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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의 숭고함 (1)

  • 작성일 2014-08-01

 

 


패자의 숭고함(1)

 

명예로운 자들, 그들은 얼마나 옹졸한가!

페르난두 페소아 1)

 

 

조재룡(문학평론가)

 

 

 

*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나는 머리 뒤로 깍지 낀 양손을 두르고, 이마에 피 묻은 붕대를 감은 채, 땅바닥에 내려놓은 제 누더기 군장 옆에 더 이상 작동할 것 같지 않은 낡은 소총 한 자루를 비스듬히 기대어 놓고, 동료들과 나란히 무릎을 꿇고서 하염없이 무장해제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부상병의 모습을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 가위를 들어 나는, 제법 커다란 그 사진을 조심스레 오려내었고, 약간을 망설인 후, 내 책상 위의 알록달록한 벽지 한복판에 잘 보이도록 붙여 놓았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전의(戰意)로 이글거렸을 것이 분명한 그의 두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망하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는 무언가가 그의 눈동자 안에 녹아 있었다고 해야 할까.
    제 얼굴 깊숙이 고통과 굴욕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던 그 병사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피어오르고 이내 꺼지고 말 불꽃과도 같이, 강력한 인상을 내게 뿜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명백히 패배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모습, 아마 내가 이 병사의 얼굴에서 훔쳐본 것, 그러니까 비교적 어린 나이인데도 알 수 없는 마력에 이끌려 그 이후로도 꽤 오래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간직하고 싶어 했던 것은, 바로 이 패자에게서 뿜어 나오는 모종의 매혹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어둠이 쏘아올린 한 줄기 광채라고 해야 하나. 그것은 제 주변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을 때, 기댈 것이 모조리 사라져버렸을 때, 삶을 송두리째 걸고 기투(企鬪)했던 어떤 세상이, 단박에 가루가 되었으며,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 사실을 제 눈앞에서 묵묵히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바로 이럴 때, 비로소 잦아들 것만 같은 어떤 이미지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를 사로잡았던 그의 저 허망한 눈빛과 어두운 표정은, 반드시 그 병사의 남루한 행색과 초라한 몰골, 활기를 잃은 그의 지치고 낙담한 모습에서 내가 갖게 되었던 그 무슨 연민과 같은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매우 강렬한 무엇, 그래서인지, 부인하려 해도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척 감기고 마는 “산발적이고, 취약하고,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출현하고, 소멸하고, 재출현하고, 재소멸”2) 하는 이미지 하나를 그 사진에서 보았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아 나는 이런 시를 읽게 되었다.

 

   1)  「불안의 서書」,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2014, 197쪽.
   2)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 (김홍기 옮김), 도서출판 길, 2012, 84쪽.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性器에는 까닭 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移民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 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얻어먹거나
이차 대전 때 南洋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無氣力과 不感症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修飾했을 뿐 아무것도 追億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 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春畵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倫理와 사이비 學說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監獄으로 자진해 갔다

- 이성복, 「1959」 전문 -

 

