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 작성일 2026-10-01
- 댓글수 0
베일
윤해서
∴
배달을 끊을 수 없다. 이번 달에만 12번째 같은 메뉴를 시켰다. 분리수거 배출일은 월요일이다. 월요일 18시부터 23시까지만 재활용 쓰레기를 배출할 수 있다. 일주일치 쓰레기를 모아 월요일 밤에 내다 버린다. 조명을 환하게 밝힌 주차장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커다란 이케아 봉투 가득 플라스틱 용기를 들고 온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그 사람과 말없이 번갈아 비닐, 플라스틱, 종이, 캔을 분리 배출한다. 내가 이번 달에만 열두 개째 버리고 있는 똑같은 플라스틱 뚜껑 아래 색색의 플라스틱이 가득하다.
∴
두 개의 점이 있다.
점을 번갈아 본다.
어떤 움직임이 점을 만들 때 점에 내려앉는 건 뭘까.
같은 크기의 점을 찍을 뿐인데.
무엇이 점과 점 사이에 차이를 만드나.
∴
면허 갱신 안내 문자를 받았다. 최근 6개월 내 찍은 사진이 있어야 하고,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증명사진을 찍는 일은 언제나 불편하고 어색하다. 어딘가 제출했을 최초의 증명사진을 앨범에서 발견했는데, 5살의 나는 입을 꼭 다물고 뭔가를 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증명사진을 찍을 때마다 흑백사진 옆에 모아두었는데 조금씩 다른 사진 속 얼굴이 모두 흑백사진 속 얼굴과는 기묘하게 닮아 있다. 내가 사진관을 선택할 수 있게 된 후로는 계속 같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몇 년 만인지 그 사이 사진관은 이사를 했다. 큰길가에서 골목 안쪽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하고 찾아갔는데 이전 사진관 크기의 절반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 의자와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왼쪽으로 조금 갸우뚱. 이런 지시를 하던 사장님이 답답했는지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이리저리 조금씩 움직였다. 보정을 거친 사진 속 나는 거울로 매일 보던 나와 달랐다.
∴
금을 넘는 데 몰입하던 때도 있었다.
충동이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면서.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거나 휴대전화를 없애고 오래 걷거나 새벽까지 놀이터에 앉아 있거나.
보고 싶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
토끼 머리 위에 쌓인 먼지를 털고, 알람이 울리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토끼는 세 마리. 접시 하나를 들자고 매끈한 토끼 셋이 두 손 모으고 있다. 예외는 있을 수 없어 사이좋게 나란히. 어떤 날 접시 위에 사과를 올리고 토끼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아래층 사람이 천장을 두드리기 시작해서 팔 아프겠다, 생각하다가. 아래층 천장 위에 웅크리고 깜빡 잠들었다. 해가 지려는지 집은 어둑하고 에어컨 바람이 서늘했다. 눈을 뜬 건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
∴
통 속에 손을 집어넣는 기분.
통의 깊이를 알 수 없다.
∴
큰 화분 2개와 작은 화분 2개가 있다. 작은 화분 중 하나에서 꽃대가 올라왔다. 이렇게 더운데. 꽃이 피었다. 역대 최대. 역대 최고. 이런 표현이 매일 반복되고 있다. 에어컨을 틀어 갇힌 공기를 식힌다. 2주 전에는 짧았던 꽃대가 일주일 만에 길어지더니 다섯 송이의 꽃이 피었다. 어디에서 소리 없이 죽고 이미 오래전에 죽어서 생겨났다. 야자는 무난하게 잘 컸다. 달마다 흙을 뚫고 올라와 하나의 줄기가 열 개 스무 개 잎으로 펼쳐졌다. 시든 끝을 오리고 공중에 물을 뿌렸다. 숨이 빠져나올 구멍이 부족한 것도 같다. 분사되는 방울들.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고, 기름 값이 내렸다는 뉴스를 본 것을 떠올렸다. 뉴스와 현실이 늘 같진 않다. 점심시간도 지난 애매한 오후 시간인데도 항상 복잡한 사거리에서 길이 막혔다. 빨갛게 표시된 구간을 통과하는 동안 옛날 노래를 들었다. 그 시절에 매일 만나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는데 그 사람들의 얼굴과 같은 얼굴인지 확신할 수 없다. 매주 2리터짜리 물 조리개에 물을 받아 큰 화분에 한 통씩 주고, 분무기로 잎에 물을 뿌린다. 물 받침대로 흘러나온 물을 버리고, 잎에 생긴 벌레를 알코올 솜으로 닦아낸다. 나는 얼마 전 화분 하나를 죽였고, 화분들이 죽을까 봐 꾸준히 마음을 쓴다. 길에 있는 나무나 꽃은 알아서 잘 자랄 거라고 믿으면서. 사실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나무나 꽃을 보고 감탄만 한다. 사람의 얼굴은 매일 조금씩 바뀌고 언제나 연료 계기판의 눈금은 연료보다 천천히 줄어든다.
∴
“프랑스 라스코의 동굴에는 약 1만 9000년 전 제작된 벽화 지도가 있다. 세계 최초의 지도일 수도 있는 이 벽화에 무엇이 그려져 있을까?”
탐험가 퀴즈를 보았다.
∴
매일 걷는 길을 걷는 것만으로 죽을 수 있다.
