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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하고도 복잡한

  • 작성일 2025-11-01

간결하고도 복잡한


이주란


헤밍웨이의 소설 「깨끗하고 밝은 곳」에는 카페 손님들이 모두 떠난 시간까지 전등빛 아래 앉아 집에 가지 않는 노인 한 명이 등장한다. 박인성 평론가가 그 노인과 겹쳐보였다는 뜻은 아니다. 노인과 그는 좋은 손님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많이 취하면 돈을 내지 않고 가는 버릇이 있는 노인과 달리 그는 우연히 카페에 들른 친구에게 종종 커피를 사는 버릇이 있다는 점이 다르다. 몇몇 날 내가 보았던, 박인성 평론가와 그를 둘러싼 풍경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1. 서울역에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는 일주일에 절반은 부산에서, 나머지 절반은 서울에서 움직인다고 한다. 나는 그가 부산을 떠나 서울에 도착하는 목요일 저녁, 7시 18분에 도착하는 열차에서 내리는 그의 표정을 관찰하기 위해 서울역으로 갔다. 서울역 광장 앞에서 한 사람이 END가 아니라 AND, 명심해라 이것들아, 하는 행동은 꼭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온다, 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을 지나쳐 역사 안으로 들어가면서는 어쩌면 END가 아니라 AND,가 아니라 AND가 아니라 END라고 말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후 열차를 타기 직전까지 세 개의 수업과 세 개의 회의를 마쳤고 먼 거리를 이동했기에 짐도 좀 있고 다소 지친 표정일 거라 짐작한 것과 달리 그는 크지만 무겁지 않은 가방을 왼쪽 어깨에 걸친 채 바쁘지 않은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회색 쓰리피스 수트와 똑딱이 체크 셔츠를 입은 그는 플랫폼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에스컬레이터 안 타세요? 

저는 그냥 계단으로 갑니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사람들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 속에 뒤섞여 그는 빠르게 걸었다. 

이제 어디로 가세요? 

오늘은 성수로 갑니다. 

그는 여러 개의 출구 중 맨 오른쪽 출구를 향해 걸었다. 걸음걸이는 눈에 띄는 것 없이 평범했으나 힐리스라도 신은 것처럼 자연스럽고 (내 기준 너무)빠른 걸음이었기에 그의 마음은 이미 성수에 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왜 이렇게 빠르세요? 

진짜 눈을 감고 간다면 이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렇게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익숙한 길이죠. 서울에 오면 저는 보통 성수 아니면 상수에 있는데요, 상수에 갈 때는 삼각지역에서 갈아타거든요. 삼각지역에서 상수역으로 갈 때는 맨 끝에서 갈아타면 빨라요. 

성수로 가면서 상수로 가는 길을 설명하던 그는 상수로 갈 때 절반쯤은 가야 할 맨 끝의 반대편 맨 끝으로 가는 결정을 하는 바람에 더 먼 길을 걷게 되곤 한다고 말했다. 

걷기의 날들이죠. 차라리 중간에서 타는 게 나으려나. 늘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려요. 

틀리면 무슨 생각을 하시냐고 물었더니 내가 그렇지 뭐, 하는 생각을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 앞서 걷던 그에게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 그래. 거기서는 삼십 분쯤 있을 것 같은데 너도 그때까지 있게 되면 봐. 간결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은 그는 내게 저리로 가서 2호선 타고 가시면 돼요, 간결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는 서울역을 출발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환승을 하여 성수역으로 향하는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가 삶이라든지 일상의 익숙함에 속거나 익숙한 듯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 속을 정말이라는 부사를 꼭 써야 할 만큼 정말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2. 연희동에서 


절기상 가을의 한복판이었으나 기온은 높아 여름의 마지막이라고 불러도 좋을 날이었다. 다시 부산으로 가기 전날 그는 연희동에 위치한 라이카시네마에서 영화를 보았다. 나는 그가 본 영화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연희동으로 갔다. 연휴 동안 《그저 사고였을 뿐》, 《어쩔 수가 없다》외 몇 편의 영화를 더 보았다는 그가 방금 본 영화는 《마작》이었다. 

영화에서 마작을 하던가요? 

아, 했어요. 

