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니치 미치(1회)
- 작성일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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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니치 미치
이상하
0장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소정은 갤러리 스페이스 디아워즈에서 근무한 반년 넘는 시간을 떠올렸다. 갤러리 사람들이 보는 지금의 자신은 어떤 모습일지 고민했다. 기획팀 팀장인 리사의 눈에는 아르바이트생을 괴롭히는 계약직일 터였다. 리사로부터 그만 돌아가 보라는 말을 들은 오늘만 놓고 보면 아르바이트생의 향수를 훔치는 말단 직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니, 반도 아니고 그 이상으로 리사는 착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본래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갤러리에서 일하며 이렇게 변한 것이었다. 그리고 향수도 훔친 게 아니라 주운 걸 제때 돌려주지 못했을 뿐이었다.
소정은 민규의 스마트폰 핫스폿으로 노트북에 인터넷을 연결했다. 개인 메신저를 켰다. 애써 대화방 섹션에 떠 있는 빨간색 동그라미를, 그 안의 숫자를, 352개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대신 친구 목록 스크롤바를 아래로 움직였다. 그놈의 스마트폰. 스마트폰만 어디 있는지 확실히 알았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소정이 거칠게 무선마우스를 움직였다. 스페이스 디아워즈의 리사, 사이먼, 애런 등의 직원과 아르바이트생 박연경의 계정이 눈에 들어왔다. 양조공장 주차장의 보도블록 경계석에 앉아 있는 자신의 엉덩이가 왠지 모르게 더 시렸다. 소정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메신저에 로그인한 이유를 떠올렸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사과, 죄송합니다, 진정성 있는 사과, 모두 다 제 불찰입니다,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것들만 생각났다. 곁에 앉아 있는 민규가 오렌지주스 캔을 건넸다. 소정이 마시다가 바닥에 내려놓은 것이었다.
“더 마셔. 아니면 탕비실에서 과자 같은 거 갖다줄까?”
배고프겠다. 민규가 작게 읊조렸다. 소정은 캔을 받아 들며 괜찮다고 말했다. 주스의 인공적인 단내가 훅 끼쳤다. 그 냄새로 몇 주 전, 갤러리 티켓 데스크에서 주운 향수를 떠올렸다. 오프화이트 타일 위에 덩그러니 놓인 작은 유리병. 그걸 주우며 소정은 주인을 찾아주리라 마음먹었다. 달랑 병만 봐서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 향을 맡으면 생각날까 싶어 공중에 뿌려보았다. 갤러리의 디퓨저 냄새에 어릴 적 썼던 오이 비누가 떠오르는 향이 겹쳐졌다. 무주 본가 욕실과 동네 대중목욕탕 그리고 모텔 화장실 비눗갑에 눌어붙어 있던 에메랄드색 비누. 손바닥에서 몇 번 굴리면 금세 거품이 일며 퍼지던 비릿하고도 서늘한 냄새. 향수 냄새를 맡고 기껏 생각한 게 싸구려 오이 비누라는 사실에 코웃음이 났다. 소정은 익숙한 듯 낯선 냄새가 나는 향수를 손에 들고 오래 살폈다. 누구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 때문이었다. 일단은 사무실 책상에 올려놓고 조만간 주인을 찾아봐야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여러 일로 정신이 없어 향수의 존재를 잊고 말았다. 그럼에도 소정의 테이블에 있는 향수병을 보고 박연경은 다른 소리를 했다. 향수를 소정이 훔쳤다며 소리쳤다.
“이거 제 거잖아요. 케이 님 테이블에 제 향수가 있는 이유가 뭐죠?”
박연경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층고 높은 스페이스 디아워즈에 울렸다. 박연경은 불결한 것을 목격했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만을 써서 테이블 위의 향수병을 집어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소정에게 쏠렸다. 아르바이트생인 박연경에게 오해라고 말해야만 했지만 소정은 입을 뗄 수 없었다. 박연경이 여러 말을 쏘아붙였다. 그중 하나가 잊히질 않았다.
“도대체 타인 걸 왜 훔치시는 거예요?”
훔치다. 소정은 그 말을 제일 싫어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언니 현정이 떠올라 목뒤가 뻐근해졌다. 소정이 속으로 되뇌었다. 주인을 찾아준답시고 그걸 주우면 안 됐었는데. 줍지 않았더라면 그딴 소리를 듣지 않았을 텐데.
주스 캔을 손안에서 천천히 돌렸다. 갤러리에서의 오늘 일을 생각하면은, 캔을 바닥에 던지고 발로 구겨도 시원찮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민규가 신경 써서 가져다준 것이니까. 뒤늦게서야 소정은 민규도 얼마나 놀랐을지 생각했다. 서울 북촌의 갤러리에서 다짜고짜 택시를 타고 이천의 양조공장까지 온 자신에게, 손을 벌벌 떨며 갤러리에서 잘릴 것 같다는 말만 되풀이한 자신에게, 민규는 그저 괜찮을 거라고만 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물류 아르바이트로 근무하는 양조공장에 들어가 오렌지주스를 가져온 후, 소정에게 숨 먼저 고르라고도 말했다. 소정은 남은 주스를 다 마신 후 바닥에 캔을 내려놓았다.
“불쑥 와서 놀랐지?”
“누나가 더 놀랐겠지 뭐.”
고맙게도 민규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은행잎 하나가 노트북 키보드 위로 툭 떨어졌다. 소정이 고개를 젖혔다. 주차장에 즐비한 은행나무를 둘러보았다. 점점 노랗게 물들어가는 잎들을 보며 자신이 스페이스 디아워즈에 입사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목련이 조금씩 피어나고, 나무들은 새순이 틔우던 때. 노트북 위의 은행잎을 집었다. 은행잎은 탁한 초록색, 옅은 연두색 그리고 노란색까지 다 담고 있었다. 소정이 민규 옆에 은행잎을 내려놓았다.
“이거 봐. 은행잎이 밖에서부터 노래진다고 알고 있는데 이건 잎줄기부터 노랗게 되었네. 안쪽부터 시들고 있어.”
“그러네, 신기하다. 원래 바깥쪽부터 변하는 거 아닌가?”
“여러모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나 봐.”
“누가?”
“내가, 여태.”
소정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민규가 소정에게 온종일 뭘 먹기는 했냐고 물었다. 소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규는 탕비실에서 뭐 좀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괜찮다는 만류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탁탁 털었다.
“누나 이제 긴장 풀린 것 같으니까, 나 다녀오면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줘. 알았지?”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며 민규는 공장으로 뛰어갔다. 가는 내내 몇 번 더 뒤를 돌아보며 소정을 살폈다. 근심 어린 눈빛으로. 가지 말고 기다리라며 크게 소리치기도 했다. 소정이 민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민규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서야 다시 노트북 화면을 살폈다. 리사에게 오늘은 그만 일찍 돌아가라는 말을 들은 후 그저 즉흥적으로 막걸리 양조공장에 왔다 여겼지만, 내심 민규라면 분명 내치지 않으리라 믿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불현듯 언젠가의 식사 자리에서 민규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나도 아빠 고깃집이나 돕고 여러 알바만 전전하는 내가 싫어. 다른 일 하고 싶었다고.”
