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달을 만나러
- 작성일 20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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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초록 달을 만나러
백승연
"다른 행성에 너랑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좀, 찝찝해."
혜지가 입술을 삐죽이 내밀다가 맥주잔을 들었다. 혜지의 말을 온전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나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구에서의 나의 하루하루도 고되고 힘든데, 척박한 제2 지구에서 또 다른 나는 어떤 방식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을지 걱정되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의 복제인간이 제2 지구로 보내지는 걸 허락하면 학자금 대출을 모조리 갚을 수 있었으니까.
"쓰리디 업종이겠지? 분명히?"
혜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25년 전 인류는 인간이 살 수 있을 만한 두 번째 행성을 발견했다. 새 행성의 이름을 붙이는 것에도 여러 국가의 신경전이 이어져서, 행성이 발견된 지 20여 년이 넘도록 '제2 지구'로만 부르고 있었다. 당연히 인간의 생활터전으로 삼기에는 아직까지 인프라가 마련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로봇과 몇몇 우주비행사를 보내 몇 가지 실험을 거쳤다가, 재작년에야 안전성을 검증받고 주민을 모집했다. 그리고 그 주민 중에는 나의 복제인간, 두 번째 '필'이 껴들어간 것이고.
필은 테라포밍 1기 주민이었다. 제2 지구를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기반을 구축하는 일을 했다. 제2 지구에서는 밤낮으로 인공 달이 떠 있었는데, 낮에는 불을 꺼두어 형체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밤이 되면 표면이 은은한 초록빛으로 빛났다.
초록 달. 그것은 제2 지구의 상징이자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달이었다.
"그치만 나도 초록 달은 한번 보고 싶다."
"사진으로 보면 되잖아."
"그게 같냐."
혜지가 맥주를 마시며 테라스 밖을 내다보았다. 도시의 밤하늘은 네온사인과 가로등, 자동차가 뿜는 불빛 때문인지 충분히 어두워지지도 못하고 불면증을 앓는 것 같았다.
"필은 거기선 계속 시를 쓸까."
혜지가 밤하늘에 뜬 하얀 달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었다. 벨벳 쿠션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둥근 달. 안으로 들어가면 무엇이든 폭 감싸 안아 줄 것 같은 동그라미. 그 밑에서는 자동차가 내는 소음과 매연, 사람들이 함부로 떠드는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지구답게 시끄러웠다.
"안 쓰겠지. 내 몸만 복제해 가는 게 아니라, 2년 전 내 기억까지 모조리 복제해 가는 거니까. 제정신이면 눈 뜨자마자 정신 차리고 바로 다른 일이나 열심히 할걸?"
내 말이 끝나자 혜지가 둥근 눈을 살짝 감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혜지를 따라 웃다가 뒷맛이 쓴 맥주를 마셨다.
올해 초, 제2 지구로 간 복제인간 중 한국인은 100명이었다. 단 100명 안에 내가 들어간 것이었다. 그중 50명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인류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이었다. 생물학자나 화학자, 천문학자 등등의 과학자가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의학자, 심리학자가 있었다. 기계를 다룰 수 있는 기계공학자, 로봇 공학자도 있었다. 제2 지구 사람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해줄 요리사나 체력을 관리해 줄 트레이너도 뒤를 따랐다. 그렇게 '쓸모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50명을 채우고 나면, 남은 50명은 철저히 랜덤으로 사람들을 뽑았다.
인류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지적으로 기술적으로 또는 신체적으로 뛰어난 인간들만 뽑아 제2 지구를 채우는 것보다는, 비교적 '평범한' 사람들을 포함해 인류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인류에 기여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말이 어렵지, 그냥 잡일 해줄 사람 필요한 거 아니냐고."
처음 제2 지구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혜지가 볼멘소리를 했다. 나는 만약 나의 복제인간인 필이 제2 지구를 간다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상상해 보았다. 컴퓨터 실력도 평범, 눈치도 평범, 체력도 평범, 지적 능력도 평범했다. 그나마 오랫동안 시를 썼다는 것이 특이사항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포기했다. 은근한 상처만 남기고 말았다.
장점이라고 말하자면, 나는 내가 수많은 별들 속에 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소중한 단 하나의 별이라도 우주 속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언젠가 불타올랐던 기억이 있지만 차갑게 식어 가는 걸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높이 오른 적도 없는데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것에 끊임없이 버둥거리며 손을 뻗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스스로의 재능이 별 볼일 없음을 깨닫고 손가락을 굽히는 순간을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혜지와 친구들과 시를 쓰는 동안, 나는 우주와 별과 대등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만 개의 별들 속에도 독립적으로 빛나는 단 하나의 별이었다.
그런 시간들은 모두 지나갔다. 나는 세상 속에서 나를 책임지기 위해 세상의 규칙을 흡수했다. 자기소개서를 썼고 정장을 샀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무엇이든 열심히 할 수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밤이 되면 전등을 켜고 노트 위에 글자를 끄적였다. 이제는 시도 뭣도 아닌 글자들을. 그렇게라도 내가 좋아했던 것을 붙잡으려 했지만, 취업을 하고 나니 그마저도 힘이 들었다.
그러다 어떤 날은 꿈을 꿨다. 우주비행선에 앉은 내가 창밖에서 멀어지고 있는 지구를 보는 꿈이었다. '멀어지고 있음'은 느리지만 지속적이었다. 어떨 때는 비행선이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비행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어쨌든 둘 사이는 암흑물질로 채워지고 있었고, 다시는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꿈에서도 그런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득해지고 조금 슬펐는데, 깨고 나면 그마저도 모두가 느끼고 사는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어제 '아득하다' 각자 열두 개씩 채워 넣었지? 김혜상 씨랑 조현우 씨가 중복으로 적어 넣은 게 있어서 오늘 새로운 걸로 하나 추가해. 가위 바위 보 해서 한 명이 채우면 되겠네."
아침 회의 시간 부장이 김혜상과 조현우를 보며 말했다. 둘은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하는 일은 추상적인 단어를 구체적인 상황으로 바꾸어 설명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아득하다'에 맞는 상황을 문학적인 문장으로 한 문단 이상 적는 일이다. 이렇게 모은 문장을 회사에서 개발 중인 인공지능 이야기 생성 로봇에게 제공했다. 독자가 읽고 싶은 이야기의 키워드를 고르면 인공지능이 그에 맞는 이야기를 합성하는데, 스토리의 큰 골격은 인공지능 혼자 가능했지만, 세세한 감정묘사와 배경묘사는 아직까지 인간의 터치가 필요했다. 게다가 문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좀 더 세밀한 데이터가 있어야 해서, 나처럼 문학을 전공했던 사람들이 대거 이 회사로 들어왔다.
"현우 씨, 아득하다 뭐라고 적었는데요."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가, 어느 날 백발노인이 되어서 옛 여자 친구가 좋아했던 와인을 마시면서 과거를 떠올리는 상황을 썼어요. 그때 맡았던 와인 향이 떠오르는 거죠. 그때가, 아득하게."
