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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특집좌담(소설)] 안다무(安穩-多情-無害) 시대와 위험한 소설들

  • 작성일 2026-10-01

[문장웹진 특집좌담(소설)]


안다무(安穩-多情-無害) 시대와 위험한 소설들


진행 : 박인성 평론가

패널 : 이미상 소설가, 위수정 소설가

기획 : 이주란 편집위원, 박인성 평론가




박인성

문장웹진 기획좌담 10월호에 게재될 소설 파트 좌담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회 겸 토론 참여자로 이번 좌담회에 참여하게 된 문학평론가 박인성입니다.

좌담의 주제는 ‘안다무 시대와 위험한 소설들’입니다. 

위수정, 이미상 두 분 소설가를 모시고 함께 이야기 나눠볼 텐데요.두 분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리고 최근 근황도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수정

안녕하세요. 2017년부터 소설을 발표하고 쓰고 있는 위수정이라고 합니다.개인적으로 좀 힘든 일이 있어서 최근에는 소설을 잘 못 쓰고 있는데 이제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소설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인성

최근에 이상문학상 수상이라는 경사도 있었기 때문에. (웃음)



위수정

그 상 덕분에 제가 평소에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제안들을 받아서 즐겁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확실히 소설 쓰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어요.제가 사소한 일에도 에너지를 많이 쓰고, 또 멀티가 잘 되는 사람은 아니라서, 어려운 점도 있지만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상

저는 소설을 쓰는 이미상입니다. 근황은 소설은 열심히 쓰지만 쓴 것을 내보내기는 싫은 상태입니다. (웃음) 그냥 집에 계속 쌓아놓고만 싶습니다.



박인성

그것은 개인적인 만족도의 문제일까요?



이미상

만족도도 그렇고 그냥 헤매는 거죠. 늘 그렇듯 엄청 헤매고 있습니다.



박인성

알겠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두 분 모두 열심히 쓰고 있으나 뜻처럼 원활하지는 않다는 말씀이네요.



이미상

그렇죠. (웃음) 셋 다 마찬가지죠.



박인성

저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두 분을 이렇게 모시게 된 건 두 분이 이번 주제에 잘 어울리는 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찾아보니까 두 분이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에 실린 <동시대—새로움> 기획에 나란히 산문을 발표하신 적이 있으시더라고요.이미상 작가는 실험을 "스스로 자극을 고안해 주입하고, 그로부터 파생된 효과를 관찰하고, 창작물에 적용하는 것"(<삼각플라스크가 종이 되어 울리면>)으로 다시 정의해 "사적이고 만만한 것"으로 끌어내리셨고, 위수정 작가는 "그때도 지금도 '전위적'이라는 수식을 동일하게 붙이는 것은 전혀 전위적이지 않다."(<새로울 것 없는 나의 우울에 대하여>)고 쓰셨습니다.두 글 모두 이제 새로움이라는 요구 자체에서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는 글이었다고 읽었는데요.그 글이 쓰인 후 다소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각자에게 갱신이나 새로움이라는 말의 무게가 어떻게 남아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또 두 분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문학 장이나 문학의 풍경은 좀 어떻게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미상 저때 정의를 잘해놨군요. 지금의 저보다 낫네요. (웃음) 새로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기보다는 어떻게 새로움을 소설에 집어넣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소설을 저대로 쓰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새로움은 소설가라면 누구나 바라고 추구하지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는 것, 나는 새롭게 한다고 했는데 남들은 아니라고 하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하고, 나한테 새로운 시도가 보수적인 외양을 띌 수도 있고요. 어쨌든 새로움은 열심히 추구하지만 결과는 알 수 없는 과정이랄까요?

박인성 징후적 독해라는 말 많이 쓰잖아요. 예를 들어, “새로움이라는 건 이렇게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징후적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도 많이 이야기를 하듯이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요즘에는 동시대적이고 가시적인 것들을 우선적으로 찾거나 반영하는 경향들이 강해져서, 소설에서도 새로운 소재나 현상, 동시대적 사건이나 이슈를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그런 경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미상

요즘은 유행이 빨리 바뀐다고 느껴요. 제가 유행의 흐름을 아예 모르는 스타일은 아닌데도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빨라요. 예컨대 주제적으로 남성성과 노동 웨이브가 올 거라는 건 알죠. 하지만 소설은 쓰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완성하면 유행이 끝나 있더라구요. 그래서 전에도 사석에서 말한 적 있지만, 문예지 기획은 나왔는데 들어갈 소설은 아직 도착하지 못한 느낌? 그래서 요즘에는 차라리 속이 편해요. 유행에 따라가질 못하겠으니 초조하기보다 그냥 못하겠다, 포기. 포기하기 전까지 마음의 부침이 있긴 했고요. 



위수정

그때가 4년 전이었죠. 그 글을 썼던 때가 생각이 나는데 그때 저의 생각을 특별히 갱신하고 싶은 마음은 크게 없어요. 왜냐하면 그 글 자체가 일반론에 가깝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문학에서 새로움이라는 주제 자체가 역시나 새롭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그때는 좀 더 냉소적이었죠.

만약에 갱신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때 가졌던 그 냉소적인 마음. (웃음) 그 마음을 갱신하고 싶다라는 생각은 있어요. 지금은 냉소적인 마음이 문학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느끼고 있고 새로움에 대해서 고민하는 그 상태는 계속되어야 하지 않을까. 계속 질문하고 말하는 것, 그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형식이나 서사나 소재의 새로움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새로움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그 새로움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로 질문의 방향을 달리 해야할 것 같아요. 왜 우리는 자꾸 어떤 새로움에 관해서 질문하는가. 클래식에 관해 말할 때에는 인류 공통의 보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잖아요.작가로서 소위 말하는 ’트렌드‘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아니면 어떤 보편성, 시대를 불문하고 이어져 온 어떤 가치나 질문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그 두 가지가 사실은 대비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항상 고민하지 않을 수는 없어요.

’내 글이 올드한가‘라는 고민은 치명적이거든요.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늘 내가 쓰는 글에 어떤 낯선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항상 품고 가는 것 같아요.



박인성

두 분 이야기를 듣다 보니, 방향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결로 모이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바깥에 있는 새로움을 겨냥해 그것을 의식적으로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내부의 태도일 수도 있고 작가와 자기 작품과의 지속적인 연결의 차원에서 새로움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상

정신 승리를 위해서 스스로에게 항상 하는 말이지만, 한계가 곧 개성이기 때문에, 불가능이 새로움을 낳게 하는 토양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저는 늦은 나이에 데뷔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올드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요. (웃음)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추구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무언가가 생성되는 게 개성이고 새로움이겠죠.



박인성

작가가 추구할 수 있는 방향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의식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통제할 수는 없는 지점들을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이번 좌담의 제목에는 굳이 ’위험한 소설‘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본격적으로 좌담을 시작하기 전에 이 말이 두 분한테 어떻게 좀 와닿는지 혹은 와닿지 않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웃음) 경계심이 드는 표현인지, 아니면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위수정

’위험한 소설이 뭘까?‘ 생각을 해보면 아마 동시대 독자들에게 어떤 불편함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을 해요.각 시대마다 그런 작품들이 분명히 있었잖아요. 지금까지 읽히는 고전으로 불리는 제품들도 (그 당시에는) 《보바리 부인》도 그랬었고, 그리고 사드나 바타유는 말할 것도 없고 《홍길동전》도 그랬었잖아요. (웃음) 사실은 그래서 문학이라는 것은 체계화된 사회의 규범화된 시스템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불화를 전제로 하는 장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그런 의미로 저는 문학이라는 장르 자체가 위험함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나, 기본값이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박인성

이미 소설이나 문학이라는 말 안에 위험함이라는 표현이 늘 포함되어 있다는 말씀이네요.



위수정

네. 위험하지 않은 소설이라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역설적인 표현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미상

저에게 ‘위험한 소설’이라 함은, 책 추천사에 적혀 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상투적인 표현이 되어버린. 그것이 저의 정의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문학을 잘 몰라서 이러는데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위험한 소설이 어떤 것인지. 자주 못 읽어본 것 같기도 하고요. 솔직히 얘기해서 모른다가 저의 답인데, 어쩌죠......



박인성

(웃음) 맞습니다. 우리가 함께 고려해야 할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소설의 좌표를 생각해 보는 작업과 연결된 답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나눠본 뒤 마지막에 다시 한번 여쭤보면서, 재정의해야 할 부분이 있는지도 뒷부분에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위험한 소설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전에, 먼저 현상으로서의 '안다무(안온·다정·무해)' 경향을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이 경향을 저격하거나 비판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이것이 문학만의 현상이 아니라 시대 전반의 감각의 문제인 것 같아서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사람들은 푸바오에 열광했었죠. 타인과의 접촉은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푸바오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일에는 다들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해한 것, 귀여운 것에 열광했던 분위기에는, 타인을 감염의 위협으로 상상하게 된 시대에 '무해함'을 요구하는 태도가 형성된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고요.

실제로 위로나 힐링을 내세운 에세이는 출판 시장의 스테디셀러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알고리즘과 숏폼이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콘텐츠의 세계, 그리고 출판·영상 플랫폼에서 이어지는 비슷한 경향의 작품들이 이 흐름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두 분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이 시장의 독자이자 소비자이기도 하니까, 일상에서 이런 무해함의 취향을 가장 뚜렷하게 경험하는 순간이 어떤 순간인지 궁금했습니다.



이미상

안다무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안온, 다정, 무해를 내 소설에 적용했을 때, 나는 안온이 몇 퍼센트, 다정이 몇 퍼센트, 무해가 몇 퍼센트일까 따져보기도 했고요. 일단은 세 단어가 뭉쳐 있기에 단어들을 쪼개서 나 스스로는 정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요. 결론적으로 제가 생각한 것은, 안다무 현상이라고 뭉뚱그려 말할 때, 멸균과 조금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 같아요. 나와 다른 존재와의 부대낌, 갈등, 긴장 같은 것을 일소한 상태인 멸균을 안다무와 연결할 때 저한테는 개념적으로 조금 와 닿았어요. 안온, 다정, 무해, 이 셋도 쪼개야 하는데 못하겠고요...... 그것은 평론가들이 해주시고요. 말하고 싶은 건, 정의를 내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에요. 안온과 다정과 무해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사적 정의 내리고, 그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소설에 도입할지 하는 것이요. 


