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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보러 갔다

  • 작성일 2009-02-23

 

[조경란이 만난 사람⑫]-미국 난(蘭) 협회 심사위원, 안나 최(Anna S. Chai)



꽃 보러 갔다




난(蘭)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매화·대나무·국화와 더불어 사군자(四君子) 중 하나라는 것, 그리고 은둔자나 선비 혹은 군자의 덕을 뜻하는 식물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난을 잘 길러 본 경험도 없고 난을 갖고 싶은 욕심을 내 본 적도 없다. 어디 가서 꽃 핀 난을 보면 그저 아 정말 아름답고 고고하구나, 감탄했고 간혹 난을 선물 받을 때면 이게 또 언제 죽을까, 키우기도 전부터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하다못해 그냥 두기만 해도 잘 자란다는 선인장도 못 키우는 사람이고 그런 것에 어느 정도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에게 난이라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꽃’이었다. 게다가 그 선명한 빛깔과 특이한 형태도 내 취향은 아니다. 나를 가졌을 때 엄마는 고작 스무 살, 아버지는 그것보다 일곱 살 더 많았다. 그래도 시퍼런 청년이었다. 시인이 되고 싶기도 했고 정말로 좋은 목수가 되고 싶기도 했던 그 청년은 첫딸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몹시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서울 경(京)에 난초 란(蘭),은 너무했다. 내 이름이 불리는 것, 내 이름을 말해야 하는 순간을 오랫동안 부끄러워한 적이 있다. 게다가 성(性)까지 붙여 부르면 더더욱 촌스럽게 느껴지니까. 그래서인지 친구 사귀는 데 영 젬병이었으면서도 중학교 2학년 때는 한반이었던 미란이 노란이 수란이 애란이와 함께 ‘란 클럽’을 만들어 도시락을 함께 까먹었던 기억이 난다. 농담이다.


미주 한국일보 손수락 위원과 샌프란시스코 상하수도 공사 프로젝트 매니저이자 수필가인 김희봉 선생과 함께 지난 12월 26일 아침, 벨몬트(Belmont)로 향했다. 안나 최 선생이 1976년부터 살기 시작한 후 현재 네 개의 온실을 갖고 있다는 그 언덕 위의 집으로. 김희봉 선생에게 안나 최 선생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지 거의 삼 개월 만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내가 버클리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안나 최 선생이 난 심사를 하느라 세계 각지로, 혹은 서울에 있었고 내가 11월 초 잠깐 서울에 다니러 갔을 때는 다시 벨몬트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버클리에서의 캘리포니아 대학과 대산재단의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가까스로 이루어진 약속이었다. 중국계 작가이면서 그곳에서 큰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맥신 홍 킹스턴이나 『조이럭 클럽』을 쓴 에이미 탄과의 약속이 깨졌을 때는 아쉽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안나 최 선생은 꼭 만나고 싶었다.  고백하건데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난 협회(American Orchid Society) 심사위원’이라는 안나 최 선생보다 그녀가 매일 아침 7시면 일어나 거의 하루 종일 손으로 만지고 다듬고 물을 주며 돌본다는 그 네 개의 온실,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850여 종의 이천여 개 화분들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나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 거란 직업병이 발동했던 게 사실이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다음날이었는데도 햇빛은 겨울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웠고 눈부셨다. ‘캘리포니아라니. 이런 데서 철학을 하거나 글을 쓰기는 정말 어려울 거야’라고 나는 투덜거렸다. 그래도 ‘꽃’을 보러 가기엔 최고의 날씨였다.  

정원에 있던 화분들 중에서 갑자기 안나 최 선생이 꽃 한 송이를 꺾었다. 마치 ‘똑’하고 꽃 모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아 저절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선생님, 그렇게 꽃을 꺾어도 되나요?”라고 나는 물었다. 꽃 기르는 사람이 그렇게 무람없이 똑 하고 모가지를 부러뜨리다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안나 최 선생이 호탕하게 웃으며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래야 또 열심히 자라지요, 세상에 안 괜찮은 일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하였다(선생이 첫 번째 꺾은 그 꽃송이를 나는 그 집을 나올 때까지 손에 들고 있었고 온실 천장에 가만히 올려 두고는 저런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초면인데다 처음 현관문을 밀고 들어간 순간부터 어쩐지 내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 같아 더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드는 것 같았다. 꽃을 가꾸어서 그런가, 얼핏 보면 이제 막 육십 세쯤으로밖에 안 보이는 얼굴이다. 1938년에 태어나셨다고 했으니 그래도 올해 일흔 살쯤 되었을 것이다. 내 부모보다 나이가 많다. 허물을 보여도 이해해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난’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혹여 다른 마음이 있다는 걸 들켜도. 그 다음부터 나는 난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두서없이 물어보았던 것 같다. 난을 좋아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17세 때부터 난을 기르기 시작했다고 했으니 그건 내가 지금껏 살아온 시간보다, 물론 글을 써 온 시간보다 길고 긴 시간이었다. 專門家. 갑자기 그 단어가 생각났다.


