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과 미로
- 작성일 2008-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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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과 미로
이치은
1. 미궁(迷宮, Labyrinth)-첫 번째 주회로를 타고 9시 방향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돌다

내가 어느 순간 최고의 수학자들과 회계사들을 동원하여 미분방정식이라도 돌리지 않는 이상 찰나의 내 재산이 얼마인지 도저히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부자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때부터 나는 더 많은 그리고 더 특별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사진가 G였다. G는 주로 건물을 찍는 사진가였는데, 세계를 돌아다니며 판에 박힌 듯한 구도로 평범해 보이는 건물들을 찍었다. G와 알게 된 후 그의 사진전에 몇 차례 초대 받아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가끔은 더 엉뚱하고 더 유쾌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는 사실만 빼면 실은 썩 내키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의 사진은 대체로 지루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사진 속에 사람들을 비롯해 움직이고 있는 사물들은 통 볼 수 없다는 공통점을 알아채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통 단조롭고 무의미해 보일 뿐이었다.
작년 가을 <부서진 도시들>이란 그다운 이름의 전시회에는 별로 사람들이 없었다. 단풍이 한창인 주말 오후라 사람들이 전시회 같은 데서 시간 낭비하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나같이 시간이 펑펑 넘치는 사람도 그렇게 느낄 정도였으니. 하품을 참으면서 따분한 사진들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눈에 들어 온 사진이 있었다. <꿈의 정원-첫 번째 주회로를 타고 9시 방향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돌다>라는 기다란 제목이 붙어 있는 흑백 사진이었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아 윤곽이 흐릿하고 더러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뭉개진 검은 폐곡선이 그려진(혹은 인쇄된?) 사다리꼴 종이와(혹은 천과? 판대기와?) 그 밖엔 흰 여백과 검은 여백이 다인 이상한 사진이었다. 다시 보니 고대의 고누판처럼 보이기도 했고, 아주 조그만 무늬를 확대해서 찍은 것 같기도 했다. 그거건 저거건 제목과 사진의 묘한 불일치가 눈에 띄었다.

“이 사진이 맘에 드나?”
나는 부자가 된 이후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느니 침묵을 지키는 게 낫다.
“자네도 알겠지만-물론 나는 몰랐다. 몰랐으므로 입을 닥치고 있었다-미궁엔 갈림길이 전혀 없지. 이른바 인간의 주된 죄악인 초조를 물리치고 끝까지 걸어갈 수만 있다면 미궁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네. 미궁은 그게 아무리 길다고 해도 끝까지 걸어가면 막다른 길이 나오지. 그걸 확인하고는 돌아왔던 길로 다시 걸어 나오면 되는 거야. 그게 다라네. 너무 간단하지. 비결치고는 너무 간단하지. 하지만 대부분의 범인(凡人)들은-나는 그에게 내가 어떤 범주에 속하는 인간인지 물어보지 않았다-막다른 끝까지 가지 못하고 길을 잃었다고 착각하며 중간에 돌아 나오게 되는 거야. 그리고 십중팔구 돌아 나오다가 또 그 ‘초조’라는 죄악 때문에 또다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반대로 걷게 되는 거야. 그런 거라네. 인생은 미궁처럼 갈라지는 길도 교차점도 없는 외길인데, 그 위에서 우리들만이 진자처럼 우왕좌왕 떠돌다 생을 낭비하게 되는 거지. 거듭 말하지만 미궁은 갈림길이 전혀 없는 길이라네. 갈림길은 사람의 마음속에 정확히 말하자면 초조 속에 있는 거라구, 미궁 속이 아니라.”
나는 뭐든지 대꾸를 하고 싶어졌다. 한 사람은 그저 말하고 한 사람은 듣기만 하는 관계란 결코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으니.
“그게 무슨 상관이지, <꿈의 정원-첫 번째 주회로를 타고 9시 방향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돌다>라는 거창한 제목과는?”
나는 제목을 끝까지 암기하여 말할 수 있었던 내게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기가 사람들이 초조를 이겨내는 거의 유일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네. 나 역시 마찬가지고.”
“뭘 어떻게 이긴다는 거지?”
