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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신을 탐구하는 순례자를 위한 안내서(2회)

  • 작성일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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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에 대항하기 위해 준비할 것들: 1장, 코어 근육 단련하기



 모든 영혼은 죽지 않네. 그 이유는 이렇지. 항상 운동하는 것은 죽지 않지만, 다른 것을 운동하게 하면서 다른 것에 의해 운동하는 것은 운동이 그치면 삶도 멈추네.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것만이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운동하기를 멈추지 않고, 뿐만 아니라 운동하는 다른 것들에 대해 운동의 원천이자 시원이 되네. 그러나 시원은 생겨나지 않네. 시원은 어떤 것으로부터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지. 만일 시원이 어떤 것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시원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네.1)



 많은 순례자가 차근차근 쌓아 올린 놀라운 업적들을 통해 그림자 신의 존재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임이 밝혀졌을 때, 대다수 순례자를 정말 놀라게 했던 것은 그림자 신이 정말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그림자 신의 존재가 확증됨으로써, 우리에게 몸뚱이와 분리된 혼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확증되었다는 점이다. 당신이 젊은 순례자라면, 더욱이나 특별히 역사에 관심이 있는 편도 아니라면, 과거의 순례자들이 느꼈던 놀라움이 새삼스럽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분명 그것이 명확한 진리로 받아들여지기 전부터, 대다수 순례자는 (그들이 순례자라는 사실이 알려주듯) 그림자 신이 존재하리라 믿었고, 따라서 살아서는 그림자 신에게 삼켜지는 방식으로밖에 찾아갈 수 없는 다른 세계(당시엔 이를 주로 ‘저승’이라 표현했는데)가 우리의 몸뚱이가 본래의 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을 때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온 혼이 빨려 들어가는 세계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아는 것과 자신의 믿음이 개인의 앎과 무관한 불변의 진리로 확증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 사이에는 하나의 세계와 다른 하나의 세계 사이만큼이나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다. 하물며 그림자 신에게 삼켜지는 방법이 지금만큼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던 당시에는 아직 그 다른 세계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세계를 가리키는 것인지, 혹시 그것이 많은 신화에서 증언되는 바와 같이 죽은 이들만이 모여 사는 세계를 지칭하는 것인지(‘저승’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당시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가 많았다. 일상을 지탱하는 사사로운 믿음이란 이처럼 단단한 법이다), 아니면 지금에 와선 순례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그저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 세계와 아주 많은 부분이 같은, 그러나 적지 않은 차이를 가진 또 하나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인지조차 아는 이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극소수의 선지자만이 그림자 신에 대한 몇몇 불확실한 진실에 대해 소박한 앎을 주고받았던 시대, 지금에 와선 누구나 당연하게 순례자라 부르는 그들을 그들 자신조차 순례자라 부르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 여명기부터, 그림자 신은 하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관문 역할을 했으며, 이 변덕쟁이 신의 은총 없이, 즉 ‘관문’을 통과하지 않은 채로 세계 사이의 경계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은 혼2)뿐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명확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이 사실은 여러 논증을 통해 차차 정밀하게 다듬어진다. 당신이 순례자라면, 최소한의 상식을 갖춘 순례자라면, 혼이 세계 사이의 경계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임을 알고 있으리라.3) 또한 그렇게 이동한 혼이 도착하는 곳이 대개 그가 바로 직전까지 거주하고 있었던, 다시 말해 그것이 본래 세계에서 마지막에 있었던 장소와 모든 면에서 거의 같은 장소,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아주 높은 확률로 존재하거나 적어도 존재했을 장소, 생전 처음 겪는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 다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을 우리의 혼 입장에선 의심 없이 제 몸뚱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그런 도플갱어적 육체의 인근이라는 사실 역시. 순례자들의 탐구가 그처럼, 이후 많은 도시 전설과 설화에 대해 그랬듯, 의도치 않게 서구 문화권에 전승되어왔던 도플갱어 괴담의 기원을 파헤치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진부한 농담조차 아니다(아직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혼이 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몸뚱이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은 다른 혼을 본다면 어떤 마음을 먹을지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막 여명기가 끝났을 무렵, 그림자 신의 존재가 확증되고 순례자라는 표현이 막 정착되었을 즈음이다. 당신이 역사에 관심이 많은 순례자라면, 우리가 이 고리타분한 시대를 새삼 환기하는 것에 불만을 느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시대는 짧지 않은 순례사 중에서 가장 많은 헛소문이 판쳤던 시대, 아직 그림자 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세간의 사람들에게 볼썽사나운 추태들을 보인 탓에 순례자들은 물론 그림자 신에게까지 여러 참을 수 없는 오명이 들러붙게 만든 시기이기 때문이다. (때로 냉소주의에 찌든 몇 순례자는 차라리 이 시기 순례자들과 그림자 신에 대한 세간의 이미지가 완전히 끝장나 버렸어야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적어도 그랬다면, 훗날 이와 같은 역사를 직접 겪어보지 않은 혈기왕성한 후발주자들이 과학적인 방식으로 그림자 신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신문사와 방송사를 끌어들인 탓에 순례자들이 온 세상에 지구평평설이라든가 지구공동설의 주창자와 동급의 미치광이 집단으로 낙인찍힐 일은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미신과 광기의 시대. 치욕스러운 암흑기. 요새 순례자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당신의 불만은 합당하다. 더욱이나 이 시리즈의 이름은 다름 아닌 ‘미신에 대항하기 위해 준비할 것들’이 아닌가? 그러나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밤은 그림자 신을 목도하기 가장 어려운 시간이지만, 동시에 당신의 눈으로 가늠할 수 없는 그 모든 곳에 그림자 신이 임재해 있을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아아, 한낱 심심풀이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여졌던 괴담들 속에, 얼마나 많은 진리의 흔적이 숨어 있었는지!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치욕스러운 시대로부터, 치욕과 함께 이 시대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어리석은 자들(어리석은 시대를 다만 어리석은 시대로 여기는 이들이야말로 진실로 어리석은 자들일지니!)은 결코 발견해내지 못할 귀중한 지혜를 길러내는 일이다. 따라서 이 시리즈에서 우리는 바로 그 어리석음의 시대, 미신과 광기의 시대에 발견된 탓에 온당한 위상을 얻지 못한 많은 유용한 정보를 소개할 것이며, 또한 (여하간 시대적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이 정보들을 어떻게 하면 현대적인 이해와 정서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볼 예정이다.

