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스테이프 원더월
- 작성일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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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스테이프 원더월
임국영
#1 인투로 (이승윤)
무대 위에 록 밴드가 서 있었다. 조명이 드리운 실내 공연장은 마치 화마가 뒤덮은 것처럼 새빨갰다. 땅속 깊은 곳에서 길어온 듯한 베이스 기타 소리가 인트로 라인을 열었다. 긴장감이 고조되자 보컬이 관객에게 정중히 알렸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쇼.”
보컬이 말을 끝맺자 일렉트릭 기타 두 대와 드럼이 달궈진 무쇠를 망치가 내려치는 듯한 굉음을 내뿜었다. 관중은 음악에 맞춰 고개나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쏟아 냈다. 리듬을 따라 움직이던 나는 잠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렸다. 연주 파트가 끝이 날 즈음 고개를 들자 코앞에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어? 이게 왜 내 앞에? 의문이 가시기 전에 나는 그간 매일같이 불러서 입술 끝에 달라붙은 가사를 발음하기 시작했다. 1절 후렴을 끝내고 나서야 온전한 기억을 되찾았다. 맞다. 내가 보컬이었지.
#2 나는 왜 (못)
“록 얘기 좀 그만 쓰면 안 돼요?”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기 직전 어느 술자리에서 누군가 내게 말했다. 그 사람 말고도 직간접적으로 비슷한 조언을 했던 이들이 더러 있었지만 유난히 진지한 그의 태도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록 같은 걸 누가 듣겠는가? 당신이 어떤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지 아무도 관심 없다. 주구장창 똑같은 이야기만 하면 질리지도 않는가?
그날 술자리를 마치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의 말에 사로잡혀 지냈다. 저기요 선생님, 내가 쓰고 싶은 거 쓰겠다는데 님이 뭐 어쩔 건데요, 하는 반발심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으레 애주가가 적은 글에는 술이 등장하고 흡연가가 쓴 소설에는 담배 피우는 장면이 삽입되기 마련 아닌가. 작가에게 친숙한 소재가 작품에 반영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라는 항변을 스스로 되새겼지만 어쩐지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음미해 볼 만한 화두임은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소설을 쓸 때 늘 음악을, 특히 록을 소재로 삼는가. 어째서 한 번도 이 현상에 관해 의구심을 갖거나 깊이 성찰해 본 일이 없었을까?
나에게 록이란 무엇인가?
#3 난 알아요 (서태지와 아이들)
당신 기억 속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은 무엇인가? 라디오, 오디오 플레이어, TV와 컴퓨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거나 부모님이나 유치원 선생님이 알려 주신 동요인가? 나의 경우는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재생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곡 〈난 알아요〉였다. 힙합 장르를 베이스로 한 댄스 팝에 메탈 요소가 가미된, 네 살 남짓한 꼬마한텐 여러모로 자극적인 노래였다. 얼마나 자극적이었냐면 노래를 듣는 순간 트랜스 상태에 빠진 샤먼처럼 눈이 뒤집혀서 별안간 춤을 췄을 정도였다. 이 소리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내 감정을 멋대로 조종하는 것인가! 나는 아직 만나 보지 못한, 얼굴도 모르는 이와 마치 하나가 된 듯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이 곡을 듣고 있을 누군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마음이 된 것만 같은 기이한 일체감이었다. 그때부터 음악이라는 예술 장르가 지닌 불가해한 권능을 숭배하게 됐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라디오 모드로 변환하는 법을 알고부턴 다시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올드 팝부터 당대의 최신 댄스곡까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랜덤 재생되었으니까 말이다. 세상에 이렇게나 다종다양한 음악이 존재했다니. 끝 모를 축복이 고막에 깃들었다. 나와 취향이 맞는 프로그램이 송출을 시작하면 스피커에 귀를 가져다 대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어떤 음악의 인트로를 듣다가 ‘이건 내 취향에 부합한다’라는 판단이 서면 잽싸게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앞부분 몇 초 정도가 날아간 녹음본들로 가득 채워진 믹스테이프가 그 시절 내겐 최고의 보물이었다. 마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스타 로드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일한 유산인 ‘끝내주는 노래 모음집’을 아끼던 것처럼 말이다.