∴
다와다 요코의 『목욕탕』을 먼저 읽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아구아 비바』를 읽었다. 두 책을 처음 읽은 계절은 기억나지 않는데, 『목욕탕』 을 최근에 다시 읽을 일이 있었다. 『목욕탕』을 처음 읽을 때는 전혀 없었던 어떤 느낌에 계속 사로잡혔다. “인간의 몸은 팔십 퍼센트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첫 문장을 시작으로 “나는 투명한 관이다.” 마지막 문장까지 모든 문장은 제자리에 있었다. 책꽂이에서 『아구아 비바』를 꺼냈다. 리스펙토르가 쓴 첫 문장은 “거기엔 몹시도 심원한 행복이 있다.”지만 독자가 만나게 되는 첫 문장은 편집자 주이다. “Água Viva는 단어 그대로를 직역하면 ‘살아 있는 물’로 번역되고, 일반적으로는 해파리를 의미한다.” 자유롭고 투명한 관이 두 책 사이에 놓였다. 『아구아 비바』의 마지막 문장은 “내가 당신에게 쓰는 이것은 계속되며 나는 홀려 있다.”이다. 나는 멀리 꽂혀 있던 두 책을 포개어 두고 계속 되는 중이다. 잠시 둘 사이를 흐르는 것이 되었다.
∴
글자의 형태로 인간을 납치하는 것.
∴
오이를 씻고, 가지를 씻고, 당근을 씻고, 오이를 썰고, 가지를 썰고, 당근을 썰고 거의 기계처럼 빠르게 움직이면서 만들어지는 것을 본다. 김치를 담그고, 깨를 볶고, 쌀을 씻으면서 채워지는 걸 본다.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고, 먼지를 닦아내면서 정리되는 것을 본다. 냉장고를 비우고, 욕실 거울에 물기를 제거하고, 신발을 나란히 줄 세우면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본다.
뭐든 피하는 법만 늘었다.
∴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손.
두 사람은 머리채가 잡혀 고개를 똑바로 들 수 없다.
양손으로 서로의 목을 조르면서.
∴
내내 비가 오다 그쳤다. 운동복을 빨았다. 운동복은 세탁기에 넣은 지 90분 만에 세탁, 탈수, 건조되어 나왔다. 따뜻한 운동복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거실에서 따뜻한 운동복에 코를 박고 있을 때 주방에서 조금 전에 음식을 덜어 먹은 그릇의 세척이 끝났다는 소리가 울렸다. 식기세척기가 입을 열고 증기를 배출했다. 누군가 주방에 갔다가, 냉장고가 만든 얼음을 컵에 담았다. 컵에 탄산수를 따랐다. 컵을 손에 쥐자 기포가 터지는 게 보였다. When you lose something you cant replace1)
∴
이렇게 더운 건 처음이다.
이런 폭우는 처음이다.
∴
그런데 그게 왜?
∴
움직이면서 덮치는. 끈을 잡아당기자 무더기가 끌어올려진다. 끈은 무더기 속에 연결되어 있다. 끊어질 것 같다. 무더기를 단체로 들어 올린다. 끈은 두고 무더기를 풀어헤친다. 무더기 속에서. 탄력으로 묶거나 찢어지면서 붙잡거나 끌어올리면서 끌어당기거나 끈이 끈을 잡아매는. 가라앉는 이유를 모르겠다. 유리 벽에 밧줄이 하나 둘 셋 매달려 있는 것을 본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알아듣는 사람끼리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들으면서 끈의 끝을 올려다보았다. 말이 오고 가고, 아래로, 아래로. 몇 걸음 뒤에. 팽팽해진 근육.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기도 했나. 믿어서가 아니라 방법이 없으니까. 할머니가 스타킹으로 묶어 놓은 겨울 이불. 그걸 밟고 노는 게 좋았던. 잎이 물들고, 낙엽이 지고, 얼고, 썩고. 물에 젖으면 잘 늘어나. 양손에 한끝씩 쥐고 당기면 묶은 게 졸리는. 데니아 20 검정 스타킹으로 묶어 놓은.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줄다리기 시합은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 팔을 걸고 몸을 눕히고. 뒤에 뒤에 뒤에 붙고 붙고. 일일이 답하는 사람이 어딨어. 쌓이는 것은 쌓이고 무너지는 것은 무너지고. 투명은 질기고 지킬 게 마음밖에 없는 사람도. 끈을 잡아당기자 끈이 쏙 빠져나온다. 단번에 매끄럽게. 이렇게 쉽게? 어느 날.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아무 상관없는 사람의 말을 듣게 된다. 당신은 이미 눈치챘다. 얼마든지 비겁해지겠구나. 산도 좋고 바다도 좋고 절벽도 좋고 호수도 좋아. 끝없는 들판을 보면 숨을 참게 된다. 붙잡힌 적 없는데. 당길 수 있을 때 당기고 놓을 수 있을 때 놓으세요. 종의 울림. 종소리가 서로의 간섭으로 멀리 간다. 종 내부에 결정이 있다. 펭귄은 멀리서 보면 무더기. 무더기로 보인다. 손을 잡자 제자리에서 난다. 바닥에 펭귄 키만 한 구멍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
현실이 현실을 가린다.
∴
파일 하나를 영구 삭제했다.
∴
극장에서 나왔을 때 손발이 얼어있었다. 미지의 것이 한 시간 가까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동안, 죽은 사람들의 얼굴과 공포에 질린 산 사람의 얼굴이 번갈아 나왔다. 쉬지 않고 들리는 총성과 욕설이 두려워서 미친 사람의 비명으로 들렸다. 눈앞에서 자동차가 날고,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의 허리가 꺾였다. 영화는 그것을 상상하게 만들고, 그것을 죽게 만들고, 그것의 배를 가르고, 마침내 그것이 말하게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는 아니었다.
∴
채칼에 대고 무를 밀면 무가 밀려 나온다.
쌓인 무 위로 무가 쌓이고.
