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도는 ‘남성성-코어’
- 작성일 2026-10-01
- 댓글수 0
[문장웹진 다시 읽기]
돌고 도는 ‘남성성-코어’
― 최가은, 「과잉 남성 사회―장류진 소설의 남성-청년」 (2020년 7월호 수록)
정의정
패션 산업은 빠른 속도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낸다. 발레코어, 고프코어, 놈코어… 아직 이것들도 다 알지 못하는데 또 포엣코어로 유행이 바뀌었다고 한다. 유행의 빠른 전환은 상품 소비를 부추기는 시장 전략이다. 그런데 무언가 사고팔지 않는, 시장의 대척점에 있을 법한 문학장에도 유행은 있다.
2025년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1)이 인셀2)의 정동을 다루면서 화제가 된 후, 그해 가을 계간지 『문학과사회 하이픈』은 ‘젠더-플레이’ 특집을 기획하며 청년 남성의 극우화 양상을 중심으로 하는 남성성 논의를 본격화했다.3) 올해 『문학동네』 또한 ‘남성성의 재구성’이라는 키워드 아래 기획된 여러 편의 비평·에세이를 발행했다.4) 대다수의 필진들은 이러한 특집호가 구성된 배경으로 12·3 계엄과 탄핵 이후 정국을 통과하며 테러, 집회에서 포착된 한국사회의 극우-인셀 정동과 그에 감응하는 근래의 문학 텍스트들을 짚는다.5) 지금 문학/비평장의 트렌드는 ‘남성성-코어’라고나 할까…?6)
그런데 동시대 지식장의 담론적 화두를 유행이라고 말해도 될까. ‘남성성’에 ‘-코어(core)’라는 말을 붙이니 진지하게 논의되는 남성성 담론을 가볍게 치부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우려스럽다. 그러나 내게 이 명명은 단순히 현상을 조롱하는 말이 아니라 동시대 현안을 발 빠르게 조사·수집하고 관련 서적과 글을 남독(濫讀)하고 그것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자신의 의견을 서둘러 표명해야만 하는 현장비평(가)의 생리와 한계를 통찰하는 언어로서 적실해 보인다.
물론 지금 한창 논의되는 ‘남성성’이란 이성애자-청년-남성 젠더의 극우적 멘탈리티에 주로 한한다. 이는 식민지 남성성이나 가부장 권력 비판에 비하면 지극히 동시대적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일베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2010년대 초반부터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백래시 국면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남성성은 언제나 문제가 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논의는 그때의 연속선에 위치하기보다 지금-여기에만 초점을 맞추어 과열되는 양상을 띤다. 이러한 담론적 단절은 이전의 남성성 논의가 정치성을 담지하지 못할 만큼 미진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언제나 ‘지금’을 가장 위태로운 시기로 지목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극대화하고 독자의 주목을 요청하는 현장비평의 관습으로 읽힌다. 이런 식의 비평이 반복되면 결국 담론은 축적되지도 사태의 근원지로 진입하지도 못한 채 한때의 유행으로 떠돌게 되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이전 시기의 글을 지금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 작업은 중요하다. 이는 후속 연구로서 선행 연구를 참조하는 연구 윤리의 실천으로서가 아니라, 과거를 반추하고 현재-미래를 도모하는 메타비평적 실천으로서 의미 있다. 이 글 또한 그 실천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바라며, 2026년의 시점에서 2020년에 발표된 최가은의 비평 「과잉 남성 사회―장류진 소설의 남성-청년」7)을 다시 읽고자 한다. 최가은의 글은 장류진 소설(특히 「펀펀 페스티벌」)의 남성-청년 인물을 분석하며 세대 담론이 호명하는 ‘청년’이라는 기표가 여성을 배제한 채 남성 젠더의 얼굴로 추상화·자연화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또, 장류진 소설에 특유한 리얼리티란 당대 청년들의 노동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인구학적으로 과잉 남성화된 세계에 여성이 노동하는 청년-시민으로서 포함되지 못했음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예리하게 분석한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그에 기반한 텍스트 분석은 지금의 관점에서도 대체로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집권하기도 전이었던 2020년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광장과 거리에 모인 젠더 불문 청년들의 다종다양한 몸을 훨씬 더 다채롭게 목격하는 중이다. 