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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작성일 2026-09-01

  [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전설의 고향>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있는 거 같지도 않다. 도리어 “십 년째 생선처럼 누워만 있던 할머니”가 귀신 같기도 하고, 아이들이 “누나, 같이 놀자”고 조르면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끈을 풀”어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칼을 앞으로 쏟”고 귀신의 역할을 하는 화자가 돋보인다.


  이 시는 옛날 귀신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것일까? 세심히 들여다보면 애도의 의지가 시 전반을 묵묵히 받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1연에서 화자는 자신을 따라오는 “죽은 사람”을 피해 처음 “하루 이틀 사흘 눈을 감고 달”린다. “백 일이 되던 날”에는 “눈을 뜨고 달”리고, “천 일이 되던 날 달리기를 멈”추는데, 이 과정은 자못 애도의 과정과 닮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는 그 존재를 쉽게 놓아주지 못하고, 죄책감이나 미련, 후회와 같은 감정의 앙금을 오랫동안 짊어지며 살아간다. ‘아니야, 그 사람은 죽은 게 아닐 거야’ 되뇌며 자신에게 닥친 슬픔을 외면하고 도망치듯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그 사람은 내가 이렇게 살길 바라지 않을 거라는 깨달음을 얻으며 천천히 애도를 이뤄내는 과정 말이다. 애도란 옆에서 누가 도와준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내 발로 꿈속을 걸어 나”와야 끝나는 일이다. 시에서는 죽은 사람이 따라온다고 했지만, 나를 괴롭히는 건 그 사람을 떨치지 못하는 내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꿈을 꾸는 중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꾸는 “자각몽”처럼 말이다. 거창하게 애도라고 말하긴 했으나 ‘귀신 달래기’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누군가를 달래는 과정에서 실은 제 마음도 달래지는 법이니까. 3연에서는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 눈에 잔치였지 누군가의 초상을 치르던 중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훌쩍 자란 화자는 이제 안다. 귀신도 “혼자 노는 꿈”을 꾸면 무서워한다는 것을. “시골 외갓집 창고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면 사람들은 귀신이 우는 거라 믿고 달아났지만, “갇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을.


  「옛날 귀신」을 읽으며 자연스레 떠오른 영화가 있다. 2017년에 개봉한 데이빗 로워리(David Lowery)의 <고스트 스토리>이다. 이 영화는 죽은 자의 영혼이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감당하는지 보여준다. 영화 초반, 갑작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작곡가 C는 영안실에서 고스트가 되어 깨어난다. 연인 M과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M의 슬픔을 묵묵히 지켜보는 것뿐이다.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도, 곁을 떠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산 사람과 고스트가 경험하는 시간의 비대칭을 담아낸다. M이 상실을 견뎌내는 시간은 지루하리만치 느리게 가는데, 고스트가 겪는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지나간다. 조금씩 일상을 되찾은 M은 훗날 다른 이를 만나 결국 집을 떠나도 고스트는 끝내 집을 떠나지 못한다. 새로운 가족이 들고나고, 집이 철거된 자리에 고층 건물이 들어서도 고스트는 그때 그곳에 붙들려 홀로 남아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 쓸쓸함은 유령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를 되묻게 한다.


영화 <고스트 스토리> 스틸컷

출처 : 네이버 영화


  우리가 흔히 유령이라고 번역하는 ghost의 어원은 고대 영어 gāst에서 유래하는데, 이 단어는 원래는 숨(breath), 영혼(spirit)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영혼에게도 숨이 붙어 있다는 걸까. 사라진 존재가 여전히 어떤 기척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회학자 에이버리 고든(Avery F. Gordon)은 『유령적 사건들: 출몰과 사회학적 상상력(Ghostly Matters: Haunting and the Sociological Imagination)』(2008)에서 이러한 ‘출몰(haunting)’을 매듭짓지 못한 과거의 슬픔이나 억압된 상처가 사라지지 않은 채 현재의 삶으로 되돌아오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고든에 따르면 유령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자신의 지분과 온전한 주의(attention)를 요구하는 ‘실재적 현존(real presence)’이다. 유령이 출몰하는 순간은, 그것이 우리에게 이전과는 다른 ‘조치되어야 할 무언가(a something to-be-done)’가 남아 있음을, 마땅히 마주해야 했을 슬픔과 기억에 응답하라고 요구하는 신호라는 것이다.1)


  이모가 돌아가시던 해, 나는 수능을 앞둔 고3이었다. 담임 선생님의 부름에 교무실로 가니 어머니께 전화를 해보라며 반납한 휴대전화를 돌려주셨다. 여고생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한 복도에서 이모의 부고를 들었다. 조퇴를 하려고 했으나 엄마는 장례식에 오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하셨다. 장례식이 나주에서 진행되어 참석하려면 학교를 며칠은 빠져야 했고, 이는 수험생의 루틴을 배려한 선택이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해서였을까. 나는 이모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이모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쩌면 이모는 먼 나라로 이민을 가셨거나 그저 잠시 연락이 두절된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이모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모를 살려둔 건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나에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모가 계셨다면 잘 컸다고 마구 칭찬해 주셨겠지, 이모가 모시는 신은 이 미래를 다 보았을까 하면서. 나는 이모의 장례식에서 맘 놓고 울지 못한 게, 할머니와 엄마가 이모의 영정 사진을 앞에 두고 평생의 이별을 준비할 때, 등을 토닥이고 안아드리지 못한 게 내내 후회된다. 할 일을 다 하지 않고 나이만 먹은 것 같다.


  옛날 귀신이 나에게 묻는다.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나에게 소중한 것은 다 옛날에 있다. 설령 그것이 귀신이라 할지라도.



  ▶ 이민하 「옛날 귀신」 작품 읽기



1) 에이버리 고든이 말하는 ‘출몰(haunting)’과 ‘유령’은 본래 노예제, 국가 폭력, 인종적 자본주의 등 공식적인 역사나 사회적 제도 속에서 은폐되고 억압된 집단적 폭력의 상흔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고든은 역사적으로 가해진 사회적 폭력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을 때, 보이지 않아야 할 존재들이 생생한 ‘실재적 현존’으로 나타나 현재를 교란하고 정치·사회적 응답을 요구한다고 본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고든의 ‘출몰’ 개념을 개인의 삶 속에서 매듭짓지 못한 미완의 애도로 가져와 함께 읽고자 했다. Avery F. Gordon, Ghostly Matters: Haunting and the Sociological Imagination, Univ of Minnesota Press, 2008 참조.



《문장웹진》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25년 한 해 동안 진행한 <문장웹진 Rewind>를 <문장웹진 다시 읽기>라는 이름으로 이어 갑니다.
<문장웹진 다시 읽기>는 과거 《문장웹진》에 수록된 작품을 현재의 시선으로 다시 읽고 재조명하는 연재 기획으로, 등단 10년 이내의 젊은 작가와 평론가들이 참여합니다.
2026년 7·8·9월호는 김진선 시인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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