저도 힐링물을 좋아해요. 인스타그램에서 피지 짜는 영상만 보는 사람이거든요. 그거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저도 작품에서 긴장과 갈등을 보는 게 피곤하기 때문에, 드라마에서도 갈등은 건너뛰기하고 해소만 딱 보기 때문에, 안다무 좋아하는 마음 잘 알죠. 삶이 유해하기에 콘텐츠에서까지 유해함을 보고 싶지 않고. 생활이 긴장의 연속이라 쉬고 싶고. 저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박인성 저도 귀지 제거나 잉그로운 헤어 영상을 봅니다. (웃음) (이 : 잉그로운 헤어, 제 최애입니다.) 

위수정 작가님 말씀도 더 들어보겠습니다. 

위수정 ’안온, 다정, 무해‘라는 것이 트렌드가 된 이유는 독자들이 이 세계의 유해함에 관해 예민하게 감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문학에서 ’안다무‘라고 지칭할 때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한 것 같지만요. 

어쨌든 세계가 유해하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좀 벗어나서 나를 보호하고 싶은 보호 본능. 그런 것의 발현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도피할 곳이 필요하잖아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은. 저도 독자로서 때때로 다정하고 따뜻한 작품을 읽고 싶을 때도 있고요. 트렌드라는 것이 작동하는 원리가 그런 것 같아요. 이 시대의 우리가 어떤 것에 피로감과 위협을 느끼고 있는지를 가장 빠르게 보여주는 것.


너무나 잔혹하고 폭력적인 세계를 다른 시대보다 더 빠르고 구체적으로 듣고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에 노출되는 내 스스로가 너무나 취약하고 상처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것을 차단하기에도 손쉬운 세계이기도 하고요. 신자유주의 시대가 그렇잖아요.그래서 사실은 그런 경향이 어찌 보면 다른 의미로 위험한 시대일 수도 있는 건데, 저도 현실도피성 콘텐츠를 많이 소비하긴 합니다.



박인성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죠.



위수정 

네. 맞아요. 저 같은 경우는 동물 관련 콘텐츠를 자주 보게 됩니다. 알고리즘이 저를 그쪽으로 자꾸 데려가요. 아니면 건강한 요리법 같은 거 그리고 명상은 하지는 않지만, 스트레스가 밀려올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싱잉볼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이미상

저도 싱잉볼 자주 틀어놔요. 



위수정

네. 빗소리 ASMR을 켜두고 글을 쓸 때도 있고, 운동을 하기도 하고. 어렸을 때는 오히려 더 어두운 곳으로 침잠하고 싶은 욕망도 있었는데 나이가 드니 그런 것들에서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고 무해한 콘텐츠를 동력으로 소설을 쓰기 위한 에너지를 얻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박인성

두 분 말씀에 공통적인 것은, 결국 세상의 유해함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우리가 숨 쉴 틈, 숨 쉴 구멍을 얻으려 한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동시에 그것이 멸균 효과를 가진다는 점에서는, 이미상 작가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유해한 것들을 우리 삶에서 완전히 떨어뜨려 놓기 위한 제스처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분명히 이 태도 안에서도 스펙트럼이 나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어서 질문을 드리자면, ’안다무‘는 결국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편함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반대편에는 흔히 '사이다패스'라고 이야기되는 경향이 있죠. 고구마 전개, 사이다 전개라고 할 때의 '사이다'에 사이코패스를 결합한 말로, 사이다만을 원하는 중독적인 독서 경향을 가리키는데, 웹소설 독자층에서 주로 이런 사이다패스 경향이 많이 이야기됩니다. 도파민 중심의 서사, 강렬하고 빠른 전개를 가진 이야기들이요.

예를 들어 최근의 <참교육>처럼 복잡한 법리적 과정이나 정의의 관철 과정보다 일단 두들겨 패는, 폭력이라는 가장 심플하고 확실한 방법을 쓰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우리 사회 속에 존재하는 빌런들을 어떻게 배제하고 멸균할 것인가에 대한 상상력과도 잘 연결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무해함을 파는 시장과 또 한편에 존재하는 도파민을 파는 시장, 이 두 시장의 존재를 당연히 실감하시겠지만, 그 사이의 중간지대에서 문학의 위치 혹은 두 분 소설의 위치는 어디쯤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라고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하네요.



위수정

동떨어질 수 있을까요. 도파민에 대해 찾아보니 성취감이나 쾌감을 느낄 때 나오는 신경 전달 물질이더라고요. 그리고 세로토닌이라는 것도 있는데요. 일상의 충만함과 평온함을 느낄 때 분비된다고 합니다. 책이 펼쳐져 있고, 창 밖에는 비가 내리거나 나무들이 보이고, 고양이가 소파 위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그런 방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가까운 이와 담소를 나누는, 스트레스가 없는 일상. 하지만 그런 것도 반복되면 지루해지죠.


그럼 이제 <참교육> 쪽으로 가는 거죠. 세상의 더럽고 부조리한 것들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면서 정의의 사도들이 등장해 말 그대로 ’참교육‘을 시전하는 기승전결의 서사들. 우리는 그 두 극단을 손쉽게 왕복할 수 있어요. 버튼 하나만 누르면 친절하게 눈앞에 펼쳐주니까요. 때문에 대중들이 점점 소설에서 멀어지고 있는 건 당연한 거라 생각하고, 작가로서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불만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 이해는 해요. 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위수정

하지만 문자를 읽고 해독하고 상상할 때 느껴지는 만족감은 또 다른 영역이에요.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볼 때, 굳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자면 제 소설은 도파민 쪽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일종의 쾌감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렇습니다. 아닌가요? 어쨌든 둘 중에서 어느 쪽에 가까운지에 대해 택하라고 하시면 도파민 쪽이겠지만, 사실은 코르티솔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스트레스 호르몬. 경중의 차이는 있겠으나 소설 안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독자는 일종의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독자를 괴롭히기 위한 장치라기 보다는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단순한 행복이나 쾌감 또는 평온한 즐거움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박인성

문학이 위치한 제3의 포지션 같은 것들이 분명히 있겠죠.



이미상

일단 무해함을 파는 시장과 도파민을 파는 시장, 이 비교, 너무 좋다고 생각해요. (웃음) 양극단을 원하는 것이 지금 현재 문화의 특징인 것 같아요. 확 가라앉았다가, 확 솟구치는. 공통점은 어쨌든 극단이고, 그 둘을 오가는 운동성 자체가 재미를 줄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저는 전개가 강렬하고 빠르다고 해서 자동으로 도파민이 나오지는 않아요. 사람을 엄청나게 죽여도 자극이 없어요. 지루한 거죠. 


사실은 저에게 새롭지 않은 서사는 패턴화된 서사예요. 전개가 빠르더라도 루트가 정해져 있으면 뭔가 자극이 안 돼요. 한국 순문학에서는 인물이 너무 돌아다니질 않는다고 하는데, 저도 약간 그런 스타일이긴 하지만, 활동성이 높은 작품들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하기도 해요. 어차피 a에서 b라는 정해진 루트로 가는데 엄청나게 돌아다닌다 한들 제자리걸음 아닌가. 예측하지 못한 전개가 펼쳐질 때 도파민이 터지죠. 


그리고 시리즈물 같은 경우에 도파민이 계속 터지긴 어려워요. 일본 애니메이션도 처음에는 심장 벌렁거리지만 1화, 2화, 3화, 패턴이 계속 똑같으면 더 잔인하게 죽인다 한들 흥분되지는 않죠. 어떻게 보면 초반에 도파민이 샘솟았던 것을 반복할 때, 그 패턴을 학습했을 때, 그것에 익숙해진 것이 도파민 자체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는 것 같아요. 패턴에 친숙해진다는 건 내가 그 세계에 속한다는 느낌을 주니까요. 흥분과 쾌감보다 작품세계의 일원이 되는 소속감이 더욱 깊고 오래 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사이다 서사 같은 경우에도 도파민 폭발보다 어찌 보면 해소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뭔가 마음이 풀리는 기분. 마음이 풀려서 계속 보고 싶은 기분. 울분의 해소. 그런 쪽이 더 와 닿는데, 이럴 때 제가 젊지 않다는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 왠지요.



박인성

<범죄도시> 같은 작품 보면 뭔가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정직하게 직진하는 원 패턴이잖아요. 마동석이 범인들을 신나게 두들겨 팬다. 매번 더 큰 자극으로요.



위수정

작가님이 표현하신 도파민 아니면 안다무, 둘 다 결국에는 내가 아는 세계를 안전한 곳에서 향유하고 싶은 마음인 거죠. 반면에 소설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미상 작가님이 말씀하신 부분은 저도 동감을 하는데, 영화의 예를 들어보면, 처음에는 블록버스터를 열광하면서 재미있게 보다가 이후에는 예술영화에 흥미를 갖게 되죠. 그렇다고 예술영화만 보게 되는 건 아니지만요.

내가 아는 세계의 기승전결과 권선징악이 펼쳐지는 것에 만족과 위안을 얻다가 이후에는 내가 모르는 세계, 내가 놓치고 있었던 세계로 관심이 확장된다고 생각해요. 낯설기 때문에 그 세계는 편하지 않죠. 우리에게 안도를 주기보다는 불안과 의문을 던져주니까요. ’대중‘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건 조금 조심스럽긴 하지만, 불편함 쪽으로 가지 않고, 내가 보고 싶은 세계 그리고 내가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 안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그다지 좋은 현상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자신이 속한 세계의 특정 부분에서만 살고 싶어 하는 독자들이, 다른 의미로 위험한 독자들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런 의미로 자신이 속한 바운더리에서부터 좀 벗어나게 하고 싶은 것이 소설가로서의 욕망이겠죠.



박인성

두 분 이야기를 듣다 보니 중요한 포인트로 논의가 모인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서사를 즐기는 패턴 자체가 점점 더 친숙한 세계만을 지향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는 오늘날 숏폼의 유행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긴 흐름 속에서 패턴의 변화를 통해 얻게 되는 새로움의 충격은 점점 기피되는 것 같습니다. 기존의 문학적 관점에서 기승전결을 거쳐 도파민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사람들이 못 견디게 되면서, 오히려 익숙함과 친숙함 속에서 최대한 무언가를 얻어가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이것도 앞의 경향들과 다 이어지는데, 현실 자체가 너무 스트레스가 많고 유해하다고 여겨지다 보니 여기에 인위적인 스트레스를 더하고 싶지 않은 것이죠.