밀린 무 위로 무가 넘친다.
채칼 하나가 모든 걸 해결할 때가 있어.
∴
도시를 떠나 전기를 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밭을 일궈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살고 있다. 엄청나게 어려운 일을 하시는 분들이네요. 혼잣말처럼 답하면서, 십 년 전쯤 살았던 마을을 떠올렸다. 나는 그 마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사람들이 종일 집 앞에 돗자리를 깔고 나와 앉아 있다. 손을 흔든다. 서로의 머리를 빗겨 주면서 나에게도 돗자리 위에 앉기를 권한다. 나는 처음에 돗자리 귀퉁이에 앉아서 두 다리를 모으고 그들을 따라 조용히 웃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표정이 다양해지고, 손짓이 커지고, 어떨 땐 일어서서 뭔가를 말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나중에는 큰 종이를 펼쳐놓고 동네 아이들과 돗자리에 엎드려 그림을 그렸다. 그 마을 어디에서나 설산이 보여서 내내 아름다움에 홀려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매 순간이 설산이 투명하게 비치는 호수처럼 맑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밤이면 전기가 귀해서 일찍 자야 했고, 물이 끊겨서 샤워가 중단되기도 했다. 새벽에는 마을 사람들과 모여 밀크티를 마시고, 낮에는 하염없이 걷는 그 꿈같은 마을을 떠날 수 있었던 건 다른 아름다움에 홀렸기 때문이다.
∴
나는 너를 본다.
∴
바닥을 향해 던진 것이 튀어 오른다.
무거운 것이 가볍게 느껴진다.
∴
밥을 먹으면서 국도 여행하는 콘텐츠를 보고, 같이 밥 먹던 누군가와 국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인천에서 강릉까지 우리나라를 횡단하는 6번 국도의 끝까지 달려보기로. 처음 달리는 길이 많았다. 국도 번호의 표지판이 나타날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도시를 벗어나서 고개를 들지 않아도 하늘이 보이는 곳까지 나갔을 때 마을주민 보호구역을 지났다. 길에 죽어있는 고라니를 만났다. 지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오대산에 들러 식당에 갔는데 나물이 한 상 가득 나왔다. 열다섯 가지 나물 중에 이름을 아는 나물은 다섯 개도 되지 않았다. 나물의 이름을 친절하게 알려준 건 그곳에서 일하는 네팔 청년이었다. 절반도 먹지 못했다. 다음 날 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겨 놓고 온 나물을 한 번 생각했다. 국도 다음에 고속도로가 생겼지. 인간이 괜히 고속도로를 만든 게 아니다. 역시 고속도로가 편해.
∴
바닥을 들여다보고 있다.
바닥에 멍이 들어 있다.
만질 수 없는 것을 문지른다.
바닥을 기는 것은 없다.
마른 흙에 풀포기도 이끼도 없다.
아무것도 살지 않는다.
바닥에 비친 얼굴.
모르는 척하고 싶다.
바닥의 습관으로.
사람의 마음을 더듬는다.
멍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
산 것을 만지는 산 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멀리서 목격된다.
∴
밤에 범인이 다녀갔다. 후진 중에 경고음이 울린다. 계속 가다가는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복도를 따라 엘리베이터까지 흔적이 남아서. 범인이 떠난 방에 사람이 찾아왔다. 경고를 무시하면 둘 중 하나. 여기에서 시작된 게 분명합니다. 문 밖에 서 있다. 경고음은 경고를 들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것은 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손에 들린 것을 본다. 사람의 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다.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이어진 걸 따라왔다니까 그러네. 움직임을 막는 경고음이 울린다. 낮밤은 둥글고 길은 하나로 이어져. 발을 뗀다.
∴
깊은 바다 위에 부서지는 빛.
가만히 본다.
가까이 가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
숲에 쓰러진 잣나무가 있다. 잣나무 앞에 푯말이 세워져 있다. 이 나무는 벼락을 맞아 쓰러졌습니다. 푯말의 윤곽은 어렴풋하고 바탕은 텅 비어 있다. 허리 숙여 푯말을 읽다가 장작을 하나씩 쌓는 사람을 보았다. 누군가 숲속에 있다. 장작이 모인다. 비 오다 그치고, 까치 울다 그치고, 쓰러진 잣나무는 고요하다. 사람들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나간다. 장작 위에 장작이. 보기 좋은 무질서를 이룬다. 장작 생각이 나면 장작을. 얼마나 오래 모아왔는지 알 수 없다. 밤이면 둥글게 모여 노래 부르는 사람들. 잣나무를 위해 기도하는 두 손. 뒷짐 지고 순식간에 타오르는 하늘. 무섭다 생각했다. 어디까지 가는지 알 수 없어.
∴
물을 삼키는데 누군가 지나간다.
목구멍을 따라 행진하는 사람들.
기도에 걸려 기침이 터져 나온다.
토할 수도 삼킬 수도 없습니다.
받으소서.
아멘.
우리 은하가 잡아먹은 은하의 흔적.
식도를 따라 행렬이 이어진다.
망원경으로 관측된 발자국 같은 건 없다.
거리에 대한 포기 같은 것이 있었나.
과오를 나눠 가진 하나의 별자리.
천구의 반대쪽으로 흩어져.
빽빽하게 뒤엉킨.
