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레이드가 끝나면(2회)
- 작성일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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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가 끝나면
이한슬
아침인데도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전날 밤 창밖의 불빛을 가리기 위해 암막 커튼을 쳐둔 탓이었다. 휴대폰을 보니 오전 11시가 넘어 있었다.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주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 힘겹게 느껴졌다. 하룻밤 새에 몸이 아주 무거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빛 한 점 들지 않는 땅속에 안야를 남겨두고 맞이한 첫 번째 아침이었다.
마일로가 방문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기주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방으로 들어온 마일로는 안야를 찾는 듯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이내 자기 방석 위로 올라가 그를 등지고 앉았다.
거실로 나오자 먼저 일어난 요한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휴대폰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요한은 몇 시간 전에 로완과 연락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 사람, 안야 전화를 일부러 피한 것 같아요.”
요한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야의 휴대폰으로 걸었을 때는 계속 받지 않더니 자신의 전화로 걸자마자 바로 받았다고 했다.
“마일로, 원래 로완의 개였대요. 안야랑 살게 되면서 같이 키웠는데, 헤어지기로 했을 때 안야가 말도 없이 데리고 떠났다고요.” 안야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서야 로완은 입을 다물었다고 했다.
“아무튼 지금은 마일로를 데리러 올 수 없대요. 데려다주면 사례를 하겠다던데요.” 요한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기 개라면서 데리러 오지도 않다니…….”
요한은 그렇게 중얼거린 뒤에 기주를 향해 말했다. “저도 당분간은 데려다줄 수 없다고 했어요. 두세 달은 스케줄이 꽉 차 있거든요.”
“자네가 일하러 가면 마일로는 어떡하나.”
기주가 물었다.
요한은 돌봐줄 친구들이 많아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다들 마일로를 좋아하거든요.”
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일로에게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군.”
요한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마일로 산책시키고 올게요.”
리드 줄을 챙겨 든 요한이 마일로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혼자 남은 기주는 안야의 물건들을 마저 정리하기 시작했다. 안야가 마지막으로 벗어둔 옷이나 안경처럼 흔적이 남은 물건들은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결국에는 치워야 할 테지만 당장은 남겨두고 싶었다. 서너 개의 상자들을 채운 것만으로 안야의 방은 금세 휑해졌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말보로 레드 한 갑과 노란색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봉투는 밀봉되어 있지 않았고, 앞면에 ‘Rowan’이라고 쓰여 있었다. 안에 든 종이를 꺼내 펼치자 영문 필기체로 대여섯 줄 남짓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이번에도 첫 줄의 ‘Rowan’과 마지막 줄의 ‘Anya’만을 겨우 알아보았다.
산책에서 돌아온 요한이 기주를 불렀다. 그는 편지를 봉투 안에 다시 넣은 뒤 거실로 나갔다.
요한은 수건으로 마일로의 발을 닦아주고 있었다. 개 알레르기 때문인지 연달아 재채기를 해댔다. 식탁 위에는 요한이 사 온 샌드위치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아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먼저 식사를 마친 기주는 안야의 방에서 편지를 챙겨 식탁으로 돌아왔다.
“내가 마일로를 데려다주는 건 어떤가.” 기주가 식탁 위에 편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것도 같이 가져다주면 좋을 것 같은데.”
요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봉투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요.” 요한이 말했다.
기주가 이유를 물었다.
“마일로, 비행기 못타거든요.”
마일로 정도 크기는 케이지에 넣어서 비행기 화물칸에 실어야 하는데, 마일로가 케이지에 들어가는 걸 무서워한다고 했다. “안야에게 듣기로는 숨이 가빠질 정도래요. 서부에서 올 때도 차로 데려오느라 고생했다고 들었어요.”
잠시 고민하던 기주가 물었다. “차로 가는 건 가능하다는 얘기 아닌가?”
“아버님 혼자서요? 샌프란시스코까지요?”
요한이 기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3000마일은 될 거예요. 쉬지 않고 달려도 며칠은 걸려요. 그건 저한테도 힘든 거리예요.” 요한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주가 농담처럼 한 번 해본 말이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마일로는 제가 잘 데려다줄게요. 솔직히 내키진 않지만…… 안야가 부탁한 일이니까요.”
편지를 읽어보겠는지 묻자 요한은 자기 몫이 아니라는 듯 바로 고개를 저었다.
기주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 직사각형 붉은벽돌 건물들이 늘어선 대로변에는 차들이 드문드문 세워져 있었다. 한낮이었으나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은 잿빛이었고 공기도 눅눅했다.
기주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안야의 서랍에서 발견한 말보로 레드였다. 언제 챙겼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들이마시자마자 콜록거렸다.
“녀석 참, 독한 걸 피웠네.”
기주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끈 뒤 휴대폰을 꺼냈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경로를 검색하자, 미국 지도 위로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파란 선이 기다랗게 그어졌다. 화면 하단에는 2,900마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환산해 보니 4,700킬로미터였다. 숫자만으로는 얼마나 먼 거리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검색해 보았다. 기주에게 가장 익숙한 장거리였다. 400킬로미터가 조금 넘었다. 서울과 부산을 열두 번쯤 오가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터였다. 그 정도라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멀든 가다 보면 도착할 게 아닌가.
안야가 원한 일이라는 것만으로도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기주가 다시 이야기를 꺼내자 요한은 당황스러워했다.
“미국에 처음 오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이 나라는 정말 커요. 혼자 운전하면서 마일로까지 데리고 가려면 훨씬 더 오래 걸릴 거예요. 안야도 오는 데 일주일쯤 걸렸다고 했으니까요.”
요한은 기주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운전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에요. 계속 앉아만 있는데도 몸이 아파요.”
평생 몸으로 먹고살아 온 기주였다. 아직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요한은 장거리 운전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잠들어 버리거나, 한번 길을 잘못 들었다가 몇 시간을 되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적한 도로에서 사고가 나면 도움을 받기 어려울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혼자 가신다고 해도 말렸을 거예요. 그런데 마일로까지 데리고 가시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무모한 일이라는 건 나도 알지.”
잠자코 듣기만 하던 기주가 말했다. “다만 내겐 서둘러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고…… 그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면 해주고 싶네.”
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파 위에서 잠든 마일로가 색색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창밖은 어두워졌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요한이 입을 열었다.