god, H.O.T, 젝스키스, 1TYM, 코요테, 이정현, 김현정, 양파, 조성모, 김건모···. 일일이 열거 할 수 없는 수많은 뮤지션들을 TV와 카세트테이프, 라디오로 접하며 90년대를 보내고 나자 컴퓨터로 마음대로 음원을 들을 수 있는 2000년대에 들어서게 됐다. 그 당시엔 ‘벅스 뮤직’ 같은 무료 스트리밍 사이트가(후에 문제가 되는 서비스 방식이긴 했다지만) 꽤 많았는데 이 시기부터는 대중 미디어에선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음원들도 손쉽게 찾을 수 있게 됐다. 에미넴 같은 해외 힙합 음악이라든가 크라잉넛, 델리스파이스 같은 인디 록 음악들처럼 말이다. 바로 이즈음부터 아버지가 내 방문을 수시로 열기 시작했다.
#4 호텔 캘리포니아 (이글스)
“음악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
소싯적에 인천에서 LP바를 운영했던 만큼 아버지는 제법 음악을 애호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절친한 친구가 좋아했던 곡이라며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를 컴퓨터로 들려달라며 요청하곤 했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언젠가 미국에 가 보고 싶다며 입버릇처럼 말했다던 아버지의 친구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컴퓨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신청곡을 들으며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혔다. 내 방에서 줄담배를 피우면서 말이다.
아버지의 신청곡은 점차 늘어났다. 나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케케묵은 넘버들을 재생하는 불운한 디스크자키가 됐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손님으로부터 진위를 검증할 수 없는, 음악에 관한 두서없는 트리비아를 청취해야만 했단 점이다. 〈노 워먼 노 크라이〉와 〈미스티 모닝〉을 들으며 레게의 전설 밥 말리가 죽었을 때 고국인 자메이카에선 대통령한테도 해 주지 않는 국장(國葬)을 치렀다거나 에릭 클랩튼이 실족사한 아들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으로 〈티어즈 인 헤븐〉을 만들었다는 사연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외에도 드러머 존 본햄이 죽자 해체한 레드 제플린의 〈스테어웨이 투 헤븐〉, 경비행기 사고로 멤버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는 레너드 스키너드의 〈심플 맨〉 같은 곡들을 들으며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아버지가 신청하는 곡은 반드시 죽음과 근접한 사연과 얽혀 있단 것이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죽은 자를 기억하고 기리는 양식으로 음악을 대했던 것 같다.
아직 10대였던 아들의 정서 함양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그의 끈질긴 음원 신청과 넋두리 덕에 결국 나는 음악, 특히 록이란 장르에 눈을 뜨게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문화적인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때를 생각하면 밴드 오아시스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소닉〉이 떠올랐다.