상영관에서 나온 그는 거리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는 제목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아보였다. 공예갤러리를 지나 횡단보도 앞에 섰다. 점심을 사 먹고 상수로 갈 거라고 했다. 보통 냉면집이나 중국집엘 가는데 냉면집이 문을 닫아 만두를 먹으러 갔다. 내가 짐작하기에 그는 냉면을 먹고 싶었던 것 같았는데 닫힌 문을 보자마자 그렇다면…… 하면서 재빨리 다음 행선지를 정했던 것이다. 만둣집에는 마침 한 테이블이 비어 있었다. 군만두와 찐만두를 먹으며 그는 오래전 이곳에 왔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동료와 함께 일을 마친 뒤 들렀다가 각자 만두를 다섯 접시씩 먹었다는 이야기였다. 맥주도 곁들였으려나. 오래전 많은 만두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근래 공허했던 마음이 조금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만두의 맛이 좋아서였겠지만 할 이야기가 많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 이야기가 많다는 건, 아무래도. 


3. 합정에서


합순에 있을 것 같습니다. 

합순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한참을 생각한 끝에 그것이 합정순대국을 뜻한다는 것을 알았다. 해야 할 일들이야 늘 있지만 연휴를 맞이하여 전날 다소 과한 음주를 한 모양이었다. 

어젯밤에 미리 어머니에게 말해두었어요. 아침밥을 먹지 않겠다고.

그런 것을 미리 말해주시는군요.

그렇죠. 그러지 않으면 혼이 납니다. 

인성아! 인성이 너! 하면서 혼쭐이 난다고 하였다. 그가 신춘문예 당선 소감에서 어머니의 믿음에 대해 언급했던 일을 떠올리다 보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여기 순댓국엔 콩나물이 들어있어요.

숙주 아닌가요?

아, 숙주네요.  

보통은 여럿이 있을 때나 그를 보았기에 식사를 한 기억은 없었다. 그리하여 철저하게 관찰만 하고 싶었으나 합순에서는 나도 밥을 먹었고, 때문에 순간순간에만 그를 관찰할 수 있었다. 뭐랄까, 그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가 누군가와 나누던 대화에서 들은 기억을 떠올려보면 어릴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넌 왜 이렇게 애가 부잡스럽니!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어머니의 지도 덕분인지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릇을 말끔히 비웠고, 내가 수저를 내려놓고 가방을 들자 의자를 밀고 일어나더니 의자를 다시 밀어 넣었다. 

다음 달에 건강검진이 있는데… 그는 씁쓸하게 말하며 거리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하루에 만 보에서 만오천 보쯤은 늘상 걷는다고 했다. 합정에서 상수를 향해 걷는 동안 그는 이 거리에서 일어났던 몇몇 일들을 지금의 시점으로 서술해주었다. 사실에 치우치지도, 감정에 치우치지도 않은 어법이었기에 나는 그저 잠자코 들었다. 

아마 이 길은 제 집 앞보다도 더 많이 걸은 길일 거예요.

집 앞보다도 더 많은 길이라는 건 도대체 얼마만큼인 걸까. 오래전부터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이 길을 걸었을 것이고, 간결한 하루를 만들기 위해(의도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아마도 말할 수 없이 복잡다단한 많은 날을 지나왔을 것이다. 나보다 조금 앞서 횟집과 베이글집과 부동산과 카페와 공연장과 편의점과 옷가게와 라멘집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방에는 오 년 전에 구입한 노트북이 들어있다고 한다. 


4. 상수동에서 


지지난밤과 지난밤엔 많은 비가 쏟아졌다. 바람이 몹시 부는 한낮. 그는 좋아하는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학술대회 준비와 시험 문제 출제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오는 길에 교보문고에 들러 구입한 소설책 두 권을 조금 넘겨보았고, 다시 읽으려고 챙겨온 소설책을 본격적으로 읽었다. 

어제 몇 시에 들어가셨어요? 늦게까지 계셨어요?

카페 주인이 그에게 물었다. 

뭐야, 내가 너보다 일찍 들어갔잖아. 