“정 그러시겠다면…… 저는 이틀 뒤 시카고에 들렀다가 캔자스시티로 떠나요. 방향을 생각하면 아이오와시티까지는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봤자 2000킬로미터 정도니까, 반도 안 되는 거리지만요.”
요한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해준다면 나야 고맙지.” 기주가 말했다.
요한이 기주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야가 아버님을 닮아서 고집스러운 거였군요.”
“안야가 고집이 셌나?”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마음을 먹은 일은 절대 안 바꿨어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 물었다. “미국에 대해 모르시잖아요. 겁나지 않으세요?”
“이 나이에 겁날 것도 없지. 내게 처음 해보는 일이 몇 개나 남았겠나.”
기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내내 심각해 보이던 요한도 마침내 미소 지었다.
“웃으시니까 안야랑 더 닮았어요.”
기주는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면서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출발 하루 전, 기주와 요한은 떠날 준비로 온종일 분주했다. 요한은 마일로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을 설명했다. 사료는 아침저녁으로, 물은 서너 시간마다 챙길 것, 배변 패드에는 볼일을 보지 않으려고 하니 자주 산책시킬 것. 잘 짖지는 않지만 호기심이 많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고도 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는 리드 줄 꼭 채우세요.”
기주는 휴대폰 메모장에 꼼꼼히 받아 적었다.
요한은 기주의 휴대폰에 번역 앱을 깔고 사용법도 알려주었다. 기주가 한국말로 몇 마디 하자 영어로 번역된 음성이 나왔다.
“세상 참 좋아졌군.” 기주가 말했다. “이것만 있으면 문제없겠어.”
“가끔 틀릴 때도 있어요.” 요한이 웃으며 말했다.
기주는 가방 안주머니에 로완에게 전해줄 편지를 챙겨 넣은 뒤 환전해 온 달러를 세어보았다. 요한과 몇 번 식사를 한 것 말고는 돈을 쓴 일이 없었다. 샌프란시스코까지 가기에 부족한 건 아닌지 묻자, 요한은 괜찮을 거라면서도 만일을 대비해 렌터카와 숙소는 카드로 결제하는 게 좋겠다고 덧붙였다.
귀국행 비행기표도 바꿔야 했다. 요한은 기주 대신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삼십 분이 넘게 통화한 끝에 2주 후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출발하는 편으로 일정을 변경했다.
어느새 저녁 무렵에 이르렀다. 새벽에 출발해야 하니 일찍 자야 한다는 요한의 말에 기주는 안야의 방으로 향했다. 요한이 기주를 불러 세웠다.
“안야 물건들이요. 정말 다 정리해도 괜찮아요?”
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떠돌며 살아온 그로서는 당장 필요한 게 아니라면 물건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안야의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요한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안야 휴대폰을 가져도 되겠나.”
요한은 그렇게 하라면서 안야의 휴대폰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0418, 마일로의 생일이었다. 다만 몇 시간 전에 해지한 터라 사용은 할 수 없다고 했다.
“이거면 충분하네.”
기주가 안야의 휴대폰을 매만지며 말했다. 안야와 자신을 이어주었던 물건이었다.
동이 트기 전 기주는 요한, 그리고 마일로와 함께 집을 나섰다. 평생 건설 현장에서 일한 기주였으나 처음 보는 크기의 트럭에 말문이 막혔다. 트럭을 한 바퀴 돌아보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차체는 검은색이었고, 파란색 트레일러가 연결되어 있었다. 트레일러에 크고 작은 은색 소용돌이가 그려져 있었다. 타이어를 세어보니 열여덟 개나 되었다.
요한이 마일로의 물건이 든 노란 배낭과 안야의 방에 있던 쿠션을 뒷좌석에 실었다. 손으로 쿠션을 가리키자 마일로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성큼 올랐다.
“참, 이 녀석 차 타는 건 꽤 좋아해요.” 요한이 말했다.
두 사람도 트럭에 올라탔다. 내부 역시 꽤 넓었다. 층고도 높았다. 뒷좌석은 한 사람이 누울 수 있을 만큼 폭이 넓었고, 그 위로 수납장도 달려 있었다.
“여기서 살아도 되겠군.” 기주가 말했다.
요한은 생활용품이나 가구를 싣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실제로 차에서 자는 일도 많다고 했다. 요한이 쓰고 있던 볼캡을 챙이 뒤로 돌려쓴 뒤에 물었다.
“진짜 괜찮겠어요? 샌프란시스코까지는 정말 멀어요.”
기주는 뒷좌석에 있는 마일로를 보았다. 웬일로 마일로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출발하지.” 기주가 말했다.
트럭이 웅장한 엔진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
태오는 뉴욕에 와본 적이 있었다. 5년 전, 수리부엉이의 번식 과정을 촬영한 다큐멘터리가 뉴욕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초청되었을 때였다. 늦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무렵이었고, 촬영 일정 때문에 행사장과 호텔만 오가다 바로 떠나야 했다. 기억하는 건 공항에 오가는 택시에서 바라본 뉴욕 거리의 모습뿐이었다. 뼈대만 남은 앙상한 나무들이 거리에 줄지어 있었고, 사람들은 목을 움츠린 채 빠르게 걸었다. 삭막하고 쓸쓸한 분위기였다.
여름의 뉴욕은 사뭇 달랐다. 렌터카 수속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나오자 아스팔트에서 올라온 열기로 눈앞이 일렁였다. 순간 태오는 그 일렁임이 자신의 눈 때문인지, 실제 열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주 잠깐씩이긴 했지만 사물의 윤곽이 흐릿해지거나 중심부만 남고 주변이 어둡게 보이는 순간이 있었다. 밤에는 확실히 예전보다 사물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운전을 해도 될지 망설여졌으나, J. F. 케네디 공항에서 이경이 사는 포트리까지는 한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렌트한 차는 은회색 혼다 어코드였다. 해외에서의 마지막 운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고급 스포츠카라도 빌릴 걸 그랬나 하는 엉뚱한 후회가 들었다. 시동을 건 태오는 선글라스를 썼다가 다시 벗었다. 눈이 부신 것보다 조금이라도 잘 보는 편이 중요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양옆으로 물류 창고 같은 컨테이너 건물들과 붉은 벽돌 건물들이 이어졌다. 30분쯤 지나니 높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퀸즈 미드타운 터널을 빠져나와 맨해튼에 들어서자 풍경은 확연히 달라졌다. 유리 빌딩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고, 건물 외벽을 뒤덮은 전광판은 대낮에도 선명하게 빛났다. 출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정체가 심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 사이로 노란 택시들이 눈에 띄었다. 사이렌과 자동차 경적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횡단보도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자 사람들이 물살처럼 도로를 가로질렀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도 많았다.
