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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록(素心錄)』, 그 마음의 울림과 여운

  • 작성일 2026-02-01

   [편집위원 기획 – 단 한 권의 책]


   『소심록(素心錄)』, 그 마음의 울림과 여운


정혜경


   연주홍빛 표지 배경에 민들레 씨앗이 날아다니고 있다. 표지 왼쪽에는 한자 세로쓰기로 素心錄(소심록) 柳達永(류달영) 著(저)라고 저자가 직접 쓴 글씨가 굳건하게 새겨져 있다. 성천(星泉) 류달영의 수상록 『素心錄(소심록)』(경문사, 1961)이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우선 성천의 수상록이라는 것만으로도 반가웠고, 소박하면서도 여운 있는 표지가 마음을 끌었다. 장정을 맡은 월전 장우성은 농민이 ‘생각하는 민들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성천의 뜻을 이렇게 담았다. 1961년 초판본 민들레 씨앗 하나가 이제사 마음터에 내려앉았다.

 

   저자 성천 류달영(1911~2004)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39년 『농촌 계몽의 최용신 소전』을 저술해서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양정고보 스승이었던 김교신은 최용신을 만나 보았던 성천에게 이 책을 쓰도록 권유했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재직 중이던 성천은 제자들에게 최용신 전기를 읽히고 싶었다. 일본 경찰 검열을 의식하며 어려움 속에 완성한 최용신 전기는 초판 1천 부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품절되었을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다.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에 민족 사랑과 계몽 운동의 불씨를 심어 준 책이었다. 그 시절부터 성천의 글은 독자를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서 시작되어 6·25전쟁과 4·19혁명 후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발표했던 성천의 글이 했던 역할을 『소심록』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소심록』은 ‘평소의 마음을 기록한 책’이란 뜻으로 근래에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모아 내었다는 겸손한 제목이다. 성천은 이 글모음이 자신에게만이라도 사람다운 사람을 위하여 훗날까지 격려하는 힘을 가질 것으로 믿었다. 그 ‘격려하는 힘’은 충분히 전해져 강렬한 울림으로 왔다. 가로 12.5cm 세로 19cm의 이 아담한 책 405쪽에 51편의 글이 빼곡히 담겨 있다.


   『소심록』의 글들은 1959년 3월부터 1961년 2월까지 이 년 동안 《사상계》, 《새벽》, 《사조》, 《신태양》, 《식량과 농업》, 《여원》 그 밖의 여러 잡지와 《조선일보》, 《대학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에 발표한 것이다. 이 책은 1961년 5월에 출간되었으니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지 일주기가 되는 시점이었다. 마지막 장 ‘사월혁명’의 다섯 편은 혁명 때 쓰러진 꽃다운 젊음들과 같은 행진 속에서, 거친 호흡을 함께 하면서 쓴 글들이었다. 성천은 4·19혁명은 학생들의 피로 성공했으니, 그 정의로운 피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면서 깊은 존경으로 명복을 빌었다.


   성천이 사회의 지도자로서 특별했던 점은 나라의 현실에 대해 고뇌하면서 비전을 제시할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현실에서의 타개책까지 구체적으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성천은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 중 사토 교수에게 선물 받은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의 이야기』를 읽고 청년 교육과 협동 운동이 ‘광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확신했다. 이 민족의 생명을 말라 죽지 않게 하는 길은 교육이라 생각했고,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자가 되려고 했다. 그리고 인재 양성을 위해 당시 암흑천지였던 여성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선택했다. 


   성천은 1936년 개성의 호수돈여고에 부임하게 되는데. 개성에서 여러 계획을 실행해 보았다. 우선 학교에서 과학 과목을 맡아 동물, 식물 광물 생리를 12시간 가르치면서 가정교육, 화훼원예, 우생학 세 과목을 과외로 가르치고 싶다고 건의하여 학생들에게 12시간을 더 가르쳤다. 화훼원예를 가르치며 여성의 정서를 함양하여 가정을 아름답게 꾸미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이 분야의 심화로 10년 후 1946년 성천의 서울 농대 시절 전공이 원예학이 되었고, 1947년부터는 무궁화 연구를 시작해 1983년 저서를 내었으니 ‘보람 있는 고생’의 출발이었다. 


   그 24년 후, 1960년 6월에 쓴 ‘농촌 파일로트에게 드리는 글’에서 “우리가 우리 인생을 결산하는 마지막 날에 결코 다시 반복할 수 없는 스스로의 삶을 회상할 때에 보람 있는 고생보다 더 값지고 만족한 것은 없을 것으로 나는 생각합니다. 인생의 손익을 기록해 가는 장부에 기록되어 가는 재산은 ‘나보다 더 큰 것을 위해서 스스로 선택한 보람 있는 고생의 가치’라고 나는 믿습니다.”라고 평소의 신념을 밝혔다. 성천의 글이 독자에게 힘 있게 전달되는 것은 이렇게 자신의 삶에서 실천했던 체험이 녹아 있는 글이기 때문이겠다.