∴
부드러운 동그라미. 바닥에 떨어진 오디. 골목에서 골목으로 달리는. 건반과 누렁이가 현실이었던 시절. 그런 건 다 잊고. 이렇게 더운 날. 누군가와 마주 앉아 참치 뱃살을 씹고, 전복을 씹고, 연어 알을 꼭꼭 씹어 삼켰다. 현실이라는 단어를 문장마다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현실은. 현실을 생각했을 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이런 말들이 입에서 망설임도 없이 매끄럽게 미끄러져 나왔다. 현실 :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나 상태. 나는 누군가와 실제로 존재했지만 누군가의 현재와 나의 현재가 정확하게 중첩되어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현실을. 현실을 그렇게. 그런 말은 언젠가 들은 말이었고 그 말이 현실을 이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충실하게, 현실을 재연했다. 누군가와 쇼핑몰에 가서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만 오가는 층을 오갔다. 어디나 사람이 많아서 놀랐고 거울에 스칠 때마다 어딘가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모양, 재질, 색감. 누군가의 옷을 고르고, 만족했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동시에 허기를 느꼈다. 만두피 속에 쌓여있는 새우 살을 씹고, 튀겨진 닭의 다리를 씹고, 닭의 알이 풀어진 국을 마셨다. 국그릇 속에 풀어진 노란 덩어리. 씹기 좋게 곱게 다져진 살. 그건 현실이 분명했다. 다르게 느낀다면 다르게 말할 수 있을 거다. 단어의 차원에서 현실은 거울과 닮았다. 그걸 깨뜨리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
자리 열 개가 하나의 받침에 연결되어서.
한 사람이 자세를 고치면 열 사람의 몸이 떨린다.
뻔한 구도가 가정을 만들고.
한 사람이 온몸으로 웃어 열 사람의 자세를 바꾼다.
열 개의 다리가 이불 속에 있어.
전기는 통하면서 머물 줄 모른다.
열 사람 놀라 한 사람 몸살을 앓는다.
∴
이질적이다. 느낌인지 생각인지 기분인지 모르겠다. 자주 걷던 거리, 종종 만나던 사람, 옷걸이에 걸린 옷, 벽을 골똘히 본다. 갑자기 얼굴이 나타난다면 놀라게 될까. 입을 벌린다. 누가 제일 처음 노래를 시작했나. 음의 높낮이, 박자, 리듬. 이런 이름들도 있기 전에. 몸을 울려 처음 부르는 노래. 자장가 같은 것을 떠올리다가.
막이 뚫린 기분.
안경점 폐업 문자를 받았다.
∴
2026년 8월 26일 네팔-중국 티베트 국경 지대 근처에 있던 빙하가 붕괴됐다.
∴
완전히 덮어두고 있었다. 그 뒤로 내려온 길을 다시는 오르지 않았다. 눈 속에 누군가 있었다. 나도 거기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만났다. 손전등을 들고 좁은 눈길을 따라 걷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사방이 눈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눈을 마주 보았고, 누군가 서 있는 뒤쪽 겹겹의 봉우리를 보았다. 높이가 가늠되지 않았다. 몇 시간 뒤면 하산이 시작될 것이다. 해발 4130m 베이스캠프, 오후에 이미 도착한 거기가 목적지였다. 당신은 이 시간에 여기에 왜 왔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보폭이 큰 걸음으로 다가오며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뒤를 돌아보았다. 깊은 새벽이었고 고요했다. 누군가 나와 같이 내 뒤를 주시했는지, 그저 나를 계속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무섭지는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여긴 왜. 이 시간에.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누군가 역시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고, 봉우리 쪽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초조했다. 누군가를 만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롯지의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와 내 입에서 동시에 빠져나온 숨이 하얗게 번졌다. 나는 어색하게 몸을 왼쪽으로 조금 틀었다. 비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방해가 될 생각도 누군가의 목격자가 될 생각도 없었다. 내가 오랫동안 원한 건 하나였다. 여기에 도착하는 동안 누군가 마주하게 되는 장면은 끼어든 적 없다. 이렇게 계속 마주 서 있을 수는 없지. 누군가 내 오른편을 지나쳐 내가 온 곳을 향해 몇 걸음 비켜갔다. 옅은 술 냄새가 났다. 나는 누군가 온 곳을 향해 걸었다. 한참을 앞만 보고 걷다가 내가 길이라고 믿고 걸어온 길이 누군가가 길 없는 능선을 걸어갔던 발자국이었다는 걸 알았다. 길은 곧 끊겼다. 누군가 거기에서 멈췄고, 돌아섰던 것이다. 나는 잠깐 멈춰 섰다. 걸어온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 누군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작게 보였다. 멀리 있는데도 나를 향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 오른팔을 들었다. 그것이 이쪽으로 오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한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사위가 어둠보다 눈에 가까워졌을 때 나는 누군가 서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천천히 돌아섰고, 우리가 떠나온 쪽으로 걸었다. 나는 손전등을 끄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 사라진 자리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큰 보폭으로 걷기 시작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하나의 문을 닫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손발이 얼어 아무 감각이 없었다.
∴
규칙적으로 돌아오는 발작.
양껏 마음을 쏟고 무심히 돌아선다.
∴
택배가 도착했다.
커다란 상자 하나와 상호가 적힌 흰색 불투명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상자와 봉지는 현관 앞에 두고, 주소가 적힌 택배 송장을 분리했다.
파란색 운동 바지와 흰 수건 20개를 각각 투명한 비닐봉지에서 꺼내 세탁기에 넣었다.
자극과 에너지는 혼동된다.