민규는 물을 벌컥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살게 되는 걸 어떻게 해, 누나도 알잖아, 누나도 갤러리 일이랑 새벽 재택 아르바이트 병행하잖아, 나랑 같이 일하잖아, 정말 이 답답함을 몰라? 소정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누나한테 갤러리에서 일하는 게 뭐길래 그렇게 유세를 떠는 건데?”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민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날 민규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후 소정과 민규가 직접 만난 건 이곳, 그러니까 양조공장이 처음인 셈이었다.
노트북 화면에 알림이 떴다. 사이먼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미리보기로만 봤을 뿐인데도 다급함이 느껴졌다. 당장 사과해, 케이. 케이, 라는 부름에 소정은 다시 갤러리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곳에서만 자신이 그렇게 불리기 때문이었다.
―케이, 리사 팀장이 퇴근하라고 했다고 그렇게 그냥 가면 안 되지. 사과하고 갔어야지!
갤러리의 오지라퍼답게 사이먼은 소정을 닦달했다. 소정도 알고 있었다. 사과해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누구에게? 기획팀 상사인 리사? 가능했다. 소정이 아르바이트생의 기를 죽이려고, 이른바 ‘빠따를 쳤다’는 사실을 알아채 버렸으니까. 아니면 아르바이트생 박연경? 그것도 가능했다. 자신이 박연경의 기강을 잡으려 했기에. 하지만 향수는 정말 훔치지 않았다. 그건 오해였다. 노트북 화면에 사이먼으로부터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는 알림이 떴다.
―케이가 지금 어떤 사람한테 실수를 저지른 건지 알지?
소정은 답하는 대신 박연경의 메신저 프로필을 눌러보았다. 프로필사진은 현재 스페이스 디아워즈에서 전시되고 있는 아우구스트 마케의 「천연색 작곡(Farbige Komposition)」 웹 이미지였다. 이번 마케전에서 그나마 관람객들의 시선이 오래 머물던 작품. 무엇보다도 그 그림은, 이번 전시의 처참한 세일즈 실적을 구원해 준 판화 에디션 피스였다. 갤러리 VIP인 박연경의 부모가 기꺼이 구매해 준 덕분에.
반면 리사의 것은 「사랑받는 금색(Geliefd goud)」을 현장에서 직접 찍은 사진이었다.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 소장된,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게르 라타스터의 회화작품. 소정은 게르 라타스터라는 작가도, 「사랑받는 금색」도 일전에 리사의 프로필사진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누구였더라. 아마도 같은 기획팀 대리인 애런이나 과장인 사이먼이 그 작품이 리사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라 말해주었을 터였다. 소정은 프로필사진 속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도 캔버스 위에 두껍게 짓이겨진 물감의 질감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붓 터치 때문인지 소정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소정은 스크롤을 넘기다가 습관처럼 친언니의 것을 살폈다. ‘현정’이라는 이름이 설정되어 있는 프로필. 자유의여신상이 프린트된 엽서를 찍은 사진이었다. 언니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프로필을 바꾸었다. 와인 잔과 함께 찍은 스테이크 사진이기도 했고, 스크린골프장에서의 모습이기도 했고, 대학명이 떡하니 박힌 미국 미술대학 사진이기도 했다. 소정은 언니의 프로필사진 히스토리에 들어갔다. 최근에는 우수 사원 트로피를 업로드하기도 했으며, 또 가장 최근에는 그러니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떤 외국인과 악수하는 사진을 올렸다. 넥타이를 반듯하게 매고, 정장을 갖춰 입은 백인 남성. 그런데 갑자기 웬 자유의여신상인가. 어쩌면 언니가 미국으로 대학을 보낸 누군가로부터 받은 엽서일지도 몰랐다. 언니는 입시 미술 전문 유학원에서 근무하니까. 그렇다고 해도 자유의여신상 엽서는 미감이 떨어지고, 어딘가 고리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리사의 프로필사진을 본 직후라 그런지 더욱 눈살이 찌푸려졌다. 명색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람이, 그것도 좋은 대학의 회화과까지 졸업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소정은 자신의 프로필사진도 눌러보았다. 대학원 졸업식에서 자신이 학사모를 던지던 순간이었다. 사진을 확대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두려울 게 없는, 마냥 행복한 표정. 소정은 홀로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고 예술경영대학원에 입학한 때를 떠올렸다. 졸업하면 미술 쪽 직장에 다니며 계속 그림 곁에 있으리라 믿었던 자신을 기억했다. 그 믿음은 생활비 대출과 조교 벌이로 대학원을 다닐 때도 굳건히 존재했다. 졸업식 당일까지, 아니 졸업한 후 약 6개월이 지났을 때까지도 유효했다. 그러나 취업 준비를 하다 보니 자신이 애써서 가지게 된 총알은 문구점에서 파는 비비탄 총알과 흡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과녁을 맞히기는커녕 그저 바닥에 너저분히 굴러다니는 하얀 알갱이들.
소정은 왜 이 졸업식 사진을 오랫동안 프로필로 설정해 놓았는지를 고민했다. 아직도 이때의 기대를, 이제는 아주 작아진 기대를 품고 있는 걸까. 아니면 멋모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두서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사이먼에게서 또다시 메시지가 왔다.
―도대체 전화는 왜 안 받는 거야? 잠수 타는 거야? 다 끝장날 수 있으니까 빨리 사과하라고!
끝장이라는 말에 소정은 절로 황급히 메신저 대화방 섹션을 눌렀다. 사이먼, 새벽 재택 아르바이트 작업 그룹과 담당자, 갤러리 알바생들, 민규. 그 이름들 옆마다 뜬 빨간 동그라미를 보자 다시금 정신이 아득해졌다. 갤러리 사람들에게 오늘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왔다고 말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왜냐면 그 누구도, 집에서 하물며 원룸에서 스마트폰을 어떻게 잃어버리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때때로 소정의 스마트폰 찾기를 도와주는 민규도 처음엔 그게 가당키나 하냐고 했으니까. 소정은 집에서 스마트폰을 잃어버릴 수 있는 이유를 말하려면 언니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야만 했다.
소정은 언니에게서 온 메시지가 있는지 살폈다. 자신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끝끝내 핸드폰을 숨기게 만드는 언니였지만, 어쩐 일인지 언니에게선 아무런 메시지도 와 있지 않았다. 민규가 거친 숨을 내쉬며 달려와 다시 소정 곁에 앉았다.
“누나 뭐 먹을래? 초코파이? 후레쉬베리? 마가렛트?”