오아시스는 악동 형제 노엘 갤러거와 리암 갤러거를 주축으로 한 세계적인 밴드다. 젊은 시절 음악에는 전혀 관심 없고 동네 양아치 노릇이나 하던 동생 리암은 어느 날 괴한이 휘두른 망치에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진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리암은 그 순간부터 ‘음악을 해야겠다’라고 결심한다. 노엘은 이 일화를 두고 ‘리암은 망치에 맞은 게 아니라 음악에 얻어맞은 것’이라 평한다. 한편 노엘은 아버지로부터 심각한 가정 폭력을 당했는데 노엘은 이를 두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재능을 때려 박은 것’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상당히 폭력적인 계기로 음악에 발을 들인 이들의 이야기가 큰 인상으로 남은 까닭은 나 역시 아버지와의 관계가 썩 긍정적이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를 괴롭게 만든 대상으로부터 내 삶을 지속시킬 정신적 유산을 얻게 되었다는 이 서사가 내겐 좀처럼 풀리지 않는 아이러니였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던 마지막 날 새벽, 다른 가족들을 방으로 보내고 나는 홀로 빈소를 지켰다. 영정사진 앞에는 술이 든 종이컵 몇 잔이 놓여 있었다. 평생 술 때문에 가족 고생시키다 간 사람한테 죽어서도 술을 먹이냐며 어머니가 으름장을 놓았지만 아버지의 오랜 친구들은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용케 어머니의 눈을 피해 친구를 위한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원망했던 세월이 길었던 탓에 아버지의 죽음은 슬픔보다는 서글픔이 더 컸다. 그래서 나는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도 아버지를 어떤 얼굴과 마음으로 떠나보내는 게 맞는지 좀처럼 갈피를 못 잡았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작게 〈호텔 캘리포니아〉를 틀어 놓고 영정사진 앞에 술을 따라 올렸다. 과연 음악에는 죽은 사람을 추억하고 기리는 힘이 있는 모양인지 아버지와 함께 노래를 듣던 시간이 향연처럼 피어올랐다. 늘 피하고만 싶던 사람이었는데 함께 음악을 듣던 순간만큼은 마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우린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생전 아버지의 신청곡 리스트를 틀어 놓고 새벽을 보냈다.
그렇게 아침을 맞고 나서야 나는 풀지 못한 앙금 같은 것을 얼마간 내려놓고 오롯이 그의 명복을 빌 수 있었다. 이 또한 음악이 지닌 불가해한 권능 덕일 것이다.
#5 원더월 (오아시스)
앞서 록에 눈을 떴느니 어쨌느니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렇다고 뮤지션의 길을 걷겠다는 생각은 딱히 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여력과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망하게도 내 소설을 읽은 독자 중에 작가가 밴드 활동을 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밴드는 개뿔 술에 취해 노래방에서 방방 뛰거나 고함을 지르는 게 고작인 참으로 한 많은 삶을 살아왔을 뿐인데 말이다. 이게 다 주구장창 록을 소재로 소설을 써 온 나의 부덕함 탓이었다. 이쯤 되면 음악을 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직무 유기 아닐까?
지인들과 얼떨결에 밴드를 결성한 지 벌써 2년이 흘렀다. 그간 꾸준히 명곡들을 카피하거나 오리지널 곡을 만들어 연습했다. 연습곡들이 제법 쌓이자 친한 사람들을 불러 자그맣게 공연을 열기도 했다. 음악에 일가견 있는 척 떠들다 보니 어느새 진짜로 음악을 시작한 격이었다. 마치 자신이 음악인이라며 거짓말을 일삼다 뒤늦게 밴드를 결성하게 되었다는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 이석원의 사연처럼 말이다.
“연습은 좀 했어?”
홍대입구역 근처 합주실에 도착해 짐을 두고 마이크에 커버를 씌우고 있으면 밴드 리더(퍼스트 기타 겸 작곡, 작사가이자 서브 보컬, 엔지니어, 총무를 맡고 있다)가 묻는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답을 대신하지만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모두가 안다. 딱히 연습은 하지 않았다. 록은 기세니까.
뮤지션으로 대성할 각오까진 없어도 합주할 때만큼은 펜타포트 페스티벌의 주간 무대에 서 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다.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없어 보컬을 맡은 나는 중학생 때부터 노래방을 다녀온 구력을 토대로 악을 썼다. 그러나 가사를 수시로 까먹고 음정 박자가 들쭉날쭉하는 바람에 민망한 상황을 한두 번 맞닥뜨린 게 아니었다. 다른 멤버들 역시 정식으로 음악을 배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합주를 마치고 나면 ‘방금 나 많이 틀렸나?’ 하는 눈빛으로 서로 눈치 보기 바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각자가 갖고 있는 고유한 주파수가 완벽에 가깝게 들어맞는 기적과도 같은 찰나를 맞곤 했다. 그럴 때면 우린 주변을 돌아보지 않아도 잠시나마 서로가 ‘연결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소설에서 음악을 다뤄 온 이유다. 음악이란 소재는 대사와 진술만으론 전해지지 않는 일체감을 독자와 공유하기 위한, 나의 비밀스러운 주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슈퍼소닉〉에서 노엘 갤러거는 1996년 25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냅워스 공연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대규모 공연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아시스 덕이 아니라 음악을 들으러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들 덕분이라고. 정말로 대단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당신들이라고. 말하자면 오아시스란 밴드는 매개였을 뿐이고 사람들이 하나로 연결되고자 하는 마음이 기적에 가까운 시공간을 빚어냈단 얘기였다. 나는 그의 말에 무한정 동의한다.