두 사람은 웃었다. 그때 카페 주인은 지나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라고 말했고 지나는 사람이 정말로 그대로 지나가자 손님이 아니었네,라고 말했다. 그때 콘센트가 있는 쪽에 자리가 났고 그는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은 바깥쪽보다 시원하여, 벗어두었던 겉옷을 다시 입었다. 테이블이 따로 없는 좌석이어서 그는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았다. 

가장 먼저 학교 메일을 확인하고요, 그다음에 개인 메일을 확인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빠르게 이메일을 확인한 뒤 쇼핑몰에 접속해 배송일자를 확인한 뒤 조용히 분노했다. 

연휴라는 건 납득이 되는데…

그렇게 말한 뒤엔 상황을 인정하였는지, 정말 납득이 되었는지 열어두었던 모든 창을 닫고 시험 문제 출제에 열중했다. 카페에서는 브라질 재즈가 흐르고 있었고 그러는 동안 시간이 꽤 흘러 처음 주문한 커피를 다 마셨다. 그러자마자 카페의 매니저가 그를 향해 물었다. 

시원한 밀크티 드실 거죠? 

그러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따뜻한 거 먹고 싶네. 

두 사람은 웃었고 박인성 평론가는 정말 따뜻한 밀크티를 주문했다. 밀크티가 나오기 전 누군가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 

어제 재밌으셨어요? 

재밌었는데, 누군가 자꾸 자중하라고 해서 집에 갔어요. 

굳이 그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집에 가야 했을 시간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무튼 나는 여러 잔의 커피를 마시며 카페에서의 그를 관찰했다. 그는 각기 다른 사람들과 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영화와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사랑과 우정과 부모의 죽음과 청바지의 세탁법, 이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그 중간 어디쯤의 밀도로. 잠시 그가 혼자가 되었을 때 나는 물었다. 

근데 납득이라는 단어를 왜 이렇게 많이 쓰세요?

아 그게… 다음을 위해서 그런 것 같은데요. 정답이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이번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언젠가 그는 생활인인 자신과 평론가인 자신의 거리감이 매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눈으로 확인한 기분이었다. 그는 카페에 들르는 다양한 사람들과 간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했으나 대부분은 듣고 있었고, 그러다 넌지시- 상대의 주먹을 펴고 작은 공을 쥐여주듯이 자신의 생각을 덧붙일 때 종종 다정해보였다. 다소 심드렁하긴 해도 생각했던 것만큼 시니컬하거나 비관적이지 않고 오히려 다정해보였던 것이다. 나는 어느 여름 한 작가와 그가 함께 ‘다정함은 상상력이다’라는 두 사람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그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러다 보니까 즉답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좀 생기긴 하는데, 아무래도 말하는 이의 상황이나 맥락 같은 걸 생각해보는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아요. 


5. 다시 상수동에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하여 일상 속 그의 모습을 찍기 위해 다시 상수동에 간 날이었다. 점심 시간이 지난 즈음이라 카페는 많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는 그날도 콘센트가 있는 자리에서 무릎에 올려놓은 노트북을 끌어안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상대와 대화가 종료되면 혼자서 무언가를 했다. 그날 카페에서는 미국의 색소포니스트 스탠 게츠와 브라질의 기타리스트 주앙 지우베르투의 앨범이 흐르고 있었다. 

사진을 좀 찍을게요. 

그러시죠. 

그는 간결하게 말했으나 내가 찍은 사진들에는 문제가 있어 보였다. 흠, 큰일이다,라고 내뱉었던 것 같은데, 그러자 누군가 내게 사진을 찍어야 하는 거면 카페에 있는 카메라로 찍어보시겠느냐고 물어왔다. 

아니 그냥 제가 찍어볼까요? 

그의 친구가 휴대폰 카메라로, 그리고 다른 친구가 카페에 있는 카메라로 그를 찍기 시작했다. 다른 손님들이 찍히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하면서, 그러나 문밖으로 나가면 옥외영업이라는 사장의 주의에 또 조심하면서 말이다. 그 순간 내가 담고 싶었던 것은 그 모든 것이었다. 나 같은 성격으로는 한 시간 앉아 있기도 쉽지 않은 그 카페에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는 얼굴들과 대화를 나누며 웃는 그를 찍는 두 사람. 다른 손님들이 너무 많았기에 찍을 순 없었지만 아마 그 장면은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을 것이다. 