사실 우리가 즐기는 모든 콘텐츠는 친숙함으로부터 살짝 멀어져 있는 것이기에, 거기에 친숙해지는 과정 자체가 인위적인 스트레스를 동반하잖아요. 소설이 그렇고 영화, 예술영화가 다 그러하듯이요. 그렇게 익숙해지는 과정에서의 인위적인 스트레스조차 이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독자들이 많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서론에서 가볍게 풀어본 내용들을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인성

두 번째 논의의 장으로 이어가 보겠습니다. '안다무의 정치적 무의식'이라고 거창하게 썼지만, 두 분의 작품을 함께 이야기해 보면서 무엇이 지금 문학에서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의 방향을 결정하는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미상 작가님은 이태원 참사에 대한 글에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조사와 숙고를 통과하면 말은 안전하고 무해함에 가까워지지만 잃는 것도 있다. 이야기가 부풀어 올라야 할 때, 안전한 말은 그 필연적인 느림 때문에 제때에 말을 보태지 못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빨리빨리 많이많이 말하자>,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봄호)


이 문장은 사회적 발언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소설 쓰기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처럼 보입니다. 

소설가로서 쓰는 과정에서 문장이 안전한 말을 향해 스스로 굽는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미상

일단 ’스스로 굽는다‘는 표현이 좋네요. 제 소설로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자기 검열하는 경우가 있죠. <일일야성>에서 남성 페미니스트로 보일 여지가 있는 남편을 다룰 때 그랬어요. 엄청 고쳤는데, 제 비소설가 자아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체를 알고 있고, 의미 있고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지지하거든요. 그래서 소설에서 남편을 여러 버전으로 고쳤어요. 갑자기 직접적으로 옹호하는 발언을 집어넣기도 하고 반대로 남편에게 더욱 가혹한 버전도 있었고요. 그런데 소설 내적으로는 본능적으로 느끼는 남편의 색채가 있었거든요. 개인으로서의 가치, 당위와 소설에서 그리고 싶은 인물이 따로 놀 때, 당위의 손을 들어줄 때, 저는 제가 안전한 쪽으로 굽는다고 느껴요. 5(6)86 세대를 비판적으로 그렸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구체적인 현실의 인물들을 생각하면 아, 소설 보고 속상하겠다, 싶어요. 근데 그건 제 개인의 마음인 것이고, 저 같은 경우에는 소설은 따로 작동해요.



박인성

요즘 저는 현실과 허구의 문턱이 너무 낮아져서 누구나 이 두 세계를 오간다는 표현을 즐겨 씁니다. 사실 독자의 마음이 가장 먼저 그렇겠죠.

독자의 마음도 허구와 현실을 너무 쉽게 오가고, 허구를 읽으면서 현실과 바로 접목해 읽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오늘날의 독서 경향이 되었습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캐릭터 한 명 한 명이라는 존재도 예전처럼 허구적 인물이기에 아무런 대표성이 없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거죠.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그런 대표성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에요. (이 : 맞아요.)



박인성

위수정 작가님도 최근 <귀신이 없는 집>에서 시스헤테로 기혼 남성 크로스드레서라는 소재를 다루셨고, 또 <오후만 있던 일요일>에서는 노년 여성의 욕망과 치매 노인의 성적 욕망을 다루셨습니다.

정체성과 재현을 둘러싼 감수성이 어느 때보다 섬세해진 시기에 이런 인물들을 쓰기 전에 통과해야만 했던 작가로서의 고려와 고민이 있었을지, 반대로 저항이 없었다면 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위수정

앞선 질문에서 조사와 숙고의 과정에 대한 말씀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어떤 대상에 대해 조사와 숙고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은 저의 내부에 그것에 대한 저항감이 있다는 말이기도 해서 저항 없이 소설을 쓴다는 것이 제게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그러니까 저항 없이 써지는 글을 내가 소설로 발표할 수 없다고, 그래서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왜냐하면 누구나 한 사회에서 규범과 체계를 체화하며 살아가게 될 텐데요, 그런 사회 시스템에 적응해서 자연스럽게 그 선 안에서 살아가지만 때때로 저항감이 생기는 일들도 생기기 마련이죠. 하지만 대체로, 보편화된 규율이나 도덕 같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 안에서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편하게 누릴 건 누리지만 아무런 책임이나 의무 없이 희미한 상태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욕망이거든요.

저도 그런 욕망이 있어요. ’눈에 띄지 않는 삶‘은 마찬가지로 ’침범 받고 싶지 않다‘라는 욕망이 포함되어 있는 거죠. 저 역시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고, 부딪히고 싶지 않고, 그냥 조용히 살다가 자연스럽게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소설가로서의 저는 의식적으로 그런 마음에 일종의 저항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이런저런 부조리한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항하는 목소리를 지지하나 내가 나서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는 나서는 거거든요. 작가라는 직업은 말하기를 택한 사람이고 그렇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어떤 스탠스(Stance). 그러므로 조사와 숙고의 과정이 어떤 중립적인 언어나 누구에게나 이해가능한 중립적 인물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긴 조사와 숙고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어떤 위치나 입장을 정해야만 하는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예민한 소재를 썼을 때에는 원색적인 비판을 받기도 해요. 말씀하신 <귀신이 없는 집> 같은 경우에는 인물들에게 내재된 보수성과 아이러니가 제게 중요했어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비판이 두려워서 쓰지 않는 것을 택하는 편이 어쩌면 제 마음은 편할 수 있어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래도 쓰고 싶고 써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요. 뛰어넘고 싶은 것들이 있어요. 사회적으로 형성된 위치와 생활인으로서의 감수성 같은 것을 뛰어넘고 싶어서, 비판을 받더라도 써야지. 부족하다면 다음에는 좀 더 조사와 숙고의 과정을 거쳐야지. 제가 작가가 되기로 한 이후에 가장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그럼에도 나도 누구나 좋아할 수 있을 만한, 조금은 안온하고 다정한, 잔잔하게 아름다운 소설을 쓰고 싶기도 합니다. 미문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아름다운 문장에 대한 욕심도 생기고요. 그런 작품도 능력이 된다면 언젠가 써보고 싶어요. 지금은 그저 두려운 마음을 다잡으며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가려고 해요.



박인성

위수정 작가님 답변에 이어서 조금 더 여쭤보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쓰는 과정에서의 고려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작가가 일부러 마음에 보풀을 일으키는 일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너무 편안한 이 세계를 편안하게 전달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보풀을 일으키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최근에는 작가님도 원색적인 비난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하셨으니까요.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 일으키는 마음의 보풀이 작가로서 더 중대한가요, 아니면 쓰고 난 뒤 밖에서 긁는 자극들이 더 크게 느껴지시나요?



위수정

그게 긁힌다면 제가 숙고의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내가 놓친 부분에 대해서 어떤 비판의 소리를 듣는다면 그건 정말 뼈가 아프겠죠.웬만해서는 심각하게 긁히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숙고의 과정을 오래 거칠수록 다양한 비판을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작품뿐만이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해서라도 저항 없이 써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저는 인적이 드문 시골이나 숲속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기질이 좀 예민하기 때문이거든요.아주 사소한 것에도 쉽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취약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렇기도 해요.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럴 거라 생각하는데, 소설 안의 인물을 설정할 때 역시 작가의 성향이 투영되지 않을 수 없겠죠. 그래서 소설 쓰기 전에 억지로 보풀을 일으키는 것 같지는 않아요. 이미 제가 가지고 있는 내면 자체가 보풀 투성이라서.



박인성

보풀을 일부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풀투성이인 내면에서 소설이 출발한다면, 검열과 저항은 작가에게 외부에서 부과되는 조건이 아니라 쓰기의 조건 그 자체가 되는 셈이네요. 그렇다면 이미상 작가님께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여쭤보겠습니다. 아까 <일일야성>의 남편을 여러 버전으로 고쳐 썼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준비되었다가 끝내 쓰이지 않은 말들은 작품 안에 공백으로 남습니다. 그 공백을 두고 어떤 독자는 왜 그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요구할 것이고, 다른 독자는 그 공백 자체를 읽어 또 다른 해석을 만들어낼 겁니다. 그 남편을 남성 페미니스트로 납작하게 읽어 버리는 독해가 실제로 나온다면, 작가로서는 그것을 오독으로 보아야 할지, 감당해야 할 소설적 해석의 영역으로 보아야 할지 고민이 되실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이미상

저 같은 경우에는 겸손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소설가로서의 제 문제가 전달력이 좀 약해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제 문장 때문에 전달에 실패한 부분이 있으리라고 인정합니다. 오독이라고 했을 때, 첫 번째는 제 문제, 기초적인 전달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데뷔했을 때 지금이라도 문창과 들어갈까 했었던 거고요. 두 번째는 단편소설이라는 형식이 오독의 공간을 넓히기 위한 형식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오독 안 할 거면 단편 왜 읽습니까...... 그 맛에 쓰고 읽는 것인데요. 그러니까 너른 해석의 공간, 그 자체를 만드는 게, 단편소설 작가들의 꿈이고 스킬이고 난관이기에, 어찌 보면 오독이 안 생기면 큰일입니다. 잘못 읽기는 발생해야만 하는 것이에요.



박인성

작가님은 별로 긁히지 않으실까요? (웃음)



이미상

저는 엄청 긁혀요. 독자가 가진 오독의 권리와 불가피성과는 별개로 상처는 매번 받죠. 전에 베트남전쟁과 느슨하게 관련된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독자로부터 베트남전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지적을 받았어요. 너무 괴로워하다가 아, 그러면은 공부를 해야겠다, 결심하고 베트남전쟁 참전군인 구술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예전부터 관심을 가졌으나 활동을 차일피일 미뤄 왔는데 좋은 계기가 되었죠. 울고 나서 일어나,인 것이죠. 단체 가입하고 공부 시작하자. 긁힌 후가 중요한데 솔직히 인간적으로 힘들긴 합니다.



박인성

반대로 말하자면, 굳이 마음속에서 보풀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는 거네요. 현실에서 늘 독자와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웃음) 



이미상

그럼요. 독자와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박인성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위수정 작가님의 <은의 세계>에서는 "당신을 지켜드립니다"라는 문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안전과 위생의 언어 속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사촌이 가족 바깥으로 밀려나기도 합니다.

'보호'와 '돌봄'의 언어가 누군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쓰일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 작품을 쓰실 때 가장 먼저 무엇을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인물이었을까요, 구조였을까요,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었을까요?



위수정

저는 인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배경이나 다른 요소들로 소설의 단초를 잡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인물로 소설을 이끌어 갑니다. <은의 세계>를 예로 드신 건, 아마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을 해서 말씀해 주신 것 같은데, 배경을 먼저 떠올리고 쓴 작품이 물론 있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항상 인물에게 집중하는 편이에요.다만 인물을 중요하게 생각하되 작가의 메시지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선을 지키려고 합니다. 저는 메시지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쓰는 것 같아요. 인물을 구체적으로 그리면 그릴수록 스스로 움직이려는 힘이 강해지고, 그것을 서로 느끼면서 소설을 써나갈 때 즐거워요. 소설을 쓰다보면 제가 애초에 알 수 없었던,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새로운 서사나 행동이나 감정들이 탄생하는데 그런 장면들을 만들어 갈 때 작은 희열을 느낍니다. 

