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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

  • 작성일 2026-09-01

[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


진행 : 윤재민 평론가

패널 :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




윤재민 

안녕하세요. 문장웹진 9월호 비평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사회를 맡은 문장웹진 편집위원이자 평론가 윤재민입니다. 그리고 오늘 패널로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를 모셨습니다. 사실 이렇게 세 분을 모신 이유는 전적으로 저의 사심 때문인데요. 그간 제가 글이나 활동하는 것들을 인상 깊게 보았고, 궁금했던 분들 모신 겁니다.

참석자 분들 모두 간단하게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어요. 언제 데뷔했고, 어떤 활동을 주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현재 평론가부터 먼저 하실까요?



현재 

안녕하세요. 저는 202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 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활동을 시작한 조현재라고 합니다. ‘현재’라고 성을 떼고서 필명 아닌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교 

안녕하세요. 저는 2022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안희연론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도 원고에 넣을 약력을 요청받으면 이 정도로만 저를 소개하곤해서 어떤 말을 더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미진 

안녕하세요. 저는 2025년에 김기태론으로 창비 신인 평론상을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한 이미진이라고 합니다. 이제 1년이 된 것 같고, 조금씩 평론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생활인으로서 돈을 벌고 있고요. 그렇습니다.



윤재민

오늘 이렇게 모신 세 분. 연차가 현재 평론가가 3년, 그리고 최선교 평론가가 4년 차 정도 됐죠? 2022년도니까 4년. 그다음에 이미진 평론가 같은 경우는 1년 되셨지요?



이미진 

아마 발표 기준으로는 1년이 조금 안 된 것 같습니다. 



윤재민 

이제 1주년 돼 가시는군요. 세 분들 모두 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인데, 그중에서 재미있는 글 많이 쓰시고 계시거나, 그럴 거라는 믿음이 드는 분들과 대화 나눠보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거든요. ‘신인 비평가’로서 가지고 계시는 여러 가지 고민이나 문제나 목표나 욕심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궁금하고요. 우리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각자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지평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일단, 비평가로 데뷔하게 된 각자의 계기가 있을 텐데요. 최선교 평론가 먼저 말씀해 주실까요?



최선교 

평론가가 된 계기를 기계적으로 기술해 보자면 국문과 대학원 수업 과제로 처음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왜 평론을 계속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제 성향 때문인 듯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떤 것에 심취하고 매료된 상태를 무척 즐겼어요. 그리고 내가 그것에 매료되었는지 꼭 설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확하게 내가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일이 무척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저는 시나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을 매료시키기보다 매료되는 일에 더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윤재민 

제 지론이긴 한데 저는 비평도 문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시, 소설 그리고 그 외 여타 희곡 같은 장르들과 마찬가지로. 그러면서 저도 가끔 생각합니다. ‘나는 왜 하필이면 문학 중에서도 비평이라고 하는 문학을 내가 하게 됐고 그걸 업으로까지 삼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돌이켜 보면 저도 그런 것 같아요. 비평이라고 하는 문학의 특징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은 철저하게 자기 읽기에 기반한 문학이라는 것이겠죠. 물론 모든 문학 다 마찬가지죠. 기본적으로 읽기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쓰기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러나 비평 특히나 문학 비평은 특히나 읽기 본위의 글쓰기잖아요. 내가 읽은, 내가 읽은 것, 내 관점, 내가 이렇게 읽었다는 것을 표현하거나 그것에 대해서 뭔가 말하는 것. 여러 ‘문학’ 중에서 선택을 한다면 저한테도 선택지는 비평뿐이었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최선교 평론가 말씀에 일견 공감하는 바가 있네요.



이미진 

방금 얘기하신 읽기를 통해서 뭔가를 쓰게 된다라는 거에 대해서 공감이 가고요. 어떤 거를 읽었을 때 거기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평론을 쓰게 하는 것 같아요. 연구라든지 이런 학술적인 방식과 구분되는 어떤 정동적인 부분에서의 문학적인 성격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저도 그렇게 해서 비평을 시작하게 된 것 같고요. 저 같은 경우에도 어렸을 때부터 영화나 음악을 좋아했고 혼자서 글도 쓰곤 했어요.


저는 문예창작학과 학부를 졸업했는데 본격적으로 창작을 하려고 들어간 건 아니었고 그냥 막연히 문화적인 걸 좋아해서 들어간 거였어요. 그런데 시나 소설을 창작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문학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저 자신도 원래는 어렸을 때부터 시 쓰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었고, 대학에 가서는 소설도 쓰고 싶다고 생각을 하긴 했었는데, 돌이켜 보면 그때도 조금 관념적인 방식의 글쓰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중에 20대를 보내고 나서 뒤늦게 대학원에 가게 됐는데 연구가 너무 재밌었어요.


그래서 (윤: 연구요?) 예. 비교문학을 전공하면서 문학연구, 문화연구 등을 주로 했는데, 한 10년 정도를 하다 보니까 논문이라든지 소논문이라든지 이런 형식의 글쓰기를 훈련을 할 수가 있었어요. 근데 그러면서 오히려 비평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강해진 것 같아요.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글쓰기라든지 논문 형식으로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 보면 문학적인 방식으로 풀어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윤재민 

이미진 평론가가 말씀해 주신 비평가로서의 경로가 저랑 반대라서 재미있네요. 저는 문학 비평으로 데뷔를 한 이후에 대학원에 가서 문학 연구를 접하게 되었고, 제 지적 역량의 문제를 크게 겪었어요. 그리하여 상당 기간 비평적인 정체성보다는 연구적인 정체성을 가지려 노력하며 버텼던 시기가 저는 굉장히 길었어요. 그러다가 한 몇 년 만에 되려 다시 비평적인 글쓰기로 선회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여러 도전을 통해 이렇게 이미진 평론가 같은 좋은 글 쓰시는 분과 비평가로서 만나 반갑네요.



현재 

저 같은 경우에는 학부에서 문학을 따로 전공하지는 않았어요. 당시에 얻어걸린 게 많아서 그게 티가 잘 안 날 수도 있는데, 당선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문학 비평을 거의 못 읽어본 상태였어요. 다만 강보원 작가님 글을 좋아했기에 그분 비평만 읽은 채로 강보원에 대한 글을 하나 써보고 싶었고, 투고를 했는데 그게 당선이 됐습니다. 그러고 나서 비평에 뒤늦게 관심이 생겨서 부랴부랴 찾아 읽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물정이라든지, 분위기라든지, 이런 걸 잘 모르고 들어온 부분도 있고요.


저는 원래는 평론을 쓰고 싶다기보다는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예를 들어서 시인이 시를 쓴다고 해도 자기 시론을 하나쯤은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 느낌으로 저만의 시론을 하나 써볼 수는 있겠다 싶어서 투고를 한 것이지 평론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등단을 하고 나니까 평론장에 계시는 분들의 고민, 책임감 이런 게 저한테 같이 전이가 되면서 많이 고민하게 되고 덩달아 흥미가 생기게 된 것 같습니다.



윤재민 

재미난 부분이 있는 거 같아요. 일단 문학의 비평의 독자가 아니었는데 강보원의 비평을 읽었다? 이게 되게 독특한 부분인 것 같고.



현재 

강보원 작가님 비평 특징이 뭐냐면, 그분 같은 경우에는 다른 문학 평론가분들하고 다르게 메타 비평이라고 할 만한 걸 많이 안 쓰셨어요. 최근에 비평집 단행본이 나왔는데, 그분이 2016년에 데뷔를 하셨어요. 그래서 10년 동안 길게 활동을 하신 거죠. 비평집 1부가 ‘비평의 쓰임과 운명에 대하여’라고 메타 비평 파트인데 그렇게 모아만 놓고 보면 분량이 꽤 돼지만, 메타 비평은 정말 꼭 필요한 시기에 꼭 필요한 글들만 제출을 하셨고 그분 활동을 전반적으로 돌이켜보면 문예지나 이런 데 글을 싣는 것보다는 단행본 작품 해설 위주로 활동을 많이 하셨거든요.


그래서 예전에 박솔뫼 작가님이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는데, 강보원 작가님 비평의 매력이 뭐냐면 그냥 그 비평 단독으로 읽었을 때도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지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그분 글 특징 중의 하나가 예전의 저처럼 비평이라는 걸 통 안 읽던 사람이 봐도 쉽게 읽히고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단행본 해설도 대체로 그렇고요.


