컨 바람이 서늘했다. 눈을 뜬 건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 ∴ 통 속에 손을 집어넣는 기분. 통의 깊이를 알 수 없다. ∴ 큰 화분 2개와 작은 화분 2개가 있다. 작은 화분 중 하나에서 꽃대가 올라왔다. 이렇게 더운데. 꽃이 피었다. 역대 최대. 역대 최고. 이런 표현이 매일 반복되고 있다. 에어컨을 틀어 갇힌 공기를 식힌다. 2주 전에는 짧았던 꽃대가 일주일 만에 길어지더니 다섯 송이의 꽃이 피

  • 윤해서
  • 2026-10-01

문장웹진 소설

보트 아래

보트 아래 손호영 한때 나는 얀의 말대로 집 앞을 비추는 보안카메라를 설치했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해 보곤 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햇빛, 무심히 우리 집을 침범하던 빛을 나도 결국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 도시에 뿌리내렸다면, 나의 세계는 바라던 만큼 넓어졌을까? 어쩌면 우리는 아기를 낳아 키웠거나, 혹은 결혼했을지도…… 이런 생각들은 물의 파동처럼 하나의 점으로부터 사방으로 원을 그리며 뻗어 나가곤 했다. 나는 그를 떠나며 가족 핑계를 댔다. 여기서는 영원히 가족을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는 짐짓 놀라며,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나에게 너는 오래전부터 가족이었다고. 글쎄. 정말? 찰나였지만, 얀은 정말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고, 나는 승리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지난 일들을 여러 번 되감아 보면서 나는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는지 원점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정말 그의 견고한 세계에 작은 생채기라도 낼 수 있는 존재였는지를. * 암스테르담 출장에 김수오를 데려간 건 박 대표 부탁 때문이었다. 그곳에 살 때부터 눈여겨보았던 로컬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와 국내 독점 유통 계약을 맺으려던 참이었다. 수 개월간 메일과 화상 회의로 대략의 조건 조율이 끝난 단계여서 큰 부담은 없었다. 현지 스튜디오와 쇼룸을 돌아보는 일정까지 포함해 4박 6일 출장 계획을 보고했는데, 박 대표가 그제야 김수오에게 시킬 만한 일을 고민해 보라고 말했다.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오 년을 살다 이 년 전쯤 귀국했다. 반년 넘게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던 내게 해외 바잉과 상품 기획을 총괄하는 차장 자리를 제안하며 손을 내밀어준 게 대학 선배인 박 대표여서, 나는 그의 지시라면 가급적 따르는 편이었다. 김수오는 박 대표 친구의 아들로 올해 스물일곱 살이었고 몇 달 전 정직원으로 채용됐다. 그의 아버지는 치아 교정 전문의로 전국에 네트워크 병원이 30곳쯤 있는 치과 체인의 대표라고 했다. 잘은 몰라도 박 대표는 김수오의 아버지에게 얼마간 빚을 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불쑥 남의 사무실을 찾아와 맡겨둔 듯 자기 아들 일자리를 요구할 수 있겠느냐고, 그것도 정규직을, 의사라면 상식이 있는 사람일 텐데, 하고 직원들끼리 수군댔다. ─우리 아들이 올해 졸업하는데 패션을 하고 싶다네. 그러면서도 아주 당당하거나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박 대표에게 전해 들으니 그 집안은 대대로 의사였는데, 김수오가 삼수를 하고서도 의대 입시에 실패했다고 했다. 메디컬 편입을 하라고 생명공학부에 보내놨더니, 학점 관리는 뒷전에 갑자기 패션MD를 하겠다고 선언해 집안이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경력직 뽑아달랬더니 낙하산 신입이 웬말이냐고 투덜대는 직원들에게 박 대표는 김수오가 비싸고 좋은 것들 많이 보고 자랐으니 감각은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미감이니, 취향이니, 요즘 그런 거 없는 애들도 있어요? 내가 말했다. ─말하자면 그렇단 얘기지.

  • 손호영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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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순응

암순응 박선우 스트레칭의 마지막 단계는 아기 자세다. 우선 바닥 매트에 두 무릎을 꿇고 발뒤꿈치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며 앉는다. 상체를 숙이면서 두 손을 머리 위로 곧게 뻗는다. 그러면 어깨의 삼각근과 등허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얕은 신음이 절로 나온다. 그대로 이마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것. 그리하여 더는 내려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 자세를 갖춘 뒤에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속으로 하나, 둘…… 서른까지 세다 보면 몸의 뒤틀린 부위들이 바로잡히는 게 느껴진다.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에 끼워 맞춰지는 기분. 신체가 교정되는 감각은 정신 상태로도 이어진다.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듯하다. 힘이 다하면 매트 위에 드러눕는다. 두 눈을 감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뱉어낸다. 몸이 이완되는 감각에 집중한다. 그러면 호흡이 잦아들면서 주변의 모든 것이 서서히 멀어져감을 느낄 수 있다. 아득해지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도. 어느 순간에는 나 역시도. 스트레칭을 마친 후에는 몸을 일으켜 방문 앞으로 간다. 나는 번번이 문손잡이를 쥔 채 망설이다가 문을 열어젖힌다. 거실로 나가면 가죽 소파에 길게 누운 아버지가 보인다. 올해 일흔넷의 아버지는 한 손을 이마에 올려둔 채 나지막이 코를 골고 있다. 더는 염색을 할 수 없어 백발이 성성해진 머리카락과 고목 껍질처럼 버석하고 거무스름해진 얼굴, 움푹 파인 볼, 살집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앙상해진 팔다리로 맥없이 축 늘어져 있다. 매일 아침 나는 그 모습을 본다. 하루가 다르게 기력을 잃으며 쇠약해지는, 무시로 잠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헤어나질 못하는 아버지를 마주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더디게 흐르다 못해 한순간 뚝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현실과 유리되면서 내가 아버지의 세계에, 그러니까 산 자들의 세계에서 죽어가는 자들의 세계에 휩쓸려 들어와버린 것만 같다. * “이대로면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사실 겁니다. 항암을 하시면 6개월에서 1년쯤이고요.” 혈액종양내과 허 교수는 아버지의 검사 결과를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초진을 맡았던 소화기내과 전문의와 위암센터 외과의가 입에 지퍼라도 채운 양 말을 삼갔던 것에 비하면 훨씬 나았고, 어쩐지 속 시원한 감정마저 들었다. 처음으로 상급종합병원 의사에게 신뢰감을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허 교수의 소견에서 새로운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전이성 위암 말기 환자의 여명’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느낀 속 시원함은 아버지가 시한부 환자임을 누군가 육성으로 선언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동안 가족은 물론이고 지인들조차 쉬쉬해온,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그러니까 네 아버지는 얼마나 남은 거니?”―공식적으로 논할 수 있게 된 후련함 말이다. 그래, 내가 의사에게 원하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 우리가 환자에게 도

  • 박선우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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