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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凴)(1회)

  • 작성일 2026-08-31

빙(憑)


이서영



1부




1. 귀신만큼 이상한 아이




 율은 말이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동시에 말이 너무 많은 아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율이 대화에 끼는 걸 반가워하지 않았다. 율의 머리카락은 항상 기름으로 젖은 듯이 눌어붙어 있었고, 아침에 세수를 하고 나왔을 텐데도 오전 10시만 되면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턱에는 화농성 여드름이 주먹만 한 크기로 자리를 잡았다. 살집이 있는 어깨를 옹송그리고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가 자기가 조금이라도 아는 얘기가 나오면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폭포가 떨어지면 마땅히 물이 튀듯, 율의 침도 사방으로 튀었다. 율이 갑자기 덮쳐오듯 말을 끼얹는 주제들은 오로지 귀신이었다.


 며칠 동안 비가 그치지 않을 때도, 체육대회에서 우리 반이 계주 직전에 뒤집혔을 때도, 반장이 피구하다가 이마에 공을 맞아 여드름이 터졌을 때도, 전교 1등만 하던 희연이가 갑자기 반에서 10등을 했을 때도, 교감 선생님이 빗길에 넘어져서 돌아가셨을 때도, 율은 신이 나서 말했다.


 “그게 다 귀신 때문이야.”


 한마디로 멈추기라도 했다면 반 애들이 좀 무서워하기라도 했을 텐데. 율은 말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아무도 믿지 않고, 관심도 없는 이야기, 그게 왜 다 귀신 때문인지를 목 놓아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율에게는 안타까운 일인 것이, 그녀는 목소리조차 작지 않았다. 귀신 때문이라고 말을 시작하고 나면, 조금 전까지 코끼리 같은 몸으로 웅크리고 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모두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율의 목소리, 몸짓, 태도, 모든 것이 아이들의 편안함을 송곳처럼 찌르고 부숴댔다.


 하지만 율은 그럭저럭 공부를 하는 아이였다. 반에서 1등은 아니지만 5등 안에는 꼬박꼬박 들었고, 선생님의 질문에 곧잘 명료한 대답을 했다. 보통 어느 정도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어느 그룹에나 속할 수 있기 마련이다. 어느 정도 체육을 잘하는 아이나, 어느 정도 예쁜 아이가 그렇듯이. 특히 고등학교 교실 안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상당한 어드밴티지를 받고 들어가는 자질이었다. 그 모든 어드밴티지를 받고 나서도 율은 쉽지 않은 아이였다. 그 화산 폭발 같은 귀신 대화의 플러스마이너스를 하고 나면, 결국 율은 언제나 혼자서 밥을 먹었다. 율을 괴롭히는 사람도 따돌리는 사람도 없었지만(물론 남자애들은 율의 뚱뚱한 몸을 뒤에서 손가락질하곤 했다. 율이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그건 눈치챘을 것이다.), 체육 시간마다 율에게는 짝이 없었다. 나도 다른 애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그 학년 한 학기가 다 지나도록 율과 내가 나눈 대화는 세 마디를 넘어가지 않을 터였다.


 율과 대화를 트게 된 건 2학기 초의 양호실에서였다. 고등학교 내내 생리통이 유난히 심했던 나는 생리가 터진 오전 시간이면 곧잘 양호실에 누워 있곤 했다. 율이 들어온 건 2교시 체육 시간이었다. 휘장이 쳐져 있을 때는 율인 줄 몰랐다. 양호 선생님의 살짝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다 이랬대, 완전히 갈았네.”


 누군가 다쳤나보다 생각하며 눈을 감고 있는데, 양호 선생님의 목소리에 비해 상대방의 목소리는 정말 개미 소리만큼 조그맣게 들렸다. 분명 목소리는 들리는데 뭐라고 하는지 조금도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양호 선생님도 뭐? 를 두 번 정도 반복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남은 시간 동안 체육 하긴 힘들 테니까, 쉬었다 가. 바깥쪽 침대에는 너희 반 연주 있으니까 안쪽 침대에서. 알겠지?”


 우리 반이라는 말에 나는 살짝 휘장을 걷었다. 아저씨 같은 양말에 삼선 슬리퍼를 신은 발목이 보였다. 내 발목 두 개쯤 합쳐놓은 거 같은 두툼한 발목을 보고, 나는 다시 휘장을 내렸다. 정율이군. 5분 뒤에 양호 선생님이 누군가의 전화를 받으며 양호실을 나갔고, 그때 적막이 깨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율과 말을 섞을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놀랍게도 율이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많이 아파?”


 “지금은 약 먹어서 좀 나아. 3교시 지나면 다시 수업 들어가려고. 너는,”


 평범하게 너는 무슨 일로 왔느냐, 어딜 다쳤느냐, 그렇게 말했으면 됐을 텐데. 내 입에서는 어처구니없게도 살짝 빈정거리는 농담이 튀어나와 버렸다.


 “너는 뭐, 귀신 들려서 왔어?”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율의 목소리가 화통 삶아 먹은 것처럼 우렁차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율은 여전히 속삭이듯이 말했다.


 “맞아. 귀신이 내가 넘어지도록 민 것 같아.”


 남들한테 생긴 문제가 다 귀신 때문이라고 하는 게 좀 별로라고 늘 생각했었는데,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율의 세계에서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도 모두 귀신의 탓이었다. 거기다가 율이 말하는 귀신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나름의 체계가 있었다. 귀신 얘기를 시작하자 율은 좀 더 신나 보였고, 점점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얘는 혼자 있을 때 무슨 오컬트 책을 엄청나게 보는 걸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취미가 있는 애들은 율 말고도 많았다. 축구에 미쳐 있는 애도 있고, 애니메이션에 미쳐 있는 애도 있고, 게임에 미쳐 있는 애도 있었다. 그러다 보면 귀신에 미쳐 있는 애도 있는 거겠지. 율은 온갖 종류의 귀신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넘어지게 하는 건 집 밖에서 실족해서 죽은 여귀일 수 있지 않을까. 너도 그렇게 매번 몸이 아프면, 그렇게 아파서 죽은 저퀴들이 달라붙은 걸 수도 있어. 한번 생각해 봐.”


 “너는 그런 귀신 이름들은 어떻게 다 아는 거야?”


 휘장 너머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나는 우리 엄마가 알려줬어.”


 엄마가 공부를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집안일을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귀신을 가르쳐준다니. 혹시 율의 엄마는 무슨 무당이라도 되는 건가 잠깐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서 묻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율과 아직 그 정도로 친밀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머지않아 금방 알게 되었다. 어째선지 그날부터 율은 식판을 들고 내 앞에 앉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2. 병든 고양이와 저녁 식사를




 율과 같이 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긴 시간 동안이나. 나는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지만, 고양이와 함께 산다면 대충 이런 느낌일까 생각했다. 율은 신비할 정도로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나이가 60 가까이 되었다면 마땅히 뭐든 할 줄 아는 게 있게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곱게만 나이 든 사람이라고 해도, 하다못해 뜨개질 같은 사소한 취미라도 있을 법한데, 율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율은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요실금이 시작되어 기저귀 같은 팬티를 입고 있는 율에게선 언제나 쿰쿰한 오줌 냄새가 났다. 방금 막 씻고 돌아왔을 때도 조금씩은 냄새가 났다.


