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의 일
- 작성일 202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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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의 일
신연선
1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집에 가려는데 병원 주차장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생전 땡볕 아래에서 맨얼굴 내보인 적 없던 듯 희디흰 얼굴이었다. 떨고 있는 모습이 사뭇 눈길을 끌었다. 낯선 땅에 홀로 떨어진 모습 같기도 했다. 나의 멍한 눈과 그 사람의 흔들리는 눈이 흐린 하늘 아래 잠깐 마주쳤다. 추운데 얼른 타요, 차 안에서 동생들이 소리쳤고 나는 그야말로 쓰러지듯 차에 올랐다. 차는 순식간에 주차장을 빠져나와 앞으로 나아갔다. 차의 속도만큼 빠르게 창밖 풍경이 뒤로 달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너무나 피곤했다.
누님, 다 왔소. 일어나쇼. 막내 목소리가 꿈결의 경계를 지나 점차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른 동생들을 내려 주고 또 이동하는 내내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바윗덩이가 짓누르는 듯한 어깨의 피로는 여전했다. 습관처럼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차에서 내리자 막내가 뒷자석에 있던 남편의 유골함을 조심히 꺼내 내게 안기고는 돌아섰다. 막내는 장례를 치르는 내내 살뜰했다. 하염없이 넋 놓고 있는 나를 대신해 번거로운 장례 절차를 세심하게 따져 가며 봐주었다. 큰소리 한 번 나지 않게 해 준 것이 고마웠으나 저녁 먹고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누가 밥을 차린단 말인가. 대충 한 상 차리는 것이야 일도 아니지만. 나는 그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눈치가 어땠는지 막내도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 걷는 뒷모습이 이십오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꼭 닮아 있었다. 많이 늙었구나. 내가 쟤를 업어 키웠는데. 작기도 작았고, 울기는 또 얼마나 울었는지 녀석이 잠시 숨을 고르느라 울음을 멈추면 귀가 멍할 정도였다. 시간은 어째서 쏘아 놓은 화살일까. 그 까칠한 아기가 늙은 아버지 뒷모습을 하고 구부정 걸어갈 때까지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기분이었다.
집으로 들어서자 묵은 공기 냄새가 났다. 그 경황 중에 습관대로 개켜 둔 남편의 이부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현관 한쪽에 유골함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자리를 찾아 줘야 할 것이었지만, 일단 그대로 두자.
집이 적막하다.
남편과 있을 때도 소란한 적은 거의 없던 곳이다. 남편은 말하는 것을 귀찮아했다. 귀찮아하다가 잘 못하게 된 사람. 질문을 하면 행동으로 답하던 사람. 술을 마시면 말이 다소 늘었지만 곧 잠이 들어 버렸으므로 그러는 시간도 짧았다. 그런대로 산 지 사십 년이 훌쩍이었다. 든든하지도 믿음직스럽지도 않은 반려자였는데 빈자리가 이렇게 나나. 신발을 벗고 집에 올라서서 TV부터 켰다. 흘러나오는 말소리를 들으니 어느 정도 평상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가운데가 꺼진 소파, 색이 바랜 커튼, 구석구석이 들뜬 장판, 시간에 닳은 채 집의 일부가 된 것들. 이곳도 반짝이던 때가 있었다. 연년생 칭얼대는 두 애들을 데리고 이사하면서도 그때는 힘든 줄을 몰랐다. 평생 처음 가져 보는 내 집이었고, 창틀이니 화장실이니 구석구석 묵은 때를 닦느라 한동안 근육통을 달고 살면서도 매일이 즐거웠다. 남편이 상의 한마디 없이 입에서 졸졸 물 뿜는 개구리 모형이 놓인 투박한 돌분수를 들였을 때도 나는 귀찮은 줄 모르고 때때로 물때 청소를 해 가며 관리했다. 아무리 내 집이래도 이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한동안은 그 재미로 살았다. 개구리는 마른 입을 한 지 오래고, 수조 안에는 남편의 약통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집 곳곳에 있는 남편 물건들을 다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았다. 병이 깊어지면서 독해진 남편의 냄새가 밴 옷가지부터 모두 버려야 했다. 남편이 종일 누워 있던 저 이불도 함께. 어제 딸 지민이는 제 아빠 쓰던 것들 정리해서 어디다 기부를 하겠다고 했었다. 이런 겨울에 이불 필요한 곳이 많으니까 그냥 버리지 말라고. 병나서 죽은 사람이 쓰던 것을 뭐 좋다고. 그러는 거 아니다. 동티나게. 단호하게 말하자 지민이는 환경 오염이니 유기견이니 입에 올리면서 엄마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해, 하고 트집을 잡았다. 아무리 똑똑한 척을 해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건 모르는 지민이 얼굴이 생전 처음으로 미워 보였다.
급히 허기가 몰려왔다. 지긋지긋한 허기. 허기는 어김없이 나를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로 데려갔다. 형제만 열 명에 우리가 ‘하얀 할머니’라고 부르던 아버지의 할머니까지 모두 열다섯 명이 살던 좁은 집에는 언제나 먹을 것이 부족했다. 그마저도 먹을 것이 생기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남자 형제들에게 우선 돌아갔다. 어머니는 잡풀이건 나무껍질이건 뭐든 구해와 거친 보리쌀을 섞어 멀건 죽을 만들었고, 몸이 약했던 나는 그걸 먹으면 어김없이 설사를 했었다. 저건 곧 죽겠다, 누워 있던 나를 보고 할머니가 건조하게 뱉은 말이 지금까지도 귀에 붙어 있었다.
거실을 지나 내 방으로 들어가서 곧장 이불을 폈다. 입고 있던 옷을 아무렇게나 벗고 그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 빛에 눈이 부셨다. 불을 환하게 켜 놓았다고 투덜대는 남편이 스위치를 탁 꺼 버릴 것 같았다. 그럴 사람은 이제 없었다. TV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2
엄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문자 보면 전화 줘요.
깜빡 졸았나 했는데 해가 중천이었다. 꿈도 없는 깨끗한 잠이었다. 곧 눈이 올 모양인지 창으로 내려오는 빛이 탁했다. 양 무릎이 욱신거리는 걸 보니 작은 눈은 아닐 것 같았다. 길게 하품을 하고 부재중 전화 세 통과 함께 딸애가 보낸 문자가 찍혀 있는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그저 보고만 있자니 화면이 슬며시 어두워지다 이내 꺼졌다. 몸은 여전히 잠 속에 있는 듯 무거웠다. 내키면 다시 자도 된다. 전화기를 머리맡에 되는대로 내려놓고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무릎을 끌어당겼다. 건조한 장례식장에서는 내내 코가 막혀 입으로 숨을 쉬어야 했는데 지금은 편안하게 공기가 코로 들고 났다. 나는 마음에 일렁임 하나 없는 고요함을 느꼈다.
잠으로 넘어가는 혼곤한 틈에 전화벨이 울렸다. 한숨을 내쉬자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여태 잤어요? 내가 보낸 문자는 봤어? 밥은 먹었나 하고. 이번 주말에 갈게요. 엄마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답이 궁금하기는 한 건지, 배려인 듯 아닌 듯 용건 바쁘게 말을 걸어오는 지민이에게 나는 나중에 오라 할 때 오라고, 지금은 됐다고 답했다. 귀찮은 내색을 숨기지도 않고 하는 내 말에 지민이는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얕은 숨을 내쉬었다. 엄마아. 지민이는 저 할 말 있을 때 꼭 하는 식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화 끊는다, 내가 말하자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나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통화를 끝냈다.
오겠다는 애들을 마다한 것은 처음이다. 오라는 말을 먼저 하지는 않았어도 온다는 애들은 반기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새끼들은 그리운 법. 그만큼 애들이 자주 오지 않기도 했다. 애들을 맞느라 알도 잘 낳고 생긴 것도 예쁜 닭을 잡을 때면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흔들리긴 했고, 그러면서도 내 새끼들 입에 그것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 정말로 배가 불렀다. 등허리가 뜨뜻해지는 기분 같은 것이 있었다. 이걸 보려고 그 지겨운 순간들을 겪어 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애들이 하나씩 집을 나가고 남편과 둘만 남자 집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소리가 사라진 집에서 나는 낮이나 밤이나 라디오를 틀었다. 자다가도 무소음에 놀라 깰 때면 그대로 일어나서 식탁에 앉아 새벽 라디오를 들었다. 소리, 무엇보다 사람 목소리. 그게 왜 그토록 간절했을까. 그러는 걸 알면서도 남편은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매일처럼 아이들과 통화해도 가시지 않던 허전함이 지금껏 쌓여 몸 한구석에 돌처럼 굳어 있다는 사실을 남편은 눈 감을 때까지 몰랐을 것이다. 이젠 상관이 없었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정자 씨 되시죠? 사무적인 목소리의 여자가 내 이름을 확인했다. 누구신가요?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는 내 목소리에 내가 진력나는 것을 느끼면서 답했다. 장례식장이라고 밝힌 여자는 상주 방에 갈색 손가방을 두고 갔다고 찾아가시라고 말했다. 오셔서 안내 데스크에 문의하시면 됩니다. 일주일 안에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신분증에, 온갖 카드와 영수증, 립스틱, 반창고, 손톱깎이와 귀이개까지 가득 들어서 크기에 비해 묵직한 내 가방. 아들 현민이는 툭하면 그 가방에 손을 댔었다. 남편이 알면 정말로 손목이 부러질지도 몰랐기 때문에 내 선에서 손버릇을 단속하면서도 다섯 번에 한 번은 모르는 척했다. 진짜로 잘못될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현민이 팔 개월 때 그 튼튼하던 애가 장이 꼬여 죽을 뻔했는데, 까무러치게 울고 넘어가는 애를 안고 한밤중 빗속에서 잡히지도 않는 택시를 기다리느라 발 굴리던 순간이며 새파랗게 질려 기절한 애를 보고 재수 없다고 낮게 욕을 하던 택시 기사의 목소리며 우리 애 좀 살려 달라고 울며 사정하는 내게 가망은 없겠지만 일단 수술이나 해보자던 의사의 무심한 말투가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곤 했다. 지민이도, 남편도 내가 그 일을 꺼낼 때면 대체 언제 적 얘기를 아직까지 하느냐고, 그만 좀 하라고 진저리를 냈다. 또 옛날얘기, 엄마는 왜 맨날 옛날얘기만 해? 지민이는 나더러 과거에만 사는 사람 같다고 말했다. 제발 지금을 살아요, 하면서. 지금을 살라니. 나는 언제나 지금을 살았다. 지난 순간들이 나에게 변함없이 현재였을 뿐이다. 하얀 쌀밥을 밥그릇에 담을 때면 이것 한 숟가락이 그토록 간절했던 어린 내가 되었고,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하고 마는 지민이를 보면 어른들 기침 소리에도 기가 죽는 허약한 넷째 딸을 바라보던 내 어머니가 되었다. 현민이는 어떤가. 태어날 때부터 현민이는 꼭 내가 업고 다니던 막내 같아서 그 애를 잃을 뻔했다는 사실이 언제나 내 인생을 뒤집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게 했다. 다름 아닌 그런 내가 현민이를 야물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현민이가 끝내 고등학교를 도중에 관두고 오 년 넘게 제 방에 박혀서 나오지 않을 때 매일 했었다. 그것도 지금은 다 지난 얘기다.