근데 보통 한국문학 비평가들 같은 경우엔 그렇지가 않거든요. 한국문학 평론은 메타 비평이 활동의 메인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거 자체로는 문제가 될 게 없지만 기존 비평장에서 오고 가는 어떤 현장 비평사가 있잖아요. 다들 그 맥락 위에서 글을 쓰시거든요? 그래서 그 맥락을 모르는 독자는 쉽게 접근하기가 힘들어요. 그러다 보니 현장 비평이 문학장 논의가 이 장 안에서만 갇혀서 폐쇄적으로 돌게끔 하는 데 일조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각주에서 서로를 호명하는 방식도 제가 보기엔 좀 답답하고요. 


그런데 아무리 비평에 관한 비평을 쓴다고 해도 꼭 그런 방식으로만 쓰일 필요는 없거든요. 실제로 강보원 작가님 같은 경우에는 입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주 조금 있는 문학」을 제외하면 한국문학장 내부의 특정 논의나 개별 필자를 직접적으로 호명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동일한 문제를 다루더라도 한국문학장 바깥에서도 이해 가능한 문학 작품이나 문화적 사례를 가져와 논의를 전개하는 편이라, 결과적으로 글의 보편성과 가독성이 좋고요. 그런데 또 이 문학장 내부에 위치한 글로서 분명히 기능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그런 글들을 많이 쓰셨기에 저 같은 독자도 쉽게 팬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윤재민 

비평가 생활을 약간 별 고민 없이 어쨌든 러프하게 시작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문학에 대한 본인의 입장이 어느 정도 뚜렷하게 있는 가운데 비평가로서 지금 활동을 하시면서 글도 쓰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어요. 글에서도 그런 게 느껴져서 흥미로웠고요.

지금 세 분의 자기소개와 함께 운을 떼며 대화하고 있는데 좋네요. 한국문학이라고 하는 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학 평론가로서 우리가 이번에 만났는데 각자가 전부 다 다르네요. 확실히. 이렇게 만나서 대화 나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지금 여기 제가 모신 평론가들 데뷔 연차가 1년, 3년, 4년이니, 기본적으로 2020년대 초라고 하는 시간을 경유하여 현재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죠. 

특히 현재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는 2020년대 초라고 하는 시점에 본격적으로 문학 평론가로 데뷔를 해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인 건데, 요 시기 그러니까 2022년, 2023년이면은 코로나 시기였죠? 국내외로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가끔 그때가 꿈 같기도 해요. 코로나 시절이 정말로 현실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나? 싶기도 하고요. 최선교, 현재 평론가는 그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그저 문학 읽기를 통해서 그 시기를 견뎠거든요. 평론가들의 읽기에 뭔가 영향을 끼치거나 했던 것들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현재 

근데 제가 그 질문에는 답하기가 조금 애매한 게, 원래가 밖에 잘 안 나가는 사람이라서 코로나 이전이나 이후나 생활 자체가 그렇게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학교도 제가 학부를 서른이 넘어서야 졸업했는데, 그동안 학교를 거의 안 나가다가 어떻게 보면 졸업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게 지방에 살면서도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거였습니다. 그래서 졸업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고요.


그리고 코로나 이후로 문학 행사가 인스타 라이브나 유튜브 통해서 활성화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가 제가 본격적으로 한국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였는데, 그게 맞물리면서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들께 조금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고요. 어디 굳이 안 나가도 안방에서 덕질 같은 걸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던 거죠. 그리고 코로나와 맞물려서 문단에서 술자리라든지 모임 같은 게 거의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게 당시에는 어떤 긍정적인 작용도 분명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게 최근까지 이어지면서 오히려 서로가 너무 끼리끼리만 모이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잘 안 하게 되는 계기가 된 부분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요. 그렇지만 제가 직접 경험한 건 아니라서 그 부분에 대해 제가 뭐라고 자세히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코로나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윤재민 

별일이 아닌 것처럼, 당연히 그저 일상이라 그러셨겠지만, 들었을 때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어요. 한국문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시점이 공교롭게도 코로나 시기랑 맞물렸다고 말씀 주셨어요. 그때 인스타 라이브나 그리고 줌 미팅 그리고 유튜브 라이브 같은 것들이 굉장히 활발했죠. 물론 예전부터 다 했던 것이지만 당시는 그게 주 무대가 됐던 시점이잖아요. 어떻게 본다면은 현재 평론가가 한국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시점이 제 생각에는 굉장히 특이한 경험 같기도 하네요. 현재 평론가가 가지고 있는 그 문학적인 취향 혹은 한국문학에 대한 입장과 굉장히 맞물려 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고요. 흥미롭네요. 


최선교 평론가는 또 어떻게 이에 대해서 회고하는지 궁금하거든요?



최선교 

2022년을 떠올려보니 아주 옛날처럼 느껴지네요. 그때를 생각하면 격리나 단절 같은 단어들이 떠오르곤 하지만, 인간이 지나치게 연결된 존재라는 걸 체감한 시간이기도 했죠. 우리가 얼마나 악하고 약한 존재인지를 목격한 시기였고요. 사람을 극한 상황에 몰아넣으면 굉장히 추한 면들이 드러나잖아요. 그런 점에서 코로나 시기가 일종의 사회 실험처럼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게 만든 시기라고도 생각을 하거든요. 코로나가 발발했던 초창기를 생각해 보면 특정 지역 사람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하게 표출하곤 했잖아요. 물론 줄곧 혐오의 문제는 존재했지만,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그 사실을 직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윤재민 

최선교 평론가가 말씀해 주신 부분이 평론가의 글이나 그리고 읽기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평론가 등단작도 생각이 나고요. 코로나 같은 일은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되겠죠. 사람들이 뭔가 이 사회 실험의 대상이 된 느낌?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얼마나 연결돼 있고, 그리고 그 연결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를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했고요. 저 같은 경우는 자유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생각했어요. 담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결국에 이게 직접적인 몸의 문제구나라는 걸 자각했달까요.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다른 이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나의 행동이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해악이나 책임을 동반하는 것인지를 극적으로 깨닫게 된 계기였고요. 그게 제 문학과 읽기에도 큰 영향을 끼쳤어요. 그것을 아직 제대로 언어화하거나 하지는 못하고 있는데 제가 최선교 평론가의 그 글을 보면서 그런 부분들을 많이 떠올리거든요. 


그리고 이미진 평론가 같은 경우는 연구자로서 그리고 문학의 독자로서 당시에 여러 생각을 하셨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이미진 

저 같은 경우에는 그때 박사 수료 상태였고 학원에서 일하면서 애들을 가르치고 있었거든요. 개인적으로 당시 저한테 제일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어머니가 백신을 맞고 한두 달 정도 있다가 자가면역 질환이 발병한 일이었어요. 거의 죽었다 살아났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되게 아프셨는데 그러고 나서 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 한국이 코로나 방역에 대해서 되게 잘했다고 세계적으로 칭찬을 받고 있던 그런 상황이었던 걸로 기억이 나거든요.


그런데 바이러스라는 건 어떻게 보면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 있는 거잖아요. 백신을 맞는 게 옳다 그르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연이어 발생하게 되고 또 그런 현상들을 바탕으로 통제되지 않는 개인의 의견들이 터져 나오게 되면서 어떤 절대적 가치나 따라야 할 도덕적 지표 같은 것이 사라져 버렸거나, 적어도 그 척도를 달리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결국에는 사람들이 기존 시스템만으로는 통제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다 같이 체감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존의 권위가 사회적인 도덕 혹은 정치적인 차원에 있어서는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설정하거나 컨트롤하는 게 어려워졌다는 사실이 가시화된 시기라는 생각도 들고요. 