    나도 안다. 이 젊은 부상병 역시 “보이지 않는 監獄으로 자진해” 가야만 했을 것이다. 포로 신세인 그는 결국, 교양 있는 젊은이라면 어느 정도 겸비하고 있었을 품위나 일말의 자존심, 병사의 신분이기에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을 애국심이나, 어느 한 국가의 건실한 시민이라면 마음속에 품고 있었을 휴머니티마저 통째로 빼앗긴, 낯선 무대 위로 갑자기 끌려 나온 하류 배우가 되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또 애를 쓰면서, 오로지 생존을 걱정해야만 하는 비루하고도 처절한 일 앞에서 부단히 제 용기를 끌어냈어야만 했을 것이다. 운이 좋아 치료를 받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았을 때조차 그의 안전은 오롯이 보장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가 받은 정신적 상처나 심적 충격은, 만일 그가 육신의 건강을 되찾았다고 말해도 좋을 지경에 이르렀다 해도 끝끝내 회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는 결국 무모한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더구나 그가 겪어야만 했을 굴욕과 수모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을 것이며, 그의 고생은 또 다른 우여곡절과 사연을 예비해야만 했을 것이다.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국적을 상실했기에, 그는 자기 앞에 곧 펼쳐질, 예상하기 어려운 막막한 시간과 언제고 맞서 싸워야만 하는 채비로, 초조한 제 마음을 다급하게 말아 쥐고서 일분일초를 견뎌내야만 했을 것이며, 도박과도 같은 타인의 선택이나 자의적인 결정에 저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의탁해야 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훗날 우리 앞에 배달된 한 장의 사진으로 덩그러니 남겨지기 전까지, 그가 걸어야만 했을 몰락의 퇴로는 또 얼마나 비참했을까?
    혹시 당신은 패배자의 긴 무리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광풍과도 같은 저 암흑의 풍경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상상 속에서, 힘을 잃은 북소리와 간간이 귓전을 때리는 나팔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나오는 것을 막아낼 재간이 나에게는 없다. 제 동료들의 신음소리를 참아내며, 북소리에 맞추어 침울하게 걸음을 하나하나 떼면서 헐떡이는 그의 숨소리가 지금 내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한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과 절망감을 물리칠 여유조차 갖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동료를 위로할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절망했을 것이며, 그럼에도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서 제 발끝을 주시하며, 적진의 막사를 향해 사방에서 재촉해 오는 행군의 명령에 묵묵히 몸을 내맡겨야만 했을 것이다. 패자의 무리들, 그러나 거기에는 차라리 어두워서 숭고한 무엇, 파편처럼 솟아올라 산화하며, 통념의 장벽을 단숨에 깨부수는, 전율과 우울의 지평 위로 속절없이 번져 나가는 고귀함이 자리한다.

 

 

*

 

    나는 항상 패자들을 사랑했다. 승자들의 공식은 사실 너무 뻔하다. 사회에서 그토록 떠받들고 자주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려 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경이로울 정도다.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 사이에 균형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승자들은 제 가신들을 부리는 데 지나치게 영악했던 것뿐이며, 시간을 착취하고자 짜낸 효율성의 타임라인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게으름을 추방해야 한다는 식의 망상에 힘입어, 어금니에 힘을 주고 입술을 질근 깨물며 맹신한 자들이다. 그들은, 마키아벨리의 저 말마따나, “사람들에게는 화끈하게 호의를 베풀거나 짓뭉개야” 한다는 강령에 충실하고자 무진장 노력하면서, “제 약속을 어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부족해한 경우가 결코 없다”3) 는 사실조차 버젓이 증명해 온, 그러니까 지나치게 두뇌회전이 빠르고, 정의나 공평, 배려나 양보와는 전혀 상관없이, 제 마음먹은 바를 언제고 실행에 옮기는 데 있어서 조금의 지체도 허용하지 않은 비열한 자들이자, 그럼에도 사회의 통념이 허용하는 범주 내에서 이 모든 것을 훌륭히 조절해 낼 줄 알고, 필요할 때면 자신들의 관대함조차 마음껏 과시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거나, 감정의 기복이 몹시 심한 별자(別子)들이었으며, 게다가 제 행동을 임의로 연출해 낼 능력마저 갖추고 있는 교활하고 약삭빠른 자들이었을 뿐이다.
    승자들은, 한마디로 말해, 제자신이 지나치게 영악했다는 사실만을 오로지 자랑거리로 떠들어댈 수 있는, 그 누구도 그렇게 할 것을 바라지 않았으나, 그 누구보다도 자주, 자신의 엉성한 펜을 움켜쥐고 제 인생에 밑줄을 치고자 했던 사람이다. 필요할 때마다 정의와 명분과 실리와 희망에 흠뻑 젖은 깃발을 호기롭게 들어 올릴 줄 알고, 상황에 맞추어 제가 치켜세운 깃발의 색깔이나 무늬마저 통째로 바꿀 줄 아는 사람들이 항상 승자의 반열에 제 이름 몇 자를 보무도 당당하게 올려놓는다. 전쟁터를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며 어떻게든 승리를 쟁취해 낸 자들의 삶을 한번 보라! 성공과 출세를 뽐내기를 몹시 좋아하는 자들이 지나치게 야박한 원고료를 지불해 가며 자기 이름을 주인으로 둔갑시킨 후에, 대형 서점의 노른자위 가판대 위에서 올려놓고서 저 보란 듯이 팔아 처먹고 있는, 성공의 그 무슨 비급이라도 적어 놓았다는 듯이 우쭐대고 있는, 휴지 조각만도 못한 책자 나부랭이를, 진정제 몇 알을 미리 복용한 후,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 단 한 페이지라도 넘겨보라. 지위와 명예와 돈과 사랑과 사상을 쟁취했노라 떠들어대며, 제 삶을 오로지 승리로 넘쳐나게끔 포장하기 위해, 소위 승자라 불리는 자들은 얼마나 자주 비열한 짓거리를 저질러 왔으며, 야비한 행동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당당하고도 잔혹하게 실천에 옮겼으며, 열성을 다해 남의 아이디어를 강탈하고, 자기 것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비겁과 무지, 잔혹과 냉정, 아부와 오기, 선점과 지배, 폭력과 겁박이라는 낱말들로 제 삶을 그리도 자주 비끄러맸던가?