태오는 운전석에 앉아 느긋한 마음으로 창밖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미국을 대표하는 도시답게 시야에 빈틈이 없었다. 그가 떠돌던 사막과 빙하, 평원이나 밀림과는 전혀 다른 압도감이 느껴졌다.
태오는 뉴욕에 와보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대도시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무관심했던 세계일지라도 제대로 보고 싶어졌다. 편도 비행기표만 끊어서 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경을 만난 뒤 미국 동부를 구경해 볼 생각이었다. 딱히 가보고 싶은 도시가 있지는 않았다. 촬영 때문에 여러 나라를 다녔어도 늘 공항과 숙소, 촬영지만 오갔을 뿐이었다. 이경에게 물어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허드슨강을 건너 이경이 사는 뉴저지의 포트리에 접어들자 태오는 이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기음만이 줄곧 이어졌다. 내비게이션에서 도착했다는 안내가 나왔다. 태오는 전화를 끊고 차에서 내렸다.
이경의 집은 하얀색 단층 목조주택이었다. 진회색 박공지붕에, 목제로 지어진 외벽은 하얀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집 주변 잔디들은 관리를 하지 않는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태오는 초인종을 눌렀다. 새 지저귀는 벨 소리가 울렸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몇 번 더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이경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대기음만 들리다가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 버렸다.
오기 전에 이경에게 전화를 해볼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미국까지 만나러 오겠다고 하면 괜한 부담을 줄까 봐, 도착해서 연락해도 충분하리라 여겼다. 집 주소를 알고 있으니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태오는 집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한낮인데도 거리는 한적했다. 드물게 차들이 오갈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집들도 대체로 낡고 바래 있었다. 방금 맨해튼을 지나와서인지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허기가 밀려들었다. 비행기에서 먹은 기내식이 마지막 식사였다. 맞은편에 햄버거가 그려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태오는 길을 건너 가게로 향했다.
식사를 마치고 이경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2시가 넘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초인종을 한 번 눌러본 뒤 집 앞 계단에 앉았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햇볕이 뜨거운 날이었으나 계단에 그늘이 들어 시원했다.
누나는 대체 왜 이 나라에 온 걸까.
비자 때문에 이경이 일을 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다였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경을 생각하면 언제나 춘천 고향집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어머니도. 아프기 전에도 어머니는 혼자 있는 걸 싫어했으므로 이경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거의 없었을 터였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태오는 고향집을 자주 가지 못했다. 너무 바쁜 나머지 자신이 고향집에 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쓰던 펜 하나 쉽게 버리지 못하던 이경이 고향집을 팔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이유를 고민해 보다가 태오는 자신이 이경이 그 집을 영원히 떠나지 않으리라고 여겨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도 집만 지키고 있지는 않는구나 싶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경이 이 도시에 있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직접 만나야 실감이 날 것 같았다.
오후 5시에 이르도록 이경이 오지 않자 요의를 참던 태오는 근처 카페로 향했다. 햄버거 가게에 다녀오면서 봐둔 곳이었다. 커피를 사 들고 돌아오니 2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별 기대 없이 초인종을 눌렀는데 집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문을 열어준 건 붉고 풍성한 곱슬머리의 라틴계 여자였다.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박이경이란 사람, 여기에 살고 있나요?”
태오는 영어로 물었다. 여자는 질문을 알아들은 것 같았는데 이경이 누군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태오를 경계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태오는 남동생이라고 말하고 나서 휴대폰에서 이경의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7년 전 태오의 결혼식 때 찍은 단체 사진이 남아 있었다. 고화질이라 확대해도 제법 또렷하게 보였다. 사진을 보여주니 여자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더 이상 여기 살지 않아요. 몇 달 전에 떠났어요.”
스페인계 특유의 억양이 강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아나요?” 태오가 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긴 잠깐 살다가 떠나는 사람이 많아요.”
여자는 집주인은 알 수도 있다면서 연락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집주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자는 급한 일이면 집주인이 맨해튼 33번가에서 한국 서점을 운영하니 직접 찾아가 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태오는 하는 수 없이 왔던 길을 거슬러 맨해튼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이라 도로는 차들로 가득했다. 휴대폰으로 서점 영업시간을 검색해보니 마감까지 1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공항에서 이경의 집으로 찾아올 때와는 달리 마음이 조급해졌다.
문을 닫기 20분 전에야 겨우 서점에 도착했다. ㄱ자 형태로 된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다. 벽마다 한국어로 된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시가 바뀐 것 같았다.
책을 정리하고 있는 직원에게 물으니 사장은 이미 퇴근했다고 했다. 급한 일이라고 하자 직원은 집으로 연락해 보겠다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태오는 서점을 둘러보았다. 정치, 경영, 문학, 자기 계발서, 한국에 있는 서점처럼 종류별로 코너가 나뉘어 있었다. 책들 사이에서 문득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지민의 요리책이었다. 표지 속 지민은 당차 보였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반드시 살아낼 사람처럼. 보정한 사진이라서 그런 탓도 있겠지만 지금의 지민에게는 사라진 생기가 느껴졌다. 출간 연도를 확인하니 벌써 5년 가까이 지나 있었다. 태오의 눈이 멀게 되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앞으로 지민이 웃는 일은 더 줄어들 터였다. 태오는 심란한 마음으로 책을 내려놓았다.
카운터에서 직원이 사장과 연락이 닿았다며 태오를 불렀다. 유선 전화 수화기를 건네받은 태오는 이경의 남동생이라고 말한 뒤,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이 되어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집주인이 태오가 집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이미 들은 터라 대화는 수월했다.
“그분 지난달에 나갔어요. 시카고로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집주인은 우편물을 보내주기 위해 적어둔 주소가 있다며 불러주겠다고 했다. 태오는 직원에게 메모지와 펜을 빌려 주소를 받아 적었다.
13214 S. Burley Avenue, Apt. 2B, Chicago, IL
차로 돌아온 태오는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시카고라니.