그나저나 가방을 두고 오다니. 그 가방을 지니고 다닌 지 삼십 년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거의 내 몸 일부나 다름이 없었다. 손때가 묻어 갈색이라기보다 짙은 회색에 가까워진 바닥 양 모서리는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 매만지기 좋았고, 그 안에는 필요한 것들이 정확히 내가 정리한 상태로 갖춰져 있었다. 지민이가 자신이 첫 월급으로 백화점에서 사 준 가방을 아꼈다 뭐 할 거냐고 탓해도 나는 내 가방만이 좋았다.
정신이 없긴 없었다. 없던 줄도 몰랐던 가방이 수중에 없는 걸 깨닫자 닻을 놓친 배처럼 마음이 흔들렸다. 순간 어제 주차장에서 본 사람이 떠올랐다. 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나 쓸쓸해 보였을까. 나는 아직까지 그이가 거기 그대로 있을 것 같다는 이상한 상상을 했다.
3
사흘 장례가 끝나고 딱 하루 지났을 뿐인데 장례식장이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생각 없이 걸쳐 입고 나온 꽃자줏빛 패딩이 그제야 신경 쓰였다. 입구에 머뭇거리며 서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바람에 풀려 버린 목도리를 여미면서 지나는 젊은 여자 뒤로 이 찬 날씨에 달랑 셔츠 하나만 걸친 채 담배를 태우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하나같이 굳은 얼굴들이었다. 다른 표정을 허용하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몰랐다. 얼른 가방만 찾아서 나오자, 생각하는 순간 왼쪽 가슴이 쥐어짜듯 아파 왔다. 상을 치르는 동안 협심증약 챙겨 먹는 것을 관뒀었다. 상복을 입고서 약을 챙겨 먹는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산 사람은 살아. 칠십이 넘도록 건물 청소 일을 하는 둘째 언니가 퇴근 후에 장례식장에 와서 한 얘기였다. 이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형부는 눈 떠서 잠들 때까지 술을 들이붓는 사람이었고, 막내 아들 경호가 채 세 살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떴다. 경호가 우리 지민이보다 한 살이 많았던가. 언니는 혼자서 애들 세 명을 시집 장가까지 보냈다. 그 세월을 어떻게 버텼대, 내가 중얼거리자 언니가 한 말이었다. 산 사람은 살아.
통증이 옅어지자 찬 공기가 시원하게 가슴으로 들어왔다. 머리가 맑아지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붓집에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강 사장이 사랑이 엄마 편에 조의금을 보내왔으니 인사도 해야겠고. 갓 나온 순두부가 있으면 좋겠다.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른 것이 얼마 만인지 몰랐다. 조금 흐뭇해진 마음으로 장례식장 계단을 오르면서 패딩 자락을 툭툭 털었다.
낮이건 밤이건 쨍한 조명 탓에 눈이 시리도록 환한 건물 내부로 들어서니 시선이 자연스레 남편의 상을 치른 ‘3호실’ 빈소에 닿았다. 그새 다른 사람의 장례가 진행 중이었다. 산 사람이 사는 동안 매일 사람이 죽는 것이다. 그럴 수가 있나. 그럴 수 있다. 사는 게 죽은 사람들의 그림자 안에서 까부는 노릇임을 모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오래 병환을 앓았던 것일 텐데 병원 치료 한번 받아 본 적 없이 가시기 직전까지 농사일만 하다 죽은 내 어머니. 말년의 어머니는 한번 시작한 기침을 좀처럼 멈추지 못했고, 그 끝에 언제나 피 섞인 가래를 토했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끈질긴 기침 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두껍고 딱딱했던 손이 떠올랐다. 오래된 소나무 껍질 같던 그 피부의 촉감이 손가락 끝에 남아 있었다. 어머니 없이 살아온 세월이 함께 산 세월을 훌쩍 넘겼는데도 이러하니 죽음은 언제나 나를 굽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발치만큼 가까운 곳에서.
나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면에 보이는 데스크로 향했다. 번쩍번쩍 빛이 나도록 깔끔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게 거뭇한 수염으로 점잖지 않아 보이는 직원이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데 길게 자란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저런 사람을 왜 데스크에 앉혀 놨나, 표정을 구기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나는 남자에게 가방을 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직원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가방이요? 무슨 가방? 하면서 성가신 티를 냈다. 안내 데스크에 문의하라고 하던데···. 내가 말끝을 흐리자 남자는 한참을 답 없이 제 볼일만 보더니 그 끝에 눈을 들어 나를 향해 그러니까 분실물이란 말씀이세요, 어머니? 했다. 그 목소리가 듣기 싫게 커서 내가 왜 당신 어머니야, 하고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젊은 애들의 하는 짓이나 말본새가 자꾸 고까운 생각이 드는 것도 나이 탓인지 모르겠다. 나는 남편이 죽어서 어제 발인을 했고, 바로 저기 3호실에서 상을 치렀으며, 거기에 가방을 두고 갔으니 어서 돌려달라고 중얼중얼 직원에게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직원은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여기저기서 불쑥 찾아온 사람들이 묻는 잡다한 것에 답을 하면서 제 볼일을 보았다. 글쎄, 얼른 좀 줘요!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민이가 함께 있었다면 엄마, 좀, 하면서 지나치게 낮은 자세로 직원에게 사과했을 것이다. 모든 잘못은 나에게만 있다는 듯이. 나한테 무례한 것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엄마, 좀. 성인이 된 후 지민이는 내게 할 말이 그것뿐이라는 듯 번번이 좀, 했다. 자주 가던 코다리 집에서 어째 양념 맛이 떨어진 것 같지 않으냐고 한마디 했을 때도, 택시 기사에게 아들이 막 가게를 개업했고 그곳이 요즘 같은 불황에도 장사가 잘된다고 기분 좋게 말했을 때도, 여행지의 절에서 기와불사를 하려고 제 남편에게 현금을 빌리려 했을 때도, 끝내 돈 오만 원을 빌려 기와에 적은 소원이 저의 임신과 출산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지민이는 아, 좀! 하면서 눈을 흘겼다. 저 잘났다고. 혼자만 잘난 줄 알고.
가방을 돌려받자마자 인사도 않은 채 돌아 나오면서 나는 이 썩을 놈의 장례식장 다시는 오나 봐라, 생각했다. 일이 많으면 사람을 더 뽑을 것이지 여러 사람 힘들게 할 일인가. 그 많은 꽃 장식 종류며, 맛대가리 없는 음식이며, 링컨이니 리무진이니 하는 것들로 정신없는 유가족들 힘들게 해서 번 돈은 다 어디로 가나. 슬픈 사람들 상대로 장사나 하는 인간들. 못된 놈들. 나는 죽어도 집에서 혼자 죽겠다고 생각하다가 그 비슷하게 옹고집을 쓰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당신 바람과 달리 아버지는 큰아들과 며느리의 눈칫밥을 피해 시간을 보내곤 하던 시내 공원에서 모르는 사람들 틈에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관을 부여잡고 대체 병원을 왜 안 가고 고집을 피워서 자식들 속을 밟아 뭉개느냐고 통곡하던 그때의 나는 그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나. 그러고 보니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나이가 지금 나와 얼마 차이 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몸서리나게 부끄러웠다.
