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
- 작성일 2026-07-01
- 댓글수 0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딸깍
양안다
나는 시 창작과 관련하여 AI를 활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창작자의 윤리라던가 신념 같은 건 아니고, 그저 AI의 시 취향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입력하거나 프롬프트를 통해 자세한 방향을 지시하면 나아지는 편이지만, 아직까지 나의 취향과 AI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내가 다른 이와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와 다름없습니다. AI는 창작 주체라기보다 창작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깝고, 이러한 맥락에서 AI는 키보드나 사전, 아니면 노트와 펜의 역할과 같습니다. 다만 AI는 적극적인 도구입니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것과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독자나 스승, 동료 시인을 포함하여 타 장르 창작자와 철학자, 그리고 세상을 떠난 시인과도 영향 관계에 놓입니다. AI는 이러한 점에서 모든 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AI는 때로 합평자가 되어줄 수 있고,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으며, 시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맥락을 끌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근본적으로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움직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로 형성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나 : 위의 텍스트는 ‘시인의 AI 활용’에 대한 텍스트입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ChatGPT-5.5 : 제가 조금 덧붙이고 싶은 것은, AI에게 “취향”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취향은 인간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AI의 취향은 어떤 미적 신념이나 삶의 이력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럴듯함의 평균값에 가깝습니다. AI는 시를 쓸 때 자주 매끄럽게 만들고, 의미를 지나치게 정돈하고, 이미지들을 문학적으로 보이게 배열하고, 감정의 결론을 너무 빨리 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AI의 기본 취향은 “좋은 시”라기보다 좋은 시처럼 보이는 문장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에게는 그게 참을 수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AI는 적극적인 도구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는다.
AI는 도구인데, 기존 도구와 달리 도구인 척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인 척도 합니다. 키보드는 수동적이고, 사전은 정적인데, AI는 말을 걸고 반응하고 제안하고 반박하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능동적이고, 그렇다고 창작 주체라고 하기에는 책임과 욕망과 고유한 삶이 없습니다.
나는 AI가 주체적으로 시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취향에 맞는 시’를 언젠가 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나의 영향 관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AI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2020년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와 같이 숨을 쉬고 살아가는 해외 시인은 어떤 시를 쓰고 있는 걸까?’ 어쩌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처음으로 코로나가 크게 확산하던 시기에 대구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쌓이고 쌓인 독서 경험으로 인해 새로운 감응이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동시대의 해외 시인이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나는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가능한 많은 정보를 취합하고자 했습니다.
예전에 문장웹진에서 <미국의 현대 시인>이라는 기획이 진행된 적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제이크 레빈(Jake Levine)은 여러 시인의 작품 및 인터뷰를 통해 국내 시 독자들에게 그들을 소개하였습니다. 나는 제이크 레빈 덕분에 리처드 사이켄(Richard Siken)의 「여우들의 전쟁」을 알게 되었고, 시를 처음 읽어 본 순간처럼 새로운 감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리처드 사이켄의 시집 『Crush』와 『War of the Foxes』를 구매하였습니다. 물론 번역본이 없었고, 나는 영어에 능통하지 않았습니다. 원서를 손쉽게 번역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당시에 AI는 물론이고 텍스트 인식 기능도 없었습니다. 나는 리처드 사이켄의 두 권의 시집을 타이핑하기 시작했습니다. 타자가 빠른 편이라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두 권의 시집을 모두 타이핑하여 텍스트 파일을 만드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구글 번역과 파파고의 차이점을 알고 계신가요? 물론 나도 언어화하여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적어도 시를 번역할 때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는 리처드 사이켄의 시집 두 권을 구글 번역과 파파고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 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두 번역기 모두 한 번에 번역할 수 있는 텍스트의 양이 3,000자 내외였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두 번역기의 성능은 지금보다 좋지 않았으므로, 번역 오류인 부분은 일일이 사전을 뒤져가며 수정하는 과정도 거쳐야 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나에게는 즐거움이었으며, 온전치 않게 번역된 텍스트를 읽는 것 또한 기쁨이었습니다.
이제는 딸깍, 하면 모두 끝나는 일입니다. 물론 AI의 번역이 맥락을 온전히 이해한 채로 이루어진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일을 손쉽게 해준다는 것이며, 번역 수준이 내가 시를 감상하는 데에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평일에 나는 사무실에 출퇴근하며 살고 있습니다. 출근하는 길에 내가 하는 루틴 중 하나는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외국 시’ 파트를 출간일순으로 정렬하여 신간이 나왔는지 확인하는 일입니다. 기왕이면 AI보다 번역가의 번역이 독서할 때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출판 시장에 대해 무지하지만, 적어도 시가 다른 장르보다 우선으로 번역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시는 상업성이 떨어지고, 어쩌면 시의 특성상 번역에 있어서 곤란한 점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시는 다른 장르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러시아계 미국인인 조지프 브로드스키(Joseph Brodsky)는 1987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입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최혁순의 번역을 거쳐 세종출판공사에서 펴낸 『아름다운 시대의 종말』을 통해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절판되었다는 점은 둘째치고, 인터넷 서점조차 해당 도서가 검색 결과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책에는 종종 있는 일로 보입니다. 2026년 6월 기준으로 인터넷 서점에 조지프 브로드스키를 검색하면 시집이 아닌 에세이 한 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노벨문학상이 문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그래도 노벨문학상인데……’와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노벨문학상인데……’ 그러니 여타 다른 외국 시인의 번역본을 읽어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모로 ‘딸깍’은 나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셈입니다.