   당시 개성은 총독부에서 전매하던 인삼 재배로 인해 총독부의 눈치를 덜 보던 자긍심 있고 활기찬 도시였다. 성천은 농사짓는 사람으로서 개성 사람의 생활 태도에 주목했다. 개성 사람들이 척박한 왕모래 땅에 채소 농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일 년 내 거름을 모으는 태도, 요행을 바라지 않는 근면성을 알게 된 것이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여서 조선 시대에 선비로서 사회적 지위를 얻는 삶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런 취약점에서 자부심 강한 개성 사람들이 오히려 상업에 종사하며 자립적이고 철저히 근면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게 된 것일 것이다.


   “개성은 인삼 재배로 유명하고, 또 개성배추를 비롯하여 개성 꽃상추, 개성 다다기오이, 개성 봄무우, 개성 장손마늘 따위 개성 특산의 좋은 채소들이 많다. 개성 일대는 왕모래밭으로 토박한 고장이다. 그 왕모래밭에서 탐스러운 채소가 자라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좋은 씨앗의 준비와 거름 주는 것이다. 개성은 씨앗의 명산지이며, 개성배추 채종법은 우리나라의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개성사람들은 거름을 소중히 여기고 알뜰하게 일 년 내 모은다. 개성사람들이 장사를 잘하는 것은 그 꼼꼼하고 건실한 농사법에서 상업의 원리를 찾아낸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조선의 농민들에게 씨앗을 수입하게 해서 해방이 되고 나면 더욱 심각한 식량난에 처할 지경이었다. 그것을 염려해서 미리 준비해서 해방 후 일본에서 건너온 농학자가 우장춘이었다. 지금 우리가 지금 먹는 배추와 무가 그때 개량된 것이니 씨앗 문제가 아주 중요했다. 조선 정조 시절 수원화성 둔전에서 개혁 농법이 시행되었다. 1906년 고종은 수원에 농업 인재 육성을 위해 농림학교를 세웠고 성천은 그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개성에 간 것이다. 근대 농업 전통이 이어지는 과정과 해방 전 개성이 씨앗의 명산지라는 것을 알게 되어 반가웠다. 


   성천은 개성 사람들에게서 발견한 근면성을 반가워하며 우리 민족을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과제도 근면성에 있고, 옳은 이념에서의 근로를 육성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오십을 바라보던 1960년 2월에 쓴 ‘근로’는 꿀벌을 관찰하며 쓴 글이다. 성천은 그 전 해에 꿀벌 한 통을 사 와서 가족과의 친구들의 불찬성에도, 고집대로 꿀벌을 치기로 했다. 농민들에게 양봉 사업을 권유하려면 경험도 얻어야 하고 꿀을 얻을 수도 있지만 성천에게 중요한 것은 꿀벌 관찰에서 얻은 새로운 배움이었고 그 배움을 글로 전해 주었다. 


   “나의 정신을 강하게 울려 주는 것은 벌들의 근로의 모습이다. 지붕을 뚫고 이제 갓 나온 어린 벌이 한 시간가량 자기의 몸을 말리고 가다듬고 나면 벌써 돌아다니면서 방 소제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새끼벌이 나온 방의 지저분한 것을 깨끗이 치우고, 침을 발라서 방안을 깨끗이 닦아 왕봉의 알을 낳게 하거나, 또는 꿀과 화분을 저장하게 만들어 준다. 꿀벌은 신비스러운 본능에 의해서 근로의 상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나는 올해에도 근로의 정신을 꿀벌에게서 더 배워 보고자 한다.”


   이렇게 평생 배움에 열심이었고 일에도 근면하던 성천이었지만 삶에서 커다란 상실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먼저 국권을 빼앗긴 나라에서 성장했던 아픔이 컸다. 성천은 자신의 가슴에 자라난 민족의식의 첫 싹은 코 흘리기 시절 겪은 3.1 만세에서 터 났다고 했다. 이 싹은 양정고보에서 김교신 선생을 만나 무성한 줄기로 자라고 깊게 뿌리 내리게 된다. 스승으로부터 배운 조국의 역사와 지리, 국토에 대한 자부심이 『소심록』 곳곳에 표현되어 있다. 그중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 중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격파한 ‘울돌목’을 찾아 감격스러운 묘사를 남겼다.