"와, 정말 저랑 비슷하네요."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잖아요."
김혜상과 조현우는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수정할 사람을 정했다. 부장이 오늘 써내야 할 단어 목록을 나눠주었다. '추악하다.', '수치스럽다', '황홀하다', '청승맞다' 같은 단어들이었다. 김혜상과 조현우가 목록을 읽다가 동시에 머리를 감쌌다.
"내가 깡통 로봇한테 감정을 가르치려고 문학을 전공한 건 아닌데."
"오늘 하루도 미쳐버리겠구만."
회의가 끝나고 울먹이는 척 말하던 김혜상과 한숨을 푹 쉰 조현우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을 따라 자리로 돌아가려는 나를 부장이 불러 세웠다.
"김필 씨. 어제 '아득하다' 문장 좋았어. 우주에서 비행선 타고 지구랑 멀어지는 얘기. 그거 뭐, 꿈 얘기라고 했던가?"
"네, 꿈이요."
"잘 썼어. 잘했다고. 우리 일이 기계처럼 써서 기계한테 읽히는 거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결국 데이터를 모아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하고, 그게 또 독자에게 전달되는 거니까."
"네, 부장님."
"우리 인공지능 AIST가 문학을 죽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난 아냐. 내가 소설가 출신이잖아. 이건 독자에게 문학이 더 가까이 가는 징검다리가 된다고. 독자가 원하는 주인공, 독자가 원하는 배경, 독자가 원하는 문체를 만들어내는 거잖아. 우린 문학을 지키고 있는 거야."
나는 부장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수치스럽다'와 '청승맞다' 중에 '청승맞다'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퇴근길에 혜지의 연락을 받았다. 혜지는 숨이 찬 목소리로 놀랄 만한 소식이라며 말했다.
"김필, 너, 시인 됐어. 시인이라고!"
나는 2년 전을 끝으로 더 이상 신춘문예나 공모전에 시를 내지 않았다. 그런 내가 갑자기 등단 같은 걸 할 리는 없었다. 자세히 설명해 보라는 말에 혜지는 당장 인터넷이나 켜보라고 하며 통화를 끝냈다. 나는 안경다리에 있는 전원 버튼을 누르고 눈앞에 홀로그램으로 뜨는 인터넷에 접속했다. 메인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잡초를 없애던 제2 지구 작업자 김필, 한국어로 된 시집 발간.'
은빛 작업복을 입고 커다란 고글을 쓴 필이 한쪽 손으로 자기 키만큼 자란 잡초를 들고 있었다. 혜지 말대로 쓰리디 업종이었다. 누가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 나는 옷깃을 세우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김필 시인의 첫 시집, 「뿌리를 자른 나무가 드디어 걷기 시작했다」가 제2 지구에서 발간되었다. 제2 지구에서는 소량 발간되어 센트럴 서점에 전시되었지만, 이곳의 여러 문학가들의 추천으로 제1 지구에서는 10배가량 많은 부수를 발간할 계획이다.
이 인터뷰는 한국에서 태어난 일반인, 김필과 제2 지구의 삶에 대한 내용이다. 인터뷰어 '강산희'는 '강', 인터뷰이 '김필'은 '김'으로 표현했다. 강산희 기자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2 지구의 필과 10분 동안 영상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아래는 둘의 인터뷰를 구술한 내용이다.
- 강 : 제2 지구에서 김필 씨는 어떤 일을 하시는지, 실례지만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 김 : 말 그대로 잡초를 없애는 일을 합니다. 초국가 정부는 제2 지구가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행성이란 것을 확인하고, 그곳에 제1 지구에서 키우던 작물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옥수수와 콩, 고구마 같은 것들이요. 그들 중 일부는 무사히 자랐지만, 어떤 것들은 변이를 일으켜 아무 쓸모없는 잡초 같은 것들로 변했지요. 뿌리는 우악스럽고, 인간이 먹을 수 없는 독성 가득한 식물로요. 우리는 그런 잡초를 없앱니다. 커다란 트랙터를 몰기에는 잡초들이 유익한 작물들 사이 여기저기에 퍼져 있어, 작은 전동 오토바이처럼 생긴 기계에 올라타 잡초가 있는 곳으로 향하죠. 오토바이 바퀴 앞에 절단용 레이저가 달려 있어 잡초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픽픽 쓰러져요. 일은 편합니다.
- 강 : 그렇군요. 그럼 바쁜 일과를 마치고 틈틈이 시를 쓰셨겠네요.
- 김 : 제 오리지널이, 그러니까, 이렇게 부르니 좀 이상하네요. 그냥 원본이라고 칭하겠습니다. 제 원본이 하던 일이니까요. 한량처럼 하늘을 보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들을 쓰는 거죠. 그게 가끔 시가 됩니다. 가끔요.
- 강 : 제가 알기로는 필 씨의, 그러니까, 필 씨 원본은 제1 지구에서 문학적 활동은 하고 계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필 씨는 제1 지구의 필 씨가 바랐던 삶을 이어서 살고 있는 셈일지도 모르겠네요. 기분이 어떠신가요?
- 김 : 글쎄요. 복제인간으로 눈을 뜨고 나서 정부와 오랫동안 인터뷰를 했습니다. 원본은 저를 제2 지구로 보내도 상관없다는 데 동의했지만, 복제인간이 되고 나서의 마음은 또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로 복제인간으로 완성되고 난 인간이 마음을 바꿔 지구를 떠나지 않은 사례도 꽤 있습니다. 그들은 지구에 남아 쌍둥이처럼 살거나 자의적 소멸을 선택했죠. 저는 눈을 뜨자마자 원본이 왜 절 제2 지구로 보내려고 했는지 알았습니다. 물론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도 있었지만, 필은, 초록 달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달을 사랑해서 달을 만든 인간의 마음을 가장 가까이서 만나고 싶었던 것이지요.
나는 다시 안경다리에 있는 버튼을 눌러 홀로그램 화면을 껐다. 거실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2년 전에 나는 정말 절망의 끝에 서 있었고, 종일 현기증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내가 원했던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삶의 중심부에 존재하지 못했고, 그 언저리를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제2 지구의 필은 시인이 되었다니. 종일 잡초를 없애는 작업을 하다가 집에 오면 시가 써지던? 나는 눈을 감고 고글을 쓰고 멀뚱히 서 있는 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다 방문자를 알리는 AI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홀로그램을 켜자 문 밖에 맥주와 안주거리를 잔뜩 사들고 온 혜지와 친구들이 보였다.
"뭐 해. 오늘은 파티 해야지."
나는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혜지와 친구들이 거실 테이블에 치킨과 햄버거를 부산스럽게 꺼내 놓았다. 친구 중 하나가 거실 텔레비전을 켜고 제2 지구의 필의 소식을 찾았다.