“우리는 들어가고, 또 나온다네. 같은 길을 돌아 돌아 같은 구멍으로 말이지. 꿈에선 그게 돼.”
나는 꿈에 길이 있다는 말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나로 말하자면 근 십 년간 꿈을 꾼 적이 없었다.
“자네의 설명이 맘에 드는구만. 이거 얼만가?”
내 침실 벽에 지금 이 <꿈의 정원-첫 번째 주회로를 타고 9시 방향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돌다>가 붙어 있다. 예전 거기다 걸어 두었던 그림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 후로 죽 비워 두었던 바로 그 벽에 말이다.
내 잠 속에 길도 미궁도 막다른 골목도 또 초조도 없으니 사 놓고 걸어 두기라도 하는 수밖에.
2. 미로(迷路, Maze)-38,723개의 분기점이 있는 꿈으로부터 귀환한 천재적인 기억력의 건축가 태정
나와 내 친구들은 양쪽으로 깃발들이 잔뜩 달린 좁은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3층 베란다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처음엔 여남은 명이 넘는 무리였는데, 새벽이 다가올 즈음엔 엄청나게 돈이 많다는 것 외에는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폴과 역시 돈이 많기는 하지만 돈보다는 천재적인 기억력으로 더욱 유명한 괴짜 건축가인 태정, 그리고 둘과 달리 항상 돈이 궁한 나, 그렇게 셋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바람은 시원했고, 우리들은 새벽까지 위스키와 맥주를 마셨지만 그다지 피곤하지 않았다. 좁은 거리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또 껑충껑충 뜀박질을 하며 떼를 지어 다양한 방식으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그때 폴이 문득 이렇게 말했다.
“꿈엔 갈림길이 없어. 우리는 들어갔던 길로 나오게 되지.”
한동안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도시의 명물인 연푸른색 비둘기가 녹이 슨 금속 난간 위를 곡예라도 하는 것처럼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들어갔던 길로 다시 나온다는 게 무슨 말이지?”
나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한참 후에 그렇게 물었다. 거리 아래쪽에서 하늘을 향해 쏘아지는 조명 덕분에 폴의 얼굴은 한결 홀쭉해 보였다.
“입구도 현실이고 출구도 현실이란 말이야. 일단 꿈으로 들어가면 거기엔 어떤 갈림길도 없단 말이지.”
“누가 자네에게 그런 생각을 불어넣은 거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태정이 난데없는 기습을 받아 비명을 지르는 꼬마 인디언처럼 입을 열었다. 비명의 꼬리가 채 사라지기 전, 나는 머릿속 작은 칠판에 다음과 같은 단어의 연쇄를 낙서했다.

“사진가 G가 내게 했던 말이라네. 자네들도 알다시피 내겐 멋진 말을 만들어 내는 재주는 없다네. 단, 그게 쓸 만한 말인지 아닌지 맛은 좀 볼 줄은 알지. 나는 G의 말이 마음에 들어 <꿈의 정원>이라는 그의 사진을 한 장 샀지. 할 수 없었다네, 나는 꿈을 꾸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으니까.”
나는 사진가 G의 사진들이 얼마나 비싼 값에 팔리는지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단지 사진가의 말이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자신이 꿈을 꾸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G의 사진을 샀다는 폴이 부러웠다. 물론 난 사진가의 말들이란 고사상 죽은 돼지 입에 꽂는 돈처럼 불필요할 뿐더러 추악하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폴처럼 부자가 된다면 그 모든 걸 용서할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네 말처럼 꿈엔 갈림길이 없어, 꿈을 꾼 사람이 만들기 전까진 말이지. 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고 나면 꿈에서 빠져나가기 전까지 그 갈림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네.”
한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 태정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계속 또박또박 말했다.
“어쨌건 자네가 사진가 G에게서 그런 생각을 들었다니 정말 다행이네. 혹시라도 미로가 시간으로 조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기꾼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나는 자네들에게 꿈속에 갈림길이 있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을 거야.”
“그 얘기는…….”
내 말의 허리가 다시 태정에 의해 싹둑 베였다. 나는 다시 머릿속 작은 칠판에 낙서를 했다.