4
저기요, 괜찮아요? 웅웅거리는 사이로 작게 들려오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그 소리에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담배꽁초며 플라스틱 병뚜껑, 구겨진 종이컵 따위로 지저분한 화단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보기 싫게 기대 있었구나. 장례식장을 나오는데 다시 숨이 멎도록 가슴이 아파서 쓰러지지 않으려고 기듯이 화단을 붙든 것이었다.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드니 눈앞에 어제 본 그 사람이 있었다. 아··· 나는 알은척을 하려다 말고 고맙습니다, 했다. 며칠 약을 안 먹었더니 이러네요, 변명하듯 사과하듯 말하는데 사는 게 죄 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여전히 하얗고, 파랬다. 단정하게 빗어 하나로 묶은 머리 군데군데가 희끗했고, 미간에 깊게 난 두 줄 주름에도 눈길이 갔다. 다소 팬 볼과 날카로운 턱선, 핏줄이 두드러지게 불거진 손등을 차례로 보며 이이가 내 또래이려나, 생각했다. 나보다 훨씬 어릴 수 있겠다 싶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여자의 눈 때문이었다. 그의 두 눈에 번잡한 공원 한가운데에서 엄마 손을 놓쳐 버린 아이 같은 어리둥절한 두려움이 안개처럼 번져 있었다. 무엇보다 평균보다 조금 더 밝은 갈색의 눈동자가 시선을 붙잡았다. 눈이, 하고 말을 시작했지만 맺지는 못했다. 여자는 못 들은 척 얕게 미소 짓고는 저도 약 같은 것 챙겨 먹는 일이 영 안 돼요, 그래도 내 몸 내가 챙기는 수밖에요, 했다. 낮고, 끝이 갈라지는 음성이 역시 과히 어린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여자의 부조화가 흥미로웠다. 그래야지요, 나는 몸을 가누며 답했고 여자는 잘 생각하셨어요, 하며 눈가에 여러 가닥 주름을 만들었다. 그때 내 팔뚝을 붙잡고 있는 여자의 손으로 얕은 떨림이 전해졌다. 그제야 지금껏 여자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보니 여자는 겉옷을 걸치지 않은 채였다. 새것인 듯 깨끗하지만 마른 몸에 꼭 맞지 않아 어색한 짙은 색 조끼와 그 안에 받쳐 입은 하늘색 셔츠 소매에 옅게 묻은 김칫국물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에는 은색 바탕에 검정 글자로 ‘금정순’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기서 일하시나 봐요, 나는 이상하게 동하는 호기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물었다. 여자는 양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가. 나는 다시 사과하는 심정으로 추울 텐데 어서 들어가라고, 이제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자의 손을 내 팔뚝에서 떼려는데 그가 손에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짧은 순간이었다. 나의 멍한 눈과 그 사람의 흔들리는 눈이 추운 공기 가운데 마주쳤다. 밝은 갈색의 눈동자. 거기에 물기가 어리는 것 같았지만 원래 그런 눈일지 몰랐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면서 여자는 손을 풀었다.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그가 곧 퇴근인데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나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건물 뒤편을 향해 걸어갔다.
여자의 뒷모습이 건물 안으로 사라진 순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탐스럽기까지 한 눈송이가 패딩 위에 톡톡 떨어졌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모습에 어릴 때 보았던 함박꽃이 떠올랐다. 내 장례식에는 국화 같은 처량한 꽃 말고 함박꽃을 가득 놓고 싶다. 아니지. 장례식 같은 것은 안 하면 좋겠다. 애들 힘들게 뭣 하러. 나는 자꾸만 사라지는 눈송이를 보면서 그저 이처럼 살며시, 소리도 없고 자취도 없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죽음이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자 여자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묶었던 머리를 풀어 어깨까지 단정하게 내리고, 검은색 모직 코트의 허리띠를 몸에 꼭 맞게 묶은 차림이었다. 좀 춥지 않나, 오래 입었는지 희뿌연 빛이 한 겹 덮여 있는 여자의 겉옷을 보면서 생각했다. 동시에 어째서 이 상황이 이상하지 않은가, 뭐가 이렇게 자연스러운가, 하는 생각이 얕게 튀었다. 밥이나 약 따위를 챙겨 주어야 할 사람이, 내 행동의 이유를 번번이 설명해야 할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상관없었다.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흘끗 본 뒤 여자는 제 이름은 금정순이에요, 했다.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뜻이리라. 나는 금정순의 갈색 눈을 바라보며 정정자요, 라고 답했다. 금정순과 나는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걸음을 뗐다. 바람에 날아든 눈 한 송이가 목덜미에서 차갑게 녹는 탓에 어깨를 움츠리자 금정순이 댁까지 모셔다드려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내가 눈썹을 치켜들고 바라보자 금정순은 손사래를 치며 오해는 마시고요,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요, 했다. 제가 아픈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봐요, 라면서. 나는 집이 멀지도 않고 몸 상태도 정말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금정순은 완고했다. 그의 순한 눈을 보며 문득 그럴까 싶기도 했으나 동시에 세상에 이상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문자로 오는 링크 같은 거 절대 누르면 안 돼, 하던 지민이의 잔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금정순에게 그냥 버스 정류장까지만 함께 가 달라고 부탁했다. 금정순은 잠시 입술을 꾹 오므리더니 마지못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방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네 귀퉁이가 조금씩 구겨진 명함이었다. 여기, 제 번호예요. 댁에 도착하시면 잘 들어갔다고 꼭 연락 주세요.
버스에 오르고, 자리를 잡아 앉고,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나를 지켜보던 금정순의 시선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따라오는 듯했다. 그 시선을 의식하느라 집 현관문을 열어서야 두붓집에 가서 순두부를 사려고 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입맛은 없었다. 금정순의 물기 어린 갈색 눈. 빈속에 약을 먹을 수 없으니 억지로 가스레인지를 켜 팬에 들기름을 두르고 달걀을 꺼내 프라이를 했다. 작은 미소로 나를 배웅하는 금정순. 배추김치를 통째 싱크대에 놓고 서서 한입 먹자 입에 침이 돌았다. 마른 몸에 비해 깜짝 놀라도록 커 보이던 금정순의 단단한 손. 달걀 프라이를 접시에 옮겨 담고 식탁에 앉아 아무래도 밥을 먹을까 잠시 고민했다. 작은 손가방 하나 들고 있지 않던 단출한 금정순의 뒷모습. 노른자를 젓가락으로 터뜨리고 흰자를 조금 잘라 거기에 묻혀 한 입을 먹었다. 거칠지만 듣기 좋은 금정순의 음성. 일단 음식이 입에 들어가자 한 접시가 빠르게 비워졌다.
접시를 개수대에 내려놓고 곧장 찬장을 열어 협심증약을 꺼냈다. 물 한 컵을 약과 함께 다 마시며 현관에 벗어 둔 패딩을 바라보았다. 손이 끈적한가 싶어 물에 여러 번 헹구는데 작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현관으로 가 패딩 주머니에서 금정순의 명함을 꺼냈다. 작은 숫자들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찡그리고 내려다보았다. 다시 식탁에 앉아 휴대전화에 그 번호를 하나씩 입력했다. 자꾸만 잘못 눌리는 숫자를 지웠다 다시 입력하고, 메시지 창에 정성껏 글자를 입력해서, 전송 버튼을 얇은 유리창 열 듯 조심스레 눌렀다.
잘 도착했읍니다. 정정자.
5
강 사장이 담백하게 안부를 물어 왔다. 고생 많으셨죠. 장례만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므로 다른 말 하지 않고 그저 여기 순두부가 그렇게 생각나더라고요, 하고 답했다. 내 말을 들은 강 사장이 온 얼굴에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식사 잘하셔야죠. 그러면서 오늘은 두부값을 안 받겠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게 말이 되느냐고 내가 손사래를 치자 강 사장은 오늘만이에요, 하면서 눈을 부드럽게 감았다 떴다. 괜히 목메게 하는 강 사장을 보며 장례를 치른다는 게 다 누굴 위한 것인가, 생각했다. 사람 노릇이 평생에 걸친 숙제였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 기분이었다. 포장된 순두부를 받아 들고 강 사장을 향해 또 올게요, 많이 팔아요, 하며 돌아서는데 막 가게로 들어서는 금정순의 얼굴이 보였다. 어? 깜짝 놀란 나를 향해 금정순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다 만나네요. 그런 그에게 너무 신기하네요, 답하면서 어제와 달리 든든하게 외투를 챙겨 입은 금정순의 모습에 이상할 만치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그런 우리를 향해 강 사장이 어머나 두 분 어떻게 아세요? 하고 끼어들며 물었다. 얼마 전부터 자주 오시는 손님이라고 금정순을, 오랜 단골이라고 나를 소개하면서. 왠지 귀가 빨개지는 것 같았다. 옷매무새를 만지는 척 오른쪽 귀를 쓸면서 여기 두부가 참 맛있지 않느냐는 하나 마나 한 말을 건넸다. 그러자 금정순이 여기 순두부가 너무 좋아요, 했다. 그 표정이 참으로 천진했다. 금정순의 말을 들은 강 사장이 역시 주름지게 웃으며 방금 여기 여사님이 꼭 그 말을 하고 가시는 참이라며 재미있어했다. 금정순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그럼, 저도 순두부 하나 주세요, 하며 주문하고는 빠르게 내게 돌아서서 잠깐 기다려 달라고 속삭였다.
나란히 두부 가게를 나오는데 드물게 환한 겨울 햇빛이 비쳤다. 금정순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보며 기분 좋은 숨을 내쉬었다. 요즘은 죄다 키오큰지 키오스킨지로 주문하게 해 놨던데 여기는 그러지 않아서 더 좋더라고요. 말 몇 마디면 될 것을 왜 그렇게 하나 모르겠어요. 복잡하기만 하고. 그러고는 외투 주머니에서 비닐 포장된 일회용 숟가락을 꺼내 건넸다. 바로 먹어야 맛있잖아요. 잠깐 공원까지 같이 걸어요. 어리둥절한 채 숟가락을 꾸물꾸물 받아 드는데 금정순이 숟가락을 하나 더 꺼내 입에 물고는 순두부가 담긴 일회용 반찬 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우리 주변으로 하얀 김이 부드럽게 퍼졌다. 자연스럽게 순두부를 한 숟가락 퍼서 먹는 금정순의 얼굴에는 근심 한 조각도 비치지 않았다.
댁이 이 근처세요? 덩달아 순두부를 한입 넣는 나를 보며 금정순이 물었다. 나는 버스로는 세 정거장, 걸어서는 이십 분이 조금 더 걸리는 이 가게를 종종 산책 삼아 온다고 말했다. 여기가 한 자리에서 이십 년 넘게 장사한 집이며, 사장 내외가 직접 만드는 두부는 마트에서 파는 것과 비교도 안 되게 고소하다고, 육고기만 찾는 아들 현민이도 여기서 사 온 두부는 판두부든 순두부든 뭐든 잘 먹는다고 이어 긴 수다를 늘어놓았는데 금정순은 그러는 내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얘기를 듣기라도 하는 듯 어머, 그래요, 좋다, 하며 일일이 반응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저는 최근에 이사 왔어요. 혼자, 아는 사람 없는 동네에서 살고 싶어서요.
