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니치 미치(2회)
- 작성일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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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니치 미치
이상하
톰은 구석의 상설 전시 섹션까지 걸어갔다. 매립형 오목 손잡이가 있는 곳에 멈췄다. 벽에 웬 손잡이인가, 싶어서 소정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얀 벽에는 슬쩍 봐서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완벽하게 숨겨진 문이 있었다. 톰이 문을 열었다. 커피 냄새가 안쪽에서부터 훅 끼쳐왔다. 향긋한 커피 향이 아닌 커피 찌든 내. 소정이 카페 마감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맡았던, 젖은 원두 찌꺼기에서 올라오는 곰팡이 냄새.
문 너머 사무실 가장 끝 쪽에는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있었다. 톰은 소정에게 손짓하며 테이블 근처 의자에 앉으라 했다. 소정은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의자를 빼며, 기획팀장인 정도현이 어디 있는지 살폈다. 눈이 자연스레 마흔 즈음으로 보이는 여성에게 갔다.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여자. 얼핏 보면 삼십 대 중반처럼 보일 정도로 젊고 수수한 차림새였다. 소정은 정도현이 40대 중반인 점을 상기하며, 인터뷰 때 스모키화장을 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저 여자가 정도현이 맞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실버 메탈 네일을 한 손가락 쪽으로 시선이 닿았다. 그 네일을 보고서야 알았다.
정도현이었다.
정도현은 보도 자료나 유튜브 영상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차분해 보였다. 하지만 네일만큼은 인터뷰 이미지 때보다 더 날카롭게, 그러니까 라운디드 셰이프였던 것이 스틸레토 형태로 뾰족하게 바뀌어 있었다. 업계에서는 정도현을 두고 여러 말을 주고받았다. 그녀가 추상주의에 일가견이 있다는 이들도 있었고 작품보다 세일즈에 집착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아트페어 티켓팅 알바생에서부터 시작해 놓고선.
마지막 말은 항상 비슷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빈도가 늘어갈수록 소정은 더 정도현에게 관심을 가졌다. 이곳은 아무도 돈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그 어디보다 매출을 중요시하는 업계였다. 인터뷰 속 정도현은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갤러리의 소명은 작품을 파는 것이라고, 그래야 작가도 산다고 말했다. 자신이 경영학과 출신이기에 예술, 언론, 인문 계열이 많은 이쪽에서 오히려 빛이 나는 게 아니겠냐고 인터뷰어에게 되묻기도 했다. 소정은 정도현의 당돌함이 부러웠다.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사람이어서일까. 소정은 정도현과 실제 친분을 쌓고 싶었다. 인간으로서의 정도현이 궁금했다. 그녀와 친해지면 자신도 정도현처럼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소정은 정도현을 알아보지 못한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톰은 면접 때까지만 해도 스페이스 디아워즈의 전시 빈도를 높이고 고객을 더 많이 부르기 위한 장기목표를 이루려고 기획팀 계약직을 뽑게 되었다고 했지만, 원형 테이블에서는 총무팀 팀장(팀장이라 불렸지만 해당 팀엔 한 명밖에 없었다)이 육아휴직을 냈기 때문에 여러모로 인원 충원이 필요했다고 말을 바꾸었다. 소정은 당황한 티를 애써 숨긴 채 잠자코 듣기만 했다. 갤러리에서 일할 기회 자체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되새기며, 기획팀 일만 하길 바라는 건 욕심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넵, 이라고 답했다.
“뭐 그렇다고 꼭 총무팀 일만 하는 건 당연히 아니죠. 기획팀 업무가 전반일 거예요.”
전반. 전반이 어느 정도를 뜻하는 것일까. 소정은 제대로 된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또다시 넵, 이라 대답했다. 페이퍼를 보며 톰이 이렇게 말했다.
“김소정 님은 개근상을 놓치지 않았던 사람일 것 같네요.”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인사 담당이니까 사람을 보면 딱 알죠. 개근상 타입인지 장기자랑 대상 타입인지.”
소정이 조심스레 톰의 얼굴을 살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톰의 각진 턱이 좌우로 조금씩 움직였다. 소정은 시선을 옮겨 명품 브랜드 로고가 조그맣게 새겨진 검은색 뿔테 안경과 깨끗하게 민 스킨헤드를 바라보았다. 톰이 입고 있는 청록색 니트에는 보풀 하나 없었다. 고급 캐시미어인 듯했다. 꾸민 티는 나지 않는데 묘하게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소정은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무신사에서 저렴하게 구매한 검은색 로퍼. 톰이 고개를 들며 소정에게 사내에서 쓸 영어 이름을 정했는지 물었다.
“우린 영어 이름 쓰거든요. 피스 오너들이랑 커뮤니케이션할 일이 많아서.”
“케이로 하겠습니다.”
“스펠링은?”
“K, E, I입니다.”
톰은 K까지 적은 손을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 그리곤 노란색 보디를 가진 BIC 볼펜을 한 번 돌렸다.
“좀 촌스러운데? 다른 스펠링 생각한 거 없어요?”
“아직 없는데…… 찾아보겠습니다.”
“나도 톰 T, O, M 아니에요. T, H, O, M이라고.”
니치하게 만들어야지. 톰이 소정을 보며 거들먹거렸다. 소정은 TOM과 THOM의 차이를 잘 알지 못했지만 이해한 척하며 톰을 향해 웃어 보였다. 톰은 왠지 개근상 타입이 아닌 장기자랑 대상 타입을 더 선호하는 인물인 듯했다.
“내가 한번 검색해 볼게요.”
톰은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 앱에 무언가를 열심히 타이핑했다. 소정은 Kaye라는 영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톰은 총무팀에게 인수인계받은 내역을 소정에게 공유하며 그 업무를 그와 소정이 나눠서 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말이 좋아 나누는 거지 리스트를 확인해 보니 소정이 총무팀 업무 대부분을 맡아서 해야만 했다. 우편물 확인하기, MD 재고 체크, VIP 메일링 체크, 전시 프리 오픈 물품 체크, 매표소 업무 및 여러 아르바이트생 관리하기, 아웃소싱 업체와 커뮤니케이션 등.
소정은 업무 리스트를 보며 이 일을 총무 쪽에서 했던 게 맞나 싶었다. 기획이나 재무 쪽에서 해야 하는 일들도 포함되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정직원이 대표 포함 일곱 명인 곳이기에 모두가 업무를 일당백으로 하는 것 같았다. 소정은 당장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자신이 급여 담당 아웃소싱 업체 직원보다도 못한 계약직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아웃소싱 업체 직원은 벌써 스페이스 디아워즈와 일을 8년이나 했다고 했다. 그러니 소정은 범접할 수도 없는 사회생활 고참 선배였던 것이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낫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톰이 소정에게 물었다.
“그리고 노트북 가지고 왔죠?”
“네, 혹시 몰라 제 거 가지고 왔습니다.”
“잘 돌아가죠?”
그렇다고 말하자 톰이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업무 때도 당분간 그거 쓰세요.”
당분간. 소정은 당분간이라는 말이 주는 모호함을 잘 알았다. 그러나 넵, 이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톰이 창가 쪽 테이블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기획팀 소속이니까 기획팀이랑도 인사해야죠.”
