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작가
- 작성일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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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 기획-Game & Writer]
게임과 작가1)
임가영
예술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20대 중반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모두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는 그림이 좋다거나 무언가를 만드는 게 좋다는 이유로 예술을 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현대미술’이 좋았다. 더 정확하게는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경계 설정에 관여하는 시도들이 좋았다. 더불어 ‘작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도 좋았다. 위대한 창작자의 숙련된 솜씨와 천재적 재능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들을 작품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관객이나 독자들에게 창작의 공을 돌리는 시도들이 공감이 갔다.
말하자면 나는 ‘저자의 죽음’을 목격하기 위해 현대미술을 택했다. 예술을 하기 전 나의 전공은 정치외교학이었고, 처참한 학점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관심이 갔던 과목이 ‘정치철학’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그때까지 나는 그림을 그려(웹툰 어시스턴트와 게임 캐릭터 원화가) 돈을 벌고 있었는데, 한 번도 나 자신을 창작자로 생각한 적이 없었고 한 번도 내 그림에서 예술 비슷한 것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래서 미대를 들어갔고,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들에 대한 작업을 하기 위해 애썼다. 미술 갤러리 안에서 카레를 끓여 나눠 먹거나 지역의 경찰과 청소년이 다 같이 둘러앉아 청소년 범죄율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작품들을 리서치하고, 이러한 참여형 미술을 둘러싼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와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 그랜트 케스터(Grant Kester)의 담론적 논쟁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어렴풋이, 나는 그게 내가 원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했고 역량이 되는 한도 내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이론은 이론일 뿐인 듯했다. 저자의 죽음이라는 말을 믿고 예술을 시작했는데, 저자는 좀처럼 죽지 않았던 것 같다. 한 교수는 술자리에서 내게 “너는 아직 작가는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작가는 ‘자기 일을 책임지고 해낼 수 있는 사람, 혹은 그에 준하는 물질적, 비물질적 중심점’처럼 느껴졌다.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준 다음 그 과정을 포트폴리오에 잘 기록해서 다음 전시 기회를 얻어낼 수 있는. 다른 교수는 작가가 에고가 강하고 별나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나는 작가가 그런 것인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대미술은 일종의 폰지 스킴(Ponzi scheme)처럼 나를 가짜 약속으로 끌어들였던 걸까? 아니면 나는, 남들에게는 당연한 것을(아무리 이런저런 반작가적 실천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이나 담론이 존재한다 해도 결국 제도는 안정적인 창작자–수용자 모델 속에서 지속되며, 이것은 사실 ‘저자의 죽음’ 자체와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 같은 걸)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걸까?
학교를 나왔을 때 나는 더 이상 작업을 할 기력이 없었고, 집에서 은둔하다시피 하면서 게임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흘러, 문득 둘러보니 너도나도 전시 서문과 작품론에서 관객의 해방을 말하던 때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유행은 변하고, 한때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당연히 흘러가 버리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작가가 죽는 것을 한 번도 제대로 체험해 보지 못했는데, 이 기획은 어느새 내가 미처 따라잡지 못한 어딘가로 가버린 것 같았다.
그러다 근래, 나는 게임에 대한 연구들 속에서 내게 익숙한 참여예술이 다시 등장하는 것을 발견했다. 저자와 관객의 문제에서 게임은 예술과는 당연하게도 매우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 참여예술이 관객의 자리를 새삼스럽게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면, 게임은 처음부터 ‘참여’를 전제로 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게임은 이미 완성된 참여예술인 걸까? 게임 연구에서 등장하는 예술 사례들을 발견할 때마다, 어쩌면 게임이야말로 저자의 죽음관객의 참여라는(나로서는) 미완의 프로젝트를 이어갈 수 있는 매체일까 기대하게 된다. 과연 어떨까?