명은이라는 인물도 마찬가지였어요. 어쩌면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 같아요. 

“명은이는 왜 이런 행동을 하지?” 

물론 저는 그 행동의 이유에 대해 작가로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름대로 생각은 하지만 거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을 하거든요.말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특히 《은의 세계》 소설집에 있는 소설들에 대해서는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순화하면 어렵다.이미상 작가님이 오독 얘기를 하셨는데, 저는 오독이 아닌 독서가 있을까 해요. 예술을 감상한다는 것에 정답은 없으니까. 오독이라는 말이 그래서 좀 이상한 거죠.사실 해석의 층위가 다양한 작품일수록 매력적이라서 저도 그런 작품을 쓰고 싶은데 제 소설을 읽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것이 해석의 스펙트럼이 넓어서 좋다는 의미는 아니겠죠. 아니겠지만, 그렇다 해도 저는 제가 독자로서 어떤 인물이나 분위기라든가. 희미하더라도 나를 끌어당기는 장면이나 이미지가 남는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하고 그런 작품을 쓸 수 있다면 만족할 것 같아요.



박인성

두 분께 작품 이야기를 먼저 여쭤봤던 것은, 쓰면서 무엇을 쓸 수 있는가 혹은 무엇에 더 끌리는가와 마찬가지로, 무엇은 다소 쓰기 어려운가 혹은 쓸 수 없다고 느끼는가의 지점들을 짚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작가로서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작동하거나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금기의 출처가 있는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다만 시장이나 편집부, 동료나 독자 같은 단순한 대상을 지정해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의 경험에서, 외부에서 왔다고 생각했던 망설임이 사실은 자기 안에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본질적으로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의 검열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출처가 있는지, 혹은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지 질문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미상

안다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했지만, ‘미량의’ 금기가 없으면 문단에서 상을 받지 못하지 않나요. 완벽한 안다무 소설은 등단하지 못할 것 같은데...... 문제가 되는 건 어떤 금기가 각광을 받느냐인 것 같아요.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거나 내가 불편한 것은 어찌 보면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데 필수요소 같은 것이어서, 이런 질문이 뭐랄까 낯부끄러운 거예요. (웃음) 안전하게 금기시되는 주제로 이득을 본 측면이 있기 때문에......



박인성

장사 밑천을 건드리는 질문이었네요. (웃음)



이미상

한국 소설에서 금기는 어느 정도 장사 밑천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검열하게 되는 부분은, 제가 당사자가 아닌 경우에 잘 못 쓰겠어요. 써도 망하고요. 



박인성

완벽한 제3자인 경우 말인가요?



이미상

‘-화’해서 쓰는 거를 잘 못해요. 예컨대 성소수자인 친구도 있고 인터뷰도 하고 조사도 한다고 했는데 잘 쓰지는 못하겠어요. 고민이에요. 이게 당사자만 쓸 수 있다는 건 아니에요. 예컨대 저는 남자가 쓴 페미니즘 소설, 읽고 싶어요. 잘 썼다면 읽었을 때 작가의 성별을 구분하지 못할 것이고, 어쩌면 당사자가 아니라서 변별점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죠. 이런 식으로 비당사자가 쓸 때의 장점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생각은 하는데, 막상 저도 잘 안 되기 때문에 말은 쉽지....... 하죠.



박인성

그걸 가로막는 어떤 벽이나, 발부리에 걸릴 것 같은 불안감이 있는 걸까요?



이미상

디테일이 떨어지니까. 그리고 변형을 못하기 때문에. 비당사자로서 쓸 때는 정답에 가깝게 쓸 것 같아요. 자신이 없으니까 변형을 못 하는 거예요. 저도 당사자인 영역이 있는데, 남들이 거기에 대해 쓸 때가 있거든요? 읽어 보면 틀리질 않아요. 그런 사람이 현실에 있어? 누가 물으면 어, 있어, 하고 증빙 가능하게 쓰게 되는 거예요. 걱정이 되니까요. 근데 내가 당사자면 현실에 있든 없든 가능의 영역까지 포함해 마음대로 캐릭터를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어요. 당사자는 익숙하기 때문에 인물을 가지고 놀 수 있고, 틀린 소리를 할 수 있고, 위반할 수 있어요. 이것도 판타지일까요. 어쨌든 이런 게 저에게는 숙제예요.



박인성

당사자로서의 금기의 영역과 비당사자의 금기의 영역이 또 달라지는 지점들이 있는 거네요. 



이미상

그렇죠. 제 생각에는 그래요. 당사자들은 갖고 놀 수 있고, 틀린 소리를 할 수 있어요. 한 마디로 잘 알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현실 너머로 확장할 수 있는 거죠. 비당사자는 위반과 확장까지는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저한테는 그게 숙제인 거죠. 그렇게 쓰고 싶지 않으니까.



위수정

너무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는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소설을 많이 쓰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해요.당사자가 아닌데 이렇게 써도 되나. 자격이 있나. 그런 생각 많이 하죠.그럼에도 내가 선택한 것을 어쨌거나 글로 드러내긴 하는데,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설득해야 되잖아요. 예를 들어, 중년 여성의 삶에 대해서 쓴다면 저는 당사자이기 때문에 누군가 소설 안의 세계에 대해 동의하지 않더라도 작가가 당사자이기에 허용되는 범위가 분명히 있을 거예요. (이 : 맞아요.)



위수정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근거 있는 자신감. 그런데 그게 아닐 경우에는 확실히 움츠러드는 게 있죠.근데 저는 저의 이 상황을 반대로 적용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아요.어떤 위치에도 스펙트럼은 있으니까. 누군가에 대해, 어떤 사건에 대해, 단정 지을 수 없죠. 당사자로서 여성의 이야기를 쓴다 해도 그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쓰지 않았는지, 어떤 것을 누락시키고 있는지 계속 확인해야 해요. 그럼에도 작품 자체가 독자들 다수에게 설득력이 없다면 그건 저의 실패겠죠. 

그런데 그런 범주가 아니라, 단순하게 “너는 당사자가 아니라 잘 모르는 거 같아. 너는 틀렸어.”라고 할때 저는 스스로 설득력을 지닌 답을 갖고 싶다고 생각해요. 그런 답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할 것인가, 숨길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지만요. 여하튼 쉽지 않은 건 분명해요. 그래서 아마 안 쓰는 것일 거고, 못 쓰는 것일 거고요. 검열의 출처가 어디에 있건 간에 제일 중요한 건 작가의 내면이죠. 저 역시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머리로는 옳다고 여겨지는 사안들이 한편으로는 불편하고 힘들게 여겨지기도 해요.그래서 바깥에서 들이대는 검열보다도 나도 모르게 체화된, 그래서 불편하고 꺼려지는 것들. 하지만 그대로 안주하기보다는 다른 쪽으로 변화시키려는 마음은 의식적으로 갖게 된 거예요. 그것과 저는 언제나 싸우는 것 같아요. 실패하더라도 한번 해보자. 사실 어떤 소설을 쓸 때는 저 스스로도 되게 작아지거든요. 그리고 저도 모르게 소재주의로 가려고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고. 그런 얘기 분명히 나올 테니까. 그래서 저를 설득하는 과정이 좀 필요해요. 망설임 같은 게 분명히 일종의 검열의 작동일 것이고, 그것과 싸우는, 좀 전에 말한 숙고의 시간이 괴롭긴 하지만 필요하고 의외로 또 결정을 내리면 시행하는 데는 그게 오래 걸리지는 않아요. 나중에 몇 년 지나서 이런 것을 쓴 내가 부끄럽거나 후회되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은 하지만 다행히 지금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기는 해요.



박인성

두 분 말씀을 듣고 나니 작가라는 존재가 명명백백한 텍스트성을 가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예전에 구조주의 서사학을 공부할 때는 무조건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웃음)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실제 작가가 아니라 내포 작가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었는데, 요즘은 그런 개념을 칼같이 분리하거나 복잡하게 꼬아서 보는 것 자체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작가는 굉장히 다양한 형태의 텍스트성을 몸에 지닌 채 우리에게 드러나 있고, 이것이 언제나 텍스트와 연결되어 작품과 함께 병행해서 읽히기 때문에, 그 과정 안에서 감당해야 할 또 다른 텍스트적 요소들이 늘어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위수정

저는 어떤 이야기건 일단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많이 나와야 질도 올라가지 않을까.



박인성

반대로 아까 이미상 작가님도 남성이 쓴 페미니즘 소설을 더 읽고 싶다, 블루오션일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두 분은 문학장에서 페미니즘 리부트의 변동 과정을 쭉 지켜보셨잖아요. 특히 페미니즘의 선명한 정체성 정치가 소설적 형상화를 거치기보다 소재나 인물, 경험의 영역에서 훨씬 더 날것으로 강렬하게 소설 속 세계에 들어왔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날것의 영역이 상대적으로 완화되고, 강조점이 교차성의 현실 문제나 돌봄, 또 한편으로는 무해함과 윤리 쪽으로 옮겨 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시대적 분위기가 연착륙하는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연착륙이란 결국 무언가를 착륙시키지 않은 채 남겨 두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 과정에서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욕망이나 소재의 영역들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좀 더 폭발적으로 나왔어도 재미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들이요. 혹은 그때 날것으로 들어왔던 에너지가 지금은 어디로 옮겨 갔다고 보시는지도요.



위수정

사실 국내의 문단이라는 공간이 좁다는 생각은 들어요. 한국문학에 대한 수요가 적기 때문일 텐데, 독기 있는 작품이 인정받지 못했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던 것 같기는 해요.아까 페미니즘 리부트 얘기도 하셨지만 그 당시가 그랬죠. 제가 등단했던 시기 전후가 그런 경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가 이슈였어요. 페미니즘 소설이 트렌드이기도 했고, 그래서 남성 작가가 발표하기 힘들다는 얘기도 있었죠.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것의 범위가 너무 1차원적으로 쓰였던 때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하지만 어떤 시대나 트렌드라는 것은 있고, 그런 게 없는 시대는 없죠. 문학에도 분명히 유행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고,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시대 정신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어떤 스타일이나 사상이 붐업이 될 때는 좀 극단적으로 과장되는 면이 있는 것 같기는 해요. 하지만 그런 단순함이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고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다양화되고 또 갈래가 많아지고, 좋은 쪽으로 향해 움직인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믿고 싶고 그렇게 되도록 저도 애써야겠죠.


