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배달하는 소설가 하성란
- 작성일 2012-05-28
- 댓글수 0
[기획특집 인터뷰]
문학을 배달하는 소설가 하성란
─ 소설가 하성란 인터뷰
● 일시 : 2012. 2.
● 장소 : 홍대 앞 카페
● 진행/정리 : 주하림(시인)
1996년 단편소설 「풀」로 등단한 이후 『루빈의 술잔』, 『웨하스』, 『삿뽀로 여인숙』, 최근 발표한 『A』까지. 동인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고, 사실주의적인 묘사와 삶의 이면을 치밀하게 파헤친 작품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며 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하성란 소설가를 만났다. 유독 매섭던 한파가 지나간 봄날 같던 오후 세 시. 홍대 한복판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 만난 하성란 소설가는 체호프 소설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인 같았다. 맛있는 빵과 타르트를 파는 카페에서 무거운 겨울 외투를 벗고 오후의 수다 같은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 주하림 : 책이나 지면에서만 뵐 수 있던 분을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제 막 데뷔 삼 년차인데 아직도 견습생처럼 헤맬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선생님은 1996년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막 데뷔하셨을 때의 심정을 듣고 싶어요.
▶ 하성란 : 스물아홉에 데뷔를 했는데요. 처음에는 장난 전화가 온 줄 알았어요. 그즈음이면 과 친구들이 그런 장난 전화를 하곤 했지요. 그해 신춘문예에 응모했든 하지 않았든 우리에겐 모두 열망이 있었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혹시나 싶어 다시 신문사에 확인 전화를 했었지요. 고 3 겨울에 처음 친구와 원고가 든 봉투를 들고 혜화우체국까지 걸어갔던 것이 기억나요. 1995년 겨울 신문사로부터 전화를 받을 때까지 여덟 번 정도 떨어졌지요.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땐 별 기대 없이 갓난아이와 낮잠을 자고 있었어요. 그런 전화는 꼭 그럴 때 와요.
▶ 주하림 : 습작기나 등단 무렵에는 어떤 일이나 작업을 하면서 데뷔를 준비하셨나요?
▶ 하성란 : 그냥 계속 썼어요. 그 방법밖에는 몰랐죠. 필사라는 걸 몰랐지요. 알았다면 도움이 많이 되었을 거예요. 여름까지 게을렀다가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원고지를 펼치고 잠을 설쳤지요. 문학과는 영 딴판인 회사에 다녔지만 가방 속에 늘 문학책을 넣고 다녔지요. 그걸로도 위안이 되었어요. 현대문학을 정기구독하고, 여러 작가의 소설들도 문예지를 통해 읽었지요. 이론이나 작법을 알려주는 책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읽을 땐 이해하겠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는 거죠. 체득밖에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계속 썼지요.
▶ 주하림 : 선생님이 졸업하신 서울예대는 쟁쟁한 작가들을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죠. 서울예대 문창과 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는지 궁금해요.
▶ 하성란 : 그땐 술을 마실 줄도 몰랐어요. 학교가 명동 한복판에 있다는 이점이 있었지요. 거리를 걷는 것도 공부였어요. 클럽도 다니고 맥주집도 다니고, 그러다 지도교수이신 오규원 선생님께 혼이 나기도 했고요. 오규원 선생님이 곁에 있었던 게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학보에 공모한 소설이 당선되었는데 선생님께서 따끔하게 지적을 해주셨어요. 인물들이 땅을 딛지 않고 있다, 고 하셨지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죠.
▶ 주하림 : 작품에 영향을 준 인물이나 사연에 대해 듣고 싶어요. 가령 연애에 관련된 추억이라든지, 소설의 모티브가 된 사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하성란 : 연애에 대한 건 별로 없어요. 단편 「1968년의 만우절」에 남편 얘기가 좀 나오고, 전체적으로 아버지 얘기가 많이 나와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썼어요. 결핍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가 늘 그리웠어요. 여느 딸들과 마찬가지겠지만 아버지에게 퍽 많은 사랑을 받은 편이였거든요. 연애 경험은 별로 없어요. 첫 연애 후 곧바로 결혼했어요. 연애를 비롯해 많은 경험이 한 사람을 성숙시키지요. 문학의 자양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람으로 인한 기쁨과 슬픔. 사람을 많이 만나 보는 게 중요하지요.

▶ 주하림 : 글 쓸 때 특별한 노하우가 있나요?
