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거대한 사랑의 기록

  • 작성일 2026-02-01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거대한 사랑의 기록   

- 김명순 창작집 『생명의 과실』


박소란

사진1. 『생명의 과실』 (한성도서주식회사, 1925) 표지


   지난 2025년은 『생명의 과실』(한성도서주식회사, 1925)이 출간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였다. 『생명의 과실』은 김명순(金明淳, 1896~1951 추정)이 쓴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창작집이다. 국내 서지 기록에 등록된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 문학사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명의 과실』도 김명순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때문에 100주년은 터무니없이 고요했다. 별다른 의식이나 언급 없이 우리 문학장은 지난 한 해를 지나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전 김명순이 겪어야 했던 갖가지 고난과 핍박을 떠올리게 된다. 혹여 김명순이라는 선구적 예술가를 아직까지도 과거 그늘진 그 자리에 세워 둔 것은 아닐까, 못내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조금만 검색을 해 봐도 대략의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김명순은 쉽게 소거될 수 없는 이름이다. 1917년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문예지 『청춘』의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친 한국 문단 최초의 여성 작가다. 1920, 30년대 누구보다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친 김명순은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고 보들레르의 시를 번역하는 등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피아노를 잘 치고 독일어로 곡을 만들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신문기자, 영화배우로도 활동할 만큼 다재다능했다. 

   이처럼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기생 출신의 ‘첩'이라는 이유로, 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이유로, ‘자유연애’를 주창한다는 이유로 온갖 조롱을 받았다. ‘부정한 혈액’ ‘문란한 여자’ 등 모욕적인 꼬리표가 일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공부와 집필에 힘썼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등 힘겨움이 잇달았고, 결국 1951년경 일본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홀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김명순은 생전 시, 소설, 수필, 희곡(각본) 등을 한데 묶은 두 권의 창작집을 냈다. 『생명의 과실』과 『애인의 선물』(회동서관, 1929 추정)이 그것이다. (세 번째 창작집을 준비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과적으로 불발되었으며, 때문에 창작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도 상당하다.) 이 중 『생명의 과실』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 여성 작가 최초의 단행본으로 그 의미가 각별하다.    



   1

 

   『생명의 과실』에는 등단작 「의심의 소녀」를 포함해 소설 2편, 시 24편, 수필(목차에는 ‘감상(感想)’이라 표기되어 있다) 4편이 수록되었다. 소설 「돌아다볼 때」나 시 「유언」, 「저주」, 「탄실의 초몽」, 「유리관 속에」, 수필 「대중 없는 이야기」, 「네 자신의 위에」 등의 빼어난 작품들이 모두 이 첫 창작집에 담겨 있다. 시집이나 소설집과 같은 하나의 장르에 국한된 형태가 아니라 여러 장르의 작품이 두루 담긴 창작집 형태 또한 김명순이라는 작가의 개성에 걸맞은 다분히 현대적인 방식이라 여길 만하다.  

   책의 표지를 넘기면 곧장 내지 제일 첫 페이지 상단에 적힌 ‘生命의 果實’이 눈에 들어온다. 이어 바로 그 위에 우뚝 자리한 ‘金明淳․創作集’이란 글자가 보인다. 같은 페이지 하단에는 ‘京城 漢城圖書株式會社 發行’이라고 적혀 있다. 이어 1~3페이지에 시, 수필, 소설 순으로 목차가 게재되어 있고, 그 바로 앞 페이지에는 ‘머리말’이 실려 있다. “이 단편집을 오해받아 온 한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과 여름(열매)으로 세상에 내노음니다(내놓습니다)”. 읽을 적마다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문장이다. 아직 재래의 인습이 지배적이던 시절, 자기 발성으로 새로운 신념을 주창하는 여성 창작자로서 그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그런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창작에 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각 장르별로 고루 아끼지만, 그중에서 먼저 시 「유언」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 시를 통해 나는 처음 김명순이라는 작가에게 매료되었다. 


   세상이여 내가 당신을 떠날 때  

   개천가에 누웠거나 들에 누웠거나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하시오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있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하시오,

   그러면 나는 세상에 다신 안 오리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작별합시다.