 율은 커다란 티셔츠에 기저귀만 입고 생활(그걸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면)했다. 율은 때때로 내 방에 있는 책을 읽었고, 침대에 누워서 짧은 동영상들을 보며 킬킬 웃었다. 내가 밥을 차려주면 나와서 먹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말이 많았고, 율의 입에서 밥풀이 튀어서 식탁 여기저기에 떨어졌다. 방에 놓인 책을 읽었다면서 저 나름의 비평을 늘어놓다가, 내가 그런 내용 아닌 것 같다고 한마디하면 우물쭈물하면서 은근슬쩍 자기 말이 그 말이었다고 말을 바꿨다. 민망해서 입을 다물 법도 한데, 율은 그럴수록 오히려 더 목소리를 높였다. 식탁 앞에서 나는 거의 입을 열 새가 없었다.


 율은 그렇게 자주 씻는 편이 아니었다. 이틀 이상 안 씻어서 기름에 젖은 듯한 머리를 한 율을 보면, 고등학생 때 생각이 났다. 어릴 적에 율의 머리에서 커다랗고 네모난 비듬을 발견하고 떼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대로 둔 적이 있었다. 쥐어짜면 기름이 떨어질 것 같은 머리카락에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다. 율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침이 되면 율의 머리에서 커다란 비듬을 발견하곤 했다.


 며칠 동안 율의 베개를 관찰했다. 그동안 내 베개 위에는 이틀에 한 번씩 수건을 갈아 두었다. 율의 베갯잇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샛노란 색으로 변했다.


 불쑥 같이 살자는 말을 꺼낸 건, 이번엔 내 쪽이었다. 임시 보호시설에서 무작정 뛰쳐나와서 24시간 하는 맥도날드에 앉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걸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몇십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무작정 율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서는 일단 씻기기 시작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율의 다리에선 땟국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유기견이라도 데리고 온 기분이었다. 율의 몸은 변함없이 비대했지만, 비대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하얗고 작은 발이 그 몸 맨 아래에 달려 있었다. 비누 거품이 피부 위로 지나가자 하얀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이제 늙어서 부드럽게 주름진 다리와 팔에, 여기저기가 멍투성이였다.


 사정 좋은 사람들에게야 율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있을 수 있고, 회복을 도와줄 만한 사람이 필요하고, 뭐 수많은 말을 갖다 붙일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사정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새벽같이 나가서 일을 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새벽 4시부터 출근하는 버스 기사들은 점심시간 외에도 식사가 필요했다. 덕분에 조리와 배식을 두 번 해야 했고, 몸은 두 배로 지쳤지만, 통장에 돈도 두 배로 들어왔다. 학교에서 일하는 게 더 낫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학교는 방학이 있다. 방학 동안에 손가락만 빨면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버스 기사들은 학부모들처럼 쫓아와서 급식 메뉴가 이상하다며 난리 치지도 않으니까.


 식당에는 영양사도 없었고, 한 달 치 메뉴표도 없었다. 다음 날 메뉴는 나와 다른 한 명이 저녁마다 결정했다. 이 식당에서 일하는 유일한 두 명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동태탕을 만들었다. 종종 어떤 기사들이 동태탕이 지겹다고 투덜거렸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운수회사의 대표 사촌 중 한 명이 수산물을 팔았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매번 동태를 사라는 압력이 들어오는 건, 아마도 동태가 마진이 제일 많이 남거나, 그런 종류의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돌아왔을 때, 집에 따뜻한 밥과 찌개가 차려져 있다면 멋진 일일 것이다. 아마 그런 걸 꿈꾸며 많은 남자는 결혼을 하는 거겠지. 하지만 율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지친 상태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12평짜리 반지하방은 오줌 냄새로 가득했다. 신발을 털털, 벗어 던지며 생각했다. 이년은 하루 종일 집에서 처놀면서 강아지처럼 벽에다가 오줌을 갈기고 다니나.


 물론 율은 강아지가 아니었기에, 문이 열린다고 해서 화들짝 허겁지겁 반갑게 뛰쳐나오는 일은 없었다. 화장실 갈 때 말고는 침대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왔겠지.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풍경은 더욱 가관이었다. 귀신같이 찬장에서 42만 원짜리 볼을 꺼내다가 시리얼을 말아 먹은 모양이었다. 시리얼 통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세트로 산 스테인리스 스푼과 볼이 침대 밑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우유는 냉장고에 넣어놨나, 부엌을 보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싱크대 위의 우유를 냉장고에 다시 넣고 시리얼 통을 주워다 아래쪽 찬장에 넣었다. 그새 몇 개 바닥에 떨어뜨린 부스러기들도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볼과 스테인리스 스푼을 주워다가 싱크대로 가져갔다. 민트색 고무장갑을 끼고 뜨거운 물을 틀었다. 나뭇잎 모양의 귀여운 무늬들 위로 굳어 있던 우유들이 씻겨 내려갔다. 기태와 백화점에 갔을 때, 굳이 테이블 웨어 코너로 가서 두 개 세트로 고른 볼이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 나에게는 꼭 볼이 필요했다. 베이지색 앞치마를 두르고 양파 수프 같은 걸 만들어서 둘이 먹기 위해 내놓으려면 볼이 필요했다. 예쁜 가방이라도 하나 사주겠다던 기태는, 볼과 스푼 세트에는 지갑을 꺼내지 않았다. 이런 걸 이 가격 주고 왜 사냐면서 툴툴거렸다. 나는 기태의 부인이 쓰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식기가 필요했다.


 잘 씻어서 볼을 찬장 제일 위쪽에 안 보이게 밀어 넣어 놓은 뒤, 나는 무늬 없는 하얀 국그릇을 두 개 꺼냈다. 집 근처 그릇 가게에서 떨이할 때 산 것이다. 하나는 살짝 이가 나가 있었다. 동태탕같이 매운 거 말고, 심심한 된장국이 먹고 싶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호박을 꺼냈다. 랩에 감싸 둔 양파 반 개도 꺼냈다. 두부도 있으면 좋았겠지만, 두부를 사 올 기력까지는 없었다. 멸치는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은 멸치를 쓰는 게 어쩐지 아까워져서, 멸치 팩 밑에 남은 가루를 탈탈 털어서 국물에 넣었다. 보글보글, 국이 끓는 소리가 나자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며 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보글거리는 국물처럼 혐오감이 수면 위로 치솟아 올라왔다. 또 제대로 씻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여기저기 밥풀을 튀겨대면서 먹겠지. 율이 먹고 난 자리는 언제나 깨끗하지 않았다. 국물과 밥풀이 흩어져 있는 자리를 보자면, 그건 마치 율이 지금까지 살아온 궤적처럼 보였다.