"와, 이런 특종을 이렇게 짧게 전하고 끝이야? 제2 지구에 한국인 1호 시인이 생겼는데?"
"소식이나 전해 주면 감사해야지. 더 신나고 재미있는 일들이 많잖아, 지구에는."
"그래도 한 건 했다. 김필."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헛웃음을 쳤다.
"저게 내가 한 거냐?"
"어쨌든. 제2 지구의 김필이 쓴 시에 네 기억이 안 들어갔다고 장담할 수 있겠냐."
"내가 준 건 절망밖에 없다."
나는 괜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혜지와 친구들이 캔맥주를 부딪쳤다. 이들과 20대를 전부 보냈다. 서로의 실패를 목격하고 격려하면서도 시를 놓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런 게 무슨 대수냐고, 시가 나한테 뭘 주는 거냐고, 아무도 시키지 않은 짓을 왜 혼자서만 붙잡고 있느냐고 술주정도 많이 했다.
사온 맥주가 동이 나고, 친구 둘이 새 맥주를 사러갔다. 나는 환기라도 시킬 겸 테라스 창을 열었다. 가을바람이 맑은 기운을 뿜으며 거실로 들어왔다. 혜지가 조금 춥다며 몸을 떨어서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남은 친구 하나가 술기운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 같으면 말이야, 복제인간을 만들고 걔를 여기에 둘 거야. 그리고 내가 제2 지구로 갈 거야."
"가서 뭐 하게."
혜지가 담요를 두른 채로 피식 웃었다.
"초록 달을 봐야지. 여기에서는 평생 못 볼 빛깔이라잖냐. 그걸 보면 나도 계속 시를 쓸 수 있지 않았을까."
"고작 그런 걸로?"
나는 고개를 저으며 과자를 집어 먹었다. 친구는 바닥에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그래. 고작 그런 걸로. 우린 늘 남들이 보기엔 고작 그런 것들만 붙잡고 살지 않았냐."
2년 전 시 스터디 해산식이 있었다. 계속 시를 쓰겠다고 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결국은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스터디 안에서도 등단한 친구가 있었지만, 청탁 몇 번을 받고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시간은 가고 뛰어난 신인들은 몰려오고, 속수무책으로 나이만 들어가던 시기였다. 친구의 불안을 우리는 너무 가까이서 지켜보았고, 한때 우리 행복의 모든 것이었던 시가 조금은 두려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시를 붙잡기 위한 삶은 허공에 떠 있는 삶이었다. 발밑이 지면에서 오 센티미터쯤 떠오른 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큼은 현실감을 찾지 못한 내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살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또 얼마큼은 남들은 바라볼 수 없는 시야를 갖고 사는 것 같아 우쭐해지기도 했다.
너는 시를 모르잖아, 너는 알잖아. 이런 것들이 내가 나와 타인을 나누는 기준이자 울타리가 되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허세고 자만이었지만 그때 내게는 그 기준이 세상을 보는 전부였다. 더 이상 공모전에 시를 내지 않고 취직하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 갔다. 처음에 나는 그들이 패배한 거라고 생각했다. 재능이건 뭐건, 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속 도전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중년들이 사실은 꿈을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난 모습이라고 상상해 보지 못했다. 그게 곧 나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에 손을 놓았을 때, 놀랍게도 내가 사는 세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치 굴속에서 나온 것 같았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본 적 없던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잘 있어라, 이놈에 문학판. 나 안 뽑은 걸 후회할 거야."
해산식에서 거하게 취한 혜지가 술잔을 들고 소리쳤다. 모두가 피식피식 웃으며 그런 혜지를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기도 사람 있어요! 난 밑에서 계속 문학 할 거야."
"문학에 위아래를 왜 나누니. 내가 만족하면 되는 거지."
"너만 만족할 거면 넌 공모전에 시는 왜 내냐. 결국엔 다 똑같아. 저 위로 올라가고 싶은 거라고."
"모순이야. 줄 세우기 싫어서 시작한 게 문학인데, 결국 줄 서고 싶어서 안달이 나게 돼."
"그거 이상한 거 아니야. 당연한 거야."
"내가 좋아하는 건데, 당연히 인정받고 싶지. 남보다 더 잘하고 싶고. 시라고, 문학이라고, 그러면 안 돼?"
유쾌한 해산을 목표로 시작했던 해산식은 끝내 밤새 문학 토론으로 이어졌다. 그런 날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말들도 넘쳐났는데, 그때는 그게 다 진지하게 통용되는 말이었다.
"사람이 정말 쉽게 잘 안 변하거든."
혜지가 담요를 꼭 싸매며 말했다. 나는 테라스 창을 다시 닫고 돌아와 앉았다.
"김필. 너 2년 전에 나한테 엉엉 울면서 전화한 거 기억 안 나? 회사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으니까 머릿속이 다 컴퓨터처럼 변하는 것 같다고. 이젠 시의 언어도 모두 잃고, 사리사욕에만 빠져 사는 인간이 되는 거 같다고. 네가 지켜 왔던 윤리니 뭐니, 그게 얼마나 허망하고 예쁘기만 했는지 알 거 같다고, 그래서 무섭다고."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사람과 사람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던 때였다. 그건 그저 '사회의 언어'였다. 날것을 가공해서 듣기 좋게 만든 언어였다. 사회 초년생이던 나는 그런 '가공법'을 배우지 못했고, 언제 어디서든 진심 섞인 말이 나올까 봐 입술을 떨었다. 사용하던 근육이 달라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혜지야."
"응."
"아니야. 사람 쉽게 잘 변해."
"그래?"
맥주를 사오겠다던 친구들이 도착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캔맥주를 힘주어 구겼다.
한 달 뒤, 제1 지구 서점에 김필의 시집, 「뿌리를 자른 나무가 드디어 걷기 시작했다」가 전시되기 시작했다. 고글을 벗은 필의 사진도 벽면에 걸려 있었는데, 제2 지구의 햇빛이 이곳보다 강한 탓인지 피부가 탄 모습이었다. 그래도 전에 본 사진보다 훨씬 자신감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마스크를 쓴 채로 필의 시집 한 권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필의 시에서는 제1 지구에서 있었던 일들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어린 시절이나 제2 지구에서 있었던 일들을 시에 주된 재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최근에 내 모습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약간은 섭섭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나에게 섭섭하다니, 우습지만 그랬다.
좋은 시였냐고 묻는다면 그럭저럭이라고밖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무슨 질투나 그와 비슷한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이제는 어떤 시가 인류에게 가치 있는지, 어떤 시가 정말 잘 쓴 시라고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필이 제2 지구의 초록 달을 보며 쓴 시는 좋았다. 그 시에서는 묘하게 타인을 끌어안는 작은 포옹의 온기가 느껴졌다. 어쩌면 한 달 전 필의 인터뷰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가 초록 달을 만나고 싶어 했다는 걸 떠올리며 쓴 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출근을 하고 나서 조현우 씨가 내 자리로 찾아왔다. 김필의 시집을 들고 있었다.
