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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모르는 마누엘

  • 작성일 2024-11-01

   불안을 모르는 마누엘


임택수


   마누엘은 이면도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호수에 손을 넣으면 금방이라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은 폭염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자동차 트렁크에서 시클라멘 화분과 청소 도구를 챙겨 공동묘지 후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더위에 지쳐 가는 온몸의 감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실눈을 뜨자 통행로에 깔린 흰 자갈이 잔설처럼 보였다. 알록달록한 조화와 반듯한 형태의 무덤들이 대낮의 정적에 갇혀 있었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한번 쓱 둘러보았다. 전과 달리 어딘가 훤해진 느낌이었다. 저 멀리 반대편에 있는 북문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마누엘은 묘지의 청청했던 나무들이 대부분 잘려 나간 것을 알아차렸다. 이 주 전 이곳에 들렀을 때 해충 때문에 골치가 쑤신다고 불평하던 관리인이 떠올랐다. 외래종 날벌레라며 여기서 성장한 해충이 지역의 포도밭까지 퍼져 심각한 피해를 준다며 구시렁거렸다.

   마누엘은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서쪽 구역으로 걸음을 떼었다. 수돗가 나무 그늘에 있던 벤치도 보이지 않았다. 마누엘은 그 벤치에 앉아 아버지의 무덤에 닿은 가죽나무 그림자가 시계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지켜보곤 했었다. 

   문짝만 한 자주색 평석 위에 놓인 화분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마누엘은 애도의 문장이 새겨진 책 모양의 석판과 시든 화분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평석을 솔질했다. 여기저기 굳어 있는 새똥을 손톱으로 긁어낸 뒤 페트병을 열어 물을 뿌렸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토도독 떨어졌다. 마누엘은 평석에 새겨진 아버지의 이름 주위로 석판과 시클라멘 화분을 올려놓았다. 아버지가 만족할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게 제자리에 놓인 것 같았다.

   “아버지, 저 가요.” 그는 빈 페트병과 솔을 챙기고는 사인을 보내듯 발끝으로 평석 옆면을 툭툭 건드렸다.

   묘지의 나무가 사라지자 묘지의 그늘도 사라졌다. 햇빛이 정수리를 달구고, 등과 겨드랑이가 끈적거렸다. 지붕을 얹은 석실 안 조각상들은 눈을 내리깐 채 만돌린을 뜯고 있었다. 마누엘은 버릇처럼 망자들의 이름을 읽어 나가다 한 무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매번 처음 발견했던 때처럼 발길이 멈춰졌다. 평석 없는 무덤은 미처 장례를 다 끝내지 못하고 서둘러 묻은 것처럼 맨땅을 허술히 드러내 보였다. 색 바랜 조화가 땅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고, 그 뒤로 달걀만 한 흑백 사진을 박은 묘비가 기우뚱 세워져 있었다. 사진 속 얼굴은 동양 남자였다. 망자의 가운데 이름은 Chang, 이었다. ‘창’은 푸르거나, 창문이거나, 무기가 아니면 노래일 거라고 언젠가 문규가 알려주었다. 

   꽃다발을 든 초로의 여인이 중앙 구역까지 와서는 중얼대더니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묘지 분위기가 달라져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마중을 나올 수도 없을 텐데.” 마누엘이 혼잣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길을 헤매던 여인은 정문 앞 키오스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경비실에서 관리인이 나와 그녀에게 뭐라 묻더니 팔을 뻗어 북쪽 묘역을 가리켰다. 북쪽 묘역을 지나 북문으로 나가면 4차선 도로가 있고, 그 도로를 건너면 마누엘의 어머니가 사는 아파트가 나왔다. 

   허름한 건물 모퉁이에 흑인들이 얼쩡거렸다. 이따금 지역 신문에 등장하는 마약상들 같았다. 마누엘은 대학 입학 자격시험을 치른 날, 마리화나를 처음 피웠다. 만취한 상태에서 절친이 말아 준 담배를 몇 모금 빨고는 축 늘어져 환각에 빠졌다. 누군가와 오래 키스를 했다. 혓바닥에 분포한 오돌토돌한 돌기까지 감촉되었다. 그러다 한 여자의 손톱 끝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새의 몸통과 날개를 하고서 밤새 빙글빙글 날아다녔다. 

   마누엘은 며칠 동안 지끈대는 두통에 앓아누웠다. 담배 냄새만 맡아도 토할 지경이었다. 불쾌하고도 도발적이었던 첫 경험을 극복하기까지 족히 십 년은 걸린 것 같았다. 그는 한 살 이후, 부모님 집에서 십팔 년을 살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기숙사에서 지냈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완전히 독립했다. 한국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마누엘은 프랑스 생활에 쉽사리 적응할 수 있었다. 거울 앞에 섰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을 완벽한 프랑스인으로 느꼈다. 요리사였던 아버지는 한국 요리를 연구해서 프랑스에 도착한 기념일에 파티를 열었다. 

   마누엘은 오층 건물 앞으로 느릿느릿 차를 몰았다.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 건물 꼭대기 층을 올려다보았다. 삼분의 이쯤 내려졌던 블라인드형 덧창이 올라가고 어머니가 창가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녀는 손으로 주차장의 한 방향을 알려주었다. 마누엘은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오, 마누.” 어머니가 빼꼼히 열린 현관문 뒤에서 그를 불렀다. 

   그는 어머니와 볼 인사를 나눴다.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그의 뺨에 침을 묻혔다. 집 밖은 위험하고 불결하고 복병이 도사리는 곳이어서 모든 덧창을 내리고 하루 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한 뼘쯤 열어 둔 창가에 앉아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부엌의 조리대에는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자신은 물론 그 누구를 위해서도 요리하지 않았다. 가사도우미가 사다 준 레토르트 식품이 냉장고에 남아돌았다. 

   어머니는 오렌지주스를 마누엘에게 따라주었다. 마누엘은 아버지가 앉던 자리에 앉아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엄마, 드디어 바캉스예요!”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하루였지만 그는 짐짓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어머니가 조용히 웃었다. 오늘은 그가 맡아 온 ‘통합반’의 담당 소임이 끝나는 날이었다. 가난과 내전, 그리고 복잡한 정치적인 이유로 부모를 따라 프랑스로 밀입국한 아동들을 위한 특별 학급이었다. 구월 학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과목별 수준에 따라 학년과 학급을 옮겨 다니며 공부하게 될 터였다. 마지막 수업은 받아쓰기로 마무리했다. 

