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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엣

  • 작성일 2026-07-01

  듀엣


조우리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그날부터 시작하는 수밖에는 없어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말이에요. 지금으로부터 이 년 전이니까, 난 열여덟이었고 그 애는 열일곱이었죠. 따지고 보면 고작 몇 달 터울일 뿐이긴 해도 엄연히 내가 언니거든요. 그 애는 끝까지 한 번도 날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지만요. 왜 그랬을까. 아마 우리 사이가 정말 자매처럼 가까워지는 것만은 원치 않았던 모양이지요. 어쩌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몰라요. 원래의 내 성격이라면 깍듯이 예의를 차리라고 한 소리 했을 거거든요. 그런데 왜인지 그 애에게는 내 이름을 함부로 불러도, 내 어깨에 손을 올려도 그냥 그러도록 내버려 두게 되었으니까.

  그날, 장 선생님이 서울역으로 직접 마중을 나가서는 가회동 우리집으로 그 애를 데려왔지요. 그 애를 처음 본 순간 난 벼락을 맞은 것처럼 깨달았어요.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오만하게도 그때까지 난 내가 완벽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태어나 한 번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란 없었지요. 누구나 날 보면 예쁘다고 칭찬하기 일쑤에, 내 스스로 느끼기에 제법 똑똑하기도 했으니까요. 노래야 두말할 것도 없고, 춤도 물론이고요. 그래서 장 선생님이 내가 혼자서는 데뷔할 수 없다고 했을 때, 도무지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거예요. 내가 어디가 못나고 무엇이 부족해? 왜 혼자서 무대에 서지 못한다는 거야? 자존심이 상해서 차마 장 선생님 앞에서는 말도 못 꺼내고는 밤새 뒤척이면서 혼자 속앓이만 해댔거든요. 그런데 그 애를 보니까 알겠는 거예요. 나에게 부족한 건 바로 저 애였구나. 그러니 이젠 됐다. 다 됐어. 안심이 다 되더라고요.

  나중에 이야기해 주었죠. 난 네가 있으니 됐다고. 난 너만 필요하다고. 우리의 첫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이었어요. 아뇨. 그 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어요. 어지간히 긴장을 했던 모양이죠. 그저 내 손을 한번 꽉 쥐고 말더군요. 아주 세게.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그 애가 들어오던 순간이 생생해요. 한여름이었지요. 날이 무더워서 마당에서 기르던 화초들이 축축 처지니까 살림을 봐주던 순천댁 아주머니가 사방에 찬물을 끼얹고 있었거든요. 순천댁 아주머니는 부지런하긴 해도 손끝이 야무진 편은 아니에요. 화단과 화분에만 조심히 물을 뿌리는 게 아니고 숫제 사방에 던져대듯 하니 마당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는데, 먼저 들어온 장 선생님이 철퍽 소리가 나게 물웅덩이를 밟고는 새로 맞춘 모시 양복이 다 상하게 생겼다며 투덜거렸더랬죠. 그러거나 말거나 순천댁 아주머니는 계속 물을 뿌려대고 그 바람에 마당 한구석엔 작은 무지개가 피어났어요. 난 대청마루에 앉아 킥킥 웃기만 했지요. 아마 수박도 먹고 있었나. 그때까진 장 선생님한테 서운한 마음이 남아 있었으니까,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퍽 재미났죠.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꿈에도 몰랐거든요.

  들어와.

  누가 또 와요?

  내가 이야기했잖아. 수희는 솔로가 아니라 듀엣을 해야 한다고.

  무슨 시스터즈니 하는 거, 정말로 하신 말씀이었어요?

  당연하지. 내가 어디 흰 소릴 하는 사람인가. 자, 얼른 들어오라니까.

  장 선생님이 재촉을 하니까 그제야 그 애가 열린 대문으로 들어왔어요. 특유의 걸음걸이. 쌓인 눈 위를 밟아도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을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말이에요. 나는 그 애가 마음에 담아둔 것이 없어 그렇게 날아다닐 듯이 걷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온 세상천지가 벼랑 끝 낭떠러지 같아서 발을 헛딛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그랬던 거더군요.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지옥 같은 불구덩이로 떨어질 것만 같아서…… 아. 정말 너무하지요. 결국 그 애가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고 말다니요.

  ……고마워요, 기자님. 정말 친절하시네요. 손수건에서도 좋은 향기가 나고요. 아시겠지만 인터뷰 요청을 해온 곳은 많았어요. 머물고 있는 호텔은 어떻게들 알았는지 퇴원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서 객실로 전화가 들어오더군요. 아이, 기자님을 탓하는 건 아니에요. 직업이 직업이니, 해야 할 일을 하시는 거잖아요. 이해해요. 그냥 좀…… 지긋지긋했어요. 방송국이며, 신문사며, 잡지사며…… 맞아요. 전부 거절했지요. 실은 저 다음 주에 부모님이 계신 미국으로 떠나요. 아니에요, 영영 여기하고는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거든요. 음반 같은 건 이제 쳐다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나온 이유는…… 기자님뿐이거든요. 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한 사람은요. 정말이에요. 다들 나한테 이 흉측하게 망가진 얼굴을 보여달라고, 베일을 걷고 세상에 얼굴을 내보이라고, 새카맣게 불타버린 극장에서 혼자만 살아남은 심정을 토로하라고 닦달을 해댔거든요. 심지어는 노래도 한 곡 부르라고 하더군요. 무대에서는 딱 한 번 같이 불렀던 우리의 노래를 말이에요. 듀엣곡을 혼자 부르라니, 잔인하기도 하지……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다시 시작하지요. 아까운 시간이 가고 있네요.

  그래요, 아직 그날이군요. 그 애를 보고 순천댁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서는 쪼르르 나에게로 달려왔어요. 그리고는 내 귀에 대고 다급하게 속삭이더군요. 아주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말이에요.

  아기씨, 저 애가 참 귄이 있네요.

  귄있는 애. 그건 순천댁 아주머니에게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찬사거든요. 집안 어른의 소개로 우리집에 일을 하러 온 첫날 어린 나를 보고서도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했다지요. 아기씨가 귄이 있으니 보살피는 보람이 크겠다고 말이에요. 우리 어머니는 사대문 안에서 태어나신 분이라,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고향에서 쓰는 말이라고요.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그래서 가끔은 얄미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이한테 하는 말이라고. 순천댁 아주머니는 듀엣이라는 말의 뜻을 몰랐거든요. 그러니 당신이 모시는 아기씨를 위협할 적이 나타났다고 여긴 거지요. 장 선생님이 나를 대신할 아이를 데려온 줄로만 알고요. 나중에 그 말을 전해주었더니 그 애는 막 웃더군요. 사랑스러운 아이라니. 자기 고향에선 가스나가 영 새피하다는 말이나 들었다나요.