삼십 년을 한 동네에서 살아온 나는 금정순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 걷는 길이 가을이면 샛노란 빛으로 눈을 다 환하게 하는 은행나무 가로수길이라는 걸 금정순은 알까. 저 길 끝에 나오는 공원은 또 어떻고. 공원 주변을 빙 둘러싼 벚나무들은 봄이 왔나 싶으면 성질 급하게 꽃잎을 휘날릴 것이다. 그럴 때면 동네 할머니들은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슈퍼 입구의 평상에 나란히 앉아 해바라기를 할 테지. 봄이 오면 곧 여름이 오는 것을 알듯이 동네를 구석구석 아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 얼마나 마음 편한데. 금정순은 왜 모르는 곳에 터를 잡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장례지도사로 출근한 지 꼭 한 달이 됐다고 금정순이 말했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어서요. 그 말을 할 때 그의 얼굴에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쓸쓸한 기운이 짧게 스쳤다. 그랬구나, 일이 많이 고되죠, 내가 묻자 금정순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죽음을 돈으로 바꾼다는 게 낯설기만 하다고. 거의 혼잣말처럼.
금정순은 첫날부터 팀장에게 불려 가 혼이 났다. 상주의 아내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기 때문이었다. 곁에서 그 말을 들은 상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냈다. 뭐 이딴 인간이 다 있어, 기본도 안 된 쓰레기 같은 년이, 하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 난리를 피웠다. 상주의 아내는 그런 남편의 소란에 눈을 찌푸리고는 복도로 나가 버렸다. 주방에서 음식을 소분해 일회용 접시에 옮겨 담던 팀장이 급히 뛰어나와 금정순과 상주 사이에 서서 고개를 조아렸다.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말하던 팀장은 어리둥절한 채 서 있을 뿐인 금정순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면서 얼른 사과하세요, 빨리, 하고 재촉했다.
난장판이 된 장례식장을 뒤로하고 팀장을 따라 건물 뒤쪽으로 나오자 담배를 꺼내 문 팀장이 조금 전까지의 비굴한 표정을 싹 지우고 금정순을 노려보며 미친 거 아니에요? 했다. 금정순은 그 열렬한 깽판을 떠올리며 상주야말로 미친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팀장이 상주 못지않게 목소리를 높였으므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들려도 안 들리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게 기본인 거 모르느냐고 팀장은 말했다. 나는 일할 때 립스틱도 안 발라요, 상주들이 거슬려할까 봐. 이 정도는 다 기본이잖아요. 립스틱이 어때서, 기본이 무엇인데, 팀장의 잔소리를 들으며 금정순은 생각했고 그러거나 말거나 팀장은 한참이나 금정순으로서는 퍽 동의하기 힘든 말들을 쏟아 냈다. 그러는 게 생각보다 길어져서 금정순은 어쩌면 이 사람이 내가 실수하기를 바랐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데 이르렀다. 이어 팀장은 이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가 않다고, 아주 섬세한 노동이라고 항변하기 시작하더니 자기가 받은 오해와 멸시, 그럼에도 해내던 마음과 팀장으로서의 자부심까지 꺼내 들었다. 그 말을 들을 때 금정순은 팀장이 조금 가깝게 느껴졌다. 이 노동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여기가 원래 이런 데예요, 라고 팀장이 말을 끝내며 처음으로 제대로 금정순을 바라보고는 일단 오늘은 퇴근하라고 말하곤 돌아섰다. 금정순은 한동안 원래, 이런 데, 같은 말에 붙들린 기분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문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었어요. 하나같이 상주의 아내한테 고생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듣자 하니 그 사람이 십 년 넘도록 뇌졸중으로 거동도 못 하고 누워만 있던 시모 병시중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지난 세월이 어땠든 앞으로 시간은 자기 것이 됐으니까, 드디어. 그거야말로 축하할 일이 아닌가. 금정순은 어딘가에 항의하듯 말했다. 어떤 사람이 호상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야말로 가신 분이고 고생한 분이고 싸잡아 모욕하는 거죠. 금정순은 역시 누구에겐지 모를 화를 내면서 순두부를 크게 한 숟가락 떠 입에 물었다.
우리는 나란히 길을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먹듯 순두부를 퍼먹고 있었다. 생전 애들한테 길거리에서는 음식을 못 먹게 했었는데, 이러는 게 이상하게 좋았다. 복 나간다고 엄히 말하곤 하던 내가 지금 하는 모습을 지민이가 보면 뭐라고 할까. 상관은 없다. 금정순과 있으니 모든 게 아무렇지 않았다. 김이 살살 오르는 따뜻한 순두부를 입에 넣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갔다. 그 온기에 굳은 심장까지 풀어지는 듯했다. 나는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한 달 동안 입을 꽉 다물고 일했을 금정순을 상상했다. 많이 추웠겠다. 그런 생각뿐이었다.
사는 내내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요, 사는 게 낯설었어요. 금정순은 딱히 낙담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나는··· 말을 시작했지만 마치지는 못한 채로 금정순의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낯설다. 사는 게 낯설다. 모르겠다. 나는 낯설 틈이 없었다. 원래 사는 건 억울하고, 원래 가난한 사람이 힘들고, 원래 세상은 고통스럽다. 그러니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했다. 나는 낯설어할 줄도 모르고 돈을 무서워했다. 백 원이라도 깎으려고 시장 상인과 실랑이할 때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지. 버스비를 아끼려고 한 시간씩 걸어서 일하던 칼국숫집에 가는 것은 당연하게만 여겼고. 그런데도 주변에 돈을 꾸어야 하는 일이 생기면 혀 깨물고 죽고 싶다가도 새카만 애들이 생각나 정신을 붙잡았다. 왜 남들 다 가는 유학을 자기만 못 가느냐고 따져 묻는 지민이에게 그저 비상금으로 감춰 뒀던 백만 원을 알아서 쓰라고 건넸을 때도 속에서는 피눈물이 났지만 사는 게 원래 다 이렇다고, 없는 나를 탓할 뿐이었다. 이어 병원비를 아끼기 위해 하루 온종일 남편 병간호를 했던 지난 육 년의 시간이 떠올랐다. 나는 말없이 순두부를 한입 삼키면서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함께 목 안으로 넘겨 버렸다.
6
오며 가며 또 보자고 애들처럼 웃으며 금정순과 헤어진 사거리에서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가세요, 인사하던 금정순의 목소리를 기분 좋게 떠올리며 집으로 들어서는데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현관을 여니 집 전체에 연기가 옅게 퍼져 있었다. 급히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막고 연기가 짙어지는 쪽을 따라갔다. 아침까지 누웠던 이불에 막 불꽃이 번지는 참이었다.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불이 나는 곳을 빠르게 내리쳤다. 작은 불은 다섯 번쯤 내리치기를 반복하자 이내 꺼졌다. 이불을 들추어 보니 전기요 한쪽에 까만 테두리의 구멍이 보였다. 전기요 전원을 그대로 켜 두고 외출한 모양이었다.
연신 기침을 하며 콘센트에 꽂혀 있는 코드를 잡아 빼고, 집 안의 창문을 모두 열었다. 누가 심장을 주먹으로 때리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집에 불이 나다니.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가려운 우둘투둘한 왼쪽 정강이를 두 손으로 연신 쓸어내렸다.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직전, 그러니까 지민이 여섯 살, 현민이 다섯 살 때 집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지민이에게 현민이를 맡겨 놓고 남편 친구 모임에 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판자를 대충 이어 지은 조악한 그 집은 여름은 무섭게 덥고 겨울은 끔찍하게 추웠다. 그리고 언제나 주방이 문제였다. 연탄가스를 내보내는 연통이 바람만 불면 흔들리는 벽체 탓에 어긋나기 일쑤였는데 뭐든 대충 해 넘기는 남편은 내가 여러 번 잔소리해야만 연통 둘레를 알루미늄 테이프로 울퉁불퉁 감았다. 가스를 마셔 어지럽다는 애들한테 동치미 국물을 먹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곧 있으면 좋은 집으로 이사 갈 거야, 좀만 참아. 늦은 밤 마당을 따라 쭉 돌아가야 나오는 지저분한 공용 화장실에 칭얼대는 지민이를 데려다주면서 나는 주문처럼 그 말을 외웠었다.
두 애들은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내 말을 얌전히 들었을 터였다. 궁금해서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 게 불안해서 남편을 재촉해 집에 온 참이었다. 술이 부족한지 계속 짜증을 내는 남편을 뒤에 두고 걸음을 서둘던 마음은 불안이었을까, 확신이었을까. 주방 벽을 따라 불길이 오르고 있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집으로 들어갔을 때 아이들은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두 애들을 어떻게 둘러업고 나왔는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웃집 사람들이 양동이에 물을 받아 함께 불을 끄는 사이 남편이 붙잡은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야 왼쪽 다리에 불에 타 눌어붙은 새카만 천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후로 나는 불이 무서워서 요리도 잘 하지 않았다. 성격 좋고, 보너스도 후했던 사장과 이 년이나 일했던 칼국숫집을 끝내 그만둔 것도 사장이 나를 주방으로 옮기려 했던 탓이었다. 죽은 남편을 화장하기로 했을 때도, 불이 무섭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다.
차가운 바깥바람이 이윽고 연기를 밀어내자 모든 게 지겨워졌다. 지민이는 불이 나게 한 내 부주의만 탓할 것이 뻔했고, 현민이는 전화조차 안 받을지 몰랐다. 나는 혼자였다. 평생 처음으로. 아니, 평생 그랬듯이.
나는 역시 혼자 있을 금정순을 떠올렸다.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금정순은 벨이 두 번도 채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마디뿐이었는데 금정순이 무슨 일 있느냐고 걱정스레 말을 걸어왔다. 그 목소리에 목이 꽉 막혀 잠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게··· 집에 불이 났어요. 내가 말하자 금정순은 괜찮으세요? 제가 갈까요?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은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이 집에서 나가고 싶어요. 금정순은 잠시 머뭇대다가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아까 우리가 헤어진 사거리에서 만나자고 했다.