   “햇빛은 창문으로 들어와, 행갈이 하고, 욕조에서 물놀이를 합니다.” 

   자크 프레베르의 시를 받아 적던 아이들은 수업 종료 벨이 울리자 순식간에 가방을 쌌다. 사미라, 드미트리, 타마라, 프란체스카, 륜둘라. 그는 텅 빈 교실을 둘러보며 이 반을 거쳐 간 아이들을 떠올려 보았다. 아이들의 어학 수준은 제각각이었다. 말은 잘해도 쓰지를 못하거나 아예 연필 쥐는 법조차 모르기도 했다. 정해진 때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아이들. 마누엘은 리비아에서 온 열한 살의 사미라를 생각했다. 오늘 새벽, 아이의 가족은 숙소에 들이닥친 경찰과 함께 국경으로 돌아갔다고 조회 시간에 교장이 말했다. 사미라는 작문 시간에 고향에 친구들을 두고 왔다고 썼다. 마누엘은 다음 학기부터 바뀌는 학급 운영 방침을 아이들에게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마누엘은 아이들의 그림으로 만든 엽서를 나눠주며 한 명씩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들의 미래를 어림칠 수 없다는 것. 그 사실이 되레 마누엘을 안도하게 했다.

   어머니는 나달나달한 레퍼토리를 다시 시작했다. 

   “좀 전에 네 누이가 전화했더라. 걘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쇼를 한다고 그러냐. 어릴 때부터 그랬잖니. 너한테 못되게 굴고. 참, 빅토리아 이모가 전화했는데 벌써 새 애인이 생겼다는구나, 남편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쯔쯔쯧. 슈크루트를 먹으러 가자는데, 이렇게 코끼리 다리를 하고서 어딜 다니냐. 요 봐라, 또 부었지? 안 되겠다, 주치의를 갈아치워야지. 이 약들 다 소용없다. 이러다 나도 네 아버지처럼 물 한 모금 못 넘기다 가게 되겠지.” 

   어머니는 손수건으로 이마와 눈가에 맺힌 땀을 찍어냈다.

   마누엘은 식탁 너머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활기가 다 빠진 얼굴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그다지 절실해 보이지 않았다. 요리사였던 아버지가 퇴직한 뒤로 두 사람은 매일 부대끼며 지냈다. 느닷없이 아버지가 연락해 이곳에 달려오면 어머니는 흔들의자에 앉아 입을 꾹 다문 채 레이스를 뜨고 있고, 아버지는 앞치마를 두른 채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스테인리스 연마 봉에 칼을 갈고는 법랑 냄비에서 식용 실로 동여맨 고깃덩이를 건져내 적당한 두께로 썰었다. 보기 좋게 접시에 담아 어머니 앞에 내려놓았다. 진득한 소스에 딸려 나온 월계수 잎을 으깬 감자 위에 살짝 얹었다. 월계수 잎은 ‘오늘 셰프와 자야 한다’는 익살맞은 의미였지만, 어머니는 그 사인을 못 본 체했다. 아버지는 토막 낸 소 등뼈에서 골수를 긁어내 바게트에 발라 마누엘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뻥 뚫린 뼛조각을 쩝쩝거리며 빨았는데 어머니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역정을 냈다. 이런 식이면 한 사람은 집 밖으로 사라진다는 걸 마누엘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거실 장식장에서 두 사람이 좋아하는 가수의 시디를 꺼내 오디오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했다. 피아노 반주에 이어 아즈나부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와인을 한 모금 넘기고 나서 입을 열었다. 에디트 피아프에게 거절당한 아즈나부르의 프러포즈로 시작해 피아프의 남자들을 죄다 저녁 식탁에 호출하였다. 마르셀 세르당의 죽음에 얽힌 스토리가 끝나자 아버지는 오랜만에 샤를 트레네를 들어 보자며 어머니에게 속삭였다. 폴 베를렌의 시에 곡을 붙인 가을 노래였다. 집 안의 공기가 훈훈해지고 아버지는 사흘 만에 어머니가 웃는 모습을 본다며 흡족해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오랜만에 심야 영화를 보러 갔다.

   “마리는 어찌 지내냐?” 어머니가 물었다. 

   “내일 집에서 저녁 먹기로 했어요.” 

   “마리는 나보다 더 프랑스적이야.” 어머니가 크로넨버그 맥주를 그에게 건네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누엘은 양손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명상 센터에서 성인이 된 마리와 재회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마누엘은 저녁거리를 사러 간 마트에서 마리를 다시 만났다. 마리는 몇몇 작가들과 공동 작업실을 사용했는데 지금은 층고가 높은 스튜디오를 얻어 작업실 겸 주거 공간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물은 어떤 이유로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지만, 흘러오던 방향으로 다시 방향을 바꿔 흐르는 바닷물처럼, 검은빛 물이 돌고 돌아 내게로 다시 온다면, 세상의 수많은 색을 모두 담아 왔다고 말해 줄 것 같아요.” 그녀는 지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마누엘은 시내에 있는 튀니지 요리 전문점에서 마리와 저녁 시간을 보냈다. 식사하던 중에 뜨거운 에너지가 몸의 중심으로 쏠려서 적잖이 당황했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날것의 상상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그는 고개를 돌리다 어둑한 유리창에 비친 한 동양 여자를 보았다. 맨얼굴에 빨간 립스틱, 검정 미디 원피스가 잘 어울렸다. 여자가 그의 시선을 따라 유리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집에서 한잔 더 해요.” 마리가 말했다. 마누엘은 마리를 바라보았다. 돌연한 직감에 마누엘의 호흡이 미세하게 거칠어졌다. 귓속에서 마라카스를 흔드는 소리가 났다.

   마리는 사춘기 때 처음으로 부모에게 반항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아주 먼 곳에서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며칠 동안 악몽을 꾸었다.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야 하는, 생사가 걸린 문제에 맞닥뜨렸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미래가 자신에게 올 수 있는지 의심하던 날들이었다. 버릴 수 없는 생각들이 덩어리가 되어 점점 방을 차지했다. 마리는 성장을 멈춰버린 것 같았다. 이러한 위기는 뮤리엘의 죽음 이후 또 한 번 찾아왔다. 뮤리엘은 마리가 처음 사귄 친구였다. 죽을 때까지 한 번도 타인의 발을 밟은 적이 없는 뮤리엘. 삼 년 전, 뮤리엘이 자살로 생을 끝낸 후 마리는 캔버스 앞에 설 수 없었다. 오직 뮤리엘의 색이었던 블랙에 매료되었을 뿐. 죽기 전날 밤에도 다음날과, 다음 달과, 내년의 일정까지 약속해 놓고 죽어버린 뮤리엘. 완벽히 배제되었다는 느낌에 마리는 멘붕에 빠졌다. 마리는 뮤리엘이 뛰어든 강에서 몇 번이고 자문해 보았다. 가깝게 지내던 것들을 떠나 어딘가 다른 곳으로 사라지는 어떤 느낌에 대해. 만약 뮤리엘이 절체절명의 이유를 댔다면 순순히 떠나보낼 수 있었을까? 마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수처럼 한순간에 벌어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떠나기도 할 것 같았다. 그러자 누군가를 잃었다는 상실감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생의 감각으로 이어져 자유와 재생으로 통하는 입구를 마련해 주었다.