하루 종일 울릴 일이 거의 없는 휴대폰이 울린 건 그때였다. 문자도, 카톡도 아니고 전화였다. 김기태라는 이름이 화면 위에 떠 있었다.





3. 걸귀




 연주가 집에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침대 위에 누워서 연주가 신발 벗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연주 쪽을 바라보았다. 연주는 침대 옆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며, 왼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연주의 미간에는 왼쪽에만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못마땅한 걸 볼 때마다 왼쪽 눈썹이 꿈틀거리는 저 습관 때문이겠지. 열일곱 살 때부터 꾸준히 보아왔던 저 습관. 내가 연주의 웃는 얼굴보다 더 많이 본 얼굴이기도 했다.


 연주는 내가 시리얼을 먹은 흔적을 빠르게 치웠다. 연주는 나와 다르게 늘 재빠른 구석이 있었다. 생각하면 즉시 실행에 옮겼고, 미적대지 않았다. 연주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연주의 불쾌감은 연주의 입이 아닌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고, 사과하지도 않았다. 어정쩡하게 몸을 반쯤 일으켰다가 긴장한 상태로 다시 반쯤 누웠다. 갑자기 긴장한 나머지 어깻죽지가 아파 왔다. 연주의 저 불쾌감이 무엇 때문인지는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루 종일 씻지 않았다. 씻어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불쑥, 침대 프레임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그 충동을 따를 만큼 몸은 재빠르지 못했다. 느리게 휴대폰 화면을 넘겼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허비할 수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화면을 넘겼지만, 사실 그건 매일 실패하는 과업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세상이 잊히지도 않고 선연하게 머릿속에서 매일 살아 숨 쉬었다. 귀신이 틀림없었다.


 오늘도 엄마 생각을 했다. 엄마는 많은 귀신을 알고 있었다. 엄마가 말해준 여러 귀신을 천천히 떠올리며, 엄마가 죽었을까 생각했다. 내가 엄마의 생사도 모르니, 엄마는 무사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무사귀신이 되지 않기 위해 나를 낳았을지도 모르는데. 불효녀도 이런 불효녀가 없었다. 평생을 그렇게 온갖 귀신을 달래겠다고 돈을 퍼붓고 다녔는데, 막상 딸내미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서 무사귀신이 되다니. 갑자기 신이 나서 침대에 누운 채 깔깔 웃다가, 서늘한 기분이 들어 웃음을 멈췄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어쨌든 엄마는 내 인생의 귀신들을 물리쳐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도 엄마를 잃어버렸다. 눈물이 방울방울 흘렀다. 베갯잇이 천천히 젖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연주의 베개는 옷장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옷장까지 이동해서 베개를 꺼낼 기력은 없었다.


 한참을 가만히 누워 있다 보니 배가 고팠다. 엄마는 늘 내게 걸귀가 붙었다고 했었다. ‘할머니’에게 곧잘 달려가 이것저것 묻다가 막판에는 꼭 질문을 덧붙였다.


 “율이가 걸신들린 게 아닐까요?”


 내가 잘 먹는 사람이었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이 먹는 사람이었냐고 하면 부정할 수 없이 그랬다. 속이 언제나 텅 빈 것 같았다. 음식을 먹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맛있는 요리를 잘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음식이 눈앞에 있으면 언제나 탐욕스럽게 욱여넣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내가 밥을 먹을 때면 엄마는 늘 걸귀가 붙은 게 틀림없다고 혀를 찼다. 밥상에서 얻어맞는 일도 허다했기에, 가능하면 엄마랑 같이 밥을 먹지 않으려고 했지만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유통기한이 아직 지나지 않은 우유가 한 통, 찬장 안에는 시리얼이 있었다. 시리얼 옆에 있는 그릇이 한눈에 들어왔다. 파란색과 노란색이 점점이 박힌 아주 예쁜 그릇이 두 개. 나는 노란 점이 박힌 그릇을 꺼내 들고, 그 안에 시리얼을 부었다. 우유를 부으면서 계속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의 눈초리가 무서워서 계란프라이 하나에 3분의 1 공기 정도만 밥을 간신히 먹었던 날 새벽이 떠올랐다. 계란은 가늘게 부스러졌고, 나는 밥알을 아리듯 입에 가져가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엄마 가까이 있어서 도저히 손을 뻗지 못한 음식이 누워서도 잊히지 않고 떠올랐다. 살그머니 부엌으로 나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두운 집 안에 냉장고 속 음식들이 환하게 떠올랐다. 총각김치는 맨 아래쪽, 김치 통 안에 있었다. 조심스럽게 김치 통 위에 있는 밀폐용기를 치우고, 김치 통을 꺼냈다. 총각김치 냄새가 물큰하게 올라왔다. 정신없이 손가락을 그대로 뻗어 김치를 입안에 욱여넣기 시작했다. 다섯 개째 김치를 입에 넣었을 때, 엄청난 격통이 뒤통수에 느껴졌다. 엄마였다.


 “미친년아, 걸귀 들린 년아!”


 총각김치를 입에 물고 머리카락이 쥐어뜯기도록 맞았다. 맞으면서도 우물우물, 입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총각김치 끄트머리에 붙은 시래기가 시큼하고 달콤했다. 엄마의 주먹질이 배로 오는 것만은 온 힘을 다해 막았다. 이 음식을 도저히 토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또 먹을 수 있는 날이 올까. 나는 침대에 앉아 시리얼을 입에 넣으며, 엄마에게 맞으면서 먹던 총각김치 맛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시리얼을 다 먹고 나서는 까무룩, 잠깐 잠이 들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온갖 꿈속을 헤매던 차에 연주가 돌아온 것이었다.


 아랫도리가 축축했다. 자면서 오줌을 살짝 지린 모양이었다. 탁탁탁, 무언가 써는 소리가 들려왔고 집 안은 금세 고소한 냄새로 가득 찼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갑작스럽게 배가 고파졌다. 허리를 쥐어짜는 것처럼 배가 고팠다. 돌이켜 보면 항상 엄마 말이 맞았다. 걸귀가 들린 것이다.





4. 멋진 신세계




 메일을 두 번 더 읽었다. 그리고 입을 꼭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웅크렸다가 쭉 폈다. 그리고 자리에서 방방 두세 번 뛰었다. 솔직히 될 거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redsun.com이 끝에 박혀 있는 메일은 틀림없이 합격을 고지하고 있었다.