선생은 차례대로 네 개의 온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온실은 각 온도에 맞게 자라는 난들로 구분해 놓았고 그중 한 곳은 선생이 평생 모은 희귀종을 기르는 곳이었다. 난을 좀 기른다는 세계의 난 애호가, 수집가들이 한 번씩 와 보고 싶어 하며 때로 우리식의 관광버스 같은 것을 대절해 먼 데서 구경을 오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 곳치고는 선생의 말마따나 소박하고 구식인, 이런 데 정말 한 포기에 수천만 원씩 하는 난들이 있을까 싶은 그런 곳이었다. 온실 문을 열자 열풍 같은 습도가 훅 끼쳤다. 그 비좁은 공간에 제주도의 한란부터 중국, 일본, 히말라야, 호주, 아프리카 등지에서 구해 온 동·서양란들이 그야말로 빽빽이, 그러나 당당하게 뾰족뾰족 잎을 내밀고 있었다. 한꺼번에 그토록 다양한 난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아무 준비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맞닥뜨린 것처럼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노란색, 초록색, 분홍색, 붉은색, 갈색, 푸른색, 흰색, 아이보리색, 포도주색. 벌어진 것, 오므라든 것, 비틀린 것, 구부러진 것, 각이 진 것, 꼬인 것, 늘어진 것, 불룩한 것, 홀쭉한 것, 엉킨 것, 입술 같은 것, 뿔 같은 것, 모자 같은 것, 플레어스커트 같은 것, 혓바닥 같은 것, 뱀 같은 것, 나무뿌리 같은 것, 말의 발굽 같은 것, 박쥐 같은 것, 고드름 같은 것, 성기 같은 것. 그리고 수천수만 개의 초록색 이파리들……. ‘그러니까 이것은, 섹시하고 매혹적이며 야릇한 꽃들’이라고 나는 기가 꺾인 채 중얼거렸다.

   


안나 최 선생은 12세가 되던 유년기부터 늑막과 폐결핵, 소아마비를 앓아 학교를 다닌 시간보다 못 다닌 시간이 더 많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래서 삼각함수니 피타고라스 정리, 미분 적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1957년도 숙명여자대학교에 입학한 해부터 우장춘 박사 수제자인 원예 학자 고병민 선생에게 5년 동안 원예 개인 수업을 받았다. 1964년 결혼하여 도미, 그 후 남편이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미장원,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꽃가게를 시작하였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해 기숙사에 들여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안나 최 선생은 미국 난 협회를 찾아가 회원 등록을 했다. ‘마치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기만을 오랫동안 기다려 온 사람처럼’이라고 덧붙였다. 그때 선생의 나이 오십삼 세였다. 그 이 년 후, 선생은 미국 난 협회 심사위원이 되는 공부를 시작한다. 미국의 난 심사위원이 되는 길은 까다롭기로 유명한데다 협회 이사회로부터 심사위원 인준을 받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학명’을 읽어 내야 하니 영어뿐만 아니라 라틴어 또한 완벽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서기 1년, 학생 3년, 준 심사위원 3년, 도합 7년 동안 연구 발표를 하고 지도자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7년 동안 모든 것이 통과되면 다시 이사회에서 이 사람을 국제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내보내도 되겠는가 하는 일종의 인품 같은 것을 검토한다. ―세계 난 대회는 3년마다 올림픽처럼 다른 나라에서 국제 대회가 열린다― 만약 10년 동안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스스로 물러나도록 권고 받는다. 2001년 11월 선생은 드디어 미국 난 협회 이사회로부터 심사위원 인준을 받게 되고 이해 매년 미국에서 최고의 난 재배자 한 사람을 선택해서 주는 ‘Butterworth Trophy'(특별상)를 수상하게 된다. 90년이 넘은 미국의 난 역사상 유색 인종으로는 선생이 두 번째 수상자라고 한다.

 

My Life with Orchids.

 

꽃을 만질 때와는 다르게 선생이 머뭇머뭇 내 앞으로 내민 책의 제목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꽃을 잘 기르시는 무슨 비법이 있나요, 선생님?”

그런 게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으면서 물어보았다. 누구라도, 그 온실을 본 사람이라면 묻지 않을 수 없을 거란 짐작을 하면서.