"필 씨가 사인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시집에 김필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옆자리에 김혜상 씨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필 씨 복제인간한테는 연락이 안 오나요? 저라면 제 분신이 잘살고 있는지 진짜 궁금할 것 같아요."
"매년 수송선이 오가니까 일 년이면 연락이 닿겠지요. 하지만 송신권을 사야 할걸요. 꽤 비싼 금액이라고 들었어요."
"아쉽네요."
"잘살고 있겠죠. 여기 있는 우리보다야. 제2 지구는 물도 공기도 맑다고 들었어요. 여기보다 10분의 1 크기로 작아서 인구수도 많지 않고."
"나도 거기서 살고 싶다."
부장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AIST의 베타 테스트 날이었다. 사용자가 직접 고른 키워드로 완성한 소설을 국내외 공모전에 내기 시작한 지 일 년째였다. 결과는 늘 참패. 한 번도 예심에 오른 적이 없었는데, 며칠 전 한 편의 소설이 본심까지 오르는 쾌거를 이뤄냈다. 부장이 고른 키워드였다. '모험', '소년', '몬스터' 등의 키워드로 시작하는 판타지 소설이었다. 재미를 목적으로 고른 키워드였는데, 문체를 꽤 무거운 톤으로 설정해서 장편소설을 심사하는 평론가들에게 신선함을 보여준 것 같았다.
"욕도 많이 먹었지. 예술은 인간만이 하는 거라고 회사에 컴플레인 엄청 들어왔어."
"다 과도기가 필요한 거겠죠. 결국엔 편리와 효율로 다들 몸을 틀 테니까요."
김혜상의 말에 조현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그치만 자기가 원하는 키워드로만 소설을 읽는다는 건, 곧 자기가 보고 있는 또는 보고 싶은 시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래서?"
부장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조현우를 돌아보았다.
"어쩌면 자아에 벽을 쌓는 부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거죠."
김혜상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보탰다.
"부작용 하니까 생각나네요. 왜 어떤 물건을 사면 실패할 수도 있잖아요. 그치만 어느 한 부분은 좋을 때가 있지 않아요? 예를 들어서 엄청나게 재미없는 영화를 봤는데, 그래도 배경음악 하나는 마음에 들어온다거나 그런, 예측하지 못한 기쁨이요. 근데 AIST는 그런 실패를 최소화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니까 어떤 부분에서는 독자의 만족감을 극대화하지만, 실패 속에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기회는 박탈당하는 거 아닐까, 하는?"
"참 생각 많아, 우리 팀."
부장이 고개를 흔들며 자리로 돌아갔다. 김혜상과 조현우도 머쓱해진 표정으로 자기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시간에 가속도가 붙었다. 평생 혼자 살면서 시를 쓰겠다던 혜지는 결국 회사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했다. 한 친구는 그저 그런 문학잡지에서 등단하면서 그럭저럭 축하를 받고 그럭저럭 문단 활동을 이어 나갔다. 자신은 딱 이 정도일 거라고 자조 섞인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그동안 나는 점점 일이 익숙해졌다. 한 단어만 던져 주어도 그와 관련된 상황을 열 개씩 스무 개씩 기계처럼 써내려갔다. AIST는 인간들의 문장을 밤낮으로 받아들였고, 이제는 인간의 후속 수정이 거의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그럴듯한 한 편의 소설을 써냈다. 물론 핸드메이드 코트가 기성복보다 비싸게 팔리듯, 여전히 소설가가 직접 쓴 소설이 더 높은 명예를 얻었지만 DIY 형태의 소설 시장도 무섭게 커나가고 있었다.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부장은 팀원들에게 매일 아침 격려 섞인 말을 건넸다. 나는 부장의 자리에 아직까지 꽂혀 있는, 지금은 매우 비싸고 귀해진 종이책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꼭 모두가 좋아할 필요는 없지. 그럴 수도 없고.'
집에 와서 아주 오랜만에 물걸레질을 했다. 아날로그적이다. 미소를 지으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걸레로 먼지를 닦았다. 얼룩이 진 부분을 집중적으로 닦다 보면 정신이 멍해졌는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시간이 선물처럼 귀하게 느껴졌다.
더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혜지도 친구들도, 안정적인 삶을 더 미뤄 두고 한 번만 더 썼다면, 한 번만 더 도전했다면. 우리 중 누구라도 좀 더 나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을까. 충분히 가능했던 일을 내가 겁을 먹고 멈춰버린 것일까.
의미 없는 생각을 반복하고 있을 때 AI의 알림음이 들렸다.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송신인의 이름은 김필이었다. 나는 걸레를 바닥에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얀 달 아래 계실 필에게>
안녕하세요. 그곳의 필은 안녕하신가요. 필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기도 전에 제 시집이 제1 지구에 도착해 있겠군요. 최대한 빨리 필에게 시집 발간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었지만 송신비가 만만한 액수는 아니더군요. 그래서 며칠 전 문학상 소식을 듣고 상금을 미리 받아 이렇게 메일을 보내는 것입니다.
필이 복제인간 동의서에 사인을 한 시점에서 약 3년이 흘렀습니다. 복제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체검사와 인터뷰를 거친 것이 1년, 제2 지구에서 보낸 시간이 2년 정도 되었지요. 필에게 이 메일이 도착했을 때는 송신 시간이 더해져 또 4년이 흘렀을 겁니다. 시간이 무섭게 흘러갑니다. 저 또한 점점 제1 지구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잊어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필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아무래도 필은 제가 태어난 시점에서는 이미 저보다 2살이 많은 상태였기 때문에 동갑보다는 형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지만 제가 정말 필에게 존댓말을 쓰는 이유는 신체적인 나이 때문이 아니라, 당신과 저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아득함을 느끼다 보면 저도 모르게 현기증이 올 때가 있습니다.
시 스터디 <시련>은 어떻게 되었나요. 해산식이 있던 것은 기억나지만, 그래도 계속 시를 쓸 사람들 몇몇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당신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저만큼 깊이 아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 새벽에도 필은 집에 돌아가 마지막 술잔을 기울였지요. 언제 빠졌는지도 모르게 깊이 잠들었던 것도 기억합니다. 얼마쯤 눈물이 났다는 것도요.