 남들 다 한다는 취업 스터디도 한 번 참여한 적이 없었다. 안 될 걸 알면서도 원서 한 번 써보는 것도 경험이지, 하면서 썼던 것이었다. 직무도 한정되어 있지 않았고, 코딩 과제는 죄다 바이브 코딩으로 제출했다. 바이브 코딩을 자유롭게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고 되어 있기는 했는데, 이렇게 전부 바이브 코딩으로 해도 되는 거였어? 어쨌든 IT 회사인데. 너무 신이 나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레드선이라니, 내가 이제 레드선에 다닌다니!


 레드선의 뉴로모픽 사업은 이제 거의 국가 기간산업이었다. 세계인의 절반 정도는 레드선 아이디가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이제 휴가도 레드선으로 갔다. 레드선에서 로그아웃하고 현실 세계에 로그인한다는 말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었다. 레드선으로 출근하는 사람들까지 생기고 있는 판국이었다. 사람들이 레드선 안에 회사를 차리고, 레드선에서 콘텐츠를 제공했다. 현실 세계가 의미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고 개탄하던 사람들조차도, 모두가 레드선에 접속했다. 레드선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세계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뉴로모픽 잘 못 쓰는 노인들 정도만 예외일까. 사람들은 모두 레드선 속에 영혼의 한구석을 두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레드선으로 ‘진짜’ 출근을 하게 된 것이다. 레드선 속으로 출근을 하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의 레드선으로. 사람들의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된 것이다. 꿈은 아니겠지. 설마 내가 지금 레드선 안에 있는 건 아니겠지. 싱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에게 이 소식을 먼저 알려야 할지 감도 오질 않았다.


 신이 나서 냉큼 앱을 작동시키고 목뒤의 모듈을 가볍게 움직였다. 곧장 레드선의 세계로 들어갔다. 집 안에 있으니까 굳이 AR 모드를 작동시킬 필요는 없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집 안에서 VR 모드로 접속하는 거였다.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동네방네 방이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싱글벙글하면서 10분 정도 강변 벤치에 앉아 있으려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 쟤 차단해 놓는다는 걸 깜빡했네. 취업 준비 때문에 바빠서 헤어지자고 하더니만, 알고 보니 후배랑 바람난 전 남친이었다. 보이는 걸 보니, 저쪽도 날 차단 안 한 모양이지. 오늘 같은 날은 차단 안 하길 천만다행이었다. 상대한테는 무슨 설정이 되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이건아!”


 신나게 몸을 흔들며 걸어오던 재현은, 날 보고 잠깐 움찔하는 거 같더니만 어색하게 손을 같이 흔들었다.


 “어, 자현아.”


 “잘 지내?”


 “어…… 나야 뭐, 비슷하지.”


 적당히 안부라도 묻고, 신상 조사를 한 다음에 얘기했어야 하는데, 도저히 참지 못하고 말이 먼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나 취직했어!”


 “아, 그래? 축하한다.”


 “너는, 취업 준비한다더니. 취업했어?”


 “아……. 뭐, 그냥 그렇지. 근데, 자현아. 내가 오늘 이거저거 할 일이 좀 있어가지고.”


 멋쩍게 지나가려는 이건에게 냅다 말을 던지고 말았다.


 “나, 여기 취직했어.”


 “어? 여기…… 무슨 회사야? 너, 나랑 설정이 다른 거 같은데. 나는 지금 AR인데.”


 “아니, 여기. 여―기.”


“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고 이건의 얼굴이 일그러져갔다.


 “레드선?”


 거울을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내가 지금 얼마나 산뜻하고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는지.


 “아니, 너, 무슨, 취업 준비한다는 말도 못 들었는데.”


 “맞아, 엄청 본격적으로 한 건 아니었고. 그냥 나도 기대 없이 이력서를 냈는데. 어떻게, 취업이 됐네.”


 “레드선에, 진짜로 취업이 됐다고? 농담이 아니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네가 뭐…….”


 “내가 뭐?”


 “아니, 하. 아니다. 그래, 축하하고. 참…… 그래. 좋겠네.”


 이건의 복잡미묘한 표정이 끝내주게 읽혔다. 읽는 프롬프트라도 따로 띄워놓을까 고민을 했지만, 굳이 그러진 않았다. 이미 저 미간에 잡힌 주름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할 일 많다며, 얼른 가봐. 나중에……. 뭐, 볼 기회가 있으려나?”


 “그래……”


 후배랑 계속 잘 만나고 있느냐고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너무 고소해서 재생할 수 있게 데이터 저장을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데이터 용량이 아까워서 관두기로 했다.


 접속을 끊고 나와서, 친구 몇 명에게 현실로 소식을 전하자 친구들은 신이 나서 다시 레드선에서 모이자고 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신나는 날에는 술 한잔은 해줘야 하니까. 하지만 이제 현실에서 술을 먹는 사람은 민목들 말고는 없었다. 뭐, 젊은 사람 중에서도 자연주의자들이라서 적극적으로 민목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웬만해선 모두 모듈을 설치하니까. 쓸데없이 현실에서 술 먹고, 괜한 위험과 숙취에 시달릴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친구들과는 밤 8시에 동시접속으로 만났다. 빌린 술집 좌표를 미리 공유했다. 오늘 같은 날을 위해 돈이라는 게 있는 거지. 나는 새로 나왔다는 결 고운 술들을 잔뜩 샀다. 만나기로 한 술집에는 기분 좋은 향도 깔고, 예쁜 카펫도 하나 빌렸다. 안주는 새우와 토마토를 얹은 빵으로 준비했다. 누구한테든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접속했다가 이건을 만났다는 소식엔 하나같이 눈물을 흘릴 만큼 웃어댔다.


 “그 새끼, 오늘 억울해서 잠 못 잔다.”


 12시까지 술을 진탕 마셨다. 옛날 말로 하자면 아주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마셨다. 친구들을 다 보내고 나서는 일부러 잠도 레드선에서 잤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어나고 싶었다. 젠 모드로 들어갔다. 세상이 아득해졌고, 우주에 홀로 떠 있는 우주 해파리가 된 것처럼 전신이 축 늘어졌다. 아침 6시에 눈을 떴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상쾌하고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출근 첫날이 된 것이다.





5. 학수고대하던 식탁




 고민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망설임도 없이 기태는 명랑하게 입을 열었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귓전을 때렸다.


 “잘 지냈어?”


 하지만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몇 초간의 침묵 끝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뭐, 잘 지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한 건 아닐 거고.”


 “아직 얘기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날카롭지. 그냥 잘 지냈냐고 묻는 거잖아.”


 기태의 목소리에서 빙글거리는 웃음기가 느껴졌다. 출소하던 날, 교도소 앞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그 긴 시간을 버텼던 교도소 담벼락에 기대어 1시간이 넘도록 앉아 있었다. 끝내 기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태는 오지 않는다. 그걸 받아들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던 순간을 기억했다. 겨울 아침 공기는 차가웠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폐 깊숙한 곳까지 씻어 내리는 듯했다. 그 길로 편의점에 가서 머리끈을 샀다. 머리를 하나로 크게 묶은 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무작정 걸어가기 시작했었다.