요즘에는 시의성이 뭘까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어요.어떤 소설이 이 시대에 의미를 가지고 읽힐 수 있는 것. 그것이 어떤 소재 자체의 트렌디함에 머무르지 않고, 이 시대를 감각하게 하는 의미를 만드는 건 뭘까.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어도 어떤 작품은 올드하게 느껴지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면,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뭘까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욕망이나 소재의 영역들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소위 ‘순문학’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에 기대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아요. 상식적으로 납득 가능한 인물, 일정 수준의 지적이거나 우아한 분위기 같은 것. 소설의 미학이나 소설 안의 세계관을 읽어내기 보다는 단순히 서사 그 자체, 소재 자체, 작게 들어가면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가에 불편함의 포커스를 맞추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박인성

오히려 지금은 좀 더 미시적으로 깊어지는 과정이 중요한 시기라고 이야기해도 될 것 같아요. 이미상 작가님은요?



이미상

예전에는 어떤 한 주제를 잡고 그것에 대한 소설을 썼는데, 요즘은 그렇게 쓰는 것에 관심이 덜하기 때문에 생각을 잘 안 하기는 해요. 옛날의 저였다면 극우하고 페미니즘의 결합에 대해 쓰고 싶었을 것 같아요.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에 페미니즘의 다양한 이슈 중에서도 안전의 이슈가 굉장히 중요했고 저도 그에 대한 소설을 썼어요. 안전하지 못함에 대한 불안이 거의 신체적인 수준에서 느껴졌던 시기였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요. 그런데 안전에 대한 요구가 이민자 배척이나 극우 정치와 결합하잖아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2016년에 강남역 시위에 나갔던 사람 중에 2026년 올공(올림픽공원) 시위에 나가게 된 사람의 10년을 조명하는 소설을 읽고 싶네요. 막상 쓰려고 하면 무척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읽고 싶네요!



박인성

반대로 얘기하면 그간의 변화 속에서 느껴지는 낙차나 격차 같은 것이 전면화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 10년의 풍경 사이에서 발생한 굉장한 낙차와 변화가 있기 때문에요.

두 분의 작품들과 함께 최근 문학장의 트렌드, 시류까지 짚어보는 두 번째 장 이야기였고요.


세 번째 장에서는 이런 소재들이 과연 요즘 한국 문학장에서 얼마나 전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의 차원에서, 네 가지 정도를 대놓고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계급, 섹슈얼리티, 폭력, 중독의 문제인데요.

동시대의 소설은 윤리를 다루는 태도에서는 상당히 대담하죠. 윤리의 여러 지점들을 넘나들기도 하고, 당연하다고 여겨져 온 것들에 균열을 내거나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소설들이 엄청나게 많아졌는데, 한편으로는 '올드 클래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한때는 정말 많이 다뤄졌는데 요즘에는 오히려 전면화되기에 거북스러워진 소재들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표적으로 계급의 적대, 섹슈얼리티와 에로스, 날것의 폭력, 중독과 자기 파괴 같은, 2000년대와 2010년대까지는 굉장히 많았던 소재들이 요즘에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고, 선명하게 무대 위로 올라오는 것이 조심스러워 보입니다. 특히 중독이나 성적 쾌락 같은 것들은 미시적으로 다루어질 뿐 전면적으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 면이 있고, 섹슈얼리티는 종종 죽음 충동, 폭력, 강박과 함께 병리화되어 그려지는 경향도 많습니다.

두 분은 이런 흐름의 진단에 동의하시는지, 동의하신다면 어떤 머뭇거림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혹은 동의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도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미상

저도 동의를 하고요. 근데 결락되었다고 판단하면 그거 이제 나오는데...... ‘웹진 비유’에 진송 평론가의 <한국문학에서 동시대적 화자의 재구성>(2023년 64호)을 보면, 기존 문학에서 결여된 지점을 짚기 무섭게 이에 맞춘 소설이 등장하고, 그것을 비평이 찬사하는 공회전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요. 비평이 지금 우리 문학장에 이것이 부족하다고 하면 그게 곧 나옵니다. 



위수정

저는 작가들이 폭력이나 쾌락에 탐닉하는 극단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은 욕망이 크게 없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들은 본인들이 매력을 느끼는 소재나 서사나 인물을 쓰기 마련인데 정념이나 충동에 대한 끌림이 덜 하니까 많이 안 쓰는 거 아닐까요. 

저는 섹슈얼리티, 에로스, 폭력, 중독 같은 것들을 병리화하지 않고, 다른 말로 하면 이론적으로 의미를 끌어내려는 의지 없이 그 매력에 몰두해서 쓰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어떤 감정이나 충동에 대해 분석하려 하지 않고, 또 내면적 규범을 염두에 두지 않고 좀 더 나아가는 글쓰기에 대한 로망이 있어요.


하지만 욕망의 끝까지 가는 인물을 자연스럽게 긍정하는 소설을 쓰는 것이 나의 소설 세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들기는 해요. 사실 나는 더 가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소설에서만 가능한 것은 또 뭘까, 하는 질문도 이어서 따라와요. 


저는 항상 좀 어떤 선을 뛰어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한번 해봐야겠다고 전부터 계획해왔어요. 그런데 몰입해서 작품을 쓸 만큼, 어떤 선정적인 세계가 나에게 그만큼 매력적인가? 그것이 요즘엔 저를 막고 있는 것 같아요. 점점 그런 세계가 피로해진달까.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박인성

이런 소재들에 대해 현장의 작가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데에는 또 다른 형태의 저변의 이유가 있고, 지금의 작가들에게는 더 시급하게 그려내야 할 현실의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분명히 듭니다.



박인성

앞서 답변에 어느 정도 나왔지만 추가로 질문을 드려보자면, 계급과 관련된 부분들은 최근 소설들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주로 돌봄이나 노동의 잔잔한 비애가 그려지거나, 상위 계급과 차상위 계급, 중산층이 기본값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선명한 물질적 계급보다는 미시적인 계급성의 문제, 상대적 박탈감 같은 감정적 층위의 영역들이 많이 그려지는데요.

계급이 비애가 아니라 적대와 전선, 혹은 분노와 모욕, 폭력을 동반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일이 오늘날 가능할지, 가능하지 않다면 어떤 이유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다른 매체들에서는 아주 과격한 형태의 계급 전쟁이나 계급 간 투쟁의 문제가 그려지는 것을 종종 보는데, 문학의 영역에서는 주로 암시적이거나 미시적인 형태로 그려지다 보니, 이런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지도 궁금합니다.



위수정

예전에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들에서 본 것들을 지금 다시 소환해서 하는 작업들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약간 회의적인 느낌인데요. 적대, 분노, 폭력을 동반한 극단적인 서사로만 이루어진 소설이 제게는 설득력이 좀 떨어지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요.<참교육> 같은 드라마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세계를 정확하게 구현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소설은 그렇지 않죠. 왜냐하면 현실 세계 자체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제게 <참교육> 같은 서사는 판타지와 다를 바 없어요. 소설의 세계는 독자가 원하는 단순한 정의의 구현이라든가, 권선징악이 이루어지는 세계라기보다는, 정확하게 ‘리얼리즘적인 세계’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설령 요정이 등장하거나, 물건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설정이 들어간다 하더라도요. 물론 선악 구도로 가자는 얘기는 아니시겠지만, 저는 소설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갔을 때에는 결국 계몽적으로 흐를 위험이 크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은 저에게는 소설로서의 의미가 별로 없기 때문에 더 교묘하게, 세계의 디테일을 포착하고 싶어요. 그래서 작가가 소심해 보이더라도, 암시적이거나 미시적으로 여겨져서 답답함을 유발한다 하더라도, 제게는 그런 문학이 더 정교한 투쟁에 가깝지 않나 생각해요. 


저는 어떤 상황이나 어떤 계급에 처한 인물을 자세하게 관찰해서 특정한 상황에 부려 놓는 것이 작가로서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에요. 어떤 사안에 대해 숙고를 많이 할수록 답을 내리기 힘들더라고요. 



박인성

<참교육> 같은 작품을 말씀해 주셨으니 생각해 보자면, 사실 이 작품에서의 폭력이 누군가에게 쾌감을 준다는 것은 그것이 되게 안전한 폭력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결국 폭력을 활용하는 방식이 훈육하고 다시 길들이고 사회적으로 정화하기 위한 폭력이기 때문인데요. 어떻게 보면 문학에서는 이 시스템 자체에 대한 급진적 폭력 같은 것들이 그려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참교육>의 폭력은 과격해서 문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전해서 문제적이라는 의견이죠.



위수정

맞아요. 그래서 오히려 문학으로 그것을 가져온다면, 저는 연대의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연대의 불가능성에 집중하고 싶어요. 우리는 분명히 어떤 상황에서는 연대를 해야 하는데 결국 미묘한 차이로 그렇게 할 수 없는 불가능성에 포커스를 맞추고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는 것이 결국 연대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연대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디까지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좀 더 제게는 의미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상

저는 이 질문이 와 닿았던 것이, ‘계급을 비애가 아니라 적대와 전선으로 분노와 모욕과 폭력을 동반하는 것으로 쓰는 일’을, 저는 언젠가 하고 싶어요. 제가 지금도 본업이 따로 있어서 노동에 대해 나름의 비애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규모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지 않고 잘 몰라서 천천히 공부하고 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것은, 대립 구도를 선명하게 그리거나, 내가 당한 폭력을 상대에게 똑같이 또는 더 크게 가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한 사람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가 노동자로서 어떤 노동 조건 때문에 어떻게 힘들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투쟁하는지 하는 거요. 피해자로서만 그려지지 않고, 환경을 바꾸기 위해 하는 능동적이고 복잡하고 희생적인 행위들이 늘 저에게는 감동을 줘요. 저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약간 쓰기 어렵지만, 이런 소설, 기다립니다. 



박인성

도식적으로는 그려질 수 없는 일이죠. 

앞서 위수정 작가님이 말씀하셨듯, 어떻게 보면 지금은 소설의 양적 공급 자체가 더 늘어날 필요도 있다는 것이죠.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출판되는 소설들이 워낙 많고, 아마추어 작가들이나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설도 많아서 소설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한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출판의 영역 안에서 다루어져야 할 시급한 이야기가 워낙 많기에, 진지한 작가 의식을 가지고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 자체가 양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이러한 문제를 감당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모든 작가가 이런 것들을 다 소화할 수는 없으니까요.

또 한편으로는 섹슈얼리티가 소설에 들어올 때 보통 위험하게 그려지거나 병리화되거나 상처의 증상으로 환원되는 경우가 오래전부터 많았고, 여전히 그러한 측면이 다소 있는 것 같습니다. 욕망과 쾌락 자체를 단죄하거나 병리화하지 않고 쓰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은데요.