-「유언」(1924) 전문


   7~8년 전 어느 앤솔러지에선가 읽은 것 같은데, 지금은 그만 그 책의 제목도 잊어버렸다. 다만 이 시를 읽자마자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던 기억만은 선명하다. 문장마다 깃든, 입술을 잘끈 깨물듯이 참아 내는 울음을 누가 쉽게 지나칠 수 있을까. 아, 이건 진짜구나! 좀처럼 본 적 없는 진정과 절절한 몸부림을 엿본 순간, 매료되었다고 할까, 감염되었다고 할까.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시는 1924년 5월 29일 「조선일보」 지면에 처음 발표된 것이었다. 

   「유언」을 만난 후 나는 몇 년에 걸쳐 김명순의 전작을 탐독했다. 지금은 절판된 전집을 구해 열어 보기도 하고 작가가 작품을 발표한 옛 신문이며 잡지를 뒤적여보기도 했다. (알다시피 요즘은 컴퓨터 앞에 가만히 앉아서도 이런 일이 능히 가능하므로.) 그렇게 다소 부산스레 여러 작품들을 만난 뒤에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김명순의 작품을 현대어로 편역하는 작업에까지 도전하게 되었다. 2023년 2월 출간한 김명순의 산문집 『사랑은 무한대이외다』를 시작으로 2025년 6월과 7월에 잇달아 출간한 소설집 『내 마음을 쏟지요 쏟지요』, 문장집 『사랑하는 이 보세요』가 그 결과물이다. 

   편역 준비 과정에서 나는 『생명의 과실』과 『애인의 선물』 원본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기관을 수소문했고, 얼마 뒤 근대서지연구소의 서지학자 오영식 선생님을 통해 원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명의 과실』의 경우 아직 몇 권의 원본이 남아 있고, 1970년경 문학사상사에서 ‘한국현대시 원본전집’ 시리즈로 발간한 복각본 또한 있지만 『애인의 선물』 원본은 오직 한 권뿐이다. 그것을 소지하신 분이 오영식 선생님이다.) 

   처음 근대서지연구소에서 『생명의 과실』을 대면한 당시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누렇게 변색된 낱낱의 페이지를 조심스레 넘기자 금세 김명순이 살던 100년 전 그 시절로 거슬러 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조금만 세게 만지면 곧장 으스러질 것 같은 종이를 딛고 있음에도 한 글자 한 글자가 뿜어내는 위용은 대단했다. 당시의 책이 으레 그렇듯 세로쓰기 방식,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이 이어지는 우종서(右縱書)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데다 한글과 한자가 뒤섞여 있는 등 오늘날의 관점에서라면 결코 읽기 수월하다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 자리한 단어와 문장 들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으로 그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내게 오영식 선생님은 왜 하필 이제는 완전히 잊힌 이 작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인지 물으셨다. 여러 대답이 속에서 맴도는 가운데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저 “작품이 좋아서요” 하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생명의 과실』 속 「유언」은 개고를 거친 모습이다. 1924년 조선일보 발표작과 비교했을 때 시의 첫 대목과 마지막 대목을 비롯 부분부분 달라진 점들이 보인다. 언어나 감정에 있어 다소간 정제된 면이 있다. 초고 버전과 개고 버전, 두 버전을 비교해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독자로서 누리는 뜻밖의 즐거움이라 하겠다.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할 때

   개천가에 고꾸라졌든지 들에 피 뽑았든지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구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그러면 서로 미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된다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유언」(1925) 전문


   현재 『생명의 과실』 원본을 직접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김명순의 문장을 원문으로 확인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출판사 핀드가 지난해 김명순이 낸 두 권의 창작집을 복원했기 때문. 오영식 선생님을 통해  『생명의 과실』과 『애인의 선물』 원본을 확인한 뒤, 당시 창작집의 규격이며 장정까지 고스란히 살려 냈다. (아쉽게도 『애인의 선물』 원본은 판권란을 포함한 뒷부분 몇 장이 소실된 상태로 남아 있어 이 책 마지막에 실린 각본 「두 애인」의 결말 내용은 확인이 불가하다. 출판사 핀드는 복원 과정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몇 곳의 도서관을 수소문했고, 어렵사리 「두 애인」이 발표된 문예지 『신민』 36호(1928년 4월)를 찾아 그 누락된 내용을 메웠다.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그간 근대 여성 작가의 단행본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더욱이 근대 여성 작가의 단행본을 복원하다니, 아마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한국 여성 작가의 계보를 되짚고 한국문학의 보배로운 유산을 발굴한 뜻깊은 작업이라 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2. 『생명의 과실(복원본)』(핀드, 2024) 표지



   2

 

   『생명의 과실』 속 한 편 한 편을 찬찬히 읽어 나갈수록 그 속에 담긴 겹겹의 사유는 가슴속에 거센 파문을 일으킨다. 사는 내내, 쓰는 내내 치열한 내적 전투를 멈추지 않았던 김명순의 작품은 더없이 처연하고 동시에 굳세며, 무엇보다 깊다. 작품을 통해 보건대, 여러 불행의 증거에도 김명순은 결코 지치거나 꺾이지 않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절망하고 비탄하면서도 끝내 굳건한 마음으로, 의지로 삶을 일으키는 사람.