 2년은 생각보다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후 완전히 달라진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2년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이는 50대 중반이었고, 업계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사기와 배임으로 감옥에 갔다 온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는 너그러운 회사는 없었다. 기태에게 연락이 온 건 그해 연말이 되어서였다. 여상한 말투로 온 메시지 한 통.


 『누나, 연말 잘 보냈어요? 행복한 새해를 맞길.』


 7년 전에, 아직 몸이 좀 더 건강할 때 일하던 피트니스 클럽은 12시까지 운영했다. 나는 운영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곳에 들어가 청소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청소를 시작하려고 고무장갑을 끼다가 기태의 메시지를 읽었다. 55살이 되는 1월 1일이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지였지만 답장하지 않았다. 답장할 수 없었다. 기태의 프로필사진에는 어느덧 키가 훌쩍 큰 청소년이 되어버린 기태의 큰 딸이 기태와 함께 바닷가에서 하트를 그리며 웃고 있었다. 기태는 건강해 보였다. 폭삭 늙지도 않았고, 적당한 돈을 벌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답이 없어도 기태는 새해만 되면 메시지를 한 번씩 보냈다. 기태에게 오는 연락은 오로지 그게 전부였다. 7년 동안, 우리가 나눈 대화는 새해의 메시지뿐이었다. 나는 휴대폰 번호를 바꾸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를 굳이 찾는 사람도 없었다. 기태는 나를 찾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자기의 삶을 살아갔다. 7년 만에, 출소하고 나서 처음으로 온 전화였다. 욕설을 내뱉고 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치밀었지만 이를 깍 물고 참아냈다. 이 관계를 그렇게 대하는 건 도저히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한번 만날 수 있을까?”


 “왜, 아직도 내가 너한테 써먹힐 거리가 남았나. 이젠 부장도 아니고 대표이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이번엔 내가 누나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거짓말. 정말로 나를 도와줄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너는 진작에 나에게 연락을 했겠지. 거짓말이라고 몸의 모든 솜털 하나하나가 다 파르르 떨며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의 한구석이 훅 내려앉았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일지도 모르잖아. 진짜로 도움을 주고 싶을지도, 어쩌면 줄 수 있는 사건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묻어뒀던 기억들이 시간을 비집고 고개를 내밀었다. 다시 묻어두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기어코 집요하게 기억들은 뒤통수를 끄집어 당겼다.


 사랑한다고 말하던 목소리, 내 어깨를 쓸어내리던 크고 두터운 손. 내가 살던 오피스텔에 두고 갔던 시계를 기억했다. 일부러 그 누구도 출근하지 않은 새벽에 출근해서, 그의 자리에 시계를 놓아두던 기억. 목덜미에서 나던 땀 냄새. 그만 떠올리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온 세상에서 나던 그의 냄새. 그는 어디 살고 있냐고 물었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일 저녁에 잠깐 만나자는 기태의 요청은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기태가 나오라고 한 약속 장소는 십수 년 전에 약속을 잡고 종종 만나던 그 호텔의 카페였다. 이제 그 호텔 근처를 지나갈 일도 없는데. 굳이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내로 나서야 한다니.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 약속을 지킬 것이었다. 나를 배신하고 지옥에 처넣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이 자리로 나갈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끓이던 된장국의 불을 조금 줄였다. 식탁 안에서 김치를 꺼냈다. 포기로 여러 개 사둔 김치를 가위로 조금 썰었다. 싸게 사려고 여러 포기를 너무 많이 샀더니만, 익을 대로 익어서 신 냄새가 훅 올라왔다. 생김치를 먹어본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율은 어느새 침대에서 나와 멍하니 부엌에 서 있었다. 앉은뱅이 식탁은 냉장고 옆에 접혀 있었지만, 율은 그걸 꺼내서 닦을 만한 인물이 못 되었다. 살아서 숨이 붙어 있지만, 생산적인 일을 자기가 먼저 움직여서 해내는 건 불가능한, 이 집의 병든 고양이.


 하지만 나는 율에게 아무것도 시킬 생각이 없었다. 율이 그 무엇도 할 줄 모른다는 건 이제 내게 몹시도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식탁을 펴고, 행주로 식탁을 닦아냈다. 그리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한 벌씩 꺼내서, 두 벌을 율에게 내밀었다. 율은 얼떨결에 수저를 받아서 식탁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멍청이답게 식탁 앞에 앉았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자리에 불편하게 앉은 율의 얼굴은 변함없이 은밀한 기쁨을 주었다.


 나는 율의 앞에 밥을 놓았고, 내 자리에도 밥을 놓았다. 찌개를 꺼내서 한가운데 두고, 국자를 얹었다. 안에 든 건더기는 별게 없었다. 어쩌면 율은 반찬이 별게 없다고 투덜거릴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도 김치가 너무 익었다고 투덜거렸었다. 놀라운 일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이 순전히 나에게 얹혀살고, 그 무엇도 나에게 기여하지 않으면서도 오로지 불평불만만 하고 살 수 있다니. 나는 율을 한심하게 여겼다. 지독할 만큼 율을 경멸했다. 그리고 이 지리멸렬한 동거 생활에는 그 경멸이 반드시 필요했다. 나는 내 삶에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이 코끼리 같은 여자와 헤어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오로지 그 경멸만이 내가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이었다.





6. 귀신 들림




 밥을 양껏 숟가락에 얹었다. 한입 가득 밥을 밀어 넣고, 숟가락을 된장국에 넣으려다가 된장국을 국자로 따로 떠서 가져가는 연주의 손가락을 보고 멈칫,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연주가 내려놓은 국자를 들고 내 그릇에 덜기 시작했다. 국자가 손에서 미끄러지지는 않았지만, 건더기는 제대로 떠지지 않았고, 국물은 그릇 안으로 얌전히 떨어지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밥이랑 같이 국을 먹어야 하는데. 하지만 국을 기다리지 못하고 목구멍 안으로 밥알들이 밀려 들어갔다.