근처 어딘가로 집을 옮겼으리라고 추측했던 그는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메모지를 응시하다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검색했다. 차로 13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예전이라면 고민 없이 출발했을 터였다. 소규모로 다큐멘터리 촬영을 다니다 보면 하루 10시간이 넘도록 운전대를 잡는 일도 더러 있었다.
문제는 태오의 눈이었다. 낮에는 눈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도 있었지만, 밤에는 확실히 나빠졌다는 게 느껴졌다. 시야가 어두침침했고, 빛과 어둠의 경계도 선명하지 않았다. 눈에 무리가 되는 일은 피하라던 의사의 말도 떠올랐다.
어느새 해거름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그대로 시카고를 향해 출발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가 정 힘들어지면 그때 쉬어 갈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이경이 없는 도시에서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출발한 지 2시간도 지나지 않아 태오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도시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순식간에 해가 저물어 버렸다. 헤드라이트를 켰는데도 차선이 번져 보였다. 앞서가는 차들의 붉은 후미등도, 표지판의 글자도 마찬가지였다. 바짝 긴장한 채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줄였다.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히 밤이 깊어질수록 차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때였다. 눈앞에 검은 형체가 불쑥 나타났다. 태오는 브레이크를 세게 밟으며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타이어가 노면을 긁으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부딪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들이받기 직전에야 차가 간신히 멈춰 섰다. 너무 갑작스러워 야생동물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앞서 달리던 차였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앞차의 존재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뒤늦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참 동안 핸들을 붙잡고 있던 태오는 떨리는 손으로 내비게이션에 가장 가까운 휴게소를 검색했다. 휴게소 주차장에 도착하자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대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차 앞 유리로 들어온 햇빛에 얼굴이 뜨거웠다. 휴게소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여벌 옷으로 갈아입은 뒤 편의점에서 도너츠와 바나나, 생수를 구입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도너츠를 먹으며 이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대기음만이 이어졌다. 음성사서함에 일 때문에 미국에 왔다고, 메시지를 들으면 연락 달라는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걸고 다시 도로로 나섰다.
날이 밝자 눈 상태는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태오는 서너 시간 동안 운전에 집중했다. 정오 무렵 시카고를 알리는 표지판을 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시카고는 뉴욕과는 사뭇 달랐다. 공장이나 창고 같은 컨테이너 건물들이 많았다. 고층빌딩들도 있었지만 뉴욕처럼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지는 않았다. 철로를 지나는 기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서점 주인이 알려준 주소는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이었다. 낮은 벽돌 주택들이 늘어선 조용한 동네였다. 초인종을 누르니 백인 여자가 나왔다. 여자는 방 한 칸을 에어비앤비로 렌트하고 있다면서, 이경이 두 달 정도 머물렀고 일주일 전쯤 페스티벌에 간다며 떠났다고 말했다. 무슨 페스티벌인지 물었으나 거기까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여자의 뒤편에 서 있던 10대 후반의 딸아이가 태오에게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부서진 상아색 콘크리트 벽을 배경으로, 한 귀퉁이에 누군가의 뒷모습이 찍혀 있는 사진이었다. 단발머리에 검은색 상의와 바지, 어깨를 약간 웅크린 자세. 이경이었다. 뒷모습이었지만 태오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여기가 어딘가요?” 태오가 물었다.
“스틸워커스 파크예요.” 아이가 대답했다.
이경이 떠나기 며칠 전,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며 차를 태워달라고 해서 함께 다녀왔다고 말했다. “예전엔 제철소였는데 지금은 건물 벽만 남아 있어요.”
태오가 사진을 전송해 줄 수 있겠는지 묻자 아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로 돌아온 태오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휴대폰으로 ‘미국의 축제’를 검색해 보았다. 시카고가 속한 일리노이주에서 열리는 축제만 해도 수십 개였다. 페스티벌을 보러 간다는 사실만으로 이 거대한 나라에서 이경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경이 페스티벌에 가기 위해 떠났다는 이야기도 믿기 어려웠다. 태오가 기억하는 이경은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 마을 오일장에 가자고 하면 이경은 늘 집에 남고 싶어 했다. 어쩌다 따라나선 날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멀찍이 뒤따랐다. 앞서 걸어가던 태오가 돌아보면 이경은 늘 사람들에 치여 저만치 뒤처져 있곤 했다.
태오는 아이가 보내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이경이 서 있던 장소가 궁금해졌다. 내비게이션에 아이가 가르쳐준 지명을 입력하고 시동을 걸었다. 20분쯤 달린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입구에 서 있는 녹슨 철제 안내판을 지나 잡풀이 무성한 산책로를 따라가니 호숫가와 우뚝 선 콘크리트 벽이 나타났다. 사진 속 그 벽이었다.
태오는 휴대폰 사진과 눈앞의 풍경을 번갈아 보며 이경이 서 있었을 자리를 가늠해 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벽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곳곳에 금이 가거나 부서져 있었다.
누나는 왜 이런 곳에 오고 싶었던 걸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태오는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공원보다는 버려진 땅에 가까워 보였다. 풀이 자란 곳보다 흙이 드러난 땅이 더 많았다.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와 잘 어울리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오는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연락도 하지 않고 무작정 이경을 만나러 미국으로 온 것부터가 무모한 일이었다. 시력을 잃기 전에 이경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이경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기음만 줄곧 듣다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미국에 온 뒤로 열 통이 넘게 걸었는데도 이경에게서는 전화는커녕 문자 한 통 없었다. 외삼촌이 번호를 제대로 알려준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태오는 호수 앞 기다란 나무 벤치에 앉았다가 등받이가 부서진 걸 알고 일어섰다. 노을이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간밤의 일이 떠오르자 해가 지기 전에 차부터 반납하기로 마음먹었다. 차로 돌아와 가장 가까운 반납 장소를 검색한 뒤 서둘러 출발했다. 가는 동안 하늘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렌터카 반납 지점은 주차타워 건물 3층에 있었다. 직원에게 차 열쇠를 건네주고 건물 밖으로 나오니 해는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배가 고파졌다. 휴게소에서 간단히 먹은 뒤로 온종일 굶은 상태였다. 태오는 문을 연 식당을 찾아 거리를 걸었다. 몇 블록을 지나도 주택들만 이어졌다. 눈앞이 침침했고 빛들은 뭉개져 보였다. 간판처럼 보이는 형체가 보여서 다가가 보니 볼링 센터였다. 갈수록 거리는 한적해졌고, 간판이 켜진 곳들도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저 멀리 빨간색 네온 간판이 보였다. ‘Open 24 Hours’라는 글자가 태오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금세 쏟아붓기 시작했다. 태오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식당 문을 여니 커피와 빵 냄새가 풍겼다. 스페인계 중년 여자는 일행이 있는지 물었고 태오가 혼자라고 답하자 바 테이블로 안내해 주었다. 흰색과 빨간색이 어우러진 가게 안은 어릴 적 가족들과 종종 가던 패밀리 레스토랑을 떠올리게 했다.