  인사해라, 수희야. 너랑 듀엣을 할 윤명화다.

  기자님도 그 애의 이름을 이명희로 알고 계셨군요. 아마 다들 그럴 거예요. 가끔은 그 애조차도 자기 이름이 원래부터 이명희인 줄로만 아는 것 같았거든요. 언젠가부터 명화라고 부르는 건 나뿐이었으니까. 아이, 물론 둘이 있을 때만요. 

  장 선생님은 처음에 우리를 희 자 돌림을 쓰는 자매 듀엣으로 만들고 싶어 했어요. 이수희, 이명희. 기쁠 희(喜) 자를 써서 영어로 ‘조이 시스터즈’라고. 워낙에들 자매며 쌍둥이며 그렇게들 팀을 꾸리면 잘되곤 했으니까, 우리도 그 덕을 좀 보자는 계산이었겠지요. 나중에 기획사 계약을 하면서 박 사장님이 남들 뒤꽁무니나 따라다녀서야 되겠느냐고, 뭐가 됐든 앞장을 서야 하지 않겠냐고 면박을 주어서 무산되었지만요. 어머, 그래요? 희자매라는 팀이 나왔어요? 아, 그 팝송을 부르는 팀. 들어본 적이 있어요. 거기는 아마 셋이지요. 이름은 몰랐거든요. 만약에 장 선생님이 계속 우겼더라면 그 팀은 다른 이름을 써야 했겠군요. 고작 몇 달이라도 엄연히 우리가 선배 아니겠어요?

  장 선생님이 왜 그런 욕심을 냈는지도 이해는 가요. 그 애, 명화랑 나는 썩 닮았거든요. 화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가면 더 그랬어요. 아마 기자님도 구분 못 하실 걸요. 아무리 팬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쌍둥이처럼 똑 닮지는 않았지만, 동기간이라고 소개를 한다면 굳이 아니랄 것도 없었지요. 이목구비를 뜯어보면 죄 달랐는데도 어쩐지 풍기는 인상이 비슷하달까. 키도 몸매도 엇비슷하니 저기 저만치에 가만히 서 있으면 낳아준 부모도 헷갈릴 법하달까. 가끔은 꼭 쌍둥이처럼도 보였어요. 처음에야 그 애가 고향 말씨를 쓰고 난 서울말을 하니까, 또 순천댁 아주머니가 그 애는 얘, 하고 부르고 나더러는 애기씨, 하니까 우리가 달라 보였지만 그건 얼마 가지 않았거든요. 내 옷을 입히고 ‘이명희’라고 새 이름까지 지어주니 그 애는 금방 나처럼 말하고 나랑 같이 다니는 것에 익숙해졌어요. 기다렸던 것처럼. 맞아요, 기다려왔던 것처럼. 언제든 이전의 자기를 버릴 준비를 해왔던 사람처럼 말이에요.

  명화는 혼자 표를 끊어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왔다고 했어요. 윤명화, 열일곱 살, 부산 출신. 그게 제 입으로 뱉은 소개의 전부였지요. 고향에서의 생활과 가족들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요. 장 선생님은 뭘 더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한테는 얘기해주지 않았어요. 그 애가 당부를 해둔 것 같았지요. 굳이 캐물을 생각도 없었는데 말예요. 난 무슨 사연이 있나 보다 하고 말았어요. 열일곱 여자애가 가수를 하겠다고 혼자 서울까지 올라왔는데 사연이 없을 리가 있나요. 그런데 그건 나한테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아까도 말했지만, 나한테는 오로지 명화가 나랑 듀엣을 하게 되었다는 것만이 중요했지요. 장 선생님이 대단한 계획이라도 되는 것처럼 팀워크를 다져야 하니 우리집에서 같이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어요. 난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어요. 아무리 장 선생님이라고 해도 그 애를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분이 여자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는 분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장 선생님은 급히 만날 사람이 있다면서 명동에를 좀 다녀오겠다며 나가고, 명화만 우두커니 마당에 남았어요. 맞아요. 그때 장 선생님이 만난 사람이 대박기획의 박 사장님이에요. 사실 약속은 없었고, 내가 명화를 꺼려하는 거 같지 않으니까 신이 나서 달려간 거지요. 순천댁 아주머니가 손님방으로 쓰던 건넌방을 급히 치웠어요. 그때까지도 난 대청마루에 앉아서 그 애를 훑어보고만 있었고, 그 애는 내 눈빛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지요. 그때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내가 좀 예쁘다고 생각했으려나.

  수박 먹을래?

  그래요. 내가 그 애한테 처음 건넨 말은 고작 그거였어요.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건네거나 노래는 좀 할 줄 아느냐고 쏘아댄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걸 너도 같이 먹지 않겠느냐는 권유 말이에요. 한 조각 내밀기도 했어요. 그러면서도 나는 그 애가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명화는 망설임도 없이 성큼 다가와서는 마루에 털썩 걸터앉더군요.

  응, 먹을래.

  수박물에 끈적해진 내 손과 땀으로 끈적한 그 애의 손이 잠시 스쳤어요. 우리는 별다른 말 없이 함께 수박을 먹었지요. 순천댁 아주머니가 건넌방을 다 치웠으니 들어와도 된다고 외치기 전까지 말이에요.

  그 애의 짐이라고는 낡은 옷가지가 든 가방 하나가 전부였거든요. 내 보기엔 쓸 만한 건 하나도 없어 보였어요. 당장에 내다버리고 싶은 걸 그래도 소중하다고 챙겨왔으니 내 맘대로 할 수는 없고. 내 옷을 몇 벌 꺼내주니까 그 뒤로는 그것만 입고 원래 자기 옷은 가방에서 꺼내지 않더군요. 명화가 처음 우리집 건넌방에 들어간 날부터 불이 나서 방 안의 모든 것이 타 버린 그날까지, 그 가방은 같은 자리에 놓여만 있었지요.

