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석류 익는 시간
- 작성일 201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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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자선 사랑시]
석류 익는 시간
장석남
당신은 내게 비단을 주니
그걸 눈에 두르고
더듬어서 내 맘속 둥그런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보네
항아리에 늘 허공이나 담아 두는 당신의 뜻을 모르니
붉은 비단이나 두 눈에 곱게 두르고 들어가 보면 알려나?
하늘이 온통 노을로 꽃핀
이 부러진 듯 시디신
석류 익는 시간
마당가의 석류나무, 지난봄과 여름의 가뭄에 겨우 목숨이 붙어 한 해를 넘겼다. 느지막이 잎들이 피었으나 간혹 기웃거려 보아도 꽃은 끝내 못 본 듯한데 가을 지나니 쭈그러진 석류가 하나 발치에 떨어져 있다. 어디 눈에 안 띄는 자리에 서자처럼 달렸던 모양이다. 주워 비 안 맞는 데 올려놓아 본다. 안쓰럽게 여긴 거라면 거짓이고 그저 무심한 손길이다.
하늘이 도와서 나무가 무성하던 해의 찬란한 석류꽃들은 실로 볼 만했다. 길고 뾰족하고 또 조밀한 가시들 틈에서 핏물인 양 솟아 매달린 모습들은 저절로 사랑의 감정을 불러온다. 그 열매는 또 어떤가. 어느 날 나와 보면 터져서 알알이 제 가슴속의 이야기가 넘친다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내게 사랑은 석류꽃이요 그의 후일담 격인 열매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최상품의 당 비단을 내게 내민다. 살[肉]에 가장 가까운 그것. 허나 그 쓰임새는 눈을 칭칭 동여 감으라는 것. 눈 감고야 비단은 하여 무엇 하리. 그러나 숙명이어서 다시 건넬 수 없고 찢어버릴 수 없고 누구에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비단으로 눈을 가리니 그 자리서 가슴은 그대로 커다란 항아리가 되는데 거기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다른 것은 담을 수 없고 들어가지도 않는 항아리, 그러나 그녀는 늘 그것을 비워 두기만 한다. 한없이 비워 두기만 한다. 매일 비워 두기만 한다. 언제나 비어 있다. 항아리가 생기면서 말이 더디고 항아리가 생기면서 하늘이 가깝고 항아리가 생기면서 노을도 가까워진다.
사랑을 누가 무엇이라 정의할 것인가. 사랑의 감정을 누가 무엇으로 표현할 것인가. 그저 항아리에 냉수물이나 가득히 채우고 들여다보면 그네 모습이 저 깊이 있고 그 위에 나의 얼굴이 어른거릴 뿐이다. 그 물이 다 사라질 때까지 들여다보아도 그럴 뿐이다.
어느 날 석류나무를 지나다 보니 거기 사랑이 있었다. 함부로 오는 손길을 거절하는 가시와 피어린 어여쁜 꽃들과 시디신 이야기가 어느 가을날 터져 나오는 열매가 있었다. 나는 항아리에 석류나무를 한 가득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묵집에 앉아서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료//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료
- 「묵집에서」 전문
초겨울로 접어든 흐린 저녁에 말라비틀어진 석류 열매 하나를 주워 비 맞지 않게 창틀에 놓아 보는 심사의 근원이 아마도 저 위의 시에도 좀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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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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