녹이 슨 손잡이에, 언제 써 붙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낡은 ‘어서 오세요’가 적힌 종이가 붙은 누추한 비닐 문을 열자 뜻밖에 널찍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있는 수조는 깨끗했고, 그 뒤로 적당히 어수선한 정도의 손님들이 두세 테이블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금정순은 익숙하게 한쪽 구석 자리로 가 앉았다. 여기 안주가 다 맛있어요, 과메기가 있네? 이거 먹을 줄 아세요? 어딘지 들떠 보이는 금정순을 향해 남편이 좋아하던 과메기, 나는 그 비린 맛이 싫어서 매 겨울 사다 바치면서도 입도 대지 않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겉에 하얗게 살얼음이 낀 소주병을 냉장고에서 꺼내 오면서 금정순은 여기 술이 셀프거든요, 했고 그 순간 나는 술을 먹어 보겠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해사한 표정을 짓게 하는 것이라면 나도 한번 먹어 보고 싶다고. 금정순이 소주잔 두 개를 제 앞에 나란히 놓고는 소주를 쪼록쪼록 따라 한 잔을 내게 건넸다. 때마침 주문한 과메기가 나왔다. 나는 금정순이 하는 대로 앞접시에 과메기를 한 점 놓고, 그 위에 초장을 살짝 찍은 쪽파를 올려 크게 한 입 먹었다. 깜짝 놀라게 고소한 과메기였다. 맛있죠? 금정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정말 그렇다고 답하며 금정순이 내민 소주잔에 내 잔을 부딪고는 소주를 조금 마시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런 나를 보고 금정순이 크게 소리 내며 웃었다. 도대체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 거냐고 혀를 빼며 말하는 나에게 금정순은 그 맛에 먹어요, 잡생각 날리는 맛이라서요, 했다. 나는 기본 찬으로 나온 미역국을 한 숟가락 떠먹으면서 문득 이곳에 들어와 소주를 마실 때까지 남편의 유골이나 타버린 전기요 따위를 전혀 떠올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라고 했었잖아요. 금정순은 엄마가 오래 아팠다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말했다. 마흔둘이었나 셋이었나··· 혼자 중얼거리더니 금정순은 처음엔 교통사고였다고 했다. 처음엔, 이라는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말은 다음이 있었다는 얘기다. 금정순은 다쳐서 거동이 불편해진 칠십 대 노모가 부담 없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미혼 자식이었다. 마침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던 터라 금정순은 덤덤하게 병시중을 들었다. 잠깐이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쳤지만 비교적 건강했던 엄마는 사고 한 달이 지난 즈음에 다시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결국 금정순은 몇 년 전 독립해 나온 엄마 집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두 오빠 부부가 처음부터 엄마의 병치레를 금정순에게 떠넘긴 것은 아니었다. 다들 한창 바쁘게 일할 때였으니까요. 애들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겠고. 그러나 간병이라는 것은 무리 없이 일과 병행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화장품 방문 판매 사원이었던 금정순은 점차 단골 고객을 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오빠는 금정순에게 생활비를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엄마를 맡겼다.
눈을 뜨자마자 식사를 준비하고 엄마의 아침밥과 챙겨야 할 여러 개의 약을 먹이는 일, 누워만 있으려는 엄마를 때때로 일으켜 거실을 한 바퀴 걷도록 하는 일, 일주일에 한 번 저녁에 집에 들르는 큰오빠의 손을 빌려 엄마를 목욕시키는 일, 기저귀를 거부하는 엄마가 요의를 느끼는 새벽에 실수하지 않도록 재빨리 화장실로 데려가는 일. 어느 하나 제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엄마는 오빠한테만 미안하다고 했어요. 오빠가 있을 때만. 내가 얼른 죽어야지, 하고. 금정순과 둘이 있을 때 엄마는 요구가 많았고, 자주 화를 냈고, 가끔 물건을 던질 때도 있었다. 요령이 생기나 하면 예상치 못한 일이 송곳처럼 튀어나와 여기저기를 찔리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금정순의 엄마는 점차 회복했다.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혼자서 화장실에 갈 수도 있게 되었다. 금정순이 일을 그만둔 지 사 년이 지난 때였다. 간간이 연락을 나누던 선배에게 일 구하는 연락을 해 볼까 고민했지만, 결국 할 수 없었다. 엄마의 약해진 몸은 연달아 덮쳐 오는 병을 이기지 못했다. 치매라고 했다.
엄마는 기어코 구십을 넘겼어요.
금정순은 소주를 천천히 입에 흘렸다. 내부의 조명 탓에 조금 짙어 보이는 금정순의 갈색 눈에 물기가 어렸다. 엄마의 장례를 치른 것이 일 년 전이었다는 금정순이 자기 잔에 소주를 한 잔 더 따라 마시고는 고백하듯 말했다.
너무 살리고 싶었어요. 너무 죽이고 싶었고요.
7
지민이는 오늘 아침에도 전화를 걸어왔다. 집을 나간 뒤에는 한 달에 한 번이나 먼저 전화를 할까 말까 했던 애가. 꼭 내가 걸어야 짧은 안부라도 확인할 수 있었던 애가. 지민이는 말했다. 아빠 진짜 어떡할 건데. 납골당이든 묘지든 알아보는 것도 다 일이고, 현민이는 신경도 안 쓸 거고, 그럼 이거 다 내가 해야 되잖아. 난 뭐 시간이 남아돌아서 이러나. 속엣말을 툭툭 내뱉어서 사람 상처 주는 건 지민이나 남편이나 똑같았다. 너 신경 쓸 일 없으니까 이제 그만하라고 하자 현민이 그 새끼는 장례 끝나고 엄마한테 전화 한 통이나 했어? 아부지, 아부지, 하면서 울기나 하고 술이나 먹고. 이모 삼촌들 보기 쪽팔려서 진짜. 대체 엄마는 왜 걔한테 싫은 소리 한마디를 못 하는데? 걔도 이제 사십이야. 어린애 아니라고! 하며 지민이는 속을 긁었다. 왜 나만 맨날 어른이야? 연달아 하는 말을 자르며 당분간 네 전화 안 받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날카롭게 말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조용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어디 하나 내 손길 닿지 않은 곳이 없는데도 못 견디게 집이 낯설었다. 나는 가방을 둘러메고 무작정 집을 나왔다. 바람이 차가웠는데 조금도 춥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니까요.
목적지 없이 탄 버스에 앉아, 어젯밤 다소 풀어진 표정으로 금정순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소주 한 잔을 다섯 번에 나눠 마시는 동안 얼굴은 빨개지는데도 정신은 맑아졌다. 아무도 없을 텅 빈 집을 생각하다 현관 한쪽에 며칠째 그대로 놓아 둔 남편의 유골함이 떠올랐다. 얼른 자리를 정해 줘야 할 텐데. 나 가고 나면 누가 신경이나 쓰겠나, 싶어서요. 어디다 버릴 수도 없고. 얘기를 들은 금정순이 말했다. 버리면 어때서요? 제 이름은 금정순이에요, 했을 때와 똑같은 말투였다. 어리둥절 자신을 바라보는 내게 금정순이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들 때문에 엄마를 아빠 산소에 함께 모시긴 했지만 그건 버리느니만 못한 거예요. 엄마는 흐린 정신에도 아빠 얘기는 일절 안 했어요. 싫어할 게 뻔한데 아빠와 같이 묻어 버리는 게··· 그런 불효자식들이 또 없죠.
사실은 엄마를 자유롭게 놓아줄 곳을 알아봐 두었다는 거였다. 엄마의 고향집이 있던 시골 작은 마을. 겨우 다섯 가구가 사는 산골짜기 동네인데 팔십 대 할아버지가 그 동네 이장이자 막내라고,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들을 궁금해하지 않을 곳이라고 설명하면서 그곳 마을 조금 아래에 산을 따라 흐르는 아담한 하천이 있다고 했다. 어렸을 때 외갓집에 놀러 가면 돗자리랑 수박 한 덩이만 들고 그곳에 가서 온종일 몸을 담그고 있었어요. 한여름에도 부채가 필요 없었어요. 금정순은 비밀한 곳을 나에게만 알려 준다면서 얕게 웃었다. 그 깨끗한 웃음이 믿음직스러웠다.