C. 티 응우옌(C. Thi Nguyen)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2)』은 여기에 직접적인 답을 내놓는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사용자가 어떤 작품을 경험하려면 실질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규정된다면, 그 작품은 참여예술(participatory art)이다.”3) 따라서 감상을 위해 플레이가 요구되는 게임 역시 일종의 참여예술이다. 한편 참여예술가들은 상황을 만들지만, 그것이 산출하는 참여 경험에 대한 통제는 회피하는 반면(한마디로 참여자들을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고 풀어놓는다면), 게임 디자인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통제하려 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행위성(agency)이라는 매체를 다루는 게임 디자이너들의 ‘장인적 솜씨’를 통해, 게임은 참여예술 및 사회적 예술이 달성하고자 한 목표―참여자가 작품에 대한 경험을 통해 사회적, 도덕적 변화에 도달하는―를(어쩌면 더 잘) 해낼 수 있다.
그럼 게임의 창작자, 작가는 누구인가? 응우옌은 게임의 미적 책임에 디자이너와 플레이어 모두 역할이 있다고 말한다. “게임 디자이너들이 ‘플레이어의 행위성을 통해서’ 그들이 의도한 미적 효과의 상당수를 성취하고, 그 최종 결과는 디자이너와 플레이어 모두에게 미적으로 귀속된다.”4) 디자이너는 게임의 미적 형식을 설계하지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플레이어의 행위성을 산출하는 것이고, 미적 효과의 발생 또한 플레이어의 참여로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정말로 게임이야말로, 명시적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창작의 공을 작가와 플레이어가 나눠 가지는 참여예술인 것 같다.
응우옌의 게임 디자인에 대한 설명은 게임 업계에서 유명한 플레이 중심 디자인(Play-centric Design, 이하 PCD)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 PCD는 플레이어의 실제 경험을 설계의 출발점으로 삼고, 반복적인 플레이 테스트와 피드백을 창작 과정에 반영하는 게임 디자인 방법론이다.
그런데 여러모로 비슷한 언어를 공유하고 있음에도(‘플레이어의 행위성을 통해서’와 같은) PCD와 응우옌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금방 발견된다. 그것은 응우옌이 행위적 거리(agential distance)라고 부르는 것에 있다. 엄밀히 말해 게임 디자이너는 게임을 만들지, 게임 ‘플레이’를 만들지는 않는다. 창작 과정과 결과물 사이에 일종의 거리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응우옌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이너의 능력, 어떻게든 해법을 찾아내는 통제력을 강조한다.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은 것을 플레이어가 어떻게 경험할지를 예측하고 조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좋은 디자인을 통해 어쨌든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PCD는 훨씬 겸손하다. 플레이 중심 디자이너는 플레이어의 다양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받아들인다. 그들의 해법은 정교한 설계와 통제가 아닌 거듭된 테스트와 조정이다. 트레이시 풀러턴(Tracy Fullerton)이 쓴 PCD의 교과서와 같은 책 『게임 디자인 워크숍』5) 9장에서는 플레이 테스트에 임하는 디자이너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자신의 게임을 테스트하게 될 사람들을 모아 두고, 그 앞에 선 디자이너는 작품에 대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게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발전될지, 그리고 이 게임에 대한 자신의 희망과 꿈까지.
풀러턴은 그러나 그러한 충동의 억제를 강조하면서, 테스트 플레이어들의 순수한 피드백을 위해 디자이너는 뒤로 물러나라고 제안하며, “당신은 상자 안에 없다(You don't come in the box)”는 게임 디자인계의 격언을 인용한다. (당신은 상자 안에 없다니, 작품에서 작가가 사라진 모습을 이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한 문구가 있을까?) 이 인용구의 정확한 의미는 게임이 세상에 나가 대중에게 도달할 때 디자이너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고, 플레이어에게 직접 게임을 설명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디자이너의 부연 설명이나 ‘진짜 의도’로 플레이어의 반응을 조정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피드백에 따라 게임의 형태를 조정하라는 것이다.
응우옌이 말하는 게임 디자이너는 플레이어 앞에서 겸허하게 물러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미적 결정을 관철시키는 분명한 작가다. 다만 게임의 매체적 특성인 플레이(응우옌의 언어를 쓰면 행위성) 중심적 번역을 거친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응우옌이 말하는 참여 예술로서의 게임 및 게임 디자인은 오히려 일반적인 게임 디자인 관행보다 작가 및 저자성을 복권시키는 쪽이었던 걸까?