나는 존재라는 어휘를 볼 때면 하릴없이 복수가 아닌 단수로 읽곤 한다. 태생적으로 외로운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은 집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온라인에서, 거리에서 타인과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며 지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진정으로 내면에 있는 모든 언어와 감정을 꺼내 보여 전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타인의 진심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더더욱 요원하다. 진정한 소통의 순간은 절대적으로 희소할 따름이고 그러므로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 있는 와중에도 대체로 혼자다.
혼자인 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혼자이기만 한 것은 유쾌한 일이 되기 어렵다. 지독한 외로움에 놓여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존재의 고독을 해갈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일을 살아 보게끔 하는 힘이 생성되지 않겠는가. 우리에겐 연결이 필요하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즉효 약이 음악이라 주장하는 바다.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던 사람마저 한순간이나마 이해하고 용서하게 했던 만큼 그 효과는 보장한다. 햇볕을 쬐거나 과일을 먹어서 비타민을 얻는 것처럼 우리는 더 많은, 더 좋은 음악을 복용할 필요가 있다.
Because maybe
You're gonna be the one that saves me
And after all
You're my wonderwall
- 오아시스 <원더월> 중
그러니까 여러분, 음악 들으세요. 음악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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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기획한 콘텐츠를 선보입니다. 이번 호의 주제는 정다연 편집위원이 참여한 ‘나의 반려들’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존재에게 삶을 빚지며 살아갑니다. 그 존재는 가까운 친구일 수도 있고,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 사물일 수도 있습니다. 저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우리와 오랜 시간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만은 변함없습니다. 이번 기획에서는 세 명의 작가가 각자의 반려가 되어주었던 대상에 대해 소개합니다. 그들의 반려 이야기에 자신의 경험을 포개보면서 즐겁게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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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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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도는 ‘남성성-코어’[문장웹진 다시 읽기] 돌고 도는 ‘남성성-코어’ ― 최가은, 「과잉 남성 사회―장류진 소설의 남성-청년」 (2020년 7월호 수록) 정의정 패션 산업은 빠른 속도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낸다. 발레코어, 고프코어, 놈코어… 아직 이것들도 다 알지 못하는데 또 포엣코어로 유행이 바뀌었다고 한다. 유행의 빠른 전환은 상품 소비를 부추기는 시장 전략이다. 그런데 무언가 사고팔지 않는, 시장의 대척점에 있을 법한 문학장에도 유행은 있다. 2025년 넷플릭스 시리즈 1)이 인셀2)의 정동을 다루면서 화제가 된 후, 그해 가을 계간지 『문학과사회 하이픈』은 ‘젠더-플레이’ 특집을 기획하며 청년 남성의 극우화 양상을 중심으로 하는 남성성 논의를 본격화했다.3) 올해 『문학동네』 또한 ‘남성성의 재구성’이라는 키워드 아래 기획된 여러 편의 비평·에세이를 발행했다.4) 대다수의 필진들은 이러한 특집호가 구성된 배경으로 12·3 계엄과 탄핵 이후 정국을 통과하며 테러, 집회에서 포착된 한국사회의 극우-인셀 정동과 그에 감응하는 근래의 문학 텍스트들을 짚는다.5) 지금 문학/비평장의 트렌드는 ‘남성성-코어’라고나 할까…?6) 그런데 동시대 지식장의 담론적 화두를 유행이라고 말해도 될까. ‘남성성’에 ‘-코어(core)’라는 말을 붙이니 진지하게 논의되는 남성성 담론을 가볍게 치부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우려스럽다. 그러나 내게 이 명명은 단순히 현상을 조롱하는 말이 아니라 동시대 현안을 발 빠르게 조사·수집하고 관련 서적과 글을 남독(濫讀)하고 그것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자신의 의견을 서둘러 표명해야만 하는 현장비평(가)의 생리와 한계를 통찰하는 언어로서 적실해 보인다. 물론 지금 한창 논의되는 ‘남성성’이란 이성애자-청년-남성 젠더의 극우적 멘탈리티에 주로 한한다. 이는 식민지 남성성이나 가부장 권력 비판에 비하면 지극히 동시대적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일베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2010년대 초반부터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백래시 국면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남성성은 언제나 문제가 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논의는 그때의 연속선에 위치하기보다 지금-여기에만 초점을 맞추어 과열되는 양상을 띤다. 이러한 담론적 단절은 이전의 남성성 논의가 정치성을 담지하지 못할 만큼 미진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언제나 ‘지금’을 가장 위태로운 시기로 지목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극대화하고 독자의 주목을 요청하는 현장비평의 관습으로 읽힌다. 이런 식의 비평이 반복되면 결국 담론은 축적되지도 사태의 근원지로 진입하지도 못한 채 한때의 유행으로 떠돌게 되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이전 시기의 글을 지금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 작업은 중요하다. 이는 후속 연구로서 선행 연구를 참조하는