   가능하다면 그림의 모든 배경을 블랙으로 칠하고 싶었다. 온전히 블랙인 블랙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작과 생명과 빛을 품은 블랙은 모든 색의 근원이었다. 마리는 블랙이 감춘 색들을 표면으로 드러내기 위해 검정 잉크를 분해했다. 마누엘은 마리의 작업실 한쪽 벽을 채운 그림을 보았다. 그녀가 말하길, 잉크의 번지는 성질과 종이의 흡수하는 성질을 이용해 결과물을 얻는데, 물기가 있는 종이에 잉크를 떨어뜨리면 잉크가 종이에 흡수되면서 넓게 퍼진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검정 잉크가 감추었던 여러 색깔이 정체를 드러냈다. 외적인 현실처럼 안쪽보다는 가장자리에서 더 잘 보였다. 

   “마리 같은 아이를 입양했어도 좋았을 거야. 나중에 집 안에서 뛰노는 애들도 보게 될 테고. 네 누이는 애당초 저밖에 모르니 굳이 애가 필요 없겠지.”

   마누엘은 고개를 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그는 입양에는 그저 관심이 없었다. ‘아베쎄데’를 익히기도 전에 자신을 태운 배가 안전한 연안에 닻을 내렸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식탁에서 가족과 일과를 공유하며 머리가 굵어졌다는 것. 그가 그의 본심을 갖게 부모님이 그를 믿어 주었다는 것. 그래서 조금 성가셨던 건, 자신의 과거를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할 때였다. 그는 웃으며 많은 입양 이야기의 공통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극의 발단을 기대했던 상대방의 실망한 표정이라니. 하지만 마리와 재회하고 난 뒤로는 입양이 얼마나 심각한 주제였는지를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키, 어린 마리를 만났던 초임 교사 시절. 그날 마누엘은 국경이 가까운 북동쪽 소도시에서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났다. 어린 마리는 양어머니와 교실 밖 복도에서 마누엘의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보다 더 작은 사내아이가 양어머니 뒤에 숨어 마누엘을 올려다보았다. 마리의 동생, 태호, 올리비에였다. 올리비에는 이미 두 살에 프랑스로 건너왔고, 마리는 뒤늦게 같은 가정에 입양된 경우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혈육이 아니었다. 

   “나도 한국에서 왔어.” 마누엘이 말했다. 

   올리비에가 마누엘의 말을 이해했는지 수줍게 웃었다. 마리는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다. 어린 마리는 학교에 온 지 한 달이 넘도록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시간에 벌떡 일어나더니 마누엘을 쏘아보았다. 귀밑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마리는 다급히 교실 뒤로 가서는 쭈그리고 앉아 쐐쐐 오줌을 누었다. 그러자 콩고에서 온 뮤리엘이 마리 옆에 나란히 앉더니 똑같이 쐐쐐 볼일을 보았다. 

   마누엘은 퇴근길에 역 부근에 있다는 한국 가게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한국산 스낵과 익살스러운 가면 하나를 발견했다. 한쪽으로 입매가 비뚤어진 독특한 가면이었다. 다음날, 마리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마누엘은 아이들에게 한국 문화를 소개하면서 가면을 보여주었다. 가면을 머리에 쓰고서 가게 주인이 알려준 대로 팔다리를 움직였다. ‘조오타, 말투기!’라고 추임새를 넣었다. 그때, 터져 나오던 마리의 웃음소리. 아이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마리를 보다가 전염된 것처럼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그마한 몸 안에 그토록 우렁찬 웃음소리를 가두고 있었을 줄이야. 

   지난달, 어머니의 생일을 맞아 몇몇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마리와 문규도 함께했다. 문규는 오 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마리는 마누엘과 시내에서 데이트를 할 때면 문규를 불러내어 즉석에서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마누엘은 그에게 ‘창’이라는 글자에 관해 물어 보았다. 문규는 깨끗한 인상의 호감형 청년인데도 불안에 싸인 것처럼 눈빛이 흔들리고 목소리가 침울했다. 천성이 낙천적인 마누엘은 문규의 불균형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호기심이 발동할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니었다. 그날 초대 받은 사람들은 더위 얘기로 시작해 시시콜콜한 일상사를 주고받으며 여름을 비난했다. 나아가 챗 GPT 시리즈나 창작 주체로서의 AI의 저작권에 대해, 고령자 돌봄 로봇의 출현에 대해 설왕설래했다. 머잖아 인간은 인공지능 기계에 굴복하거나 제거 대상이 될 것이므로 슈퍼 인간은 필요 불가결하다는 문규의 심각한 발언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시절엔 명상이나 요가로 수행을 쌓아야 한다고 누군가가 말하자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론 부족하다며 누군가가 공동체 의식에 대해 일갈했다. 결국엔 모두가 기다리는 바캉스 얘기로 잠시나마 여유를 부렸다. 어느 틈에 한국의 입양제도가 화제에 올랐다. 여전히 해외로 아이들을 보낸다는 문규의 말에 별안간 마리가 헛구역질을 했다. 그녀는 어둑해진 정원으로 나가더니 한참이 지난 뒤에 자리로 돌아왔다. 

   “혹시, 마리, 아이 가진 거야?” 

   사람들이 돌아갈 무렵, 누이가 마누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마누엘은 대답 대신 호두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누이에게 안겨 주며 등을 떠밀었다. 

   마누엘은 마리가 그녀의 집에 도착할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몸 상태를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 아이는 아녜요.” 

   마누엘은 주먹 쥔 손을 인중에 댄 채 생각에 빠졌다. 심각한 문제를 고민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서 뒤뜰로 나갔다.