 

   3)  마키아벨리, 「군주론」 (글·그림 세인 클레스터), 리더스하우스, 2014, 18쪽, 38쪽.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오 한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 최승자, 「악순환」 전문 -

 

    승자들은 나를 권태롭게 만든다. 그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말은, 사실 어휘나 문장이 조악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내용마저 너무나도 빈곤하여 차마 사유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아니, 그렇기에 그들에게서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스승과 맞먹는 수준의 공갈과 위선으로 가득 찬 망상과, 공상과학소설의 습작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치졸하고 허풍 섞인 모험담 정도를 제외해 놓으면 딱히 읽을 것이 없으며, 그들이 이 외에 또 다른 말을 우리에게 건네는 것도 아니다. 하기야 승자에게 우리가 건넬 말은 뭐가 있을 것이며, 설사 그렇게 한들 그가 우리의 말에 잠시라도 귀를 기울일 확률이 또 얼마나 되겠는가?
    현란한 스포트라이트로 가득한 성공은 삶의 진실을 알려주는 데 있어서, 부러움을 자아내고자 억지로 꿰어 맞춘 얼치기 충고나, 누구나 알고 있는 진부한 상식을 씨부렁대며 제 고유한 비법이라도 된다는 듯 주절거리는 헛소리, 조리 없이 주구장창 늘어져 반복의 악순환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지리멸렬한 강담(講談)을 빼면, 그 소재나 주제에 있어서 비참의 수준을 모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승리와 승리라는 말, 승자와 승자라는 표현 속에는, 인간이라는 종자와 그들이 밟아 온 역사를 되돌아보며, 한번쯤 품게 마련인 연민과 경이로움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제거되어 있으며, 인간과 인간이 모여 일구어 나가는 사회 저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내려놓게 될 관심과 애정을 일시에 얼어붙게 해버리는 무자비한 속도와 공포만이, 온갖 땀내 나는 노력과 실패의 과정을 오로지 결과만을 잣대로 삼아 단박에 헛된 것으로 치부하고 또 그렇게 초토화시켜 버리는, 환불처럼 편리한 비장함과 금속처럼 냉정한 비열함만이 거주할 뿐이다. 그러나 패자들의 얼굴에서는, 패자들의 걸음걸이에서는, 그들의 행장과 그들의 어눌한 말과 그들의 참혹한 삶에서는 이런 것들을 찾아볼 수 없다. 패자, 패배하는 자, “언제나 패배하는 사람”은, 이 모든 거짓과 화려한 포장, 가식과 통념에서 벌써 비껴서 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패배하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도망치는 사람이 있다. 아름답고 더러워라, 승리만을 기록하는 사람도 있지만 현실은 이 모든 것들과 아무런 관계도 책임도 없다. 현실에서는 그 어떤 폭력도 눈물도 없다. 단 하나의 단호한 명명만이 있다. 단 하나의 거대한 입과 이렇게나 많은 찢겨진 입들이 있다. 이렇게나 많은 유령들이 또다시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죽은 자들이 사라지니 신도 사라졌다. 하지만 나의 조국의 내부에는 여전히 구원이 있고, 구원의 쾌락이 있다. 빌어먹을 마녀가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이토록 나약한 말의 악몽이 있다 ; 언제부턴가 온 집 안의 수도꼭지가 잠가지지 않는다. 얕은 잠속으로까지 물이 넘쳐 들어온다. 엄마를, 아내를, 애인을, 진실 속에서 익사한 사람들을 불러 본다. 내게는 숨겨진 벗들이 있으며, 숨겨진 입들이 있으며, 숨겨야만 했던 유령이 있으며…… 숨겨져 있으니 내게 이 현실은 아무런 관계도 무게도 없이 영원히 출렁이며 고인 채 썩고 있다. 단단한 벽과 늙어 소리를 잃은 악기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실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와, 벌레처럼 울고 있는 형광등, 찢겨진 입과 매일의 유언 ; 그저 악몽을 창조하는 것. 기억되는 악몽만이 가끔 진실이 된다. 우리 중 기록될 악몽의 주인은 누구일까. 누구의 악몽이 구원을 받을까. 그리고 끝끝내 구원을 단념할 수 있을까, 이후의 악몽들을, 이후의 삶을.