  모르셨군요. 그날 불이 난 건 종로의 극장만이 아니었어요. 가회동의 우리집, 장 선생님의 장충동 작업실, 박 사장님과 직원들이 쓰던 명동 사무실에도 불이 났거든요. 기자님도 이상하시지요? 분명 누군가 의도적으로 불을 지른 방화사건이라고 경찰에 얘기했지만 내 말을 믿어주지 않더군요. 극장의 불은 누전 때문이고, 우리집은 누가 골목에 불씨가 안 꺼진 연탄을 버렸다나요. 장 선생님 작업실은 담배꽁초를 살피지 않아서, 명동 사무실은 인명피해도 없이 사무실 한쪽 캐비닛 하나만 탔을 뿐이라 조사할 필요도 없다나. 하필이면 그 모든 불이 같은 날 타올랐다는 게 어떻게 이상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게다가 그날은 우리의 노래를 처음 발표하는 데뷔 공연 날이었는데 말이에요.

  사실은…… 저는 범인으로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거든요. 아니에요,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라고 해야겠네요. 얼굴에 붕대를 감고 병원 침대에 누워서 수만 번을 곱씹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이 분명하다고. 어때요, 기자님. 특종을 보도할 준비가 되셨나요?



*          *



  남자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얼굴은 챙 넓은 모자 끝에 두른 검은 베일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막이 내린 무대처럼. 그런데도 여자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남자가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겠다는 듯 완고하게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각오를 마친 관객만이 다음 장을 볼 자격이 있었다.

  한 달 전, 종로의 한 극장에서 불이 났다. 삼 층짜리 건물이 전소된 대형 화재였다. 칠십일 년의 대연각 화재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또다시 화마가 끔찍한 참사를 불러오리라 겁을 먹었다. 그날 극장에서는 촉망받는 신인가수의 데뷔 리사이틀이 열렸고, 대단한 가수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이었으니 공연 중에 불이 났다면 수백 명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아니 다행이라고 해도 될 일은 아니겠으나, 사상자는 다섯 명에 그쳤다. 불이 공연이 모두 끝나고 관계자들이 뒤풀이까지도 마친 새벽에 타올랐기에.

  최초 신고 이후 삼십 분 만에 불은 완전히 진화되었으나 목조 건물이었던 극장의 상태는 처참했다. 잿더미가 된 극장에서 네 구의 시신과 한 명의 부상자가 발견되었다. 시신의 옷가지와 소지품을 통해 드러난 신원은 다음과 같았다. 

  박윤구, 오십삼 세, 남성, 대박기획 사장.

  장홍석, 사십이 세, 남성, 작곡가.

  안영숙, 사십 세, 여성, 식모.

  이명희, 십구 세, 여성, 가수.

  이들의 시신은 모두 무대 위에 있었다. 그리고 비상구 계단에서 다리가 골절된 채로 얼굴에 큰 화상을 입은 여자가 발견되었다. 일주일 뒤에야 겨우 의식을 되찾은 여자는 불이 난 그날 그 극장에서 이명희와 듀엣 가수로 데뷔한 같은 팀의 이수희로 밝혀졌다.

  남자는 어젯밤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인터뷰에 응할 테니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 객실로 찾아오라는 내용이었다. 반드시 혼자서만 와야 하며, 사진 촬영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특이한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 인터뷰 중에는 메모를 하지 말고 차라리 녹음을 하라는 거였다.

  제가 녹음 파일을 유출할까 걱정이 되진 않으십니까?

  남자가 묻자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웃음기가 실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 싶으시다면 제가 온전히 막을 수는 없겠지요. 그럴 셈이었다면 제가 허락하지 않더라도 몰래 녹음을 하면 그만이잖아요.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으실 거예요. 어떤 이야기는 영영 혼자만 간직하고 싶기도 하니까요.

  남자의 시선이 장막 너머의 여자를 좇다가 하릴없이 테이블로 향했다. 말끔하게 껍질을 벗겨 정갈하게 썰어둔 사과가 담긴 접시 옆에 식은 커피가 담긴 잔이 있었다. 포크도 하나, 잔도 하나뿐. 여자는 물조차도 마시지 않았다. 남자가 커피잔 옆에 놓아둔 녹음기에서 녹음 중임을 알리는 빨간불이 깜빡였다. 마이크로 카세트의 자기 테이프에는 침묵만이 새겨지고 있었다.

  남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나 긴장이 되는 이유는 앞으로 듣게 될 놀라운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 꼭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 들뜬 기색이 남자에게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위험하다고.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남자가 일평생 추구해온 바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지금도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좋습니다. 그 특종, 제가 하지요.



*          *



  원래대로라면 우리는 처음 만난 그 이듬해 봄에 데뷔할 예정이었어요. 일 년이나 더 걸린 건 순전히 나 때문이었지요. 장 선생님이 그전에 써 둔 노래들이 죄다 맘에 들지 않았거든요. 아무래도 듀엣을 위한 노래가 아니었으니까요. 내 솔로 음반에 넣으려고 했던 노래들을 억지로 듀엣곡으로 만들었으니, 아무리 나와 명화의 목소리에 맞게 파트를 나누고 화음을 추가해도 도무지 성에 차질 않았지요. 그러는 동안 가을이 다 지나고 겨울마저도 끝나가는 데도 우린 한 곡도 녹음을 마치지 못했더랬어요.

  수희는 도대체 언제까지 퇴짜만 놓을 셈이지?

  선생님도 느끼시잖아요. 영 아니라는 거 말이에요.

  내 듣기에는 그리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은 정도로 되겠어요? 선생님이 이렇게 배포가 작은 분인 줄은 몰랐네요.

  수희도 알겠지만, 예술에 만족이라는 건 없어.

  저는 예술에는 타협이란 것도 없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가 따박따박 대꾸질을 하는데도 장 선생님은 조곤조곤 다독일 뿐 언성을 높이지도 눈을 부라리지도 않았어요. 그분은 신사다운 매너가 있었거든요. 뭐, 미국에 계신 우리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후원금이 장 선생님이 그토록 여유로울 수 있는 근원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요. 내가 장 선생님과 실랑이를 하든 말든 명화는 녹음실 마이크 앞에만 서면 망설임 없이 노래를 불렀지요. 방금 받은 악보인데도 음 하나 틀리지 않고 말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것이 그 애의 최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 애는 스스로 돋보이도록 실력 발휘를 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 맞추어 주고만 있었거든요.

  너는 내 코러스가 아니야. 너랑 나는 듀엣이야.