 자, 그렇다면 그 첫 번째는 무엇일까? 아마 당신도 이런저런 미디어 매체를 통해 들어본 적 있으리라. 우리가 처음으로 살펴보게 될 것은 ‘코어 근육’이다. 당혹스러운가? 분명 당신이 짐작하는 대로 이 암흑기에는 아직 어느 문화권에서도 ‘코어’라는 표현이, 누군가 그 비슷한 표현을 썼을지언정, 요새와 같은 방식으로 공공연하게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본래 ‘단전(丹田)’이었다. 문화권이 다른 순례자 사이의 교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현대에 비해선 현저히 적었던 만큼, 이에 대한 관심이 주로 아시아의 특정 문화권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음은 당연하다. (물론 서구권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4원소설을 기반 삼아 비슷한 일이 시도되긴 했다. 그러나 후술할 경우와 달리 정말이지 미신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그 처참한 노력들에 대해 긴 얘기를 덧붙일 필요는 없으리라) 순례자들이 주목한 것은 설령 그 모든 것이 도교에서 말하는 단전과 의미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된 것은 아닐지라도, 아시아의 여러 문화권에서 단전 내지는 그와 유사한 ‘장소’에 대한 전승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기(氣)라 부르건 내공(內功)이라 부르건 차크라(चक्र)라 부르건, 단전은 언제나 육체를 초과하면서 동시에 물리적 세계에 특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상의 힘이 거주하는 장소였다. 따라서 그림자 신의 존재와 함께 혼의 존재가 확증된 시대, 단전이 혼과 모종의 연관을 가진 장소로 상상되었던 것은 놀랍지 않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어처구니없는 미신이 얼마간 진실에 가닿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이 ‘단전주의자’들은 한 가지 잘못된 판단을 했다. 어찌 보면 전승과 이야기에서 묘사되는 바를 지나치게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인데, 이들은 단전을 육체의 특정 지점을 점거하고 있는 영혼의 반신처럼 여겼던 것이다. 이들에게 단전이란 육체이나 육체가 아닌 것, 육체의 형상을 띤 영혼의 한 기관이었다. 따라서 단전주의자들은 그것을 옭아매며 동시에 보호하고 있는 단단한 몸뚱이에 막혀, 자신의 것임에도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혼을 단련하기 위해 단전을 단련했다. 단련의 목적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단련을 통해 죽지 않은 채 혼의 통제권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고, 어떤 이는 죽음 이후의 상황을 대비하고자 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도 단전은 어디까지나 혼의 ‘한 기관’이었을 뿐이므로, 단전의 단련이 혼 전체의 단련을 보장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오로지 단전 단련에만 집중했는데, 그것이 그 국소적인 단련이 점진적으로 혼 전체의 단련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다른 대안이 없어 단전이나마 단련하고자 했던 것인지 여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문제는 단련 방식이었다. 이 역시 다양한 방식이 존재했으나, 대다수 단전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단련법은 ‘단전 명상’이었다. 단전 명상은 거의 모든 면에서 일반적인 명상과 같았지만, 생각을 비우는 대신 단전으로 의식을 모은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간단히 말해, 헛짓거리였다. 당신도 알겠지만, 이후의 순례자들은 많은 탐구를 통해 하나의 존재를 이루는 두 개의 중심인 몸뚱이와 혼이 그처럼 손쉽게 섞여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오해해선 안 될 것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하나의 존재를 이루는 두 중심인 만큼, 서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관계인 것 역시 아니라는 점이다. 단전주의자들이 보여준 온갖 헛짓거리에 정나미가 떨어진 이후의 순례자들이 간과한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물론 수정되어야 할 것은 많았다. 