▶ 하성란 : 노하우가 있다면 좀 알려주세요. 매번 처음인 것처럼 쩔쩔매지요. 절대 끝맺지 못할 것처럼 끙끙대기도 하구요. 그런데 노하우가 없다는 것, 공평하다는 생각도 하지요. 어느 작가든 공편한 조건 속에서 첫 문장을 시작하지요.
▶ 주하림 : 작품을 쓸 때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점은 무엇인가요?
▶ 하성란 : 이야기 얼개를 짜는 게 가장 어려워요. 머릿속에서 사건을 만들고 소설의 전체적인 틀을 짜는 게 어려워요. 하나라도 맞물리지 않으면 안 돼요. 대신 한번 정확하게 짜지면 그때부터 쓰는 건 수월한 편이죠.
▶ 주하림 : 아까 노하우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건 다시 말해 아직까지 창작에 대해 괴로움을 많이 느낀다고 봐도 될까요?
▶ 하성란 : 어제는 친한 소설가 다섯 명이 내 소설을 비난하는 꿈에 시달렸지요.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지요. 그런 꿈은 꾸지 않았는데, 왜 그런 걸까. 아침에 곰곰 생각했어요. 아직까지 자기 검열에 시달리는 것 같아요.
▶ 주하림 : 등단한 지 16년 되었는데요. 장편과 단편 중에서 어떤 게 더 즐겁게 써지나요?
▶ 하성란 : 둘 다 어려운데(웃음), 장편은 장편대로 단편은 단편대로요. 장편이니 단편이니 하는 것보다, 쓰고 읽는 습관이나 관성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 주하림 :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집은 따로 있나요?
▶ 하성란 : 그런 건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끔 소설을 읽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놀랄 때도 있지요. 일상적인 나와 소설을 쓰는 나 사이의 간극이랄까, 그런 것이 느껴지지요. 어떤 것이 나일까, 물론 둘 다 나이겠지만, 둘 다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요.
▶ 주하림 : 저는 개인적으로 소설가들에게 체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평소 몸 관리,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 하성란 : 건강한 편이에요. 조깅과 수영, 인라인을 잠시 배웠지요. 운동은 왜 이렇게 지루한 걸까요? 오래가지는 못해요.
▶ 주하림 : 책을 삼킨 tv나, 문학집배원 등 소설 쓰는 것 외에 다양한 글쓰기 관련 일을 하고 계신데, 소설 창작에 방해가 되지 않나요?
▶ 하성란 : 책을 삼킨 tv 경우 평소 만나기 힘든 분들과 문학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방송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조명이 딱 켜지면 머릿속이 하얗게 됐어요. 소설 외의 글을 쓸 때면, 솔직히 소설만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 때가 있어요. 하지만 글을 써서 그 노동의 대가를 받는다는 것, 감사하고 있지요.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 주하림 : 갑자기 조금 다른 질문이 떠올랐는데요. 저는 여름에 태어나서 여름을 참 좋아하는데, 어떤 계절을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계절이 소설에 영향은 미치나요?
▶ 하성란 :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진 않아요. 저도 여름을 좋아해요. 여름에 태어나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계간지에 계절에 걸맞은 소설을 써서 발표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전 물을 무척 좋아해요. 물속에서 노는 걸 참 좋아하는데, 피곤하면 잠수하는 꿈을 꿔요. 물속에서 눈을 떠서 물속 흐릿한 사물을 보는 꿈을 꾸다 일어나면 몸이 개운해요.

▶ 주하림 : 선생님 작품을 보다 보면 섬뜩하리만큼 치밀한 묘사가 인상적인데, 문득 그림이나 명화에 관심이 있을 거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특별히 좋아하시는 그림이나 화가가 있나요?
▶ 하성란 : 뭔가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해요. 돋보기로 한참 그림을 들여다본 적도 있었지요. 그림의 균열, 눈빛, 물감의 결 같은 것. 예전에는 살바도르 달리를 좋아했어요. 새로운 감각의 화가들을 두루두루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림에서 나타난 장치들을 통해서 소설의 형식을 끌어올 때가 있어요. 대신 무서운 그림은 싫어요.
▶ 주하림 :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게 뚜렷한 것 같아요.(웃음) 평소 좋아하는 것에는 어떤 게 있나요?
▶ 하성란 : 퀼트하고 뜨개질하는 거 좋아해요. 뭐 만드는 것, 주로 혼자 하는 일을 좋아해요. 낯선 사람들은 두렵지만 친한 친구들 만나는 거 좋아해요. 좋은 친구들과 맛있는 밥, 그리고 술 한 잔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죠. 남편은 좋은 술친구예요.