1990년대에는 마광수 같은 작가들이 이러한 것들에 대해 여러 시도를 하긴 했으나 충분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오히려 약간의 선입견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킨 지점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 욕망을 윤리적으로 안전하게 처리하는 것에 대한 작가로서의 접근 방식에 대하여, 혹시 어떤 압력을 받거나 그로 인한 어려움을 느끼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미상

저는 이 질문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대학생 때 《카트린 M의 성생활》을 읽은 이후로 성애에 관한 웬만한 글은 자극이 되지 않아...... (그 글은) 프랑스의 유명한 미학자가 ‘갱뱅’하고 그러는 이야기란 말이죠. 그걸 20대 때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려서 자극을 너무 강하게 받았던 것 같아요. 2000년대 초반에 제가 페미니즘을 받아들인 방식은 성혁명과 관련이 있었어요. 성적 억압을 타파하는 것이 저항적으로 여겨졌어요. 현재 이것은 비난을 받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때는 여성이 성욕을 갖는 것에 대한 억압이 지금보다 강했던 것 같아요. 청소년은 더욱 심했고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문제입니다. 


문학에서 성적 욕망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문제에 대해서 제가 고민하는 건...... 성과 폭력이 너무 붙어 있다는 점이에요. 90, 00년대는 실생활에서 성희롱, 성폭력은 훨씬 노골화되고 심한 부분이 있었어요. 하지만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어요. 과거에도 불법촬영물과 관련 범죄는 있었고 심지어 작품에서 금기 타파라는 명목으로 소위 ‘몰카’가 긍정적으로 그려지기까지 했지만, 지금처럼 딥페이크 범죄나 온라인상에 내 이미지가 영구히 돌아다닐 일은 훨씬 적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카트린 M의 성생활》을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들여올 수 있나? 저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어요. 금욕주의와 성적 억압, 특히 청소년을 향한 억압은 여전히 싫고 저에게 영원한 테마 같은 것이지만, 동시에 성적 욕구를 탐험하고 실수해도 돌이킬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 결국 이걸 다 담아야 하는 것이겠죠.



박인성

지금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와 시대적 환경, 심지어 온라인 세계와의 접속 속에서 섹슈얼리티가 그 자체로 온전하게 향유될 수 없는 완전히 분열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분명한 현실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열성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문학이나 소설 안에서 그려낸다는 것은, 오히려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보지 않는 시선이 될 가능성이 높겠죠.


박인성

오히려 두 분이 잘 다루실 수 있는 지점으로, '유해한 남성성'의 문제가 요즘 문화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 본 영화 <백룸>이나 <마티 슈프림>도 그렇고, 결국 이런 질문인 것 같아요. '남성성은 속죄할 수 있는가?' 남성성이 자기 자신을 속죄하거나 정화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처럼 느껴졌거든요.

최근 한국문학 안에서 남성성이 그려지는 방식도 한편으로는 거세되거나, 소위 말하는 에겐남이 되어야 하거나, 퀴어여야 하는 식인데요. 이런 남성성의 재현 방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완전히 다른 섹슈얼리티의 재발견이나 발명까지 말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위수정

남성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결국 저는 관찰 없이 소설 안에서 어떤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기는 좀 힘든 사람이라서 관찰을 많이 하는 편인데,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을 쓰면서도 그런 생각은 해요.타자화하지 말자. 어떤 인물도. 그래서 남성이 병풍처럼 등장하거나 아니면 남성 인물이 지닌 (남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성향이나 습벽이 단점으로 그려지는 소설의 전개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요.일반론이지만, 저는 소설 안에서 인물의 성별과 무관하게 그들이 지닌 장점과 단점, 결함과 미덕을 여러모로 찾아보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자면, 다른 작품에서 앞서 말씀하신 ‘거세된 남성성’ 또는 ‘유해한 남성’으로 인물들을 그린 작품들을 보면서 불만이 없진 않아요. 저도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오래 혼자 살면서 느끼는 가부장적 세계에 대한 저항감과 불편함과 불만이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있고, 특히 저는 경상도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더 그런 포인트가 많아요. 하지만 문학에서 어떤 특정한 인물이나 성향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타자화시키는 방식으로 그리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인물들의 여러 가지 다양한 면을 그냥 사람으로서 만들어 보고 싶다. 에겐남, 테토남 같은 이름들을 떠나서 각자의 결함이 있죠. 내가 알지 못하는 죄가 있잖아요. 내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사회 속에서 특별한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살아왔기 때문에 행하는 그 무수한 죄들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작가가 어떤 단죄의 칼을 들지 않은 채로 가만히 펼쳐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미상

남성성에 대해서는 요즘 얘기도 많이 되고 하는데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유해한 남성성을 다 제거한 좋은 남자라는 거는 남성사회에서 왕따라는 얘기죠. 전혀 그 세계에 낄 수 없고 자기와 비슷한, <일일야성>에서처럼 그 동아리 속에서만 살 수 있는 거고, 남성 집단에서 완전히 이탈되는 존재가 되어야 되는 건데, 그게 한 개인에게 쉽겠어요. 저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문화를 바꾸어야 하지만 문화가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개인으로서 문화 안에서 살아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여러 고민과 판단, 타협, 소극적 저항 같은 것을 하며 살아가잖아요, 우리 모두요. 그냥 그것을 드러내는 것만 소설이 겨우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요. 구체적인 수준에서 변화하는 사람, 내가 가지고 있는 속성 중 일부를 조금씩 바꾸어 나가며 노력하는 사람이 좋죠. 저 역시 그러고 싶고 그러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고요.



박인성

안전하게 그려질 수는 있으나 매력적이지는 않다는 거군요.



위수정

저는 남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셔가지고 얘기한 거지만, 여성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이미상

그렇죠. 다 갖고 있죠.



위수정

페미니스트임에도 한국에서 살면서 체화된 보수적 성향들이 나와서 스스로 아이러니를 느낄 때가 있죠. 제가 그래요. 근데 그런 것들이 삶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소설적인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박인성

유해한 남성성의 문제는 사실 젠더만의 문제라기보다 우리가 학습해 온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에 접근하려면 온전히 캐릭터로만 환원되지 않는 지점들이 더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위수정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몸이 있고, 각인된 생활 환경이 있고, 유전적인 DNA도 있고.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나 의지가 사실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순응하지 않는 것. 운명이라고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 



박인성

마지막 4장은 '메타, 전망'입니다. 거창한 소리죠. 소설가들에게 담론을 요구할 수는 없으나 간단한 의견들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이미상 작가님은 금기 위반이 소설의 필수 요소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오랜 시간 한국 소설에서는 금기를 위반하는 방식의 접근보다 기존의 윤리를 의심하고 해부하는 소설들이 주된 경향으로 있어 왔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정상성과 사회의 구조적 폭력성을 의심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안전하게 인정받는 방식을 생산해 오지 않았나라는 질문도 던져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어디까지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 지점인가. 물론 이 한계 지점을 탐색하는 것이 소설의 역할이고 굉장히 중요하긴 하지만, 때로는 그 한계 안에서 도달할 수 있는 모범 답안들이 사전에 학습되거나 정립되어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사실 비평의 해석적 작업들이 이런 것을 많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작품의 미덕이나 해석적 지평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현실의 문제나 징후와 연결해 작품의 미덕을 살려주는 방식의 해석적 터치들이 때로는 소설을 너무 모범 답안화하는 경향도 있는데, 이런 작품의 적극적인 담론화 방식을 작가로서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 궁금합니다.



위수정

이 질문이 저는 좀 어렵더라고요. 금기를 위반하는 방식의 접근보다는 기존의 윤리를 의심하고 해부하는 소설들이 좀 더 안전한 방식이라는 말씀이.



박인성

이 질문 자체가 사실 해석적 담론입니다. (웃음)



위수정

그래서 여기에 해당하는 소설과 저기에 해당하는 소설이 뭐지라고 생각을 해봤어요.근데 아마 금기를 위반하는 것에 목적을 둔 소설이라고 이해를 하자면.



박인성

쉽게 이야기하면, 선을 넘는 것 자체에 관심 있는 소설이 있을 수 있고, 선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소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위수정

그렇죠. 그런데 선을 넘는 것을 목표로 한다라고 했을 때,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그런 쪽으로 향하는 것이 좀 더 손쉬운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은 해요.하지만 당연하게도 막상 쓸 때 손쉽지는 않겠죠. 왜냐하면 어느 정도까지 가는 것이 과연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며, 또 그런 작품이 소위 말하는 문학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작가로서 그런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쓸 수는 없지 않을까요?



박인성

결국 '선'에 대한 질문은 작가로서는 굉장히 본질적인 것이고요.



위수정

그렇죠. 그래서 두려움 같은 게 있어요. 지금은 조금은 달라졌긴 하지만, 예전에는 좀 답답했어요. 독자의 입장에서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제 위치 자체가 경계에 서 있다는 느낌이에요.  가독성이 좋으면서도 의도가 단순하게 드러나지 않는, 도발적인 작품을 쓰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금기를 ‘위한’ 작품, 그러니까, 포르노그래피처럼 보여도 상관없는, 아주 자극적인 무언가를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적도 있어요. 지금은 사실 자신이 좀 없어요. 욕망이 달라졌달까.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그런 성적인 에너지로만 충만한 작품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그 의도가 너무 드러나 버릴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떤 작품을 썼을 때 작가로서 충족되는 무언가가 있다면 기꺼이 쓰겠죠. 불안과 고통과 좌절이 따르겠지만 그럼에도 시도를 할 텐데 그런 에너지를 들여서 금기를 위반하는 것에‘만’ 초점을 둔 작품을 쓰는 것에 지금으로서는 저를 설득할 만한 요소들이 좀 약하지 않나 해요.



박인성

너무 의식화된 목표로 작동할 때는 말이지요.



위수정

네. 반대로 이것이 불편해?라고 나는 묻고 싶어라는 목표랄까, 문제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앞서 말씀하신 기존의 윤리를 의심하는 차원의 소설이 되겠죠. 그게 저한테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근데 이 둘이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이 두 갈래가 과연 분리 가능한가 그런 생각도 좀 들어서요.



박인성

조금 더 쉬운 사례로 바꿔서 질문을 하자면, SF 업계에서는 섹스 로봇 이야기는 절대 금지 같은 것이 있거든요. 수많은 기성 작가들이 쓰지 말라고 이야기해요.



이미상

잘 쓰기가 어렵나 보다.



박인성

잘 쓰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결국 하나같이 로봇을 타자화하고 도구화할 뿐 섹슈얼리티에 접근하는 방식이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니까, '그럴 거면 쓰지 말라'는 거죠. '그럴 거면'이라는 괄호가 붙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쓰지 말라는 거죠.