현재에도 나는 외국 시를 찾아 읽고 있습니다. ‘현대 시인’을 포함하여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시집을 원서로 구매하여 번역 과정을 거친 뒤에 감상하고 있습니다. 2020년과 2026년의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원서를 타이핑하지 않아도 되고, 3,000자 내외의 속박에 묶이지 않아도 되며, 사전을 찾아보는 일도 극히 줄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원서를 재단기로 잘라 스캔기로 스캔하거나 텍스트를 추출하여 AI에게 번역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AI 덕분에 로라 라이딩(Laura Riding)의 산문을 읽었습니다(정확히는 읽다 말았습니다). 존 애쉬베리(John Ashbery)의 시집 『A Wave』를 인상 깊게 읽었으며, 현재는 루이스 주코프스키(Louis Zukofsky)의 시집 『“A”』를 읽고 있습니다. 그럼 그다음에는 무엇을 읽어야 하나요?
모두 알고 있듯이 사용자의 질문이 상세할수록 AI는 정확한 답변을 제공합니다. 나는 AI에게 해외 시인을 추천받는 일을 즐깁니다. AI가 없었다면 나는 해외의 ‘현대 시인’을 포함하여 어떠한 시인을 알아내는 데에도 오랜 시간을 소모했을 것입니다. 모르는 상태에서는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요. 심지어 겨우 알아낸 시인의 작품이 나와 취향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AI에게 내가 읽고 싶은 작품의 조건을 상세하게 전달합니다. AI는 여러 시인의 목록과 더불어 각각의 특징, 추천하는 이유 등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답변을 제공합니다.
나는 AI에게 나의 시를 맡기지는 않지만, AI를 통해 타인의 시에 도착합니다. AI는 알지 못했던 이름과 아직 번역되지 않은 문장들로 나를 데려다줍니다. AI가 놓아준 교량은 앞으로 더 넓고 견고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교량은 도착지를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를 데려다줄 뿐입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읽고, 무엇을 오해하고, 끝내 무엇을 내 언어의 일부로 받아들일지는 여전히 나의 일입니다.
AI가 데려다준 “타인의 시”는 정말 우연한 타자인지, 아니면 알고리즘이 이미 정렬한 타자인지 나는 모릅니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문장 앞에 데려다준다고 할 때, 그 문장은 원문 그대로의 낯섦으로 오는지, 아니면 AI가 임시로 만든 해석의 표면을 통해 오는지 나는 모릅니다. AI는 발견을 돕지만 영향은 내가 감당합니다. AI는 문 앞에 데려가지만 문턱을 넘은 뒤의 변형은 나의 몫입니다. 그리고 이용하는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이것은 창작과 독서, 모두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 : 당신은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ChatGPT-5.5 이용자에게 결정적인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그 정보와 부딪힌 뒤 생기는 오독, 저항, 취사선택, 변형입니다. 어떤 시를 읽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 있고, 반대로 잘못 이해한 한 문장이 자기 언어의 기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은 AI가 대신할 수 없습니다.
AI는 문 앞에 데려가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문이 어떤 문인지 미리 설명하고, 문패를 바꾸고, 문 안의 풍경을 요약해버립니다. 그러므로 이용자, 즉 시인은 AI가 데려다준 문 앞에서 곧장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이 문은 누가 고른 문인가. 이 문에 붙은 이름은 누가 번역한 것인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문인가, 문에 대한 설명인가.”
최근에 한 친구가 물은 적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어느 시대에 살고 싶어요?” 나는 그때 ‘핸드폰이 없던 시대’라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원할 때마다 언제든 상대와 연락이 가능한 시대보다 한 번의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시차가 필요한 시대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딸깍, 하면 많은 것이 해결되는 이 시대에 시는 유독 느린 속도로 세계와 연락을 주고받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일이 더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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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호 기획 콘텐츠 ‘AI와 문학’에서는 AI와 작가가 맺고 있는 관계를 들여다봅니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AI를 사용하고, 때로는 사용하기를 주저할까요? 그 선택들이 작가의 작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이번 기획에서는 변화하는 창작 환경에 놓인 작가들의 고민과 작업 방식에 대해 청해 듣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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