피부 관리를 얼마나 받은 걸지 궁금해질 정도로 매끈한 피부를 가진 정도현이, 그러니까 리사가 의자에 앉은 채 소정에게 손을 뻗었다. 뾰족한 칼 같은 메탈 네일이 반짝거렸다.
“안녕. 리사예요. 톰은 케이 별로 내키지 않아 했는데 난 괜찮다고 했어요.”
리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톰이 그런 이야기는 왜 하냐고 손사래를 쳤다. 리사는 어깨를 들썩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톰. 무슨 영어 닉네임 스펠링에 그렇게 집착을 해요? 나한테도 그럼 좀 괜찮은 거 추천해 줘봐요.”
리사는 톡 쏘는 어투로 아무렇지도 않게 톰을 눌러버렸다. 순간 소정은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이 좁은 사무실에서는 모든 말이 들리는구나. 톰은 나를 원하지 않았구나. 리사는 나를 괜찮다 했구나. 소정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핏줄이 도드라진 손이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소정은 오전에 톰에게서 입사 면담 및 간략한 인수인계를 받자마자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시시때때로 들어오는 화장실 관련 민원까지 자신에게 처리하라고 지시할 듯했다. 그래서였다. 톰이 혹시 질문이 있으면 하라는 말에, 화장실에 대해 물은 건.
“톰 님, 혹시 화장실은 어디에 있을까요?”
대답 대신 톰은 리사를 바라보았다. 소정을 바라보던 리사 역시 톰을 바라보았다. 둘의 행동에 소정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소정은 어딘가 미묘하게 톤이 안 맞게 되어버린 분위기를 되돌리고자 말을 급하게 이었다.
“오늘이라도 관람객이 화장실이 어디인지 물어보았을 때 제가 답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 봐 싶어서… 여쭤보았습니다.”
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은 갤러리 밖으로 나가 건물 계단을 반 층 올라가거나 내려가면 있다고 말해주었다. 반 층 내려간 곳은 직원 전용이라 비밀번호가 걸려 있고, 반 층 올라간 곳은 오픈 스페이스라 관람객에게 알려주면 된다고 했다. 화장실은 건물 소속 여사님이 청소하신다고 일러주었다. 톰의 모습만을 봤을 때 소정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찌저찌 상황을 잘 넘어갔다 여겼다.
하지만 리사는. 리사는 빤히 소정을 바라만 보았다. 소정이 아닌 대신 톰에게 물었다.
“케이한테 인사 조직도 공유는 아직 하지 않은 거죠?”
톰 팀장님. 소정은 케이가 일부러 톰 팀장님, 이라고 발음을 똑바로 끊어서 하려고 한 것을 들었다. 소정은 조금 전에 톰을 톰 팀장님이라 부르지 않고 톰 님이라 부른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리사가 톰 팀장님이라고 말한 후 잠시 정적이 있던 그 순간에, 소정은 자신이 끼어들어 직급을 붙여서 말해야 하는지 몰랐다고 사과할지 아니면 그냥 뭣 모르는 신입사원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한 행동인 척해야 할지(사실 소정은 정말 영어 닉네임을 쓰는 사내 문화라기에 당연히 직급을 붙이지 않고 ‘님’을 붙여 말하는 줄 알았다) 고민했다.
그때 하필 언니가 떠올랐다. 언니가 건넨 두꺼운 돈봉투가 기억났다. 언니가 데려갔던 고급 레스토랑이 눈앞에 그려졌다. 언니와 저녁 식사를 하고 홀로 빠져나왔던 날, 소정은 스페이스 디아워즈에서 일하며 한 번쯤은 자신도 그곳에 언니를 불러 앉히리라 마음먹었다. 언니뿐만 아니라 엄마 아빠도. 그 레스토랑에서 언젠가는 갤러리 정규직으로 일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소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젠간, 이 아니라 반드시, 정규직이 되었다고 말해야만 했다. 네가 무슨 그림이냐며 대학원이냐며 갤러리 근무냐며 안정적인 직업이니 뭐니를 말했던 언니와 엄마 아빠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소정이 황급히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직급 붙여야 하는지 모르고 제가 그만 톰 님이라고 말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리사의 무표정한 얼굴이 바뀌었다. 날렵한 눈꼬리가 곡선으로 휘며 웃음기가 돌았다. 메탈릭 실버 네일을 한 손을 휘휘 저으며 대꾸했다.
“뭘 그렇게까지 미안해해. 처음이니까 괜찮아요.”
입사 당일, 리사가 소정에게 알려준 기획팀 업무는 다양했다. 소정이 대학원에서 배운 내용과 큰 틀에서는 비슷했지만 더 심도 깊은 일들이었다. 소정은 리사가 이야기하는 것들을 정신없이 받아 적었다. 일단은 놓치지 않고 다 기록해 놔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리사가 잘해보자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난 후에는, 노트에 빼곡히 적힌 글자들을 살폈을 때는 노트 안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소정이 황급히 건네받은 자료를 뒤적였다.
리사가 가장 먼저 살펴보라 일러준 것은 다음 전시인 아우구스트 마케 전 「감각/필요/충분」의 자료였다. 아우구스트 마케 재단과 협업한 전시로 판화 에디션과 드로잉 등을 들여올 계획이라 적혀 있었다. 선정 이유로 1여 년 전 갤러리 정체성인 추상 회화 BEP 달성 이슈, 그러니까 손익분기를 넘기지 못해서 급하게 내외부 기획 회의를 거쳤고, 그 결과, 보다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주의 쪽으로 돌려 마케 전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심지어 「감각/필요/충분」은 거금을 들인, 첫 재단 협업 전시였다.
마케, 아우구스트 마케. 들판, 햇살 등의 이미지가 소정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소정은 급히 노트북으로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를 열어 마케에 대해 검색했다.
아우구스트 마케, 독일 표현주의, 칸딘스키, 청기사파.
소정이 시선을 옮겨 리사가 전시 자료와 함께 건네주었던 도록 등을 살폈다. 그 중에는 독일의 유명한 아트 북 출판사인 타셴(TASCHEN)의 책이 있었다. 소정이 타셴의 책을 펼치자 오래된 먼지 냄새가 풍겼다. 책 앞부분을 보니 1993년도에 발간했다 적혀 있었다. 소정은 아트 북을 빠르게 훑었다.
강한 색채, 왜곡된 풍경과 인물, 거친 터치, 직감적 이물감.
소정은 다시 스페이스 디아워즈의 자료를 읽었다. 영어, 독일어, 한국어가 섞여 있어서인지 더 잘 읽히지 않았다. 소정은 눈앞에서 뿌예지는 단어들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자신이 이력서에 쓴 어학 성적들을 떠올렸다. 유효기간이 임박한 토익 자격증 그리고 유효기간이 없는 프랑스어 자격증. 대학생일 때 언젠가 유학 간다면 프랑스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다짜고짜 딴 것이었다. 하지만 유학은커녕 어학연수나 교환학생도 가지 못해 프랑스어 실력은 녹슬고 말았다. 이곳에서 프랑스어로 된 원서를 읽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어떡하나. 소정은 쓸모없는 고민을 머릿속에 지우고자 손으로 눈가를 세게 비볐다. 다시 글을 읽으려 했다.