윤재민 

이게 아까도 말씀드렸지마는 저는 정말 당시가 꿈같이 느껴지거든요. 포스트 코로나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지금 세상이 워낙에 안 좋은 일들도 많고 세계상의 변화도 가열찬 상태라, 이런 것들이 요새는 많이 논의되지는 않는 거 같아요. 때로는 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 초 우리가 겪었던 코로나라고 하는 개인적·사회적인 트라우마 그리고 여러 사회 실험의 대상이 되면서 각자가 느꼈던 문제의식이나 생활 양식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논의가 차후에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좀 더 현대, 현시점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어요. 코로나 이후로 수많은 다른 문제들이 우리의 일상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드릴 말씀은 개인적인 문제의식인데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해서 여쭤보고 싶어요. 2022년도에 발발한 러-우 전쟁 그리고 그 외의 이후에 현재 진행형으로 지금 팔레스타인 문제 같은 제노사이드 문제들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많이 저에게 큰 충격을 던져준 문제 중에 하나거든요. 언제나 팔레스타인은 문제였지만 최근에 팔레스타인 관련 책들도 한국에 굉장히 많이 번역이 되잖아요. 《완벽한 피해자》나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 그리고 《팔레스타인 시선집》 같은 최근 번역된 책들을 읽으면서 비평가로서나 일개 시민으로서 마음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한편으로 이에 대해서 뭔가를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감히 이에 대해 함부로 쓰지 못하겠는 거예요. 내가 전쟁이나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뭘 안다고. 만일 내가 이에 대해 뭔가 쓴다고 한다면은 이게 어떠한 방식으로 읽힐지, 그렇기에 어떻게 이 사안에 개입해야 할지 굉장히 무력해지기도 하고요.

굉장히 민감한 얘기이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한국문학 비평이라고 하는 맥락과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이런 사안과 관련된 글을 읽을 때마다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은 느낌을 요새 굉장히 많이 받거든요. 이런 사례를 정동이라 표현해도 될까요. 

지금 이야기한 팔레스타인 문제나 전쟁 같은 사안들은 저를 감염시킨 문제의식이고 이 외라도 혹시 지금 평론가들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인 문제의식 중에서 뭔가 여러 가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국의 문학평론가’로서 평론가들의 읽기와 글쓰기에서 끊임없이 평론가들에게 뭔가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어떠한 사례가 있으면은 그게 뭔지 여쭤보고 싶네요.



이미진 

제가 세월호 때 한국에 없었었거든요. 해외에 있었는데 근데 해외에 있다가 들어와서 보니까 뭔가가 바뀌어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나 느끼는 게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어요. 당시엔 제가 거기 없었다는 이유로 어떤 죄의식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는 거고 그건 정신적이라기보다는 물리적이거나 그런 부분이라는 걸 차츰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여전히 글을 쓰는 저 자신에 대한 괴리감 같은 것이 있지만 어떻게든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것을 느낀다는 사실을 복기하는 건 중요한 것 같아요.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도 그렇고 팔레스타인 가자에도 오래된 전사(前史)가 있었잖아요. 그걸 이제야 알게 되고 깨닫게 되었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뭐라고 해야 할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뭐라도 같이 얘기하거나 표현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상황이 긴박하고 악화되고 있기 때문에 문학이라는 게 사소하고 무력해 보일 수는 있겠지만, 고통은 결국 개인적이고 내밀한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좀 전에 윤재민 평론가님이 얘기하시기도 했지만, 마치 벌레가 지진이 나면 먼 곳에서도 진동을 느끼거나 이런 것처럼 먼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느끼는 부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더라도 사람들이 평소에 잘 인지하지 못했던 그런 부분들을 작품을 통해 꺼내놓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미묘한 지점들을 번역을 해 주는 게 평론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윤재민 

어떤 사건에 직접적으로 기여 혹은 개입해서 다른 판도를 만들 수는 없더라도, 문학 평론가로서 혹은 개인이자 시민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목소리를 형상화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입장. 이미진 평론가 글을 보면 지금 말씀해 주셨던 맥락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어느 정도 보여주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공감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제가 잘할 수 없는 부분이나 놓치고 있는 사안을 넓은 문제의식으로 언어화하시고 계세요. 평론가가 앞으로 쓰실 글을 보면서 세상의 여러 다른 진동이나 문제들을 새로이 경험하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최선교 평론가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최선교 

제가 이 질문의 크기를 감당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먼저 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한국의 문학 평론가'로서 어떤 생각을 한다고 입장을 말씀드리기에 저의 문제의식이 너무너무 작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거든요. 그냥 겸손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제 삶의 구조 자체가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요.


그래도 제가 최근에 했던 사사로운 생각 두 가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이 체감되고 회자되는 방식인데요. 전쟁 뉴스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주식이 떨어지겠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런 이야기만 할 수 있냐고 말하지요. 어느 쪽이 옳은 걸까요? 당연히 옳은 쪽은 없죠. 전자의 사람들에게는 현실의 빠듯함이 전쟁의 비극보다 밀접하게 체감되는 것이고, 후자의 사람들은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방향에 대해 말하고 있잖아요. 이 간극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저에게도 이런 간극이 있어요. 저는 평생 게임을 안 하다가 최근에 게임을 취미로 갖게 됐어요. 맵을 돌아다니면서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게임인데요. 게임 중간에 무작위로 폭격이 가해지는 타이밍이 있는데, 같이 게임을 하던 친구가 “실제로 전쟁에서 이런 거면 진짜 무섭겠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때 제 안에서도 어떤 모순이 발생하더라고요. ‘만약 나에게 먼 나라의 비극이 실제로 체감되었다면, 이런 시기에 이런 게임은 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하지만 결국 저는 계속 게임을 할 것이고, 전쟁도 계속되고 있죠. 종전 협상은 번복되고요. 제가 했던 또 다른 생각은 이렇게 반복되는 삶의 패턴에 대한 것이었는데요. 인간이 본능적으로 익숙함을 느끼는 서사 구조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해소되는 것일 텐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그런 서사 구조로 흘러가는 일이 거의 없고, 예측 불가능하지만 한편으로는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폐쇄적인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삶에 대해 갖게 되는 체감의 영역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요. 물론 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미진 

저도 주식 계좌 있습니다. (웃음) 이율배반적이지만요. 어렵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최선교 

보통 문예지에서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기획으로 지면을 꾸리잖아요. 제 기억으로는 정보라 소설가가 특집이 아닌 지면에 팔레스타인에서 지금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글을 쓰신 적이 있어요. 그런 글을 볼 때 좋더라고요. 자리를 깔아 놓고 이야기를 할 때보다 불현듯 ’아 맞아, 그랬었지‘라고 느끼게 만들던 글이었어요. 평론을 쓰다 보면 특정한 시기와 기획에 맞추어 글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가끔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던져 버리는 것도 좋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방법 같았습니다.



윤재민 

공감 가는 말씀을 해 주셨어요. 비평가 대부분이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고백을 하자면, 제가 이 비평 기획을 몇 달 전에 했을 거 아니에요? 그때가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가 가장 극단적인 범죄로 치달았을 시점이었는데, 그저 이에 대해 막연히 뭔가를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내가 이걸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라고 하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었습니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도 해야될 것 같았어요. 부끄럽게도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은 고작 글이나 비평적인 무엇인가일 테죠. 제 이름을 걸고 문학 비평을 쓰거나 말씀하신 무슨 무슨 특집 지면을 꾸리거나 참여하는 것 등. 그런데 그것이 현 상태에 유의미하게 개입하는 저항일지 확신할 수도 없고 내가 그것을 유의미하게 언어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런 가운데 제가 여러분들을 상정하고 막연히 이번 좌담을 꾸린 거거든요.


처음에는 팔레스타인 그리고 전쟁 같은 문제에 대해 한국의 문학 비평가로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보고자는 생각을 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세 분께 부담을 너무 드리는 거죠. 최선교 평론가가 제 이런 마음을 지금 잘 말해주신 것 같아요. 제가 뭘 쓰고 말하더라도 그들에게 내가 정말 해주고 싶은 것들을 할 수는 없겠죠. 근데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아까 말씀해 주신 정보라 소설가 같은 경우는 굉장히 예전부터 팔레스타인 문제를 비롯하여 여러 사안에 대해 발언을 해오고 계시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어떤 시기에 하나의 이슈에 대해 즉각적으로 몇 번 발언하고 마는 게 아니라, 세상의 여러 문제를 인식해 나가면서 필요한 행동을 할 땐 해야 한다는 영감을 항상 주시죠.

현재 평론가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씀 있을까요?



현재 

저는 원래 이 질문은 어떤 의견이 있는 게 아니라서 안 하느니만 못한 그런 얘기가 될 것 같아서 넘기려고 했었는데, 그런데 뭐라도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조금 다른 방향에서 얘기를 해보자면, 지금 질문 주신 바도 중요한 주제이고 분명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기는 하지만, 지금 문학장의 많은 논의들이 전쟁과 같은 거대 담론을 위주로 돌아간다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해요. 