- 정의정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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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문장웹진 기획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서수 작년에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자와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특정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었고, 각본 작업에 동참해줄 작가를 구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에 각색 일을 했었기에 지인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내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작가님 이름으로 챗GPT에 검색을 해 봤어요.” 그가 가방에서 파일 홀더를 꺼내더니 A4 용지를 넘기며 말했다. “약력과 작품관 같은 걸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제가 재미있는 걸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서수 작가가 쓸 법한 시놉시스를 한 편 써달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한테 제안했던 그 소재로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각본 작업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이서수라는 소설가가 그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이미 테스트해봤다니…… 나는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상태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나처럼 썼겠느냐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챗GPT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조합해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정확히 내가 만들 법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전개 방향이 모두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를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걸 생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1분도 안 걸렸죠, 뭐. 아시잖아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의 짜임새로 시놉시스를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예측해보니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의 1분과 인간의 1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나보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앞으론 이런 일을 자주 겪을 수 있겠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스토리텔링 산업과 인공지능이 합쳐졌을 때 내가 쓴 소설은 AI에 생성을 위한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과 책 리뷰, 인터뷰 기사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임에도 데이터만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특수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는 AI로부터 시놉시스를 얻는 데서 멈추었고, 이후의 작업은 인간 이서수와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
- 이서수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딸깍[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딸깍 양안다 나는 시 창작과 관련하여 AI를 활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창작자의 윤리라던가 신념 같은 건 아니고, 그저 AI의 시 취향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입력하거나 프롬프트를 통해 자세한 방향을 지시하면 나아지는 편이지만, 아직까지 나의 취향과 AI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내가 다른 이와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와 다름없습니다. AI는 창작 주체라기보다 창작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깝고, 이러한 맥락에서 AI는 키보드나 사전, 아니면 노트와 펜의 역할과 같습니다. 다만 AI는 적극적인 도구입니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것과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독자나 스승, 동료 시인을 포함하여 타 장르 창작자와 철학자, 그리고 세상을 떠난 시인과도 영향 관계에 놓입니다. AI는 이러한 점에서 모든 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AI는 때로 합평자가 되어줄 수 있고,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으며, 시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맥락을 끌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근본적으로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움직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로 형성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나 : 위의 텍스트는 ‘시인의 AI 활용’에 대한 텍스트입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ChatGPT-5.5 : 제가 조금 덧붙이고 싶은 것은, AI에게 “취향”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취향은 인간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AI의 취향은 어떤 미적 신념이나 삶의 이력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럴듯함의 평균값에 가깝습니다. AI는 시를 쓸 때 자주 매끄럽게 만들고, 의미를 지나치게 정돈하고, 이미지들을 문학적으로 보이게 배열하고, 감정의 결론을 너무 빨리 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AI의 기본 취향은 “좋은 시”라기보다 좋은 시처럼 보이는 문장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에게는 그게 참을 수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AI는 적극적인 도구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는다. AI는 도구인데, 기존 도구와 달리 도구인 척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인 척도 합니다. 