- 김안, 「이후의 삶」 전문 -

 

    패자란 누군가 자신의 사막 위에다가 조그마한 모래언덕 하나를 창조하고, 그 언덕 뒤편에 종려나무 몇 그루를 심으며, 사연 많은 제 인생을 위무하면서 아름다운 삶의 종착지를 상상하거나, 누군가 자신이야말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이며, 양지바른 곳에서 살고 있다고 크고 작은 목소리로 주장할 때, 벌거벗은 채, 한줌의 허무한 재를 움켜쥐고, “이 현실은 아무런 관계도 무게도 없이 영원히 출렁이며 고인 채 썩고 있다”는 생각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사람이다. 패자의 표정과 눈빛, 그들의 말에는, 주변에서, 일상에서, 삶에서, 날마다 마주하게 되는 선전과 선동들, 광고와 변명들, 시위를 떠나 정중앙의 한 점에 도달하려 맹렬한 속도로 질주하는 일에 전념하는 화살처럼, 어김없이 우리의 가슴 한구석에 내리꽂히고 마는 저 사나운 격려와 육중한 권고, 까닭을 알 수 없는 응원과 ‘힘내라’는, 애정을 가장한 미끼와도 같은, 무심코 내던진 폭력과도 같은 저 한 마디 말 속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무엇, 그러니까 성실과 열정, 집념과 노력, 행복과 안위, 경쟁과 전망을 죄다 뭉뚱그려, 문화라는 기치 아래 하나로 묶어낸 다음, 경박하게 마이크를 붙잡고서, 앵무새처럼 바보 같은 말을 반복하며, 우리의 뇌수에 폭격을 가하는 기계적인 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저 빌어먹을 놈의 이데올로그들의 입에서라면 절대로 흘러나오지 않을 무엇이, 건전한 사상과 긍정의 철학, 개조와 발전의 우월성을 쉴 새 없이 조잘거리며, 대중을 향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제 목청을 돋우거나, 그와 같이 얼빠진 일로 제 끼니를 해결하고, 목젖을 축이는 자들의 눈으로는 결코 포착될 수 없는 무언가가 서려 있는 것이다.
    시는 바로 이 패자의 무리가 뿜어내는 어두운 광채, 우수와 절망과 슬픔으로 충만한 자들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말들이며, 기획된 바 없이 패자에게서 풀려 나온,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고귀함과 위대함을 지니고 있는 사유이자, 그 사유가 열어 놓는 미지, 그 미지의 세계로 입사할 가능성을 이 삶에서 불안정한 형태로 시시각각 타진한다. 사실 시인은, 이미 시작해 놓은 삶이라는 경주를 끝마치지 못하고 이상하게 중단을 강요당해, 잿빛 트랙 위에 널브러진 사람들에게 애도를 보내는 일로 제 임무를 다했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 이들을 보며,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왜곡된 의욕과 저지된 야망을 끝없이 반추하게 만드는 자인 것이다.
    패자가 가지고 있는 그것은 적어도 사칭이나 기만으로는 획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오로지 그러하다는 이유 때문에 여전히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명예의 행렬에서 낙오된 사람들, 사회의 규율 속에서 지독히 운이 없었던 사람들, 역사 속에서 비루하게 버림받았던 사람들, 타인의 영광을 장식하는 데 필요했던 일회용 소모품과 같았던 사람들, 사회의 변두리에 머물며 무시당하고 핍박받아 온 사람들, 일패도지(一敗塗地)한 자들, 그러니까 패배로 바닥에 쓰러져 한 번쯤 제 몸에 진흙을 묻혀 본 자들, 제 입가에 고기 덩어리가 아니라 삶의 자잘한 부스러기만을 물고 있는 사람들, 날은 저물었는데도 갈 길은 아직도 멀다(日暮途遠) 4) 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관통하고 있는 어둠과 우수, 절망과 슬픔을, 예서 흘러나오는 정형화되지 않는 사유를, 결코 정식(定式)으로 환원되지 않을 사유를, 쉽사리 요약되지 않거나 요약을 거부하는 사유를, 바로 그 사유에서 비롯된 알 수 없는 우리 정신의 행방과 감응을, 그것이 머릿속을 한 바퀴 휘젓고 돌아 나온 상태와 그러한 상태를 제 언어로 궁굴리는 데 게으르지 않은 사람들을, 그들이, 망설이며, 주저하며, 머뭇거리면서, 사(思)를 지극히 넓혀내고, 거침없는 변(辨)으로, 우리에게 내려놓은 모든 글들을 나는 사랑한다. (계속)