   푸른 달빛이 뒤뜰의 잔디밭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마치 세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물속 같았다. 팔딱 튀어 올랐다 사라지는 물고기처럼 박쥐 떼가 머리 위를 빠르게 지나갔다. 마누엘은 맨발로 잔디밭을 걸어 보았다.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이 타인에게 달린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아느냐고 아버지가 어린 마누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마누엘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간을 요했다. 


   “어젯밤 꿈에 네 아버지가 찾아왔지 뭐냐.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아니?” 

   어머니가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시선을 천장에 고정하더니 소리를 꽥 질렀다. 

   “우리가 오십 년 동안 해오던 그 짓!” 어머니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누엘은 어머니를 부축해 침실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배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감았다. 눈가가 짓물러 있었다. 그는 갑작스레 몰려오는 피로감에 아무데나 드러눕고 싶었다. 땀에 젖은 겨드랑이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목덜미에서 어깻죽지까지 석고를 바른 것처럼 무지근했다. 아침에 거른 혈압약이 생각났다. 그는 식탁으로 돌아와 잔에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멀리서 구급차 소리가 들려왔다. 열흘째 계속되는 불볕더위로 온열질환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마누엘은 구급차에 실려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열 살 때였던가. 네다섯 명의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었다. 개중에 덩치가 큰 녀석이 마누엘을 벽에다 밀어붙이더니 둥근 티탄 코펠을 눈앞에 내밀었다. 

   “너, 진짜 프랑스 사람 되고 싶지?” 덩치가 말했다. 

   마누엘은 녀석을 기억했다. 이따금 학교에서 난데없이 나타나 원숭이 흉내를 내고는 달아나던 놈이었다. 덩치가 코펠 뚜껑을 열자, 아이들이 코를 싸쥐고 재빨리 물러났다. 역한 암모니아 향이 확 끼쳤다. 형태가 무너진 치즈 덩어리엔 푸른곰팡이가 퍼져 있었다. 아빠라면 단번에 치즈 이름을 알아맞힐 거라고 어린 마누엘은 생각했다. 

   “입 벌려!” 덩치가 눈을 부라리며 손가락으로 치즈를 떠서 마누엘의 입 속에 밀어 넣었다.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치즈 속살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누엘은 조금씩 치즈를 삼켰다. 뭐야, 잘 먹잖아. 아이들의 얼굴에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이번엔 덩치가 손가락 두 개를 사용해 치즈를 푹 떠서는 마누엘의 입 속에 욱여넣었다. 마누엘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치즈 때문이 아니라 녀석의 손톱이 잇몸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욕지기가 치받쳤다. 하지만 덩치는 멈추지 않았다. 순간, 마누엘은 덩치의 손가락을 꽉 물어버렸다. 덩치가 내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손가락을 빼려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더 세게 물어버렸다. 단짝인 티에리가 슬금슬금 뒤로 빠지는 게 보였다. 덩치가 주먹으로 마누엘의 머리통을 갈겼다. 마누엘은 움찔하면서도 손가락을 놔주지 않았다. 티에리가 한 아저씨를 데리고 왔다. 그제야 마누엘은 덩치의 손가락을 놓아 주었다. 그날 마누엘은 입안에서 여러 가지 맛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브레이크타임에 쉬러 온 아버지를 보자마자 현관에 뻣뻣이 선 채로 토하기 시작했다. 옆구리가 가렵고 눈두덩이 퉁퉁 붓더니 온몸에 발갛게 반점이 돋아났다.

   마누엘은 식탁에 놓인 라디오의 전원을 끄고 어머니의 침실로 향했다. 어머니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아침마다 성긴 은발을 이마 위로 넘겨 스무 개가 넘는 실핀으로 고정한 후 헤어스프레이를 뿌려야 안심하는 어머니. 어머니가 낮게 코를 골았다. 곧고 당당했던 어머니의 등은 이제 잠자는 동안에도 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린 마누엘이 낯선 이방인들에 둘러싸여 주눅이 들 때면 어린 그를 안아 주었다. 마누엘이 드니, 라는 성을 얻은 지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그렇게 기다리던 임신을 했다. 아버지는 어린 마누엘을 복덩이라고 불렀고 어머니는 아이는 둘이 커야 외롭지 않다며 즐거워했다. 

   어느샌가 잠에서 깬 어머니가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보았다.

   “선풍기라도 트세요. 저녁에 요 앞 공원에도 나가 보시고요.” 

   그의 말에 어머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뭉개진 어머니의 턱선이 바들바들 떨렸다. 

   “네가 이 동네를 몰라서 그러냐? 전염병은 둘째고, 길에 나가면 아직도 젊은것들이 날 흘끔거려!” 

   마누엘의 눈 밑에 경련이 일었다. 그의 두 손이 어머니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 어머니가 소리 없이 입을 벌린 채 몸을 비틀었다. 

   “엄마,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계속 이러면 오고 싶지 않아.” 

   그가 팽개치듯 어머니를 풀어 놓았다. 어머니가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안 갈 거지, 한국?” 어머니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나는 네가 한국에 돌아가면······ 고통스럽겠지만, 그래도 너를 위해서라면 행복해할 거야.” 

   어머니는 사십 대 후반까지 깐깐하면서도 유쾌한 독일어 교사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본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현실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마누엘은 어머니가 예전에 비해 얼마간 헐렁해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머니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마누엘은 차창을 열어 둔 채 에어컨을 조절했다. 어머니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손수건을 흔들었다. 그는 클랙슨을 짧게 두 번 울렸다.


   마리의 흰색 르노 클리오 옆에 진회색 푸조 3008이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 중이었다. 내일 저녁 약속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건 핑계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제과점표 벨기에산 초콜릿이 들려 있었다.

   일층 복도 안쪽에 있는 마리의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새된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가족회의 결과가 그거예요?” 마리의 목소리였다. “맞아요. 나보다 열다섯 살 많고, 이혼남에, 대출 빚도 있고. 그런 걸 말하는 거죠?”

   “대체 앙투안이 왜 싫다는 거니? 집안끼리도 잘 알고, 앞날도 창창하고, 내가 너였다면 벌써 잡았을 거야.”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어딘가 낯익은 여자 목소리였다.

   “게다가 왜 하필, 입양인이니?”

   “왜요, 비극이 두 배가 될 것 같아 걱정하는 거예요?” 마리가 말끝에 헛웃음을 쳤다. “당신들, 특히 당신 말이야. 여덟 살짜리 애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기억 안 나냐고!” 

   “너 또 무슨 망상이야?” 남자가 말했다. 

   마누엘은 문에서 두어 발짝 물러섰다. 인기척이 가깝게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마리가 문 앞을 지나 침실로 가는 모양이었다. 