∴
분홍 베일에 싸여 푸른 감옥의 비를 선사하지. 새벽에 적어놓은 문장은 시시했다. 아무 장면도 동반하지 않는 소리로만 이루어진 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문장도 선명하게 남지 않았다. 전날에는 긴 회의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거북목이 심한 상태라는 걸 안 뒤로 습관적으로 하는 노력. 반듯한 자세로 앉아 전방을 주시했다. 경청하는 자세로 보일만 했다. 비가 하루 종일 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에 머리카락을 붙이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일찍 잠들었기 때문에 새벽에 눈이 떠졌다. 그 시간은 내가 보통 자려고 눕는 시간이기도 해서 잠들기 위해 깨어난 기분이었다. 눈을 뜨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책상 쪽으로 다가간 일이다. 암막 커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한 팔을 뻗고 있었다. 손에 닿는 무엇을 막아줄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는 어둠 속에서 책상 위에 쌓여 있는 A4 용지를 집었고, 뒤집었다. 글씨가 있는 쪽으로 뒤집었다는 건 몇 시간 뒤 커튼을 걷은 후에 알았다. 가지런히 프린트된 글자들 위에 아무렇게나 흘려 쓴 글씨를 알아보았다. 비는 그쳤고 오후에는 일을 하러 가야 한다.
∴
길에서 모르는 누군가를 만났다.
그러니까 싫다고 했어야지. 그러니까 싫다고 했어야지.
빠르게 중얼거려서 고개를 숙였다.
잊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
집에 돌아와 시계를 보았다.
∴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솔라스탈지아
∴
블랙홀이 떨면서 내는 신음.
∴
누가 그걸 몰라?
∴
달라진 건 없다. 눈을 뜨면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연다. 컵에 물을 받는다. 오줌을 싸고, 치약을 짜서 이를 닦고, 클렌징 폼으로 세수하고, 바디워시로 샤워하고, 샴푸로 머리를 감는다. 치약과 클렌징 폼과 바디워시, 샴푸의 일회 사용량은 거의 동일해서 그것들은 차례로 떨어진다. 거실장에는 뜯지 않은 같은 제품들이 나란히 들어 있다. 그것들은 성분과 기능, 향과 거품의 정도를 고려해서 선택한 것이다. 주기적으로 주문하고 다 쓴 용기를 내다 버린다. 모든 제품이 거의 동일한 향이다. 온몸에 거품을 바르고, 머리에 거품을 뒤집어쓰고, 미끌거리지 않을 때까지, 거품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물을 흘려보낸다. 샤워기 헤드에서 일정량의 물줄기가 쏟아진다. 샤워를 하면서 노래를 듣거나 부르지 않는다. 샤워를 하면서 후회도 원망도 하지 않는다. 마음을 쓰지 않는다. 달라진 건 없다.
∴
맨손으로 시달렸다.
∴
잠에서 깨서 메시지를 확인한다.
주먹 모양으로 마음을 말아 쥐고.
다리를 떠는 사람.
오래전 떠난 메아리가 도착한다.
구름산 터널에 구름이 걸려 있어.
살과 살이 벌어진 곳에서 태어난 말이 지독하다.
상한 곳을 잘 들여다봐.
∴
부드러운 애정이 가득한 눈빛을 보았다.
∴
이 닦고 커피 마시고. 매일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모든 걸 미뤄두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은 다. 그냥 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겠다는 생각까지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다. 그런 날들이 오래 이어져 왔다. 어릴 때는 내가 미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때 내가 미루고 싶었던 건 숙제나 피아노 학원에 가야 할 시간, 이를 닦거나, 잠들어야 할 시간 같은 것이었다. 하나를 미루면 미룬 무게만큼 마음이 무거워졌고 그래서 더 더디게 움직였다. 나는 거북이, 나무늘보, 달팽이 같은 별명들로 불린 적이 있고, 그건 네가 너무 느려서 그래, 라는 타박을 종종 받았다. 하지만 내가 미룬 것을 언제나 어른에게 들켰다. 늦게라도 학원에 가서 연습곡을 쳐야 했고, 밀린 숙제는 개학식 전날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 했다. 끝까지 떼를 써보아도 12시에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이제 나는 내가 미루고 있는 것들을 쉽게 들키지 않는다. 내가 미루는 것들은 눈에 보이는 것일 때보다 보이지 않는 것일 때가 더 많고, 그건 당장에는 내 눈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루다 보면 미뤘다는 사실마저 잊게 된다. 내가 무엇을 잊었는지 기억해내기 전에. 그냥 다. 미루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미루면서. 미뤄둔 것들은 잊고 여기저기 정신을 판다.
∴
어딘가 들어섰다.
진동에 휩싸였다.
∴
거의 매일 누군가 누군가를 죽인다.
∴
전시관 앞에 수영장과 골프장이 있다. 풍차가 돌고, 분수가 솟아오른다. 바람과 사람이 오간다는 이야기. 구멍으로 공이 들어가고. 사람이 물을 뒤집어쓰고. 바닥이 바닥을 훔치고. 이야기는 골프장 수영장과 대치하고 있다. 멀리서 씨를 뿌리고, 고랑을 파고, 무언가 끌고 오는 소리. 말만큼 침묵도 스쳐 지나간다. 형상, 분위기, 냄새. 아무것도 끌려오지 않는다. 한 사람의 마음에 맺혔던 것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
누군가 짧은 영상을 보내왔다.
붉은 불꽃이 가득했다.
거실 창에 걸린 불꽃의 색깔이 바뀌었다.
내일이 진짜야.
∴
몇 시간 사이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서 도미노 한 줄이 차례로 넘어진 형상이 되었다. 그건 사소한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되었다. 어쩌면 오랜 습관에서. 해가 지고 있었고, 퇴근한 사람들이 각자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알 수 없는 찜찜함 같은 것이 중요한 일정을 잊은 느낌으로 반복해서 돌아왔다. 지속의 원인을 모르는 건 아니었는데 불편함이 불편함을 이기고 있는 상태였다. 퇴근하면서 퇴근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말을 시작하면 돌아온 느낌을 미뤄둘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다시 돌아오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말을 시작했다. 곧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멀어졌고 거의 완전히 잊혔다.