  내 말에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말로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요. 아마도 몰랐을 거예요. 듀엣이 된다는 거, 한 사람 옆에 다른 한 사람이 동등하게 서는 일, 그때까지 그 애의 세상에서는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 어떤 기쁨을 주는 일인지도 알 수가 없었겠지요.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나는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애 손을 잡아끌었지요.

  아무래도 둘이 입을 맞추기 전에 마음부터 맞추어야겠군. 시간이 좀 필요하겠어. 그동안 나도 그대들 마음에 드는 새 노래를 만들고 말이야.

  장 선생님은 우리에게 집과 연습실만 오가지 말고 거리를 맘껏 쏘다니라고 했어요. 노래를 잘하려면 노래를 안 하는 날도 있어야 한다나요. 날씨가 풀리고 있으니 명동의 유명한 다방도 가고, 남산에 가서 케이블카도 타고, 능동에 새로 개장했다는 대공원에도 가보라면서요. 그러고 보니 명화가 서울에 온 지도 반년이 훌쩍 지났는데 그 애는 서울 지리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어요. 그 애가 다니는 동선이래 봤자 집에서 회현동 연습실과 충무로 녹음실을 오가는 게 전부였으니 그럴 밖에요. 다른 외출을 했던 건 딱 두 번이었어요. 성탄절에 명동성당으로 트리 구경을 갔었고, 설에는 조계사에 축원 연등을 달러 갔었지요.

  우리 둘 다 믿고 의지하는 신은 없었어요. 그렇대도 기도를 들어준다는 걸 마다할 필요가 있나요. 내가 비는 거야 늘 비슷하죠. 멀리 계신 부모님의 건강과 안녕, 내가 바라는 꿈이 이루어지기를.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순천댁 아주머니와 장 선생님도 무탈하시기를. 한집에서 살게 되었으니 그 애도 한 식구잖아요. 그러니 그 애의 행복도 빌어주었지요. 글쎄요. 그 애는 무얼 빌었으려나요. 성모상 앞에서도, 관세음보살상 앞에서도 간절하게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던 바람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기도 안에 나도 있었을까요.

  목련이 지고 진달래가 피기 시작할 때쯤에서야 그 애는 나를 편히 대하더군요. 나한테 먼저 말을 붙이기도 하고, 골목을 급히 지나가는 자전거가 있을 때면 내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기도 하면서요. 나는 이미 한참 전부터 그러고 있었거든요. 내가 손을 잡으면 그 애는 마주 잡는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붙들린 것처럼 그저 잡혀주기만 했었는데, 그때쯤에는 내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어 깍지를 껴 주었지요. 깡말랐던 몸에 보기 좋게 살이 오르고 키도 조금 자란 그 애는 정말로 나와 한 쌍처럼 보였어요. 가끔은 나도 요술거울에 비친 나를 본 것처럼 놀라기도 했지요. 내 말투, 내 표정, 내 몸짓이 고스란히 옮아 있었는데 그럼에도 분명하게 내가 아니었으니까.

  장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하는 성실한 학생들처럼 우리는 서울 곳곳을 누볐어요. 명동 제비다방에서 쌍화차를 마시면서 디제이에게 신청곡 쪽지를 적었지요. 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이 연습실 바로 지척에 있다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요. 그 애는 케이블카 유리창에 바짝 붙어 아래를 내려다보더군요. 난 금방이라도 그 애가 잠긴 문을 부수고 바깥으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어요. 줄 하나에 매달려 허공에 떠 있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애의 고요한 눈이 무서워서 그 애에게 매달려 팔짱을 꼈는데, 그 애는 내 마음을 짐작이나 했을까요. 전망대에서 그 애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었어요. 사진사에게 돈을 주고 기념사진도 찍고요. 아, 그 사진도 불타버렸군요. 우리가 함께 찍은 단 한 장의 사진인데 말이에요.

  그 사람을 만난 건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 돌아온 여름날이었어요. 아니, 만났다고 할 수는 없겠어요. 그 사람은 우리를 보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볼 수 없었으니 말이에요. 어쩌면 보았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사람이라고 알아보지 못했으니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때 우리는 박 사장님의 주선으로 워커힐호텔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장 선생님이야 우리 부모님이 후원금을 보내준다 쳐도 박 사장님은 우리를 마냥 놀릴 수만은 없었겠지요. 우리는 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손님들이 자리를 채우는 동안 여흥을 돋우는 역할이었어요. 명화는 문주란 노래를 잘했어요. 허스키한 목소리도 꽤나 흉내를 잘 냈거든요. 명화에게 패티김 노래가 신청곡으로 들어오기도 했지요. 나는 김추자 노래를 주로 불렀어요. 흥이 오르면 고고춤도 좀 추고 말이지요. 돌아가며 한 곡씩 부르다가 끝에는 펄시스터즈 노래로 마무리를 하는 식이었는데 팁도 제법 받았어요. 

  정식 가수가 아니니까 따로 대기실이 있지는 않았고 악단들이 쓰는 대기실 한쪽을 얻어 쓰고 있는데 어느 날 우리 앞으로 꽃다발이 들어왔어요. 품에 겨우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장미 꽃다발이었지요. 호텔 로비에 있던 벨보이가 팁을 받고 심부름을 해 준 거였는데 표정에 귀찮은 기색이 하나도 없던 걸 보면 쏠쏠하게 받았던 모양이에요.

  최고의 가수, 희에게.

  꽃다발 속 카드에는 짤막하게 한 줄이 적혀 있더군요. 나가려는 벨보이를 붙잡고 누가 주었느냐 물었더니 그저 팬이라고만 전해달라고 했다지요. 내가 둘 중에 어떤 희에게 보낸 것이냐고도 물었는데 그걸 자기가 어떻게 아느냐고 쏘아붙이고는 나가버렸고요.

  수희에게 온 꽃일 거야.

  그 애가 그렇게 말했고, 내 생각도 같았지요. 노래를 부르고 꽃을 받은 게 처음도 아니었으니까. 여학교에 다닐 때는 발표회가 끝나고 꽃다발 때문에 사고가 날 뻔한 적도 있었거든요. 아이, 과장이 아니에요. 처음엔 한 손으로 그다음엔 두 손으로 꽃다발을 들다가 더 들 수가 없는데도 계속해서 건네주는 바람에 품에 가득 안게 되었는데도 멈추지 않고 그 위로 꽃다발을 쌓아버리는 바람에 그만 넘어질 뻔했다니까요. 지나친 사랑이란 사람을 휘청거리게 만들기도 한다는 걸 배웠지요.