그해는 필에게 정말 시련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신춘문예에 시를 공모하기 한 달 전까지, 필은 말 그대로 미친 사람처럼 시에 몰두했으니까요. 작은 방에 1.5리터짜리 생수 두 병이 뒹굴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흘 동안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않고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시를 썼지요. 침대에 엎드려 노트에 연필로 시를 적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밤새 수정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몰두의 시간을 다시 재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에서 11월의 바람이 부는데, 낙엽 냄새가 흘러 들어오는 창밖을 보고 있으면 괜히 눈물이 났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이번에는 진짜 되겠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공모전에 시를 냈습니다. 이쯤 했으면 좋아하는 건 이제 취미로 하라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올 때였습니다. 솔직히 말해 봐, 너 시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일하고 싶지 않은 거 아냐? 시는 다 핑계고 너 하고 싶은 것만 하려는 거잖아. 무책임하게. 이제 더 이상 그런 말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습니다. 얼마큼은 맞는 말이었으니까요. 넥타이 메고 일하러 가는 하루하루보다 하늘을 보며 시를 읊는 삶이 훨씬 재밌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일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며 풀이 얼마나 예쁘게 흔들리는지, 손등의 상처는 어떤 방식으로 아물어 가지는지 관찰하고 해석하는 날들이 더 좋았으니까요.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낙방이었죠. 폐인이 된 몰골로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편의점으로 갔습니다. 당신은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도 있는 결과를 굳이 종이 신문을 찾아보았습니다. 종이라는 물질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손가락에 까칠까칠하게 만져지는 명확한 포기의 순간을 감각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해 시로 등단한 사람은 당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였습니다. 총명한 눈을 가진 남자요. 그가 쓴 시를 읽고 필은 조용히 신문을 제자리에 두고 편의점을 나왔습니다. 1월 1일, 새해의 찬바람에 발끝이 시려 왔습니다. 재능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요, 노력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무엇이든 자신이 철저히 뒤처져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그날의 마음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필. 그래서 저의 시를 시집으로 발간하자는 제의를 받았을 때, 저는 너무나 기쁘면서도 당신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필은 정말 제 소식에 행복할까요, 아니면 더 큰 아픔을 느끼게 될까요. 좀 더 나아가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지는 않을까요.
필, 저는 아침마다 눈을 뜨면 테라스 창을 열어 맑은 공기를 마십니다. 눈앞에는 너른 광장이 있고, 푸른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들 몇몇이 맨손체조를 하는 것을 봅니다. 토마토와 케일 등을 갈아 건강주스를 만들어 마시고, 샤워를 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습니다. 배낭에는 점심시간에 먹을 샌드위치와 커다란 고글을 넣습니다. 작업장으로 가는 동안 얼굴을 익힌 사람들과 밝게 인사합니다. 제1 지구에 비해서는 확실히 여유로운 얼굴들입니다. 생필품과 의료비는 정부에서 무료로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주거를 위한 대출금 이자도 아주 낮은 편이고요. 계획도시이기 때문에 비교적 좁은 면적에 빌딩을 높게 세웁니다. 제1 지구의 도시를 차곡차곡 접어 놓은 것과 비슷하지요. 가까운 곳에 영화관, 병원, 도서관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쾌적함만큼은 만족스럽습니다.
이런 환경 덕분에 일이 끝나고도 틈틈이 시를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돈을 급하게 모을 필요도, 눈앞에 수많은 경쟁자가 보여서 끙끙 앓을 필요도 없었으니까요. 낮 동안 잡초를 처리하고 저녁에는 테라스로 나와 초록 달을 올려다보며 시를 썼습니다. 그건 그냥 일상이었습니다. 목메고 할 필요도 없는 일상이요.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상뿐이 아닐까요. 시집을 내고도 제 삶은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센트럴 서점에 제 이름이 들어간 시집이 들어갔을 뿐이지, 저는 여전히 제 몸과 정신적 행복을 위해 경제활동을 하니까요. 가끔은 몸이 피곤해서 일을 쉬고도 싶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앞에서 웃는 척 얼굴을 일그러뜨려야 했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습니다.
문장이 자꾸만 두서없이 흘러나옵니다. 결국 저는 운이 좋았던 겁니다. 이곳에는 한국어로 시를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많은 소설과 시가 몇 가지 언어로 번역이 되어 제2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환경이 갖추어졌을 뿐, 우리가 원했던 성취는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지요.
필, 이곳에서는 독성을 품은 채 이 미터까지 자라는 잡초들을 돌연변이 식물로 규정합니다. 굳이 학명을 붙일 필요도 없이 '잡초'라고만 부르지요. 오토바이를 끌고 레이저로 이것들의 뿌리를 지지다 보면 힘없이 픽픽 쓰러지는 모습에 괜히 마음이 울적해질 때가 있습니다. 발버둥의 여지도 없이 미약하게 무너져 가는 것들이 본의 아니게 당신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필, 우리 닿고 싶던 그곳에 가장 가까이 갔던 날을 잊지 말기로 해요. 며칠 밤을 새다가 겨우 한 문장을 만들어냈을 때, 어쩌면 정말 내가 바라던 시를 완성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가까워졌을 때, 모든 사람이 잠든 시간에 홀로 깨어 있던 것 같던 그 기분을 지우지 말기로 해요. 그날만큼은 부디 진심이 되어 그 어떤 날에도 쓰러지지 않기로 해요.
잘 지내요, 필. 당신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나는 테라스로 나가 창을 크게 열었다. 하늘에서 낮달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제는 너무나도 담담하고 괜찮아서,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이 의아한 기분을 어떻게 필에게 전할 수 있을지 잠시 고민했다. 필의 메일을 읽고 나니 확신이 섰다. 나는 제2 지구의 필을 보면서 다시 시를 쓰고 싶어지지도 않았고, 필에게 질투의 감정이 생기지도 않았다. 세상에 대한 분노도 없었다. 시를 품었던 마음을 삽으로 폭폭 퍼내고, 그 자리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흙을 조금씩 채워 넣는 기분이었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필이 있는 행성을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테라스로 나가 하늘을 두리번거렸다.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그 세계는 존재할 것이다. 그곳에서, 내가 가장 치열하게 사랑했던 순간을 기억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퍽 위로가 되었다.