태오는 직원에게 추천 메뉴와 커피를 주문했다. 몇 분 후 핫케이크와 프렌치프라이가 담긴 접시가 나왔다. 핫케이크는 지나치게 달았고 커피는 미지근했으나 음식을 남김없이 먹었다. 식사를 마치자 더는 미룰 수 없는 사실과 마주해야 했다.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늘 밤 묵을 곳을 찾고 한국행 비행기표를 예매한 뒤에 일단 돌아가자고, 이경과 연락이 닿을 방법은 나중에 다시 찾아보자고, 그리고 앞으로 달라질 자신의 삶과 마주해야 한다고 태오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휴대폰을 향해 있었다. 이경에게 전화 한 통만 온다면 지금이라도 만날 수 있을 터였다. 괜한 기대라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포기가 되지 않았다.
거세게 내리던 비가 조금 잦아들었다.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자리로 돌아오다가 문득 가게 한쪽 벽 앞에 멈춰 섰다. 코르크판으로 된 벽면 한가득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대부분 가게 안에서 찍은 사람들의 사진이었는데, 관람차나 대교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빈 그네를 찍은 사진에 태오의 시선이 머물렀다. 사람이 떠난 자리를 찍던 이경의 습관이 떠올랐다. 언젠가 인스타그램에서 이경의 계정을 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도 생각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훨씬 전이었으니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아이디라면 기억하고 있었다.
500miles_pik.
이경이 10대 시절부터 쓰던 이메일 주소였다. 어릴 적에 태오가 아이디의 뜻을 물었을 때 이경은 좋아하는 노래 제목과 이름의 이니셜을 합친 거라고 알려주었다.
태오는 인스타그램 검색창에 이경의 아이디를 쳐보았다. 계정은 있었으나 게시물은 한 개도 없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진을 올리는 일은 이경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경의 아이디를 구글 검색창에 넣어보았다. 그런데 블로그 주소 하나가 나왔다.
태오는 주소를 눌렀다. 검은색 바탕 화면 위로, 게시물로 보이는 사진들이 두 줄로 이어졌다. 마치 검은 격자창 너머의 풍경들처럼 보였다. 제목이나 카테고리는 없었다. 프로필 사진도 비어 있어서 이경의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태오는 게시물 중 하나를 눌러 보았다. 여러 장의 사진들이 세로로 길게 펼쳐졌다. 빈 의자와 테이블, 텅 빈 관객석, 길에 버려진 소파, 눈이 쌓인 버스 정류장. 글은 없었고, 사진 아래에 날짜로 보이는 작은 숫자들만 적혀 있었다. 사진을 찍은 날인 듯했다.
사진 속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경의 블로그가 맞는 것 같았다.
스크롤을 한참 내리다가 게시물 하나를 눌렀다. 고향집 동네처럼 보이는 듯한 풍경이 나왔다. 낯익은 골목과 오래된 담장, 비어 있는 운동장. 태오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소들도 있었다. 다른 게시물에는 안개가 자욱한 브루클린 다리나, 행사가 끝난 후 빈 의자들만이 남은 타임스퀘어처럼 뉴욕에서 찍은 게 확실해 보이는 사진들이 있었다.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영문 간판들이 켜진 밤거리, 문 닫힌 상점 앞에 놓인 의자, 건물 앞 계단, 적갈색 철교, 마지막으로 텅 빈 벤치를 찍은 사진에서 태오의 시선이 멈추었다. 몇 시간 전 공원에서 자신이 앉았던 바로 그 벤치였다. 한쪽 등받이가 부서져 내려앉은 모양이 똑같았다. 사진 아래 적힌 날짜는 2주 전이었다. 이경과 자신이 얼마 간격을 두지 않고 같은 공간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새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태오는 가장 최근에 업로드된 게시물을 눌러보았다. 나흘 전에 올린 것으로, 사진은 총 네 장이었다. 음료 캔이 놓인 빈 벤치, 널브러진 낡은 자전거, 연못에 묶여 있는 빈 보트, 그리고 연못 앞 동양풍의 붉은 누각이 찍힌 사진이었다. 마지막 사진을 제외하면 모두 미국처럼 보였다.
태오는 마지막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나무들보다 높이 솟은 붉은색 목조탑과 지붕의 형태는 확실히 동양식이었다. 누각 뒤편으로, 멀리 고층빌딩들이 보이긴 했지만 미국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미 다른 나라로 떠났을지도 몰랐다. 태오는 다시 막막해졌다.
그때 식당 안으로 두 동양인 남자가 들어왔다. 청년처럼 보이는 남자는 녹색 캡에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 무릎 위까지 오는 베이지색 카고팬츠 차림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는 진회색 반집업 등산용 티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태오의 뒤편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언뜻 부자지간처럼 보였는데,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나이 많은 남자가 청년을 줄곧 “자네”라고 불렀다. 여행 중인 모양인지 도시나 지명이 계속 들려왔다. 주로 청년이 말을 했다. 원어민 발음이었고, 미국 지리에 익숙한 듯했다.
“아이오와시티보다 좀 더 같이 갈 수 있어요. 한 100마일 정도? 디모인에서 내려야 할 짐들이 있거든요.”
“자네가 알아서 하겠지.” 중년이 말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태오의 머릿속에 청년이라면 이경의 블로그 사진 속 장소를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평소라면 낯선 사람에게 뭔가 물어보는 건 질색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태오가 말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태오를 바라보았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여쭤봐도 될까요?”
태오가 휴대폰을 청년에게 보여주었다. 청년이 알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해볼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청년은 태오의 휴대폰 속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아시안 가든 같은데.” 청년이 말했다. 화면을 위로 올려 다른 사진들도 살펴보더니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디모인 맞네요. 아이오와주에 있어요.”