  나는 선심을 쓰듯 그 애에게 꽃다발을 반으로 갈라 꽃을 나누어주었어요. 공평하게 나누겠답시고 꽃송이를 세어서 정확히 절반을 주었지요. 그 애는 마치 내가 선물하는 꽃인 양 나에게 연신 고맙다고 말을 하더군요. 집으로 돌아온 우리에게 순천댁 아주머니가 똑같은 화병을 건네주었어요.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문을 열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잘 자라고 인사를 했지요. 같은 미용실에서 다듬은 머리에, 같은 양장점에서 맞춘 투피스를 입고서 말이에요. 그 밤엔 안방에도 건넌방에도 장미 향기가 가득했을 거예요.

  그 이후로 그 사람은 공연 때마다 꽃다발을 보내왔는데, 작은 선물도 하나씩 함께였거든요. 처음엔 쿠키나 초콜릿 같은 간식거리였는데 어느 날은 고급 미제 립스틱이 들어왔어요. 꽃도 쿠키도 초콜릿도 그 애와 똑같이 나눌 수가 있었는데, 립스틱은 그럴 수가 없잖아요. 기껏해야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그 애의 입술에도 립스틱을 한 번 발라주는 것밖에는.

  너에게 더 잘 어울린다.

  진심이었거든요. 그 말을 하면서 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기자님은 아세요? 다 똑같은 붉은색처럼 보여도 저마다 다 다르거든요. 여자들의 화장품이라는 게 그래요. 아주 미묘하지만 엄연한 차이가 있단 말이지요. 그 립스틱의 붉은색, 분명 내가 아니라 명화에게 더 어울렸어요.

  명화가 먼저 무대로 올라가고 대기실에 남은 나는 거울을 바라보다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립스틱을 문질러 지워버렸어요. 그리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지요. 명화는 내 몫까지 더 많은 노래를 불러야 했을 거예요. 당황했을까요? 아니면 기뻤을까요? 나는 묻지 않았어요. 명화도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니까. 그날 명화는 평소보다 훨씬 더 화려한 꽃다발과 선물 상자를 들고서 집에 돌아왔답니다. 그래요, 최고의 가수, 팬이 사랑하는 가수 희는 수희가 아니라 명희였던 거예요.

  그 애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가 받은 꽃과 선물을 나와 나누려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받지 않았지요. 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 애가 그랬던 것처럼 그 애에게서 받는 선물이라고 여길 수가 없었거든요. 그 애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내가 나누는 것들을 어쩜 그렇게 기쁘게 받을 수 있었을까. 정말 나에게서 받는 선물이라고 여겼던 걸까. 실은 자기의 몫이어야 할 것을 가로채서는 겨우 절반만 나누어주었을 뿐이라는 걸 알고 나서는 어땠을까. 그 애에게 물어보았더라면 그 애는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괜찮다고, 난 정말 기뻤다고, 그런 말을 들을 수도 있었을까요?

  그 이후로 워커힐호텔에서는 명화만 공연을 했어요. 난 이태원의 파라다이스에서 마무리 공연을 했고요. 메인 가수들이 약속된 공연을 마치고 떠나면 흥이 오른 이들을 늦게까지 붙잡아두면서 매상을 올리는 역할이었죠. 거긴 미군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팝송을 많이 부르고 팁도 달러로 받았어요. 난 영어를 몇 마디 할 줄 알았으니까, 거기 손님들에게 인기가 나쁘지 않았지요. 명화는 내가 받지 않는데도 대청마루에 자기가 받은 꽃과 선물의 절반을 올려놓곤 했어요. 순천댁 아주머니가 그 꽃을 내 방에 장식해두면 나는 화병에서 꽂을 뽑아 마당에 던져버리기도 했답니다. 왜 그렇게 심술이 났던지 몰라요. 아마도 질투였겠지요.

  한 번은 자정 넘어까지 공연을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방에 노란 장미가 꽂힌 화병이 있었어요. 나는 습관처럼 꽃을 뽑아 들고 마당으로 향하는 들문을 열고 몸을 내밀었는데 그 애가 나를 부르더군요.

  수희야.

  그 애가 툇마루에 나와 앉아 있었어요.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내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도 다 지켜보고 있었나 싶기도 했어요. 부엌 옆 순천댁 아주머니 방에는 불이 꺼져 있었지요. 달이 밝아 그 애의 흰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어요. 그 애도 내 얼굴을 보았을 거예요.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지요.

  솔로곡만 부르니까 재미가 없다. 너도 그렇지?

  나는 대꾸하지 않고 들문을 닫았어요. 그리고 노란 장미를 다시 화병에 꽂았지요. 불을 끄고 캄캄한 방에 앉아서 그 애가 건넌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날 때까지 숨죽이고 있었어요.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지요. 그 애는 밤새 툇마루에 앉아 있었을까요. 혹시나 내가 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에요.

  뜨거운 여름이었어요. 내 마음도, 그 애의 마음도 그랬을 거예요. 지난 여름까지만 해도 그 애는 시골에서 상경한 볼품없는 가스나였고, 난 그저 제 잘난 줄만 아는 오만한 아기씨였는데 말이에요. 계절이 한 바퀴를 돌아온 여름날 우리는 무더위뿐만 아니라 화려한 조명과 무대의 열기와 낯모를 누군가가 보내는 사랑에 속수무책으로 달아오르고 있었지요. 그 달뜬 마음 안에는 서로에 대한 감정도 있었을까요. 적어도 나는 있었거든요.

  나는 그 애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딱 맞는 짝이라고. 그러니 함께 있어야만 한다고. 장 선생님이 혼자 데뷔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던 건 나뿐인데, 그 애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맞아요. 그 애는 아니었죠. 그 애는 혼자서도 팬을 매료시키고, 최고의 가수라는 말을 들었잖아요. 나는 내가 가진 걸 나눠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애에게서 빛나는 재능을 갈취하고 있었던 것만 같아서 괴로웠어요. 그 애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에요.

  우리의 데뷔곡이 완성되었다는 장 선생님의 연락을 받았을 때는 가을의 초입이었어요. 선생님은 원래도 날렵했던 분이 더 홀쭉해지셨더군요. 늘 말씀하시는 창작의 고통 때문이었겠지요. 명화는 남포동 동명극장에서 처음 장 선생님을 마주쳤을 때 국극에서 남역을 하는 배우인 줄로 알았다고 했을 정도로 장 선생님은 선이 고운 분이시죠. 녹음실이 아닌 작업실로 우리를 부른 장 선생님이 심각한 얼굴로 우리에게 묻더군요. 혹시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없느냐고요.