 클럼지(clumsy)라는 단어는 어릴 적, 노천명이라는 시인의 시에서 처음 보았다.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얹혔다고 했다. 클럼지를 사전에서 찾았을 때, 나는 삽시간에 단어에 매료되고 말았다. 어설픈, 재바르지 못한, 세련되지 못한, 서투른, 투박한, 까다로운, 골치 아픈. 손이 클럼지하다니. 시인은 투박하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았지만, 매끄럽고 작은 내 손이야말로 클럼지라는 단어에 적절하게 어울렸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손이었다. 부엌칼을 쥐면 손가락을 베였고, 국자를 쥐면 국을 흐트러뜨렸고, 머리핀을 쥐면 머리카락을 모으지 못했다. 걸레를 쥐어짜는 것도, 방을 정리하는 것도, 그릇을 씻는 것도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클럼지한 손을 노래한 시인에게는 무게를 얹기에는 “가냘픈 몸”이 있었다. 내게도 그런 몸이 있었다면 클럼지한 손을 조금은 용서받을 수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떨어진 국물 위로 연주의 시선이 느껴졌다. 순간 벌거벗은 기분이 들었다. 클럼지한 손으로 허둥지둥 떨어진 국물들을 주워 담고 싶었다. 그럴 수는 없었지만.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국자를 내려놓았다. 연주가 일부러 나를 괴롭히기 위해 국자를 가져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이 먹는 자리에서는 국자를 써서 담아 먹는 게 일반적이니까. 하지만 나는 매번 국을 흘렸다. 매번 반찬을 흘렸고, 매번 무언가를 망쳤다. 수치심은 불안으로 빠르게 모습을 바꾸어갔다. 불안은 언제나 그렇듯, 참지 못하고 입으로 터져 나왔다. 온갖 쓸데없는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입으로.


 “오늘 레드선에 대해서 이것저것 봤는데 말이야. 레드선으로는 온갖 것이 다 가능하다고 그러더라고. 요즘 애들은 레드선에 웬만하면 다 접속을 해가지구 말이지, 목에 레드선 접속 모듈이 없으면 민목이라고 부른대. 레드선 말고도 다른 접속 플랫폼도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레드선이 제일 유명하고 요즘 사람들은 웬만하면 다 레드선 아이디는 가지고 있다고 하고 말이지. 약속 잡아서 만나고 그러던 것처럼 요즘엔 레드선에서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만나고 그런대. 너나 나는 둘 다 민목이다. 그치? 그런 거 접속하려면 돈이 많이 들려나. 궁금하기는 한데 다 늙어가지고 또 그런 데 들어가 보는 것도 주책일지도 몰라.”


 연주는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선은 나를 향하지 않았다. 말하면서 여기저기 튄 밥풀들에 연주의 시선이 꽂혔다. 부끄러움에 손가락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입은 더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런 대답도 없는 이야기에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덧댔다. 언젠가부터 연주와의 식사는 불안에 떨면서 끊임없이 떠드는 나의 원맨쇼였다. 언젠가부터, 아니,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을지도 몰랐다.


 처음 연주의 앞에 식판을 들고 앉았을 때를 기억했다. 워낙에 잘 넘어졌지만, 그날 체육 시간에 넘어진 건 전날 엄마에게 심하게 맞은 탓이 컸다. 정강이가 도무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귀신 들렸냐는 연주의 농담은 잠자리에 들 때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농담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귀신 들렸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엄마 말고는 처음이었다. 내 서툰 손짓을 연주가 어떻게 바라보는지, 첫날부터 알게 되었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비난이 냅다 쏟아지기 직전, 엄마도 늘 저런 눈으로 날 바라봤다. 하지만 젓가락을 제대로 쥐지 못해 바닥에 떨어뜨리는 걸 본 연주는 잡귀가 들었다고 숟가락으로 내 머리통을 때리는 대신, 젓가락 통에서 새 젓가락을 집어 주었다.


 그날 연주에게 나는 엄마가 자주 찾아가는 무당 이야기를 하면서 밥을 먹었다. 그 무당은 태주를 모신다고 했고, 태주는 꽃 위에서 머문다고 한다, 무당은 어린아이 같은 투로 말을 하고, 엄마는 무당에게 벌써 돈을 아주 많이 가져다줬다, 아빠와 엄마는 이혼을 했는데, 그때 이후로 무당을 자주 찾아가게 된 건지, 아니면 그 전부터 무당을 자주 찾아가서 이혼을 하게 된 건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만한 이야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남들이 옆에서 듣고 있지는 않을지 신경이 쓰였지만, 입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밥을 먹는 내 모습을 지켜보는 연주의 왼쪽 눈썹에 작은 주름이 계속 보였다. 주름 하나가 신기하게 눈썹의 모양을 바꿔놓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던 연주의 얼굴에 못마땅해하는 시선이 확연하게 내려앉았다. 안도감이 들었다.


 나만 연주를 찾는 건 아니었다. 연주도 별다른 무리에 속해 있진 않았고, 단짝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종종 연주도 나를 찾았고, 함께 점심을 먹고, 함께 하교를 하는 여자아이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곧 다른 사람들의 눈에 단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연주가 그걸 부끄러워하진 않을까 신경이 쓰였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애쓰는 마음은 언제나 더 큰 소리로 튀어나오곤 했다. 마치 오늘처럼.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들어 입에 넣으면서도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출 수가 없는 말은, 건드려선 안 될 말과 해도 될 말 사이를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오갔다.


 “아까 통화하는 거 같던데, 친한 사람인가 봐. 하긴, 너는 나보다 사회생활도 오래 했으니까 친구도 많겠지. 부럽다. 나는 너 말고는 아무래도 친구도 없잖아. 나도 너처럼 직장을 좀 다녀봤어야 하는데, 어려웠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혼자 떠들어대는 말에 연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전화를 받는 연주의 표정은 해쓱했다. 마치 물귀신에라도 덜미를 잡힌 것처럼 보였다.


 어릴 적에는 한 번도 물놀이를 간 적이 없었다. 바다나 강은 물론이거니와 수영장에도 가지 못했다. 수학여행을 바다로 가게 되면, 엄마는 수학여행 자체를 보내주지 않았다. 물귀신은 음기가 강해서, 물귀신에 잡히면 넋도 건지기 어렵다며 수학여행 가고 싶어 하는 나를 엄마는 매섭게 때렸다. 천천히 입안으로 숟가락을 밀어 넣는 연주의 얼굴에 물귀신이 어른거렸다. 밥상 여기저기에 내가 흘린 고춧가루와 밥풀이 흩어졌다. 말은 힘이 없었고, 나는 넋을 건져내는 방법을 몰랐다. 





7. 토끼 굴




 설치 기사는 화요일에 왔다. 그날 기태는 이미 근로계약서까지 모두 준비를 하고 날 만나러 나온 것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태가 꺼낸 말은, 분하게도 7년의 세월을 어렵지 않게 녹여냈다.


 “누나, 미안해요.”


 내 얘기를 많이 하지는 않았다. 기태는 예상한 대로 잘살고 있었다. 내 인생이 저당 잡힌 그 회사를 걷어치운 다음, 새로운 회사를 다시 만들었다고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에 기태가 만들겠다고 했던 그 기술이 지금 레드선이 하고 있는 뉴로모픽 메타버스 같은 것이었다. 나도 새까맣게 속았지만. 새 회사를 무슨 돈으로 만들었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짐작이 갔다.