“여기서 먼가요?” 태오가 물었다.
“차로 네다섯 시간쯤 걸려요.” 청년이 대답했다.
태오는 차를 반납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반납하지 않았더라도 운전은 더 이상 무리였다.
“차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태오가 물었다.
“글쎄요. 작은 도시라 찾아가기가 쉽지 않을 텐데…….” 청년은 태오의 난처한 표정을 보더니 물었다. “근데…… 지금 당장 디모인에 가고 싶은 건가요?”
“네.” 태오가 말했다. “급히 가야 할 일이 생겨서요.”
청년은 잠시 태오를 바라보았다.
“저희도 거기로 가는 중인데, 같이 갈래요?” 그렇게 말한 후에 중년 남자를 향해 물었다. “아버님, 괜찮죠?”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오는 초조해졌다.
“부탁드립니다.” 태오가 머리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사례는 하겠습니다.”
“차에 개가 있어서 불편할 텐데……”
남자가 몸을 뒤로 젖히며 중얼거렸다. 태오는 괜찮다고 답했다. 남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밤, 요한과 기주, 태오, 그리고 마일로가 탄 트럭이 디모인을 향해 출발했다. 뒷좌석에 탄 태오는 이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란한 트럭 엔진 소리에 휴대폰을 대지 않은 귀를 손으로 막았다. 이번에도 들을 수 있는 건 대기음뿐이었다. 전화를 끊은 뒤 그는 이경에게 디모인으로 가는 중이라고, 아직 그곳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태오는 디모인에 간다고 해서 이경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서라고는 이경의 것으로 보이는 블로그 속 사진뿐이었다. 이경이 아직 거기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실마리를 발견한 이상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태오는 디모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무엇일지 상상해 보았다. 이경을 만나게 되는 순간일지, 아니면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일지. 어느 쪽이든 분명해지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었다.
옆에서 개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차 안이 어두운 탓에 또렷이 보이지는 않았다. 태오가 손을 내밀자, 개는 잠시 냄새를 맡더니 손끝을 살짝 핥았다. 따뜻한 혀의 감촉이 전해졌다.
요한이 라디오를 켰다. 태오에게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500 Miles, 이경이 좋아하던 바로 그 노래였다.
당신이 내가 탄 기차를 놓쳤다면,
당신은 내가 떠난 걸 알게 될 거예요.
100마일 밖에서 울리는 기적 소리만이 들려오겠죠.
100마일, 200마일,
300마일, 400마일,
집에서 500마일이나 멀어졌어요.
이대로는 이대로는
이대로는,
집에 갈 수 없어요.
노래를 들으며 태오는 눈을 감았다. 금세 잠이 들었다. 미국에 도착한 이후로 그토록 깊이 잠든 건 처음이었다.
제2장. 안나 혹은 안야
*
퀸즈에서 출발한 이후로 요한은 안야와 있었던 일들을 기주에게 들려주었다. 영어를 못했던 자신에게 안야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던 열 살 무렵의 일. “안야는 저한테 영어를, 저는 안야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줬어요.” 1년 반 전, 돌연 마일로와 함께 서부에서 돌아오더니 같이 살자고 했던 일. 함께 사는 동안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유튜브에서 레시피를 보며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던 일도 이야기했다. “솔직히 맛은 없었어요. 둘 다 요리를 못하거든요.”
이야기에는 두서가 없었다. 열한 살의 안야 다음에 서른세 살의 안야가 나왔다가, 학창 시절 안야로 돌아갔다. 기주는 잠자코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다. 들을수록 안야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안야를 얼마나 몰랐는지만 선명해졌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시카고 다이너에서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된 한국인은 너무 조용한 나머지 차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요한은 뒷좌석을 돌아보더니 라디오를 끄고 작은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마일로에 대한 당부를 재차 한 뒤 미국에서 조심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었다. 주유소가 일찍 문을 닫거나 한참 동안 없을 수도 있으니 기름은 자주 채우고, 도둑들의 표적이 되지 않게 가방은 트렁크에 두라고 했다. 경찰이 쫓아오면 바로 갓길에 차를 세워야 하며 행여 시비를 거는 이들이 있다면 무조건 시선을 피하라고도 덧붙였다. 말하는 내내 코를 훌쩍거리기에 감기에 걸렸는지 기주가 물었다. 개 알레르기약을 챙기는 걸 깜빡했다면서 요한이 웃었다.
“아무튼 숙박은 가능하면 아시안이 사는 지역으로 가세요. 한인타운이면 더 좋고요.”
디모인에서부터 기주와 마일로만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요한은 걱정이 많아 보였다. 기주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평생을 떠돌며 살아온 그로서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미국이든 한국이든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얼마나 멀든 어차피 자신은 운전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가만 보니 미국의 도로는 한국보다 간격도 넓고 차선도 많아서 운전하기에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마일로를 위해 자주 쉬어가야 하는 건 기주에게도 반가운 일이었다. 예순이 넘은 이후로 요의를 참는 일이 부쩍 어려워졌다. 번역 앱을 사용하는 법도 배웠으니 휴대폰만 잘 챙기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느냐고, 기주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요한이 되물었다.
“만약 휴대폰이 안 터지는 곳이면요?”
기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되지 않겠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는 건 기주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님은 미국을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요한이 말했다. “다행히 체격이 크셔서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을 것 같긴 하지만요.”
요한은 자신에게는 이유 없이 시비를 걸거나 욕을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그래서 가끔은 영어를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한다고 했다. “퀸즈에서 20년을 넘게 살았는데, 며칠 전에도 어디에서 왔는지 대답해야 했죠. 이 나라에선 저를 그저 영어 잘하는 동양인으로만 볼 때가 많아요.”
요한이 속상하다는 투로 말했다. 기주는 요한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는 데 말만 통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미국은 원체 다양한 사람이 살지 않나.” 기주가 말했다.
“그 말은 맞아요. 이민자의 나라니까요.” 요한이 대답했다. “그런데 사람이 많은 거랑 받아들여지는 건 다른 문제예요.”
요한은 말을 고르는 듯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닫힌 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아요. 열어주기 전에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문이요.” 요한이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 그래요.”