[핵심 큐레토리얼]
(실배치 순서 미정, 자료 내 연도순 표기, 번역 필요, 번역가 작업 및 애런 검수 완료)
애런. 애런은 누구인가. 전문 번역가인가 스페이스 디아워즈 직원인가. 어찌 되었든 그 누구보다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하품이 나오려 했다. 새벽 재택 아르바이트 때문인 듯했다. 스페이스 디아워즈 입사 첫날만큼은 빠지고 싶었지만 다른 알바생이 하필이면 같은 날에 먼저 휴가를 써서 아르바이트를 빼지 못했다. 함께 근무하는 민규가 소정에게 신경 쓰지 말고 담당자한테 말해보라 했지만 소정은 그러지 않았다. 계약직을 전전하는 자신에게 아르바이트는 그나마 안정적인 일상을 이끌어주는 최후의 보루였다. 어디선가 정규직으로 일하게 될 때까지는 계속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소정은 벌어지는 입을 재빠르게 손으로 가렸다.
- We draw only from plaster-work junk i.e. plaster-casts.
We're learning a tremendous amount.
August Macke (c. 1904–1906)
우리는 석고 캐스트 같은 낡은 모형만을 그린다.
그래도 배우는 건 실로 엄청나다.
아우구스트 마케(1904~1906년경)
고개를 들자 시야에 리사가 들어왔다. 리사가 한 남자에게 다가가 무어라 일렀다. 매트한 질감의 왁스로 앞머리를 바르게 넘긴 사람. 짙은 쌍꺼풀, 약간의 매부리코. 그가 찬 스마트워치의 캔버스 소재 시곗줄이 눈에 익었다. 언니 현정이 일전에 에르메스 제품이라고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자신에게 보여줬던 게 떠올랐다. 그때 언니는 이렇게 물었다.
“근데 아무리 인턴이고 계약직이어도 근무할 때 스마트워치 필요하지 않아? 왜 안 사? 사줘?”
“됐어.”
소정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언니가 한 번 더 정말 안 사줘도 괜찮겠냐고 물어봐 주길 바랐다. 언니는 항상 소정의 기대를 빗겨나갔다.
“싫으면 말고.”
리사와 대화를 마친 남자가 소정을 바라봤다. 소정은 그와 마주치지 않은 척하며 다시 자료로 눈길을 옮겼다. 갈증이 났다. 온종일 커피만 마시고 물 한 모금도 못 마셨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 In order to paint one must be able to see an object in its uniform tone,
in its whole magic, be it a flower or a human hair.
All the paintings created this way are the mirrors of a soul in harmony.
It is quite simply vast and has no needs of symbols in order to paint the sea.
August Macke (c. 1912–1914)
꽃 한 송이든 머리카락 한 올이든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대상을 통일된 색조와 그 전체가 품은 신비로움 속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그려진 모든 그림은 조화를 이룬 영혼의 거울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광막하기에, 바다를 그리는 데 상징은 필요하지 않다.
아우구스트 마케(1912~1914년경)
마지막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 충분히 광막하기에 바다를 그리는 데 상징은 필요하지 않다. 이 문장 때문에 마케 전의 타이틀이 「감각/필요/충분」이 된 듯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던 이가 있었다. 사람은 기억나지 않고 힘이 실린 목소리만이 소정의 귀에 맴돌았다. 대학 졸업 후 다닌 미술학원에서 들었던가. 소정은 자신과 함께 화실을 함께 쓴 많은 이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소정은 다시 밑줄을 보았다. 누가 그은 것일까. 기획팀장인 리사? 아니면 갤러리 외부 위원회에 소속된 교수? 스페이스 디아워즈 대표? 소정은 그 문장을 자신의 노트에 받아 적었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밑줄 때문인지 자꾸 그 문장을 읽게 됐다.
그리는 데에 상징은 필요하지 않다, 그 자체로 충분하기에. 정말 그럴까, 신비롭기만 하다면? 필요와 충분 아니면 필요 혹은 충분.
소정은 자신이 적은 문구 옆에 물음표를 작게 그려 넣었다. 교수로부터 메시지가 없다는 피드백을 들었다던, 대학생 때의 언니 모습이 겹쳐 보였다. 소정은 물음표를 옆에 온점을 여러 개를 꾹꾹 눌러 찍었다. 작은 점들은 말줄임표가 되었다.
리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가 소정의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짙은 향수 냄새가 나리라는 예상과 달리 그에게서는 파우더리한 비누 향만이 풍겼다.
“안녕하세요, 케이 님. 애런이라고 합니다. 저도 기획팀이에요.”
소정은 그가 건넨 명함을 받아 들었다. 이 사람이 애런이구나. 소정은 급히 그의 직책을 살폈다. 대리. 그를 대리님으로 불러야만 한다. 같은 실수는 저지르면 안 된다. 소정은 속으로 되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애런 대리님. 김소정, 케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기획팀은 세 명인데, 제가 케이 님 직속 사수니까 저한테 많이 물어보세요.”
소정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목례했다. 애런은 무릎을 살짝 접고는 소정의 테이블 높이로 시선을 맞추고자 했다. 소정도 그를 따라 상체를 굽혔다.
“다름이 아니라 자료에도 적혀 있듯 마케 전은 세일즈 높이려고 기획된 전시예요. 제 소개도 할 겸 한 번 더 강조해 주려고요.”
소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수의 갤러리가 회화 위주로 전시하는 상황은 익히 알고 있었다. 회화가 설치, 조각, 미디어아트보다 작품 판매에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미술품을 투자 목적으로 구매하는 이가 많아져 여러 장르의 피스가 팔리고 있다고 해도, 보관하기 용이한 회화가 그중 제일 인기가 많았다. 스페이스 디아워즈도 그런 맥락으로 회화를 전시지만 그중 추상 회화 전시에 특화된 곳이었다.
대학원 수업에서 교수는 추상 회화가 갖는 세일즈 포인트에 관해 강조하곤 했다. 추상화는 특정 장소나 인물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기 때문에 한번 구매하면 공간 특성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든 걸어둘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더 나아가 추상화를 구매한다는 사실 자체가 예술적 안목을 갖춘 컬렉터임을 증명하기에 자연스럽게 티어를 조성하게 한다. 그 외에도 추상화는 특성상 큐레이션과 기획의 내러티브가 작품 가치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갤러리 입장에서도 마케팅하기 용이한 장르로 꼽힌다.
교수는 관련 예시로 여러 전시와 갤러리를 소개했다. 스페이스 디아워즈도 거기에 속해 있었다.
설명을 마친 애런이 무릎을 폈다. 소정의 노트를 한참 바라보았다. 소정은 그제야 애런이 바다를 그리는 데에 상징은 필요하지 않다, 라는 문장 옆의 물음표와 말줄임표를 살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애런이 소정에게 작은 목소리로 의미가 궁금하냐고 물었다.
“곧 궁금하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 일 처리만 해야 할 거예요, 같이 파이팅 해봐요.”
소정은 애런을 향해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애런이 떠나자마자 펜으로 노트 속의 문장부호들을 지웠다. 괜한 걸 적었다는 생각에 문장 위에도 밑줄을 죽죽 그었다.