중간에 안 사실이지만 사진을 찍어준 그의 친구 김진홍씨는 그래픽 디자이너였고, 그리하여 아무래도 결과물은 내 결과물과 멀어져 전문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이 원고와 함께 올라갈 사진을 그날 그 시간에 약속하지 않고 만나게 된 그의 친구가 찍어주었다는 사실이, 내가 그를 몇몇 날 관찰하면서 느꼈던 가장 커다란 기분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머리 길이와 수염이 없던 시절 그의 모습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있기에 이 원고에는 김진홍씨가 찍은 사진을 덧붙인다. 사진 속에서 그는 자신을 찍던 두 사람이 웃기는 말을 하여 웃고 있다. 연속적이면서도 유동적일 그의 복잡한 내면까지 관찰하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웃고 있으니 좋은 것 같고, 그리하여 나는 그가 오래오래 즐겁게 쓰고 즐겁게 살 것 같다는 예감을 했다. 그에게는 이미 깨끗하고 어떤 종류의 질서가 있는, 밝은 불빛이 있는 카페가 있으니까.









2025년 10월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기획한 콘텐츠를 선보입니다. 이번 11월 호의 주제는 이주란 편집위원이 참여한 ‘ㅇㅇ씨의 일일’입니다.

누구나 그렇듯, 어느 하루는 한 사람의 일부가 됩니다. 때로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는 삶을 지탱하는 것은 그런 평범하고 시시콜콜한 일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날들은 흘러가기도 하고 오래 머물기도 하고 흘러갔다가 되돌아와, 움직임이 되고 표정이 되고 장면이 되고 문장이 됩니다. 이번 기획에서는 세 명의 작가가 각자 세 명의 작가를 만나 미래의 문장이 될지도 모를 일상 속 순간들을 기록해보았습니다. 익숙한 듯 하지만 문득 낯설기도 할 이야기를 즐겁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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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기획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

[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문장웹진 기획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서수 작년에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자와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특정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었고, 각본 작업에 동참해줄 작가를 구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에 각색 일을 했었기에 지인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내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작가님 이름으로 챗GPT에 검색을 해 봤어요.” 그가 가방에서 파일 홀더를 꺼내더니 A4 용지를 넘기며 말했다. “약력과 작품관 같은 걸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제가 재미있는 걸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서수 작가가 쓸 법한 시놉시스를 한 편 써달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한테 제안했던 그 소재로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각본 작업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이서수라는 소설가가 그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이미 테스트해봤다니…… 나는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상태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나처럼 썼겠느냐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챗GPT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조합해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정확히 내가 만들 법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전개 방향이 모두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를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걸 생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1분도 안 걸렸죠, 뭐. 아시잖아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의 짜임새로 시놉시스를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예측해보니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의 1분과 인간의 1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나보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앞으론 이런 일을 자주 겪을 수 있겠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스토리텔링 산업과 인공지능이 합쳐졌을 때 내가 쓴 소설은 AI에 생성을 위한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과 책 리뷰, 인터뷰 기사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임에도 데이터만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특수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는 AI로부터 시놉시스를 얻는 데서 멈추었고, 이후의 작업은 인간 이서수와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

