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형식
- 작성일 201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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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2011년 경향진단·소설
사유의 형식
허병식
이 스마트한 시대에……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읽고 쓰는 방식이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는 주장은 이미 하나의 유행담론을 넘어 대세를 이룬 듯하다. 우리는 이미 인터넷과 각종 정보기술, 그리고 스마트 기기들의 발달로 인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전달하는 방식에서 참으로 빠른 변화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추종하며 무조건적인 열광과 환영으로 스마트한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 우리에게 놓여진 현실적인 과제의 전부일 것인가.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이러한 변화들이 실상은 우리의 사유를 가볍고 천박하게 만들고 있다는 진단은 스마트 열풍의 한편에서 들려오는 의미 있는 목소리다. IT 미래학자인 니콜라스 카가 쓴 책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최지향 역, 청림출판, 2011)은 이런 디지털 시대의 사고방식이 가져올 여러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디지털 기기를 통해 전통적인 독서가 대체되는 방식은 결국 책을 읽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깊이 생각하는 능력’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전자책의 등장으로 인한 독서는 필연적으로 선형적인 사유가 아닌 하이퍼텍스트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결국 인지적 과부하를 불러와 독자의 능력을 초과하는 작업 기억 능력을 요구하게 된다고 말한다. 결국 사람들은 디지털 매체를 통해 무언가를 읽었지만, 사실은 자신이 여러 하이퍼텍스트가 안내하는 링크들을 방황하다 돌아왔을 뿐, 읽은 정보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는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독서를 통해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정보를 기억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게 된다면, 읽는다는 행위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게 될 것인가.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만들어낸 이후, 독서는 인류에게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깊은 집중과 분석적이고 공감적인 문자해석 활동,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만의 사유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인류가 문화와 문명을 이루는 데 핵심적인 동력을 제공했다. “우리 정신의 역사에서 이 ‘불가사의하면서도 이례적인 일’을 가능케 한 것은 책이라는 기술이다. 독자들의 뇌는 단순히 글을 읽을 줄 아는 뇌 이상이었다. 이는 문학적인 뇌였다.”(『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101~102쪽)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문학을 포함한 인문적인 사유는 단순히 읽고 기억하는 능력 이상의 것을 사람들에게 부여하여 인류를 형성해 왔다. 현재의 문화와 문명을 이루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가 책이라는 형식에 빚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하기 어려운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책이라는 양식이 빠르게 다른 미디어로 대체되어 가는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문학의 역할이 점점 축소되고 결국 종말을 맞이할 것이란 전망은 이제 거스르기 힘든 흐름이 되었다. 그러나 점점 소수자, 예외자가 되어 간다고 해도 여전히 문학을 생산하고 또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다. 이 스마트한 시대에 그 몰락의 운명을 스스로의 것으로 수락한 자들이 어떤 사유의 형식을 창안하여 상징적인 죽음을 준비하게 될 것인가를 지켜보는 일은 쓸쓸하지만 의미 있는 것이다. 인터넷 웹진의 한 페이지에서 머물며, 다른 페이지들과 각종 링크들에 대한 유혹에 끝없이 시달리며 이 글을 힘겹게 읽고 있을 독자들 또한 그러한 몰락의 예감들 속에서 문학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11년의 문학이 책과 사유의 종말이라는 과제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스마트한 시대의 흐름에 관계없이, 또는 그 흐름과 관계를 맺으면서, 지금, 여기의 작가들이 수행하는 작업을 살펴보면서, 사유의 미래에 대한 어렴풋한 짐작을 수행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언어가 있다
어떤 사유는 언어의 경계에 관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인간 주체성의 형성과정이 문학적 사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그 핵심에는 언어의 형상과 표현에 대한 능력의 확보라는 지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배수아나 한유주의 작업을 통해서, 문학이 그 기원의 자리에서부터 자신의 양식으로 확보하고 있던 언어형식에 대한 수행적인 관심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지켜봐 왔다. 2010년에 그러한 대열에 합류한 신예작가로 박솔뫼의 이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첫 장편소설 『을』(자음과모음, 2010)에서 등장인물 ‘을’은 자신의 독백적 발화를 낯설게 느끼는 장면들을 자주 보여준다. “속으로 조그맣게 은행에 어떻게 갑니까 하고 말해 보았다. 여보세요. 은행에 어떻게 갑니까. 어색한 것도 그렇다고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었다.”(『을』, 30쪽)와 같은 대목들이 그것이다.