키보드는 수동적이고, 사전은 정적인데, AI는 말을 걸고 반응하고 제안하고 반박하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능동적이고, 그렇다고 창작 주체라고 하기에는 책임과 욕망과 고유한 삶이 없습니다. 나는 AI가 주체적으로 시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취향에 맞는 시’를 언젠가 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나의 영향 관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AI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2020년에는 문득 이런 생
- 양안다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1) 노대원 AI 이후, 해석의 미래는? 평론가는 문학 텍스트와 평론뿐만 아니라 문학 이론을 비롯해서 여러 인문학 저서나 논문을 읽어야 할 일이 많다. 특별히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로 된 책과 논문도 읽어야 한다. 구글 번역이 나오고서 글과 책을 번역해 읽는 일에 큰 도움을 받아왔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엉뚱한 번역 표현이 자주 발견되었다. 그러다 ChatGPT가 나오기 전, 지금으로부터 거의 십여 년 전에 구글 번역의 성능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느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평론가로서 AI를 진지하게 걱정했다. 구글 번역이 혁신되었다고 한다. 이것도 '특이점'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기계번역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해석자로서, 다만 번역의 미래만을 생각할 것은 아니다. 번역과 해석은, 1차 텍스트에서 2차 텍스트로의 작업이란 점에서 같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이후 해석의 미래는 어떨까? 해석은 예술이지만 번역 역시 예술이지 않았던가? 텍스트와 해석(비평)의 풍부한 '병렬 코퍼스'가 인공지능에게 주어진다면 해석의 자동화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번역가들은 번역의 미래를 고민한다. 해석자들은 해석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가? (2016년 11월 19일) 이 글을 쓰면서, 링크를 걸어 인용한 글은 번역가 노승영의 「알파고와 번역의 미래」였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광고를 보거나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웹 문서뿐 아니라 잡지, 단행본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 번역가의 번역은 인쇄술 등장 이전의 책이 그랬듯 소수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가 되면 극소수의 번역가만 살아남을 것이다. 기계번역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는 번역가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제품이 수공예로 소량 생산되는 고급 제품이 구별되듯 기계번역과 인간의 번역이 구별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어떤 번역가가 살아남을까?”2) 이 예상은 거의 정확하게 실현되었다.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번역가가 생각보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 어쩌면 그 예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AI 번역은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이 글을 페이스북에 남기면서, 친구와 대화를 나눈 것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 원고료는 너무 싸기 때문에 인간 작가를 상회하는 탁월한 AI를 개발하는 비용이 더 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자조적인 농담을 던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AI가 문학을 위협한다 해도, 나는, AI와 문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작업을 도전적으로 수행하는 쪽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얼마 뒤(ChatGPT 출시 몇 해 전에), 제주도에 AI 관련 서머 스쿨이 있어 방문한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김성훈 교수를 만나 점심 식사를
- 노대원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 곽재식 인터넷에 누가 “자동차 엔진오일이 왜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엔진오일에 정말 돈을 많이 들일 필요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올렸다고 해 보자. 이런 덧글을 달면서 기대하는 것은 엔진오일에 대해서 잘 아는 자동차 수리 일을 하는 사람이나 엔진오일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전문 지식을 담아 써 주는 대답이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오래 자동차를 운전해 본 사람들이 각자의 엔진오일에 대해 이야기 해 주는 경험담을 들어 볼 수 있기를 기대할 것이다. “엔진오일 우습게 보다가 저는 큰코다친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 비슷한 답을 기대할 거라는 이야기다. 이런 기대는 무리를 지어 살면서 서로 경험과 기억을 언어로 공유하면서 발전해 온 사람이라는 종족이 원시 시대 때부터 갖고 있던 아주 오래된 습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한동안 이런 덧글을 달면, 부리나케 달려와서 “챗GPT에게 물어 봤더니, 이렇게 답변해 주더군요.”