애런의 말에는 적의가 없었다. 적의가 없는데도 얼굴이 붉어지는 자신이 너무나도 작아 보였다. 드디어 갤러리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입사한 지 몇 시간이 되지 않아 바로 이런 기분을 마주하다니. 소정은 한쪽 엄지와 검지 사이를 다른 손으로 꾹꾹 눌렀다. 그 부위가 시뻘게졌지만 계속 매만졌다. 톰이 자리로 찾아올 때까지.
“케이, 벌써 넋 놓고 있는 거야? 이거 매뉴얼이니까 보고 메일이랑 메신저 그리고 클라우드 프로그램들 다운받아요.”
소정은 톰이 건넨 자료를 받아 들었다. 마우스를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 톰은 갤러리 직원들을 마저 소개했다. 리사, 애런을 비롯해 기획팀 과장인 사이먼, 디자이너 그리고 갤러리의 홍보 대행사 직원까지. 톰은 소정을 위해 대행사 직원까지 일부러 부른 것이라 생색냈다. 보험 및 운송업체나, 액자 업체, 보존 수복 전문 업체, 인테리어 업체 등은 나중에 소개해 주겠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케이가 홍보 쪽 업무도 좀 맡겠죠? 이쪽이 대행사 실장님이에요. 우리 쇼릴 영상 같은 것도 다 제작해 주셔.”
쇼릴. 쇼릴 영상. 소정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머릿속에 굴리며 톰의 손이 닿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첫날이라 정신이 없으시죠? 잘 부탁드립니다.”
대행사 실장이 미세한 펄이 박혀 있는 검은색 명함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김소정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직 명함이 없어서요.”
“명함 관리 앱 쓰시죠? 거기로 제가 제 거 쏘아드릴게요.”
소정은 잡지사 근무 이후 앱을 지웠다는 걸 떠올렸다. 바로 다운로드하려는데 갑자기 음식이 나왔다. 일인용 솥 밥. 소정은 여러 종류의 솥 밥을 각기 주인에게 바쁘게 전달했다. 톰에게는 스테이크, 리사에게는 관자, 사이먼에게는 장어……. 맛있게 드시라는 말과 함께 정신없이 움직이는데 애런이 소정에게 말했다.
“케이, 그냥 있어도 돼요. 괜찮아요.”
그제야 소정은 주위를 살필 수 있었다. 다른 직원들이 자신에게 ‘용쓴다’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음을 알아챘다. 소정은 자리에 앉아 제 앞에 놓인 컵을 들었다. 다른 직원들에게 다 따라주느라 바닥만 겨우 채운 물은 단숨에 동이 났다.
점심 식사가 끝날 때까지도 소정은 화장실에 가지 못했다. 입사 첫날이기에 너무 긴장하여 요의를 크게 느끼지 못했기도 했지만, 요의를 느껴도 잠시도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는 마음이 들어서 가지 못했다.
오후 업무 시작 후 몇 분 뒤에 소정은 저릿한 느낌이 들어 황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다른 직원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고객용으로. 여자 화장실 두 칸 중 하나에 들어갔다. 어쩐지 소변을 보아도 시원하지 않았다. 아랫배도 따끔따끔한 듯했다. 출근 전, 긴장되는 탓에 혹시 몰라 방광 이완제를 먹었는데도 이러다니. 소정은 변기 물을 내리며 방광염은 아닐 것이라 믿었다. 이따금 스트레스를 받으면 방광염 증상만 느낄 때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앓아온 방광염으로 생긴 과민성방광 때문이었다. 방광 이완제를 회사에도 챙겨와서 다행이었다.
소정은 변기 뚜껑을 닫은 뒤 다시 그 위에 앉았다. 오전 내내 살피지 못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스마트폰 화면을 이리저리 클릭했다. 메신저를 봐도, 메일함을 봐도, 포털사이트의 뉴스나 소셜미디어를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정은 눈을 세게 감았다가, 다시 떴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다짐하며.
우선 대행사 실장이 말한 명함 관리 앱을 다시 다운받았다. 그 후 메신저 앱에 들어가 보았다. 여러 개의 메시지가 보였다. 소정은 미리보기로 민규에게서 온 것을 읽었다. 첫 출근 아자아자! 라는 응원 메시지. 너무나 진심 어린 말이었기에 소정은 차마 답장할 수가 없었다.
민규야, 나 자신이 없어. 잘 다닐 수 있을까?
이런 말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소정은 민규의 것을 지나쳐 언니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았다.
―정도현 만났어? 추천서 받을 수 있겠어?
입시 미술 유학원에 다니는 사람답게, 늘 언제나 동생에게까지 추천서 좀 받아보라는 사람답게, 언니는 입사 첫날부터 들들 볶고 있었다. 소정은 언니에게 답장을 보냈다.
―존나 싫어.
소정이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언니는 그걸 바로 확인했다. 소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정은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 다시 언니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내가 돈 줬잖아.
그리고 하나 더.
―정도현한테 잘 말해봐. 내용은 어차피 내가 쓰고 사인만 해주면 된다고 해. 20초면 작성 끝나.
장문의 메시지가 또 화면에 떴다.
―사례비도 두둑이 준다고 전하고. 미국에서 포폴 쌓는 미래의 아티스트랑 연결고리 생기는 거라고도 어필해. 갤러리에선 그런 게 중요하니까.
소정은 그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자기 말만 이렇게 늘어놓다니. 적어도 동생에게 무엇이 싫은지는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걱정해 줄 수 있지 않나. 새로 들어간 회사가, 아니면 언니인 자신이 싫다고 하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스마트폰 화면에는 언니로부터 전화가 오고 있다는 알림이 떴다. 소정은 홧김에 스마트폰 전원을 꺼버렸다.
소정은 어린 시절에 언니만 믿어, 라고 웃으며 말해주던 그 사람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고민했다.
누군가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그 기척에 소정은 반사적으로 변기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자신이 지금 고객용 화장실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근무 내내 너무 정신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걸까. 화장실에서 스마트폰도 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던 잠시가 아주 편히 침대에서 눈을 붙이고 있던 시간처럼 느껴졌다. 소정이 습관적으로 변기 물을 내렸다. 물이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긴 머리를 질끈 묶었다.
3장
착한 네가 이해해 줘
양조장 주차장의 경계석과 닿은 엉덩이가 점점 더 아파왔다. 웅크린 소정의 아랫배 쪽에서 미세한 통증이 올라왔다. 개미가 기어다니는 느낌. 방광염의 전조였다. 소정은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모아 쥐었다. 경계석에 노트북을 내려놓은 뒤 가방에서 파우치를 찾았다. 파우치 안에 비상용 약이 없었다.
소정은 텀블러를 꺼내 물이라도 마시려 했다. 차가운 물로 목을 축였더니 통증은 잠시 잊혔지만 몸은 더욱 조그맣게 만들게 되었다. 민규가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소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를 꽉 물었다. 초가을 바람이 더 시리게 느껴졌기에. 바람이 살을 파고들자, 소정의 기억은 방광염이 시작되었던 어린 시절 겨울 안방구석에 닿고 말았다.