   “너, 우리한테 이래도 돼? 분수도 모르고 날뛰고 있어.” 여자가 말했다.

   마누엘은 노크하려다 그만두었다. 가슴 속에서 점점 커지는 불덩어리 같은 게 늑골을 밀어내고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는 뒤돌아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국도로 들어서자 창턱에 제라늄 화분을 내놓은 주택단지가 나타났다. 저만치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흰색 풍력 발전기가 줄지어 서 있었다. 타워 끝의 터빈 날개가 느릿느릿 회전했다. 막바지로 치닫는 노란 유채밭이 지평선을 만들며 펼쳐져 있었다. 언젠가 마리가 했던 말이 돌멩이처럼 마누엘의 명치께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부모와 함께 행복을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우리의 생은 어떤 방식으로든 훼손되고 있다고. 마누엘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열어 둔 창으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그는 자동차 오디오에 저장된 라디오 채널을 연달아 눌러 보았다. 남자 진행자의 질문에 게스트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한 시간마다 열한 마리의 반려동물이 버려지는 거죠. 이 중 육십 퍼센트는 여름철에 버려지고요. 징역과 벌금형의 처벌 수위가 강화됐지만, 숫자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잔인한 바캉스가 시작된 거죠.”

   마누엘은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바꾸다가 음악 채널에 고정했다. 월드 뮤직 코너에 나온 게스트가 노래를 소개했다. 

   “이번 곡은 세자리아 에보라와 페드로 게라가 부릅니다. ‘시간과 침묵.’” 

   멀리 지평선까지 이어진 길에 한 대의 자동차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많은 이들이 바캉스를 떠난 모양이었다. 라디오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배음으로 한 팽팽한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튕겨 나왔다. 마누엘은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액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았다. ‘하늘에 외딴집, 바닷속에 정원, 네 가슴 속 종달새 한 마리······ 한순간, 산산이 깨져 버린 목소리.’ 그는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렸다. 그러다 어디쯤에선가 박자를 놓쳤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콧속이 시큰해졌다. 


   마누엘은 우편함에서 한 무더기의 우편물을 집어 들었다. 

   “바캉스가 시작됐소!” 자전거 벨을 울리며 장이 다가왔다. 마누엘은 장과 악수를 나눴다. 두 해 전, 마을 축제에서 장을 처음 만났다. 장이 이 마을로 이사 온 직후였다. 마누엘의 출생지를 중국으로 오해해 마누엘을 만날 때마다 중국 여행 계획을 말하곤 했다. 

   “손녀가 다 크면 우리 마누라도 한가해지잖아. 그때가 되면 우린 중국으로 떠날 걸세. 아예 거기 눌러앉아 살지도 몰라, 허허.” 장이 같이 떠나자고 했다. 자기 같으면 벌써 열 번도 넘게 고향에 갔다 왔을 거라며.

   현관으로 비쳐든 햇빛이 거실 바닥의 타일 위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마누엘은 복도 끝에 나 있는 유리문을 열고 뒤뜰로 나갔다. 두엄 냄새가 코끝에 와 닿았다. 늦은 오후의 햇볕이 비스듬히 잔디밭에 떨어졌다. 버드나무 그림자가 열 시 방향에서 길어지고 있었다. 뒤뜰 외벽에 붙여 만든 테라스가 열기로 가득했다. 마누엘은 테라스 상부에 설치된 접이식 차양을 펼쳤다. 옅은 그늘이 바닥에 드리워졌다. 그늘은 블랙이 아니었다. 그늘 속에서 사물들은 물기를 흡수한 것처럼 조금 짙은 빛깔로 또렷해졌다. 옆집과 경계를 이룬 낮은 돌담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건너왔다. 온 가족이 남쪽으로 바캉스를 떠나는 모양이었다.

   물 없이 털어 넣은 알약이 입천장에 들러붙었다. 마누엘은 냉장고에서 위스키 병을 집어 들다가 미끄러져 놓칠 뻔했다. 차가운 술병을 목덜미에 대고 지그시 눌렀다. 잔에 술을 따르고 얼음 두 조각을 집어넣었다. 뜨거운 차를 맛보듯 한 모금 머금었다 천천히 넘겼다. 짜릿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창고 출입문 옆, 보일러 작동 장치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기름이 떨어졌다는 알람이었다. 그는 작동 장치의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난방을 걱정하기엔 너무도 뜨거운 여름이었다. 이 집의 난방 설비공사를 맡았던 사람은 전처의 남편이 된 프랑수아였다. 그는 인건비를 제외하고 자재비만 적은 청구서를 마누엘에게 보냈다. 마누엘은 십 년 전에 전처와 헤어졌다.

   “당신은 너무 밝아, 슬픔이 없어.” 전처가 말했다. 

   전처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마누엘에게 무심해졌다. 

   “더는 안 되겠어.” 전처가 말했다. 

   “아이 때문이야?” 마누엘이 물었다. 

   “난 진심으로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 전처가 고개를 돌렸다.

   결혼한 지 십 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마누엘은 아이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아이들을 깨울 때 따뜻하게 발을 만져 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불임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전처가 피임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마누엘은 현관 벽면의 전신거울에 비친 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평균 키의 동양인이지만 어딘가 유럽인처럼 이목구비에 선과 그늘이 묻어 있었다. 오른쪽 광대 위에 까만 점 하나. 마누엘은 희끗희끗해진 관자놀이를 손으로 문댔다. 이제 책을 오래 들여다보면 눈앞이 어질해지고 글자들이 풀어져서 읽기가 힘들었다. 매일 아침, 혈압약을 삼키고 그 약들 가운데 이뇨제 성분의 부작용 때문에 요산을 조절하는 또 다른 약을 삼켰다. 약의 잠재된 부작용은 몸만 아니라 정신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두 달에 한 번 혈액 검사를 하고 칼륨 수치와 요산 수치에 따라 주치의는 처방전에 약을 더하거나 제했다. 

   “인샬라!” 마누엘은 아버지를 흉내 내 보았다.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아버지의 눈빛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마누, 딱 한 잔만. 그러면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겠어.” 

   마누엘은 와인이 담긴 스테인리스 플라스크를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버지가 눈을 감은 채 마누엘의 손을 오랫동안 쥐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아버지는 숨을 거뒀다. 만약 그때 와인을 건네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좀 더 버틸 수 있었을까. 그런 질문의 끝에는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들이 줄줄이 딸려 나왔다. 아버지가 다시 쓰러져 병원에 들어가기 한 달 전이었다. 아버지는 연락도 없이 캄캄한 밤중에 눈길을 달려 마누엘을 보러 왔다. 현관문을 열자 아버지가 양손에 물건을 잔뜩 들고 있었다. 