▶ 주하림 : 한국 소설가 중에서 어떤 작가를 좋아하시나요?
▶ 하성란 : 동년배 작가들을 좋아해요. 그들의 소설이 없다면 지금도 갈피를 잡기 어려울 거예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미처 내지 못한 목소리를 찾고. 뛰어난 동료 작가가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인 것 같습니다. 누구 한 사람 딱 꼽아서 거론하긴 좀 애매하네요.

▶ 주하림 : 문학집배원을 하면서 많은 소설이나 에세이를 소개해 주셨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문장은 어떤 게 있을까요?
▶ 하성란 : 『행복한 세계 술맛 기행』을 쓴 니시카와 오사무라는 일본 작가가 기억나요. 그 사람은 사진가인데요, 카메라를 맡기거나, 팔아 술을 마셨다더군요. 싸구려 위스키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글을 읽다 보면 위스키 한 잔이 간절히 생각나요. 일 때문에 지방에 들렀을 때였어요. 모임에서 한 분이 문장배달을 잘 받아 읽고 있다고 하셨지요. 좋은 문장을 읽으면 하루가 행복하다고 하셨어요. 아, 더욱 열심히 좋은 문장을 찾아야지, 란 생각을 했지요. 한참 소설을 읽고 좋은 문장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아요. 밑줄을 긋고 싶은 멋진 문장이 아니라 소소한 여운을 불러일으키는 문장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읽고 있는 문장은 똑같지만 개인의 체험은 다 다르니까요. 아마 문장배달이 끝나더라도 이 습관은 오래 남을 듯해요. 문장을 찾는 습관요.
▶ 주하림 : 문학집배원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이나 원칙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 하성란 : 이 세상의 책을 다 읽었고 인상 깊은 문장이 저절로 떠오른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그렇지 못하니 늘 새로운 문장을 찾아야 하지요. 먼저 문학집배원의 기본적인 선정 기준을 맞추려 하지요. 문장배달에 많이 소개된 작가의 작품보다는 덜 소개된 작가의 작품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보다는 아닌 작품으로. 그 다음엔 순전히 독자의 입장에서 문장을 읽게 되지요. 작가 이름보다 작품으로 먼저 만나는데 저도 놀랄 때가 많아요. 이 작품의 작가가 이분이었다니, 이 작가가 이렇게도 글을 쓰는구나, 등등요. 문장은 전체가 아닌 부분을 소개하기 때문에 맥락이 닿지 않거나 뜬금없는 부분은 좀 곤란하지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소설이고 산문이고 부분부분 인용해 왔는데, 그 부분으로 전체가 설명되는 거예요. 참 신기하지요.
▶ 주하림 : 문학집배원으로 활동해 오면서 겪은 애환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 하성란 :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가끔 문장배달을 잘 읽고 있다는 분들과 마주칠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아, 정말 읽으시는 분들이 계시구나, 더욱 좋은 문장을 찾아야지, 부끄러우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 등기우편이구나, 문장배달은. 수신인 손 안에 잘 도착했으니까요.
▶ 주하림 : 문학집배원으로서 독자들에게 바라는 점 혹은 기대하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살짝 공개해 주세요.
▶ 하성란 : 좋은 문장을 읽으면 그 문장의 의미를 짐작하는 일도 재미있지만, 전 자연스럽게 제 경험이 떠올라요. 그렇게 읽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배달하며’는 2매 분량으로 짧은 글인데, 이 문장을 읽는 분들의 ‘받아보며’라는 글도 개인적으로 읽고 싶어요. 아마도 다들 다르실 거예요. 얼마나 다양한 개인적 경험이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 주하림 : 최근 ‘예술진흥기금 확충’과 관련한 세미나에 발제자로 참석하셨는데요. 작가들의 창작기금에 대한 이야기, 작가들의 현실에 대해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 하성란 : 지금까지 직장에 다녔다면 아마 과장은 됐을 텐데(웃음), 소설 창작만으로 생활하기 어려워요.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었는데, 그처럼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글을 쓰는 좋은 환경이 우리 작가들에게도 주어지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지요. 다른 문화를 향유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야 우리 문학도 더욱 다양해질 수 있지요. 현실에 급급해 써내는 게 아니라 정말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창작지원금도 심사를 거치지 않고 필요한 이들에게 모두 지원되면 좋겠어요. 또한 기금을 받으면 정해진 기한 안에 실적을 제출해야 하는 시스템도 바뀌었으면 해요. 우리 작가들이 핍진해지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여유를 가지고 창작을 즐길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요.