제가 문예지를 자세히 챙겨 보는 독자가 아니라서 함부로 얘기하기는 그렇지만, 그러니까 지금 그런 큰 주제에 대해서 평론가들이 계속 당장의 즉각적인 답변이나 생각을 내놓게끔 기획 자체가 벌써 너무 크게 돌아간다? 최근의 문학장의 논의들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데에서 오는 부담감이나 간과되는 요소들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반대로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윤재민 

실제로 그건 사실이에요.



이미진 

저는 큰 주제에 대해서 다루는 것 자체는 별로 나쁘다고 생각은 안 들거든요. 왜냐하면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원론적인 얘기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뉴스 같은 게 되게 디테일하게 들어오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문학을 통해 좀 더 큰 주제를 얘기를 하는 거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논의가 좀 더 섬세하게 다각화될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어쨌든 어떤 주제에 대해서 다룰 때 얘기를 꺼내놓게 되면은 결국에는 다 다양한 얘기들이 나오게 되고 그게 모이게 된다는 생각은 들거든요. 



윤재민 

누군가의 글이나 기획이 항상 성공하거나, 그것에 전부 동감하거나 성공할 순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 비평가로서 우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계속 시도하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의식은 정답은 없는 거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숙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와중에 우리의 일상적이고 즉물적인 생활세계를 침투하는 공통적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코로나 팬데믹이 그렇고, 대한민국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나 러-우 전쟁을 직접적으로 실감하는 건 어렵지만 그럼에도 이를 ‘나의 문제’로 감각하기도 하고요. 누구에게는 그냥 뉴스고 해외 토픽이고, 누군가에게는 주가지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요. 그런 방식의 언표들이 범람하는 가운데서 역설적으로 그런 먼 세계의 문제들이 제 일상까지 침투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우리들은 한국의 문학 비평가로서 지금 여기를 살고 있고요. 너무 큰 질문을 드린 것 같은데, 좋은 답을 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이어서 또 한번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사안이 이건 민감한 부분일 수 있는데, 2024년 12월 3일 이후에 대해서요. 이와 관련해서 1, 2년 사이에 문학계에서도 여러 가지 논의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12.3 비상계엄 이후의 여러 한국 사회 정황들 그리고 최근 잠실 시위 같은 문제들도 있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평론가들께 대답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겠지만 한번 여쭤보고 싶긴 하거든요.

이것과 관련해서 평론가들께서 문학 비평가로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자신의 글이나 집필에서 어떠한 맥락의 기획을 하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자유롭게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최선교 평론가가 먼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최선교 

저에게 12.3 계엄은 극우를 눈앞에서 만나게 된 경험입니다. 그 전에 일베가 있었지만 온라인상에서 존재감을 드러냈잖아요. 계엄 이후에는 길을 가다가, 혹은 내 가까운 지인 중에서 내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을 물리적으로 만나게 됐다는 충격이 컸습니다. 아마 저에게 일종의 결벽증이 있어서 그런 만남을 충격으로 받아들였겠죠. 


말씀해 주신 것처럼 한국적 상황은 앞서 이야기한 내용들과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점도 있는 것 같아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하고 있는데요.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지?‘와 ’저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야 하지?‘였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는 약간의 억하심정이 섞여 있다면, 두 번째 질문은 꼭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2.3 이후에 발표된 소설들 중에서 눈여겨본 작품은 극우가 자신의 가족으로 설정된 소설들이었어요. 자기 엄마라든지 아빠라든지 아니면 자기 자식이라든지 하는 사람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소설이었는데, 왜 작가들이 그런 소설을 구성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방금 말씀드렸던 두 번째 문제랑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관련된 글을 하나 발표하기도 했는데, 사실 아직까지도 문제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고 있습니다. 제가 성격이 급해서 그 글에서 결론을 하나 내리긴 했는데요. 문학적 상상력이나 대화를 차치하고, 개인이 집단적으로 수행하는 증오 정치가 국가의 무능력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에요.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를 상상하는 일이 문학의 영역입니다. 한편 공공연하게 소수자를 혐오하는 발언의 전시가 허락되고, 국가 차원에서 수행하는 혐오의 논리를 학습해 왔기에 지금의 극우 집단이 만들어졌다는 원인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재민 

그렇죠. 이게 지금 이 사안은 여하튼 정말로 ‘리얼’한 문제잖아요. 우리는 우리의 업에 따라 이를 다룬 픽션, 서정, 서사를 접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죠. 비평가로서의 판단을 넘어서요. 그게 현실과 문학이 갖는 당연한 낙차라고 하는 게 있는 가운데, 최선교 평론가 말씀처럼,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에 대한 요구가 더 우세할 수밖에 없는 시기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미진 

어떻게 같이 살아갈 것인가 이런 얘기가 나왔는데 저는 어쨌든 문학을 통해서 이 문제를 더 깊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방식을 발굴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있고요. 방금 얘기하셨던 소설들의 경우 저는 50대 여성 작가들이 극우적 성향이 있는 인물을 아들로 설정한 소설들을 몇 편 봤는데,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시도해 본 거라고 생각했어요. 작가들이 나름대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풀어낸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시도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윤재민 

말씀 시작하신 김에 이미진 평론가가 이 사안에 대해 더 이어서 하실 말씀해 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특히 12.3이랑 관련해서요.



이미진 

제 생각에 12.3은 예전에 비해 시대착오적인 부분이 있었던 계엄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사회적 충격이 빠르게 망각 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대신 그 자리를 포퓰리즘이나 대상화된 세계 감각 같은 것들이 채우고 있다는 느낌도 드는데 현실 정치에서 잘못된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그 전에 시대적인 과제로 받아들여야 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단순히 시대가 변했다, 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응축된 것들이 좀 더 적나라하게 불거져 나오는 것 같고요. 그런 면에서 확실히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간 것 같아요. 풀어나가 할 과제들도 장기적으로는 예전과 다르게 접근해야 하는 부분들이 생겨나는 것 같고요. 


12.3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은 아니지만 요즘 최진영 소설로 작업 중인 글이 하나 있는데, 최진영 소설을 읽으면서 사랑이 있고 그 반대편에 증오가 있는 게 아니라 사랑 안에 되게 많은 감정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랑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가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의로 가면 의도와는 상관없이 위계적으로 된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어요. 일단 제가 쓰고 있는 건 지금 미움이라는 주제를 쓰고 있어요. 일차적으로는 미움을 증오 혹은 혐오와 구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잘 전달될지는 모르겠어요.




윤재민 

이미진 평론가 지금 쓰고 계시는 그 글이 최진영 작가와 관련된 글인 거죠? 이 주제와 관련해서? 



이미진 

네. 그렇지만 극우 얘기를 본격적으로 하고 싶다라기보다는, 누군가를 대상화하는 일의 위험과 그렇게 하지 않기까지의 어려움에 대해서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어떤 면에서는 정말 문제가 있다고 할지라도요. 사회과학이나 일반적인 미디어에서는 얘기하기 어려운 부분을 문학에서는 아슬아슬하게나마 할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윤재민 

그렇죠. 그 글 게재되면 꼭 알려주세요. 



이미진 

예.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재민 

그러면 현재 평론가 혹시 관련해서 얘기하고 싶은 거 있으실까요?



현재 

좀 생뚱맞은 답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제가 등단하고 최근 2, 3년 정도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면 한국 사회에서도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제가 실제로 본 것 중에는 비평장 안에서 비평가들끼리 서로 마음 상하고 싸우는 일들도 꽤 눈에 띄었습니다. 정지돈 작가의 일도 그렇고요. 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날을 세우고 상처 주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근데 이 문학장 안에서의 감정이라는 게, 사실 그런 일들이 터지기 전부터 다들 맘속에 뭐가 쌓여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 일들이 있기도 전부터 벌써 비평장 내의 분위기에 대해 지적하는 글들이 몇몇 발표가 됐었어요. 굉장히 뭔가 감정적으로 이렇게 토로하는 그런 글도 봤었고, 그런데 저처럼 그 당시의 비평장 내의 분위기나 이런 거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봤을 때는 저 사람 갑자기 왜 저렇게 흥분해서 얘기하지? 맥락도 없이? 그렇게 보였었거든요.