  이상한 사람이라니요?

  귀찮게 쫓아다닌다거나 억지로 구애를 한다거나 하는 일 없었어?

  우리는 힐끔 서로의 눈치를 살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장 선생님이 크게 탄식을 하셨지요. 맞구만, 맞아, 광팬이 붙었어, 하면서요.

  광팬까지는 아니에요. 그냥 꽃과 선물을 좀 주는 정도인데……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곧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지요. 명화가 그 큰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거든요. 그제야 알게 되었어요. 내가 명화와 따로 공연을 다닌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에요. 

  그 사람은 내가 명화와 떨어지길 기다렸던 것처럼 모습을 드러냈다더군요. 공연 전에 박 사장님이 차로 명화를 호텔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가 끝날 때쯤 데리러 가곤 했는데, 박 사장님 차가 떠나기가 무섭게 누군가 명화의 손목을 잡아챘다는 거예요. 중절모를 쓴 남자였는데 너무 놀라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멍하니 끌려만 가다가 악단 사람이 명화를 알아보고 공연이 곧인데 어딜 가느냐고 물으니까 그 남자는 그대로 달아나버렸다고요.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무대에 올라갔더니 글쎄 그 남자가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더라는 거예요. 모자 때문에 그늘이 진 얼굴에서 비죽 웃는 입만 보였다나요.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재킷 윗주머니에는 손수건까지 끼운 모습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점잖은 신사로만 알았겠지요. 공연이 끝나고 명화가 대기실에 돌아왔더니 뻔뻔스럽게도 꽃다발과 선물이 놓여 있었다더군요.

  그냥 버려버리지, 바보처럼 그걸 매번 집으로 들고 왔어?

  어디서 쳐다보고 있을까 봐…… 날 따라와서 해코지를 할까 봐……

  나는 그 애가 나를 걱정해서 그랬다는 걸 알았어요. 그 애는 우리집에 살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이 우리집을 알아내서 나한테도 해코지를 할까 봐 애써 웃으며 노래를 불렀던 거예요. 고마운 팬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말이지요.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 애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내 자신이 미워질 정도였어요.

  장 선생님은 우리에게 종이 한 장을 보여주었어요. 그것은 경고장이었답니다. 우리는 단번에 그 필체를 알아보았어요. 최고의 가수, 희에게. 그 사람의 글씨가 분명했지요.

  희를 솔로 가수로 데뷔시키시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있는 최고의 가수요.

  갈색 잉크라고 생각했던 것은 자세히 보니 피였어요. 무심코 종이를 집어 들었던 나는 악 비명을 지르며 내던져 버렸지요. 장 선생님은 같은 내용의 혈서가 박 사장님의 사무실에도 들어왔다고 했어요. 경찰에 신고를 했으니 나도 명화도 당분간 바깥출입을 삼가고 그 사람이 잡힐 때까지는 공연도 나가지 말라고요. 다행히 장 선생님의 작업실까지는 몰랐는지 우리가 본 혈서는 녹음실 앞으로 온 거였어요. 우리는 신곡의 악보만을 받아든 채로 집으로 돌아왔지요. 나중에 듣기로 박 사장님은 어두운 골목에서 괴한에게 얻어맞기도 했다더군요. 경찰이 말하길 명화를 차에 태우고 다니니 기둥서방이라고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다고요. 

  가을 내내 우리는 대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그 노래를 불렀어요. 알 수 있었지요. 그 노래가 우리의 노래라는 걸. 우리는 그 노래를 부르며 듀엣으로 데뷔할 거라는 걸. 수백 번, 수천 번을 불러도 질리지가 않았어요. 우리는 하루는 내 방인 안방에서 나란히 누워 자고, 또 다른 하루는 그 애가 쓰는 건넌방에서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까무룩 잠들었어요. 아, 그날들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어요. 어떤 이야기는 그저 혼자서만 간직해도 충분하지요.

  첫눈이 내리던 날, 장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경찰이 범인을 잡았다고요. 이제 안심해도 된다고 말이에요. 

  누구예요? 도대체 뭐 하는 작자예요?

  내가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니까 명화가 가만히 내 손을 잡았어요. 그 애의 손이 떨리고 있었지요. 그동안 태연한 척 했지만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장 선생님은 혀를 차며 말했지요.     글쎄, 워커힐호텔의 벨보이였다고 말이에요.

  나는 처음 장미꽃다발을 대기실로 가져왔던 벨보이를 떠올렸지요. 어쩐지 명화를 자꾸 힐끔거렸던 것도 같고, 나에게만 유독 쌀쌀맞았던 것도 같고. 그 괘씸한 놈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어요. 자수를 했다고 해서 참작을 해주고 싶지도 않았지요. 장 선생님은 박 사장님 사모님의 친척 어른이 종로경찰서 높은 자리에 있으니 단단히 손을 봐줄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덧붙였어요. 나는 그 말들을 명화에게 전해주며 명화를 끌어안고 다독여주었고요.

  며칠 뒤에 벨보이가 재판을 받고 옥살이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광팬 짓거리를 하고 혈서를 보낸 것은 큰 죄가 아니었는데 박 사장님을 습격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나요. 성에 차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드디어 우리의 노래를 녹음할 수 있게 된 거지요.



*          *



  탁.

  녹음기가 카세트 테이프의 끝을 알리며 작동을 멈추자 고요가 찾아왔다. 남자는 곧 깨달았다. 자신이 테이프를 바꾸기를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벌써 세 번째 테이프였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인터뷰 내내 남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여자에게서 느껴지던 위화감이 무엇인지. 남자보다 여자가 더 이 인터뷰의 녹음을 원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남자는 녹음기에서 테이프를 꺼내 뒷면으로 뒤집어 넣었다. 여자는 남자가 녹음 버튼을 누르고 녹음기의 붉은 램프가 깜박이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남자는 지금껏 여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되도록 질문을 삼갔다. 여자가 울먹이거나 감정이 북받친 듯 말을 잇지 못할 때에만 손수건이나 위로의 말을 전했을 뿐. 여자가 남자에게 질문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대답만을 했다. 남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남자의 인내심도 거의 바닥이 났다. 여자는 특종 운운하며 남자를 자극했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었다. 몇 시간째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남자는 테이블에 놓인 사과를 다 먹고 커피도 다 마시고 소파 옆에 놓인 협탁의 바구니에 들어있던 비스킷도 전부 다 까먹었다. 피곤하고 허기가 졌다. 어서 본론을 듣고 여자와는 그만 헤어지고 싶었다.