▶ 주하림 : 최근 경험한 것(책, 영화, 음악 등등) 중에서 특히 인상 깊었고 여러분께 소개해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나만 소개해 주세요.
▶ 하성란 : 얼마 전에 프린스의 노래를 다시 들었어요. 프린스는 마이클 잭슨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가수지요. 가사가 노골적이에요. 그런데도 뭐랄까, 어떤 선을 지키고 있어요. 시 같았어요. 이 노래 어때? 아이에게 들려줬는데 앞부분을 조금 듣고선 바로 “낡았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 면에서 퀸과 비틀스는 우리 둘 다 좋아하지요. 낡은 것에 대해 생각했어요. 가끔 일드나 애니메이션도 즐겨 보지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좋았어요.

대학시절 도서관 귀퉁이에서 읽었던 그녀의 소설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사물과 현상을 향한 혀를 내두를 정도의 예리한 관찰력과 사실적인 묘사는 만나 보지도 않은 작가를 어딘가 굉장히 메마르고 차가운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처음 그녀의 작품을 접했을 때 받았던 느낌은 그녀를 만나기 전 초조함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그동안의 긴장과 의구심은 깨끗이 씻겨 나갔다. 도리어 내내 헤매고 있었던 삶과 문학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 다정한 이웃집 언니에게 적절한 위로와 조언을 받은 기분이었다. “쓰지 않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조곤조곤한 말씨 속에서도 작품을 향해 번득이는 그녀만의 고투(苦鬪)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곳을 오래 응시하길 좋아하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땐 잠수하는 꿈을 꾼다는 그녀. 그녀가 만들어낼 새로운 세계에서는 또 어떤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질까. 하성란 소설가의 다음 페이지가 기대된다.

《문장웹진 6월호》
※ 본 인터뷰 원고는 제201호 〈웹진 아르코〉(2012. 1. 30)에 실린 인터뷰 기사의 전문입니다.
추천 콘텐츠
문장웹진 기획
그러니까 지금부터[문장웹진 다시 읽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 임솔아, (2018년 6월호 수록) 김진선 아파트 분리수거장 입구에 접이식 교자상이 버려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주인이 교자상 위에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내어 밥을 차려 먹었을 테지만, 이제는 엄중한 글씨체로 ‘무단 폐기물 신고 비용 관리실로 납부’라고 적힌 종이를 붙인 채 수거를 기다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느라 필요가 없어진 것일까.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지나쳤다. 점심이나 저녁 시간 아파트 복도에서 음식 냄새가 난다. 최근에는 청국장 냄새가 연이어 났는데, 가끔 생선이나 삼겹살을 굽는 냄새도 난다. 배달 음식도 그에 못지않다. 엘리베이터에서는 특정 브랜드의 치킨 냄새가 유난히 풍기는가 하면, 특정 요일에는 피자 배달이 잦을 때가 있다. 삼백여 세대가 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쓰는 중이구나 생각하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난다. 임솔아의 단편소설 에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나온다. 지은과 수희는 어떻게 하면 비좁은 원룸 방을 알뜰하게 구획하여 지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벽간 소음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놓고, 침대 프레임마저 분해하려 든다. 수희는 지은과 함께 명동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신경을 쏟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생활의 모습이겠으나 지은의 생활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은에게는 이름이 많다. 지은은 신영, 미희, 시한, 영은, 규리, 주영의 이름으로 산 적이 있다. 지하철 공공화장실 휴지걸이에서 주신영이라는 이름을 주운 뒤로 “다시 해보자. 주신영으로”라고 말하면서, 주신영으로 지냈다. 어느 날은 주영이 되어서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은이 이름을 바꾸어 살 때마다 수희 역시 이름이 바뀌었고, 두 사람은 이름에 어울릴 만한, 그 시기에 그들이 꿈꾸는 세계의 서사를 지어냈다. 누군가는 진지하게 이거 명의도용 범죄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정말 한 번쯤은 다시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나는 지은과 수희처럼 이름을 바꿔가면서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새 삶이 필요해서 전학을 결심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태어나 줄곧 살던 곳을 떠나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전학을 간 셈이라 사투리가 제일 큰 난관이었다. 내가 ‘살구’라고 불러왔던 놀이는 ‘공기’라고 부르는 것이었고(이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살구라는 어여쁜 단어가 있는데!), ‘정구지’는 ‘부추’이거나 ‘꼽표’는 ‘곱하기’였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단어들이 많았다. 억양 역시 어색하고 낯설었다. 경상도 억양은 강하고 말끝이 높은 편이라면, 전라도 억양은 폭이 크고
- 김진선
- 2026-08-01
문장웹진 기획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기계적 도플갱어를 만나면 이서수 작년에 나는 영상 콘텐츠 제작자와 업무 미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특정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는 사람이었고, 각본 작업에 동참해줄 작가를 구하는 중이었다. 나는 예전에 각색 일을 했었기에 지인의 소개로 그 자리에 나갔다. 상대는 내 본업이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으며, 내 소설을 읽어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작가님 이름으로 챗GPT에 검색을 해 봤어요.” 그가 가방에서 파일 홀더를 꺼내더니 A4 용지를 넘기며 말했다. “약력과 작품관 같은 걸 정리해서 알려줬는데, 제가 재미있는 걸 해봤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서수 작가가 쓸 법한 시놉시스를 한 편 써달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 작가님한테 제안했던 그 소재로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예? 