그러니 2020년 이후 문학장 안팎으로 청년 담론 내부의 젠더적 이질성을 발견하고 청년 기표에 여성을 기입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수행해왔는지 더 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최가은은 2015년에 발표된 배은경의 논문 「‘청년 세대’ 담론의 젠더화를 위한 시론: 남성성 개념을 중심으로」8)를 참조해 2008년 광우병 시위에서 대두된 ‘촛불소녀’ 담론을 예시로 들며 그간의 청년 세대론이 광장에 정치적 주체로서 모인 다양한 연령대의 청년 여성을 배제해온 맥락을 짚는다. 이것은 윤석열 탄핵 시위에서 케이팝 응원봉을 들고 광장에 나온 여성 청년들, 일명 ‘응원봉 군단’을 호명하는 담론과 대조된다. 이 호명은 케이팝 아이돌 팬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 청년들, 즉 ‘빠순이’를 향한 오랜 멸시를 단숨에 ‘덕질’과 사랑의 정동을 공유하는 집합체이자 민중 운동의 유력한 미래 세대를 향한 응원으로 바꾸어놓은 바 있다. 2020년대 중반에 이르러 마침내 여성들도 정치적 주체인 청년 시민으로서 인정받았으니, 이 사회는 촛불소녀 때보다 젠더 평등의 관점에서 진일보한 것일까?
그런 측면도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나라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거리로 나와 투쟁했던 여성들을 의도적으로 망각해버린 한국 사회의 공적 역사에서 이처럼 대외적으로 민주 청년의 얼굴이 여성으로 대표되는 일은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호명과 인준이 누구에 의해 왜 이루어지는가를 좀 더 신중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응원봉 군단’은 어떻게 기득권층(레거시 미디어와 정부 인사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었을까?
단적으로 2018년 문재인 집권 당시 혜화역 시위의 사례와 비교해보자. 혜화역 시위는 시위 과정에서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비민주적 한계가 뚜렷했으나, 자칭 ‘여성 청년’들이 거리로 모여 치른 반정부적 정치 시위 중 (대통령 탄핵 시위를 제외하면) 가장 규모가 큰 집회였다. 사회운동의 성과를 단지 규모로만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그 파급력에 비하면 (퀴어-페미니스트들에게 적절한 비판을 받았던 것과 별개로) ‘어리고 젊은 여성’들의 정치적 주체화 현상이 공적인 청년 담론 내부에서는 온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듯하다.
그렇다면 윤석열 탄핵 정국에서는 무엇이 달랐나. 물론 혜화역 시위와는 주최 단체도, 정치적 기조도, 목적도, 방식도 다르기에 대등한 비교는 어렵겠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진보 진영’의 기득권 남성들이 남성/여성으로 젠더화된 청년 집단을 특정한 방식으로 호명함으로써 자신들의 ‘헤게모니적 남성성’9)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최가은도 지적하고 있듯이,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래윈 코넬에 따르면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분열하는” “환상으로 작동”하며, 환상에 미달하는 남성성을 구성적 타자로 추방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생산한다.10) 자칭 ‘진보’ 아저씨들은 남성 청년 극우화에 대해 과도한 우려를 표하는 한편 여성 청년의 정치적 주체화 현상을 격려하면서 브레이크와 액셀을 번갈아 밟는데 이는 결국 하나의 차체를 작동시키는 원리, 즉 정권 잡기에 유리하도록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생산하는 메커니즘이 아닐까. 그렇다면 혜화역 시위의 정치성을 의미화하는 것이 당시 정권에 득 될 게 없었다는 점도 납득이 된다.