“꿈속에 다른 공간들을 이어 주는 갈림길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야. 시간적인 갈림길이 아니라.”
“그렇다면 가역적이라는 건가?”
폴이 대화에서 빠지지 않겠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질문을 마친 폴은 들고 있던 물방울이 잔뜩 맺힌 맥주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나를 은밀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콧등을 살짝 올리며 웃었다. 폴은 내게 태정의 이야기에 뭐 그리 특별한 관심이 있는 건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폴 역시 틀림없이 그 꿈속의 갈림길이라는 태정의 이야기에 홀랑 빠져 있었다.
“좋은 지적이야. 늘 그렇지만 폴 자네는 이야기의 앞길을 짚어 내는 혹은 망치는 묘한 재주가 있어. 그래, 맞네. 돌아올 수도 있어, 그리 쉽지는 않지만.”
“어떻게 갈림길을 만든다는 거지? 꿈속으로 삽이나 뭐 포클레인이라도 가지고 들어간다는 말인가?”
나는 꿈속에 세워진 벽을 곡괭이로 파는 상상을 하며 담배를 깨물었다. 파르스름한 담배 연기가 견고한 새벽하늘의 성곽을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낙서 하나가 머릿속에 다시.

“재미없는 농담 같으니라구. 내 힌트를 주지. 똑같은 방식이야, 첫 번째 꿈으로 들어가는 방식과. 이치은, 자네는 정말 모르겠나?”
“나는 알겠네.”
폴은 애써 자랑스러움을 숨기려 들지 않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는 보았다, 회색 수염으로 덮여 있는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리는 걸. 폴의 우쭐대는 미소를 얼마나 자주 봐 왔던지.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폴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구.
“그러니까, 자네 말은 꿈에서 또 잠을 잔다는 거 아닌가? 그렇게 해서 또 다른 꿈으로 넘어간다?”
“빙고”
태정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또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지르자 아무도 쳐다봐 주지 않는 곡예를 되풀이하던 비둘기가 새벽의 청회색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게 가능해? 꿈에서 또 꿈을 꾼다는 게?”
“연습을 하면 되네. 처음엔 쉽지 않지 물론. 꿈이라는 공간은 어차피 누구에게나 낯선 곳일 수밖에 없거든. 그런 곳에서 입맛에 딱 맞는 잠자리를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폴에겐 불가능한 일이겠군, 그래.”
나는 자신의 집이나 5성급 호텔이 아니면 여간해서 잠을 자려 하지 않는 폴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폴이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들이 다 잠든 새벽에 홀로 내 서재의 책상머리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책을 읽던 광경을 몇 번이나 보았다.
“난 어차피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자자자, 싸우지들 말고 내 얘길 들어 보라구. 그러니까 이런 식이란 말이야. 첫 번째 꿈에 도착하면 꿈속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를 받지 않을 만한 조용한 곳을 찾아 거기서 다시 억지로 잠을 자는 거야. 거위 털 이불이나 침대보를 방금 간 퀸 사이즈의 침대가 없다고 해서 불평해서는 안 되네. 잠이 오지 않으면 첫 번째 꿈속 마을을 전속력으로 한 바퀴 달려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도 좋구 말이야.”
나는 점점 태정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이 자리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자마자 태정의 말대로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잠이 들고 또 꿈을 꾸게 되면, 꿈 A에서 꿈 B로 넘어가는 거지.”
“거기서 질문 두 개.”
폴이 기묘한 각도로 휘어진 것처럼 보이던 오른팔을 번쩍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이 우스워 웃음을 터뜨렸지만 아무도, 나조차도 내 웃음에 주목하지 않았다.
“첫 번째 질문, 그걸 어떻게 갈림길, 아니 분기점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거지? 그건 단지 꿈 A에서 꿈 B로 넘어가는 일종의 도약대일 뿐이잖아. 그리고 두 번째…….”
“자네가 특별히 반대하지 않는다면, 첫 번째 질문부터 먼저 답을 하고 싶은데…….”