우선 단전이라는 표현, 정확히는 그 지칭을 수정해야 했다. 핵심은 코어 근육이었다. 비교적 최근에야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이전의 단전주의자들이 단전을 단련한 효과라 여겼던 몇 가지 긍정적인 변화들(그것이 설령 헛짓거리일지라도, 가시적인 수준의 호응을 얻기 위해선 뭐든 그럴듯한 효과를 얻은 케이스가 필요한 법이다)은 사실 육체적인 방식으로 단전을 단련하는 과정에서 얼떨결에 코어 근육을 단련한 덕에 생겨난 것이었다. 단전주의자들에게 있어선 살아 있는 전설이었던, 자율적 유체이탈자(단전주의자들은 그를 ‘중심에 가장 가까운 자’라 불렀고, 실명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가 보여주었다는 여러 기적 역시, 그 존재 자체의 미심쩍음을 차치하고 본다면, 그 자신이 본래 지니고 있었던 특수한 기질과 코어 근육의 단련이 맞물렸던 덕이란 것이 최근 연구자 사이의 중론이다. 또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코어 근육은 단전주의자들이 생각했던 단전처럼 물질성을 띤 혼 같은 것이 아니었다. 혼에게 코어 근육이 존재하는지까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으나, 적어도 당신의 몸뚱이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그것, 당신의 코어 근육은 분명 오로지 몸뚱이의 것이다. 다만 이 코어 근육에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역할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혼을 몸뚱이에 붙드는 장력이 그것이다. 쉽게 말해, 코어 근육이란 그것이 몸뚱이의 통제권을 함부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혼의 멱살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억척스러운 손바닥이다. 멱살을 틀어쥐는 악력(장력)을 강화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손바닥(코어 근육)을 단련하는 것이란 사실은 구태여 강조할 필요가 없으리라.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직 코어 근육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 같은 장력을 발생시키는지에 대해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단전주의자들이 했던 것처럼 가만히 앉아 의식을 집중하는 것만으로 코어 근육에 어떤 자극을 줄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이 어떤 작동 원리를 가지고 있건, 코어 근육은 명백히 몸뚱이의 일부이고, 따라서 이를 단련하기 위해선 몸뚱이를 움직여야 한다. 순례자여, 당신은 어쩌면 순례를 위해 반드시 혼까지 신경 써야 하는지 의문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 이후에 대해 생각하기엔 자신은 아직 젊으며, 유체이탈이라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이색 체험을 위해 낭비할 시간은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순례자여,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순례에 오르게 되었건 순례를 계속한다면 언제인가 반드시 그림자 신에게 당신의 몸을 내어주는 때가 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순례로 끌어들인 이들이 그에 대해 어떤 얘기를 들려주었을지 모르나) 그림자 신의 숭엄한 진리에 대해서 순례자들이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여전히 말할 수 없는 그 무수한 것에 비해 한없이 적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림자 신이라는 신비로운 예외를 제외하면, 세계 사이의 경계를 통과하는 것은 오직 혼의 역할이라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이 말은 당신과 똑 닮은 얼굴을 한 혼이 언제 세계 사이의 경계를 넘어와 당신의 몸뚱이를 노릴지 모른다는 얘기기도 하다). 미지를 걸을 때 우리가 자주 잊는 것은, 우리의 몸뚱이가 미지를 걷는다는 사실 자체에는 어떤 미지의 성분도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림자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존재 없는 그림자 역시, 그림자는 아닐 것이다.