기주는 요한이 말하는 ‘우리’가 이민자를 뜻하는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다 문득 요한이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던 말. 그제야 이민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기주는 여전히 요한의 말이 와닿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는 사는 동안 누구에게도 이해받기를 바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곁을 내주지 않으려 애를 쓰며 살아온 사람에 가까웠다. 다시는 누구도 자신을 버릴 수 없도록.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오래되어 이제는 그런 삶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안야랑 같이 살면서는 그런 생각 안 들었어요. 뭐랄까……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처음으로 돌아갈 곳이 생긴 기분이었어요. 안야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요한의 말을 들으며 기주는 안야와 전화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룸메이트에 대해 말할 때면 안야의 목소리는 늘 밝고 신이 나 있었다. 그래서 기주는 안야가 룸메이트와 사이가 좋은가 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 상상한 안야의 룸메이트는 요한과는 전혀 달랐다. 안야와 비슷한 또래의 백인 여자일 거라고 상상했다.
“안야도 좋았을 걸세.”
기주가 말했다. 요한이 미소 지었다.
캄캄한 도로에는 차들이 드문드문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중에는 요한의 트럭보다 두세 배쯤 커 보이는 트럭들도 있었다. 기주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트레일러에 그려진 그림이나 무늬는 제각각 달랐고, 차체를 에워싼 화려한 조명이 어둠 속에서도 번쩍거렸다. 어릴 적 집 근처 유원지에서 밤에 보았던 놀이기구가 생각났다.
“참, 산책할 때 꽃 근처 가지 마세요. 마일로 저 녀석, 꽃을 먹거든요.”
요한이 말했다. 안야가 일하던 꽃 가게에서 시든 꽃들을 가져왔다가 거실이 난장판이 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안야가 미술관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기주가 물었다.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간 엔진 소리가 트럭 안을 메웠다.
“실은, 3개월 전에 관뒀어요.”
얼마 후 요한이 말했다. “안야에게 술 문제가 있었거든요. 힘든 시간이었지만 좋아지고 있었어요. AA에도 꾸준히 나가고 있었고요.”
“그게 무슨…….”
기주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안야가 일을 관둔 시기와 자신에게 처음 연락해 왔던 시기가 겹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기주가 아는 건 안야의 전화를 받았던 순간 자신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안야가 언제부터 자신의 연락처를 알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때였다. 뒷좌석에서 창문에 머리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요?”
요한이 룸미러로 뒷좌석을 보며 말했다. “도착하려면 아직 서너 시간 더 남았어요. 해가 뜰 즈음에야 도착할 거예요.”
“네.”
뒷좌석에서 짤막한 대답이 들려왔다.
“김요한이에요.” 요한이 말했다. “저는 하프 코리안이에요. 그리고 여기는…… 그러고 보니 아버님 이름을 모르네요.”
“함기주요.”
기주가 말하자 뒷좌석에서도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태오입니다.”
기주는 안야에 대해 더 듣고 싶었으나 요한의 관심은 태오에게 향해 있었다. 비슷한 또래를 만나서인지, 한국인을 만나 반가운 건지 들떠 보였다. 태오가 짧게 대답만 하는데도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요한과 태오가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기주는 태오가 마흔한 살이라는 것과 자신처럼 한국에서 미국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한이 왜 차를 렌트하지 않았냐고 묻자, 태오는 잠시 말이 없더니 눈이 나쁜데 안경을 들고 오지 못했다고 답했다.
기주는 태오와 동행하기로 한 일을 뒤늦게 후회했다. 디모인에 도착해 요한과 헤어지고 나면 안야에 대해 더는 들을 수 없을 터였다.
“신기하죠? 거기서 한국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어요.”
요한은 24시 다이너라 일하러 왔다가 늦은 시간이면 종종 가긴 하지만 음식들은 하나같이 형편없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디모인에 왜 가는지 물어봐도 돼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요한은 뭔가 더 말해주길 기다리는 듯했는데, 태오가 한 말은 그게 다였다.
태오가 디모인에 유명한 축제가 있는지 묻자, 요한은 주말에 디모인강 근처에서 파머스 마켓이 열리긴 하지만 축제까지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디모인 자체가 관광객이 많은 도시는 아니라면서, 스위트콘이 유명하니 꼭 먹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나저나 두 분 다 캐리어 하나 없이 가방만 들고 미국에 오신 거예요?”
요한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신나 보였지만 기주도, 태오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일로가 낑낑거리자 요한이 잠시 쉬어 가자고 했다. 트럭이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작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헤드라이트가 비춘 곳에는 편의점으로 보이는 단층 벽돌 건물과 주유기 몇 대가 보였다.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태오는 차에 있겠다고 해서 요한과 기주만 트럭에서 내렸다. 마일로는 뒷문을 열어주자마자 차에서 뛰어내렸다. 미처 리드 줄을 연결할 틈도 없었다. 바닥 냄새를 맡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마일로가 주유기 근처에서 한쪽 다리를 들고 볼일을 보더니 요한을 향해 뛰어왔다. 요한이 마일로의 목줄에 리드 줄을 연결했다.
기주는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퀸즈에서 출발한 뒤로 쉬어 갈 때마다 요한이 기주에게 마일로 산책을 시키는 바람에 담배를 피울 겨를이 없었다. 이번에도 요한은 기주에게 리드 줄을 내밀었다.
“이번엔 자네가 좀 해줘.”
기주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허공에 흔들어 보였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과 마일로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주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새벽 4시, 세상은 여전히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한낮의 열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옷 사이로 한기가 약간 스며들었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요한에게 안야의 ‘술 문제’에 대해 다시 물어볼지 고민하던 기주는 마음을 접었다. 이제 와 사정을 들은들 괜한 캐묻기만 될 터였다. 안야가 왜 꽃집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았는지는 궁금했다. 어쩌면 말해줬는데 알아듣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한국어가 서툰 안야가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말하는 바람에 기주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옷장 위에 꽃병을 올려둔 이유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트럭 문이 열리고 태오가 내리는 게 보였다.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멀리서 봐도 초조한 기색이었다. 기주는 담배를 문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는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태오는 망연자실한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였다. 태오의 손에서 휴대폰이 툭, 하고 떨어졌다. 태오가 허리를 굽히고 바닥을 더듬거렸다. 떨어진 위치를 가늠하지 못하는 듯 두 손을 이리저리 뻗어 바닥을 더듬거렸다.