그 대화 끝에 금정순은 언제든 전화만 달라고, 안전하게 모시겠다고 하며 오른손으로 심장께를 툭툭 쳐 보였었다. 나의 웃는 눈과 마주치던 금정순의 갈색 눈.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는 풍경을 보면서 나는 짜증 부리던 지민이의 목소리와 마음을 붙잡아 주던 금정순의 목소리를 번갈아 떠올렸다. 죽음을 준비하며 혼자 살아가게 될 나의 집도 생각했다. 꿈결처럼 가만히 버스에 앉아 있자니 잡스러운 생각이 하나 둘 날아갔다. 어쩐지 몸이 조금 가볍게 느껴졌다. 차장으로 나른한 햇빛이 들어왔다. 가슴에 쌓인 얼음이 천천히 녹는 듯했다. 녹은 물이 뚝뚝 떨어져 저 멀리로 흘러갔다. 그 물을 따라 하얀 재가 떠내려가는 게 보였다.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들렸다. 아직 내 심장이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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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자의 기록공유자의 기록 이서수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가 나를 데려간 곳은 엉뚱하게도 낡은 정자 앞이었다. 아버지는 육모정이 있는 그 땅을 세 조각으로 잘라 친구들과 나누어 가졌던 사실을 내게 처음 알려주었다. 사다리꼴 모양의 땅 둘레에 소나무와 중국 단풍나무, 벚나무가 띄엄띄엄 심겨 있었다. 파란 셔츠를 입은 아이가 정자 마루 끄트머리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며 발끝으로 축구공을 굴렸다. 그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여 부근에 사는 아이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 사람이 삼분의 일씩 갖고 있어. 그러니까 이 땅의 삼분의 일이 네 몫이라고. 아버지에게 땅이 있었는지도 몰랐기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내게 증여할 생각이라는 말이 더욱 놀라웠다. 아버지가 다른 가정을 만들면서 우리의 관계는 소원해진 지 오래였다. 한편으론 번듯한 건물이 아니라 낡은 정자가 지어진 땅을 물려받게 된 사실이 약간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자 앞은 너른 공터였고 지도 앱을 통해 확인한 주변엔 초등학교와 파출소, 보습학원과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정자를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지으면 가치가 얼마나 오를지 궁금했다. 정자는 저대로 내버려 둬. 그건 지켜. 아버지가 내 속내를 읽은 듯이 말했다. 나는 미약하게 항의했다. 땅을 이렇게 놀리는 사람이 어딨어? 놀리는 게 아니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잠시 말이 없던 아버지가 입을 뗐다. 올해 우리가 자식들에게 땅을 증여하기로 다 같이 합의를 봤어. 왜 그런 결심들을 하셨는데? 그냥 때가 된 거지. 상념에 잠긴 표정을 짓던 아버지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하더니 갑자기 일이 생겨 빨리 돌아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땅에 대한 설명이나 해명이 더는 없었다. 나는 의구심을 삼키고 정자와 나무를 한 프레임 안에 담아 사진을 찍었다. 그러곤 어색함을 적당히 감추며 아버지와 정자 앞에서 헤어졌다. 해마다 한두 번씩 오가던 안부 연락마저 뜸해지던 때였기에 서울로 함께 돌아갈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생전에 재산을 미리 처분하려는 아버지의 태도가 못내 마음에 걸렸던 나는 결국 한 통의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 혹시 어디 아파? ―건강해.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분명 건강했던 것 같고, 나는 언젠가 그 땅에 대해 아버지와 길게 얘기할 기회가 다시 있을 줄 알았다. 3년이 훌쩍 흐르고 겨울 산행을 나선 아버지가 실족사로 세상을 뜰 줄은 까맣게 모르고서. * 부고장엔 그들이 아버지의 자식으로 되어 있었다. 내 이름이 없는 온라인 부고장을 들여다보다 장례식에 가지 않을 결심을 세웠다. 그러곤 동네 성당으로 가 나름의 작별 인사를 했다. 자식에게 지은 죄가 있긴 하지만 좋은 곳으로 가시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빌었다.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의 안식을 위해 켜둔 초를 바라보다 아버지의 봉헌초도 마련해 불을 밝혀 두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친족의 도리로 그 정도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새 초가 보이지 않아 나는 스스로 초가 되어 아버지 생의 일면을 조용히 밝혔다
- 이서수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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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베일 윤해서 ∴ 배달을 끊을 수 없다. 이번 달에만 12번째 같은 메뉴를 시켰다. 분리수거 배출일은 월요일이다. 월요일 18시부터 23시까지만 재활용 쓰레기를 배출할 수 있다. 일주일치 쓰레기를 모아 월요일 밤에 내다 버린다. 조명을 환하게 밝힌 주차장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커다란 이케아 봉투 가득 플라스틱 용기를 들고 온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그 사람과 말없이 번갈아 비닐, 플라스틱, 종이, 캔을 분리 배출한다. 내가 이번 달에만 열두 개째 버리고 있는 똑같은 플라스틱 뚜껑 아래 색색의 플라스틱이 가득하다. ∴ 두 개의 점이 있다. 점을 번갈아 본다. 어떤 움직임이 점을 만들 때 점에 내려앉는 건 뭘까. 같은 크기의 점을 찍을 뿐인데. 무엇이 점과 점 사이에 차이를 만드나. ∴ 면허 갱신 안내 문자를 받았다. 최근 6개월 내 찍은 사진이 있어야 하고,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증명사진을 찍는 일은 언제나 불편하고 어색하다. 어딘가 제출했을 최초의 증명사진을 앨범에서 발견했는데, 5살의 나는 입을 꼭 다물고 뭔가를 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증명사진을 찍을 때마다 흑백사진 옆에 모아두었는데 조금씩 다른 사진 속 얼굴이 모두 흑백사진 속 얼굴과는 기묘하게 닮아 있다. 내가 사진관을 선택할 수 있게 된 후로는 계속 같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몇 년 만인지 그 사이 사진관은 이사를 했다. 큰길가에서 골목 안쪽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하고 찾아갔는데 이전 사진관 크기의 절반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 의자와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왼쪽으로 조금 갸우뚱. 이런 지시를 하던 사장님이 답답했는지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이리저리 조금씩 움직였다. 보정을 거친 사진 속 나는 거울로 매일 보던 나와 달랐다. ∴ 금을 넘는 데 몰입하던 때도 있었다. 충동이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면서.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거나 휴대전화를 없애고 오래 걷거나 새벽까지 놀이터에 앉아 있거나. 보고 싶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 토끼 머리 위에 쌓인 먼지를 털고, 알람이 울리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토끼는 세 마리. 접시 하나를 들자고 매끈한 토끼 셋이 두 손 모으고 있다. 예외는 있을 수 없어 사이좋게 나란히. 어떤 날 접시 위에 사과를 올리고 토끼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아래층 사람이 천장을 두드리기 시작해서 팔 아프겠다, 생각하다가. 아래층 천장 위에 웅크리고 깜빡 잠들었다. 해가 지려는지 집은 어둑하고 에어컨 바람이 서늘했다. 눈을 뜬 건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 ∴ 통 속에 손을 집어넣는 기분. 통의 깊이를 알 수 없다. ∴ 큰 화분 2개와 작은 화분 2개가 있다. 작은 화분 중 하나에서 꽃대가 올라왔다. 이렇게 더운데. 꽃이 피었다. 역대 최대. 역대 최고. 이런 표현이 매일 반복되고 있다. 에어컨을 틀어 갇힌 공기를 식힌다. 2주 전에는 짧았던 꽃대가 일주일 만에 길어지더니 다섯 송이의 꽃이 피
- 윤해서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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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아래보트 아래 손호영 한때 나는 얀의 말대로 집 앞을 비추는 보안카메라를 설치했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해 보곤 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햇빛, 무심히 우리 집을 침범하던 빛을 나도 결국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 도시에 뿌리내렸다면, 나의 세계는 바라던 만큼 넓어졌을까? 어쩌면 우리는 아기를 낳아 키웠거나, 혹은 결혼했을지도…… 이런 생각들은 물의 파동처럼 하나의 점으로부터 사방으로 원을 그리며 뻗어 나가곤 했다. 나는 그를 떠나며 가족 핑계를 댔다. 여기서는 영원히 가족을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는 짐짓 놀라며,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나에게 너는 오래전부터 가족이었다고. 글쎄. 정말? 찰나였지만, 얀은 정말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고, 나는 승리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지난 일들을 여러 번 되감아 보면서 나는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는지 원점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정말 그의 견고한 세계에 작은 생채기라도 낼 수 있는 존재였는지를. * 암스테르담 출장에 김수오를 데려간 건 박 대표 부탁 때문이었다. 그곳에 살 때부터 눈여겨보았던 로컬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와 국내 독점 유통 계약을 맺으려던 참이었다. 수 개월간 메일과 화상 회의로 대략의 조건 조율이 끝난 단계여서 큰 부담은 없었다. 현지 스튜디오와 쇼룸을 돌아보는 일정까지 포함해 4박 6일 출장 계획을 보고했는데, 박 대표가 그제야 김수오에게 시킬 만한 일을 고민해 보라고 말했다.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오 년을 살다 이 년 전쯤 귀국했다. 반년 넘게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던 내게 해외 바잉과 상품 기획을 총괄하는 차장 자리를 제안하며 손을 내밀어준 게 대학 선배인 박 대표여서, 나는 그의 지시라면 가급적 따르는 편이었다. 김수오는 박 대표 친구의 아들로 올해 스물일곱 살이었고 몇 달 전 정직원으로 채용됐다. 그의 아버지는 치아 교정 전문의로 전국에 네트워크 병원이 30곳쯤 있는 치과 체인의 대표라고 했다. 잘은 몰라도 박 대표는 김수오의 아버지에게 얼마간 빚을 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불쑥 남의 사무실을 찾아와 맡겨둔 듯 자기 아들 일자리를 요구할 수 있겠느냐고, 그것도 정규직을, 의사라면 상식이 있는 사람일 텐데, 하고 직원들끼리 수군댔다. ─우리 아들이 올해 졸업하는데 패션을 하고 싶다네. 그러면서도 아주 당당하거나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박 대표에게 전해 들으니 그 집안은 대대로 의사였는데, 김수오가 삼수를 하고서도 의대 입시에 실패했다고 했다. 메디컬 편입을 하라고 생명공학부에 보내놨더니, 학점 관리는 뒷전에 갑자기 패션MD를 하겠다고 선언해 집안이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경력직 뽑아달랬더니 낙하산 신입이 웬말이냐고 투덜대는 직원들에게 박 대표는 김수오가 비싸고 좋은 것들 많이 보고 자랐으니 감각은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미감이니, 취향이니, 요즘 그런 거 없는 애들도 있어요? 내가 말했다. ─말하자면 그렇단 얘기지.