 

 

   4)  『사기史記』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서 취해 옴.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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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기획

사랑, 같은 소리 (2)

사랑, 같은 소리(2) 조재룡(문학평론가) 현대는 정말 춥다. 혼자서는 불을 못 피운다. 바람을 막으며 손바닥만 한 얼음 위에 불을 피우려면 두 사람이어야 한다. 최인훈 1) * 당신은 살짝 스쳐도 온몸이 나른해지고 긴장이 풀려버리는, 황홀한 마사지 같은 걸 받은 것과도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바라보는 것만으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순간도 몇 번은 겪어 보았을 것이다. 마주 앉아 한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지껄이는, 그러나 정신이 좀 멀쩡한 사람이라면, 채 일 분이 지나기 전에 그의 말이나 몸짓이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하며 과장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한나절 내내 들어도 지루해하지 않았던 경험도 겪어 보았을 것이며, 그랬던 소싯적을 몇 개쯤 호주머니에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앞에 앉혀 놓고, 아주 오래전 건성으로 넘긴 책의 몇몇 구절이나 심심해서 시간이나 때우려고, 이 정도 수준은 봐줘야 지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이상한 허영에 힘입어 주저하며 들어갔던 영화관에서 졸면서 보았던 몇몇 작품의 얼개는 물론, 주인공의 이름이나 자잘한 디테일마저 제 머릿속에 떠올리거나, 알고 있는,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던, 온갖 지식들과 개념 나부랭이들은 물론, 상대방 앞에 풀어 놓는 데 더없이 효율적인 예들조차, 무의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어떤 저장고로부터 끊임없이 샘솟아, 당신의 세 치 혀 앞에 고스란히 바쳐지는 것과도 같은 경험, 그렇게 이상한 기운에 자신을 내맡기며 무슨 말이건 상대방 앞에서 주둥이가 시키는 대로 몇 시간을 지껄이고,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박식하고, 똑똑하고, 기억력이 좋고, 재치 있는 사람이 되어 본 적도 있었을 것이다. 컴컴하고 음침한 제 자취방에 한줄기 서광이 비치고, 한 달 전 벌써 바닥을 친 통장의 잔고가 제아무리 삶의 누추함을 경고해 주어도, 거기에 최소한 제로 두 개가 더 붙어 있을 때나 갖게 될 법한 까닭모를 자신감에 차, 저도 모르는 사이, 그러니까 마치, 악당 앞에 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총 지갑에서 잽싸게 권총을 빼내는 바로 그 속도로, 호기롭게 제 지갑을 흔쾌히 꺼내들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아뿔싸, 그런데, 이런 게 사랑과 무슨 관계가 있나? 그건 그저 둘이,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감정,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누군가에게 씹던 껌처럼 눌어붙고 싶은 그런 마음이나 그 분위기에 잠시 속거나, 알면서도 자신을 속이거나 다른 사람마저 속이는 것일 뿐이라고. 그런데, 둘, 둘이라고? 1)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최인훈 전집6』 , 문학과지성사, 1976, 235쪽. 간절히 총을 사고 싶은 적이 있었다 어찌어찌 그 생각을 잊었는지 모른다 총을 사러 부산엘 가겠다고 돈을 꾸고 배를 사서 사막으로 뜨겠다고 한때 천사였던 한때 덤불찔레였고 한때 폭약이었던 그가 어떻게 사라져 버렸는지 모른다 지