[계속]



찬찬히 둘러보기

―익명의 제보자 x 씨의 체류기(상)


[일러두기]


 본 원고는 『안내서』 프로젝트가 아직 구상 단계일 무렵, 비밀스러운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접촉해 온 익명의 제보자가 전달해 온 짧은 체류기를 여러 실증적인 자료들과의 대조를 통해 재구성한 것으로, 이 책이 출판된 국가와 지역의 법령이 허가하는 범위 내에서 본 원고의 저작권은 저작자와 제보자 모두에게 동등하게 있음을 밝혀둔다. 다만 제보자가 그 자신은 물론 관련된 인물이나 단체의 익명성을 반드시 지켜줄 것을 당부했음을 고려해, 익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반적인 사안에 대해선 저작권에의 일체 권위 행사는 제보자의 것까지 저작자가 대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이 권한 행사가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할 시 제보자는 얼마든지 저작자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또한 예상할 수 있다시피 본 원고에 등장하는 인명과 지명을 포함한 고유명사는 모두 임의로 설정한 가공의 것임을 밝혀두며, 이 중 제보자의 이름의 경우 본인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그리스 문자 중 이 책에 최종적으로 수록된 글의 개수와 같은 순서의 알파벳인 x로 결정했음을 밝혀둔다.



 그런데 내가 찾아간 도서관 사서들은 한결같이 연락 기록과 당시 상황을 들어 책마다 기록된 표식이나 메모들이 분명 내가 남긴 것이라 주장했다. 당연히 내 혼란은 절정에 달했다. 물론 여전히 내가 그 책과 관련된 세 개 언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는 사실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4)



 도로교통공단의 교통사고분석시스템(TAAS)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그 한 해 대한민국 내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한 수는 총 229,000회였다. 이를 1년에 해당하는 365일로 나누면 627.397260274라는 값이 나오며, 이를 다시 당해 대한민국의 추정 인구수 51,751,065명으로 나누면 0.00121234퍼센트라는 값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는 어설픈 추론이다. 추정값임을 감안하더라도 총인구수에는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또한 일시적이거나 장기적인 모종의 이유로 교통사고를 당할 만한 상황이 아닌 인구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그날 x 씨가 하루 대부분을 보냈던 곳이 대한민국 내에서 인구밀집도가 특히나 높은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차이가 만들어내는 오차율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나 설령 여러 예외 요인을 모두 상정해 계산에 포함시킨다 하더라도 그날 x 씨가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은 실질적으로 1퍼센트에 미치지 못했으리라는 사실 역시, 당신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마땅한 짐작―우리는 그것을 상식이라 부른다. 하지만 상식이란 인류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성장 과정에서 얻게 된 여러 통계적 근거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추산해낸 직감과 같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직감은 기상예보만큼이나 자주 빗나간다. 직감이란 그처럼 자신이 틀리게 된 경우까지 학습하며, 자신이 틀린 상황과 그 빈도수까지 통계적 근거로 삼아 구성되는 빅데이터 기반의 약한 인공지능(weak artificial intelligence)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날 x 씨가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은 100퍼센트였다. (분명히 해두자. ‘사실상 100퍼센트’가 아니다. 그냥 ‘100퍼센트’였다) 우리가 x 씨의 증언과 증언을 토대로 수집된 많은 자료를 참조해 재구성한 이야기가 최종적으로 알려주는 교훈, 유일하게 명확한 진실이란 그렇다. 그날 x 씨는 차에 치여 죽었다. 관측된 사실들과 이를 토대로 상정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 안에서, 이는 필연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일이 항상 그렇듯, 정의(定義)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우리는 매스미디어가 우리에게 학습시켰던 여러 모델의 서사적 구성물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상황들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1) 몸의 내외부적 기능이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손상되었으며, 그 혼이 몸을 떠난 상황. 이는 두말할 것 없이 죽음이다. 2) 몸의 내외부적 기능이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손상되었으나, 그 혼이 몸을 떠나지 않은 상황. 우리는 이를 흔히 ‘언데드(undead)’라 부른다. 3) 몸의 내외부적 기능이 손상되었지만 아직 회복 가능성이 크거나 별다른 손상이 없되, 그 혼이 잠시 몸을 떠난 상황. 예컨대 유체이탈. 2번과 3번을 죽음이라 불러도 좋을지에 대해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어떨까? 4) 몸의 내외부적 기능이 손상되었지만 아직 회복 가능성이 크거나 별다른 손상이 없되, 그 혼이 영원히 몸을 떠난 상황. 이는 죽음인가? 아마 당신은 그렇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난처한 케이스는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인다. ‘그리고 혼이 떠난 바로 그 순간, 몸속으로 아주 우연하게도 몸과 아주 궁합이 잘 맞는 또 하나의 혼이 들어온 상황.’ 당신이 이를 뭐라고 부르건 x 씨가 경험한 것은 바로 조건이 덧붙여진 4번 항목의 상황이었다.