『을』에서 글쓰기의 형식에 대한 물음은 언어 안에 내던져져 있다는 상황을 낯설게 바라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말을 한다는 것, 언어를 낯설게 바라본다는 것은 발화를 통해서 사물이나 사태의 직접성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감각에서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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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무엇인가를 그리워하게 될 것인가. 을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미 그리운 어떤 것이 있기는 했는지. 아니면 불가피하게 갖게 되는 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견딜 수 없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올 것인가. 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예감이었지만 을은 자신이 어디에선가 혼자 죽게 되리라는 것을 가슴속 깊이 느끼고 있었으며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을 떠올려보아도 그랬다. 대화가 아닌 문법, 정확한 규칙, 숨결이 없는 기계, 무엇보다 깊숙한 침묵. (161-162쪽) |
을은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국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보장하는 정체성 같은 것이 결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는 공허와 침묵 속에서 자신만의 장소를 발견하려 한다. 아감벤은 이러한 공허와 소리 없음의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에서 비로소 인간에게 에토스와 공동체가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언어 안에 내던져져 있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은 결코 언어를 매개로 한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하나의 언어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사유 모델 혹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름과 규칙들이 존립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식의 사유 모델을 따를 경우에는 결코 이 ‘언어가 있다’는 사태를 표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강조-원문)” (아감벤, 조효원 역, 『유아기와 역사』, 새물결, 2010, 24-25쪽.)
언어와 목소리가 사라진 장소, 그 곳을 향한 정념을 발화하는/ 하지 못하는 이야기는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을 회복하도록 만들어 줄 것이고, 결국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과 에토스를 다시 사유하도록 만들 것이다. “공장 지대의 한가운데, 어느 언어의 세계도 아닌 어둠의 한가운데, 모든 소리가 사리진 곳. 아마 그럴 것이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곳. 바로 그 곳일 것이다.”(163쪽)라는 을의 독백은 그 장소로 우리를 인도한다. 『을』의 서사에서 이러한 언어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진단은 서사를 구성하는 여러 겹의 등장인물들의 존재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어느 도시에 머물고 있는 여행자들인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그러니까 존재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된 듯한 삶을 이어 가고 있다. 을과 민주, 프래니와 주이, 그리고 민주의 꿈속에서만 등장하는 윤과 바원 등의 이야기가 모두 어떤 사건들을 전달하는 듯하면서도, 결국 어떤 사건도 전달하는 데 의도적으로 실패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기인한 것이다. 프래니가 연인인 주이와 관계를 맺은 사람을 총으로 쏜 사건에 대해 회상하던 씨안이 결국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될 긴 시간을 예감”(178쪽)하는 것은 그러나 씨안만의 예감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이미 우리는 그 시간 속에 초대되어 있는 것이다.
박솔뫼의 「해만」이라는 단편에서도 이러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누군가 해만에 가야겠다고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떠올리는 해만에 갔던 경험을 떠올리는 이 서사에서 해만이라는 장소는 『을』의 무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언어와 목소리가 사라지는 장소, 그 곳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체가 아득한 경계 속으로 사라지는, ‘비장소’에 가까운 곳이다. “해만에서 우리는 문을 열고 인사를 하고 그러다 말이 없고 흔들흔들거리고 떠나고 돌아가고 그리고 생각한다, 그처럼 해만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천천히 모든 것이 멀어지고 사라지는 것이었다.”(「해만」, 《창작과비평》 2010 겨울호, 304쪽)라는 결말의 독백은 이러한 비장소에서 우리를 공동체 속에 묶어 주는 경계들을 다시 새롭게 구성하라고 조용히 권유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하고 목소리가 소멸하는 장소로 우리를 인도하는 이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언어가 있다’는 사태를 분명하게 자각하게 된다.