기주는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끈 뒤 태오에게 다가갔다. 휴대폰을 주워 태오를 향해 내밀었다.
“여기.”
기주의 말소리에 태오가 놀란 듯 움찔했다. “나도 늙어서 침침한 날이 많은데, 젊은 양반이 나보다 더 까막눈이네.”
기주는 웃으면서 태오의 손에 휴대폰을 쥐여 주었다. 태오의 뒤편으로, 트럭을 향해 돌아오는 요한과 마일로가 보였다.
“그만 갑시다.”
기주는 그렇게 말하며 트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적막한 새벽이라 발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뒤를 보니 태오가 따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트럭에 시동을 건 뒤 요한은 아이오와주에 거의 다 왔다고 말했다. 기주는 그게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서쪽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았다.
“디모인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태오가 물었다.
“두 시간 정도요.” 요한이 대답했다.
출발하자마자 기주는 졸음이 밀려왔다. 운전을 하는 요한에게 미안한 마음에 잠을 쫓기 위해 애를 썼으나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졌다. 뒷좌석에 있는 태오와 마일로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기주는 고개가 앞으로 툭 떨어지는 느낌에 놀라 깨어났지만 금세 다시 눈이 감겼다. 결국 요한을 제외한 모두가 잠에 빠져들었다. 밝아오는 하늘을 뒤로한 채 트럭은 서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
트럭 안에서 눈을 떴을 때, 태오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한밤중에 자다가 일어난 것처럼 눈앞이 캄캄했다. 요란한 트럭 엔진음이 아니었더라면 꿈속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태오는 눈을 천천히 깜빡여 보았다. 눈이 어둠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이 지나도 희미한 빛 덩어리만 아른거렸다. 홀로 시카고까지 운전해서 올 때도 시야의 주변은 어두워도 중심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몇 시간 전 휴게소에서 휴대폰을 떨어뜨렸을 때보다도 더 나빠진 것 같았다. 밤에는 일시적으로 증상이 심해질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곱씹으며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서인지 후각이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트럭 시트에 밴 석유 냄새에 머리가 아팠다. 개 냄새도 났지만 이틀째 씻지 못한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가 더 거슬렸다. 기주의 코 고는 소리가 엔진음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일어났을 때는 아침이었다. 해가 뜨자 눈앞의 풍경은 다시 선명해졌다. 시야 주변부가 살짝 흐려진 감이 있었지만, 대체로 문제없이 보였다.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태오는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로 양옆으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숲이 잠깐씩 끊길 때마다 잿빛 호수와 낮은 언덕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뒤로 밀려났다.
진동음에 황급히 휴대폰을 확인했다. 지민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태오는 이경의 연락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지민의 문자는 잘 도착했는지, 일은 잘되고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태오가 출장 갈 때면 지민은 늘 문자로 안부를 확인했다. 답장을 재촉하거나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카메라를 마주하고 있을 태오에게는 눈앞의 장면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사실을 지민은 잘 알고 있었다.
태오는 잘 도착했고 촬영도 잘 하고 있다고 짧은 답장을 보냈다. 일은 그만두고 이경을 만나러 미국에 왔다는 사실을 숨긴 게 마음에 걸렸으나 자신의 병에 비하면 이 정도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었다.
트럭 안으로 아침 햇살이 들이치자 요한이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켰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요한이 물었다. “이것도 인연이잖아요.”
태오는 요한이 피곤하게 느껴졌지만 그러라고 대답했다. 디모인에 도착하면 곧 헤어질 사이였다. 해외 촬영을 다니다 보면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한국인을 우연히 마주칠 때가 가끔 있었지만, 그런 상황을 특별하게 여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요한이 아니었더라면 이경이 디모인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허탈한 마음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을 터였다.
요한이 디모인에 거의 다 왔다며 태오에게 물었다. “형, 로버트 D. 레이 아시안 가든에 내려주면 되는 거죠?”
태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약속이 몇 시인지 묻는 말에는 도착해서 연락하면 될 것 같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얼마 후 거주용 건물들과 사무용 빌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건물도, 사람도 많지 않은 작은 도시였다. 창밖으로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과 문을 여는 상점들이 보였다. 태오는 마지막인 것처럼 눈앞의 세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마일로가 잠결에 몸을 뒤척이더니 태오에게 몸을 기대왔다.
“신기하네요. 마일로는 남자를 안 좋아하거든요.”
요한이 뒷좌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태오가 손으로 마일로의 등을 쓰다듬었다. 마일로는 귀를 까딱거릴 뿐 태오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렌즈를 통해 동물을 바라볼 때는 느낄 수 없는 온기가 손바닥에 느껴졌다. 문득 어릴 적 이경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동네 개들이 다 널 좋아해.
간식을 챙겨주는 건 자신인데, 왜 다 너를 따라다니는지 모르겠다며 이경이 말했다. 우리 태오가 착해서 그런가. 이경이 빙그레 웃으며 태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경은 더 이상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요한이 기주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자 잠들어 있던 기주가 몸을 일으켰다. 대화를 들어보니 기주와 요한은 디모인 하역장에 짐을 내린 다음에 함께 점심을 먹고 헤어지는 모양이었다.
창밖으로 붉은색 중국식 누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3층으로 된 탑 꼭대기가 나무들보다 훨씬 높게 솟아 있었다. 태오는 배낭을 챙겨 들었다. 기주도 창문을 열더니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렸다.
“짐 내리러 다녀올 동안 나도 여기 있어도 되겠나? 공원 같은데, 여기서 마일로 산책시키고 있겠네.”
기주의 말에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트럭이 멈추자 기주는 내려서 뒷좌석 문을 열고 마일로의 목줄에 리드 줄을 연결했다. 사료와 물이 든 배낭을 챙겨 든 뒤에 줄을 살짝 당겨 마일로를 트럭에서 내려오게 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요한을 바라보았다. 요한이 기주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태오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요한에게 차비를 내겠다고 말했다. 요한은 거절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제가 올 때까지 마일로랑 같이 있으면 안 될까요? 아버님이 개에 대해 영 몰라서요.” 요한이 속삭이듯 말했다. “마일로가 아버님을 별로 안 좋아해요.”
태오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신세를 진 마당에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가능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자 요한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한 시간이면 돼요. 금방 돌아올게요”
요한이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며 트럭을 출발시켰다. 트럭은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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