   “오후에 장 보러 룩셈부르크에 갔었다. 간 김에 너 필요한 것도 사왔어.” 

   아버지가 물건들을 식탁 위에 부려 놓았다. ‘장봉’과 ‘소시송’. 위스키와 삼 리터짜리 박스 와인. 그리고 쇼핑백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종이 재질의 까만 상자에 코히바 베히케, 라는 로고가 찍혀 있었다. 

   “이건 언젠가 네가 한국에 가게 되면, 네 친아버지 선물로 사두었던 거다. 그런데 너무 오래 보관한 모양이다.” 

   마누엘은 아버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개봉한 상자 안에는 옻칠로 마감한 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다. 상자에서 텁텁한 흙내가 났다. 아버지가 시가 한 개비를 뽑아 코밑으로 가져가서 향을 맡았다. 시가에 붙은 홀로그램 로고가 반짝거렸다. 

   “아직 향이 괜찮다. 한번 피워 보자.” 

   아버지가 양날 커터로 시가 끝을 자른 후 성냥을 그었다. 시가를 돌려 가며 고르게 불을 붙이는데 겉장이 화르륵 불꽃을 만들었다. 

   “습기가 다 빠졌구나.” 

   아버지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시가를 입에 물고서 연기를 빨아 당겼다. 입안에서 연기를 궁굴리다가 천천히 내뿜었다. 연기는 소용돌이를 그리다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마누엘은 시가를 건네받아 가볍게 빨아 당겼다. 연기에서 흐릿한 나무 향이 났다. 그날 밤 아버지는 마누엘과 밤늦도록 깨어 있었다. 

   “마누, 너 생굴 처음 먹었을 때 기억하냐? 어린애가 어찌나 생굴을 잘 먹던지. 난 네가 틀림없이 바닷가 근처에서 태어났을 거라고 믿었다. 네 디엔에이에 새겨진 거야.” 

   아버지의 초점 없는 눈이 허공의 어딘가에 머물렀다. 마누엘은 그때가 언제였는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생굴을 함께 먹었을 터였다. 마누엘은 언젠가 아버지가 생굴 먹는 방법을 찬찬히 알려주던 그 순간만큼은 어렴풋이 기억했다. 어린 마누엘은 레몬즙을 떨어뜨리면 꼼질대는 생굴이 징그러웠다. 하지만 식구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돼 있어 살아 있는 생굴을 덥석 물었다. 

   마누엘은 거실 소파에 앉아 우편물을 살폈다. 세금 고지서와 상품 카탈로그, 은행 카드 명세서와 정기 구독 잡지들. 그리고 문규가 보낸 서류 봉투가 있었다. 봉투 안에는 엽서 한 장과 작은 책이 있었는데 펼쳐 보니 시집이었다. 마누엘은 엽서를 읽어 보았다.


   마누엘 선생님,

   메일을 보내려다 서울 야경이 인쇄된 빈티지 느낌의 엽서를 발견해 선생님께 보내기로 마음먹었어요. 

   선생님 부탁대로 입양기관에 찾아갔습니다. 

   마리의 엄마가 몇 차례 마리를 만나고 싶어 했는데, 마리가 거부했다고 합니다. 마리는 두 살 때 보육원에 맡겨졌고, 마리의 조부모가 입양에 동의했습니다. 올리비에와 달리 친모에게 직접 버림받지 않아서, 마리에게 조금은 위로가 될까요? 

   선생님 파일도 찾아봤는데, 가족에 관한 기록이 전무입니다(너무 비인간적입니다).

   보내드리는 김혜순의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은 계속 한글 공부 하면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쉰네 번째 시, 「사색과 슬픔의 빛, 울트라마린 블루」를 좋아합니다. 선생님을 둘러싼 빛깔은 어떤 것일까요?

   하루에 네 번은 샤워를 해야 하는 찜통더위입니다. 그곳도 비슷하겠죠? 

   그래도 한국엔 없는 긴 바캉스가 부럽기만 합니다.

서울에서 문규


   마리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마누엘은 그녀의 집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차례 신호음이 울리고 낯선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자가 서둘러 마리를 부르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마리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건너왔다. 늘 그랬듯, 별일 없는지를 물어 보았다. 그녀는 별일 없다며 내일 저녁 약속을 먼저 말했다. 그러고는 잠깐 뜸을 들인 후 덧붙였다. 

   “고모랑 고모부가 와 있어요. 당신에게 안부 전해요.” 

   마누엘은 마리의 고모부 앙리를 알고 있었다. 앙리는 마누엘이 거래하는 은행의 부지점장이었다. 마누엘은 실눈을 뜨고 벽의 어딘가를 노려봤다. 짧은 침묵을 깨고 마리가 말을 이었다. 

   “부동산중개소에서 임차인을 찾았대요. 날짜에 맞춰 이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예정대로 창고를 정리해야겠어. 제법 큰 아틀리에가 생기겠는걸.” 

   마누엘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설핏 웃었다. 마리는 전시회 준비로 며칠간 잠을 설쳐 입술에 물집이 잡혔다고 했다. 그는 입맞춤을 보낸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마누엘은 손목 안쪽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일 분에 팔십bpm. 이 정도면 정상이었다. 

   마리는 다시 물감을 사용했다. 직접 붓을 사용하는 대신, 간접적인 운동성을 갖추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곤 했다. 가령 묽은 물감을 부은 캔버스를 상하좌우로 기울이다 보면 물감이 흘러가다가 얼룩 같은 비정형의 무늬를 만들었다. 투명도가 높은 물감으로 이 과정을 반복하면 캔버스에는 여러 층이 중첩되어 블랙이 생성되었다.

   “어쩌면 그림을 그리는 건 내가 아니라 우연인지도 몰라요. 그렇게 제 무의식의 중층 같은 검은빛이 만들어지는 거겠죠.” 

   마리는 늘 작업하기 전, 팔로산토 스틱을 태워 주변을 정화했다. 그러면 연기를 타고 블랙에 숨어 있던 그녀의 미약한 감정들이 하나둘 드러났다. 최근에 한 작업이라며 창문만 한 그림을 보여주었다. 캔버스에 그려진 인물들의 눈은 구멍처럼 검푸르렀다. 