문제가 좀 복잡해지는 것 같다. 특정 시기 예술계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저자의 위치를 흔들고 관객을 창작의 과정에 개입시키고자 했다. 이는 관객 개개인의 경험과는 상관없이 제도적, 담론적 위치를 확립한 저자―저자성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내가 상연하고 체험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게임에서는 통합적 비전과 통제력을 가진 작가, 혹은 저자성은 줄곧 취약한 자리에 놓여 있다. 응우옌이 말한 행위적 거리나 풀러턴의 상자의 안과 밖―디자이너가 만드는 것과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것 사이의 불일치 같은 게임 매체의 특성과 함께, 포커스 그룹 테스팅과 같은 집단 창작의 관행들과 플레이어들의 소비자 중심주의, 그리고 게임을 산업 및 기술적 생산물이자 단순한 오락거리로 보는 통념 역시 이 취약성의 수많은 이유를 이룰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죽음은 예술계 저자의 죽음과는 무척 다른 의미로 느껴진다.
예술과 작가와 같은 개념의 경계 설정 문제에서 예술과 게임이라는 맥락은 그만큼 서로 다른 질문을 만들어낸다. 이제 나는 좀처럼 풀어낼 수 없었던 내 바람을 해결하는 길이 작가가 온전히 사라지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아닌, 취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로서 작가를 다시 발견하고, 작가와 플레이어가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상상하는 것에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 작가는 응우옌이 말하는 정교한 통제자나 PCD의 겸손한 디자이너와는 좀 다른 것 같다.
돌이켜보면, 작업을 그만두고 게임에 몰입해 있던 시기에 나는 게임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그것을 거부하는 대신 반겼다. 왜냐하면 이때 작가의 목소리란 고립적 상황에서 벌어지는 비디오게임 플레이가 주는 편안함을 유지하면서도, 나 외의 타인과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순간들이 있다. 어지간해서는 가지 않게 되는 맵의 구석을 탐색하거나, 길을 잘못 들어 한참 동안 아무 이벤트도 이어지지 않는 구간을 헤매거나, 이상하게 맥락에서 튀는 선택지를 골라보게 된다. 명백히 옳은 진행이 아닌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충동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때 마치 기다린 것처럼 텅 빈 맵의 끝에 덩그러니 쪽지나 보물 상자 같은 것이 놓여 있거나, 게임 시스템에 포착되지 않을 산만하고 무작위적 선택에 대해 호통을 치는 대사가 출력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쩐지 게임의 메인 스토리에 몰입하고 있을 때보다도,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미겔 시카트(Miguel Sicart)와 더글러스 윌슨(Douglas Wilson)은 『이제 이건 사적인 문제다: 학대적 게임 디자인에 대하여』6)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게임에서 작가를 ‘말소’하고 투명화하는 경향이 타자의 응답을 구하지 않는 플레이어 자신의 ‘독백적 플레이(monologic play)’로 이어진다고 본다. 이를 막기 위해 ‘학대적 게임 디자인(Abusive Game Design)’이 제안된다. 학대적 게임 작가는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유희적인 경험을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를 역으로 활용해, 오히려 이를 배반하는 방식으로 플레이어에게 충격을 준다.
이러한 디자인은 작가가 충격과 불편함을 통해 자기 존재를 각인시키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문법을 연상시키지만, 궁극적으로 시카트와 윌슨은 플레이어와 작가 사이 대화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게임은 디자이너와 플레이어 사이 대화의 매개가, "플레이어에 관한 것도, 디자이너에 관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 둘 사이의 춤에 관한 것"이 된다.7)
이때 작가는 뒤로 물러나거나 통제자의 자리, 즉 상자 밖에 머물지 않고, 얼굴을 드러내며 직접 대화를 거는 자리에 참여한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8)처럼 거대한 미술관에서 관객의 눈을 마주 보며 ‘작가의 현전’을 선언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작가가 응우옌의 ‘행위적 거리’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게임 디자인의 통제를 벗어난 플레이어들을 교정하기 위해서가 아닌, 맞이하기 위해 나서는 모습을 떠올린다. 만들기와 플레이라는 서로 다른 시공의 참여자들이 함께 만나 만드는 춤 또는 대화를, 그 게임을 상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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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e & Writer> |
1) 이 글에서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writer), 미술의 예술가(artist), 게임의 디자이너(designer) 등 본래 구분될 수 있는 여러 위치를 가리키는 데 혼용된다. ‘저자(author)’ 역시 특정 분야의 직함이자 저자성(authorship)처럼 창작의 권위와 귀속을 둘러싼 이론적 개념이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는 엄밀한 구분 없이 ‘작가’와 교차하며 쓰인다. 이는 한국어에서 ‘작가’가 이미 이 모든 의미를 느슨하게 포괄하고 있는 사정을 반영하는 동시에, 참여예술에서 게임(글쓰기)으로 이동해 온 나 자신의 위치를 하나의 흐름으로 풀어가기 위함이다.