  • 이서수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딸깍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딸깍 양안다 나는 시 창작과 관련하여 AI를 활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창작자의 윤리라던가 신념 같은 건 아니고, 그저 AI의 시 취향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입력하거나 프롬프트를 통해 자세한 방향을 지시하면 나아지는 편이지만, 아직까지 나의 취향과 AI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내가 다른 이와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와 다름없습니다. AI는 창작 주체라기보다 창작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깝고, 이러한 맥락에서 AI는 키보드나 사전, 아니면 노트와 펜의 역할과 같습니다. 다만 AI는 적극적인 도구입니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것과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독자나 스승, 동료 시인을 포함하여 타 장르 창작자와 철학자, 그리고 세상을 떠난 시인과도 영향 관계에 놓입니다. AI는 이러한 점에서 모든 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AI는 때로 합평자가 되어줄 수 있고,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으며, 시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맥락을 끌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근본적으로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움직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로 형성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나 : 위의 텍스트는 ‘시인의 AI 활용’에 대한 텍스트입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ChatGPT-5.5 : 제가 조금 덧붙이고 싶은 것은, AI에게 “취향”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취향은 인간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AI의 취향은 어떤 미적 신념이나 삶의 이력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럴듯함의 평균값에 가깝습니다. AI는 시를 쓸 때 자주 매끄럽게 만들고, 의미를 지나치게 정돈하고, 이미지들을 문학적으로 보이게 배열하고, 감정의 결론을 너무 빨리 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AI의 기본 취향은 “좋은 시”라기보다 좋은 시처럼 보이는 문장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에게는 그게 참을 수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AI는 적극적인 도구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는다. AI는 도구인데, 기존 도구와 달리 도구인 척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인 척도 합니다. 키보드는 수동적이고, 사전은 정적인데, AI는 말을 걸고 반응하고 제안하고 반박하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능동적이고, 그렇다고 창작 주체라고 하기에는 책임과 욕망과 고유한 삶이 없습니다. 나는 AI가 주체적으로 시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취향에 맞는 시’를 언젠가 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나의 영향 관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AI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2020년에는 문득 이런 생

  • 양안다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1) 노대원 AI 이후, 해석의 미래는? 평론가는 문학 텍스트와 평론뿐만 아니라 문학 이론을 비롯해서 여러 인문학 저서나 논문을 읽어야 할 일이 많다. 특별히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로 된 책과 논문도 읽어야 한다. 구글 번역이 나오고서 글과 책을 번역해 읽는 일에 큰 도움을 받아왔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엉뚱한 번역 표현이 자주 발견되었다. 그러다 ChatGPT가 나오기 전, 지금으로부터 거의 십여 년 전에 구글 번역의 성능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느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평론가로서 AI를 진지하게 걱정했다. 구글 번역이 혁신되었다고 한다. 이것도 '특이점'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기계번역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해석자로서, 다만 번역의 미래만을 생각할 것은 아니다. 번역과 해석은, 1차 텍스트에서 2차 텍스트로의 작업이란 점에서 같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이후 해석의 미래는 어떨까? 해석은 예술이지만 번역 역시 예술이지 않았던가? 텍스트와 해석(비평)의 풍부한 '병렬 코퍼스'가 인공지능에게 주어진다면 해석의 자동화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번역가들은 번역의 미래를 고민한다. 해석자들은 해석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가? (2016년 11월 19일) 이 글을 쓰면서, 링크를 걸어 인용한 글은 번역가 노승영의 「알파고와 번역의 미래」였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광고를 보거나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웹 문서뿐 아니라 잡지, 단행본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 번역가의 번역은 인쇄술 등장 이전의 책이 그랬듯 소수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가 되면 극소수의 번역가만 살아남을 것이다. 기계번역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는 번역가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제품이 수공예로 소량 생산되는 고급 제품이 구별되듯 기계번역과 인간의 번역이 구별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어떤 번역가가 살아남을까?”2) 이 예상은 거의 정확하게 실현되었다.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번역가가 생각보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 어쩌면 그 예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AI 번역은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이 글을 페이스북에 남기면서, 친구와 대화를 나눈 것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 원고료는 너무 싸기 때문에 인간 작가를 상회하는 탁월한 AI를 개발하는 비용이 더 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자조적인 농담을 던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AI가 문학을 위협한다 해도, 나는, AI와 문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작업을 도전적으로 수행하는 쪽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얼마 뒤(ChatGPT 출시 몇 해 전에), 제주도에 AI 관련 서머 스쿨이 있어 방문한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김성훈 교수를 만나 점심 식사를