근데 알고 보니 서로에 대한 앙금이나 축적된 감정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던 게 있었던 거예요. 다만 지면에서 오고 가고 하는 게 없어서 표면화되지 않았을 뿐이죠. 그래서 지면만 보면 되게 평온해 보이거나 서로에게 무관심해 보이는데, 실은 그 밑에서 쌓여가던 것들이 참고 참다가 어떤 사안이 트리거처럼 작용해서 왈칵 터져 나오는 거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됐어요. 그런데 그런 게 지금의 사회적인 분위기랑 맞물려서 악화되고 제대로 봉합되지도 않은 채 얼렁뚱땅 다음으로 넘어가 버리고요. 그래서 그런 문제들에 대해 비평가들에게 끊임없이 어떤 답안이나 혜안을 내놓길 요구할 게 아니라, 지금의 한국 문단에서 비평 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심회? 이런 것에 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한번 풀어볼 수 있는 기획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까랑 이어서 얘기하자면, 지금 기획 자체가 다들 거대하고 시의성 있는 주제에만 포커스를 맞춰서 기획되는 것 같은데, 문제가 되는 사안에 대해 시의성을 가지기 위해 매달리기보다는, 잠깐 한 템포 쉬어가는 느낌의 기획도 좋지 않을까? 왜냐하면 왠지 서로 할 말도 많이 쌓인 시점인 것 같고, 그런 것들이 이렇게 해소가 돼야지 나머지 논의에 대해서도 좀 더 솔직하고 건강한 논의들을 전개할 수 있을 것 같고 하니깐요.



윤재민 

저도 편하게 얘기를 해볼게요. 공감하는 의견이기도 해서. 저도 데뷔하고 얼마 안 돼서 아무것도 몰랐었던 시절이 있었을 거잖아요? 저도 현재 평론가가 방금 말한 그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어떻게 하면은 그런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인가, 없애야 할 것인가 라고 하는 문제는 생각해 봐야 할 거 같아요. 

그런데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무뎌져요. 그런 사례를 반복적으로 계속 보면요. 그러다 보면 사회가 다 그런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부분도 있어요. 당연히 자기 합리화고 비겁한 거죠. 한편으로는 분노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라고 하는 생각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럴 수만은 없는 거잖아요.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부분에서든 해야겠죠.


사실 안에서는 감정적으로 인간적으로 좋고 나쁘고 할 수 있죠. 사회가 원래 그런 거니까. 그 외부에서 무슨 계기가 됐을 때 그런 일들이 누군가의 뭔가가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이런 일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할 부분이 있어요.

우리 생활세계에 크게 밀려드는, 앞서 이야기한 커다란 세계상의 문제들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활동 영역에서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고민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새삼 저도 반성하게 되네요. 



이미진 

합리화라고 하셨는데 개인의 괴로움이랄까 이런 것도 있지만 사실은 구조 자체가 약간 그 안에서의 어떤 생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경쟁 구도라든지 이런 것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이 사회의 어떤 부분은 계속 변화하고 있는데 미디어로서의 문학이라는 거는 되게 잘 안 변한다는 느낌도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개인의 책임으로 공통의 문제를 전가시키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출판 산업이라는 특수한 성격이 반영되는 것 같은데 멀리 보자면 AI 등 기술적 영향도 분명히 있을 테니 1~2년 만에는 아니더라도 향후 한 10년, 20년 안에는 조금 그런 쪽으로 유연하게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중요한 과제가 될 것 같아요. 



윤재민 

이를 환기할 활동, 시도, 조망이 필요한 건 사실 같아요. 반복되지 않아야 될 것들은 반복되면 안 되잖아요. 지금 말씀하신 전쟁 이런 문제, 큰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런 노력은 분명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분위기가 조금 엄숙해졌는데. 이어서 공통 질문 이후 패널 각자에 개별 질문을 드리고자 해요. 요즘 쓰고 계시는 글들을 간단히 스포해 주셔도 좋고, 더 넓게는 지금 관심을 가지고 계시거나 혹은 앞으로 평론가로서 지금 천착하고 있거나 흥미가 있는 문학적 테마가 있다면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진 평론가, 먼저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미진 

지금 쓰고 싶은 거는 사실은 약간 기존의 틀로부터 이탈하는 거에 관심이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제가 살고 있는 지금은 경계라는 게 와해 되는 시대인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알게 모르게 이루어지는 이 와해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거의 살아남는 문제로 이어지는 그런 시대인 것 같기도 하고요. 뭐 하나 잘못하다가는 어느 한쪽으로 쏠려서 내가 나답게 살지 못하게 되는. 


AI가 글쓰기를 하게 되면서 글 쓰는 방식이나 이런 것들을 평론에서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도 아마 다들 고민을 다들 하고 계시지 않을까 싶은데, 저는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말하고 싶은 부분은, 어떤 면에서는 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무엇에 이끌리는지, 어째서 슬퍼하고 분노하고 기쁜지에 대한 자기만의 고유한 방식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요. 


개인적으로는 최근에는 퀴어나 탈식민 등의 주제에 관심이 있는데, 저에게는 그런 주제들이 오늘날의 폭력이나 어떤 규범적 한계점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줄 수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 주제적인 측면을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그 안에서 미묘한 부분들? 그런 것들이 작품을 통해 흘러나오는 지점들을 이야기하는 평론을 쓰고 싶어요. 아직 좀 추상적인 것 같긴 한데, 그런 부분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들을 꾸준히 다루고 싶고요. 지금은 소설 평론 위주로 쓰고 있긴 하지만 나중에는 시 평론도 써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고요.



윤재민 

저도 이미진 평론가가 말씀해 주신 바와 같이 구체적으로 언어화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미진 평론가 문제의식이랑 동기화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최근 세상을 보면 기존에 있었던 경계나 상식들이 무너지는 부분이 있잖아요? 무엇보다 AI 말씀해 주셨는데, LLM이 글쓰기 개념으로 들어오고 나서 그 경계가 아직 완전히 무너졌다고 볼 수 없지만, 그 경계 언저리의 판도가 바뀌고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래서 이미진 평론가가 그런 문제들을 큰 틀에서 조망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으신 것같은데 응원합니다. 이미진 평론가가 쓰실 시 비평도 궁금해요.



이미진 

괜히 얘기했나봐요. (웃음) 열심히 하겠습니다.



윤재민 

파이팅. 자, 그러면은 그다음에 현재 평론가 괜찮으세요? 



현재 

저는 근데 저한테 테마라는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서 보니까 있는 것 같더라고요. 당선작도 어떤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쓴 건 아닌데, 최근에 문장웹진에 쓴 글도 마찬가지고 모두 감정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이라서 일상에서는 자기표현도 잘 안되고 로봇처럼 지냅니다. 그런데 글만 쓰면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일상에서 속을 잘 안 내비치니까, 오히려 글 쓸 때 그게 밖으로 나오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평소에도 감정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만연한, 사람들이 살면서 흔히 겪고 시달리는 감정들이 있잖아요. 그런 걸 너무 사적인 감성으로만 풀기보다는, 다들 체감하는 그 모습 그대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만히 다뤄보고 싶고요.


그리고 저는 질투 같은 것도 재미있는 주제인 것 같아요. 저는 원래 살면서 누굴 질투해 보고 그런 적이 없었거든요. 제가 제 잘난 맛에 살아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기보다는 저는 질투를 할 바에야 선망하는 쪽이었어요. 그러니까 누가 멋있고 대단한 사람이 있으면 ‘아, 저 사람 참 멋지다. 언젠가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이렇게 항상 팬심으로 선망하는 입장이었는데 제가 직접 글을 쓰게 되니까 그때부터 질투가 생기더라고요.


왜냐하면 이제는 내가 그걸 해야 하니까. 그런데 막상 제가 실제로 해보니까 저는 저렇게는 절대로 못 할 것 같다 싶은 거예요. 예전에는 저한테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니까 작가들 쫓아다니고 하면 저 사람처럼 쓸 수 있겠지, 이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죽어도 저렇게는 못 쓰겠구나 싶은 게 느껴지더라고요. 벽처럼. 그리고 그때부터 질투가 생기더라고요. 예전에 엄청나게 좋아했던 작가들 제대로 쳐다도 못 보게 되고. 근데 그런 감정이 저한테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느낀 감정들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어요.