  어쩌면 여자는 미쳐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다. 큰 사고였고, 가족처럼 지내던 식모와 오랫동안 함께 가수 데뷔를 준비했던 작곡가와 기획사 사장이 죽었다. 무엇보다 그날 한 팀으로 데뷔한 또래의 가수도 죽었다. 자신은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을 뿐더러 사고의 구설을 꼬리표로 단 채로는 가수 생활을 할 수 없으리라. 제정신인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 애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걸요.

  이명희 씨가 말입니까? 무엇을 말인가요?

  그때, 남자의 굶주린 위장에서 배수관을 타고 물이 흘러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민망하게도 길게 이어지는 소리에 남자는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배를 부여잡았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장하시지요. 조금만 참으세요. 이제 다 끝나가니까요. 사과를 좀 더 드릴게요. 드릴 게 그것밖에 없네요.

  여자가 작은 냉장고 안에서 사과를 한 알 꺼냈다. 빨갛게 잘 익은 사과였다. 다시 테이블 옆 소파로 돌아온 여자의 손에는 어느새 과도가 들려 있었다. 여자가 능숙하게 사과를 돌려가며 껍질을 깎았다.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여자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애는 알고 있었어요. 벨보이가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비록 얼굴은 기억하지 못했어도 그 사람에게 손목이 잡혀 끌려가던 때의 상황은 생생했거든요. 무대 가장 앞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던 그 사람의 실루엣도 도무지 잊히지 않았고요. 확실히 벨보이보다는 체격이 좋았어요. 그래요, 기자님 정도 되었겠네요. 꼭 기자님처럼 다리를 꼬고 앉아서…… 그렇게 웃으면서 날 바라보았지. 그렇지?

  남자가 여자의 손에 들린 과도를 빼앗는 것과 여자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녹음기를 집어든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남자가 팔을 뻗어 과도를 여자를 향해 겨누었다.

  도대체 무슨 수작이야.

  수작이라니.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순간 아니야? 나랑 단둘이 호텔 방에 있는 거 말이야.

  뭐? 그게 무슨……

  모르겠어? 나예요. 최고의 가수. 죽여서라도 갖고 싶었던, 당신의 희. 

  여자가 모자를 벗자 검은 베일 역시 먹구름이 걷히듯 사라졌다. 여자의 얼굴에는 화상 자국 같은 건 없었다. 남자는 귀신을 본 듯이 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고.

  왜요? 분명 당신이 죽인 이명희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눈앞에 서 있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거봐, 내가 말했잖아. 당신은 우리를 구분할 수 없을 거라고. 고작 그따위면서, 겨우 그 정도의 마음이면서, 감히 수희를 죽였어. 당신이 그랬어.

  여자가 서슬 퍼런 눈으로 남자를 꿰뚫을 듯이 노려보았다. 남자는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여자는 지금 유도 심문을 하고 있다. 녹음기의 빨간 램프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남자는 테이블 위로 한쪽 다리를 올렸다.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뛰어 넘어가 여자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녹음기 이리 내놔.

  당신은 무대 위에 혼자 있던 수희를 나로 착각하고 덤벼들었지. 끝내 당신 뜻을 거스르고 듀엣으로 데뷔를 했다면서 용서할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어. 소란을 듣고 무대로 달려온 장 선생님과 박 사장님, 순천댁 아주머니를 차례로 해쳤지. 그리고는 저항도 하지 않는 수희를 찔렀어. 수희가 왜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는지 알아? 내가 달려갈까 봐 그랬던 거야. 당신은 같이 죽자면서 수희를 찔러놓고는 막상 스스로를 찌를 용기는 없었지. 비겁한 인간. 벨보이에게 돈을 주고 자수를 시킨 것처럼 이번엔 노숙자에게 돈을 주고 불을 지르게 했지. 극장뿐만이 아니라 우리집에도, 장 선생님의 작업실에도, 기획사 사무실에도 불을 질렀어. 살인자. 방화범. 당신은 죗값을 치러야 해.

  남자는 여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극장에서 남자가 네 사람을 찌른 것은 사실이지만 맹세코 불은 지르지 않았다. 노숙자를 사주하다니, 그런 일은 없었다.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희에게 속이 상해서 그만 눈이 돌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무대 위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겁먹은 다리가 먼저 움직여서 달아났다. 그런데 불이라니. 게다가 극장뿐만 아니라 연쇄 방화라니. 

  남자는 여자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가 테이블 위로 뛰어 올라온 것이다. 그리고는 남자가 들고 있는 과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접시와 커피잔, 포크와 티스푼 등이 요란하게 잘그락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자는 과도를 든 남자의 손이 자신의 복부를 깊숙이 찌를 수 있도록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

  여자는 웃고 있었다. 여자가 눈짓으로 바닥에 떨어진 녹음기를 가리켰다. 테이프가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당연히 녹음은 끝이 났다.

  그래, 그날 극장에 불을 지른 건 나야. 노숙자를 시켜 다른 곳에 불을 지른 것도 나고. 내가 뒤늦게 무대로 달려갔을 때, 수희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어. 그 애가 나에게 말했지. 우리 이제부터 파트를 바꾸자고 말이야. 그게 내가 안전해지는 길이라고 했지. 당신이 자기를 나로 알고 있으니, 나는 무사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그때 나는 그 애가 원하는 일이라는 핑계로 혼자만 도망쳤어. 너무 무서워서. 그러면서도 혹시나 당신이 그날 무대 위에 있었던 게 내가 아니라 수희라는 걸 알아챘을까 봐 다리가 부러졌다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거짓 소문을 냈지. 병원에 있는 동안 당신이 나를 확인하러 오기를 기다렸어. 그런데 당신은 정말 모르더군. 나를 사랑한다더니, 죽일 만큼 사랑한다더니,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여자는 자신의 피로 끈적해진 손으로 남자의 손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핏물에 두 손이 붉게 젖어가는 동안, 경찰들이 여자와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호텔 객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자는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그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싶었다.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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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소설