소정이 민규 손에 들린 과자 봉지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스페이스 디아워즈 탕비실에 있는 미국산 쿠키나 독일산 젤리와는 다른 종류였다.
“아무거나.”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운 말인 거 알지?”
민규가 마가렛트 포장지를 뜯어 소정에게 건넸다. 소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만. 나 할 것 좀 하고.”
“뭘 하려는데?”
“사과.”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민규가 큰 소리로 대꾸했다.
“왜? 누구한테? 잠깐만. 소정 누나. 나 좀 봐봐.”
민규에게 답하는 대신 소정은 마우스 위에 손을 올렸다. 아직 초가을인데도 겨울바람을 맞은 듯 떨렸다. 누구에게 먼저 사과할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박연경에게만큼은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소정은 리사와의 대화방을 더블클릭 했다.
1부
1장
이제는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순진하게도
지난겨울 끝쯤이었다. 언니가 흰 봉투를 소정에게 건넸다. 레스토랑 조명으로 봉투가 누렇게 보였다. 소정은 이게 뭐냐고 물었다. 일부러 더 과장되게 눈을 치켜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가슴 앞에서 조용히 두 손바닥을 마주 댔다. 사실 소정은 언니 현정이 주는 축하금이 든 봉투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언니는 은행 앱으로 송금하지 않고, 굳이 현금으로, 봉투를 두둑이 만들고자 만 원짜리로만 용돈을 주는 사람이었다.
“축하해, 스페이스 디아워즈에서 일하게 된 거.”
“고마워.”
“들어가기 힘든 곳인데 용케 해냈네.”
“그러게. 제대로 한번 근무해 봐야지.”
“그래. 서른씩이나 먹었으니까 이제 좀 열심히 해서 계약직에서 벗어나 봐라.”
소정은 봉투를 가방에 넣다가 멈칫했다. 나이를 들먹이는 언니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돈 앞이니 말을 삼켰다. 손을 꼼실거려 봉투 두께가 어느 정도인지 추측해 보았다. 평소보다 훨씬 두툼했다. 소정의 손이 봉투에 오래 머무는 걸 본 언니가 운을 뗐다.
“좀 더 넣었어. 오십 정도야.”
“뭐야. 감동.”
“나중에 도움 좀 달란 의미야. 알지?”
소정은 입을 닫고 가방에 봉투를 챙겨 넣었다. 무어라 대꾸하는 대신 웨이터를 불렀다. 파스타에 곁들여서 나오는 빵이 리필이 되느냐고 물었다. 며칠 뒤부터 스페이스 디아워즈에서 근무하게 된 자신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만난 자리기에 이 기쁨에 초를 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벌써부터 대놓고 도와달라는 언니 때문에 기분을 잡칠 필요는 없었다.
빵이 나오자 언니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었다. 소정은 언니를 빤히 바라봤다. 화이트 태닝을 받은 사람처럼 하얀 피부, 연지 곤지를 찍은 듯 양 볼에 하나씩 있는 점, 쌍꺼풀 없이 날렵한 눈(소정은 저 눈을 빼다 박은 자신의 눈이 싫어서 스무 살이 되자마자 쌍꺼풀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가는 팔목. 소정은 빵을 쥐고 있는 언니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소정이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녔을 당시만 해도 저 손은 늘 물감 범벅이었다. 대전에서 입시 미술을 하고 서울로 대학을 다녔던 언니는,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며 무주 본가에서까지 성질을 부리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유아용 칫솔을 미지근한 물에 적신 뒤 손을 닦아주었다. 언니는 그 지난한 과정 내내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고, 엄마는 행여나 예민한 첫째 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숨소리조차 죽여가며 손가락 사이사이를 문질렀다. 어린 소정은 콩나물을 다듬고 국밥 뚝배기를 나르느라 마디가 굵어지고 지문이 닳은 엄마 손을 화장실 밖에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화내지 마.”
엄마도 그때만큼은 부드럽게 말했다. 언니 손을 토닥였다.
“다 잘될 거야.”
엄마는 언니 손 위로 물을 부어주었다. 돌림노래처럼 잘될 거란 말만 되풀이하며 엄마는 언니의 손톱 밑까지 수건으로 꼼꼼히 정리해 주었다. 이제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 언니는 늘 누드 톤 젤네일을 고집했다. 유학원 영업을 핑계 삼아 주기적으로 리터치를 받는 모양이었다. 소정은 언니 손에서 보기 싫게 자라난 손톱이나 큐티클 따위는 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아닌 다른 이가 언니 손에 따뜻한 수건을 대주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왠지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저 손은 대체 무슨 복을 타고났길래 평생토록 유난스러운 보살핌을 받는 걸까.
“김소정, 너도 먹어. 빵, 손으로 찢어 먹어서 안 더러워.”
“됐어. 또 리필 하지 뭐. 언니 먹어.”
“계속 리필 하면 창피하잖아. 네가 얘기해.”
“언제는 네가 말했냐.”
신경질적으로 답한 소정은 다시 웨이터를 불렀다. 죄송하지만 한 번 더 빵 리필이 가능하냐는 소정의 물음에, 웨이터는 당연히 된다고 답했다. 이곳의 웨이터는 빵을 줄 때도 불쑥 테이블 위로 먼저 팔을 뻗지 않았다. 멀찍이서 고객의 대화가 끝날 시점을 기다렸다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음식을 올렸다. 코스 페이스도 잘 맞추고, 이전 요리 식기를 치울 때도 타이밍을 잘 맞췄다. 이 자리에서 대접받는 사람이 언니가 아닌 소정임을 아는지 소정 앞에 항상 먼저 접시를 내려놓았다. 다른 레스토랑에서는 받은 적 없는 고급 서비스 에티켓이었다.
소정은 빵을 주는 웨이터에게 고개를 몇 차례 꾸벅였다. 그때도 언니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처럼 스마트폰 화면만 바라보았다. 소정은 새로 받은 빵 접시를 자신 앞에 두었다. 웨이터가 가자 언니는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불순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야, 저 웨이터 너한테 관심 있나 보다. 번호 따.”
“뭔 소리야 도대체. 미쳤어?”
“아니 너 보면서 엄청 다정하게 웃잖아. 느낌이 와.”
답할 가치조차 없다고 느낀 소정은 빵을 들었다. 비스크 소스에 찍어서 조금씩 베어 먹었다. 갑각류 껍질과 내장의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풍미가 빵과 잘 어울렸다. 소정은 소스가 접시 바닥에 옅은 주황색 띠를 남기며 사라지는 모습을 응시했다. 조심스럽게 입안의 덩어리를 삼켰다. 맛에도 여러 레이어가 있다는 걸, 이런 게 좋은 음식이라는 걸 소정은 몸소 느꼈다. 언니 덕분에라도 이런 곳에 올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친구들과 다녔던 레스토랑―레스토랑이라 하기도 민망한 파스타집이었지만―에는 비스크 파스타나 리소토 같은 건 팔지 않았다. 소정은 빵을 먹으며 레스토랑 내부를 둘러보았다. 조그마한 펜던트 조명이 테이블마다 설치되어 있었고, 벽에는 벽지가 아닌 콘크리트 위에 바로 아이보리색 페인트를 바른 듯했다. 여기까지는 큰 차별점이 없는 인테리어일 수 있겠으나 서비스 응대를 비롯한 창틀, 이 창틀이 이 레스토랑의 티어를 나누는 요소였다.