뭐라고요?” 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각본 작업을 수락하기도 전인데 이서수라는 소설가가 그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이미 테스트해봤다니…… 나는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상태로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나처럼 썼겠느냐는 의구심이 무색하게 챗GPT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조합해 이야기를 완성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건 정확히 내가 만들 법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및 등장인물들, 그들이 만나게 된 계기,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전개 방향이 모두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에 끌리는지를 깨달았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걸 생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1분도 안 걸렸죠, 뭐. 아시잖아요.”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의 짜임새로 시놉시스를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예측해보니 더더욱 웃을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의 1분과 인간의 1분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나보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앞으론 이런 일을 자주 겪을 수 있겠다는 예감도 밀려왔다. 스토리텔링 산업과 인공지능이 합쳐졌을 때 내가 쓴 소설은 AI에 생성을 위한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온라인상에 공개된 글들과 책 리뷰, 인터뷰 기사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가임에도 데이터만 구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 상황을 특수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는 AI로부터 시놉시스를 얻는 데서 멈추었고, 이후의 작업은 인간 이서수와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은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기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
- 이서수
- 2026-07-01
문장웹진 기획
딸깍[편집위원 기획 – AI와 문학] 딸깍 양안다 나는 시 창작과 관련하여 AI를 활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창작자의 윤리라던가 신념 같은 건 아니고, 그저 AI의 시 취향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복적으로 텍스트를 입력하거나 프롬프트를 통해 자세한 방향을 지시하면 나아지는 편이지만, 아직까지 나의 취향과 AI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내가 다른 이와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와 다름없습니다. AI는 창작 주체라기보다 창작 주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가깝고, 이러한 맥락에서 AI는 키보드나 사전, 아니면 노트와 펜의 역할과 같습니다. 다만 AI는 적극적인 도구입니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습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모든 것과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독자나 스승, 동료 시인을 포함하여 타 장르 창작자와 철학자, 그리고 세상을 떠난 시인과도 영향 관계에 놓입니다. AI는 이러한 점에서 모든 타자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AI는 때로 합평자가 되어줄 수 있고, 스승이 되어줄 수도 있으며, 시에서 벗어나 타 장르의 맥락을 끌고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근본적으로 사용자의 요청에 의해 움직이므로, 사용자의 요구로 형성된 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나 : 위의 텍스트는 ‘시인의 AI 활용’에 대한 텍스트입니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ChatGPT-5.5 : 제가 조금 덧붙이고 싶은 것은, AI에게 “취향”이 있다고 말할 때 그 취향은 인간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AI의 취향은 어떤 미적 신념이나 삶의 이력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럴듯함의 평균값에 가깝습니다. AI는 시를 쓸 때 자주 매끄럽게 만들고, 의미를 지나치게 정돈하고, 이미지들을 문학적으로 보이게 배열하고, 감정의 결론을 너무 빨리 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AI의 기본 취향은 “좋은 시”라기보다 좋은 시처럼 보이는 문장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에게는 그게 참을 수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AI는 적극적인 도구다. 키보드는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사전은 나에게 대체 단어를 먼저 제시하거나 묻지 않는다. AI는 도구인데, 기존 도구와 달리 도구인 척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인 척도 합니다. 키보드는 수동적이고, 사전은 정적인데, AI는 말을 걸고 반응하고 제안하고 반박하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도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능동적이고, 그렇다고 창작 주체라고 하기에는 책임과 욕망과 고유한 삶이 없습니다. 나는 AI가 주체적으로 시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며, 그 과정에서 ‘취향에 맞는 시’를 언젠가 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나의 영향 관계에 놓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AI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2020년에는 문득 이런 생
- 양안다
- 2026-07-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