- 손호영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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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순응암순응 박선우 스트레칭의 마지막 단계는 아기 자세다. 우선 바닥 매트에 두 무릎을 꿇고 발뒤꿈치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며 앉는다. 상체를 숙이면서 두 손을 머리 위로 곧게 뻗는다. 그러면 어깨의 삼각근과 등허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얕은 신음이 절로 나온다. 그대로 이마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것. 그리하여 더는 내려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 자세를 갖춘 뒤에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속으로 하나, 둘…… 서른까지 세다 보면 몸의 뒤틀린 부위들이 바로잡히는 게 느껴진다.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에 끼워 맞춰지는 기분. 신체가 교정되는 감각은 정신 상태로도 이어진다.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듯하다. 힘이 다하면 매트 위에 드러눕는다. 두 눈을 감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뱉어낸다. 몸이 이완되는 감각에 집중한다. 그러면 호흡이 잦아들면서 주변의 모든 것이 서서히 멀어져감을 느낄 수 있다. 아득해지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도. 어느 순간에는 나 역시도. 스트레칭을 마친 후에는 몸을 일으켜 방문 앞으로 간다. 나는 번번이 문손잡이를 쥔 채 망설이다가 문을 열어젖힌다. 거실로 나가면 가죽 소파에 길게 누운 아버지가 보인다. 올해 일흔넷의 아버지는 한 손을 이마에 올려둔 채 나지막이 코를 골고 있다. 더는 염색을 할 수 없어 백발이 성성해진 머리카락과 고목 껍질처럼 버석하고 거무스름해진 얼굴, 움푹 파인 볼, 살집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앙상해진 팔다리로 맥없이 축 늘어져 있다. 매일 아침 나는 그 모습을 본다. 하루가 다르게 기력을 잃으며 쇠약해지는, 무시로 잠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헤어나질 못하는 아버지를 마주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더디게 흐르다 못해 한순간 뚝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현실과 유리되면서 내가 아버지의 세계에, 그러니까 산 자들의 세계에서 죽어가는 자들의 세계에 휩쓸려 들어와버린 것만 같다. * “이대로면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사실 겁니다. 항암을 하시면 6개월에서 1년쯤이고요.” 혈액종양내과 허 교수는 아버지의 검사 결과를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초진을 맡았던 소화기내과 전문의와 위암센터 외과의가 입에 지퍼라도 채운 양 말을 삼갔던 것에 비하면 훨씬 나았고, 어쩐지 속 시원한 감정마저 들었다. 처음으로 상급종합병원 의사에게 신뢰감을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허 교수의 소견에서 새로운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전이성 위암 말기 환자의 여명’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느낀 속 시원함은 아버지가 시한부 환자임을 누군가 육성으로 선언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동안 가족은 물론이고 지인들조차 쉬쉬해온,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그러니까 네 아버지는 얼마나 남은 거니?”―공식적으로 논할 수 있게 된 후련함 말이다. 그래, 내가 의사에게 원하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 우리가 환자에게 도
- 박선우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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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 주면 오래 산다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 주면 오래 산다 임아라 그가 돌을 키우자고 했을 때 나는 딸기를 먹고 있었다. 케이크에 얹은 것치고 과즙이 실해서 턱이 저릿했다. 나는 테이블 매트에 포크를 내려놓고 오른뺨을 어루만졌다. 입안에 머금은 걸 삼켰는데도 신맛이 가시질 않았다. 어금니에 들붙은 씨가 거슬려서 자꾸 혀끝으로 더듬댔다.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돌을 키우자는 거지. 문득 씨가 아니라는 게 떠올랐다. 딸기의 겉에 박힌 점들 말이다. 그게 열매고, 그 속에 더 작은 씨가 있다는데, 그렇다고 그걸 달리 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골라낸 씨를 검지에 뱉었다. 침과 뒤엉켜서인지 꽤 부푼 것 같았다. 자기한테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나한테? 그래, 우리한테. 그의 윗입술에 묻은 생크림이 바르르했다. 나는 그것을 닦아 주려다가 관두고 나이프를 집었다.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면 으레 주는 플라스틱이었다. 초는 몇 개 드릴까요, 직원이 물었을 텐데. 그가 뭐라고 답했을지 궁금했다. 어쨌든 초는 없고, 나이프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손잡이에 달린 마개를 열었더니 성냥 두 개비가 쏟아졌다. 돌을 키우기도 해? 응, 돌도 키울 수 있대. 그는 컵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또 커피를 흘린 모양이었다. 그 컵은 가장자리가 겉쪽으로 휘어져 있어서 물이 넘치기 일쑤였다. 게다가 서랍에 들어박힌 처지길래 버리려고 했는데, 그가 발끈하는 바람에 그러지를 못했다. 너무 말짱하다는 게 그의 항변이었다. 이후 그의 커피는 그 컵에만 내줬다. 똑같은 컵이 있었는데 이미 버렸다는 건 굳이 밝히지 않았다. 왜 돌이야? 손이 가는 건 싫다며. 그렇다면 돌 만한 게 없지. 그가 살며시 컵을 기울이며 커피를 홀짝였다. 나는 슬쩍슬쩍 드러나는 둥근 밑면을 바라보면서 유난히 까맣다고 생각했다. 테이블에 닿을 때마다 닳았을 테니까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하얀 컵과 대비되어서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 너머에 있는 그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흰자위를 바삐 오가는 걸 보아하니 뭔가 숨기고 있었다. 실은 주문했어. 나는 잼이 덕지덕지한 접시를 토닥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몫의 케이크는 모로 누운 채로 사이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겹겹인 시트에서 반쪽짜리 딸기들을 빼낸 흔적이었다. 언제부턴가 버터에서 여물의 향을 맡았다. 내가 투덜댔더니, 그는 여물의 근처라도 가본 적이 있느냐며 놀렸다. 그때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고개를 가로저어야 했는데, 어째서 끄덕였는지 의문이었다. 미리 이름을 지어 주자. 그가 반절 남은 케이크를 상자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새 눅눅해진 받침대가 흔들려서 잠시 애를 먹었다. 나는 식탁에 흐트러진 빵 부스러기를 그러모으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검지에 뱉은 씨앗이 온데간데없었다. 어딘가로 옮았을 텐데, 전연 기억나지 않았다. * 김이 피어오를 정도로 따끈한 물줄기를 쏘였더니 순식간에 케이크가 일그러졌다. 폭우를 맞은 모래성처럼 쉬이 뭉그러졌다. 자잘한 건더기는 배수구를 향해 미끄러지고,
- 임아라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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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심심 임승훈 심심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심심한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심심해서 집안을 싹 바꿔봤어."라든지, "심심해서 머리핀을 또다시 찾아봤어."라고 하면, 나는 그들이 말하는 심심함이란 일종의 수사라고 생각했다. 진짜 이유는 있는데 말하기 귀찮거나, 말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다고. 대체 그 심심함이라는 게 무엇이길래 그만한 에너지를 들여서 굳이 무언가를 저지르냔 말이다. 하지만 이 년 전 급작스럽게 아내인 진서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심심함에 시달렸다. 사실 위의 말들은 주로 진서가 한 거였다. 그녀는 '심심해서 뭐뭐 했어'란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 나는 때로는 재치 있고 수사적인 그녀의 화법이 귀여웠고, 때로는 완곡적인 그녀의 태도가 우스웠고, 때로는 자기 마음에 시달리다 지쳐버린 그녀가 답답해 종종 짜증이 났었다. 왜 그녀는 본심을 밝히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심심. 진서는 왜 심심했던 걸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건 진서와 나의 기질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을 하는 사람이었다. 뭐 대단한 농담도 아니다. 대화하다가 내가 무심코 '지금'이라고 말하면, 그녀는 잽싸게 내 말을 자르고 '이 순간-'이라고 흥얼거리는 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재빠르게 눈치를 채고 '바로 오늘'이라고 대꾸해주곤 했다. 섹스할 때도 그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 벌거벗은 채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비장한 표정으로, "어디, 오늘 자네 실력 좀 확인해 보겠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진서 언니, 그럼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곤 옷을 훌렁 벗었다. 그 무렵 우린 홍명희의 소설 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진서와 광명 본가에서 아버지가 내놓은 책 박스를 뒤적이게 되었다. 진서와 나는 그 속에서 을 꺼내 들고 "우리도 이거 보자, 보자."라며 집에 가져왔다. 그 소설에서 무시무시한 사내들이 임꺽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꺽정이 언니, 이 우라질 놈의 목을 뎅강 자를깝쇼? 진서는 또한 예민하고 침울한 사람이기도 했다.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툭 내뱉고는(주로 꿈에서 내가 자기가 키우던 양을 잡아먹었느니, 섬세한 사람에겐 섬세한 날이 있다느니 했다), 긴 침묵에 빠지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모스 부호처럼 짤막하고 건조한 말을 하긴 했으니 완벽한 침묵은 아니고, 침묵의 근사치에 이르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짧으면 반나절, 길면 이틀 정도. 그러다가 그 침묵(의 근사치)에서 벗어나서 문득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였다. "심심해서 LA갈비를 만들어봤어."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내 사랑은 진서의 사랑과 조금 달랐던 걸까? 확실히 나의 사랑엔 고통이 없었다. 친구의 후배였던 진서를 처음 보자마자 호감을 느꼈다. 까맣고 가느다랗고 풍성한 단발머리,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그녀는 왠지 어떤 정물 같았다. 그런 그녀를 나는 힐끔힐끔 쳐다봤는데, 그때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후, 한 달 뒤에 우린 연애를 시작했고,
- 임승훈
- 2026-09-01
문장웹진 소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 계속 헤맬 거예요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 계속 헤맬 거예요 이승은 수연은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다른 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되었다. 월급이 높은 편도 아니었고 학원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지만, 수연은 아이들과 지내면서 학원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한 손에 샤프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우개 똥을 굴리며 수학은 왜 배워야 하는 거예요? AI가 있잖아요. 이제 수학은 필요 없는 거 아니에요? 투덜거리다가도 방긋 웃으며 떡볶이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이 귀여웠다. 작은 규모의 학원은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요즘 아이들 같지 않고 순한 편이라고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학원에서 일하는 삼 년 동안 수연은 무탈하게 지냈다. 월급이 밀리지도 않았고, 선생님들과 의견도 잘 맞았다. 크게 아프지도 않았고 사소한 말다툼을 빼고는 우재와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지냈다. 출근하면서 아이들에게 들려줄 재미난 퀴즈를 생각했고 퇴근하면서는 그날 볼 OTT를 고르고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와 장 볼 것들을 체크했다. 수연은 아이들이 수포자가 되지 않도록 일차함수와 연립방정식을 쉽게 이해할 방법을 고민했다. 주말에는 가성비 좋은 맛집을 찾아두었다. 우재와 외식을 하고 집에서 OTT를 보는 것 말고 다른 걸 해 보고 싶기는 한데 뭘 해야 할지, 우재와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고민이었다. 그해 여름 폭우가 쏟아지고 나서 이런 고민은 사라졌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내리고 며칠 후에 천장에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집주인이 옥상에 방수포를 깔아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정 불편하면 나가라고 한 이후로 수연은 하루 종일 집과 돈을 생각했다. 부동산 앱을 다섯 개 깔고 대출 조건을 알아보면서 진짜 고민이 시작되었다. 늘 아끼면서 지냈지만 모아 놓은 돈은 없었고 집값은 훌쩍 뛰어있었다. 대출 조건은 까다로웠고 대출을 받는다고 해도 매달 빠져나갈 이자를 생각하면 망설여졌다. 이사를 해야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사실은 막막한 게 아니라 뻔했다. 수연이 갈 수 있는 집은 반지하 아니면 또 다른 재개발 지역이었다. 수연은 자신의 상황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파악하고 싶었다. 그래야 느닷없이 찾아온 이 난제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빗물에 얼룩진 천장과 벽지를 보며 누워있던 어느 날 수연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삶을 그려보았다. 이 동네에 지낼만한 집이 없다면 살던 동네를 떠날 수도 있었다. 이번 기회에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학원 일을 할 수도 있고 학원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었다. 다양한 선택지가 펼쳐지자,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수연은 오랜만에 설레었다. 하지만 우재의 생각은 달랐다. 네가? 아무 연고도 없는데 혼자서? 지방에서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을 텐데. 우재의 말에 수연의 설레던 마음은 사라졌다. 우재야. 응? 그냥 잘될 거라고 말해주면 안 돼? 너 차도 없고 운전도 못