∴
일어난 것.
일어나는 것.
일어날 것.
∴
바람이 선선해졌다. 운동복은 세탁기에 넣은 지 90분 만에 세탁, 탈수, 건조되어 나왔다. 따뜻한 운동복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거실에서 이제 더위가 한풀 꺾였다는 이야기를 할 때 식기세척기가 입을 열고 증기를 배출했다. 누군가 커피 머신에 캡슐을 넣고 커피를 내렸다. And nothing else matters.2)
∴
점멸하는 신호에 절인.
∴
개와 나란히 앉아 있다.
개가 숨을 쉰다.
개의 등에 손을 얹고.
개에게 맞춰 들이쉬고 내쉰다.
∴
매초 다른 색으로 반사되는 메아리 구슬. 고대의 시간이 멈춰 있다. 시간이 닳아 투명하게 부풀고. 이름이 지워진다. 해가 수면으로 들어간다. 단박에 흘러내리는 당나귀 꼴. 끌려가는 당나귀 걸음. 한순간 살냄새가 골목을 채운다. 잃은 것을 되찾으려고. 창틀 없는 창으로 무언가 들어온다. 마음속에 든 걸 만진다. 없는 것이 생긴다. 무거워 땅이 주저앉는다.
∴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났다. 변한 것을 눈치채고,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그게 시간으로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 그사이 전쟁 중인 나라에 다녀온 사람과 전쟁 중인 나라에 갈 계획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는 전쟁 중인 나라를 추억하고 누군가는 전쟁 중인 나라를 기대했다. 요거트 아이스크림이 녹는 동안 영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물이 차올라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사람의 눈이 떠올랐다.
∴
모르는 사람의 퇴사 소식이 뉴스에 나왔다.
멈출 수 없으므로 멈출 수 없다.
불안이 분주하게 놀이를 낳는다.
∴
거대 태평양 쓰레기 지대는 하와이와 미국 캘리포니아 사이 북태평양 환류 해역에 형성된 초대형 플라스틱 집적 지역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찰스 무어 선장은 1997년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로 항해하던 중 바닷물 속에 작은 플라스틱 입자들이 떠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플라스틱 수프. 플라스틱은 가벼워서 부유하기 쉽고, 무한히 쪼개질 뿐 분해되지 않는다. 파도, 자외선, 염분, 충돌 속에서 더 작은 입자로 부서진다. 입자들은 바닷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바람과 함께 대기 중으로 떠오른다. 대부분의 플라스틱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두워지고 열 흡수 효과가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대기가 뜨겁게 반짝인다.
∴
개인적 사건을 공적 사건으로 만들기.
공적 사건을 개인적 사건으로 만들기.
∴
하늘에서 떨어진 열매를 맞았다. 전날에는 이런 의미의 문장을 읽었다. 열매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적은 있지만 열매가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어디에서 읽었는지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인상은 분명히 기억하는데 열매가 떨어지는 장면을 찾아내려고 기억을 한참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과수원에서 포도를 따본 적이 있있고, 귤나무밭을 지난 적이 있었지만 열매가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열매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었는데 문장 때문인지 감이나 대추가 어딘가 통, 튀고 구르는 소리를 기억해냈다. 기억-소리를 만들어냈다.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라 마주친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 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정류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몇 시간 뒤에 굉장히 많은 사람 앞에 서 있을 예정이었다. 버스는 물론 다른 차들도 한동안 지나가지 않았다. 어딘가 빨간 신호가 들어왔을 것이다. 버스가 나타났을 때도 버스 정류장에는 나뿐이었다. 버스가 멈췄고, 이마에 뭔가 떨어졌다. 버스에 올라탔을 때, 기사님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피. 기사님의 손가락이 가리킨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보라색 액체가 물컹하게 묻어나왔다. 나는 마침내 진짜 열매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지만, 여전히 열매가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은 없다. 나는 그것이 낙하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고, 이마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기억-소리와 순식간에 일치했다. 버스 정류장에 있는 두 그루 나무에는 몇 년 동안 어떤 열매도 맺히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확인한 나무에는 잎만 무성했다. 물고 가던 열매를 떨어뜨리는 새를 상상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열매를 맞는 일은 처음 일어났는데 평생 일어난 적 없는 일이 일어났고 일어난 일이니 이유를 알고 싶었다. 기억을 들여다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열매를 확대해 보았다. 그것이 으스러지기 전 상태를 알지 못했다. 자세히 보려고 계속 끌어당기자 새끼손가락 한 마디 버찌만 하던 열매는 더는 확대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진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이다. 하늘에서 하늘을 가득 채운 열매가 떨어진다. 일어난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
같은 절정을 본 적이 없다.
반복 후에 선명해진다.
상승과 하강에 따른 무한.
구간 반복을 실행한다.
미련 없이 증식하는 레이싱 서킷.
시발점을 차례로 통과하는 선수들.
∴
달리는 길 위에 달려온 길이 포개진다.