위수정

그럼 안 써요?



박인성

이제는 거의 안 쓰는 추세죠. 기성 작가들도 그 이야기는 너무 식상하고 지겹다고 생각할 것이고, SF장에 진입하려는 신인 작가들에게는 '쓰지 말아야 할 소재'가 되어 있는 거죠.

근데 그런 영역에 있어서 그 말이 너무 경구화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결국 섹스 로봇 이야기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다른 영역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SF라는 장르의 틀, 혹은 그것과 함께 움직여 나가는 비평적 작업의 의미화가 어떠한 선을 계속해서 구성하거나 해체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텐데요. 작가들에게는 그런 선의 구성과 해체 작업 같은 것들이 실시간으로 연동되어 있는 느낌이 드시는지, 아니면 어차피 내 작업이니까 그런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에 가까우실지도 궁금합니다.



이미상

저는 담론이라는 벽을 보면 부딪치고 싶은 충동이 일기 때문에 역으로 담론에 영향을 받는 편이죠, 섹스 로봇이 잘 쓰기 어려운가 보네, 생각하면서 섹스 로봇 서사를 비판하는 논조를 품은 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도전심이 타오르게 되죠. 절대 못 쓰게 하면 쓰고 싶어지는...... 그래서 반대로 늘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종류는, 그 벽에 부딪치는 현상이 아니라, 그 벽에 부딪쳐 박살 난 자체를 그린 소설. 설명하기 힘든데 저는 섹스 로봇-화 되어서 소설을 쓰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속상하죠. 근데 이건 개인 기질과 너무 붙어 있는 문제라서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독자로서는 오히려 자신이 선을 넘은 줄도 모르고 넘어선 채 쓴 소설을 좋아해요. 위수정 작가님은 좀 되는 스타일이시죠? 

위수정원래는 되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은데. 점점 다른 쪽으로 가는.



이미상

다시 그쪽으로 돌아가셔야 돼요. 작가님은 되는 스타일이에요. 너무 부러워요. 그리고 평론에 대해서는 어떤 주제를 세우고 그 논지에 맞는 소설 두세 편을 포함시켜 서술하는 방식이 있잖아요. 그런 글을 예전만큼 읽지는 않는 것 같아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가끔은 아직 작품은 도착하지 않았는데 기획부터 먼저 설정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박인성

선행한 키워드들이 소설을 추수하는 경향으로서의 비평화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작가로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들 혹은 저항감이 분명히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이미상

아니, 정리를 왜 이렇게 잘하시는 거죠? (웃음) 소설이 키워드에 맞춰지는 바람에 깎여 나가는 부분은 그런가 보다 하는데요, 안 깎이고 총체적으로 다루어지려면 그냥 제가 더 잘 써야 하기도 하고요, 근데 비평의 틀 자체가 고정되면 그것은 조금 지겨운 것 같아요.



박인성

프로세스화되어 있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하죠. 요즘에는 신유물론이나 브뤼노 라투르 같은 이론이 들어오면서 소설이 또 거기에 맞게 연결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런 작업을 하려고 하면 또 잘하는 평론가들, 혹은 잘 들어맞는 작품들이 있거든요.



이미상

그렇죠.



박인성

이런 작업들이 어떻게 보면 소설이 원래 가지고 있었을 날것의 예리함, 날붙이 같은 지점들을 매끈하게 연마해서, 오히려 소설이 가지고 있었던 위험한 것들을 비평적 작업들이 무마시키는 면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분명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인성

다른 한편에서는, '텍스트힙'처럼 독서마저 취향이나 자기 연출의 기호가 된 시대에 소설이 소비되는 방식과 소설이 겨누는 것 사이의 간극이 분명히 있잖아요. 독자들이 선호하는 텍스트와 표면적인 독서 경향 속에 본인의 소설이 배치되는 경험, 물론 평론가가 배치하는 것도 하나의 경험으로 느끼시겠지만,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 배치되는 경험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어떻게 보면 나의 내부에 있는 텍스트성과 무관하게, 우리의 소설들은 어떤 상황과 맥락 속에 배치되니까요.



위수정

텍스트힙이라는 것 자체는 긍정적이라고 봅니다. 어쨌거나 텍스트가 힙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책과 관련한 행사에 참석하거나 책이나 굿즈를 소비하는 장면들을 기록하는 것 자체가 트렌디한 소비 주체임을 인증하는 방식이 되고, 그로 인해 갖게 되는 일종의 우월감 같은 것, 지적 허영심이라고 할까요, 그런 걸 저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독서 자체가 힙하고 텍스트 자체가 힙하다는 것은 상당히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독서라는 행위가 트렌드와 무관하게 그저 우리 생활의 기본값이 되면 너무나 좋겠지만 아무래도 주 매체가 다른 시대니까 쉽지는 않겠죠. 

그런데 소설이 소비되는 방식과 소설이 겨누는 것 사이의 간극이 사라질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 둘이 일치될 수는 없겠지만 그건 당연한 거죠. 제 의도와 다르게 제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소설의 어떤 부분을 다른 의도로 해석하는 글을 볼 때, 기쁘기도 하고 때로는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건 제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그 작품을 수신한 독자의 것이니까요. 다만 아까 평론가 얘기를 잠깐 하셨지만, 소위 말해서 작품성이라는 것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나 시각 같은 것이 평론가나 문학계라고 불리는 집단에서 많이 이야기를 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어요. 텍스트힙에 기대어서 보자면 사람들이 그래도 전보다 문자에 대한, 텍스트에 대한 관심이 있을 테니까 단순히 문학을 전공자나 작가들, 그러니까 우리끼리만의 담론이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너무 쉬운 방식으로 대중적인 어떤 것을 긁어주는 것이 아닌 선에서, 지적인 글들을 읽고 싶어요. 쉬운 해설서가 아닌,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다채로운 평론이 나오면 좋겠는데, 역시 수요가 없으니 힘들 것 같긴 합니다.



박인성

예전의 엘리트적인 독서 목록과 지금의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의 간택 사이에 중간의 언어들이 많이 존재해서, 독자와 문학계가 서로 너무 유리되지 않게끔 하자는 것이죠. 그리고 그 중간의 언어가 많이 팔리고 자주 호명되는 작가들 바깥으로도 향할 수 있어야 할 테고요.



이미상

저는 대량 소비되는 작가가 아니어서 (웃음) 당연히 이상문학상이나 젊은작가상 받으면 대량 소비가 되죠. 그렇긴 하지만 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아서 이런 고민 잘 모르는데, 많이 안 팔려서 좋은 점도 있다! 정신 승리 합니다. 그럴 능력이 되고 실제로 인기를 얻으면 힘든 점도 있겠죠. 부럽지만 다 좋지는 않을 것 같다. 보는 눈이 적어서 생기는 자유도 있으니까요.



위수정

전혀 공감이 안되고요 (웃음). 저도 똑같은데.



박인성

저도 약간의 격차 같은 것을 느끼긴 해요. 평소에는 문학 독자는 다 어디에 숨어 있나 싶다가, 문창과 주변인들이거나 SNS 같은 곳에서만 독자의 실체를 경험하다가, 국제도서전 같은 데 가면 '도대체 이 사람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하는 생각이 들죠.



위수정

북토크에 사람 모으기도 쉽지가 않은데 너무 놀라웠어요.



박인성

그들이 문학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특정한 시선들이나 감각이 있으니까요.



위수정

이건 좋은 것 같아요. 



이미상

맞아요.



이미상

불륜카페에서 제 소설의 구절을 발췌해 불륜에 맞추어 해석했는데 너무 맛깔나고 좋더라고요. 이런 것이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리는 것의 장점이죠. 왜냐하면 평소보다 많은 분들이 읽기 때문이에요. 



박인성

그렇게 독자가 그렇게 자기 삶의 맥락 안으로 체화해서 텍스트를 끌어다 쓰기 시작하면, 정말 위험한 소설이 되는군요. (웃음)



박인성

좌담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소설의 위험성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소재나 시선, 혹은 형식일 수도 있겠습니다.

방금까지 우리는 비평이 소설의 날붙이 같은 지점들을 매끈하게 연마해 버리는 경향과 반대로 독자가 텍스트를 자기 맥락 속에 마음대로 끌어다 놓는 시대의 독서를 함께 이야기했는데요. 그렇다면 소설가에게는 비평적 의미화와 독서의 배치, 그 양쪽을 빠져나가는 탈주로가 있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무해의 시대의 감각과 비평적 해부가 만들어낸 의미의 영역을 모두 통과한 뒤에도 해석되지 않고 남아서 우리에게 안겨지는 형태의 위험한 소설이라는 게 가능할지, 그 조건은 무엇일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미상

질문이 너무 어려워요! 이것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을 해봤는데요. 어쨌든 제가 요즘 느끼는 거는 내용 면에서, 위험함, 위반은 필수고, 소위 말하는 반문화라는 것이 지금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나 하는 것이에요. 이제는 문학 내에서뿐 아니라 전 국민이 운동권이고, 저항은 너무나 매력적이고, 너도나도 저항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고, 표현할 수단도 있고요. 무해함을 때리지만 그것은 운동회의 박 터뜨리기 게임에서 박이 없는데 콩 주머니만 계속 던지는 느낌도 있어요. 시간을 아주 짧게 보지 않는다면 긴 흐름 속에서 무해함 유행도 점에 불과하겠죠. 제가 요즘 읽고 싶은 위험한 소설은 하나도 못 알아먹겠는 소설이에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비엣 타인 응우옌이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에서 한 말인데 베트남계 미국문학에는 통역의 징후가 있다고 해요. 주류가 소비하기를 바라는 이야기가 이미 존재하고 그에 맞추어 조정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컨대 노동소설이라고 한다면 르포 기사와 달리 그냥 그 현장 내부에서 통용되는 언어로만 다 발라 버리고, 기계 설비 묘사도 불친절해서 뭔 말인지 뭔 그림인지 모르겠고, 일일이 챗GPT로 다 찾아보게 만드는 소설? 그런 시도를 도전적이라고 느낄 것 같아요. 내가 알아먹지 못하는, 떠먹여 주지 않는 소설. 말하고 보니 저에게는 형식이 중요하네요. 



박인성

오히려 번역할 수 없음이 강조되는, 그래서 읽는 사람의 리터러시를 상승시키는 소설 말씀이군요.



이미상

바로 그겁니다.



박인성

그런 소설이 진정한 의미에서 위험하다는 것이군요. 위험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독자가 능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때문이겠죠.



이미상

못 알아 듣는 소설을 읽고 싶다.



박인성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위수정 작가님은요?