장소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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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뜨료슈까는요, 라고 무재 씨가 강판에 무를 갈며 말했다.
속에 본래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알맹이랄 게 없어요. 「……」 그러니까 있던 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죠.
무재 씨, 그건 공허한 이야기네요.
그처럼 공허하기 때문에 나는 저것이 사람 사는 것하고 어딘가 닮았다고 늘 생각해 왔어요.
(황정은, 『百의 그림자』, 민음사, 2010, 141-142쪽. ) |
황정은의 첫 장편 『百의 그림자』는 사람이 살아가는 일의 공허함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박솔뫼의 작품과 닮은 데가 있는 듯하다. 『을』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시간을 향해 나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였다면 『百의 그림자』는 본래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발화를 낯설게 느끼고 속으로 반복해 보는 『을』의 인물들처럼, 『百의 그림자』의 은교는 ‘가마’라는 발음을 무재에게 반복하도록 시키고는 “가마, 라고 말할수록 이 가마가 그 가마가 아닌 것 같은데요.”(38쪽)라는 반응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도 존재하는데, 박솔뫼의 인물들이 언어와 낯설어지는 순간을 그저 견디며 자신만의 침묵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택한다면, 황정은의 인물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소리내어 발화하도록 만들고, 그 언어 속에 내던져져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윤리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방법론적으로 선명하게 갈라지는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단기여행자들의 ‘탈장소’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구체적인 현실을 환기하지 않는 박솔뫼의 작품과 달리 『百의 그림자』가 특정한 장소를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장소란 어떤 곳인가.
그 곳은 ‘도심에 있는 전자상가’다. 그 곳에서 일하고 있는 화자는 그 장소를 이렇게 설명한다.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과 마동으로 구별되는 상가는 본래 분리되어 있었던 다섯 개의 건물이었으나 사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개축되어서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었다.”(29쪽) ‘가’에서 ‘마’에 이르는 기호로 그 건물들을 구분하는 방식은 명명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는 선명한 구분이기는 하나, 그것이 각각의 건물들에서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세계와 맺고 있는 장소성을 지워버리고 있다는 점에서 정당한 명명이 되지 못한다. 마치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38쪽)라고 항변하는 것처럼, 가에서 마에 이르는 기호로 명명되는 그 장소들에 대한 호명은 그 기호를 넘어 장소의 의미를 되찾아주려는 화자의 발화행위에 기인한 것이다. ‘장소’는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실천에 의해 구성되며, 이러한 실천들은 변화하는 복수의 경계를 지니게 되고, 중첩되고 상호교차하게 된다.(린다 맥도웰, 『젠더, 정체성, 장소』, 여성과 공간연구회 역, 한울아카데미, 2010, 25쪽.) 가에서 마에 이르는 기호로 명명된 장소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구조로 연결’됨으로써 그 기호적인 구분을 넘어서 스스로의 장소성을 획득하게 된다. 『百의 그림자』는 이 장소에 정당한 정체를 되찾아주고자 하는 윤리로부터 출발한 소설이다.
곧 철거를 앞두고 있는 이 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의 연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 이 소설은 “아버지는 죽어서 빚을 남기고 소년은 빚을 갚으며 어른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93쪽)의 주인공인 무재와 학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열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전자상가에 일터를 잡은 화자가 서로 어둠 속에 대화를 나누고 어둠에 잠겨 있는 캄캄한 장소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는 이야기다. 그들은 도심의 가난한 전자상가를 일터로 삼고 살아가면서, 그 장소를 벗어난 도시의 다른 지역들이 제공할 수도 있었을 다양한 기회와 삶의 양식으로부터 절연된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들이 기반하고 있는 장소를 ‘슬럼’이라고 부르는 사회에 대해서, “언제고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115쪽)라고 윤리적인 물음을 던짐으로써 언어가 지니고 있는 폭력성과, 도시의 불균등한 지리적 분포와 지역을 구획화하고 계층화하는 공동체의 윤리에 대해 성찰할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다.