흔한 스테인리스 창틀이 아닌 우드 창틀이었다. 이런 창틀은 가까이에 앉았을 때 더욱 안락함을 주기 마련이었다. 유지보수에 품이 많이 들어도 나무라는 클래식한 자재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곳의 격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정은 대학원의 전시 공간 연구 수업에서 그런 지식을 배웠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수업의 교수는 소정이 연구 조교라는 사실을 알고 소정에게 유독 더 많은 질문을 했다. 현재 오픈되어 있는 이 전시는 가보았느냐 해외 갤러리에 가본 적 있냐부터 시작해서 해당 갤러리만이 갖추고 있는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등을 주로 물어보았다. 소정은 수업 중에 질문을 받으면 곧장 노트북으로 검색해 보았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며 최대한 정확한 대답을 하려 노력했다. 교수가 하는 말은 항상 비슷했다.
“김소정 선생님, 거기 안 가보셨죠?”
소정은 교수에게 차마 가볼 여유가 없다고 답할 수 없었다. 대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표현을 골라 대답했다.
“빠른 시일 내에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정의 대답에 교수는 갤러리라는 공간은 직접 가봐야 한다고, 아울러 가까이서 인테리어와 작품 배치를 확인하고 느껴봐야 각 공간이 구현해 낸 아이덴티티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덴티티 갭을 통해 티어가 나눠지는 거죠.”
교수는 소정이 연구 조교인 만큼, 학교로부터 RA 장학금을 받으며 다니는 만큼, 갤러리에 더 자주 직접 가서 디벨럽된 리서치를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대놓고 했다. 우드와 내추럴 마블 등 클래식한 자재들이 관람객들에게 선사하는 신뢰성 등을 직접 경험해 봐야만 한다고도 덧붙였다.
“학기 중엔 연구하느라 당연히 바쁠 테고, 김소정 선생님을 비롯해서 모두 방학 중에 국내 갤러리 많이 다녀보세요. 해외는 어떤지도 한번 봐보고. 가까운 일본에 가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모두가 네, 라고 답했지만 소정만은 답할 수 없었다. 학비를 연구 조교 장학금으로 충당했지만 대출을 받아도 생활비는 늘 모자랐다. 방학은 물론 학기 중에도 과외 알바 등을 하느라 바빴다. 해외여행은 꿈도 못 꿨다. 소정은 대학원에서 예술경영학 석사 졸업장을 받을 때까지, 단 한 번도 해외에 나가지 못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언니가 소정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소정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눈빛을 보내자 언니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입을 뗐다.
“빵 다 안 먹을 거면 달라고. 애써 또 리필 해달라고 했는데 남기면 좀 그렇잖아. 센스 없게.”
소정은 화를 참기 위해 유리잔을 들었다. 레몬 조각과 민트가 들어 있는 물을 마시려 잔을 기울이자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청량한 소리를 들으며 소정은 따지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센스는 네가 더 없으면서 무슨. 물을 한 모금 삼킨 소정은 조곤조곤 말했다.
“나 먹으려고 남겨둔 거야.”
“뭐야. 그럼 빨리 먹든가.”
언니는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다시 스마트폰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소정은 저럴 거면 왜 함께 밥을 먹자고 하는지 따져 생각하다가, 그래도 돈 꽤 버는 언니 덕에 가끔 용돈도 받고 좋은 레스토랑에도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고맙게 여기자고 속으로 되뇌었다.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언니가 물었다.
“그나저나 너 요즘에 뭐가 핫한 줄 알아?”
소정은 당연하다는 듯 새벽 재택 아르바이트로 본 것들을 말해주었다. 물건은 무엇, 장소는 어디, 드라마는 어떤 작품, 연예인은 누구 등등. 이 모두가 새벽에 빅데이터 수집 필터링 아르바이트를 하며 얻은 잡지식이었다. 언니가 소정을 오래 응시했다. 그제야 소정은 언니가 레스토랑 내에서 저녁 식사 내내 자신을 거의 똑바로 바라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너 그 아르바이트 계속하는구나? 트렌드 리서치 빅데이터 회사인가 뭔가에서 하는 거.”
소정이 그렇다고 하자, 언니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한쪽으로 살짝 기울인 고개를 끄덕였다. 딱 소정이 싫어하는 모습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왜 그런 얼굴인데?”
“뭐가.”
“언니 지금 완전 똥 씹은 표정이잖아.”
언니는 남은 빵을 입안에 마저 넣은 후 오물거렸다. 한참 후에야 입을 뗐다. 이번 식사가 유달리 플레이팅이 별로였던 듯하다며 그래서 음식 사진을 안 찍었다면서. 클라이언트들과도 가끔 식사하러 오는 곳인데 이런 퀄리티가 지속되면 다음에는 오기 힘들 것 같다고 유난을 떨었다.
소정은 언니가 차분해졌다는 걸 알아챘다. 이따금 언니가 이상한 부분에서 고요한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평소에는 직설적으로 다 얘기하면서, 유독 직업이나 일 관련 훈수를 둘 때만큼은 가만히 있었다. 그럼 소정은 어쩔 수 없이 언니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긴장해야만 했다. 언니도 그런 소정을 분명 알고 있을 터였다. 언니가 물었다.
“아니, 알바랑 병행하면서까지 굳이 거기 붙어 있어야 하는 거야?”
거기. 거기는 미술계를, 문화예술계를 뜻했다.
소정은 자신이 전전했던 회사들을 떠올렸다. 그곳에서의 직책들을 기억했다. 회화 복제품 판매 업체 인턴, 구 단위 문화재단 휴직 대체 단기 계약직. 그림 곁에 머물고자 선택한 길이었지만 하나같이 실물 그림과는 먼 업무만 담당했어야 했다.
복제품 회사에서는 종일 인터넷을 뒤져 명화 고화질 이미지를 스크랩했다. 복제 전문가가 쉽게 따라 그릴 수 있는 디지털 그림을 넘겨주어야 했다. 그곳에서의 업무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합법적인 모작 업무 보조 정도. 그 외에 엑셀 시트에 어투만 바꿔 상품에 만족한다는 후기들도 작성했다. 소정이 그림을 그렸다고 얘기했을 때 그곳 직원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던가.
“원래 늦바람 든 사람이 괜히 로맨틱하지.”