언니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소정이 아홉 살이었을 적까지 언니는 상장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 흔한 표창장도, 부반장 임명장도, 환경 미화상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로 달라졌다. 사생 대회나 미술 대회, 대학에서 여는 실기 대회에서 상장을 받기 시작했다.
언니가 고등학교 1학년 봄에 처음으로 받아온 상장은 케이스에 끼워져 있었다. 고등학교의 교복색과 비슷한 검붉은 케이스. 손으로 쓸면 그대로 모양이 남는 것이었다. 한쪽으로 쓸면 밝은 자줏빛으로 보였고, 다른 한쪽으로 쓸면 피멍이 든 것처럼 어둡게 가라앉았다. 금색 봉황도 새겨져 있었다. 소정은 몰래 손톱으로 봉황을 긁어보았다. 미세한 금가루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케이스를 살짝 벌리자 쩍, 소리가 났다. 케이스 안에서는 시큼한 잉크 냄새와 화한 접착제 냄새가 섞여서 났다. 소정은 케이스를 닫고 겉면을 계속 손으로 매만졌다. 이런 부드러운 걸 뭐라 부르는지 궁금했다.
“엄마, 이런 건 뭐라고 불러?”
“우단이라고 부르지.”
옆에서 듣고 있던 언니가 끼어들었다.
“요즘 누가 우단이라고 불러. 벨벳이라고 해.”
평소였으면 별것도 아닌 거로 아는 척한다고 했을 엄마였지만 그때만큼은 가만히 있었다. 식탁 곁을 지나던 아빠도 상장 케이스를 슬쩍 만져보고는 좋네, 라고 말할 뿐이었다. 언니에게 말조심하라는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언니의 첫 상장은 식탁 옆 선반, 가족사진이 놓였던 자리를 차지했다.
그 무렵부터 언니의 하나뿐인 친구도 집에 놀러 오지 않았다. 소정이 기억하기론 언니는 그 친구 말고는 아무도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스물다섯 살, 언니가 언니의 전남편을 소개하기 위해 집에 함께 오기 전까지.
언니의 친구 이름은 한영지였다. 쌍꺼풀 있는 눈이 너무나 커서 꼭 금붕어 같았던 사람. 소정은 언니보다 한영지를 잘 따랐다. 무주군청 근처의 엄마 식당에서 콩나물국밥을 먹는 한영지에게 엄마 몰래 생달걀을 하나 더 줄 만큼.
하지만 한영지는 언니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교내 사생 대회에서 금상을 받은 이후로 엄마의 콩나물국밥집에 오지 않았다. 소정은 언니에게 왜 한영지가 오지 않는지 묻지 않았다. 분명 둘이 여느 때처럼 말다툼을 했겠거니 여겼다. 하루, 이틀, 사흘, 열흘. 보름이 지났지만 한영지는 엄마 가게에도 집에도 놀러 오질 않았다.
언니는 한영지와 절교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언니가 사생 대회에서 한영지의 수채화를 따라 그렸기 때문이라 했다. 절교. 어린 소정에게 절교라는 말은 퇴학과 별반 다름없었다. 학교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처벌이었다. 한영지의 허락하에 언니가 따라 그린 것이지만 한영지는 자신보다 언니가 그림을 더 잘 그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기에, 언니는 절교라는 처벌을 받았다. 한영지와 절교한 후, 언니는 서울로 대학을 갈 때까지 작은 무주 바닥에서 홀로 지냈다. 한영지는 쉽게 다른 친구를 만들었지만 언니는 그러지 못했다. 당시의 소정은 자신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언니를 불쌍하게 여겼다.
언니가 집에 첫 상장을 들고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소정은 언니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언니 그림을 보러 갔다. 아빠는 결혼식에 가는 것처럼 차려입은 엄마에게 도대체 그깟 그림이 뭐라고 가족까지 학교에 초대하냐고 못마땅해했다. 소정도 아빠 말에 동의했기에 원피스를 입고 싶지 않다고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언니의 수채화 앞에 섰을 때, 소정은 원피스를 입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그림 앞에서는 제일 예쁜 옷을 입어야만 할 것 같았다.
참외.
소정은 언니가 그린 「구천동 계곡의 봄」을 보고 그 단어를 바로 떠올렸다. 그림 어디에도 참외는 없었지만 자꾸 참외가 생각났다. 뽕따 아이스크림색의 계곡, 완두콩색의 이파리, 말린 고사리색의 나무줄기를 보는데도 참외 냄새가, 물기 어린 단내가 코끝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소정은 코를 킁킁거리며 도대체 언니가 어떻게 참외 느낌이 나도록 그림을 그린 것일지 고민했다. 소정과 나눠 쓰는 물감을 어찌 썼길래 이런 그림이 나온 거지 싶었다. 입안에서도 달큼한 참외 맛이 맴돌았다.
언니의 그림이 들어 있는 액자 유리가 반짝, 하고 빛났다. 그것마저 갓 자른 참외의 하얀 속살 같았다. 윤기가 맴돌고 시원한 것. 교복 입은 언니가 소정 옆에 섰다. 소정은 엄마의 손을 놓고 언니 손을 잡았다.
“언니는 참외보다 수박을 더 좋아하지?”
“맞아. 왜?”
“그냥. 난 이제 참외가 더 좋아.”
사람들이 언니의 그림 앞으로 모여들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사이로 외마디 감탄사가 들렸다. 소정은 언니의 손을 더욱더 꽈악 잡았다. 「구천동 계곡의 봄」을 그린 사람이 ‘나의’ 언니라는 것을 티 내기 위해서. 소정이 말을 이었다.
“우리 이번에는 대천 해수욕장 말고 구천동 계곡 가자.”
“싫어. 계곡에 사람 많잖아.”
“어차피 우리는 방학 때 안 놀러 가잖아. 휴가철 장사 끝나고 9월쯤 갈 테니까 사람 별로 없을걸?”
언니, 현정 언니. 소정은 언니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언니가 귀찮다는 듯 답했다.
“외지인은 안 와도 온갖 동네 사람들이 다 거기로 가잖아.”
언니는 잡고 있던 소정의 손을 놓았다. 소정이 다시 손을 잡았다. 언니의 손이 축축했다.
“언니, 근데 그림 진짜 잘 그렸다. 어디서 배운 거야? 고등학교 가면 이런 거 알려줘?”
“아니.”
“그럼?”
“영지 거 보고 그냥 따라 그린 거야. 걔는 훔친 거나 다름없다고 했지만.”
소정은 언니 그림 옆에 걸린 한영지의 그림을 살폈다. 은상이라는 상패가 붙은 것. 1학년 학생들이 모두 구천동 계곡으로 사생 대회를 갔기에 비슷한 구도(그 구도 때문에 한영지는 훔쳐 그렸다고 한 모양이었다)의 계곡을 그린 그림. 「빛나는 물줄기」라는 제목과 달리 그 그림은 빛이 나지 않았다. 탁했다. 물이 졸졸졸 흐르는 느낌이 들기는커녕 싸구려 계곡 모형을 그린 듯했다. 소정이 속삭였다.
“언니가 더 잘 그렸는데?”
“다들 그렇다더라. 영지도 그랬고.”
“영지 언니는 어딨어?”
“몰라. 안 궁금해.”
“나 영지 언니 보러 갈래.”