  • 조재룡
  • 2014-11-01

문장웹진 기획

사랑, 같은 소리 (1)

사랑, 같은 소리(1) 내게 말해다오, 사랑이여,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이 짧고 몸서리치는 시간을, 그저 생각과 교류하며 오로지 사랑이 아닌 것만 알며 사랑이 아닌 것만 행해야 하는가? 잉게보르크 바흐만 1) 조재룡(문학평론가) * 사랑이 무엇일까, 뭐 이런 멍청한 물음을, 그러나 한 번쯤 던져 보지 않은 청춘이 또 있을까? 누구나 그랬을 것이며, 그랬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거나, 어느 시각, 어느 정해지지 않는 순간들을 몰래 열고, 그래서 급습해 오는 기억에다가, 까닭을 모를 발작처럼, 사랑이라는 말을, 사랑이라는 관념을, 사랑이라는 몸의 경험과 시간의 뭉텅이를 개인의 역사라는 허명을 들고 불러내고, 또 거기에 나름의 윤색을 가해, 암튼, 저 지리멸렬의 순간들을 빛나는 교집합으로 추려내기도 하면서, 그렇게 가끔씩 우리는 모두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곤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무시로 찾아드는 걸 막아낼 재간이 없다고, 제 앞에, 친구건 동료건, 앉혀 놓고 고백을 한답시고, 듣는 사람의 찡그린 미간은 본 체 만 체, 지루한 제 사랑 이야기를 신이 나서 주구장창 늘어놓는 사람은 필경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무언가를 선택하라고 돌아오고 또 돌아 나가는 초밥집의 회전 벨트처럼, 하루하루 반복되는 지루한 삶 속에서, 제 무른 속살과 거기에 묻어 있는 감정들이 마모되어 가는 바로 그만큼 두꺼워진 표피를 잠시 망각하고서, 우리는 언제고 사랑이라는 이름을 불러낼 기회를 일상에서 만들어내고, 그 기회가 연출될 때마다, 감상에 젖어 무언가를 한 움큼씩, 뱉어내고, 쏟아내고, 토해 내고, 그러면서, 술을 한잔 입에 털어 넣으며, 또 후회를 하고, 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사랑에 관한 담론들은 사랑 자체에 온전히 바쳐지지 않는, 거개가 무언가를 사칭하기 마련인 옛이야기요, 한갓 공설이라는 것인데, 십분 양보한다 해도, 그걸 묻곤 했던 모일모시의, 단속이 없어 느슨했던 저 과거의 어떤 순간에조차, 나는 사랑이 온갖 개인적-사회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문화적-정서적 후유증으로 생겨난 쭈글쭈글한 고난이나,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삶의 피곤과 그 피곤들로 구겨진 주름들을 말끔하게 펴주거나, 그 사이사이 더께 낀 흔적들을 깨끗이 닦아내고, 개인적-사회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문화적-정서적 억압의 사슬과 절연해 낼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흔히들 말하던, 그 무슨 미지의 가능성이라고도 믿지도 않았다. 차마 믿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내가 남자이기 때문이었을 개연성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지금에서 주절거릴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1) 「내게 말해다오, 사랑이여」, in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김재혁 옮김), 자연사랑, 1999, 55쪽. 그러니까 ‘사랑’과 ‘동지’는 같은 말이 될 수 없었다. 그건 막연한 희망이었을 뿐이다. 사랑을 손에 쥐고서, 사람 자체를 보는 일이 그리 쉽던가? 젊은 시절,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나 역시 사

  • 조재룡
  • 201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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