태정은 웨이터를 불러 똑같은 맥주를 세 병 더 갖다 달라고 했다, 죄 손짓으로만 말이다. 나는 태정의 그 세련된 손동작을 보면서 다시 낙서를 해보았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그걸로 끝이라면 다이빙의 스프링보드와 다를 게 없지. 하지만 분기점을 만들, 그러니까 꿈속에 미로를 설치할 방법이 있다네. 가령 꿈 B 속에 분기점을 설치하고 싶다면, 꿈 B에서 다시 꿈을 꾸어 꿈 C로 넘어가는 거야. 그런 후에 곧바로 다시 꿈 B로 돌아온다네. 그리고…….”
“아니, 잠깐, 미안하지만 그게 바로 내 두 번째 질문이라네. 자네는 꿈에서의 이동이 가역적이라고 했었잖나. 그래 대체 어떻게 돌아온다는 거지?”
나는 거의 끼어들 틈이 없었지만 뭐 딱히 소외당한다는 기분은 아니었다. 내게는 폴과 태정이 볼 수 없는 작은 칠판이 있었으니.
“아차, 그 설명을 하지 않았군. 내가 그 분기점들이 모두 시간이 아니라 공간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그 자리에서, 그러니까 꿈 C에 도착한 그 장소에서 다시 잠을 자고 꿈을 꾸면 꿈 B로 돌아올 수 있다네.”
“그럼, 만약 꿈 C에서 자신이 그 꿈으로 들어온 바로 그 장소가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 잠을 자면 이번엔 꿈 D로 가는 거고?”
“맞아. 자네 같은 학생만 있었다면 선생질을 그리 빨리 때려치우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나는 새 맥주를 따서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켰다. 이번엔 좀 새로운 형식의 그림이 필요했다.

“좋아, 다시 앞으로 돌아가지. 꿈 B에 도착한 후 꿈으로 도착하게 된 그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꿈을 꾸어 꿈 C로 들어간 후, 바로 앞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다시 꿈 B로 돌아온다네, 여기까지는 아까 했지? 그래, 그 다음에, 이제 자네들도 알겠지만…….”
태정은 마치 내가 그의 말을 잘 듣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착한 학생이라는 증거로 그에게 맥주병을 들어 보였다.
“다른 장소에서 잠을 자는 거야. 그러면 이번엔 꿈 C’가 생겨나는 거지. 이제 꿈 B가 분기점이 되는 거지.”
이젠 거의 자동이었다.

다시 폴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이론상으로는 꿈속의 갈림길이 꼭 두 갈래의 갈림길일 필요는 없겠군 그래. 여러 가지 꿈을 꿀 수만 있다면 C’뿐만 아니라, C’’, C’’’, C’’’’, C’’’’’ 그런 식으로 무한한 개수의 갈림길이 있는 분기점을 만들 수도 있겠는데.”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
역시 폴이야,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꿈속 흑판을 지우고 고쳐 썼다.

그때 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일어나 보겠네.”
“왜 그러지? 한 시간 정도만 있으면 싱싱한 홍합을 아침으로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이 문을 열 텐데. 밥을 먹고 가지 그러나.”
“아니, 사진가 G를 찾아가서 자네 얘기를 들려줘야겠어. 나는 꿈을 못 꾸니까, 그에게 자네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근사한 사진을 하나 찍어 달라고 해야겠네. 아 재미있는 얘기 즐거웠네. 답례로 계산은 내가 하지.”
폴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언젠가부터 머릿속에서 자라나던 물음표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이렇게 폴을 그냥 보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자넨 내가 내 꿈속에 분기점을 몇 개까지 만들어 봤을 것 같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작 중요한 건…….’
“분명히 깜짝 놀랄 거야, 자넨. 하나의 꿈에 자그마치 32,837개의 분기점을 만들었다구.”
마치 태정의 말이 망치가 되어 내 머릿속 얇은 얼음판을 쾅하고 내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잔금들이, 수많은 분기점을 만들며 잔금들이 한 점으로부터 벋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구 태정 자네는 오늘 여기에 와 있는 거구. 32,873개의 분기점들이 있는 꿈속이 아니라.”