“안돼. 가지 마.”
언니가 소정의 손을 꽉 쥐었다. 너무 꽉 잡아서 마디마디가 아플 지경이었다.
“영지가 이제 너도 싫어할 거야.”
소정이 부모와 함께 언니 그림을 보러 간 날, 언니의 담임은 언니가 그림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정확히는 그림을 그려 서울로 대학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대학. 언니는 당시 티브이 말고도 화면과 본체가 엄청나게 큰 컴퓨터로 EBS 강의를 들었다. 언니는 무주 인근 지방 국립대에 가고자 했다.
대학에 관한 얘기를 듣고도 소정의 부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다 입시 미술을 시켜야 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몰랐고, 미술을 시킨다고 과연 첫째 딸이 서울로 대학을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기 때문이었다. 설령 미술을 한다 해도 자식이 밥을 벌어먹을 수 있을지에 관해서도 걱정이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평소에는 잘 안 하던 서울 사는 친척들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누가 어떻게 서울에 갔는지, 지금 어디에 사는지, 애는 몇 살인지. 소정과 언니가 옆에 있어도 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화의 끝은 늘 비슷하게 끝났다.
“걔는 어느 대학에 갔대?”
곧 엄마는 무주에 있는 미술학원 몇 곳을 돌았다. 학원 원장에게 언니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안내 책자와 미술학원 광고가 앞뒤로 프린트된 무지 노트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를 붙잡고 이렇게 얘기했다.
“진짜 소질이 있대. 서울에 있는 대학도 갈 수 있을 것 같대.”
“다 사기꾼 아니야?”
엄마는 그런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사기라면 돈을 뜯어내려 자기네들이 가르치겠다고 하지 않았겠냐고. 무주에서 가르치기엔 아깝다 했다고. 더 큰 도시로 가라고 조언했다고. 들뜬 얼굴로 아빠에게 얘기했다. 소정만이 엄마가 가져온 안내 책자와 노트를 펼쳐 이리저리 살폈다. 언니는 엄마의 얘기를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듣기만 했다. 하고 싶다고도 하기 싫다고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입시 미술학원을 알아보러 처음에 전주로 갔다. 주말 장사를 포기할 수 없으니 주중에 갔다. 주중에 언니는 학교에 가야 하니 엄마 혼자 갔다. 엄마가 학원을 알아보러 다닐 당시에 소정은 아빠의 카센터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엄마 가게에서와 달리 라디오도 듣고 티브이도 볼 수 있었지만 주파수나 채널을 돌릴 수는 없었다. 아빠가 틀어놓은 대로 따라 들어야만 했다. 그래도 소정은 손님들 얘기만 들어야 했던 콩나물국밥집 한쪽 테이블보다 카센터가 좋았다. 쇳덩어리 기구가 바닥을 나뒹굴고, 카 리프트가 설치된 곳. 자장면을 자주 시켜 먹던 장소.
아빠는 소정에게 말을 걸곤 했다. 요리와 차 정비 모두 손재주가 좋아야 할 수 있는 것이라 얘기했다. 눈썰미 등의 감각이 특출나야 한다며. 의사, 변호사 이런 거만 전문직이 아니라 엄마와 아빠가 하는 일도 엄연히 따지면 전문 기술을 갖춘 것이니 전문직이나 다름없다고 의기양양했다. 아빠는 기름때가 찌든 작업복을 입은 채, 손에 묻은 시커먼 엔진오일을 마른걸레에 벅벅 닦아냈다.
“현정이도 나랑 네 엄마를 닮은 거야.”
그 말을 한 아빠는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소정이 너도 언니처럼 잘 커야 한다. 알겠지?”
소정이 응, 이라 답했다. 아빠는 종종 큰일이네 큰일이야, 라고 중얼거렸다. 아빠가 차를 뜯어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소정은 그 큰일이란 말이 누구를 향한 말일지 궁금해지곤 했다.
집에는 미술학원에서 받아온 공책이 늘어만 갔다. 언니도, 소정도 문구점에서 노트를 사지 않아도 될 만큼. 소정은 노트 안쪽에 ○○대 3명, △△대 5명, 전북 지역 최다 입학! 등의 글자를 오랫동안 살폈다. 언니도 노트에 적힌 대학교에 가는 것일지 궁금해지곤 했다. 그런 궁금증이 들 때마다 소정은 노트 안쪽에 대학교 이름을 하나하나 따라 적었다. 그 옆에 김현정, 김소정 두 이름을 연필로 나란히 남겼다.
전주에 다녀온 날이면, 엄마는 늘 집이 아닌 콩나물국밥집으로 돌아왔다. 피곤할 텐데도 저녁 장사라도 하려 했다. 언니가 쉬라고 말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손님이 늘지 않냐는 하소연을 하며 계속 콩나물국밥만 만들었다. 언니와 소정 그리고 아빠에게 콩나물밥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밥을 다 먹은 언니는 말없이 엄마를 조금씩 도왔다. 소정은 아빠 손에 이끌려 집에 갔다. 소정이 아빠에게 언니에 대해 물었다.
“개구리 말이야. 미술 하면 화가 되는 거야?”
“모르겠네.”
“그럼 개구리, 미술 배우면 서울로 대학 가는 거야?”
“모르겠어.”
“아빠, 개구리가 영지 언니 그림 따라 그린 거래.”
“그래, 그건 잘 알고 있다.”
엄마는 대전에까지 미술학원을 알아보러 갔다. 더 큰 도시로 가면 서울로 대학 갈 확률이 높아진다는 말 때문이었다. 서울로도 학원을 찾아다녔다. 서울의 학원에 보낼 여유는 없었는지 결국 언니는 대전에 있는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그날부터 엄마는 디자인, 조소, 동양화, 서양화, 도예 등의 단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미술을 얘기할 때면 괜히 팔짱을 낀 채 턱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식당의 콩나물국밥 뚝배기들을 보며 예술혼이 안 느껴진다는 이상한 말을 떠들기도 했다.
언니는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대전에 있는 미술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집에서 쓰던 물감과 붓, 스케치북이 있었지만 다른 것으로 새로 샀다. 신한 어쩌구, 미젤로 어쩌구 같은 어려운 이름의 물감을 샀고, 인조모가 아닌 진짜 동물의 털로 만든 붓을 샀다. 은빛 알루미늄 튜브들은 두툼한 형체를 유지한 채 광택을 뿜었다. 한 번도 물을 머금은 적 없는 천연모 붓은 끝이 날카롭게 모여 있었다.
언니는 빨주노초파남보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반다이크 브라운 같은 어려운 영어를 썼다. 여러 모양의 붓으로 소정의 손등을 간지럽히며 어떤 건 돼지털로 만들고 어떤 건 족제비 털로 만들었다고 말해줬다. 족제비가 어떻게 생겼냐고 소정이 묻자 언니는 칼로 깎은 미술용 연필로 족제비를 그려냈다. 강아지와 비슷한 코, 둥근 귀, 작은 얼굴, 길쭉한 몸, 긴 꼬리. 그 그림에서는 꼭 빵집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소정은 언니가 쓰지 않는 물건들을 가지고 놀았다. 언니처럼 족제비도 그리려고 해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소정이 그리는 건 늘 곰돌이 인형처럼 보였다. 그래도 엄마와 아빠는 항상 그게 정말 족제비와 똑 닮았다고 말해주었다.