 우리의 x 씨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 것은 몇 가지 우연이 겹친 결과였다. 우선 첫 번째 우연은 x 씨가 평소 자주 발을 헛디뎠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x 씨는 걸음걸이나 일상에서 주의 집중력 따위가 비슷한 조건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좋지 못한 편이었다. 두 번째 우연은 x 씨가 그때 사고를 당한 위치가 가진 특수성에 기반해 있었다. x 씨는 볼일이 있어 대로변을 걷고 있었다. 대로는 팔 차선이었고, 대로변은 많은 유동 인구수를 충분히 감당할 만한 폭의 보도블록이었다. 관리 상태는 좋아 이가 나가거나 블록 중 하나가 일어난 구간, 혹은 미세하게 틈이 벌어진 구간 따위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대로변이라는 특성 탓에 보도블록은 자주 끊어졌다. 팔 차선 도로 쪽의 차가 대로변 안쪽의 골목으로 들어설 수 있게 할 진입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몇 차례 보도블록의 부분적인 교체나 수리가 있었는지, 각각 진입로 구간에서 보도블록이 끊기는 모양은 상이했다. x 씨가 사고를 당한 보도블록은 얕은 경사를 그리며 진입로의 아스팔트와 매끄럽게 연결되는 구조였고, 이 연결부에는 멀리서 봤을 땐 잘 구분되지 않는 낮은 턱이 있었다. 그날 x 씨의 발을 건 것은 이 턱이었다. x 씨는 별생각 없이 보도블록에서 아스팔트로, 다시 아스팔트에서 보도블록으로 이동했고, 순간 x 씨의 몸이 앞으로 크게 휘청였다. 세 번째 우연은 이때 발생한다. x 씨는 평소 자주 발을 헛디디는 편이었던 탓에, 오히려 휘청이는 몸의 중심을 도로 잡아 세우는 일에는 능숙했다(물론 꾸준한 운동 습관 덕에 x 씨의 코어 근육이 남다른 덕도 있었다). x 씨는 평소처럼, 그러고 있다는 자각 없이, 앞으로 휘청이는 몸의 중심을 되찾기 위해 배와 하반신에 힘을 주고 상반신을 크게 뒤로 당겼다. 이제 네 번째 우연이 개입할 차례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업무와 관련한 중요한 약속에 늦은 터라 다소 경황이 없었던 한 차주의 승합차가 x 씨가 상반신을 뒤로 당기는 바로 그 순간 차도에서 커브를 돌아 진입로로 들어왔다(차주는 x 씨를 이미 진입로를 벗어난 보행자로 인식했던 탓에 x 씨가 휘청이고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본래라면 뒤로 크게 당겨진 x 씨의 상반신은 관성을 상쇄한 후 곧게 선 모양을 되찾게 될 것이었다. 정확히 재본 적은 없지만 어림잡아도 1초도 걸리지 않는 과정이라고 x 씨는 단언했다. 따라서 보도블록과 진입로의 아스팔트 경계에 한 발을 딛고 선 채 뒤로 크게 젖혀진 x 씨의 상반신을 경황없는 차주의 승합차가 치고 지나가는 데엔 1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아직 중심을 되찾지 못한 채로 상반신만 차에 치여 튕겨 나간 x 씨의 몸뚱이는, 하필이면 격렬한 춤을 시연하는 장면에서 줄이 끊긴 꼭두각시 인형처럼 사지를 이룬 관절이 모두 기묘하게 틀어진 채 공중에서 한차례 크게 회전한 후 “철푸닥!”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것이 반대편 보도블록에서 우연히 사건을 목격했던 한 여성의 증언이었다.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다만 반사적으로, 목격자 여성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x 씨는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기 직전, 자신이 차에 치이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반신을 뒤로 당긴 순간 자연스럽게 꺾인 고개가 마침 커브를 돌아 들어오는 승합차 방향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이때 x 씨의 머릿속에 떠오른 예의 장면을 주마등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 그것은 x 씨가 죽음을 직감한 순간 떠올랐고, 실제로 x 씨는 한차례 죽었으므로, 그 연상 작용을 주마등이라 부를 근거는 충분했다. 그러나 x 씨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엔 그런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그날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어느 정도 논리정연한 설명이 가능하게 된 후, x 씨는 그것이 주마등이라기보단 아주 일반적인 방식의, 감각적 유사성이 발생시킨 짧은 상기에 가까우며, 이 상기가 주마등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죽음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닌(통설이 설명하듯, 눈앞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방법 따위에 대해서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대한 깨달음을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x 씨는 그날 한차례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실은 그것이 첫 번째는 아니었다. 의식적으로 기억해낼 수 있는 한 자신은 적어도 두 차례 ‘실제로’ 죽었다고, x 씨는 주장했다.