윤석열, 이준석을 필두로 하는 극우 포퓰리즘 세력도 목적은 저들과 상반되었을지언정 젠더화된 청년 담론을 통해 남성성/여성성을 편의에 맞게 재생산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윤석열은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글자를 덜렁 적은 ‘짤’로 ‘피해자 남성성’을 독려하고 ‘펨코 정치인’ 이준석을 이용해 2030 남성 유권자들을 결집하여 2022년 대통령 당선에 성공했다. 그렇게 글로벌-신자유주의적-좌파 여성 청년의 이미지를 배포하고 여성들이 남성들의 권리를 빼앗았다며 피해자-남성의 서사를 전면에 내세울 땐 언제고, 2023년 흉기 난동 범죄가 연이어 벌어지자 가해자-남성들을 단죄하기 위해 난데없이 번화가에 장갑차를 배치하는 등 ‘도태된’ 남성성과의 과장된 결별을 단행하며 헤게모니적-공모적 남성성 구축에 앞장섰다.11)
다소 비약이 있겠지만, 젠더화된 청년상을 생산하는 지배층의 메커니즘이 홍대의 탄핵 반대 극우 집회, 올림픽 공원의 부실선거 규탄 시위에 출몰하는, 안티페미-극우 정서를 내면화한 정치 주체이자 ‘멀끔하고 반반한 유니섹스 스타일의’ ‘알파메일’이라는 혼종적 존재로 가시화된 것은 아닐까?12) 이제 ‘도태남’은 ‘고립은둔청년’이라는 행정 용어로 부드럽게 포섭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남성성의 생산은 곧 여성성의 생산이다. 여성 청년의 형상 또한 지배 권력의 입맛에 맞게, 언젠가는 남성들의 기회를 빼앗는 우월한 신자유주의적 주체였다가, 또 어느 때에는 젠더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었다가, 다시 민주주의를 이끌어갈 유망한 정치 주체가 되는 식으로 이랬다저랬다 변모하는 중이다. 하향식 호명은 여성 집단을 분별없이 동일화하는 문제를 수반하지만, 이러한 청년 여성의 표상도 얼마간 실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얼핏 이러한 여성-청년의 위상 변화는 최가은이 글의 결론부에서 주문한 바대로, “‘청년’과 ‘노동’이라는 영토를 향한 여성들의 비접근성과 이질감을 끝없이 가시화하고” “우리 사회의 ‘평등’과 ‘공정성’의 의미를 재질문”할 수 있도록 마련된 토대로도 보인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2020년 코로나가 본격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성별 임금 격차와 유리천장, 경력단절, 채용 차별 등 여성 노동자 차별의 구체적 사례가 담론장에서 자주 거론되곤 했으나, 기회 균등에 대한 요구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능력주의와의 친연성으로 비판받으면서 노동의 하부구조에 대한 젠더적 측면의 비판적 사유도 덩달아 닫혀버린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13) 하부구조에 대한 물질적 개입 없이 ‘노동’과 ‘청년’이라는 기표에 ‘여성’을 기입하는 것은 공허할 뿐이다.
이렇듯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여성성은 가변적 범주로, 남성성은 그 자체로 탐구되어야 할 핵심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 말하자면 요즘의 ‘남성성-코어’다. 그리고 이것은 최가은이 「펀펀 페스티벌」의 이찬휘와 면접관의 대화를 인용하며 언제나 기성이 소환하는 ‘청년’은 “단순히 ‘남성’의 모습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임을 상기하는 대목과도 연관해 생각해볼 만하다. 지금 범람하는 남성성 탐구/비판 담론은 결국 남성성을 해체적으로 사유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기보다 ‘유해한 남성성’, ‘폭주하는 남성성’을 제거하고 아버지의 대를 이을 적자로서 ‘진정한 남성성’을 찾으려고 분투하는 중이 아닐까. 이것도 일종의 ‘과잉 남성 사회’의 단면이다. 인구학적으로 남성 성별이 과반을 상회하지 않더라도 그러하다.