미술학원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언니는 집으로 돌아와도 아무 말이 없었다. 너무 예민해진 나머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언니가 아플 때 주로 마시는 포카리스웨트를 여러 병씩 사놓았다. 파란색 띠가 둘러져 있는 불투명한 음료. 다행히 언니는 포카리스웨트는 마셨다. 집에 오면 언니는 포카리스웨트 큰 병 하나를 받아 들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소정에게 언니가 자고 있을 거라고 했다. 소정이 물었다.
“왜? 이제 9시 조금 넘었는데?”
“바빴겠지, 언니도.”
그럴 만도 했다. 토요일 버스 첫차를 타고 대전에 갔다가 막차 버스를 타고 무주에 왔으니까. 엄마는 소정에게 언니가 여러모로 정신이 없을 테니 괴롭히지 말라 했다. 소정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도 괴롭히니 마니를 말하는 엄마가 미웠다. 언니가 진짜 정신이 없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한밤중에 소정은 자신을 안고 있는 엄마 팔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언니 방의 문을 몰래 열었다.
언니의 방에서는 선풍기가 달달달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언니는 코도 골지 않고 자고 있었다.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기진맥진해 보였다. 열이 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정이 언니의 이마에 손을 댔다. 다행히 열이 나지는 않았다. 소정은 언니가 거의 다 비운 포카리스웨트 페트병을 만져보았다. 미지근했다. 미지근한 포카리스웨트는 맛이 없는데. 언니는 시원한 걸 좋아하는데. 그런 걸 생각하며 방문을 닫았다. 엄마에게로 가서 속삭였다.
“엄마, 언니 포카리스웨트 다 식었어. 바꿔줘야 해.”
으응. 엄마는 잠이 덜 깬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에 가서 새 포카리스웨트를 꺼냈다. 그걸 언니 침대 옆에 놓았다. 소정은 엄마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평소였으면 왜 언니가 있는 방에 마음대로 드나드냐고 혼냈을 텐데 엄마는 소정을 혼내지 않았다.
다른 언니들은 오래 앉아 있는 탓에 점점 교복이 작아져 고민이라 했지만,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앙상해져만 갔다. 입시 동안 픽픽 쓰려져 몇 번이고 병원에 실려 갔다.
언니가 열여덟 살이 되면서부터, 대전의 학원에 가는 날이 늘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집에 오면 병든 닭처럼 까무룩 잠이 들던 언니는 자지 않았다. 엄마가 운전하여 언니를 데리고 다닌 까닭도 있었겠지만, 놀랍게도 언니는 미술학원을 다녀온 밤에도 식탁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려 했다. 여전히 밥은 잘 먹지 않았다. 포카리스웨트나 미음, 엄마가 직접 갈아 만든 사과주스 같은 것만 마셨다.
아빠는 언니에게 정말 서울로 대학에 갈 것이냐 물었다. 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현정이 나중에 효도하려나. 화가가 그림 하나 제대로 팔면 몇억씩 받는다던데.”
설거지를 하던 엄마가 식기를 요란스레 내려놓았다.
“어휴, 당신 제발 김칫국 좀 그만 마셔.”
“그렇게 팔겠다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야 대학도 잘 가지. 아빠는 우리 개구리 믿으니까 지금 버티는 거야.”
언니는 고개를 들어 아빠를 바라보았다.
“아빠가 뭘 버티고 있는데?”
거실에서 누워 있던 소정이 언니를 살폈다. 애써 눈에 힘을 뺀 채 아빠를 응시하는, 그러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거센 언니. 정말 언니는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나도 요즘 엄마 아빠가 살림을 아끼고 있다는 걸 아는데. 아빠는 새 스케치북이나 새 연필을 주던 이였지만, 언젠가부터 언니가 쓰다 만 스케치북을 주고 몽당연필을 볼펜 깍지에 껴서 건넸다. 국밥집에서 차마 손님상에 내지 못하는 시들시들한 콩나물이 집 반찬으로 오르는 일도 잦아졌다. 엄마는 소정에게 침대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사주지 않았다. 더는 소정과 같이 자지 않았지만, 가장 작은 방을 소정이 쓰게 해주었지만, 끝내 침대는 없었다. 당분간은 요를 깔고 자라고 했다.
당분간. 소정은 그 당분간이 중학교 졸업 때까지일 줄은 몰랐다.
겨울에 가족끼리 가던 무주의 스키장에도 소정은 더는 가지 못했다. 무주군민들이라면 겨울에 꼭 가는 덕유산의 스키장. 유럽 어딘가를 빼다 박은 듯하다며 관광 명소가 된 곳. 그래서 겨울에도 외지인이 무주에 많이 올 수 있게 만들어준 명소.
엄마는 언니가 입시생이라 스키장에 갈 시간이 없다고 했다. 소정이 그럼 아빠와 가겠다고 했지만, 엄마는 그것도 안 된다고 했다.
“왜?”
“아빠 바빠.”
맞는 말이긴 했다. 언니가 토요일과 일요일을 모두 대전에서 보내면서, 그러니까 첫차와 막차를 타고 무주와 대전을 오갔던 생활 대신 주말에 모텔을 잡아 엄마와 함께 자게 되면서, 아빠가 카센터는 물론 콩나물국밥집 주말 장사까지 책임져야 했다. 콩나물국밥집에는 주방 이모가 있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겼을 때 그를 처리해야만 하는 사장도 있어야 했다. 주말에는 관광객들이 오기에 그런 일들이 꼭 한 번씩 생겼다.
아빠는 엄마를 대신해 식당 일을 처리했다. 문 닫은 식당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곤 했다. 엄마 몰래. 술을 마시며 친할아버지도 공고에서 1등을 하던 아빠에게 서울에 가 일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본인은 두려워서 하지 못했다고 소정에게 일러주었다. 언니가 서울로 대학에 가려고 마음먹은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설명했다. 소정은 아빠에게 1등을 했던 시절이 있는지도 몰랐다. 무주에서 아빠는 그저 자동차 아저씨였다. 자동차를 잘 아는 아저씨 그리고 자동차를 좋아하는 아저씨. 소정은 그런 아빠가 좋았다.
그래서인지 아빠와도 놀 수 없다는 엄마의 말을 들을 때, 소정은 자기도 모르게 헛발을 찼다. 왠지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그저 세게 차버리고 싶었다.
소정은 떼를 쓰기 시작했다. 심심하다고, 놀자고, 나도 대전에 데려가라고, 심지어는 미술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엄마는 미술학원 얘기가 나올 때마다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깜짝깜짝 놀랐다. 미술학원 얘기가 소정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노력했다. 친구네에서 하루 자는 것도 허락해 줬고, 동네 개천으로 얼음 썰매를 타러도 함께 가주었다. 커다란 딱지를 접는 기분이 드는, 색깔이 아주 많은 크레파스도 사주었다. 그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릴 때, 소정은 늘 거실 한편에 혼자 엎드려 있었다.