Midnight Coffee Club

Midnight Coffee Club 나일선 광학적 미디어의 역사는 사라짐의 역사이고 그것이 이제 내게도 사라질 자유를 주고 있다. -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 찾는 사람에겐 보여, 목소리, 믿고 있기 때문에 들려, 쓰는 일보다 더 하고 싶었던 건 얘기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 일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선 써야 했고 자신이 만들어낸 목소리와 대화하는 것, 그런 걸 소설이라 불렀지. 목소리가 선명해질수록 현실과는 점점 멀어져 어느 순간 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 사람과 만날수록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아,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건 그 갈망이 오랫동안 나를 지켜주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너무 열심히 찾았기에 서로를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건지도,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도 길었기에 함께 지내는 법을 몰랐던 것 같아. 미친 사람처럼 자기 안의 모든 것을 다 말해야만 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자신의 전부가 되어주길 바라거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 것 같아. 그게 우리가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었으니까.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과 같이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우리가 만나기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라고 말하는 순간 다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더 이상 살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도 만날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아, 이제 네가 내 앞에 있었고 우린 함께 있으니까, 모두가 포기한 질문들 앞에서 목소리는 내게 말했지. 더는 아무것도 찾지 않아서 들려, 더는 믿지 않기에 보여, 모든 감정이 다 지나가고 난 자리에 언제나 내가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잃어버릴수록 무언가를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고, 어디서든 혼자일 수 있었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연결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 같아, 듣는 방법을 몰랐기에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가 내게 말해주었지. 오랫동안 서로를 생각한다는 건 연결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어가는 또 다른 방식이다. RB의 소설에서 이런 부분은 꼭 나를 위한 것 같다. 읽고 있으면 항상 그와 커피를 마시거나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꼭 RB가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라도. 그에겐 소설이 있었고 나에겐 무엇이 있나? 나중에 보니 노이도 나와 같은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고 세 번째인가, 네 번째쯤 봤을 때 노이는 패밀리 레스토랑 윙키스에서 RB의 소설을 읽고 있는 나를, 극장에서 청소를 하는 나를, 주크박스를 차에 싣는 나를, 묘지 근처를 산책하는 나를, Noodle Express에서 팟타이를 포장하는 나를 봤다고 했다. 그중 어디까지가 나였을까, 나도 모르는 내가 노이의 기억 속에는 있었고 그런 게 좋았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내가 어쩌면 더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전에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는 노이를 본 적이 있고 그때는 이름도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언젠가 노이와 대화를 하게 될 날이 올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었지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노이는 RB의 소설이 좋

  • 나일선
  • 2026-07-01

문장웹진 소설

프롬프트의 딸들

프롬프트의 딸들 최형경 AI 프로그램에 갈색 가죽 가방을 든 이십 대 여자의 반신 사진이 만들어졌다. 민정은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았다. 사진 속 얼굴은 카리나의 얼굴형과 장원영의 눈매, 제니의 입술을 닮았다. 단추 두 개를 푼, 하얀색 셔츠 의상도 마음에 들었다. AI 작업 보드를 조작해 AI 영상 프로그램으로 모드를 바꾸었다. 민정은 영상 프롬프트를 쓰기 시작했다. 사진 속 여자가 아래 대본을 읽게 해줘. 저는 진짜 사람이 아니라 AI 모델입니다. AI 패션 룩북 만드는 법, 이제 어렵지 않습 작성을 멈췄다. 사진의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민정은 여자를 다시 살폈다. 갈색 가죽 가방이 눈에 띄었다. 로고가 없는 직사각형 모양의 숄더백이었다. 민정은 인터넷에 접속해 샤넬 시즌 백을 검색했다. 캐비어 가죽에 금장 샤넬 로고가 가방 덮개에 붙은 천이백만 원짜리 샤넬 백 이미지를 저장했다. 민정은 다시 AI 작업 보드를 조작해 AI 이미지 프로그램으로 모드를 바꾸었다. 민정이 샤넬 백 이미지를 첨부하고 프롬프트를 썼다. 여자의 가방을 첨부된 이미지와 같은 걸로 바꿔줘. AI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민정은 프로그램 화면과 시간을 번갈아 확인했다. 아이의 하원 전에 인스타그램 계정에 새 게시물을 올리고 장도 봐야 했다. 뿌연 이미지가 선명해지지 않았다. 이미지가 만들어지다가 오류가 났다는 알림창이 떴다. 민정은 다시 엔터를 눌렀다. 몇 분 뒤 완성된 이미지를 보니 가방 뚜껑의 샤넬 로고가 찌그러져 있었다. 한숨이 났다. 민정은 작업을 그만두고 노트북을 닫았다. 화면이 닫히자 민정이 작업을 하던 부엌 식탁 너머로 생활동화 전집이 보였다. 거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백 권의 책들은 민정이 작년 삼 개월 할부로 팔십오만 원을 주고 구매한 것이었다. 민정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오늘 분의 쇼츠는 오늘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돈을 번다. 민정은 다시 노트북을 열어 작업 창을 켰다. 민정이 AI 강좌 인스타그램 계정 운영을 시작한 건 딸 때문이었다. 자라나는 아이 아래로 돈은 쉼 없이 들어갔다. 발달에 필수라는 국민 아이템부터 영유아 방문 수업, 유기농 식재료까지 성장에 좋다는 건 AI 결과물처럼 끊임없이 생겨났다. 생활동화 전집도 국민 아이템 중 하나였다. 판매 사이트에서는 전문가의 의견을 빌려, 두 돌에서 네 돌 사이에 생활동화를 읽히면 예의 바른 아이로 큰다고 홍보했다. 전집은 차례차례 줄 서기, 친구에게 양보하기, 싸우지 말기 등의 주제로, 말을 듣지 않는 나쁜 주인공들이 착하게 되는 스토리를 담았다. 하지만 민정은 딸을 옆에 앉혀놓고 전집의 책을 읽을 때마다 다른 생각을 했다. 차례를 기다리고만 있는 건 소극적인 태도 아닐까. 양보를 잘하면 착한 사람은 되지만 성공하긴 어렵겠지. 내 것을 지키려면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야 해. 민정은 생활동화를 읽을 때마다 혀 아래까지 차오른 불순한 마음을 딸 앞에서 삼켜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먹은 마음을 왜 가지게 되었는지 누구도 묻지 않기를 바랐다. 큰 계기가 없었기 때문

  • 최형경
  •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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