소정의 순진한 열정을 비웃던 MD 얼굴이 아직도 선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던 40대 초반의 남자. 덥수룩한 수염과 뿔테 안경. 소정은 그 수염이 싫었다. 가끔가다 꼬불거리는 털을 사무실 바닥에서 발견할 때면, 그게 분명 MD의 수염인 걸 알면서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소정은 인턴 계약 만료 후 그 털을 보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 후 구 단위 문화재단에 전시 기획자 대체 단기 계약직으로 입사했지만, 기획은커녕 온종일 프로그램 수강생들의 앱 출석 오류 민원만 받아내야 했다. 그곳에서 배운 것 중 최고는 문화재단 정규직이 되려면 최소 3년의 재단 계약직 기간과 석박사 학위가 필요하다는 정보였다. 소정에게는 오랜 기간 동안 계약직으로 재단을 전전할 용기도, 박사까지 할 패기도 없었다.
소정은 다시 취업 준비를 하며, 그토록 염원하는 갤러리는 여태 근무했던 곳과 다를 거라는 기대를 품었다.
“뭘 걱정하는 건데? 알바를 병행해서 힘들까 봐 그러는 거야, 아니면 내가 굳이 굳이 거기 있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야?”
소정은 언니에게 ‘거기’를 말하면서 브이 자를 만든 손가락을 몇 번 구부렸다가 폈다. 언니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테이블 위에 포크를 집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접시를 뒤적였다.
“여동생들은 대부분 그런다더라. 꼭 언니 따라 하고 쫓아다닌대. 나이 들어도, 심지어 각자 가정을 꾸려도 안 변한다잖니.”
“내가 언제 따라 했다고 그래?”
“내가 그림 그리니까 너도 하고 싶어 한 거잖아.”
소정이 기가 찬 듯 웃었다.
“그렇게 치면 언니 일곱 살 때 내가 태어난 거니까, 언니 밥 먹는 거 보고 따라 하고 싶어서 나도 밥 먹기 시작한 거네?”
“좀 그런 편이긴 했어. 분유 먹어야 하는데 내 숟가락 뺏어가고.”
소정은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언니에게 더 말을 붙였다가는 말싸움으로 번질 듯했다. 야, 김소정. 언니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소정이 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왜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그냥 심심하잖아.”
“너 그거 병이야, 병. 나한테도 전화 그만 걸어. 내가 언니 때문에 하다 하다…….”
그만하라는 듯 소정에게 손바닥을 내보인 언니가 스마트폰을 귀에 댔다. 엄마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어, 엄마. 응, 올챙이랑 같이 있지. 응, 내가 알아서 비싼 거 다 사줬어. 소정은 언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바꿔줘?”
언니의 물음에 소정이 고개를 저었다.
“올챙이가 전화하기 싫대.”
언니가 엄마에게 말했다. 소정이 언제 자신이 싫다 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니는 들은 체 만 체하며 엄마와 마저 통화했다. 언니는 아직도 개구리와 올챙이, 라는 말을 쓰는 건가. 그건 어릴 적에 엄마가 언니와 소정을 불렀던 애칭이자 별칭이었다. 소정은 언니가 대학에 간 이후 단 한 번도 언니를 개구리라 부른 적이 없었다. 개구리와 올챙이는 너무 친한 자매 같으니까. 언니는 이따 또 걸겠다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언니가 마저 말을 이었다.
“네가 이번 갤러리 붙기 전에 다녔던 곳 중에서는 난 문화재단이 제일 나았던 듯해.”
언니의 누드 톤 네일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왜? 내가 언니 대신 추천서 받아줄 사람이 많았어서?”
소정이 비꼬듯 되물었다. 언니에게 한 방 먹이고자 한 말이었지만 정작 언니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응. 너 근데 그거 알아야 한다. 유학원에서 나처럼 제대로 된 추천서 받으려는 사람 별로 없어. 다 사인까지 조작하지. 나는 그래도 최소한의 윤리의식을 갖고 일하는 거야.”
언니는 곧이어 소정에게 커피나 티를 레스토랑에서 마실지, 밖의 카페에서 마실지 물었다. 소정은 여기서 해결하고 헤어지자고 했다. 밖에서 마시면 괜히 더 오래 언니와 붙어 있어야 할 듯했다. 그리고 여기서 커피까지 해결하면 언니가 커피값까지 계산할 게 분명했다.
“언니는 티 마실 거지?”
“응. 늘 마시던 걸로 주문해.”
소정은 언니를 대신하여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한 잔과 블렌딩 화이트 티 한 잔을 시켰다. 무엇이 우스운지 언니가 혼자 피식 웃었다.
“야, 요즘 애들은 아예 대학 진학할 때부터 문화재단 생각한다더라? 그래서 너한테 물어봤던 거야. 넌 고작 추천서 한 장 겨우겨우 받아줬지만.”
고작이라니. 소정이 언니를 노려봤다. 일부러 큰 소리로 되받아쳤다.
“문화재단 노리는 게 뭐 어때서?”
“뭐가 어떻긴. 하여간에 요즘 애들은 너무 극단적이야. 허구한 날 붓만 붙잡고 있거나 아니면 그냥 붓 잡는 척만 하고 있거나.”
“그럼 언니는 도대체 뭔데?”
소정은 자신도 모르게 언니에게 성질을 버럭 내버렸다. 언니의 저 말이 분명 자신을 향한 화살이라 여겼기에.
“난 뭣도 아니지. 정 고르라면 모든 곳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
이혼도 했으니까. 소정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언니가 낯설었다. 언니와 대놓고 그림 그리는 얘기를 하는 것도, 언니의 지난 결혼에 대해 말하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기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더욱 알 수 없었다. 언니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여서 더 입을 다물었다. 언제부터 언니가 저렇게 편히 스스로를 그림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고 말하게 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소정은 아직 남들에게 그림 그리기를 포기했다고 쉽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림 그리기를 포기한 일을 제외하면, 소정에게 가장 쓰라린 경험은 회화 복제품 판매 업체도 아니고 문화재단에서도 아닌, 몇 달 전까지 다녔던 미술 잡지사에서 일어났다.
약 1년 반 전, 소정은 인턴으로 근무하던 중 처음이자 유일한 계약직 전환 제안을 미술 잡지사에서 받고 밤잠을 설쳤다. 인사 담당자는 메일로 아주 정중하게 ‘김소정 님의 실력이 출중해 기획팀에 계약직으로나마 채용하고 싶다’고 했다. 향후 정규직 전환까지 고려한 제안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먼저 소정은 미술 잡지사에서 인턴으로 3개월 동안 일했다. 그동안 이런 곳이라면 갤러리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꿈을 잠시 접어도 괜찮겠다고 여겼다. 취재를 위해 에디터와 전시회에 많이 갔고, 갤러리 사람들이 잡지사 직원을 극진히 챙겨주며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라고 초대권도 주었기 때문이었다. 기획 회의 때마다 에디터들이 열띤 토론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태껏 일했던 그 어느 곳보다 미술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여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소정은 인턴 동기였던 현우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현우는 점심시간마다 소정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가끔은 그럴 만한 인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서울대 철학과와 미학과를 복수전공 한 인재니까. 사람들이 보기에 누구보다 똑똑해 보이는 사람이니까. 어떤 일이든 열중하는 놈이니까. 소정은 자신이 그래도 이름 없는 대학에 다니진 않았다고 여겼는데 현우 앞에서는 괜히 더 작아졌다.