“그래, 그게 뭐 잘못 되었나? 자네 표정을 보니 마치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 같은데.”
“그래서 우리가 자네를 기억의 천재라고 부르는 거구…… 자네는 꿈들 간의 통로가 가역적이라고 했지만 그건 어쨌거나 개별 통로에 대한 얘기구…… 결국 현실로 돌아오려면…… 자네의 이론대로라면 첫 번째 꿈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나? 하지만 폴은…….”
“내 친구, 아니 우리 친구 폴은 괜찮네. 자네도 들었잖는가? 폴은 꿈을 꾸지 않는다네.”
날이 아주 빠른 속도로 밝아오고 있었다. 청색이 폭발하듯 빨리 백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도로 털썩 앉았다. 나는 예전에 사진가 G가 자신의 전시회에 걸었던 사진들 중 몇 점이 태정이 설계한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났던 불유쾌한 소동도. 태정은 사진가 G가 오로지 자신과 자신이 설계한 작품을 모독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또 전시한다며 공개적인 장소에서 분노를 폭발시키곤 했다. 술이 취해서는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쳤고,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건물을 찍은 G의 사진들을 폐기해 버리도록 만들겠다고 장담했다. ‘내 건물을 저 따위 저질 사진사의 카메라 파인더에 강탈당하는 걸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단 말이야. 뭐든 하지 않고는 안 되겠어.’ 하지만 태정은 사진가 G의 전시회에 내걸린 자신의 건축물 사진들을 끌어내릴 법적인 이유를 찾아낼 만큼 수완이 있는 변호사를 끝끝내 만나지 못했다고 나는 들었다.
“하지만 사진가 G는…… 길을 잃을 수도 있을 거야, 꿈속에서 말이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지라니? G가 영원히 현실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구.”
“그렇게 단정 지어 이야기할 수는 없네. 꿈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으니까. 꿈속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만나 거기서 결정을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을 현실의 시간으로 전환하면 0.1초밖에 걸리지 않을지도 몰라.”
나는 0.1초짜리 악몽을 꾼 기분이었다. 나는 앞으로 꿈 따위는 꾸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기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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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01
문장웹진 소설
굳은 모양을 보면굳은 모양을 보면 정미래 여상길 씨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새가 그냥 새인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참새라거나, 아니면 그냥 어떤 새. 그런데 여상길 씨가 대뜸 직박구리네요, 했다. “네? 직박구리요?” “작년 봄인가. 웬 새 한 마리가 요 안으로 휙 들어오더니 안 나가고 버티더라고요.” 여상길 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마우스를 딸깍거리기 시작했다. 무심코 그의 모니터를 보았는데, 바탕화면에 무언가 빠르게 불어나고 있었다. 그가 기계적으로 새 폴더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가마우지, 오목눈이, 동고비… 내 시선은 아랑곳없이 그는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한 번 더 누르고 ‘새 폴더(N)’를 클릭했다. 공교롭게도 직박구리라는 이름의 폴더가 툭 튀어나왔다. 나는 두 가지 생각에 잠겼다. 이 황량한 오피스 빌딩 안에서 그 텃새가 대체 뭘 먹고 1년 넘게 연명했나. 그리고 여상길 씨는 어떻게 그게 직박구리라는 걸 알았나. 조류학자도 아니면서. 설마 매일 저렇게 새 폴더를 만드는 것도 다 조류의 학명을 외우기 위한 학습 활동의 일환이었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 날, 그 새가 어느 층 타일 위에 배를 깔고 퍼져 있는 걸 목격했다. 영락없이 죽은 것 같았지.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명복을 빈다, 직박구리. 속으로 삼가 조의를 표하려던 찰나 녀석이 꽁지깃을 살그머니 털었다. ✹ 몇 해 전, 내가 맡고 있던 슈팅 게임의 한 맵에서 뜻밖의 해프닝이 벌어진 적이 있다. 공들여 설계된 전장, 그 살풍경을 평화로이 가로지르던 비둘기. 그 사이에서 누군가 찾아낸 것이다. 지면에 내려앉은 비둘기를 밟으면 새가 공중으로 날아오른다는 사실을. 제 몸집의 몇 배나 되는 유저의 캐릭터를 등에 태우고— 버그였다. 하지만 유저들은 그걸 전략으로 삼았다. 새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 시야를 확보했다. 멀리 있는 적들을 탕! 탕! 신나게 쏴 죽였다. 버그가 패치된 날, 개발팀에선 그 폐허에 ‘새를 밟지 마시오!’라는 벽보를 곳곳에 붙였다. 누구에겐 빤하게 잘못된 오류가 또 누구에게 가서는 더없이 괜찮은 전술이 되었던 순간. 나는 그때 세상일이란 게 참 모호하고, 또 그래서 이상하게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경한 감각에 휩싸였더랬다. 나는 새삼스럽게 ‘오픈캠프’를 휘— 둘러보았다. 아무 일 없이 주 40시간을 버티는 것. 그것이 이곳, 오픈캠프의 최종 퀘스트였다. 열린 야영지라니. 듣기에는 그럴듯했다.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 같기도 한 게. 하지만 사실은 권고사직이 난무하는, 구조조정과 생존 사이의 막간 스테이지일 따름이었고… 오픈캠프로 발령이 난 넉 달 전에. 인사팀의 안내에 따라 변경된 자리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가장 먼저 보인 건 누군가의 휑한 정수리였다. 포니테일로 묶인 머리카락이 그의 고갯짓에 따라 애처롭게 달랑거렸다. 보아하니 사내 네임드 여상길 씨였다. 이미 한