그렇다고 문학/비평장에서든 노동장에서든 ‘남녀동수’가 언제나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것의 피상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재명이 성평등가족부 장관으로 용혜인을 지명했던 최근의 일은 고위직 남성의 청년 여성 정치인 호명이 왜 보여주기에 그치고 실효가 없는지 증명하는 안타까운 사례가 되었다. 최가은 또한 기계적인 “여성 할당은 구조적 젠더 불평등을 남녀 갈등의 차원으로 단순화하는 일시적이고도 기만적인 대처 방식”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다만, 조앤 스콧의 분석을 경유하여 덧붙였듯, ‘남녀동수’ 운동은 성과가 아니라 질문의 층위에서 평가될 필요는 있다. 이 운동은 “누가 개인으로서 간주되어 왔는가를 재정의하는 방식이며” “사회가 규정하는 ‘시민’과 ‘인간’의 영역”, 즉 “비민주성에 관한 문제”를 논쟁하는 “급진적인 질문의 장”이라는 것이다.14)
따라서 ‘남성성-코어’가 한 시절의 유행으로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의 남성성/여성성 논의가 열어젖힌 질문의 장을 닫지 않고 오래 열어두려는 태도가 중요할 것이다. ‘사라지는 남성 청년의 몸들’15)만큼이나 여성 청년의 퀴어한 몸들도 희미해져서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니 말이다. 허울 좋은 명명으로 편리하게 동일화될 수 없는 다양한 여성-몸과 욕망에 대해서도 문학과 비평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이 글에서 여태껏 등장조차 하지 않았던, 극우 청년 여성이라는 형상은 어떠한가. 윤석열과 오세훈과 국민의힘에게 표를 던지는 수많은 여성 친구들이 주변에 널려있다. 대기업에 다니고 상향혼을 꿈꾸며 퀴어 친구를 두고도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여성들이 있다. 이제 「펀펀 페스티벌」의 남성 인물 이찬휘를 여성 인물로 바꿔도 본래의 서사 틀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자 이찬휘’가 굳이 「잘 살겠습니다」의 ‘빛나 언니’가 되기보다, 장류진의 근작 「진짜 사랑, 가짜 사랑」의 주인공 ‘이승리’가 되는 편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시대가 왔다.16)
|
《문장웹진》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25년 한 해 동안 진행한 <문장웹진 Rewind>를 <문장웹진 다시 읽기>라는 이름으로 이어갑니다. |
1) 필립 바랜티니 연출, 잭 손·스티븐 그레이엄 각본, <소년의 시간>(Adolescence), 넷플릭스, 2025.
2) 인셀(Incel, Involuntary Celibate): 비자발적 독신주의자
3) 이희우, 「우리들의 일그러진 리바이어던-‘청년 남성 극우화’라는 사회적 사실의 구성」; 인아영, 「비남성성의 남성성-우경화 시대 한국 남성들의 불안과 교착」; 안세진, 「사라지는 청년 남성의 몸들-서장원의 최근 소설을 중심으로」; 이라영, 「정상의 귀환, 정상적인 차별의 시간」; 안희제, 「젠더의 새벽-‘남자구실’과 낡은 꿈의 불침번」; 배하은, 「다이너마이트를 좋아하는 그들은」; 권희진 외 4명 좌담 「중간 지대를 만들어가는 일」,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 가을호, 문학과지성사.
4) 권지미, 「나는 남성성을 모른다」; 박민상, 「슬롭과 문학 사이, 울면서 ‘웃는 남자’들」; 송연정, 「천사 같은 나의, 천사―동시대 문학이 재생산하는 (비)남성의 낭만성」; 이연숙, 「S에게」; 장류진, 「나의 남성 캐릭터 창작 노트」, 『문학동네』 127호, 문학동네, 2026.
5) 사실 남성성에 대한 논의는 페미니즘 이론의 유구하고 주요한 쟁점 중 하나다. 그러나 윤석열 당선-12·3 계엄-탄핵 정국과 서부지법 백색 테러 사건을 통과하면서 극우화되는 남성 청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현저히 높아졌으며, 동시대 현장비평이 이를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담론화·쟁점화했다고 진단하는 것은 적절하다. 현재 한국문학 비평장에서 남성성이 논의된 맥락에 대해서는 김건형, 「도태 한남 비평의 가능성?」, 『신생』 105호, 전망 편집부, 2025 참조.
6) 다른 한편에는 AI 기술-코어가 있다. 본래 패션 업계에서도 유행이란 지난 계절과 다음 계절의 것이 중첩되어 있기 마련이듯, 문학/비평장의 담론적 유행 또한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맞물려 있다.
7) 최가은, 「과잉 남성 사회―장류진 소설의 남성-청년」, 『문장웹진』 2020년 7월호.
8) 배은경, <‘청년 세대’ 담론의 젠더화를 위한 시론: 남성성 개념을 중심으로>, 《젠더와 문화》 제8권 1호, 2015, 7-41쪽.