   마누엘은 창고에 치워 둔 책장 맨 아래 칸에서 상자를 찾아냈다. 상자 안에는 어린 그가 한국에서 입고 온 옷과 양말과 신발이 들어 있었다. 옷 아래엔 흰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제법 굵은 밧줄은 언젠가 그가 매듭을 지어 놓은 그대로였다. 둥글게 벌어진 공간으로 손을 넣어 보았다. 줄 끝을 당기자 공간이 줄어들면서 손목을 꽉 조였다. 그는 상자 뚜껑을 덮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자신도 모르게 상자 위에 놓인 손이 자꾸 상자를 쓸고 있었다. 

   정원의 텃밭에는 탄저병에 걸린 토마토가 썩어 가고 있었다. 집의 절반을 차지한 창고 뒤편에 군락을 이룬 작약이 시들어 갔다. 마누엘은 뒤뜰 구석에 서 있는 버드나무 밑에서 흰 봉투에 불을 붙였다. 언젠가 그가 써내려간 유서였다. 유서의 내용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마누엘은 불붙은 봉투를 상자 속에 던졌다. 불길이 휘발유를 끼얹은 밧줄로 옮아가자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공중으로 솟구치는 연기는 나무가 내뿜는 수증기처럼 가지와 가지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는 검게 타고 있는 상자 속 물건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웃음의 전도체. 문득 대학 시절에 얻은 별명이 생각났다. 저만치 성당에서 저녁 일곱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마을의 개들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동쪽 구릉에 있는 사일로 지붕 위로 어제처럼 저녁이 내리고 있었다. 마누엘은 이 초저녁 박명을 자신의 빛깔로 삼고 싶었다. 폐허. 믿음이 무너진 자리. 적요한 거리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느낌. 어둠이 세상을 덮어버리기 전, 간신히 물속 같은 뒷모습을 보여주는 빛은 어딘가로 돌아가고픈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천천히 나무 주위를 걸어 보았다.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사랑을 위해서’였다. 마누엘은 사랑의 다른 말을 슬픔이라고 명명했다. 깊은 사랑. 사랑이여, 입에 재갈을 물리고 저만치 달아나 조소하는 사랑이여. 기회만 있으면 목덜미를 사정없이 짓누르는 사랑의 손아귀! 사랑이 날것인 그대로 말을 걸어 왔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눈이 퇴화한 심해어처럼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모든 장엄한 것들과 재회한 듯 나무에 입을 맞추며 나직이 속삭였다. 오늘부터 시작된 바캉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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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새해 주나영 우기 막바지인 3월 아침, 조식당에 안까지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직원은 사다리에 올라 창에 붙은 검은 시트지를 문질렀다. 들뜬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눌렀지만 쉽게 붙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해서 창을 가려야 하나 싶었다. 어젯밤 체크인할 때 받은 안내문 상단에는 영어로 ‘침묵의 날(녜삐 데이)’이라는 낯선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루 동안 발리의 불빛과 소음을 줄이며, 투숙객의 호텔 외부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안내문을 건네던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새해 첫날을 아주 조용하게 보내는 풍습이 있거든요.” 나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호텔 직원들은 목소리를 낮췄고, 손님들도 주변을 살피며 말을 줄이는 듯했다. 사다리 위의 직원은 테이프를 한 조각 더 잘라 시트지 가장자리에 붙였다. 그래도 한쪽이 다시 들뜨자 시트지 한 장을 떼어 사다리 아래로 내려보냈다. 창의 절반쯤이 드러났고, 유리 바깥 면을 따라 빗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은 케이지-프리 에그 화이트 오믈렛을 주문했다. 쉰을 넘긴 뒤부터 식단과 운동에 부쩍 엄격해졌다. 디종 머스터드 병을 열어 숟가락으로 접시 귀퉁이에 덜어 놓은 뒤, 오믈렛을 잘라 찍어 먹었다. 면도를 공들여 한 듯 턱끝이 말끔했다. 맞은편에 앉은 혜리는 빵 바구니에서 올리브 치아바타를 집어 들더니 박혀 있는 올리브만 손끝으로 빼 먹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어깨에 들러붙어 있었다. 머리를 귀 뒤로 넘길 때마다 손가락에 물기가 묻었다. 나는 냅킨 상자를 혜리 쪽으로 밀었다가 멈추었다. 혜리는 이미 옆에 놓인 냅킨으로 손끝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커피는 식어 있었다. 혜리는 남편과 전처 사이의 딸이다. 남편은 나보다 열다섯 살 많고, 혜리는 나보다 열다섯 살 어리다. 혜리가 초등학생 때 엄마와 함께 호주로 건너간 뒤, 남편은 일 년에 한두 번 혜리를 만났다.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빠짐없이 선물을 보냈다. 남편이 서재에서 혜리와 영상 통화를 하는 날이면 나는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를 조금 줄였다. 주방에 갔다가 웃음소리가 들리면 물병만 꺼내 돌아왔다. 통화가 길어지는 날에는 먼저 씻고 침실로 들어갔다. 남편은 통화를 마친 뒤 혜리의 학교생활과 새로 키우기 시작한 동물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나는 그가 보여 준 사진을 몇 장 넘겨본 뒤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혜리는 빵에서 올리브를 하나 더 빼 입에 넣었다. 남편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혼인신고를 했지만 결혼식은 혜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미뤄 왔다. 결혼식은 석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사흘 정도 쉬고 오자고 한 것도, 한국과 호주의 중간쯤인 발리에서 혜리를 만나자고 한 것도 남편이었다. 출발 전날 밤, 남편은 서재에서 청첩장이 든 봉투를 가져왔다. 구겨지지 않도록 얇은 파일 사이에 끼워 여행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혜리는 아보카도 스프레드를 빵 위에 고르게 펴 발랐다. 한입 베어 물자 빵 껍질이 바스러져