“보시다시피 제 온실들엔 무슨 특별한 장치가 없어요. 다른 분들은 기계 같은 걸로 통풍이나 습도를 조절하는 모양이에요. 난 그런 게 별로 필요하지 않아요.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어두워질 때까지 이것들을 들여다봐요. 손으로 물주고 달팽이가 난초 싹들을 먹지 못하도록 가끔 밤 11시쯤 한 번 더 와 보고. 들쥐도 잡고. 뭐 꼭 멋있는 말을 해야 한다면 난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키워야 한다는 거죠. 자식 키우듯 말예요, 하하하.”

“난 화분이 생기면 저도 물주고 들여다보고 해요 선생님. 그런데도 고작 한 달 지나면 죽기 시작해요. 뭐가 부족해서 그런 걸까요?”

“말을 거나요?”

“네?”

“난들한테 일일이 말을 건네야죠.”

“미국 난 학회는 주로 어떤 분들로 구성돼 있는지요?”

“주로 의사나 생태학자, 과학자, 그리고 식물학자들이 대부분이에요. 한국엔 어떤 분들이 난 전문가들인가요? 제가 어렸을 적에는 주로 문인이나 예술가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글쎄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Reference Book』에 품종 명(Clonal Name)을 등재시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요?”

“평생에 한 번 올릴 수 있을까 말까한 일이니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죠.”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13년 동안 무려 100여 개나 등재시키셨군요.”

“부끄럽습니다.”

“품종 명을 모국어로 지으시는 데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부모님들, 형제, 친구들, 그리고 제가 신세진 분들께 그걸 갚을 길이 없으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제 마음을 드리고 싶어서요.”

“난의 잡종과 순종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모두, ‘꽃’입니다.”

“…….”

“새로운 꽃을 탄생시킬 수 있죠.”

“선생님께 ‘꽃’은 무엇인가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큰 수술만 해도 아홉 번이나 받았어요. 살지 못한다고 생각한 순간도 많았어요. 그 와중에도 이 꽃들을 보고 기르는 순간은 저의 약이었고 의사였고 내 생명을 이어 갈 수 있는 행복이었어요.”

“꽃이 모든 사람에게 그런 의미를 줄 수 있을까요?”

“꽃은 그저 우리의 눈을 충족시키기 위해 피어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건 풀뿌리와 씨름한 지 정말 오랜 세월이 흐른 후였어요. 모든 생명은 그 생명에 합당한 대우를 할 때만 그 생명이 지닌 본연의 자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게 제 지론이 됐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가 있어요. 작가는 모르고요.”

“어떤 시요?”

“제목은 「나의 꽃」이랍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다른 꽃들보다 더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다른 꽃들보다 더 향기롭기 때문도 아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내 가슴에 활짝 피어났기 때문이다.

   

“난으로 더 이루고자 하시는 게 있는지요?”

“내년(2009년)부터는 대형 난 전시회 참가는 그만할 거예요. 후배들도 키우고 싶고.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건 따로 있어요.”

“그게 뭔데요?”

“초보자를 위한 난 재배법을 쓰고 싶어요. 이제 정말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하하하.”

온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원도 거실도 온통 꽃 천지였다. 정원이 내다보이는 거실에 앉아 녹차를 마시며 나는 전봉건 시인의 「꽃은」이라는 제목의 시를 떠올리고 있었다. 꽃이/아니다/천상의 칼이/가장 밝고 맑은 바람의/고운 자락에서/찍어낸/살점이다./그/살점이/뿜은/핏방울이다. ‘살점’이라니. 꽃을 떠올리고 쓴 표현치곤 지나치게 비외화(非外華)적인 데가 있다. 아니 시가 그렇다기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시를 떠올리고 있는 내 자신이 그렇게 느껴진다. 이럴 때 나는 내가 시인이 아니라 소설가라는 것을 깨닫는다. 소설. 그러고 보니 난초 수집가들의 욕망과 모험담을 그린 수잔 올린의 『난초 도둑』이라는 소설을 몇 년 전에 읽은 기억이 났다. 소설에도 나오지만 안나 최 선생이 설명해 준 대로 어떤 교배는 서로의 장점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돌연변이종을 만들어 낼 때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교배는 놀랍도록 아름답고 신비한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기도 하고. 그렇지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처럼 난초의 어떤 교배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결코 미리 알 수 없다. 선생은 성공적인 교배를 위해서는 인내와 행운, 그리고 교배시키려는 식물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거기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고 또 기다릴 줄 아는 마음. 새로 만들어진 종(種)이 꽃을 피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칠 년이라고 한다. 칠 년. 그러면서 선생은 마치 칠 개월, 하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꽃 한 송이를 기다리느라 아픈 줄도 몰랐죠, 하며 역시 껄껄껄.