저도 언젠가는 좀 품이 넓은 이야기도 하게 되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일상이나 경험을 탐구하는 쪽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걱정 중의 하나가 너무 내 얘기만 하게 되면 폐쇄적인 방식으로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일부러 잘하지도 못하는 능청을 떨거나 과장을 섞고 그런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윤재민 

내 글이나 작업이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라고 하는 의심과 불안은 현재 평론가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누구한테나 있죠. 굉장히 진중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씀해 주신 것 같아요. 현재 평론가의 글에서도 그런 부분들을 느끼긴 했어요. 너무 의심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저는 현재 평론가의 글 열심히 보고 있거든요. 적어도 한 명은 있으니까. 지금 말씀하셨던 그 문학적 테마를 앞으로 잘 선보이기만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최선교 평론가 말씀해 주세요.



최선교 

문학적 테마는 청탁이 들어오면 생기곤 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청탁과 무관한 문제 의식을 갈고닦아서 자료를 수집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평론가가 문제의식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가 주로 생각하는 것은 소재보다 어떤 자세로 비평을 해야 하는가예요. 아까도 잠시 말씀드렸지만, 제가 성격이 급해서 결론을 빨리 내려는 경향이 있거든요. 교훈을 항상 줘야 될 것 같고. 그래야 내가 어느 정도 이 평론에서 가치 있는 대안을 제시한 것 같고. 그래서 계속 교훈, 봉합, 대안 이런 쪽으로 글을 쓰는 게 습관이 됐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그냥 지금 당장 입바른 말을 해서 글을 마무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섣부르게 제안하는 대안은 독창적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현상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 역시도 독창적으로 보이기 쉽고요. 하지만 그런 글들을 읽고 나면 결국 입바른 소리일 때가 많아요. 그래서 요즘은 스스로 자주 경계합니다. 독창적으로 보이려다가 이도 저도 아닌 말을 해 버리지 말자고……



이미진 

최선교 평론가님 글 읽었을 때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고 되게 맑은 결론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렇게 본인이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독자로서는 맑은 결론으로 느껴졌었어요.



윤재민 

최선교 평론가의 글 읽을 때마다 제가 느끼는 그 어떤 상쾌함 같은 게 있었거든요. 이를테면 인간 비인간 담론에 대한 비평적 레토릭(Rhetoric, 사람을 설득하기 위한 말과 글의 표현 기술) 관습에 대해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평론가의 생활세계에서의 문제의식이랑 연결시켜 글을 직조한 평론, 되게 좋아해요. 배운 부분도 있고요. 어느 쪽으로 함부로 가지 않고 소위 과정으로서의 비평적 태도를 관철하시는 거 같아요.

특히 평론가의 시 비평의 화법에서 그런 게 많이 느껴지거든요. 텍스트와 텍스트 혹은 생활세계 사이의 갭을 겹눈으로 조망하면서 그 시적 미덕을 도출하는 화법을 좋아하는데요. 이건 그냥 제 그냥 개인적인 궁금증이기도 해서 그런데, 평론가께서 제일 많이 영감을 받은 시인이나 혹은 비평가나 에세이스트 혹시 있나요?



최선교 

질문을 받고 쭉 생각해 봤는데 생각보다 시인이 없었고요, 대부분 소설가였습니다. 특히 토니 모리슨이나 옥타비아 버틀러처럼 유색 인종 여성 작가들이 쓴 소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왜 그럴까 생각해 봤는데 애초에 그 사람들이 유독 거짓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났어요. 그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는 그녀들이 가진 특정한 정체성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그 사람다움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런 작가들에게 끌리는 편입니다. 


글을 쓸 때 자주 생각하는 작가는 레슬리 제이미슨이에요. 그분은 대부분의 글에서 타인의 인생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직접 인용하는 방식을 자주 사용하거든요. 글의 전개 자체가 타인의 말과 행동의 인용을 따라서 흘러가요. 평론과 비슷하기도 한데요. 그 과정에서 느끼는 건 사람의 말을 정말 잘 들어야 이런 글을 쓸 수 있구나, 하는 거예요. 평론이라면 작품이 하는 말을 잘 들어야겠죠. 하지만 사람과 달리 작품은 직접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끔 평론에서 글을 이끌어 나갈 때, 작품보다 글을 쓰는 내가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레슬리 제이미슨의 글을 읽어요.



윤재민 

누군가의 말이나 이야기를 잘 듣는 태도에서 큰 영감을 받는 거라고 볼 수 있을까요? (최: 네) 듣고 보니 토니 모리슨이나 옥타비아 버틀러와 최선교 평론가 화법이 어딘가 닮은 부분이 있는 듯도 하고. 흥미롭네요. 제가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말씀하셔서 더 흥미로웠어요.

이어서 이미진 평론가한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등단작이 김기태론이잖아요. 김기태 소설의 리얼리즘에 노정한 유토피아적 충동에 주목하는 글이죠. 문장웹진에 발표한 <끝에서 두 번째 폭력>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좌담을 기획할 때 이 글을 읽고 문제의식에 많은 공감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끝에서 두 번째 폭력>에서 팔레스타인 문제와 소설 <김춘영>을 함께 배치한 게 굉장히 또 인상적이었어요.

한국문학 혹은 문화의 어떤 경향을 논할 때 일견 직접적으로 상관없어 보일 수도 있는 세계 각지의 유토피아적인 충동 혹은 증언을 적극적으로 회집·배치하는 비평적 글쓰기를 하고 계셔요. 글에서 굉장히 넓은 시야랑 첨예한 문제의식, 하고 싶은 말들이 날카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요. 국내외 여러 이슈에 깊은 관심을 당연히 가지고 있기에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오랜 기간 연구자 활동을 하시다가 비평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나 동기를 여쭤보고 싶어요.



이미진 

일단 잘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왜냐하면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두 번째 글을 발표하는 게 데뷔하고 되게 긴장되잖아요. 정말 잘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요. 원래 그 글은 작년 겨울에 한국비교문학회에서 발표를 한 번 했었던 걸 가지고 다시 썼는데 그때도 논문이 아닌 비평 형식으로 처음부터 썼어요. 왜냐하면 지금 와서 보면 아까 말씀하신 팔레스타인 관련된 번역서들도 많이 나왔지만 그때 당시에는 준비 단계였던 것 같은데 아직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적었어요. 물론 《팔레스타인 시 전집》과 같은 고무적인 사례도 있었고 저도 그로부터 영감을 받았지만요. 무엇보다 제가 아는 한에서는 아카데미 안에서 너무 얘기가 안 되고 있다고 생각해서 학회가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해서 발표를 했고, 그거를 나중에 고쳐서 비평문으로 싣게 됐어요. 어쨌든 그때 여러 가지로 고민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조세희로 박사논문을 썼는데, <끝에서 두 번째 폭력>을 쓸 당시에 황해문화에 발표한 조세희론을 같이 쓰고 있었어요. 논문을 쓸 때는 아무래도 이론적인 부분에 집중했었기 때문에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보이지 않았나 싶어요. 조세희는 1980년 이후 죄책감 때문에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죄책감은 개인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시대적인 부분도 크다고 생각해요. 그에 대한 질문은 아직 남아 있어요. 


또 하나는 당시에 글을 쓰면서 비폭력이나 용서의 문제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었어요. 그러니까 누군가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해 해도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넓게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 국가폭력, 혹은 특정 집단 간의 문제와도 연결될 것 같아요. 저는 여전히 작은 일에도 쉽게 억울하고 화가 나거든요. 근데 비폭력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다고 얘기할 수는 있는 걸까, 하는. 회의적이지만 뭔가가 더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부족하게나마 그런 얘기를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특히 글을 쓰는 과정에서 <사북 1980>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용서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돌고 돌아가야 하는 길인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고, 한 사람이 혼자서 만들어내는 결과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얽혀 있는 감정들이 함께 돌아가는 복잡한 과정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까 말씀드린 미움과 사랑의 관계와 같은 부분을 주제로 잡은 것도 넓게는 그 연장선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어요. 


말씀하신 국내외 이슈에 대한 관심 부분은 기획이라든지 이런 거라기보다는, 특이하다면 특이한데 제가 대학 졸업하고 한 4~5년 정도를 네 군데 정도 다른 나라에서 장기 체류한 적이 있어요. 


윤재민 

비즈니스 때문인가요? 