  • 주나영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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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호 장희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공기가 차고 맑은 곳. 다른 곳보다 해가 빨리 뜨고 지는.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희재에게서 그가 지내고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우듬지 너머로 뜨는 어슴푸레한 새벽 동이나 찹찹한 분위기,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같은 임야를 떠올렸다. “죽어버렸으면.” 희재는 허공 속의 한 점을 보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곳에서 죽어버렸으면. 희재는 어머니가 복수가 찬 채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분명히 그때와는 다른 뉘앙스가 있다고 느꼈는데,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른 아침부터 희재와 나는 서둘렀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입을 헹구고, 어제 벗어두었던 청바지를 주섬주섬 입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희재는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양손으로 손잡이를 쥔 채 창문으로 머리를 기댔다. 저기 뭐가 죽은 것 같아. 아니다, 다시 보니까 없어. 진짜 아무것도 없어. 희재는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혼자 말하고 답했다. 한참 후 주위가 고요해진 것 같아 옆을 보니 희재가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백반과 우동을 나누어 먹었다. 밥을 다 먹고도 시간이 남아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통유리창 너머로 구름 한 점 없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과 휴게소 뒤편으로 펼쳐진 강줄기를 바라보았다.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휴가철이 지나서인지 대체로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없었다.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왜 그렇게 서둘렀냐고 묻자 희재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희재의 아버지 얼굴을 보고 안부를 확인한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그는 삼 년 전 아내가 간경화로 죽고 난 후 홀로 지내다 언제부턴가 야산에서 지내고 있었다. 양산에 있던 그가 어떻게 산천에 있는 그곳으로 들어가 살게 됐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미처 주변을 정리하지도 않았다. 아직도 그가 살던 집 냉장고에는 그가 먹다 남긴 반찬들이 썩어가고 있을 터였다. 희재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적부터 기르던 식물들, 호야 나무, 산세비에리아, 스투키가 말라비틀어진 채 죽어 있을 것이다. 나는 먼지가 가득한 집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부터 희재와 희재의 가족이 살았던 집. 희재와 나는 명절이면 그곳에 가서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 돌아오곤 했다. 간간이 희재와 희재의 어머니, 내가 웃을 때면 그는 크고 검은 눈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이니까.” 그가 왜 그런 곳까지 가게 되었을까 하고 묻자 희재가 대답했다. 자신도 우연히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뿐 더는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뭐든 다 자기 멋대로인 사람.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에 다른 사람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냥 그런 사람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죽어버렸으면. 나는 희재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본 그는 그저 평범한 남자였다. 말이 없고 등이 조금 굽은 왜소한 노인. 그는 묵묵히

  • 장희원
  • 2026-08-01

문장웹진 소설

내 마음이야

내 마음이야 이갑수 퇴근하고 싶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신나는 음악을 듣는다. 눈을 감고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린다. 졸업, 제대, 여행, 생일파티, 800만 원 복권 당첨, 첫 키스…… 아니 첫 키스는 빼자. 그리고 명상을 한다. 생각을 비우고 차분하게. 절대 조금이라도 우울해선 안 된다. 어제도 제시간에 퇴근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 회사가 정부의 근로자 지원프로그램 시범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지난달부터 퇴근하기 전에 우울증 지수를 체크 한다. 보건복지부가 대학 연구소와 산학협력으로 개발했다는 ‘뉴진’이라는 우울증 측정기는 헬스장의 인바디 측정기처럼 생겼다. 악력기처럼 생긴 손잡이를 잡고 발판 위에 올라서면 우울증 지수가 100분위로 표시되는데, 우울증 지수가 50이 넘는 사람은 상담을 받으러 가야 한다. 어떤 원리로 우울증을 측정하는 건지는 모른다. 아무리 사람의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몸을 측정해서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몸을 통하지 않고는 마음을 알 방법이 없으니 둘 사이의 어떤 메커니즘을 알면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시범 사업이 끝나고 일반에 공개가 되면 측정 원리도 밝혀질 테니 기다리면 곧 알게 될 일이다. - 80.00 오늘도 실패다. 점점 더 올라가고 있었다. 첫날에는 51이었고, 그날 상담은 5분 만에 끝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신기한 체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 요즘 기분은 어때요? 강 박사의 첫 질문은 항상 똑같다. -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그냥 괜찮습니다. 처음 그 질문은 받았을 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 무감각한 것도 우울증세일 수 있어요. 일단 지켜봅시다. 강 박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지난 한 달간 나를 지켜본 결과는 부정적일 게 분명하다. 내가 상담을 받으며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수치가 올라가고 있으니까. 정시에 퇴근하는 직원들을 부러워하며 상담실로 올라갔다. 내 앞에 대기자는 일곱 명, 네 명은 자주 보는 얼굴이고, 세 명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우울증 지수가 높아서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다들 정말 우울해 보였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표정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상담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로 강 박사의 얼굴이 보였다. 이 지원프로그램은 경력형 일자리 사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은퇴한 의사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효과도 있으니까. 정부 입장에서는 두 가지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좋은 정책이었다. 강 박사도 대학병원에서 정년 퇴임한 정신과 전문의다. 강 박사는 슬램덩크에 나오는 안 감독님을 닮았다. KFC의 샌더스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흰 양복 대신 흰 가운을 입고 있다는 것 빼면 정말 똑같았다. 강 박사를 보면 치킨이 먹고 싶었다. - 요즘 기분은 어때요? 자리에 앉자마자 강 박사가 모니터의 차트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전에 없이

  • 이갑수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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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내일은푸른비
    감동했어요

    불안이라는 개념은 추상적입니다. 불안을 모르는 마누엘이라는 인물은 경계에 선 자로서의 충격을 겪는 극적인 사실성을 보입니다. 불안을 모른다고 말하는 마누엘의 관점으로 표현되는 문장과 의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인격을 그리는 극한 미학으로 운용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추상성(의 감정), 극적인 사실성(의 현실), 극한 미학(의 인격)이라는 이 삼박자의 결합과 조화가 궁극적으로 좌절하지 않는 인간, 이 아니라 인간은 좌절할 수 없다라는 심미성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안을 모르는 인간이라니!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체험을 문장으로 조직화하는 한계를 발견하는 작가에게는 돌파할 서사나 정서가 필요할 겁니다. 생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는 게 아니라, 생이라는 현실성을 인정할 때 드러나는 인격을 작가는 마누엘을 통해 실현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가 경험하는 생에 대한 이면들을 마누엘과 마리를 통해 구현해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격이 있습니다. 잊었던 식견과 품격을 떠올리게 하면서 읽어가는 동안 마누엘이 스스로 불안이 없는 세계를 바캉스처럼 잘 다녀오기를 응원하게 됩니다. 제목처럼 아이러니성을 체험하는 이 소설에 크게 위로 받고 갑니다. 저도 불안을 모르는 인간이고 싶다는 공감대를 이 소설 한 편에서 느낄 수 있어서 작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 2024-11-07 15:31:46
    내일은푸른비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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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다곰젤리
    감동했어요

    나쵸를 먹으면서 보게 만드는 작가의 힘. 다 읽고 나서도 한 봉의 나쵸를 또 먹게 되었다.

    • 2024-11-11 09:56:24
    판다곰젤리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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