- 정미래
- 2026-07-01
문장웹진 소설
Midnight Coffee ClubMidnight Coffee Club 나일선 광학적 미디어의 역사는 사라짐의 역사이고 그것이 이제 내게도 사라질 자유를 주고 있다. -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 찾는 사람에겐 보여, 목소리, 믿고 있기 때문에 들려, 쓰는 일보다 더 하고 싶었던 건 얘기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 일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선 써야 했고 자신이 만들어낸 목소리와 대화하는 것, 그런 걸 소설이라 불렀지. 목소리가 선명해질수록 현실과는 점점 멀어져 어느 순간 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아, 사람과 만날수록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아,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건 그 갈망이 오랫동안 나를 지켜주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너무 열심히 찾았기에 서로를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건지도,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도 길었기에 함께 지내는 법을 몰랐던 것 같아. 미친 사람처럼 자기 안의 모든 것을 다 말해야만 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자신의 전부가 되어주길 바라거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 것 같아. 그게 우리가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었으니까.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과 같이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우리가 만나기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라고 말하는 순간 다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더 이상 살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도 만날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아, 이제 네가 내 앞에 있었고 우린 함께 있으니까, 모두가 포기한 질문들 앞에서 목소리는 내게 말했지. 더는 아무것도 찾지 않아서 들려, 더는 믿지 않기에 보여, 모든 감정이 다 지나가고 난 자리에 언제나 내가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잃어버릴수록 무언가를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고, 어디서든 혼자일 수 있었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연결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 같아, 듣는 방법을 몰랐기에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가 내게 말해주었지. 오랫동안 서로를 생각한다는 건 연결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어가는 또 다른 방식이다. RB의 소설에서 이런 부분은 꼭 나를 위한 것 같다. 읽고 있으면 항상 그와 커피를 마시거나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꼭 RB가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라도. 그에겐 소설이 있었고 나에겐 무엇이 있나? 나중에 보니 노이도 나와 같은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고 세 번째인가, 네 번째쯤 봤을 때 노이는 패밀리 레스토랑 윙키스에서 RB의 소설을 읽고 있는 나를, 극장에서 청소를 하는 나를, 주크박스를 차에 싣는 나를, 묘지 근처를 산책하는 나를, Noodle Express에서 팟타이를 포장하는 나를 봤다고 했다. 그중 어디까지가 나였을까, 나도 모르는 내가 노이의 기억 속에는 있었고 그런 게 좋았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내가 어쩌면 더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전에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는 노이를 본 적이 있고 그때는 이름도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언젠가 노이와 대화를 하게 될 날이 올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었지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노이는 RB의 소설이 좋
- 나일선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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