이미진 

비즈니스는 아니고 그냥 살았어요. 그냥 가서 워킹홀리데이 같은 것도 하고 코이카 인턴으로 아프리카에서 살기도 하고. 뭔지 모르겠는데 그냥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가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도 중반 정도인데 당시엔 답답한 마음에 막연히 한국을 벗어나서 다른 곳을 경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거기에서 어떻게든지 살아남아 보려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이러면서 살았었는데 그때 느꼈던 것 중에 하나가 한국에서 내가 되게 뭘 몰랐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이게 뭐라 해야 될까. 한국이 미디어라든지 이런 부분에 있어서 되게 막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생각보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내가 모르는 게 되게 많았구나 라는 생각을 일단 일차적으로 했어요. 그리고 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생각이 조금씩 바뀐 것 같아요. 미디어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되게 다양했고 아직 만나보지 않아서 몰랐던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에는 국제협력 쪽으로 진로를 바꿀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는데, 결국에는 한국에서 다시 문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어떻게 보면 현재 평론가의 방식대로 침잠하고 들어가서 뭔가 세계를 발견하는 방식도 있겠지만, 당시의 저는 약간 충격 같은 거를 원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으로써 경험한 부분들이 글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반영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말씀하신 부분과 같은 그런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윤재민 

방금 말씀하신 다양한 시공간 경험이 이미진 평론가의 초기 작업에 지금 묻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윤재민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평론가. 이게 현재 평론가 같은 경우는 스타일, 취향, 관점이 굉장히 뚜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재 평론가만의 방식으로 텍스트를 집요하게 글을 읽어낸 다음에, 발견한 빈틈에 뭔가 그것과 상관관계가 있는 다른 텍스트를 인용하거나 반복해서 아주 독특한 리듬과 글쓰기로 자기 텍스트를 하나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드는데. 장인정신이 느껴지기도 하는 매우 밀도 높은 글을 쓴다는 인상이에요. 만나면 그냥 한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어떤 텍스트나 문학적 대상 혹은 현상에서 비평적 읽기와 쓰기의 욕망을 느끼는지 궁금합니다.


현재 

우선은 질문을 보고 너무 반가웠고요. 제가 딱 듣고 싶었던 이야기라 그렇습니다. 제가 아까부터 계속 강보원 작가님 얘기를 했지만 강보원론 쓸 때도 강보원 작가를 단순히 쭉 잘 따라가는 게 아니라 어떤 지점에서는 그분의 빈틈 같은 걸 발견해서 약간 비틀어서 조명해 보고 싶은 바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선작만 해도 그런 식으로 양쪽을 다 보려는 마음으로 썼던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에 영감을 많이 받은 텍스트 중의 하나가 보리스 그로이스의 《반철학 입문》인데, 그게 자기가 반철학자라고 생각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평론을 모아둔 선집이거든요. 그중에 한국에 거의 번역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20세기 러시아의 레프 셰스토프라는 철학자에 대해서 그로이스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셰스토프가 평생을 걸쳐서 니체나 이런 작가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으로 글을 썼는데, 왜 그렇게 했냐면 그 사람들 입장에 동의를 못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누구보다 그 사람들에게 친연성을 느끼고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에 비판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누구를 비판한다고 하면 그렇지가 않잖아요. 지금의 한국 문학 비평장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은 특히 더 그렇죠. 입장이 가깝기는커녕 서로 완전히 결이 다른 사람끼리 비판적으로 말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죠. 그러다 보니 계속 반감만 재생산되거나 말이 공허하게 헛도는 수밖에 없고요. 근데 셰스토프는 오히려 자기 편이라고 생각한 사람을 걸고 넘어졌다는 건데, 그래서 이때 셰스토프의 비판은 비판이 되는 대상을 거쳐서 약간 이렇게 한 바퀴 빙 돌아오게 되는 자기비판이 되기도 하는 거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제가 강보원론이라든지, 문장웹진에 발표한 김수영론 같은 경우에도, 김수영 시인의 위악적인 면모를 비판적으로 다루기도 했는데, 그게 제가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에 공감을 못 하고 이해를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저도 평소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기 때문에 한 번 뒤집어본 거거든요. 그래서 이 비판은 어떻게 보면 자기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비판이 될 지도 모르는 거고요. 저는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지금 어떤 텍스트에서 읽기의 욕망을 느끼는지 이렇게 물어보셨는데, 저는 제가 오히려 강하게 끌리는, 그러니까 공감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저자를 자꾸 뒤집어보고 싶은 그런 욕구가 저한테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누군가를 비판하는 거처럼 보일 때조차도 제가 쓰는 글이 모두 저나 제 근처에 관한 얘기가 되길 바랍니다.



윤재민 

이건 그냥 제 느낌인데, 화두와 태도에서 이런 게 감지되네요. 일단 자기를 대면하고, 그로부터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방금 말씀하신 자기 집단, 동질 집단 내에서의 비판이라고 하는 맥락도 큰 틀에서 그런 맥락 같기도 하고요. 시간이 지나면 평론가의 동료를 만나게 될 거고 그러면 지금보다 더 첨예하게 문제의식이 확장되고 유의미한 방식으로 반복되겠죠.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되네요. 



윤재민 

거의 마무립니다. 이번엔 공통적 질문드리고 싶어요. 저희가 다 각자 다른 지역과 정체성 그리고 인생 경로를 겪었다가 하필 한국에 태어나서 심지어 문학 평론가로서 데뷔를 해서 이 자리에서 만난 거잖아요. 이건 제가 데뷔하고 나서부터 지금껏 가지고 있는 화두이기도 한데 도대체 이 문학 평론가라고 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지예요. 정답이 없는 문제죠. 그러면서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죠. 우리에게 붙은 문학 평론가, 평론 쓰는 사람, 문학 평론 쓰는 사람이라는 이러한 수식어가 단순히 직업 혹은 커리어 이상의 의미인 건 분명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묻고 싶은 게 각자의 현실 속에서 문학 평론가로 살아가고 생활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고, 그리고 더불어서 이것을 앞으로 어떻게 유지하고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어떤 문학 평론가, 평론 쓰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어요.



현재 

어떤 문학 평론가로 기억되고 싶냐 하면 그건 아직은 너무 요원한 일인 것 같고요. 기억이 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일단 저는 제가 쓰는 글에 유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합니다. 제가 일상에서는 굉장히 재미없고 심각한 사람인데, 그래서 오히려 유머를 배우고 싶어요. 타고난 끼가 없어서 그게 잘 될진 모르겠지만요. 약간 테리 이글턴 같은 평론가로 기억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윤재민 

테리 이글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비평가의 이상향 중에 하나죠. 굉장히 큰 포부네요. 응원합니다. 저는 현재 평론가 글에 유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론가는 이미 기억되는 평론 쓰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계속 현재 평론가의 글을 볼 수 있길 바랍니다. 

다음은 최선교 평론가 말씀해 주실 있을까요?


 

최선교 

저는 아는 것만 쓰는 평론가가 되고 싶어요. 평론은 모르는 걸 아는 척하기가 너무 쉬운 장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쓰는 평론가는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해요. 가끔은 내가 안다고 착각할 때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마감도 잘 지키는 평론가가 되고 싶은데요. 어떤 평론가가 우리는 회사로 치면 납품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는데, 실제로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다 보니까 마감이라는 게 참 중요한 거잖아요. 기본적인 태도를 잘 지키는 평론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윤재민 

담백하네요. 근면, 성실, 정직.



최선교 

진짜 그렇게 하는 게 저한테도 좋을 것 같아요.



윤재민 

마감을 무조건 지키는 비평가 대 테리 이글턴. 뭐가 더 되기 어려운 존재일까요. (현: 저는 그 전자가 더 어려울 것 같아요.) 테리 이글턴도 마감 안 지킬 것 같아요. (최: 그렇죠.) 왠지 그럴 것 같아요. 

최선교 평론가의 대답은 평론가 글을 읽는 느낌이네요. 정직한 문학 평론을 쓰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태도. 기억하겠습니다. 마감 잘 지키시는지 가끔 사람들한테 물어보겠습니다. 그런데 마감 기한에 너무 연연하지 마시고 글 많이 써주세요. 어쨌든 게재만 되면 됐죠. 게재가 곧 마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미진 평론가.