나는 볼 수 있는 가장 먼 곳을 바라보면서, 그밖에 모든 것들은 아득하게 멀어지도록 가만히 두기로 했다. 여기까지가 끝이라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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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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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자의 기록공유자의 기록 이서수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가 나를 데려간 곳은 엉뚱하게도 낡은 정자 앞이었다. 아버지는 육모정이 있는 그 땅을 세 조각으로 잘라 친구들과 나누어 가졌던 사실을 내게 처음 알려주었다. 사다리꼴 모양의 땅 둘레에 소나무와 중국 단풍나무, 벚나무가 띄엄띄엄 심겨 있었다. 파란 셔츠를 입은 아이가 정자 마루 끄트머리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며 발끝으로 축구공을 굴렸다. 그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여 부근에 사는 아이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 사람이 삼분의 일씩 갖고 있어. 그러니까 이 땅의 삼분의 일이 네 몫이라고. 아버지에게 땅이 있었는지도 몰랐기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내게 증여할 생각이라는 말이 더욱 놀라웠다. 아버지가 다른 가정을 만들면서 우리의 관계는 소원해진 지 오래였다. 한편으론 번듯한 건물이 아니라 낡은 정자가 지어진 땅을 물려받게 된 사실이 약간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자 앞은 너른 공터였고 지도 앱을 통해 확인한 주변엔 초등학교와 파출소, 보습학원과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정자를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지으면 가치가 얼마나 오를지 궁금했다. 정자는 저대로 내버려 둬. 그건 지켜. 아버지가 내 속내를 읽은 듯이 말했다. 나는 미약하게 항의했다. 땅을 이렇게 놀리는 사람이 어딨어? 놀리는 게 아니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잠시 말이 없던 아버지가 입을 뗐다. 올해 우리가 자식들에게 땅을 증여하기로 다 같이 합의를 봤어. 왜 그런 결심들을 하셨는데? 그냥 때가 된 거지. 상념에 잠긴 표정을 짓던 아버지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하더니 갑자기 일이 생겨 빨리 돌아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땅에 대한 설명이나 해명이 더는 없었다. 나는 의구심을 삼키고 정자와 나무를 한 프레임 안에 담아 사진을 찍었다. 그러곤 어색함을 적당히 감추며 아버지와 정자 앞에서 헤어졌다. 해마다 한두 번씩 오가던 안부 연락마저 뜸해지던 때였기에 서울로 함께 돌아갈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생전에 재산을 미리 처분하려는 아버지의 태도가 못내 마음에 걸렸던 나는 결국 한 통의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 혹시 어디 아파? ―건강해.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분명 건강했던 것 같고, 나는 언젠가 그 땅에 대해 아버지와 길게 얘기할 기회가 다시 있을 줄 알았다. 3년이 훌쩍 흐르고 겨울 산행을 나선 아버지가 실족사로 세상을 뜰 줄은 까맣게 모르고서. * 부고장엔 그들이 아버지의 자식으로 되어 있었다. 내 이름이 없는 온라인 부고장을 들여다보다 장례식에 가지 않을 결심을 세웠다. 그러곤 동네 성당으로 가 나름의 작별 인사를 했다. 자식에게 지은 죄가 있긴 하지만 좋은 곳으로 가시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빌었다.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의 안식을 위해 켜둔 초를 바라보다 아버지의 봉헌초도 마련해 불을 밝혀 두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친족의 도리로 그 정도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새 초가 보이지 않아 나는 스스로 초가 되어 아버지 생의 일면을 조용히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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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10-01
문장웹진 소설
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 주면 오래 산다사람 같은 이름을 지어 주면 오래 산다 임아라 그가 돌을 키우자고 했을 때 나는 딸기를 먹고 있었다. 케이크에 얹은 것치고 과즙이 실해서 턱이 저릿했다. 나는 테이블 매트에 포크를 내려놓고 오른뺨을 어루만졌다. 입안에 머금은 걸 삼켰는데도 신맛이 가시질 않았다. 어금니에 들붙은 씨가 거슬려서 자꾸 혀끝으로 더듬댔다.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돌을 키우자는 거지. 문득 씨가 아니라는 게 떠올랐다. 딸기의 겉에 박힌 점들 말이다. 그게 열매고, 그 속에 더 작은 씨가 있다는데, 그렇다고 그걸 달리 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골라낸 씨를 검지에 뱉었다. 침과 뒤엉켜서인지 꽤 부푼 것 같았다. 자기한테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나한테? 그래, 우리한테. 그의 윗입술에 묻은 생크림이 바르르했다. 나는 그것을 닦아 주려다가 관두고 나이프를 집었다.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면 으레 주는 플라스틱이었다. 초는 몇 개 드릴까요, 직원이 물었을 텐데. 그가 뭐라고 답했을지 궁금했다. 어쨌든 초는 없고, 나이프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손잡이에 달린 마개를 열었더니 성냥 두 개비가 쏟아졌다. 돌을 키우기도 해? 응, 돌도 키울 수 있대. 그는 컵을 움켜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또 커피를 흘린 모양이었다. 그 컵은 가장자리가 겉쪽으로 휘어져 있어서 물이 넘치기 일쑤였다. 게다가 서랍에 들어박힌 처지길래 버리려고 했는데, 그가 발끈하는 바람에 그러지를 못했다. 너무 말짱하다는 게 그의 항변이었다. 이후 그의 커피는 그 컵에만 내줬다. 똑같은 컵이 있었는데 이미 버렸다는 건 굳이 밝히지 않았다. 왜 돌이야? 손이 가는 건 싫다며. 그렇다면 돌 만한 게 없지. 그가 살며시 컵을 기울이며 커피를 홀짝였다. 나는 슬쩍슬쩍 드러나는 둥근 밑면을 바라보면서 유난히 까맣다고 생각했다. 테이블에 닿을 때마다 닳았을 테니까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하얀 컵과 대비되어서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 너머에 있는 그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흰자위를 바삐 오가는 걸 보아하니 뭔가 숨기고 있었다. 실은 주문했어. 나는 잼이 덕지덕지한 접시를 토닥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몫의 케이크는 모로 누운 채로 사이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겹겹인 시트에서 반쪽짜리 딸기들을 빼낸 흔적이었다. 언제부턴가 버터에서 여물의 향을 맡았다. 내가 투덜댔더니, 그는 여물의 근처라도 가본 적이 있느냐며 놀렸다. 그때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고개를 가로저어야 했는데, 어째서 끄덕였는지 의문이었다. 미리 이름을 지어 주자. 그가 반절 남은 케이크를 상자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새 눅눅해진 받침대가 흔들려서 잠시 애를 먹었다. 나는 식탁에 흐트러진 빵 부스러기를 그러모으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검지에 뱉은 씨앗이 온데간데없었다. 어딘가로 옮았을 텐데, 전연 기억나지 않았다. * 김이 피어오를 정도로 따끈한 물줄기를 쏘였더니 순식간에 케이크가 일그러졌다. 폭우를 맞은 모래성처럼 쉬이 뭉그러졌다. 자잘한 건더기는 배수구를 향해 미끄러지고,
- 임아라
- 2026-09-01
문장웹진 소설
심심심심 임승훈 심심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심심한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심심해서 집안을 싹 바꿔봤어."라든지, "심심해서 머리핀을 또다시 찾아봤어."라고 하면, 나는 그들이 말하는 심심함이란 일종의 수사라고 생각했다. 진짜 이유는 있는데 말하기 귀찮거나, 말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다고. 대체 그 심심함이라는 게 무엇이길래 그만한 에너지를 들여서 굳이 무언가를 저지르냔 말이다. 하지만 이 년 전 급작스럽게 아내인 진서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심심함에 시달렸다. 사실 위의 말들은 주로 진서가 한 거였다. 그녀는 '심심해서 뭐뭐 했어'란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 나는 때로는 재치 있고 수사적인 그녀의 화법이 귀여웠고, 때로는 완곡적인 그녀의 태도가 우스웠고, 때로는 자기 마음에 시달리다 지쳐버린 그녀가 답답해 종종 짜증이 났었다. 왜 그녀는 본심을 밝히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심심. 진서는 왜 심심했던 걸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건 진서와 나의 기질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농담을 하는 사람이었다. 뭐 대단한 농담도 아니다. 