   아- 비웃는 이들이여 당신들이 나를 실연자라고 오래 비웃어왔다. 하나 불행히도 당신들은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한 처녀가 불의의 능욕을 받고 살기를 원해서, 썩은 기둥으로 기왓장을 받쳐온 것을 도무지 헤아려주지 못했다. 

   당신들은 나를 비웃기 전에 내 운명을 비웃어야 옳을 것이다. 나는 이 지경이 겨우 이르렀어도 힘 있는 대로 싸워왔노라. 

- 수필 「대중없는 이야기」 부분


   대체 그 근저에 무엇이 있었기에? 『생명의 과실』을 비롯 김명순의 다양한 작품들을 짚어 보자면 그는 분명 혼자였으나 실은 ‘사랑’과 함께였구나 알 수 있다. 마치 가슴 깊숙이 하나의 씨앗을 심어 둔 듯이. 그 하나만을 정성으로 보살펴 가꾸듯이.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는 사랑을 버리지 않았구나. 그의 삶은 사랑으로 기어코 충만할 수 있었구나. 김명순이 그린 사랑에 대해 헤아릴수록 이 거대한 사랑이야말로 김명순이 수확한 ‘생명의 과실’과 동의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련 씨, 사람은 절대로 누구와든지 꼭 육신으로 결합해야만 살겠다고는 말 못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정을 유통시켜보지 못하고 이 세상에 대항하여 발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능할 것이지만 우리는 한 대상을 앎으로 그 주위의 모—든 것까지 곱게 보지 않습니까.” 

- 소설 「돌아다볼 때」 부분


   강렬한 만남 이후 남몰래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된, 「돌아다볼 때」 속 주인공 소련과 효순은 결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안착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랑의 감정을 간직하는 것으로 서로의 삶을 보다 성숙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김명순이 그린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보다 훨씬 광의의 개념이다. 동경이자 이상이자 신념인 것. “육적 충동과 호기심 만족에 불과한”(희곡 「의붓자식」) 일반의 ‘사랑 운운’과는 완전히 다른 것. 결혼과 같은, 자기 결정권이 박탈된 낡은 사회 제도나 도덕관념과도 철저히 대척하는 것이다. 자유를 향한 분투로 봐도 무방하겠다. 

사랑은 결국 그 누구도 아닌 ‘나’의 것. 내가 나로서 온전하고자 한 의지. 오롯한 한 존재로서 자유로이 삶을 일구고 올바로 세우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을 향한 거센 집중. 이로써 빚어진 사유는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자신에 오롯이 몰두하며 사색하는 한 인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숭고함. 


   탄실아 너는 간다. 네 한몸의 영화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서 너는 간다. 그리고 입을 다문다. 

   오오 탄실아 탄실아.

   네 한몸의 문제만 풀러 너는 간다. 

- 수필 「네 자신의 위에」 부분 


   사랑으로 충만한 ‘탄실’(김명순의 호이자 대표 필명)이 향하는 곳은 다른 어디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간 자신을 괴롭히던, “값없이 던져지던 남의 생활의식 남의 감정” 따위 “전부 뽑아내어 던져”(수필 「겨울 앞 독백」)버리고 나 자신을 위해, 나 “자신 위에 고요히 돌아가 정밀히 생각해보”(「네 자신의 위에」)고자 하는 것이다. 오직 이 하나의 사실을 새기는 것만으로도 그의 작품이 지닌 깊이를 확인하기란 충분하겠다. 

   이처럼 김명순이 일군 문학의 힘은 의심할 나위 없이 건재하다. 그러나, 그 힘과는 별개로, 김명순을 생각하는 이따금 나는 사무친다. 힘겨운 매 순간 그가 혼자였으리라는 짐작 때문에. 생의 마지막까지 가정이나 국가 같은 최소한의 울타리도 그에겐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로서, 그리고 자유롭고자 한 한 인간으로서 전심으로 분전했기에 더욱 외로웠을 그 삶을 떠올리게 된다. 