“소정 누나는 세상 살기가 힘든 걸 알긴 하는 거지?”
“뭐래. 나도 인턴 열심히 사는 중이거든?”
“내가 봤을 때 누나는 석사 학위만 믿는 사람 같아. 인턴이라도 정규직처럼 일해야지.”
점심 먹은 게 얹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지난 경험에 비춰봤을 때 인턴은 인턴답게 그저 시키는 것만 조용히 해내면 되었다. 그게 뭐 잘못되었나. 소정은 명치를 두드렸다. 처음 써보는 회사 메일, 회사 메신저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사수가 시키는 자료를 프린트하고, 커피 심부름을 하고, 회의록을 기록하고, 취재현장에 따라가고, 인쇄소에 가서 여러 종이를 만져보고, 인쇄 감리를 보고. 더 이상 어떻게 뭘 정규직처럼 일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현우가 말한 석사 학위만 믿는다는 말도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연구 조교를 한 덕분에 국내 학술지에 논문을 두 개 정도 게재했지만, 다른 랩실 사람 중에는 서너 개 실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해외 학술지에까지 척척 논문을 실은 이도 있었다. 그들은 바로 관련 국가기관에 취직했다. 소문에 의하면 해외 대학에서 박사 오퍼가 들어온 이들도 꽤 있다고 했다. 세부 전공이 전시가 아니었기에, 소정은 그들의 행보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점점 정규직 자리에서 멀어지자 소정은 자신도 해외 학술지에 실을 논문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랩실 동기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동기들은 최근 들어 해외 학술지에 논문을 실은 이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현우에게서 시선을 거둔 소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현우의 말을 아예 부정할 수는 없었다. 더 오래 그림 곁에 있어 보고자 대학원에 갔으니까. 소정이 눈가를 비볐다. 현우처럼 졸업한 대학의 이름만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애는 일부러 더 공부해 석사 졸업증을 받으려는 이유를, 국내외 학술지 논문을 써 스펙에 한 줄이라도 더 채워 넣으려는 노력을 모를 것이었다.
계약직 전환 권유를 받고 며칠이 흘렀다. 뒤늦게서야 소정은 계약직 전환 제안을 받은 이가 자신만이 아니란 걸 알았다. 면담 자리에서 인사 담당자는 소정을 앞에 두고 현우와 소정 모두 다 인턴 기간 내내 큰 도움을 줬기에 제안하는 것이라 했다. 담당자는 소정에게 서류봉투를 건네면서 고민 후 답을 달라고 했다.
소정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연봉이 적힌 계약서가 있었다. 1년간 세전 월 230만 원을 받아야 했다. 소정은 순간, 과연 현우도 같은 조건으로 제안받았을지 궁금해졌다.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사고일 수도 있으나 왠지 현우라면 더 많은 연봉을 받을 것만 같았다.
새벽 재택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니 계약직도 괜찮으리라 여긴 소정은 바로 계약서에 서명했다. 얼마 후 현우도 계약직으로 전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소정은 계약직으로 일하며 인턴 때와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다른 잡지사의 기사를 스크랩해 거의 매일 사내 게시판에 올렸다. 해외에서 열리는 전시 관련 기사들도 스크랩하고 번역기를 돌리고 윤문한 뒤 공유하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라도 성실함이 쌓이면 언젠가 표가 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절대평가보다 상대평가를 신뢰하는 사회에서 소정의 노력은 늘 어딘가 모자란 듯 보였다. 누구도 대놓고 뭐라 하지 않았지만 소정은 현우와 스스로를 자꾸 비교하게 되었다. 성실함은 저울질 속에서 점점 희미해졌다. 계약직 전환 후 약 2개월이 지났을 때쯤, 현우가 작은 잡지사의 미술평론 부문에서 당선되었다고 했다. 가끔 소정의 게시글에 ‘잘 읽겠습니다’라는 답글을 달고 정말 가끔 소정에게 고생이 많다고 말해주었던 정직원들은 현우를 위해 선뜻 축하 회식 자리를 마련했다. 이 회사에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사람은 편집장과 피처 에디터뿐이라며 현우를 치켜세워 주기도 했다.
소정은 진심으로 현우의 수상 소식을 축하했다. 동시에 고민했다. 나에게도 저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이곳에서도, 다른 어느 곳에서도 쉽지 않을 듯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불리는 이름은 늘 몇 개로 한정되어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현우를 위해 박수 치는 이들을 둘러보며 소정은 깨달았다. 저들 대부분 역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지만, 쉽게 축하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소정도 그들을 따라 조용히 박수 쳤다.
현우가 소셜미디어 에디터 자리를 얻은 것은 바로 그 수상 덕분이었다. 소정은 미술 잡지사에서 인터뷰를 위한 작가 섭외를 주로 담당했다. 원래 소정과 같은 일을 하던 현우는 그 계기로 소셜미디어 막내 에디터 자리를 꿰찼다. 미술 잡지사 소셜미디어에 갤러리 전시 내용 외에도 굿즈나 도록 관련 코멘트도 업로드했다. 현우는 종종 소정에게 사내 메신저로 자기도 소셜미디어가 아니라 종이 잡지를 다루고 싶다는 푸념 섞인 메시지를 보냈다. 그럼 소정은 이렇게 답했다.
―배부른 소리 그만하시지요?
마시던 티를 내려놓고는 언니가 말했다.
“내가 꿀팁 알려줄까?”
소정이 커피를 마시다 말고 언니를 살폈다. 언니는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는 눈빛을 보내며 소정에게 가까이 와보라는 식으로 손짓했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소정은 마주 앉은 언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언니가 작게 속삭였다.
“중요한 자리에서는 티를 마셔.”
소정이 코웃음 치며 다시 등받이에 기댔다. 쓸데없는 얘기를 잘도 포장한다고 대꾸했다.
“그게 다 능력이지 뭐. 여튼, 특히 평소에 보기 힘든 종류의 티를 골라 마시면 좀 사람이 고급져 보여.”
“언니 말은 되게 안 고급져 보여.”
“너한테 잘 보일 필요는 없잖아?”