∴
떠나고, 떠나기 위해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내가 어딘가를 여기로 느낀다면. 거기 뭔가 살아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오랫동안 여기가 아닌 곳에 있으려 했다. 문을 열고 나선다. 오래 걷거나 달린다. 뭔가를 타고, 뭔가에서 내리고. 어딘가 도착한다. 어딘가는 과거의 어느 때에 끼어드는 기분을 느끼게 했고 어딘가는 낡은 미래에 도착한 익숙함을 느끼게 했다. 어디든 도착하면 내가 있는 거기는 여기가 되었지만. 붉고 황량한 땅 가운데 솟은 절벽 위. 어딘가 완전히 다른 곳에 도착한 적이 있다. 주위에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지프차에서 내린 사람들 몇뿐이었다. 바람이 불면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이따금 흙먼지가 날리고, 해가 조용히 떠 있었다. 우리 혹시 죽은 건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는데도 기이하게 고요했다.
∴
그날 밤 내가 들은 건 선명한 총성이었다.
∴
언젠가 커다란 투명 공 안에 들어가 구르는 사람을 보았다.
그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공 안이다.
일단 구르기 시작하면 하늘과 땅이 공을 이룬다.
번갈아 뒤집혀.
구르는 동안 오로지 숨만 쉰다.
공을 생각하지 않는다.
∴
이번 달에만 13번째 같은 메뉴를 시켰다. 일주일치 쓰레기를 모아 내다 버린다. 조명을 환하게 밝힌 주차장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커다란 세탁소 비닐 가득 플라스틱 용기를 들고 온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그 사람과 말없이 번갈아 비닐, 플라스틱, 종이, 캔을 분리 배출한다. 내가 이번 달에만 열세 개째 버리고 있는 똑같은 플라스틱 뚜껑 아래 색색의 플라스틱이 가득하다.
∴
말라 죽은 나무를 보았다.
∴
허구를 보듯 보았다.
1) Coldplay, <Fix you>
2) Metallica, <Nothing Else Matters>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소설
공유자의 기록공유자의 기록 이서수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가 나를 데려간 곳은 엉뚱하게도 낡은 정자 앞이었다. 아버지는 육모정이 있는 그 땅을 세 조각으로 잘라 친구들과 나누어 가졌던 사실을 내게 처음 알려주었다. 사다리꼴 모양의 땅 둘레에 소나무와 중국 단풍나무, 벚나무가 띄엄띄엄 심겨 있었다. 파란 셔츠를 입은 아이가 정자 마루 끄트머리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며 발끝으로 축구공을 굴렸다. 그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여 부근에 사는 아이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 사람이 삼분의 일씩 갖고 있어. 그러니까 이 땅의 삼분의 일이 네 몫이라고. 아버지에게 땅이 있었는지도 몰랐기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내게 증여할 생각이라는 말이 더욱 놀라웠다. 아버지가 다른 가정을 만들면서 우리의 관계는 소원해진 지 오래였다. 한편으론 번듯한 건물이 아니라 낡은 정자가 지어진 땅을 물려받게 된 사실이 약간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자 앞은 너른 공터였고 지도 앱을 통해 확인한 주변엔 초등학교와 파출소, 보습학원과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정자를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지으면 가치가 얼마나 오를지 궁금했다. 정자는 저대로 내버려 둬. 그건 지켜. 아버지가 내 속내를 읽은 듯이 말했다. 나는 미약하게 항의했다. 땅을 이렇게 놀리는 사람이 어딨어? 놀리는 게 아니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잠시 말이 없던 아버지가 입을 뗐다. 올해 우리가 자식들에게 땅을 증여하기로 다 같이 합의를 봤어. 왜 그런 결심들을 하셨는데? 그냥 때가 된 거지. 상념에 잠긴 표정을 짓던 아버지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하더니 갑자기 일이 생겨 빨리 돌아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땅에 대한 설명이나 해명이 더는 없었다. 나는 의구심을 삼키고 정자와 나무를 한 프레임 안에 담아 사진을 찍었다. 그러곤 어색함을 적당히 감추며 아버지와 정자 앞에서 헤어졌다. 해마다 한두 번씩 오가던 안부 연락마저 뜸해지던 때였기에 서울로 함께 돌아갈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생전에 재산을 미리 처분하려는 아버지의 태도가 못내 마음에 걸렸던 나는 결국 한 통의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 혹시 어디 아파? ―건강해.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분명 건강했던 것 같고, 나는 언젠가 그 땅에 대해 아버지와 길게 얘기할 기회가 다시 있을 줄 알았다. 3년이 훌쩍 흐르고 겨울 산행을 나선 아버지가 실족사로 세상을 뜰 줄은 까맣게 모르고서. * 부고장엔 그들이 아버지의 자식으로 되어 있었다. 내 이름이 없는 온라인 부고장을 들여다보다 장례식에 가지 않을 결심을 세웠다. 그러곤 동네 성당으로 가 나름의 작별 인사를 했다. 자식에게 지은 죄가 있긴 하지만 좋은 곳으로 가시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빌었다.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의 안식을 위해 켜둔 초를 바라보다 아버지의 봉헌초도 마련해 불을 밝혀 두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친족의 도리로 그 정도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새 초가 보이지 않아 나는 스스로 초가 되어 아버지 생의 일면을 조용히 밝혔다
- 이서수
- 2026-10-01
문장웹진 소설