위수정

저는 책을 읽을 때 모르는 용어가 나오면 검색을 해 가면서 읽게 되는데 그건 독자로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자세 같아요. 내가 모르는 얘기를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가에 대한 불만은 없어요. 

작가가 자신만이 아는 이야기를 전시하듯 무책임하게 쓰는 것도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작가도 독자에게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독해를 위한 노력을 해달라는 의미로요. 독자의 편의를 위해 무조건 쉽고 알아듣게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물론 대중적으로 알려지리라는 기대는 접어야겠지만요. 


처음에 위험한 소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긍정적인 의미의 위험함을 생각했는데, 이 좌담을 하면서 일종의 부정적인 의미에서 위험한 소설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좀 전에 극우 얘기도 하셨지만 사회 시스템을 옹호하는 입장, 변화를 바라지 않거나 변화하는 방향이 옳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불의에 맞서 저항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이 있어요. 본인이 무엇에 대한 저항을 하고 있는지, 그 저항이라는 의미, 그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망각한 채로, 그들만의 논리 안에서 정의를 정의하고 몰두하는 상태. 그게 저는 소설에서나 삶에서나 가장 위험한 상태가 아닐까 합니다. 


반면, 긍정적인 의미의 위험한 소설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해 보면 (이미상 작가님은) 형식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내용에서 찾으려고 하는 작가 같아요. 아니, 형식도 내용에 포함된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보수적인 것과 가장 먼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예술이라는 것이 그렇죠. 보수적인 세계를 그린다고 해서 그 소설이 보수적인 건 아니죠. 작가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해요. 소설을 쓴다는 것은 소설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위험성을 응시하고 직면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멀쩡한 차림으로 나와서 적절한 어휘들을 골라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허용된 언어들을 가지고 상대를 설득하려 노력하는데, 소설은 좀 다른 방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해요. 허용되거나 이해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상태. 달리 말하면 ’상식‘으로 여겨지는 많은 것들을 계속 의심하려는 의지 같은 것. 그것이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가지는 정체성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상태에서 촉발되는 위험이라든지 불편함, 불쾌함까지도 잉태하고 있는 것이 소설의 기본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하지만 소위 ’안다무‘라고 묶이는 소설 속 세계는 바깥이 없거나 약소하게 여겨질 수도 있어요. 인물들은 어떤 고통을 겪어도 결국 감당해 내요. 달리 말하면 소설 안의 인물들에게 어떤 고난이 닥쳐도 그 세계 안에서는 딛고 이겨 나가 삶을 훼손당하지 않을 거라는 태도가 느껴져요. 그런 작품들을 읽으며 독자는 안도를 느끼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독자를 소외시킨다고도 생각해요. 사실 저는 ’안다무‘라고 퉁쳐서 어떤 경향의 작품들을 묶는 것에는 좀 부정적인 마음입니다. ‘안다무’라고 말할 때마다 마음 어딘가가 불편해요. 다만, 적어도 작가로서, 내 마음의 위안을 위한 글을 쓰지는 말자. 좀 더 불편하고 외진 곳으로 나를 데려가자, 라고 매번 다짐합니다.



박인성

쓰는 자로서의 태도 같은 부분을 떠올리게 됩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 그것이 강렬하게 느껴지잖아요. 도저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위험한 소재나 상황으로 들어가기 위해 일단 내 몸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 그러니까 나의 상황과 상태, 나의 정신이 일반적인 조건에서는 결코 이 상황에 접근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조금은 불편하게 만드는 조건 같은 것이 소설가에게는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어떻게 보면 소설가는 스스로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일까요?



위수정

제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그냥 사람들이 이 세계에서 본인들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도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하루하루 그저 소박한 식사, 충분한 수면, 적당한 노동, 그리고 각자의 재미를 추구하며 충만했으면 좋겠어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무언가를 착취하지 않는 선에서. 너무 이상적인가요. 제가 어렸을 때, 2026년은 아주 먼 미래였는데, 지금 2026년을 살면서 느끼는 건 역시 시간이 지난다고 사회가 진보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제 생각엔 당연한 것들이 여전히 많은 곳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라서 제가 소설을 쓰고 있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요. 편해지고 싶고 스트레스 안 받고 싶고 행복하고 싶은데 잘 안 되죠. 소설가는 별수 없이 그런 아이러니에 몸을 던져 넣고 그 상태를 바라보며 글을 쓰는 부류 같아요. 



이미상

제가 불편에 다가갈 필요가 없어요. (웃음) 노화와 불편이 엄습하고 있어요. 굳이 내가 막 달려들 필요가 없어요. 오고 있어요.



박인성

확정적인 불편이 오고 있는 세계의 소설가 두 분께 마지막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이 질문은 사실 답변하지 않으셔도 상관없고, 없으면 그냥 넘어갈 질문인데요. 지금 한국문학 혹은 그 바깥에서 과소평가되었다고 생각하는 작업들이 있다면, 한 가지씩 말씀해 주시면 재미있을 것 같아 드리는 질문입니다.

한국문학 바깥에 있는 것도 상관없습니다. 예를 들어 콘텐츠나 영화 같은 영역도 좋아요. '이런 게 좀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것이요.



이미상

저는 요새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32만 명이 참전했기에 우리도 주변에 참전군인을 쉽게 볼 수 있죠. 할아버지나 삼촌 같은 경우요. 참전군인이 그렇게 많은 데도 그들의 경험이 충분히 이야기되거나 축적되지 않았기에, 주목 받지 못한, 과소평가된 서사라고 생각해요. 참전군인 분들이 연세가 많으시고 기억이 사라지고 있기에 이것은 물리적인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하고요. 

아까 SF에서 섹스 로봇 이야기를 쓰면 안된다고 했는데, 문학에서 군대 이야기도 비슷한 처지일까 싶어요. 하지만 6,70년대 베트남전 참전도 “군대 얘기”예요. 범위를 협소하게 잡을 필요가 없죠. 

요즘은 아예 군대 경험이 없는 것처럼 소설을 쓰니까 너무 안 나오면 또 읽고 싶고 흔히 이야기되던 방식 말고 어떻게 다르게 쓸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소재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어떻게 쓸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박인성

군대 이야기야말로 '술자리에서도 하지 말라'는 경구가 붙은 대표적인 소재죠. 섹스 로봇 이야기와 비슷한 처지라는 말씀이 정확합니다. 시작하면 끝이 없고 결국 무용담으로 환원되니까 그런 금기가 생겼겠지만, 실제로는 그 무용담의 패턴 안에서 병영 국가화된 이야기들만 살아남고, 그 이면의 경험들은 말해질 기회 자체를 잃어 온 것에 가깝습니다. 베트남전까지 시야에 넣으면 더욱 그렇고요. 그 많은 참전군인의 기억이 '군대 얘기'라는 이름 아래 통째로 묶여 잊히는 셈이니까요.



이미상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는데요. 오래전 군에 입대한 대학 동기가 콜렉트콜(수신자 부담 전화)로 전화를 걸어서 운 적이 있어요. 걔가 그때 한 말이 뭐였느냐 하면 “태어나서 사람을 처음 때려봤어.” 그러면서 울었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나요. 그 친구가 워낙 유순하고 착했는데 군 생활하면서 처음 사람을 때려 본 거죠.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던 거고요. 어찌 보면 흔한 이야기이고 보잘 것 없는 에피소드인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에게는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각자만의 이야기가 있다. 보편적 서사에 파묻히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할 뿐이지 각자의 경험 속에 분명히 가지고 있고,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작업을 소설가로서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생각은 하죠. 



박인성

바로 그런 이야기죠. 유순한 친구가 '처음 사람을 때려봤다'며 우는 그 한 통의 전화가, 무용담의 패턴이 걸러내 버리는 종류의 개별적인 경험일 겁니다. <D.P.> 같은 드라마가 나름대로 의미 있게 한국 병역 문화를 다루긴 했지만, 대표성 있는 캐릭터들을 통한 대중적인 이야기가 되어야 했기에 다소 투박해진 감이 없지 않고요. 말씀하신 대로 소재보다 어떻게 쓸지가 문제라면, 흔한 서사에 파묻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단독적인 경험들의 세계가 따로 있을 것이고, 그것들이 한국문학의 또 다른 얼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위수정

저는 항상 이야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 이야기라는 건 사실 디테일의 문제죠. 이미 그리스 로마 신화 이후에 새로운 서사는 없다. 모든 서사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 ’변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인물을 가장 중요시하는 이유도 ’개인‘이 지닌, 작다면 작은 차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해도 누구의 시선을 따라가느냐에 따라서 사건은 다르게 기록되죠. 거기에서 새로움이 나온다고 생각해요.똑같은 군대 얘기, 사랑 얘기. 가족 얘기. “또 그런 얘기야.”라고 하지만 소설을 읽고 난 뒤에는 나와 다른 개인의 삶을, 내면을 경험한 것 같은 그런 독서 경험이 우리에게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시대에도 전쟁이 지속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더 믿을 수 없는 건, 한쪽에서 학살이 일어나는데 다른 쪽에서는 평화롭게 여행 가고 힐링하는 삶이 전시되죠. 거기에 대한 죄책감도 없어요. 그건 우리가 무감해질 수 있도록 만든 이 세계의 시스템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이 시대의 전쟁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보고 싶어요. 시스템 안에서 착취당하거나 죽어가는 개인의 역사는 언제나 쓰여져야 한다고 믿지만 정작 이런 말을 하는 저 역시도 그런 이야기에 피로감을 지니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무기력하기도 하고.

사실 이런 얘기는 저한테 하는 얘기예요. 아무리 제가 어떤 금기에 도전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한들 스스로 그런 스트레스에 정면으로 부딪히기를 원하는 글을 쓰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누군가가 써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도 한번 시도해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르포 소설을 써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고통이나 책임을 직면하기가 두려워서 자꾸 발을 빼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기는 해요.



박인성

말씀을 듣다 보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부터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 이란-미국의 충돌까지, 거대 서사가 없어졌다고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거대한 서사 속에 살고 있어서 오히려 그것을 따로 체감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면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거대 서사를 묘사하는 것, 그러니까 전쟁이라고 하면 어디서 무슨 전투가 일어났다는 식의 이야기나 대표성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미시적 개인의 싱귤러리티(singularity), 즉 단독자로서 한 사람이 시대의 거대성 자체를 말 그대로 체현하는 형태의 이야기가 늘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런 이야기가 이미상 작가님이 말씀하신 위험한 소설일 것이고, 위수정 작가님의 말씀처럼 그런 이야기들이 지금 우리에게 늘 필요하고 늘 부족한 소설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분 작가님이 충실하게 응답해 주신 덕분에 굉장히 볼륨 있고 의미 있는 좌담이 된 것 같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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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기획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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