언니는 둥근 머그잔을 들었다. 멀리서 보면 뭉친 눈을 들고 있는 듯이 보일 것 같았다. 그런 언니를 보고 있자니 언니와 무주에서, 본가에서 눈싸움했던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소정이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을 때까지만 언니는 소정과 그렇게 놀아주었다. 소정은 입시 미술을 한다고 온갖 생색을 부리던 언니에게 힘껏 눈 뭉치를 던지곤 했다. 소정보다 일곱 살이나 많으면서 언니는 지지 않고 소정에게 똑같이 눈을 던졌다. 소정이 퍽 소리가 나도록 눈에 맞아 아프다고 고함쳐도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언니가 다시 입을 뗐다.
“아 참, 나 인생 최고 몸무게 찍었다.”
“그래 봤자 50킬로 넘냐?”
“어. 진짜 50 넘었어. 53이야.”
“50은 뭐 성인이면 다 넘는 거긴 한데…… 엄청 찌긴 했다. 언니 원래 되게 말랐잖아. 살도 안 찌고.”
“그러니까. 근데 찌니까 체력이 생겼는지 덜 피곤한 거 같기도 해.”
소정이 언니를 살폈다. 나쁘지 않아 보였다. 살이 붙어 언니의 인상이 더 좋아 보이는 걸 수도 있었다.
“지금 제일 괜찮아 보여. 잘 먹으면서 계속 유지해.”
언니를 걱정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소정의 얼굴이 순간 달아올랐다.
계약직 종료 몇 달 전, 미술 잡지사에서 소정과 현우에게 정규직 제안도 했다. 이번에는 계약직 전환 때와 달리 과제가 있을 것이라 했다. 과제는 각자가 배정받은 작가로 전시를 시뮬레이션해 보는 것이었다. 잡지 속 ‘갤러리 뉴 인사이트 ― 관람객의 시선으로’라는 섹션에 들어갈 글도 한번 작성해 보라 일렀다. 소정과 현우는 공평하게 한국 작가를 맡게 되었다. 현우가 맡은 ‘정현’은 철근, 콜타르, 잡석 등으로 조각하는 이였다. 소정은 ‘조기석’을 맡았는데, 인물과 자연물을 결합하여 환상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만드는 사진작가였다.
소정은 조기석 작가의 작품을 보며, 자신이 실은 정규직 내정자가 아닐지 생각했다. 사진은 2차원 프린트물이었기에 3차원의 조각물보다 배치 부분에서 쉬우리라 여겼다. 또 정현 작가의 작품은 현대 추상 조각에 가깝기에 해석이 많이 필요했다. 이미 유명한 작가라서 새로운 코멘트를 내놓기도 어려울 수 있었다. 소정은 현우를 어찌어찌 잘 처리한다면 자신이 정규직 전환에 성공하리라 확신했다.
그 기대는 정규직 전환 과제 발표 날에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그날, 현우는 3D 도면 프로그램인 캐드(CAD)를 써서 전시장을 구현해 왔다. 회의실 빔프로젝터가 켜지고 현우가 마우스를 가볍게 클릭하는 순간, 소정은 자신의 몫이라 믿었던 정규직 자리가 멀어지는 걸 느꼈다. 화면 속 가상의 전시장 위로 매끄럽게 조명이 떨어졌다. 블랙 톤으로 마감된 전시장에 스포트라이트를 쏴서 안 그래도 복잡미묘해 보이는 작품이 더 오묘하게 보였다. 현우가 마우스 휠을 굴릴 때마다 관람객의 시선에 맞춘 동선이 유려하게 시뮬레이션되었다. 티 하나 없이 깔끔하고 세련된 모양새였다.
소정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자신의 거대한 폼보드 모형으로 시선을 옮겼다. 발표 전날 새벽까지 원룸 바닥에 쪼그려 앉아 우드록 본드 냄새를 맡아가며 손수 만든 것이었다. 커터 칼에 베인 손가락에는 반창고가 감겨 있었다. 출근길 지옥철에서 행여나 부서질까 봐 일부러 택시까지 타고, 진땀을 빼며 가져온 모형이 현우의 매끄러운 디지털 도면 앞에서는 조악해 보였다. 소정은 모형 바닥에 미세하게 삐져나온 접착제 자국을 손톱으로 떼어냈다. 현우가 도대체 어디서 캐드를 배운 것인지, 그걸로 어떻게 갤러리 전경을 구현할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이 업계에서 안목 있는 사람에 칭찬으로 하는 말인 ‘눈 배짱’까지 현우가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정은 자신이 1등이 될 수 없음을 알아챘다. 폼보드로 만든 거대한 전시장 모형을 숨기고 싶었다. 모델링 페이스트를 얇게 펴 발라 캔버스 같은 질감을 낸 뒤, 페릴렌 바이올렛과 프탈로 그린 물감을 스펀지로 수없이 두드려 입힌 벽면. 단순한 생각으로 벽을 마구 칠한 게 아니었다. 그 방식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리라 믿었다. 조기석의 식물 사진을 비정형 타일로 조각내어 깐 바닥은 어떠한가. 유광 겔 미디엄을 두껍게 발라 빛이 나도록 의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형 바닥은 회의실 조명 아래서 기괴하게 반짝거렸다.
자신이 만든 전시장은 공간을 품는 그릇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날이 잔뜩 선 에너지를 뿜어내는 거대한 조각품 같았다. 그러데이션 벽면과 반짝이는 바닥 위에서는 조기석의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그 어떤 예술 작품도 관람객의 시선을 끌 수 없을 듯했다. 현우가 제작해 온 전시 모형도를 보니, 자신의 문제점이 보였다. 역시나 힘을 빼야만 했다.
소정 쌤, 힘 좀 빼면 바로 데뷔할 거 같은데?
소정은 미술 대전 같은 공모전을 준비할 때 습작생 동료들이 자신에게 수없이 조언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수는 현우 작품에 관해 길게 코멘트한 후, 소정의 전시장 모형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으음, 소리도 냈다. 깔끔하게 만들려고 노력한 폼보드 마감 같은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근데 과제가 작품이 들어갈 전시장 만드는 거지, 작품으로써의 전시장을 만드는 게 아닌데.”
사수의 말을 들은 순간, 소정은 모형 바닥에 조각나 흩어진 것이 조기석의 사진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인 것만 같았다. 사수는 한참 동안 모형을 바라보기만 했다. 드디어 입을 뗐을 땐, 약간 포인트를 벗어나긴 했지만 무언가 창작하려는 열정이 보여서 좋다고 했다.
“이거 보니까 소정 씨는 직접 작품 만드는 게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응, 뭔가 느낌 있어.”