보트 아래보트 아래 손호영 한때 나는 얀의 말대로 집 앞을 비추는 보안카메라를 설치했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해 보곤 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햇빛, 무심히 우리 집을 침범하던 빛을 나도 결국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 도시에 뿌리내렸다면, 나의 세계는 바라던 만큼 넓어졌을까? 어쩌면 우리는 아기를 낳아 키웠거나, 혹은 결혼했을지도…… 이런 생각들은 물의 파동처럼 하나의 점으로부터 사방으로 원을 그리며 뻗어 나가곤 했다. 나는 그를 떠나며 가족 핑계를 댔다. 여기서는 영원히 가족을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는 짐짓 놀라며,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나에게 너는 오래전부터 가족이었다고. 글쎄. 정말? 찰나였지만, 얀은 정말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고, 나는 승리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지난 일들을 여러 번 되감아 보면서 나는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는지 원점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정말 그의 견고한 세계에 작은 생채기라도 낼 수 있는 존재였는지를. * 암스테르담 출장에 김수오를 데려간 건 박 대표 부탁 때문이었다. 그곳에 살 때부터 눈여겨보았던 로컬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와 국내 독점 유통 계약을 맺으려던 참이었다. 수 개월간 메일과 화상 회의로 대략의 조건 조율이 끝난 단계여서 큰 부담은 없었다. 현지 스튜디오와 쇼룸을 돌아보는 일정까지 포함해 4박 6일 출장 계획을 보고했는데, 박 대표가 그제야 김수오에게 시킬 만한 일을 고민해 보라고 말했다.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오 년을 살다 이 년 전쯤 귀국했다. 반년 넘게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던 내게 해외 바잉과 상품 기획을 총괄하는 차장 자리를 제안하며 손을 내밀어준 게 대학 선배인 박 대표여서, 나는 그의 지시라면 가급적 따르는 편이었다. 김수오는 박 대표 친구의 아들로 올해 스물일곱 살이었고 몇 달 전 정직원으로 채용됐다. 그의 아버지는 치아 교정 전문의로 전국에 네트워크 병원이 30곳쯤 있는 치과 체인의 대표라고 했다. 잘은 몰라도 박 대표는 김수오의 아버지에게 얼마간 빚을 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불쑥 남의 사무실을 찾아와 맡겨둔 듯 자기 아들 일자리를 요구할 수 있겠느냐고, 그것도 정규직을, 의사라면 상식이 있는 사람일 텐데, 하고 직원들끼리 수군댔다. ─우리 아들이 올해 졸업하는데 패션을 하고 싶다네. 그러면서도 아주 당당하거나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박 대표에게 전해 들으니 그 집안은 대대로 의사였는데, 김수오가 삼수를 하고서도 의대 입시에 실패했다고 했다. 메디컬 편입을 하라고 생명공학부에 보내놨더니, 학점 관리는 뒷전에 갑자기 패션MD를 하겠다고 선언해 집안이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경력직 뽑아달랬더니 낙하산 신입이 웬말이냐고 투덜대는 직원들에게 박 대표는 김수오가 비싸고 좋은 것들 많이 보고 자랐으니 감각은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미감이니, 취향이니, 요즘 그런 거 없는 애들도 있어요? 내가 말했다. ─말하자면 그렇단 얘기지.
- 손호영
- 2026-10-01
문장웹진 소설
암순응암순응 박선우 스트레칭의 마지막 단계는 아기 자세다. 우선 바닥 매트에 두 무릎을 꿇고 발뒤꿈치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며 앉는다. 상체를 숙이면서 두 손을 머리 위로 곧게 뻗는다. 그러면 어깨의 삼각근과 등허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얕은 신음이 절로 나온다. 그대로 이마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것. 그리하여 더는 내려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 자세를 갖춘 뒤에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속으로 하나, 둘…… 서른까지 세다 보면 몸의 뒤틀린 부위들이 바로잡히는 게 느껴진다.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에 끼워 맞춰지는 기분. 신체가 교정되는 감각은 정신 상태로도 이어진다.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듯하다. 힘이 다하면 매트 위에 드러눕는다. 두 눈을 감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뱉어낸다. 몸이 이완되는 감각에 집중한다. 그러면 호흡이 잦아들면서 주변의 모든 것이 서서히 멀어져감을 느낄 수 있다. 아득해지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도. 어느 순간에는 나 역시도. 스트레칭을 마친 후에는 몸을 일으켜 방문 앞으로 간다. 나는 번번이 문손잡이를 쥔 채 망설이다가 문을 열어젖힌다. 거실로 나가면 가죽 소파에 길게 누운 아버지가 보인다. 올해 일흔넷의 아버지는 한 손을 이마에 올려둔 채 나지막이 코를 골고 있다. 더는 염색을 할 수 없어 백발이 성성해진 머리카락과 고목 껍질처럼 버석하고 거무스름해진 얼굴, 움푹 파인 볼, 살집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앙상해진 팔다리로 맥없이 축 늘어져 있다. 매일 아침 나는 그 모습을 본다. 하루가 다르게 기력을 잃으며 쇠약해지는, 무시로 잠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헤어나질 못하는 아버지를 마주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더디게 흐르다 못해 한순간 뚝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현실과 유리되면서 내가 아버지의 세계에, 그러니까 산 자들의 세계에서 죽어가는 자들의 세계에 휩쓸려 들어와버린 것만 같다. * “이대로면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사실 겁니다. 항암을 하시면 6개월에서 1년쯤이고요.” 혈액종양내과 허 교수는 아버지의 검사 결과를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초진을 맡았던 소화기내과 전문의와 위암센터 외과의가 입에 지퍼라도 채운 양 말을 삼갔던 것에 비하면 훨씬 나았고, 어쩐지 속 시원한 감정마저 들었다. 처음으로 상급종합병원 의사에게 신뢰감을 느낀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허 교수의 소견에서 새로운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전이성 위암 말기 환자의 여명’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느낀 속 시원함은 아버지가 시한부 환자임을 누군가 육성으로 선언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동안 가족은 물론이고 지인들조차 쉬쉬해온,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그러니까 네 아버지는 얼마나 남은 거니?”―공식적으로 논할 수 있게 된 후련함 말이다. 그래, 내가 의사에게 원하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 우리가 환자에게 도
- 박선우
- 2026-10-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