대화하다가 내가 무심코 '지금'이라고 말하면, 그녀는 잽싸게 내 말을 자르고 '이 순간-'이라고 흥얼거리는 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재빠르게 눈치를 채고 '바로 오늘'이라고 대꾸해주곤 했다. 섹스할 때도 그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 벌거벗은 채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비장한 표정으로, "어디, 오늘 자네 실력 좀 확인해 보겠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진서 언니, 그럼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곤 옷을 훌렁 벗었다. 그 무렵 우린 홍명희의 소설 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진서와 광명 본가에서 아버지가 내놓은 책 박스를 뒤적이게 되었다. 진서와 나는 그 속에서 을 꺼내 들고 "우리도 이거 보자, 보자."라며 집에 가져왔다. 그 소설에서 무시무시한 사내들이 임꺽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꺽정이 언니, 이 우라질 놈의 목을 뎅강 자를깝쇼? 진서는 또한 예민하고 침울한 사람이기도 했다.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툭 내뱉고는(주로 꿈에서 내가 자기가 키우던 양을 잡아먹었느니, 섬세한 사람에겐 섬세한 날이 있다느니 했다), 긴 침묵에 빠지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모스 부호처럼 짤막하고 건조한 말을 하긴 했으니 완벽한 침묵은 아니고, 침묵의 근사치에 이르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짧으면 반나절, 길면 이틀 정도. 그러다가 그 침묵(의 근사치)에서 벗어나서 문득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였다. "심심해서 LA갈비를 만들어봤어."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내 사랑은 진서의 사랑과 조금 달랐던 걸까? 확실히 나의 사랑엔 고통이 없었다. 친구의 후배였던 진서를 처음 보자마자 호감을 느꼈다. 까맣고 가느다랗고 풍성한 단발머리,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그녀는 왠지 어떤 정물 같았다. 그런 그녀를 나는 힐끔힐끔 쳐다봤는데, 그때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후, 한 달 뒤에 우린 연애를 시작했고,
- 임승훈
- 2026-09-01
문장웹진 소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 계속 헤맬 거예요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 계속 헤맬 거예요 이승은 수연은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다른 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되었다. 월급이 높은 편도 아니었고 학원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지만, 수연은 아이들과 지내면서 학원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한 손에 샤프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우개 똥을 굴리며 수학은 왜 배워야 하는 거예요? AI가 있잖아요. 이제 수학은 필요 없는 거 아니에요? 투덜거리다가도 방긋 웃으며 떡볶이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이 귀여웠다. 작은 규모의 학원은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요즘 아이들 같지 않고 순한 편이라고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학원에서 일하는 삼 년 동안 수연은 무탈하게 지냈다. 월급이 밀리지도 않았고, 선생님들과 의견도 잘 맞았다. 크게 아프지도 않았고 사소한 말다툼을 빼고는 우재와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지냈다. 출근하면서 아이들에게 들려줄 재미난 퀴즈를 생각했고 퇴근하면서는 그날 볼 OTT를 고르고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와 장 볼 것들을 체크했다. 수연은 아이들이 수포자가 되지 않도록 일차함수와 연립방정식을 쉽게 이해할 방법을 고민했다. 주말에는 가성비 좋은 맛집을 찾아두었다. 우재와 외식을 하고 집에서 OTT를 보는 것 말고 다른 걸 해 보고 싶기는 한데 뭘 해야 할지, 우재와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고민이었다. 그해 여름 폭우가 쏟아지고 나서 이런 고민은 사라졌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내리고 며칠 후에 천장에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집주인이 옥상에 방수포를 깔아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정 불편하면 나가라고 한 이후로 수연은 하루 종일 집과 돈을 생각했다. 부동산 앱을 다섯 개 깔고 대출 조건을 알아보면서 진짜 고민이 시작되었다. 늘 아끼면서 지냈지만 모아 놓은 돈은 없었고 집값은 훌쩍 뛰어있었다. 대출 조건은 까다로웠고 대출을 받는다고 해도 매달 빠져나갈 이자를 생각하면 망설여졌다. 이사를 해야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사실은 막막한 게 아니라 뻔했다. 수연이 갈 수 있는 집은 반지하 아니면 또 다른 재개발 지역이었다. 수연은 자신의 상황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파악하고 싶었다. 그래야 느닷없이 찾아온 이 난제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빗물에 얼룩진 천장과 벽지를 보며 누워있던 어느 날 수연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삶을 그려보았다. 이 동네에 지낼만한 집이 없다면 살던 동네를 떠날 수도 있었다. 이번 기회에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학원 일을 할 수도 있고 학원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었다. 다양한 선택지가 펼쳐지자,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수연은 오랜만에 설레었다. 하지만 우재의 생각은 달랐다. 네가? 아무 연고도 없는데 혼자서? 지방에서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을 텐데. 우재의 말에 수연의 설레던 마음은 사라졌다. 우재야. 응? 그냥 잘될 거라고 말해주면 안 돼? 너 차도 없고 운전도 못
- 이승은
- 2026-09-01
문장웹진 소설
자꾸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자꾸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김효나 그는 얇은 회색 잠바를 입고 있었다. 아니다. 그의 시신은 얇은 회색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아니다. 그의 얼어붙은 육체는 얇은 회색 잠바 속에 내동댕이쳐 있었다. 내가 모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잠바였다. 아니다. 내가 모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잠바였을 뿐 아니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체크 남방, 한 번도 본 적 없는 추리닝이었다. 아니다. 내가 모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잠바, 남방, 추리닝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모르는, 가장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얇은 회색 잠바였다. 그의 얼어붙은 육체가 내동댕이쳐진 잠바, 남방, 추리닝 사이에서 내가 가장 모르는, 가장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은 얇은 회색 잠바라고 썼지만 실은 가장 모르는, 가장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은 그였다. 아니다. 실은 가장 아는, 가장 여러 번 본 적 있는 것은 그였다. 아니다. 실은 가장 아는, 가장 무수히 본 적 있는 그였지만 이런 모습의 그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알아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볼 수 없었다. 아니다.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가갈 수 없었다. 아니다. 다가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차갑게 얼어붙은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보시라고 말했다. 아니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보고 확인해 주셔야 한다고 말했다. 아니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확인해 주지 않으면 무연고자 처리가 될 거라고, 시신이 안치된 지 닷새가 지났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아니다. 나는 알았다는 식으로 입술을 웅얼거렸다. 아니다. 나는 다만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전히 그에게서 멀리, 가능한 한 멀리 뒷걸음질 치고 있었고 흰 가운을 입은 직원 역시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이런 일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즉, 이곳에서는 시신에게서 뒷걸음질 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다. 이곳에서는 시신에게서 옆걸음질 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다. 이곳에서는 시신에게서 뒷걸음질이나 옆걸음질 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 사람들 모두 결국에는 시신 곁으로 바짝 다가가야 하는 것 같았다.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은 가까이 와서 보셔야 한다고 반복하여 말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아니다. 그렇게 하려고 했다. 아니다. 반만 그렇게 했다. 그러니까 반만 가까이 다가갔고, 반만 보았다. 아니다. 겨우 두 걸음 다가갔고, 눈의 초점을 흐리게 하여 그를 보았다. 아니다. 초점을 흐리게 하여 본 것은 그의 얼굴이었고,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만 분명히 보았다. 아니다. 의도적으로 초점을 흐리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초점은 저절로 흐려졌다. 나는 내 눈이 자동 초점 기능을 가진 카메라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고장 난