선생의 집을 나오는데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선생의 온실을 방문한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물욕이 생긴 모양이다. 꽃은 주셔도 내가 못 기를 게 분명하다. 무겁고 두꺼웠지만 그래도 책을 선물 받은 게 다행이고 반갑다. 하지만 정원 곳곳에 포개져 있는 머그잔만 한 빈 토분들을 보니 그건 하나 기념으로 가져가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 빈 화분에 다른 것을 심어 선생처럼 물도 주고 말도 건네며 나도 한번 꽃이라는 것을 제대로 길러 보고 싶었다. 마음뿐, 그냥 집을 나왔다. 샌프란시스코에 왔으니 크랩은 꼭 먹고 가야 한다고 선생이 동네 중국식당으로 안내했다. 가는 길에 선생과 둘이 짝이 되었다. 나는 작가가 된 후 조금씩 내 이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쓸 소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 자매들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쯤에서 식당에 도착한 것이 다행이었다. 중국식당에서 우리는 여전히 난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은 지구상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처럼 난초도 무려 3만5천여 종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사람과 꽃이라. 나는 짐짓 무얼 좀 깨달은 그런 얼굴을 지었을 것이다. 사람이나 꽃이라고 해서 다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야생화의 입문서에서 본 것처럼 난초나 사람이나 ‘기묘한 존재들’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았다. 그 기묘한 존재들. 나에게는 모두 끝까지 읽어 내고 싶은 두꺼운 책처럼 흥미롭게 느껴진다. ‘초보자를 위한 난 재배법’. 내내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젓가락을 들기 전에 선생이 마침표를 찍듯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다 난초를 기를 수 있답니다.” 나는 안나 최 선생의 옆얼굴을 흘깃 보았다. 꽃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원하고 또 무엇이 필요한지를 제대로 헤아려서 그것을 세상에 번식시키는 사람. 그날 내가 본 두 번째 꽃송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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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기획

文學, 수렁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

[조경란이 만난 사람⑪],평론가― 김병익 文學, 수렁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 6월 마지막 주 금요일. 나는 장충동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그안’ 창가 자리에 앉아 김병익 선생을 기다리고 있다. ‘그안’이 처음 생겼을 때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을 자주 그곳에서 만났고 그곳의 음식에 찬사를 보냈고 거기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 무렵, 한 오륙 년 전이었는데 유난히 약속 같은 것들이 많은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는 훨씬 젊고 생동감이 있었고 소설에 대한 의욕이랄까, 열정 같은 것도 더 있었던 같고 만나는 사람도 있었다. 외출이 잦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책 읽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원하는 사람,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안’에서 저녁을 먹고 저녁을 먹은 후엔 내가 좋아하는 부드럽고 차가운 티라미수 케이크와 커피로 후식을 먹는 시간을 만끽했다. 그러다가 식당 주인이 바뀌고, 본격적으로 20세기 초가 시작되고 오른쪽 눈썹뼈 부분을 열일곱 바늘 꿰매야 하는 사고가 생기고 글이 너무나 안 써지는 시간이 시작되면서 다시 예전처럼 집에만 틀어박히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 외출할 일도 줄어들게 되고 만나던 사람과도 작별이란 걸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후의 일이다. 아직 ‘그안’을 자주 드나들던 시절, 그때 스쳐갔던 시간들은 오롯이 즐거움과 평화, 순간적이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생의 즐거움 같은 것들을 느끼게 해준 것은 사실이다. 그때 거기서 B도 만났고 경숙 선배도 만났고 김화영 선생 내외, 그리고 김병익 선생도 만났다. 그때는 선생이 25년간 살던 단독주택을 떠나 일산으로 내려간 바로 그 무렵이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선생은 장충동으로, 나도 교대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그안’으로 왔다. 지금도 나는 선생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잘 모르지만 이것 한 가지는 안다. 선생은 약속시간에 늦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 그래도 내가 먼저 도착해 선생을 기다려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거의 모든 약속에 늦는 편인 나는 선생과 약속을 하면 일단 긴장하고 약속시간부터 늦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늦기도 하고 또 늦지 않아도 언제나 선생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는 하였다. 한 번은 아버지가 자동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하기에 차를 얻어 탄 적이 있었다. 집에서부터 장충동까지 가자면 남산2호터널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차를 휙 돌려 남산3호터널로 진입했다. 약속 시간에 늦은 내가 당황하여 지적하자 아버지는 에, 하며 또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아버지와 숱하게 지나다닌 길이었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아버지도 나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땐 아버지가 술을 너무나 자주, 너무나 많이 마셔 아버지와 집안의 큰딸인 내가 서로 얼굴만 맞대면 밥상을 집어던지며 싸우기 일쑤였다. 나는 한 15분쯤 약속시간에 늦었고 아버지는 그 후로 약 한달 동안은

  • 조경란
  • 2008-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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