9) “헤게모니란 동의에 의한 지배를 뜻하는 개념으로,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젠더 관계의 패턴, 즉 이성애, 남성중심적 젠더 질서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데 널리 수용되는 실천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물리적 힘, 강인함, 지배, 통제, 위험 감수 등의 속성을 중심으로 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이해한다. 하지만 남성성은 그런 속성 자체가 아니라 구체적 실천이기에 실천의 맥락에 따라 사회적으로 달리 받아들여진다.” 추지현, 「폭력의 연속선과 남성성‘들’」, 『폭주하는 남성성』, 동녘, 2025.
10) 이는 인아영이 동시대 남성성을 분석하며, 그것이 기존의 남성성을 부인·회피하는 자기부정을 통해 ‘비남성성의 남성성’이라는 역설적 상태를 구축한다고 주장한 것과도 상통한다. 인아영, 「비남성성의 남성성―우경화 시대 한국 남성들의 불안과 교착」,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년 가을호)
11)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젠더 질서를 재생산하는 지배 계급의 통치 전략에 대해 추지현, 위의 글 참조.
12) “‘반반한’ 극우 남자들의 유니섹스한 실천”에 대한 생생한 마주침과 비평적 의미화는 박민상, 「슬롭과 문학 사이, 울면서 ‘웃는 남자’들“」, 『문학동네』 127호, 2026, 93-94 참조.
13) 물론 이 시기에 고용 시장에서의 젠더 차별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급격히 사그라든 데에는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의 일상화 등 다양한 요인이 있다.
14) 조앤 W. 스콧, 오미영 외 옮김, 『성적 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 인간사랑, 2009(최가은, 2020, 재인용).
15) 안세진의 글 「사라지는 청년 남성의 몸들」(『문학과사회 하이픈』 2025 가을호)의 제목에서 차용했다.
16) 장류진이 최근 에세이에서 밝힌 캐릭터 창작 비화는 이러한 맥락에서 유의미하게 읽힌다. 연애 프로그램을 즐겨 보던 장류진은 대부분의 남성 참가자들이 출산을 목표로 두고 여성-신체를 선별하고 있음에 새삼스레 놀란다. 이후 이런 남성 인물에서 “성별만 미러링한 캐릭터”로, “‘어리고 우월한 정자’를 지닌 ‘조신하고 참한 남편’을 최대한 ‘가성비 있는 방식’으로 찾기 위해 ‘생동성시험’에 참가하는 여성 인물”을 창작한다. “그런데 사실상 남성을 원형으로 삼은 이승리의 ‘정자 구하기’ 논리를 머릿속에서 설파하고 전개해나가다 보니, 성별을 바꿨는데도 현실에서 여성들이 하는 말과 고스란히 겹치는 것이었다.” 장류진, 「나의 남성 캐릭터 창작 노트」, 『문학동네』 2026 여름호, 159-161.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기획
[문장웹진 특집좌담(소설)] 안다무(安穩-多情-無害) 시대와 위험한 소설들[문장웹진 특집좌담(소설)] 안다무(安穩-多情-無害) 시대와 위험한 소설들 진행 : 박인성 평론가 패널 : 이미상 소설가, 위수정 소설가 기획 : 이주란 편집위원, 박인성 평론가 박인성 문장웹진 기획좌담 10월호에 게재될 소설 파트 좌담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회 겸 토론 참여자로 이번 좌담회에 참여하게 된 문학평론가 박인성입니다. 좌담의 주제는 ‘안다무 시대와 위험한 소설들’입니다. 위수정, 이미상 두 분 소설가를 모시고 함께 이야기 나눠볼 텐데요.두 분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리고 최근 근황도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수정 안녕하세요. 2017년부터 소설을 발표하고 쓰고 있는 위수정이라고 합니다.개인적으로 좀 힘든 일이 있어서 최근에는 소설을 잘 못 쓰고 있는데 이제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소설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인성 최근에 이상문학상 수상이라는 경사도 있었기 때문에. (웃음) 위수정 그 상 덕분에 제가 평소에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제안들을 받아서 즐겁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확실히 소설 쓰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어요.제가 사소한 일에도 에너지를 많이 쓰고, 또 멀티가 잘 되는 사람은 아니라서, 어려운 점도 있지만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상 저는 소설을 쓰는 이미상입니다. 근황은 소설은 열심히 쓰지만 쓴 것을 내보내기는 싫은 상태입니다. (웃음) 그냥 집에 계속 쌓아놓고만 싶습니다. 박인성 그것은 개인적인 만족도의 문제일까요? 이미상 만족도도 그렇고 그냥 헤매는 거죠. 늘 그렇듯 엄청 헤매고 있습니다. 박인성 알겠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두 분 모두 열심히 쓰고 있으나 뜻처럼 원활하지는 않다는 말씀이네요. 이미상 그렇죠. (웃음) 셋 다 마찬가지죠. 박인성 저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두 분을 이렇게 모시게 된 건 두 분이 이번 주제에 잘 어울리는 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찾아보니까 두 분이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에 실린 기획에 나란히 산문을 발표하신 적이 있으시더라고요.