- 김효나
- 2026-09-01
문장웹진 소설
늦은 새해늦은 새해 주나영 우기 막바지인 3월 아침, 조식당에 안까지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직원은 사다리에 올라 창에 붙은 검은 시트지를 문질렀다. 들뜬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눌렀지만 쉽게 붙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해서 창을 가려야 하나 싶었다. 어젯밤 체크인할 때 받은 안내문 상단에는 영어로 ‘침묵의 날(녜삐 데이)’이라는 낯선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루 동안 발리의 불빛과 소음을 줄이며, 투숙객의 호텔 외부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안내문을 건네던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새해 첫날을 아주 조용하게 보내는 풍습이 있거든요.” 나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호텔 직원들은 목소리를 낮췄고, 손님들도 주변을 살피며 말을 줄이는 듯했다. 사다리 위의 직원은 테이프를 한 조각 더 잘라 시트지 가장자리에 붙였다. 그래도 한쪽이 다시 들뜨자 시트지 한 장을 떼어 사다리 아래로 내려보냈다. 창의 절반쯤이 드러났고, 유리 바깥 면을 따라 빗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은 케이지-프리 에그 화이트 오믈렛을 주문했다. 쉰을 넘긴 뒤부터 식단과 운동에 부쩍 엄격해졌다. 디종 머스터드 병을 열어 숟가락으로 접시 귀퉁이에 덜어 놓은 뒤, 오믈렛을 잘라 찍어 먹었다. 면도를 공들여 한 듯 턱끝이 말끔했다. 맞은편에 앉은 혜리는 빵 바구니에서 올리브 치아바타를 집어 들더니 박혀 있는 올리브만 손끝으로 빼 먹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어깨에 들러붙어 있었다. 머리를 귀 뒤로 넘길 때마다 손가락에 물기가 묻었다. 나는 냅킨 상자를 혜리 쪽으로 밀었다가 멈추었다. 혜리는 이미 옆에 놓인 냅킨으로 손끝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커피는 식어 있었다. 혜리는 남편과 전처 사이의 딸이다. 남편은 나보다 열다섯 살 많고, 혜리는 나보다 열다섯 살 어리다. 혜리가 초등학생 때 엄마와 함께 호주로 건너간 뒤, 남편은 일 년에 한두 번 혜리를 만났다.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빠짐없이 선물을 보냈다. 남편이 서재에서 혜리와 영상 통화를 하는 날이면 나는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를 조금 줄였다. 주방에 갔다가 웃음소리가 들리면 물병만 꺼내 돌아왔다. 통화가 길어지는 날에는 먼저 씻고 침실로 들어갔다. 남편은 통화를 마친 뒤 혜리의 학교생활과 새로 키우기 시작한 동물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나는 그가 보여 준 사진을 몇 장 넘겨본 뒤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혜리는 빵에서 올리브를 하나 더 빼 입에 넣었다. 남편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혼인신고를 했지만 결혼식은 혜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미뤄 왔다. 결혼식은 석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사흘 정도 쉬고 오자고 한 것도, 한국과 호주의 중간쯤인 발리에서 혜리를 만나자고 한 것도 남편이었다. 출발 전날 밤, 남편은 서재에서 청첩장이 든 봉투를 가져왔다. 구겨지지 않도록 얇은 파일 사이에 끼워 여행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혜리는 아보카도 스프레드를 빵 위에 고르게 펴 발랐다. 한입 베어 물자 빵 껍질이 바스러져
- 주나영
- 2026-08-01
문장웹진 소설
장정호장정호 장희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공기가 차고 맑은 곳. 다른 곳보다 해가 빨리 뜨고 지는.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희재에게서 그가 지내고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우듬지 너머로 뜨는 어슴푸레한 새벽 동이나 찹찹한 분위기,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같은 임야를 떠올렸다. “죽어버렸으면.” 희재는 허공 속의 한 점을 보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곳에서 죽어버렸으면. 희재는 어머니가 복수가 찬 채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분명히 그때와는 다른 뉘앙스가 있다고 느꼈는데,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른 아침부터 희재와 나는 서둘렀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입을 헹구고, 어제 벗어두었던 청바지를 주섬주섬 입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희재는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양손으로 손잡이를 쥔 채 창문으로 머리를 기댔다. 저기 뭐가 죽은 것 같아. 아니다, 다시 보니까 없어. 진짜 아무것도 없어. 희재는 내가 대답하지 않아도 혼자 말하고 답했다. 한참 후 주위가 고요해진 것 같아 옆을 보니 희재가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백반과 우동을 나누어 먹었다. 밥을 다 먹고도 시간이 남아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통유리창 너머로 구름 한 점 없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과 휴게소 뒤편으로 펼쳐진 강줄기를 바라보았다.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휴가철이 지나서인지 대체로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없었다.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왜 그렇게 서둘렀냐고 묻자 희재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희재의 아버지 얼굴을 보고 안부를 확인한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그는 삼 년 전 아내가 간경화로 죽고 난 후 홀로 지내다 언제부턴가 야산에서 지내고 있었다. 양산에 있던 그가 어떻게 산천에 있는 그곳으로 들어가 살게 됐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미처 주변을 정리하지도 않았다. 아직도 그가 살던 집 냉장고에는 그가 먹다 남긴 반찬들이 썩어가고 있을 터였다. 희재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적부터 기르던 식물들, 호야 나무, 산세비에리아, 스투키가 말라비틀어진 채 죽어 있을 것이다. 나는 먼지가 가득한 집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부터 희재와 희재의 가족이 살았던 집. 희재와 나는 명절이면 그곳에 가서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 돌아오곤 했다. 간간이 희재와 희재의 어머니, 내가 웃을 때면 그는 크고 검은 눈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이니까.” 그가 왜 그런 곳까지 가게 되었을까 하고 묻자 희재가 대답했다. 자신도 우연히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뿐 더는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뭐든 다 자기 멋대로인 사람.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에 다른 사람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냥 그런 사람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죽어버렸으면. 나는 희재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본 그는 그저 평범한 남자였다. 말이 없고 등이 조금 굽은 왜소한 노인. 그는 묵묵히
- 장희원
- 2026-08-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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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흥미로운 스토리 속에서 문학창작자의 예술적 고뇌와 갈증이 잘 느껴지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