이미진 

저는 테리 이글턴 받고 벤야민. 농담이고 아니 농담은 아니고요. 그러니까 만약에 비평가로서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최근에 갑자기 발터 벤야민이 생각 났어요. 벤야민은 이론적으로 정밀하면서도 독창적이기도 하지만 약간 슬프고 인간적인 면도 있어서 좋아하는데, 죽을 때까지 다시 봐도 좋을 것 같아요. 다 얘기하셨는데 저만 얘기를 안 한 것 같아 가지고. 워낙에 많이 사랑받는 비평가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제가 드는 생각은 (문학 비평 활동을 하면서) 원고료를 받는 것과 내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독자 차이도 있는 것 같아요. 논문은 같은 연구자들끼리 보는 경향이 있고 평론은 어쨌든 다른 사람들도 더 많이 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저는 재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읽고 싶은 그런 글을 쓰고 싶어요. 저 자신도 글을 쓸 때 행복감이 있거든요. 다른 글 쓰시는 분들처럼 고통 속에서의 행복감일 텐데. 그런 게 조금이라도 전달되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는 이제 시작하는 시점이지만 글 쓰는 데 있어서는 끝까지 솔직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어요. 


윤재민 

최선교 평론가와 통하는 부분인데, 정직하게 쓰고자 하는 윤리적 태도.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어려운 일이죠. 윤리적인 태도를 견지해 나가며 유의미한 글을 쓰는 동시에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는 비평가가 되고 싶다. 벤야민 이야기를 하신 부분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이미진 

너무 부끄러워서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하나씩 다 말씀하셔서 용기 내 봤습니다.



윤재민 

어차피 최선교 평론가에 비하면 충분히 현실성 있는 목표라 생각됩니다. 평론가들 만나 얘기 나누면서 저도 많은 자극을 받네요. 얘기하다 보니 저도 목표가 생각났는데, 바보 될까 봐 여기서는 말 안 하겠습니다. (궁금하긴 하네요.) 저도 얘기해요? (네. 얘기해 주시면.) 그래요? 음, 저의 목표는 제대로 된 책 두세 권 정도 낸 비평가? 소박하죠. 읽히는 책 두세 권 정도를 상재한 평론가로 목표를 잡고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테리 이글턴, 발터 벤야민 무엇보다도 마감을 무조건 지키는 존재하지 않는 비평가, 이런 거 저는 꿈도 안 꿔요. 저는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꿈이 작은 사람.



현재 

근데 보면 읽히는 책 두세 권 내는 비평가도 잘 없는 것 같아요. 신형철 평론가님 정도?



윤재민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요. 다 높은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는 거죠.



이미진 

어차피 이상향이라면 원하는 목표를 가지면 되지 않을까요?



윤재민 

높게 잡아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위로 올라가겠죠. 그렇게 일단 서로를 응원합시다. 그리고 진짜 마지막 질문인데 이건 하기 싫으시면 노코멘트하셔도 됩니다.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며 비평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분들도 있지만, 이 지면을 통해서 평론가들 알게 되시는 동료들이 있을 수 있어요. 독자들도 그렇고요. 그중에서 비평계 동료들에게 혹시 이 지면을 빌려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은 간단하게 해 주시죠.



이미진 

비평하는 동료들이요?



윤재민 

네. 비평계의 동료들. 문학 비평이겠죠. 기본적으로는. 저희의 동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은. 이런 질문은 거의 안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한번 드려봤어요.

최선교 평론가 먼저 어떨까요? 



최선교 

다들 너무 수고가 많으시다는 말씀을 하고 싶어요. 저희가 비평 원고에 쏟는 노동력을 따지고 보면 절대 정당한 급여를 받고 있는 상황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누구보다도 이 상황을 잘 알고, 한편 이 상황이 쉽게 개선될 수 없으리라는 사실까지 알면서 말도 안 되는 노동량을 견딘다는 점에서 정말 다들 힘내셨으면 좋겠어요.  굉장히 비현실적처럼 들리겠지만 진짜 평론만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길을 한 번쯤은 모색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평론가면 과로 사회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는데, 정작 그 비판을 하는 저희는 과로를 하고 있는 상태가 많잖아요. 모순과 괴리를 일단은 잘 참고 언젠가는 같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윤재민 

너무 공감 가네요. 이게 우리끼리만 통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너무 다들 애쓰는 와중에 여러 가지 (생활에) 애로사항들이 많잖아요. 우리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반복되면 안 되는 문제들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가 뭔가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야 될 부분도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현실과 생활세계에 대해서도 더 여러 가지 논의들을 좀 더 머리를 맞대고 한번 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정말 좋은 말씀이셨습니다. 

그다음 이미진 평론가.



이미진 

저도 이제 막 비평 시작한 입장에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아까 현재 평론가가 얘기를 해 준 거랑도 연결이 될 것 같아요. 단순하게는 많은 이야기들을 서로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그런 공론장? 같은 게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허심탄회하게 서로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그런 평론가 동료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윤재민 

그렇죠.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를 근본적으로 한번 생각을 해볼 필요도 있는 것 같아요. 그 부분은 저도 여기서 활동하며 실감한 부분도 있고 반성해야 하는 부분도 있는데. 박동수 평론가의 《동료에게 말 걸기》라는 책이 떠오르네요. 어떤 동료들에게는 평론가의 이 지면이 첫인사일 수도 있는데, 평론가가 이렇게 먼저 좋은 말 걸기를 시도해 주신 거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평론가.



현재 

제가 지면에 글 쓰는 거, 대담하는 거, 인터뷰하는 거, 강의하는 거 다 한 번씩은 이제 해보게 되었는데, 제가 예전에 볼 땐 몰랐는데 직접 해보니까 이게 진짜 힘들고 고단한 일이었구나, 요즘 그거를 깨닫는 중이고요. 그래서 다들 각자가 엄청나게 애쓰고 고생하고 계시는 거였구나! 그걸 깨닫는 단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파이팅 하셨으면 좋겠다. 그냥 그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윤재민 

네. 알겠습니다. 긴 시간 이렇게 대담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불타는 세상 속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는 앤솔로지 책의 한 대목, 주디스 버틀러가 쓴 챕터에 나오는 말이에요.

우리가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것들에 대해서 다른 역사,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왜 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주디스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고요. 이게 “다른 이들의 고통을 우리 자신의 고통으로 동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읽어야 된다.”라고 말이죠. 


저는 이 대목에 굉장히 오래 눈길이 갔어요.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읽잖아요. 우리와 다른 역사와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을 읽을 때도요. 이를테면 누군가는 사람들의 고통으로부터 나의 고통을 등치시키기도 합니다. 그런 읽기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죠. 하지만 자신의 맥락으로 누군가의 이야기와 감정을 단순히 환원해서 자기화하는 읽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고통과 상황을 그리고 어떠한 역사적인 맥락의 어떤 결들이 결코 나와 같지 않구나, 그 간극을 깊이 체감하는 방식으로 책을 읽어야 된다라고 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태도에서 문학 평론가로서의 어떤 윤리적인 태도를 겹쳐 읽었어요. 

우리는 전부 다른 사람이고, 다른 위치와 입장으로부터 출발하여 다르게 읽죠. 그러한 가운데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으면서 새로운 틈새나 활로를 모색하기도 하고요. 오늘 대화가 구체적인 어떠한 상황에 대한 정답이나 연대를 구하는 자리는 아니지요. 그렇지만 오늘처럼 각자 다르게 읽는 사람들이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장이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긴 시간 너무 고생하셨고요. 오늘 좌담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패널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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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기획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

[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문장웹진 기획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서수 작년에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자와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특정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었고, 각본 작업에 동참해줄 작가를 구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에 각색 일을 했었기에 지인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내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작가님 이름으로 챗GPT에 검색을 해 봤어요.” 그가 가방에서 파일 홀더를 꺼내더니 A4 용지를 넘기며 말했다. “약력과 작품관 같은 걸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제가 재미있는 걸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서수 작가가 쓸 법한 시놉시스를 한 편 써달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한테 제안했던 그 소재로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각본 작업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이서수라는 소설가가 그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이미 테스트해봤다니…… 나는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상태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나처럼 썼겠느냐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챗GPT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조합해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정확히 내가 만들 법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전개 방향이 모두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를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걸 생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1분도 안 걸렸죠, 뭐. 아시잖아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의 짜임새로 시놉시스를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예측해보니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의 1분과 인간의 1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나보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앞으론 이런 일을 자주 겪을 수 있겠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스토리텔링 산업과 인공지능이 합쳐졌을 때 내가 쓴 소설은 AI에 생성을 위한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과 책 리뷰, 인터뷰 기사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임에도 데이터만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특수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는 AI로부터 시놉시스를 얻는 데서 멈추었고, 이후의 작업은 인간 이서수와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

  • 이서수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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