 아직도 기태의 부인 이름을 속절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민아 씨. 기술 시연회가 있던 날, 기태는 잔인하게도 그녀를 데리고 왔다. 귀여운 인상에 별거 아닌 농담에도 까르르대며 잘 웃는 여자였다. 유치원에 다닌다는 딸아이는 발레리나처럼 얇은 보라색 샤가 몇 겹씩 겹쳐진 공주님 드레스를 입고 왔었다. 기태와 오민아 씨를 반반씩 신기하게 빼닮은 아이였다. 능력 있는 싱글 여자가 대표이사고, 거기에 딸려 있는 단란한 가족을 가진 후배 동업자는 투자자들이 보기에도 괜찮은 그림이었을 것이다. 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오민아 씨를 여기저기에 안내했고, 오민아 씨는 동그랗게 눈을 뜨며 이것저것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기분이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좋은 시절이었다. 그 시연회 이후 오민아 씨가 전환사채에 3억을 넣었다는 건 법정에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감옥에 간 대신, 기태는 먹고살 만큼 이상으로 많이 남겼겠지.


 “복잡한 일은 아니에요. 믿을 사람이 누나밖에 없어서 그래요.”


 누구보다도 믿어선 안 될 사람이, 내게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말을 꺼냈다. 이 말에 약해지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기태의 제안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긴 했다. 나는 그다음 날, 주말까지만 일하겠다고 버스회사에 사표를 냈다. 월요일부터 출근하지 않는 걸 보고 율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몇 번씩 물어댔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위해서 설명해야 할 많은 것이 귀찮았다. 율은 기태가 누군지, 내가 왜 감옥에 갔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자신도 힘도 없었다.


 설치 기사는 간단한 절차라면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시술하고 나시면 24시간 동안은 접속하지 말고 관찰하셔야 되고요. 여기 보호자 비상 연락처 하나만 써주세요.”


 “보호자요?”


 “그냥 아무나 쓰셔도 돼요.”


 침대 쪽을 흘끔 바라봤다. 쓸 이름이라곤 정말이지 한 명밖에 없었다. 빈칸에 정율이라는 글씨를 써넣고, 그 옆 칸에는 율의 휴대폰 번호를 적었다. 기사는 종이 앞뒤로 사진을 찍더니, 대충 접어서 주머니 안에 넣고는 가져온 가방 안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이쪽으로 와서 고개 숙이세요. 금방 끝나요.”


 병원에서 설치하면 전신마취를 한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설치 기사는 목뒤에 가볍게 주사를 놓고는 모듈 설치를 시작했다. 목뒤에 압력이 잠깐 아주 강하게 들어왔다. 낮게 신음하자 설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조금 불편해요. 아픈 건 아니죠?”


 “네.”


 “금방 끝나요.”


 살 타는 냄새가 잠깐 나는가 싶더니, 금세 설치 기사는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24시간 동안은 접속하시면 안 됩니다. 10시간 뒤에 전화 한 번 올 텐데, 괜찮은지 상태 설명 한번 해주시고, 잘 설치됐다고 말씀 한번 해주세요.”


 설치 기사는 혹시 나중에 잘 안되면 이걸 쓰면 금방 될 거라고 하고 머리에 뒤집어쓰는 무슨 캡슐 같은 걸 하나 두고 갔다. 설치 기사가 가고 나서, 나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율의 오줌 냄새가 나는 방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설핏 깨었다가 다시 혼절하듯 잠들기를 반복했다. 평생 겪은 모든 피로가 갑자기 한 번에 몰려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척수를 직접 건드렸기 때문인가, 깨어 있을 때는 잠깐 의심했지만 금세 다시 잠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의심은 길게 가지 못했다. 10시간 만에 걸려 온 전화에는 졸리다는 말만 몇 번씩 반복했다.


 “사람마다 상태가 다른데, 졸리실 수 있어요. 24시간 지나면 괜찮아지실 거니까 지금 좀 주무세요.”


 내가 죽은 사람처럼 잠들었다가 종종 깨어나면, 율은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언제나 내 옆에 똑같이 누워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갈 생각도 없고, 뭔가 일을 할 생각도 없었다. 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도 멍한 눈으로 날 바라볼 뿐, 별다른 대처를 하지 않았다. 24시간 동안 관찰이 말 그대로 관찰이라면, 율은 충실한 보호자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다. 하루가 꼬박 지나서, 설치 기사가 찾아왔던 오전 11시쯤이 되자 거짓말처럼 의식이 말똥하게 돌아왔다.


 기태가 요청한 일은 데이터 분류 작업이었다.


 “계약은 우리 회사랑 하는 건 아니고, 레드선이랑 하는 건데. DDC라고 부르는 거 같더라고. 더미 데이터 컨퍼머의 줄임말이래. 다른 사람들이 활용하고 난 뉴로모픽 데이터를 더미 데이터라고 확인해 주면 되는 일인데. 아무래도 우리 회사에서 만든 데이터들도 있으니까. 우리 회사에서 만들었다는 표식 같은 게 있거든. 그 표식이 있는 데이터에만 태그를 두 개 붙여주면 돼. 더미 데이터 표식이랑 우리 회사 표식이랑.”


 더미 데이터 표식은 DD, 기태의 회사 표식은 Inert라고 했다.


 “원래 만든 회사에서 수거해 가는 게 기본 원칙인데, 요즘 자꾸 남의 데이터를 노리는 데이터 사냥꾼도 많고 해서 말이야.”


 일에 대해서 설명하는 기태의 얼굴에는 즐거움도 열정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얼굴 가득 있는 피로함이 오히려 더 믿을 만하게 느껴졌다. 회사에서 나와 이런 일을 하고 싶다 말하던 빛나던 얼굴은 완전히 사기였으니까. 지치고 피곤한 얼굴 앞에서 오래전에 가졌던 마음이 다시 떠올랐다. 애틋함과 가련함 사이의 어딘가를 헤매던, 누나 같은 기분.


 “제대로 된 회사에서 하는, 제대로 된 일인 거지?”


 질문 앞에서 기태의 말은 잠깐 멈췄다. 그리고 아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그리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다시 이어졌다. 그는 꼿꼿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고, 피곤한 표정 대신 웃음기가 걷힌 우울한 표정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사이에 많이 늙은 손이 눈에 띄었다. 팽팽하던 예전과 달리 부드럽게 주름진 자리가 만져질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손등 위로 손을 뻗는 대신 내 손가락을 꽉 쥐었다.


 “다시 한번, 정말 미안해. 내가 같이 책임졌어야 했는데, 누나 혼자 그 고생을 다 하게 해서 면목이 없어.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다만, 이제는 진영이 보기에 부끄러운 일은 하고 싶지 않아. 적어도 아빠로서는 당당하고 싶어. 법에 저촉되는 것도 없고, 누나를 다시 위험하게 할 일도 없을 거야. 레드선에서 DDC한테 나오는 거뿐만 아니라, 우리 회사에서 같은 금액만큼을 더 줄 거야. 누나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거지만, 내가 지금이라도 그 잘못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게 해줘.”