- 이승은
- 2026-09-01
문장웹진 소설
자꾸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자꾸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김효나 그는 얇은 회색 잠바를 입고 있었다. 아니다. 그의 시신은 얇은 회색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아니다. 그의 얼어붙은 육체는 얇은 회색 잠바 속에 내동댕이쳐 있었다. 내가 모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잠바였다. 아니다. 내가 모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잠바였을 뿐 아니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체크 남방, 한 번도 본 적 없는 추리닝이었다. 아니다. 내가 모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잠바, 남방, 추리닝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모르는, 가장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얇은 회색 잠바였다. 그의 얼어붙은 육체가 내동댕이쳐진 잠바, 남방, 추리닝 사이에서 내가 가장 모르는, 가장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은 얇은 회색 잠바라고 썼지만 실은 가장 모르는, 가장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은 그였다. 아니다. 실은 가장 아는, 가장 여러 번 본 적 있는 것은 그였다. 아니다. 실은 가장 아는, 가장 무수히 본 적 있는 그였지만 이런 모습의 그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알아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볼 수 없었다. 아니다.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가갈 수 없었다. 아니다. 다가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차갑게 얼어붙은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보시라고 말했다. 아니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보고 확인해 주셔야 한다고 말했다. 아니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확인해 주지 않으면 무연고자 처리가 될 거라고, 시신이 안치된 지 닷새가 지났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아니다. 나는 알았다는 식으로 입술을 웅얼거렸다. 아니다. 나는 다만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전히 그에게서 멀리, 가능한 한 멀리 뒷걸음질 치고 있었고 흰 가운을 입은 직원 역시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이런 일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즉, 이곳에서는 시신에게서 뒷걸음질 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다. 이곳에서는 시신에게서 옆걸음질 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다. 이곳에서는 시신에게서 뒷걸음질이나 옆걸음질 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 사람들 모두 결국에는 시신 곁으로 바짝 다가가야 하는 것 같았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보셔야 한다고 반복하여 말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아니다. 그렇게 하려고 했다. 아니다. 반만 그렇게 했다. 그러니까 반만 가까이 다가갔고, 반만 보았다. 아니다. 겨우 두 걸음 다가갔고, 눈의 초점을 흐리게 하여 그를 보았다. 아니다. 초점을 흐리게 하여 본 것은 그의 얼굴이었고,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만 분명히 보았다. 아니다. 의도적으로 초점을 흐리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초점은 저절로 흐려졌다. 나는 내 눈이 자동 초점 기능을 가진 카메라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고장 난
- 김효나
- 2026-09-01
문장웹진 소설
늦은 새해늦은 새해 주나영 우기 막바지인 3월 아침, 조식당에 안까지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직원은 사다리에 올라 창에 붙은 검은 시트지를 문질렀다. 들뜬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눌렀지만 쉽게 붙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해서 창을 가려야 하나 싶었다. 어젯밤 체크인할 때 받은 안내문 상단에는 영어로 ‘침묵의 날(녜삐 데이)’이라는 낯선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루 동안 발리의 불빛과 소음을 줄이며, 투숙객의 호텔 외부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안내문을 건네던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새해 첫날을 아주 조용하게 보내는 풍습이 있거든요.” 나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호텔 직원들은 목소리를 낮췄고, 손님들도 주변을 살피며 말을 줄이는 듯했다. 사다리 위의 직원은 테이프를 한 조각 더 잘라 시트지 가장자리에 붙였다. 그래도 한쪽이 다시 들뜨자 시트지 한 장을 떼어 사다리 아래로 내려보냈다. 창의 절반쯤이 드러났고, 유리 바깥 면을 따라 빗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은 케이지-프리 에그 화이트 오믈렛을 주문했다. 쉰을 넘긴 뒤부터 식단과 운동에 부쩍 엄격해졌다. 디종 머스터드 병을 열어 숟가락으로 접시 귀퉁이에 덜어 놓은 뒤, 오믈렛을 잘라 찍어 먹었다. 면도를 공들여 한 듯 턱끝이 말끔했다. 맞은편에 앉은 혜리는 빵 바구니에서 올리브 치아바타를 집어 들더니 박혀 있는 올리브만 손끝으로 빼 먹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어깨에 들러붙어 있었다. 머리를 귀 뒤로 넘길 때마다 손가락에 물기가 묻었다. 나는 냅킨 상자를 혜리 쪽으로 밀었다가 멈추었다. 혜리는 이미 옆에 놓인 냅킨으로 손끝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커피는 식어 있었다. 혜리는 남편과 전처 사이의 딸이다. 남편은 나보다 열다섯 살 많고, 혜리는 나보다 열다섯 살 어리다. 혜리가 초등학생 때 엄마와 함께 호주로 건너간 뒤, 남편은 일 년에 한두 번 혜리를 만났다.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빠짐없이 선물을 보냈다. 남편이 서재에서 혜리와 영상 통화를 하는 날이면 나는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를 조금 줄였다. 주방에 갔다가 웃음소리가 들리면 물병만 꺼내 돌아왔다. 통화가 길어지는 날에는 먼저 씻고 침실로 들어갔다. 남편은 통화를 마친 뒤 혜리의 학교생활과 새로 키우기 시작한 동물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나는 그가 보여 준 사진을 몇 장 넘겨본 뒤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혜리는 빵에서 올리브를 하나 더 빼 입에 넣었다. 남편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혼인신고를 했지만 결혼식은 혜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미뤄 왔다. 결혼식은 석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사흘 정도 쉬고 오자고 한 것도, 한국과 호주의 중간쯤인 발리에서 혜리를 만나자고 한 것도 남편이었다. 출발 전날 밤, 남편은 서재에서 청첩장이 든 봉투를 가져왔다. 구겨지지 않도록 얇은 파일 사이에 끼워 여행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혜리는 아보카도 스프레드를 빵 위에 고르게 펴 발랐다. 한입 베어 물자 빵 껍질이 바스러져
- 주나영
- 2026-08-01
문장웹진 소설
장정호장정호 장희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공기가 차고 맑은 곳. 다른 곳보다 해가 빨리 뜨고 지는.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희재에게서 그가 지내고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우듬지 너머로 뜨는 어슴푸레한 새벽 동이나 찹찹한 분위기,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같은 임야를 떠올렸다. “죽어버렸으면.” 희재는 허공 속의 한 점을 보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곳에서 죽어버렸으면. 희재는 어머니가 복수가 찬 채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분명히 그때와는 다른 뉘앙스가 있다고 느꼈는데,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른 아침부터 희재와 나는 서둘렀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입을 헹구고, 어제 벗어두었던 청바지를 주섬주섬 입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희재는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양손으로 손잡이를 쥔 채 창문으로 머리를 기댔다. 저기 뭐가 죽은 것 같아. 아니다, 다시 보니까 없어. 진짜 아무것도 없어. 희재는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혼자 말하고 답했다. 한참 후 주위가 고요해진 것 같아 옆을 보니 희재가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백반과 우동을 나누어 먹었다. 밥을 다 먹고도 시간이 남아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통유리창 너머로 구름 한 점 없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과 휴게소 뒤편으로 펼쳐진 강줄기를 바라보았다.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휴가철이 지나서인지 대체로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없었다.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왜 그렇게 서둘렀냐고 묻자 희재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희재의 아버지 얼굴을 보고 안부를 확인한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그는 삼 년 전 아내가 간경화로 죽고 난 후 홀로 지내다 언제부턴가 야산에서 지내고 있었다. 양산에 있던 그가 어떻게 산천에 있는 그곳으로 들어가 살게 됐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미처 주변을 정리하지도 않았다. 아직도 그가 살던 집 냉장고에는 그가 먹다 남긴 반찬들이 썩어가고 있을 터였다. 희재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적부터 기르던 식물들, 호야 나무, 산세비에리아, 스투키가 말라비틀어진 채 죽어 있을 것이다. 나는 먼지가 가득한 집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부터 희재와 희재의 가족이 살았던 집. 희재와 나는 명절이면 그곳에 가서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 돌아오곤 했다. 간간이 희재와 희재의 어머니, 내가 웃을 때면 그는 크고 검은 눈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이니까.” 그가 왜 그런 곳까지 가게 되었을까 하고 묻자 희재가 대답했다. 자신도 우연히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뿐 더는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뭐든 다 자기 멋대로인 사람.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에 다른 사람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냥 그런 사람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죽어버렸으면. 나는 희재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본 그는 그저 평범한 남자였다. 말이 없고 등이 조금 굽은 왜소한 노인. 그는 묵묵히
- 장희원
- 2026-08-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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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어쩌다보니 새해에 읽은 첫 글이 작가님의 글이에요. 두근두근, 심장소리에 살포시 웃었어요.
작가님^^ 새해 첫 소설 몰입해서 단숨에 잘 읽었어요 고맙습니다 선물같은 글! 추천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고 자주 웃는 한 해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