어른들로부터 아기였을 때부터 울음 끝이 짧았다는 소리를 들은 아이답게, 소정은 금세 떼를 덜 쓰게 되었다. 그럼에도 언니를 보면, 온종일 다른 사람과 언니 이야기만 하는 엄마를 보면, 자신이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을 보고 ‘어어 나쁘지 않네’라고만 말하는 아빠를 보면, 소정의 광대뼈가 은근하게 달궈졌다. 소정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봐도 그 뜨거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눈이 많이 오는 어느 날이었다. 그림을 그리던 소정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 언니랑 눈 가지고 놀래.”
구멍이 숭숭 난 걸레(본래 콩나물국밥집에서 물수건으로 나가던 것이었다. 구멍이 나면 바로 버렸던 엄마는 언젠가부터 그걸 집에 가져와 걸레로, 행주로 쓰기 시작했다)로 집 장판을 닦던 엄마가 소정을 쳐다봤다. 티브이로 수능 강의를 보던 언니도 소정을 바라봤다. 소정이 말을 이었다.
“지금 눈 내리잖아. 잠깐 다녀올게. 응?”
밤이니 딱 10분만 놀고 오라는 허락을 맡고 소정은 언니와 다세대주택 앞 화단에 섰다. 눈싸움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텐데도 언니는 눈사람을 만들었다. 소정은 언니에게 눈싸움하자고 일렀다. 언니는 텅 빈 눈동자를 보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언니는 소정에게 먼저 던지라 했다.
소정은 하늘색 손모아장갑을 낀 손으로 열심히 눈 뭉치를 빚었다. 단단하게, 맞으면 아프게. 그리고 언니 쪽으로 힘껏 던졌다. 소정이 던진 눈이 언니의 오른쪽 어깨에 닿았다. 퍽 소리와 함께.
“시발. 너 미쳤냐?”
언니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소정을 바라보았다. 뾰족한 고드름처럼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을 냈다. 언니도 눈을 소정에게 던졌다. 소정은 다행히 그걸 피했다. 언니는 재빨리 더 많은 눈을 빚어냈고 계속 소정 쪽으로 눈 뭉치를 던졌다. 바닥에 닿은 눈 뭉치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소정은 겁이 났다. 저 눈에 맞으면 아플 게 분명했기에. 장갑을 벗고 빨리 눈을 뭉쳤다. 질 수 없었다. 눈을 세게 던졌다. 눈 뭉치가 언니의 다리를 때렸다. 명중했다. 소정은 다시 눈 뭉치를 빚었다. 손이 너무 차가워서 아렸지만 장갑을 낄 수는 없었다. 느려지면 바로 언니에게 공격을 당할 것 같았다.
“야, 김소정.”
소정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눈 뭉치가 소정의 얼굴을 가격했다. 소정은 급히 코 밑을 손으로 훔쳐보았다. 코피가 났을 것 같았다. 투명하고 찐득한 콧물만이 손에 묻어났다. 소정이 언니를 바라보았다. 언니는 손에 든 눈을 천천히 굴리며 소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정이 소리쳤다.
“얼굴에 던지는 게 어딨어!”
언니가 눈을 또 던졌다. 소정의 왼쪽 어깨에. 자연스럽게 소정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언니는 눈을 든 손을 한껏 위로 올렸다.
“그만해! 나 아파!”
언니는 손에 든 눈 뭉치를 바닥에 힘껏 던졌다. 다세대주택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소정에게 괜찮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 이어서 계속
[참고문헌]
Macke (1993). TASCHEN.
박현진 (2024). 『예술가의 속삭임을 관람객에게 들려주는 미술관 큐레이터』. 토크쇼.
비앙카 보스커 (2025).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오윤성 역). 알에이치코리아.
The History of Art. "August Macke Quotes". https://www.thehistoryofart.org/august-macke/qu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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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니치 미치(1회)터치 니치 미치 이상하 0장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소정은 갤러리 스페이스 디아워즈에서 근무한 반년 넘는 시간을 떠올렸다. 갤러리 사람들이 보는 지금의 자신은 어떤 모습일지 고민했다. 기획팀 팀장인 리사의 눈에는 아르바이트생을 괴롭히는 계약직일 터였다. 리사로부터 그만 돌아가 보라는 말을 들은 오늘만 놓고 보면 아르바이트생의 향수를 훔치는 말단 직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니, 반도 아니고 그 이상으로 리사는 착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본래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갤러리에서 일하며 이렇게 변한 것이었다. 그리고 향수도 훔친 게 아니라 주운 걸 제때 돌려주지 못했을 뿐이었다. 소정은 민규의 스마트폰 핫스폿으로 노트북에 인터넷을 연결했다. 개인 메신저를 켰다. 애써 대화방 섹션에 떠 있는 빨간색 동그라미를, 그 안의 숫자를, 352개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대신 친구 목록 스크롤바를 아래로 움직였다. 그놈의 스마트폰. 스마트폰만 어디 있는지 확실히 알았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소정이 거칠게 무선마우스를 움직였다. 스페이스 디아워즈의 리사, 사이먼, 애런 등의 직원과 아르바이트생 박연경의 계정이 눈에 들어왔다. 양조공장 주차장의 보도블록 경계석에 앉아 있는 자신의 엉덩이가 왠지 모르게 더 시렸다. 소정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메신저에 로그인한 이유를 떠올렸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사과, 죄송합니다, 진정성 있는 사과, 모두 다 제 불찰입니다,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것들만 생각났다. 곁에 앉아 있는 민규가 오렌지주스 캔을 건넸다. 소정이 마시다가 바닥에 내려놓은 것이었다. “더 마셔. 아니면 탕비실에서 과자 같은 거 갖다줄까?” 배고프겠다. 민규가 작게 읊조렸다. 소정은 캔을 받아 들며 괜찮다고 말했다. 주스의 인공적인 단내가 훅 끼쳤다. 그 냄새로 몇 주 전, 갤러리 티켓 데스크에서 주운 향수를 떠올렸다. 오프화이트 타일 위에 덩그러니 놓인 작은 유리병. 그걸 주우며 소정은 주인을 찾아주리라 마음먹었다. 달랑 병만 봐서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 향을 맡으면 생각날까 싶어 공중에 뿌려보았다. 갤러리의 디퓨저 냄새에 어릴 적 썼던 오이 비누가 떠오르는 향이 겹쳐졌다. 무주 본가 욕실과 동네 대중목욕탕 그리고 모텔 화장실 비눗갑에 눌어붙어 있던 에메랄드색 비누. 손바닥에서 몇 번 굴리면 금세 거품이 일며 퍼지던 비릿하고도 서늘한 냄새. 향수 냄새를 맡고 기껏 생각한 게 싸구려 오이 비누라는 사실에 코웃음이 났다. 소정은 익숙한 듯 낯선 냄새가 나는 향수를 손에 들고 오래 살폈다. 누구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 때문이었다. 일단은 사무실 책상에 올려놓고 조만간 주인을 찾아봐야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여러 일로 정신이 없어 향수의 존재를 잊고 말았다. 그럼에도 소정의 테이블에 있는 향수병을 보고 박연경은 다른 소리를 했다. 향수를 소정이 훔쳤다며 소리쳤다. “이거 제 거잖아요.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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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니치 미치예술의 자격 앞에서 서성이는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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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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