 기태가 안내한 대로 레드선에 DDC 모드로 접속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정말이지, 믿어서는 안 될 놈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





8. 신세계의 파수꾼은 조금 덜 멋져




 레드선엔 정말 수많은 일이 있었다. 뉴로모픽 메타버스 밖에서 해야 할 일, 안에서 해야 할 일을 가리지 않고 정말 수많은 직군이 있었다. 지금까지 없었던 산업인 만큼, 지금까지 없었던 직군이 대량 발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가고 싶었던 곳은 당연히 감각설계팀이었다.


 감각설계팀이야말로 꿈의 직업이었다. 사람들의 뇌에 근사한 감각을 심어주기 위해 그들은 현실을 탐구했다. 척수와 머리통에 전극을 모두 연결한 채 프랑스산 와인을 종류별로 마신다고 들었다. 별이 쏟아지는 몽골의 하늘을 바라보고, 바람이 부는 오키나와의 해변을 걷고, 핀란드의 오로라를 바라본다고 들었다. 부드러운 솜털 이불 속에 눕고, 온갖 산해진미를 입에 넣는다고 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끝내주는 건 공감각 형성이었다. 공감각은 사려면 돈이 많이 들었다. 만져지는 음악, 눈에 보이는 냄새, 볼 수 있는 맛. 감각설계팀은 그 값비싸고 아름다운 세계를 매일같이 업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분명 감각설계팀으로 산다는 건 일상을 훨씬 다층적으로 살도록 만들어줄 것이 틀림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동기들 전부가 희망 업무 제1순위에 감각설계팀을 썼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각설계팀이 아니라면 공간설계팀도 나쁘지 않았다. 매번 달라지는 새로운 공간들을 하나하나 상상하고 만들어내며 그 공간을 만끽한다는 건 감각설계팀 만큼은 아니지만 꽤 멋진 일처럼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마케팅팀도 좋았다. 원래 팔아먹으려면 다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 감각설계팀이야 결국 자기가 만들어낸 감각들을 중심으로 일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은 마케팅팀이야말로 레드선 내 세계를 가장 많이 탐험해 봤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정 아니면 파트너십팀이나 대외협력팀도 나쁘지 않았다.


 후회가 되었다. 다들 감각설계팀을 1순위로 쓸 게 뻔했는데, 왜 나도 감각설계팀을 쓴 거지. 블루오션을 노려서 대외협력팀을 썼으면, 지금쯤 우울증 환자들에게 레드선 세계관을 어떻게 적용시킬지 같은 얘기를 의사들이랑 하면서 법인카드라도 실컷 쓰고 다녔을 텐데. 뻔하게 남들이 다 썼을 만한 순서대로 감각설계팀, 공간설계팀, 아바타팀을 쓰는 바람에 결국은 이 모양 이 꼴이 난 게 틀림없었다.


 원시적이기가 이를 데 없었다. 40대의 모니터 앞에 앉아 있으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는 아파트 경비도 이런 식으로 일하진 않았다. 지금이 무슨 90년대냐고. 이 화려한 레드선 건물 안에 이런 공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시스템은 변동 사항을 죄다 추적해서 이미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골방에 처박혀서 메타버스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지켜보라니. 특이 사항이 있으면 메인 시스템으로 당연히 경고가 갈 텐데. 이게 대체 무슨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서로 대화도 못 하고, 같이 점심 먹으러 갈 일도 없는 우리 지원3팀(다른 팀에서는 감찰팀이라고 불렀다.)은 모두 10명이나 되었다. 저마다 이미지도 안 씌워진 메타버스 모니터 40대를 빤하게 들여다보면서 시간을 죽여야 했다. 성과를 좀 낼 수 있다면 여기에서 성과를 내서 다른 팀으로 가는 것도 생각해 보겠지만, 대체 감찰에서 낼 수 있는 성과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눈을 굴려가며 모니터를 봐봤자, 특이 사항을 기록하는 시스템 자체의 기능보다 더 뛰어날 순 없었다. 불쌍한 사람들 같으니.


 이 바보 같은 모니터 방에 들어오기 전에 팀장이란 사람을 만났다. 어쨌든 감찰팀에도 팀장이라는 게 있으니까. 수염을 듬성듬성 기르고, 뭔지 모를 록밴드 이름 같은 게 쓰인 까만 티셔츠를 입은 팀장은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별로 할 일은 없는데. 모니터에서 눈 오래 떼고 있으면 보고 있던 써니가 경고를 주니까, 그것만 잘 지키면 돼요.”


 써니는 레드선 내 업무용AI의 이름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말이다. AI의 경고를 받지 않기 위해 모니터를 보고 있으라니, 어차피 AI가 다 문제를 기록하고 있는 시스템을. 감찰팀의 존재는 말하자면 알리바이였다. 문제가 발생하는 건 어차피 다 집계가 되는데, 그걸 사람이 지켜보고 있어야만 믿을 수 있다는 식의 구시대적 잔재였다. 아무런 성과도 안 나고, 그냥 지하실에 처박혀서 시간 낭비만 해야 하는.


 망해도 폭삭 망했다. 첫날은 이미지 안 씌운 상태에서 사람들 알아보는 것만 훈련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환상을 보면서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지만, 관제실에서는 널빤지처럼 보이는 화면 앞에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만 보일 따름이었다. 이 더럽게 재미없는 일을 하는데, 졸 수도 없었다. 조금 꾸벅 졸기라도 할라치면 AI의 매서운 호통이 날아 들어왔다.


 “양자현 님, 1분간 잠드신 것으로 확인됩니다. 모니터를 제대로 확인해 주십시오.”


 러니까 이 일은 절대 성과가 날 일은 없지만,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찍히기는 딱 좋은 일이라는 뜻이었다. 졸았다는 보고가 여러 번 쌓여서 상부에 올라가기라도 하게 되면, 다른 팀으로 옮기기는커녕 냅다 징계해고당할지도 모른다. 나는 주먹으로 허벅지를 쳐가면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뭔 상황인지 모르겠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드러눕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자기 인생을 즐기는 모습을 그냥 멍때리고 바라보는 걸로 하루가 지나가게 되었다. 하루가 너무도 길었다.


 레드선의 세계에 보이지 않는 사람은 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보정팀, 세션운영팀, 데이터관리팀 등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감찰팀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그저 안타까워할 따름이었다. 어쨌든 그 팀은 실질적인 실무를 하고, 성과도 낼 수 있는 팀이었다. 멍때리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실제 직무였다. 하지만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메타버스 경비 아저씨가 되는 게 내 직무라니.


 그나마 다른 팀을 비웃을 수 있는 게 유일한 장점이었다. DDC들이 업무 시간 하나도 안 지키고 시스템에 들락날락하는 데도, 세션운영팀은 아무 관심이 없는 거 같다고 팀장한테 툴툴거렸더니, 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보다 보면 그런 팀이 한두 개가 아니야. 그렇다고 우리가 거기다 뭐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정말이지 쓸모없기만 한 직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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