2) C. 티 응우옌, 이동휘 역, 『게임: 행위성의 예술』, 워크룸프레스, 2022.
3) 같은 책, 284쪽.
4) 같은 책, 253쪽.
5) 트레이시 풀러턴, 위선주·심연정 역, 『게임 디자인 워크숍』, 길벗, 2016
6) 더글러스 윌슨·미겔 시카트, 『Now It's Personal: On Abusive Game Design』, FuturePlay 2010, 밴쿠버, 2010.
7) 앞의 글, 2쪽.
8)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 1946–)는 세르비아 출신의 퍼포먼스 아티스트다. 여기서 언급하는 장면은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의 퍼포먼스 〈The Artist Is Present〉로, 작가가 약 세 달간 미술관에 앉아 관객 한 사람 한 사람과 침묵 속에서 눈을 마주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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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문장웹진 기획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서수 작년에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자와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특정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었고, 각본 작업에 동참해줄 작가를 구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에 각색 일을 했었기에 지인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내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작가님 이름으로 챗GPT에 검색을 해 봤어요.” 그가 가방에서 파일 홀더를 꺼내더니 A4 용지를 넘기며 말했다. “약력과 작품관 같은 걸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제가 재미있는 걸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서수 작가가 쓸 법한 시놉시스를 한 편 써달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한테 제안했던 그 소재로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각본 작업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이서수라는 소설가가 그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이미 테스트해봤다니…… 나는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상태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나처럼 썼겠느냐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챗GPT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조합해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정확히 내가 만들 법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전개 방향이 모두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를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걸 생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1분도 안 걸렸죠, 뭐. 아시잖아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의 짜임새로 시놉시스를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예측해보니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의 1분과 인간의 1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나보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앞으론 이런 일을 자주 겪을 수 있겠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스토리텔링 산업과 인공지능이 합쳐졌을 때 내가 쓴 소설은 AI에 생성을 위한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과 책 리뷰, 인터뷰 기사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임에도 데이터만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특수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는 AI로부터 시놉시스를 얻는 데서 멈추었고, 이후의 작업은 인간 이서수와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
- 이서수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딸깍[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딸깍 양안다 나는 시 창작과 관련하여 AI를 활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창작자의 윤리라던가 신념 같은 건 아니고, 그저 AI의 시 취향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입력하거나 프롬프트를 통해 자세한 방향을 지시하면 나아지는 편이지만, 아직까지 나의 취향과 AI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내가 다른 이와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와 다름없습니다. AI는 창작 주체라기보다 창작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깝고, 이러한 맥락에서 AI는 키보드나 사전, 아니면 노트와 펜의 역할과 같습니다. 다만 AI는 적극적인 도구입니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것과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독자나 스승, 동료 시인을 포함하여 타 장르 창작자와 철학자, 그리고 세상을 떠난 시인과도 영향 관계에 놓입니다. AI는 이러한 점에서 모든 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AI는 때로 합평자가 되어줄 수 있고,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으며, 시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맥락을 끌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근본적으로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움직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로 형성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나 : 위의 텍스트는 ‘시인의 AI 활용’에 대한 텍스트입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ChatGPT-5.5 : 제가 조금 덧붙이고 싶은 것은, AI에게 “취향”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취향은 인간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AI의 취향은 어떤 미적 신념이나 삶의 이력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럴듯함의 평균값에 가깝습니다. AI는 시를 쓸 때 자주 매끄럽게 만들고, 의미를 지나치게 정돈하고, 이미지들을 문학적으로 보이게 배열하고, 감정의 결론을 너무 빨리 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AI의 기본 취향은 “좋은 시”라기보다 좋은 시처럼 보이는 문장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에게는 그게 참을 수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AI는 적극적인 도구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는다. AI는 도구인데, 기존 도구와 달리 도구인 척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인 척도 합니다. 키보드는 수동적이고, 사전은 정적인데, AI는 말을 걸고 반응하고 제안하고 반박하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능동적이고, 그렇다고 창작 주체라고 하기에는 책임과 욕망과 고유한 삶이 없습니다. 나는 AI가 주체적으로 시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취향에 맞는 시’를 언젠가 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나의 영향 관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AI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2020년에는 문득 이런 생
- 양안다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AI와 함께, 평론가는 어떻게 읽는가?1) 노대원 AI 이후, 해석의 미래는? 평론가는 문학 텍스트와 평론뿐만 아니라 문학 이론을 비롯해서 여러 인문학 저서나 논문을 읽어야 할 일이 많다. 특별히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로 된 책과 논문도 읽어야 한다. 구글 번역이 나오고서 글과 책을 번역해 읽는 일에 큰 도움을 받아왔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엉뚱한 번역 표현이 자주 발견되었다. 그러다 ChatGPT가 나오기 전, 지금으로부터 거의 십여 년 전에 구글 번역의 성능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느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평론가로서 AI를 진지하게 걱정했다. 구글 번역이 혁신되었다고 한다. 이것도 '특이점'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기계번역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해석자로서, 다만 번역의 미래만을 생각할 것은 아니다. 번역과 해석은, 1차 텍스트에서 2차 텍스트로의 작업이란 점에서 같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이후 해석의 미래는 어떨까? 해석은 예술이지만 번역 역시 예술이지 않았던가? 텍스트와 해석(비평)의 풍부한 '병렬 코퍼스'가 인공지능에게 주어진다면 해석의 자동화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번역가들은 번역의 미래를 고민한다. 해석자들은 해석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가? (2016년 11월 19일) 이 글을 쓰면서, 링크를 걸어 인용한 글은 번역가 노승영의 「알파고와 번역의 미래」였다. 그 글은 이렇게 끝난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광고를 보거나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웹 문서뿐 아니라 잡지, 단행본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 번역가의 번역은 인쇄술 등장 이전의 책이 그랬듯 소수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가 되면 극소수의 번역가만 살아남을 것이다. 기계번역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는 번역가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저렴한 제품이 수공예로 소량 생산되는 고급 제품이 구별되듯 기계번역과 인간의 번역이 구별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어떤 번역가가 살아남을까?”2) 이 예상은 거의 정확하게 실현되었다. 그가 걱정했던 것처럼, 번역가가 생각보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 어쩌면 그 예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AI 번역은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이 글을 페이스북에 남기면서, 친구와 대화를 나눈 것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 원고료는 너무 싸기 때문에 인간 작가를 상회하는 탁월한 AI를 개발하는 비용이 더 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자조적인 농담을 던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AI가 문학을 위협한다 해도, 나는, AI와 문학이 만나는 접점에서 새로운 작업을 도전적으로 수행하는 쪽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얼마 뒤(ChatGPT 출시 몇 해 전에), 제주도에 AI 관련 서머 스쿨이 있어 방문한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김성훈 교수를 만나 점심 식사를
- 노대원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인공지능의 그 끝없는 지긋지긋함 곽재식 인터넷에 누가 “자동차 엔진오일이 왜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엔진오일에 정말 돈을 많이 들일 필요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올렸다고 해 보자. 이런 덧글을 달면서 기대하는 것은 엔진오일에 대해서 잘 아는 자동차 수리 일을 하는 사람이나 엔진오일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전문 지식을 담아 써 주는 대답이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오래 자동차를 운전해 본 사람들이 각자의 엔진오일에 대해 이야기 해 주는 경험담을 들어 볼 수 있기를 기대할 것이다. “엔진오일 우습게 보다가 저는 큰코다친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 비슷한 답을 기대할 거라는 이야기다. 