  • 노대원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 곽재식 인터넷에 누가 “자동차 엔진오일이 왜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엔진오일에 정말 돈을 많이 들일 필요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올렸다고 해 보자. 이런 덧글을 달면서 기대하는 것은 엔진오일에 대해서 잘 아는 자동차 수리 일을 하는 사람이나 엔진오일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전문 지식을 담아 써 주는 대답이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오래 자동차를 운전해 본 사람들이 각자의 엔진오일에 대해 이야기 해 주는 경험담을 들어 볼 수 있기를 기대할 것이다. “엔진오일 우습게 보다가 저는 큰코다친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 비슷한 답을 기대할 거라는 이야기다. 이런 기대는 무리를 지어 살면서 서로 경험과 기억을 언어로 공유하면서 발전해 온 사람이라는 종족이 원시 시대 때부터 갖고 있던 아주 오래된 습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한동안 이런 덧글을 달면, 부리나케 달려와서 “챗GPT에게 물어 봤더니, 이렇게 답변해 주더군요.”라고 자기가 인공지능에게 물어 본 내용을 복사해서 덧글로 붙여 주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덧글에 엔진오일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줄 써 두어서 열심히 읽어 보았는데 다 읽어 갈 때쯤 보니까 맨 마지막에 “이상은 제미나이에게 물어본 결과입니다”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덧글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거의 모든 곳에서 많이도 나왔다. 도대체 이런 덧글은 왜 달리는 걸까? 질문을 했던 나는 챗GPT나 제미나이에게 물어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살펴보자면 대부분의 덧글은 그야말로 순수한 의도로 달린 것이다. 질문을 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고, 자기도 그 문제에 대해 궁금하다 보니 대규모 언어모델, 즉 LLM 방식으로 운영되는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결과를 받아 본 뒤에 그 결과를 남들과 같이 공유해 보려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심정에서 나온 동기는 조롱받을 이유도 없고 나쁜 마음이라고 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계각층에서 LLM 방식의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거기에 다른 마음이 결합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는 것 같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최신 기술을 이용하고 있다는 뿌듯함이다. 요즘 그렇게 유행이라고 하는 최신 첨단기술인 인공지능을 내가 이렇게나 잘 이용해서 남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을 느껴서 “나는 요즘 뭐든 인공지능에게 물어봐. 너무 편하고 좋거든!”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게 된다는 뜻이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다 바꾸어서 완전히 다른 사회가 탄생할 거라는 이야기를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온갖 매체에서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남보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감각 속에는 거창한 환상마저 슬그머니 서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앞서갈 거라는 환상이다. 지금 치열한 경쟁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

[문장웹진 다시 읽기]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 ― 조연정, (2017년 8월호 수록) 김진선 어느 강의 시간, 교수님께서는 신입생들에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면을 소개해 주셨다. 많이 읽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그날 이후 인터넷 즐겨찾기 목록에는 《문장웹진》이 빠지지 않고 있다. 햇수로 17년, 매달 1일이면 새로 올라온 작품들을 접했다. 나름 놓치지 않고 따라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다시 보니 아닌 일이다. 맞다, 이것은 고해성사. 나의 죄를 고합니다. 나는 장르 편식이 있어서 시를 제외한 소설, 비평, 기획 등은 대체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문장웹진 다시 읽기’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다시 읽기’가 아닌 셈이다. 그러니까 이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처음 마주한 글을 여러 번 살피고, “(다시) 읽을 기회가 생겨서 정말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마침내 말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시작은 2017년 8월호에 수록된 조연정의 이라는 비평이다. 평소 어렵다고 생각한 비평만큼은 피하거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간의 죗값을 달게 받는 거 같다. 이 글은 윤이형 소설가가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로서 고민하는 몇 가지 질문과 함께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중심으로 문학적 재현,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논의의 과정에서 《문장웹진》 2017년 4월호에 수록된 조강석의 에 의문을 표하며,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부정적 평가에 정면으로 맞선다. 먼저, 윤이형 소설가의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앞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소설을 많이 ‘써야만’ 할까? - 앞으로 쓸 내 소설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순응하거나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는 여성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일까? - 나는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에 대한 어떤 멸시나 비하도 ‘현실 그대로’ 작품 속에 재현하면 안 되는 것일까? 꼭 필요해서 그런 식의 재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럴 경우, 반드시 거기에 내가 작가로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명시해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 이런 고민들을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혹은 각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내가 과잉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그저 여성 트위터리안-독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들을 ‘타인’으로 여길 만큼 나는 그녀들에게서 먼가?1) 작은따옴표 안에 들어간 말(밑줄은 인용자 강조)이 유독 신경 쓰이는 것은 왜일까. 이 질문들은 의무(‘써야만’), 제약(‘안 되는’), 판단(‘비판적인’), 자기인식(

  • 김진선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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