라고 자기가 인공지능에게 물어 본 내용을 복사해서 덧글로 붙여 주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덧글에 엔진오일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줄 써 두어서 열심히 읽어 보았는데 다 읽어 갈 때쯤 보니까 맨 마지막에 “이상은 제미나이에게 물어본 결과입니다”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덧글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거의 모든 곳에서 많이도 나왔다. 도대체 이런 덧글은 왜 달리는 걸까? 질문을 했던 나는 챗GPT나 제미나이에게 물어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살펴보자면 대부분의 덧글은 그야말로 순수한 의도로 달린 것이다. 질문을 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고, 자기도 그 문제에 대해 궁금하다 보니 대규모 언어모델, 즉 LLM 방식으로 운영되는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결과를 받아 본 뒤에 그 결과를 남들과 같이 공유해 보려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심정에서 나온 동기는 조롱받을 이유도 없고 나쁜 마음이라고 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계각층에서 LLM 방식의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거기에 다른 마음이 결합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는 것 같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최신 기술을 이용하고 있다는 뿌듯함이다. 요즘 그렇게 유행이라고 하는 최신 첨단기술인 인공지능을 내가 이렇게나 잘 이용해서 남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을 느껴서 “나는 요즘 뭐든 인공지능에게 물어봐. 너무 편하고 좋거든!”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게 된다는 뜻이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다 바꾸어서 완전히 다른 사회가 탄생할 거라는 이야기를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온갖 매체에서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남보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감각 속에는 거창한 환상마저 슬그머니 서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앞서갈 거라는 환상이다. 지금 치열한 경쟁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문장웹진 다시 읽기]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 ― 조연정, (2017년 8월호 수록) 김진선 어느 강의 시간, 교수님께서는 신입생들에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면을 소개해 주셨다. 많이 읽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그날 이후 인터넷 즐겨찾기 목록에는 《문장웹진》이 빠지지 않고 있다. 햇수로 17년, 매달 1일이면 새로 올라온 작품들을 접했다. 나름 놓치지 않고 따라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다시 보니 아닌 일이다. 맞다, 이것은 고해성사. 나의 죄를 고합니다. 나는 장르 편식이 있어서 시를 제외한 소설, 비평, 기획 등은 대체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문장웹진 다시 읽기’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다시 읽기’가 아닌 셈이다. 그러니까 이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처음 마주한 글을 여러 번 살피고, “(다시) 읽을 기회가 생겨서 정말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마침내 말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시작은 2017년 8월호에 수록된 조연정의 이라는 비평이다. 평소 어렵다고 생각한 비평만큼은 피하거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간의 죗값을 달게 받는 거 같다. 이 글은 윤이형 소설가가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로서 고민하는 몇 가지 질문과 함께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중심으로 문학적 재현,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논의의 과정에서 《문장웹진》 2017년 4월호에 수록된 조강석의 에 의문을 표하며,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부정적 평가에 정면으로 맞선다. 먼저, 윤이형 소설가의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앞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소설을 많이 ‘써야만’ 할까? - 앞으로 쓸 내 소설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순응하거나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는 여성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일까? - 나는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에 대한 어떤 멸시나 비하도 ‘현실 그대로’ 작품 속에 재현하면 안 되는 것일까? 꼭 필요해서 그런 식의 재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럴 경우, 반드시 거기에 내가 작가로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명시해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 이런 고민들을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혹은 각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내가 과잉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그저 여성 트위터리안-독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들을 ‘타인’으로 여길 만큼 나는 그녀들에게서 먼가?1) 작은따옴표 안에 들어간 말(밑줄은 인용자 강조)이 유독 신경 쓰이는 것은 왜일까. 이 질문들은 의무(‘써야만’), 제약(‘안 되는’), 판단(‘비판적인’), 자기인식(
- 김진선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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