소정은 사수의 말이 비아냥이 아님을 느꼈다. 너무나도 진심 어린 피드백이었다. 그게 더 뼈아프게 다가왔다. 이젠 애매한 작품 만들기가 아닌, 작품이 놓일 전시 기획을 제대로 하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은 듯했다. 소정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사수는 자기가 제일 눈여겨본 작품이 전시장 내에 배치되어 반갑다는 식의 입에 발린 말을 했다. 소정과 현우가 써온 글은 나중에 읽어보겠다고 말했으나, 실제 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3주 뒤, 소정은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 연장을 제안받았다. 계약직 연장 계약서에도 최종 과제 검토 후 정규직 전환 가능이란 멘트가 있었다. 소정은 그 말이 주는 막연한 희망에 더는 기대를 걸 수 없었다. 정규직으로 제대로 근무할 수 없는 곳이 아니라면, 적어도 실물 그림 곁에서 근무할 수 있는 갤러리에 계약직으로라도 계속 입사 지원을 하는 편이 나았다.
계약직 연장 오퍼를 똑같이 받은 현우 역시 잡지사에 남지 않겠다고 했다. 몇 달 후에 그는 소정에게 대기업 메세나 부서에 취직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소정은 답장하지 않았다. 그렇게 현우와 연락이 끊겼다.
언니가 찻잔을 움직일 때마다 향긋한 화이트 티 냄새가 테이블 위로 은은하게 번져왔다.
“소정아, 기분 나빠 하지 말고 들어. 아까 한 말 이어서 해보자면, 난 네가 계속 거기 일 하는 거 별로야. 그림이 밥 먹여주니? 돈 벌어야지.”
언니의 말에 소정은 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어릴 때처럼 언니에게 뭐라도 던지고 싶기까지 했다. 저 고집쟁이. 자기밖에 모르는 성격은 절대 변하지 않는구나, 생각하면서. 언니가 말을 이었다.
“그냥 편한 데서 일해.”
소정은 어린 날 언니가 던진 눈 뭉치에 맞은 그 차가움을 느꼈다. 얼굴이 얼얼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눈싸움을 하니까 눈에 맞는 게 당연하긴 한데 어딘가 억울한 기분. 언니가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 그럼에도 입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느낌.
“김현정 씨. 저 당신 때문에 그림 못 그렸어요. 알죠?”
“이게 진짜 자꾸 누구한테 핑계를 돌려?”
“핑계?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웬 핑계?”
“그래, 너 그냥 그 잘난 네 자격지심에 평생 잡아먹혀라.”
언니는 질렸다는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소정은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언니가 카운터에 들르자 비로소 조금 안도했다. 계산을 안 하고 갈까 봐 조마조마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갑자기 너무나도 싫어졌다.
소정은 의자에 걸친 코트를 입었다. 언니가 남긴 티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쌉싸름한 티를 음미하며 앞으로 스페이스 디아워즈에서 일하니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순진하게도.
티의 끝맛이 영 개운하지 못했다.
2장
궁금하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
여린 털이 삐죽 난 아기 새 같은 꽃봉오리에서 새하얀 날개를 닮은 목련이 서서히 돋아날 때쯤, 소정은 스페이스 디아워즈에 입사했다. 그곳에 입사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하나, 그토록 원했던 갤러리에 1년이어도 계약직으로 근무할 수 있다는 점(계약 연장을 하게 될 수도 있었고, 어쩌면 정규직으로 전환도 가능했다). 둘, 최근 설치미술과 미디어아트, 사진 등이 인기라지만 스페이스 디아워즈는 추상 회화로만 갤러리를 운영한다는 점(소정은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기에 회화 갤러리에 입사하고 싶었다). 셋, 이게 가장 중요했는데 갤러리계의 이단아인 정도현이 기획팀장으로 있다는 점(업계에서는 그녀를 이단아라고 불렀다. 틀을 깨는 이력과 기획 방식을 가졌음에도 뛰어난 세일즈 실적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소정은 정도현의 보도 자료를 캡처 해놓을 정도로 그녀를 존경했다. 보도 자료 이미지 속 그녀는, 그러니까 검은색 긴 생머리와 스모키화장, 그리고 실버 메탈 네일을 한 그녀는 전사와 다름없었다.
소정은 스페이스 디아워즈에 계약직으로 다시 발을 디딜 수 있어 기뻤다. 기쁨도 잠시. 몇 년 전 미술 대전을 준비하며 방문했을 때보다도, 그보다 더 몇 년 전인 대학생 때 처음 왔을 때보다도, 더욱 텅 빈 이젤 앞에 선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기획팀에서 무언가를 해내고자 하는 기대와 해내야만 한다는 압박. 그 때문이리라.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도착한 스페이스 디아워즈는 북촌 골목 안쪽의 새하얀 4층짜리 건물 1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갤러리 입구와 매표소, 인포 데스크 부근은 오프화이트 유광 타일이 깔려 있었고, 주백색의 조명이 그 위에서 은은한 윤기를 흘리고 있었다. 타일이 끝나는 지점부터 소정은 비로소 전시장 안으로 들어선다고 실감했다. 미세하게 서늘한 공기와 발소리를 삼키는 바닥, 그리고 관람객들의 지나치게 깨끗한 정적.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갤러리 홈페이지 속 사진들보다도, 스페이스 디아워즈는 더 무결했다.
대학원 시절이 절로 떠올랐다. 소정은 수업이 끝나면 종종 북촌 갤러리를 돌았다. 전시를 보기 위함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전시장을 돌아다니는 직원들을 보기 위해서. 빳빳한 셔츠를 입은 채 작품 설명을 하고, 컬렉터와 인사하고, 이리저리 전시장을 누비던 이들. 그 몸짓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떤 위화감도 없어서 회화 옆에 서 있는 직원들 모습 자체가 작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정은 그들을 보며 자신도 저렇게 될 수 있을지를 상상했다. 그때도 텅 빈 이젤 앞에 선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소정은 스페이스 디아워즈에 직원으로서 들어가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인사재무팀장인 톰의 안내를 받아 갤러리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페인트로 마감된 벽에는 ‘션 스컬리’ 작품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었다. 간간이 의도적으로 호흡을 흐트러뜨린 듯한 배치도 눈에 띄었다. 한 작품에 시선을 한 번 멈추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소정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살폈다. 레일에 달린 핀 포인트 조명이 두꺼운 붓 터치가 담긴 추상 회화 위에 정확히 빛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자 몇몇 작품 캡션에 붙은 파란색 스티커가 보였다. 이미 솔드 아웃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코발트블루. 작품보다 그 색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그 쨍한 스티커를 살피며 소정은 몇 년 전 굳게 다짐했던 바를 다시금 상기했다.
매일 회화를 그릴 창작자가 될 깜냥이 안된다면, 매일 회화를 볼 수 있는 전시 기획자가 되고 말겠다는 그 다짐.
■ 이어서 계속
[참고문헌]
Macke (1993). TASCHEN.
박현진 (2024). 『예술가의 속삭임을 관람객에게 들려주는 미술관 큐레이터』. 토크쇼.
비앙카 보스커 (2025).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오윤성 역). 알에이치코리아.
The History of Art. "August Macke Quotes". https://www.thehistoryofart.org/august-macke/qu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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