종말의 사유
이른바, 종말의 상상을 상연하는 묵시록이 최근 한국소설의 주요한 경향 중 하나가 되었다는 지적들이 들려오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기억 속으로 떠나보내고 싶어 하는 과거의 개발독재가 재현되고 있는 듯한 파국적인 현실의 모습이 작가들을 그러한 묵시록적 상상력으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진단이 그 지적들 속에 들어 있다. 이러한 종말의 사유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이 여러 가지 모습의 적대들로 가득하다는 자각을 담고 있는 것이어서, 그리고 그러한 적대는 정권 교체 같은 것으로는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 것이어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우리 문학의 현장에 출몰하게 될 것이다.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가 인물들의 그림자가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현상을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불행에 맞서는 방식을 모색하였다면, 김성중은 단편 「그림자」(《문학과사회》 2009년 여름호)에서 제 그림자를 잃고 다른 그림자와 동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초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들려준 바 있다. 이 작가가 환상과 알레고리를 적절히 동원하여 전달하는 파국의 상상력은 이채롭다. 그것은 “우리를 기만하고 혼란시켰던 빛은 어디에도 없다”(「그림자」, 338쪽)는 체념에 기반하고 있는 듯하지만, 또한 유토피아적인 열림의 순간을 내장하고 있기도 하다.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창작과비평》 2010년 겨울호)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점점 투명해지다가 결국 사라져 버리고, 집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재앙을 맞이한 순간에 최후로 살아남은 두 아이의 이야기를 전해 준다. 이 파국에의 예감으로 가득 찬 서사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최후에 살아남은 아이들의 성장이 멈추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소녀는 본능적으로 어른스러워져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물건들을 집 안에 채워넣어 생존을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고, 소년의 몸에는 허리와 다리가 너무 아프다고 말할 정도로 시각적으로 각인되는 ‘성장의 채찍’들이 출현한다. 거주를 함께 하게 된 두 아이들이 소녀가 사라지기 직전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장면은 이 이야기가 파국의 시간에 대한 감각과 더불어 생성의 시간을 준비하는, 비동시적인 종말의 상상을 보여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치 대지의 모든 것이 갈라지고 그 속으로 모든 존재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인식하는 것처럼, 두 아이들의 이야기는 헐벗은 파국의 조건의 틈새를 뚫고 자라나는 새로운 생명의 조건을 말해 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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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마지막으로 남은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남은 땅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몇 달 만에 부쩍 자란 소년이 전부터 들어 오던 소리였다. 뼈가 자라는 소리였다. (「허공의 아이들」, 284쪽 ) |
소녀가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남은 땅조차 무너지고 난 후에, 최후를 맞이한 소년에게 들려온 것이 자신의 뼈가 자라는 소리라는 소설의 결말은 현재의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이후에 도래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예감하도록 만든다.
김성중이 발표한 또 다른 단편 「버디」(《자음과모음》 2010년 가을호)는 어떠한가. 「허공의 아이들」이 파국을 맞이한 세계의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버디」는 평균수명이 백사십에 달하는 미래세계의 노년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의학의 발달로 인해 고치지 못할 환부가 없어졌지만, 불가능한 수준까지 생명을 연장하면서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써버려 절망적인 노년을 보내는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노인들이 신약과 자본이라는 규율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제약회사와 정부에 대한 연쇄 테러를 감행하게 되는 서사로 빠르게 이동한다. 버디와 화자가 공모하여 진행하는 이 테러 행위는 지배와 재난의 현실에 대한 대응이라는 알레고리만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다. 화자가 그 테러 행위의 수행 속에서 다시금 자신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장면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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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처음으로 늙은 내 모습이 ‘적합한’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어쩌면 내 인생은 이 순간을 위해 달려왔고, 거울 속의 내가 그토록 늙어 있던 것은 바로 이 순간 때문인지도 모른다. (「버디」, 65쪽 ) |
화자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청춘을 살았다”고 표현한 경험을 안겨 준 버디의 유골을 들고 스스로 조립한 바이크를 탄 채 ‘죽은 바다와 썩은 땅 사이에서’ 허공으로 도약하는 작품의 결말은 파국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물들에게 불현듯 찾아오는 불가능한 유토피아의 순간, ‘혁명’이라는 사건과의 짧은 조우를 기록하고 있다.