이미상 작가는 실험을 "스스로 자극을 고안해 주입하고, 그로부터 파생된 효과를 관찰하고, 창작물에 적용하는 것"()으로 다시 정의해 "사적이고 만만한 것"으로 끌어내리셨고, 위수정 작가는 "그때도 지금도 '전위적'이라는 수식을 동일하게 붙이는 것은 전혀 전위적이지 않다."()고 쓰셨습니다.두 글 모두 이제 새로움이라는 요구 자체에서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는 글이었다고 읽었는데요.그 글이 쓰인 후 다소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각자에게 갱신이나 새로움이라는 말의 무게가 어떻게 남아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또 두 분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문학 장이나 문학의 풍경은 좀 어떻게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미상 저때 정의를 잘해놨군요. 지금의 저보다 낫네요. (웃음) 새로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기보다는 어떻게 새로움을 소설에 집어넣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소설을 저대로 쓰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 2026-10-01
문장웹진 기획
[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문장웹진 특집좌담(비평)] 유동하는 세계, 대화하는 비평(가)들 진행 : 윤재민 평론가 패널 :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 기획 : 윤재민 편집위원 윤재민 안녕하세요. 문장웹진 9월호 비평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사회를 맡은 문장웹진 편집위원이자 평론가 윤재민입니다. 그리고 오늘 패널로 이미진 평론가, 최선교 평론가, 현재 평론가를 모셨습니다. 사실 이렇게 세 분을 모신 이유는 전적으로 저의 사심 때문인데요. 그간 제가 글이나 활동하는 것들을 인상 깊게 보았고, 궁금했던 분들 모신 겁니다. 참석자 분들 모두 간단하게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어요. 언제 데뷔했고, 어떤 활동을 주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현재 평론가부터 먼저 하실까요? 현재 안녕하세요. 저는 202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 평론 부문에 당선되면서 활동을 시작한 조현재라고 합니다. ‘현재’라고 성을 떼고서 필명 아닌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교 안녕하세요. 저는 2022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안희연론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도 원고에 넣을 약력을 요청받으면 이 정도로만 저를 소개하곤해서 어떤 말을 더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미진 안녕하세요. 저는 2025년에 김기태론으로 창비 신인 평론상을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한 이미진이라고 합니다. 이제 1년이 된 것 같고, 조금씩 평론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생활인으로서 돈을 벌고 있고요. 그렇습니다. 윤재민 오늘 이렇게 모신 세 분. 연차가 현재 평론가가 3년, 그리고 최선교 평론가가 4년 차 정도 됐죠? 2022년도니까 4년. 그다음에 이미진 평론가 같은 경우는 1년 되셨지요? 이미진 아마 발표 기준으로는 1년이 조금 안 된 것 같습니다. 윤재민 이제 1주년 돼 가시는군요. 세 분들 모두 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인데, 그중에서 재미있는 글 많이 쓰시고 계시거나, 그럴 거라는 믿음이 드는 분들과 대화 나눠보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거든요. ‘신인 비평가’로서 가지고 계시는 여러 가지 고민이나 문제나 목표나 욕심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궁금하고요. 우리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각자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지평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일단, 비평가로 데뷔하게 된 각자의 계기가 있을 텐데요. 최선교 평론가 먼저 말씀해 주실까요? 최선교 평론가가 된 계기를 기계적으로 기술해 보자면 국문과 대학원 수업 과제로 처음 평론을 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왜 평론을 계속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제 성향 때문인 듯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떤 것에 심취하고 매료된 상태를 무척 즐겼어요. 그리고 내가 그것에 매료되었는지 꼭 설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확하게 내가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일이 무척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저는 시나 소설을 쓰고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