이런 기대는 무리를 지어 살면서 서로 경험과 기억을 언어로 공유하면서 발전해 온 사람이라는 종족이 원시 시대 때부터 갖고 있던 아주 오래된 습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한동안 이런 덧글을 달면, 부리나케 달려와서 “챗GPT에게 물어 봤더니, 이렇게 답변해 주더군요.”라고 자기가 인공지능에게 물어 본 내용을 복사해서 덧글로 붙여 주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덧글에 엔진오일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줄 써 두어서 열심히 읽어 보았는데 다 읽어 갈 때쯤 보니까 맨 마지막에 “이상은 제미나이에게 물어본 결과입니다”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덧글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거의 모든 곳에서 많이도 나왔다. 도대체 이런 덧글은 왜 달리는 걸까? 질문을 했던 나는 챗GPT나 제미나이에게 물어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살펴보자면 대부분의 덧글은 그야말로 순수한 의도로 달린 것이다. 질문을 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고, 자기도 그 문제에 대해 궁금하다 보니 대규모 언어모델, 즉 LLM 방식으로 운영되는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결과를 받아 본 뒤에 그 결과를 남들과 같이 공유해 보려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심정에서 나온 동기는 조롱받을 이유도 없고 나쁜 마음이라고 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계각층에서 LLM 방식의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거기에 다른 마음이 결합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는 것 같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최신 기술을 이용하고 있다는 뿌듯함이다. 요즘 그렇게 유행이라고 하는 최신 첨단기술인 인공지능을 내가 이렇게나 잘 이용해서 남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을 느껴서 “나는 요즘 뭐든 인공지능에게 물어봐. 너무 편하고 좋거든!”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게 된다는 뜻이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다 바꾸어서 완전히 다른 사회가 탄생할 거라는 이야기를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온갖 매체에서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남보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감각 속에는 거창한 환상마저 슬그머니 서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앞서갈 거라는 환상이다. 지금 치열한 경쟁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문장웹진 다시 읽기] 현실의 우리가 문학의 미래를 ― 조연정, (2017년 8월호 수록) 김진선 어느 강의 시간, 교수님께서는 신입생들에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면을 소개해 주셨다. 많이 읽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그날 이후 인터넷 즐겨찾기 목록에는 《문장웹진》이 빠지지 않고 있다. 햇수로 17년, 매달 1일이면 새로 올라온 작품들을 접했다. 나름 놓치지 않고 따라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다시 보니 아닌 일이다. 맞다, 이것은 고해성사. 나의 죄를 고합니다. 나는 장르 편식이 있어서 시를 제외한 소설, 비평, 기획 등은 대체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문장웹진 다시 읽기’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다시 읽기’가 아닌 셈이다. 그러니까 이 기획은 적어도 나에게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처음 마주한 글을 여러 번 살피고, “(다시) 읽을 기회가 생겨서 정말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마침내 말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시작은 2017년 8월호에 수록된 조연정의 이라는 비평이다. 평소 어렵다고 생각한 비평만큼은 피하거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간의 죗값을 달게 받는 거 같다. 이 글은 윤이형 소설가가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로서 고민하는 몇 가지 질문과 함께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중심으로 문학적 재현,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논의의 과정에서 《문장웹진》 2017년 4월호에 수록된 조강석의 에 의문을 표하며,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이 미학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부정적 평가에 정면으로 맞선다. 먼저, 윤이형 소설가의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나는 앞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서사의 중심이 되는 소설을 많이 ‘써야만’ 할까? - 앞으로 쓸 내 소설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순응하거나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는 여성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일까? - 나는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에 대한 어떤 멸시나 비하도 ‘현실 그대로’ 작품 속에 재현하면 안 되는 것일까? 꼭 필요해서 그런 식의 재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럴 경우, 반드시 거기에 내가 작가로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명시해주어야만 하는 것일까? - 이런 고민들을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혹은 각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내가 과잉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그저 여성 트위터리안-독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들을 ‘타인’으로 여길 만큼 나는 그녀들에게서 먼가?1) 작은따옴표 안에 들어간 말(밑줄은 인용자 강조)이 유독 신경 쓰이는 것은 왜일까. 이 질문들은 의무(‘써야만’), 제약(‘안 되는’), 판단(‘비판적인’), 자기인식(
- 김진선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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