세 젊은 여성 작가가 2010년에 발표한 작품들을 읽어 보았다. 이들이 전달하는 세계 속에는 생성하는 존재보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응시가 더 많은 듯하다. 언어가 사라지고 목소리가 사라지는 곳, 삶의 내력이 묻어 있는 장소가 사라지고 달려온 방향과 가야 할 방향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곳, 아이들의 미래와 노인들의 생명이 소멸하는 곳을 향해 이 시대의 작가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시대에 새롭게 문학이 지향해야 할, 문학의 정치에 대한 응답이기도 할 것이다. ‘이 스마트한 시대’에, 모든 소멸하는 것을 향해 자신을 열어 놓고 있는, 겨우 존재하는 문학의 응답 말이다.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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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문장웹진 다시 읽기] 소중한 것은 어디에 있지? ― 이민하, 「옛날 귀신」(2019년 2월호 수록) 김진선 귀신과 신의 차이를 아는가? 언젠가 시로 쓴 적 있지만, 돌아가신 나의 이모는 무속인이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팠던 이모는 신내림을 받으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다른 세계와 통로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셨다. 멀리서 보이는 서낭기와 현관에서부터 나는 향냄새, 방 안을 채운 촛불의 온기,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무서운 탱화가 이모의 직업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분명 신을 모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모가 귀신을 본다고 했다. 이모에게 진짜 귀신을 보는지, 지금 여기에도 귀신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진 못했는데, 가끔 이모는 달라진 눈빛과 목소리로 다른 존재의 말을 전하셨다. 사실 나는 이모에게 깃든 것이 신이든 귀신이든 상관없었다. 이모가 예전보다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가 걱정을 한시름 놓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골목을 지나갈 때 이모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법당 바닥을 몇 번이고 걸레질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신과 귀신은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둘을 가르는 차이는 어떤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대개 신이 인간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주와 삶의 질서를 다스리는 초월적 존재라면, 귀신은 생전의 삶과 죽음, 풀지 못한 미련, 한(恨)과 같은 정동에 매여 특정한 장소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한국의 무속에는 산신, 칠성신, 용왕신, 성주신 등 자연이나 공간을 관장하는 다양한 신이 있고, 원귀나 객귀, 잡귀와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들도 있다. 그러나 한번 귀신으로 떠돌기 시작했다고 해서 영원히 귀신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영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온전한 안위와 정성 들인 제사를 받고 숭배의 대상이 되면, 마침내 그 서러움을 털어내고 신격화되어 누군가를 수호하는 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며 읽게 된 이민하의 「옛날 귀신」에서 귀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옛날 귀신’이라고 하면 소복을 차려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 귀신이나 쪽머리를 진 할머니 귀신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러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호러물의 예고편이 상영되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는 나로서는 어릴 때 가족들과 본 이 귀신의 전형이다. ‘현대’나 ‘최신’ 귀신이라면 다른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으려나. 시에서 귀신은 특정한 형상을 지닌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화자가 “커트 머리 엄마와 쌍둥이 동생과 오빠들이 납량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을 본다거나 “어른들이 마당에서 잔치를 하”는 상황에서 은연중 스산한 기운이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따로
- 김진선
- 2026-09-01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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