   올해 2026년은 김명순 탄생 130주년이 되는 해다. (그의 생일은 1월 20일!) 지난해에 이어 올 한 해 그의 작품을 읽고 그의 책을 되살리는 일이 더 중하게 여겨진다. 이제 우리에게는 읽는 일이 남았다. 어떻게 해서든 읽는 일이 가장 필요한 것이다. 김명순, 그 빛나는 사유의 힘을 믿고 독자로서 부지런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문득 소설 「돌아다볼 때」 속 주인공 소련의 방 머리맡에 족자로 걸려 있다는 롱펠로의 시 「화살과 노래」를 떠올린다. 그 시에는 허공에 쏘아 올린 화살도, 허공을 향해 부른 노래도 땅에 떨어져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시의 마지막은 이렇다. “아주 오랜 뒤 한 그루 참나무 속에서 / 나는 그 화살을 찾았네, 여전히 부서지지 않은 채로 / 그리고 그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 한 친구의 마음속에서 다시 찾았네.” 『생명의 과실』과 100년 전 김명순의 빼어난 작품들은 오늘날의 친구들, 독자들에게 조금도 부서지지 않은 채로 가닿을 것이라 믿는다. 

  『생명의 과실』에 수록된 수필 「계통 없는 소식의 일절」의 한 대목을 전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사랑은 지극히 드물게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 완성과 같이 드물게 있습니다. 아득거리고 변하고 속이는 것이 사랑이 아님은 당연합니다.

   참사랑을 얻으면 노래하지요. 그때까지 밀어(密語)입니다.



 2025년 10월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기획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2월호의 기획 콘텐츠 ‘단 한 권의 책’에서는 시인, 연구자, 학예사 3인이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을 독자분들께 소개합니다. 김명순의 『생명의 과실』부터 염상섭의 『해바라기』, 류달영의 『소심록』까지. 각각의 책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기획

[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

[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 진행 : 윤재민 평론가 패널 :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 윤재민 안녕하세요. 문장웹진 9월호 비평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사회를 맡은 문장웹진 편집위원이자 평론가 윤재민입니다. 그리고 오늘 패널로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를 모셨습니다. 사실 이렇게 세 분을 모신 이유는 전적으로 저의 사심 때문인데요. 그간 제가 글이나 활동하는 것들을 인상 깊게 보았고, 궁금했던 분들 모신 겁니다. 참석자 분들 모두 간단하게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어요. 언제 데뷔했고, 어떤 활동을 주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현재 평론가부터 먼저 하실까요? 현재 안녕하세요. 저는 202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 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활동을 시작한 조현재라고 합니다. ‘현재’라고 성을 떼고서 필명 아닌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교 안녕하세요. 저는 2022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안희연론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도 원고에 넣을 약력을 요청받으면 이 정도로만 저를 소개하곤해서 어떤 말을 더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미진 안녕하세요. 저는 2025년에 김기태론으로 창비 신인 평론상을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한 이미진이라고 합니다. 이제 1년이 된 것 같고, 조금씩 평론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생활인으로서 돈을 벌고 있고요. 그렇습니다. 윤재민 오늘 이렇게 모신 세 분. 연차가 현재 평론가가 3년, 그리고 최선교 평론가가 4년 차 정도 됐죠? 2022년도니까 4년. 그다음에 이미진 평론가 같은 경우는 1년 되셨지요? 이미진 아마 발표 기준으로는 1년이 조금 안 된 것 같습니다. 윤재민 이제 1주년 돼 가시는군요. 세 분들 모두 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인데, 그중에서 재미있는 글 많이 쓰시고 계시거나, 그럴 거라는 믿음이 드는 분들과 대화 나눠보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거든요. ‘신인 비평가’로서 가지고 계시는 여러 가지 고민이나 문제나 목표나 욕심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궁금하고요. 우리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각자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지평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일단, 비평가로 데뷔하게 된 각자의 계기가 있을 텐데요. 최선교 평론가 먼저 말씀해 주실까요? 최선교 평론가가 된 계기를 기계적으로 기술해 보자면 국문과 대학원 수업 과제로 처음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왜 평론을 계속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제 성향 때문인 듯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떤 것에 심취하고 매료된 상태를 무척 즐겼어요. 그리고 내가 그것에 매료되었는지 꼭 설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확하게 내가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일이 무척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저는 시나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

[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