   “남쪽 태평양 물이 진도와 해남 반도 사이의 좁디좁은 목으로 밀려들어서 목포 앞바다를 거쳐 황해로 터져 나가게 되었다. 네 시간만큼 좁은 물목으로 대양의 물이 몰려들고 쏟아져 날 때의 그 장관은 형용할 수가 없다. 그 거세인 성낸 파도의 위세!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울부짖는 물소리! 소용돌이쳐서 뒤틀고 감돌고 솟구치고 뒤집히는 물의 변화! 남쪽 대양의 물이 온통 몰려드는데, 서해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여서 폭포처럼 바닷물의 단층을 이루는 장관은 네 스스로 가서 보라는 수밖에 실감시킬 수가 없다.”


   전남 진도 앞바다 폭 290미터의 좁은 수로 울돌목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읽으니 꼭 가 보아야겠다는 열망이 일어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뼈아프게 겪어 내었던 성천이었기에 왜란 승전의 현장을 보면서 더욱 전율하는 감격을 느꼈을 것이다. 양정고보에 재학 중 서봉훈 선생에게 처음으로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 피 끓던 청년 시절에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은 국난 극복의 희망을 품게 해 주었겠다. 1959년, 성천은 오랜 숙원 끝에 찾은 울돌목에서, 그동안 기대한 대로 위대한 겨레의 혼, 이순신 장군을 더 가까이서 호흡할 수 있었다. 


   민족의식이 그토록 깊었지만 성천은 세계사에 대한 인식 또한 명징했다. 특히 『덴마크의 이야기』를 읽은 이후 덴마크 부흥사에 주목하였다. 6·25전쟁 중 피난지 대구에서 국민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목표로 『새 역사를 위하여: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을 저술했다. 황무지에서 협동 정신을 발휘해 민주복지국가를 재건한 덴마크의 사례를 거울삼아 농민과 학생과 교사와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주려고 했다. 『소심록』에서도 그룬트비와 덴마크 역사를 소개하고 노르웨이, 스웨덴, 핀랜드, 스위스 같은 복지국가의 실속 있는 경제력과 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소심록』을 읽어 가는 중 성천의 글에서 가장 깊이 와닿았던 것은 그 무엇보다 성천의 ‘믿는 마음’이었다. 학생과 농민의 성장에 대한 믿음, 보람 있는 고생에 대한 믿음, 눈에 보이지 않는 큰 의미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었다. 성천의 일생은 그 믿음이 헛되지 않았던 것을 입증하였다. 김교신과 사토 교수 등 방향을 제시해 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 스승들과의 깊은 교류도 성천의 감응력과 성실한 자세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개성에서 가르쳤던 제자들, 농촌이나 도시 강연 후 이루어지는 만남들에서도 성천은 시대를 함께 호흡하며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갔다.


   그다음은 성천이 슬픔 후의 정화와 고민 후의 창조를 보는 안목이다. ‘기쁨과 슬픔’ 편에서, 성천은 6·25전쟁과 그 뒤에 어린 자식 둘을 먼저 보냈는데 병원에서 또 막내아들의 불치 선고를 듣는다. 아들의 자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은 기쁨만도 슬픔만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인생을 정화하고 가치 있게 끌어올린 것은 크고 깊은 슬픔인 것을 나는 되씹어 생각한다. ‘거듭하는 슬픔들이 나를 태워 정화하라’고 나는 신에게 호소한다.” “큰 고민 속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평화를 그리워하고, 또 마음속에 높고 맑은 세계를 창조해 낼 수가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역설 속에 생의 깊이가 있을 것이다.

 

   성천의 첫 번째 수상록 『인생노우트』(수도문화사, 1957)에는 성천의 청년기를 소재로 한 글이 주로 실려 있고, 두 번째 수상록 『유토피아의 원시림』(사상계사, 1960)에는 1950년대 세계여행 중에서 느낀 글로 한정하였다. 이 세 번째 수상록 『소심록』은 성천의 성장 내면과 중년 시기의 감성, 역사의식과 생명 사상이 두루 녹아 있는 소중한 책이다. 책이 출간된 지 6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읽어도 성천의 당부는 울림이 커서 우리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애정에 함께 감응하게 하는 힘이 있다. 소심록이 주는 울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기꺼이 여운을 안고 가면서, 성천이라는 거목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믿는 마음’을 따르고 싶다.



2025년 10월호부터 문장웹진 편집위원이 기획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2월호의 기획 콘텐츠 ‘단 한 권의 책’에서는 시인, 연구자, 학예사 3인이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을 독자분들께 소개합니다. 김명순 작가의 『생명의 과실』부터 염상섭의 『해바라기』, 류달영의 『소심록』까지. 각각의 책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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