 어린 시절 x 씨는 가정을 포함한 주변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상황이 많이 달라지고 나서도, 어머니는 종종 한스러운 듯 한숨을 쉬며 농담처럼,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농담이라 여기지 않을 방식으로 ‘미운 네 살’ 얘기를 했다고, x 씨는 말했다. 그러나 같은 미운 네 살이라 할지라도 x 씨의 경우는 확실히 남달랐다. x 씨의 어머니의 주장에 따르면 네 살이 되기 전만 해도(어머니가 알지 못하는 정보까지 고려해 더 정확히 추정해보자면, 네 살이 되고 두 달여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만 해도), x 씨는 영재 소리가 나올 정도로 모든 면에서 우수한 아이였다. 그러나 x 씨는 갑작스럽게 달라졌다. 눈에 띄는 변화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로, x 씨는 이상할 정도로 주변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x 씨는 종종 자신의 부모 앞에서 그들이 악마라거나, 자신을 납치한 나쁜 요정이 변신한 모습이라고 주장했고(그 시절 x 씨는 북유럽권의 민담에서 유래된 아이를 바꿔치기하는 심술맞은 요정 트롤 이야기에 매혹되어 있었다), 놀아달라며 어기적어기적 달라붙는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을 낯선 존재처럼 경계하며 종종 “가짜”라거나 “새끼 트롤”이라고 욕했다. 심한 경우, (어머니에 따르면 이전엔 x 씨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주먹질이나 발길질이 동반되기도 했다. 둘째로, x 씨의 언어 능력이 이상하리만치 퇴화했다. 이 경우 정확한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를테면 이전까지는 ‘가위’라고 잘만 부르던 것을 갑자기 ‘집게’라고 부르거나, ‘달걀’이라는 단어는 무리 없이 기억하는 데 반해 ‘계란’이라는 단어는 수차례 다시 알려줘도 좀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식이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며 x 씨의 기행은 점차 줄어들었고, 언어 능력도 본래의 수준을 되찾았다. 사춘기 땐 오히려 남들에 비해 얌전하고 착실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x 씨가 기억하기로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진 사이가 되어버린 남동생과의 관계가 조금이나마 회복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나 제 누나에 대한 남동생의 두려움이 뿌리 뽑힌 것은 아니었다. 훗날 x 씨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던 남동생의 친구에게 (아마 환심을 사려고 그랬던 것 같은데) 남동생이 종종 제 누나를 “짝퉁”이라거나 “귀신 들린 미친년”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이 남동생의 친구는 남동생과 논다며 집에 찾아왔던 어느 날 남동생이 자리를 비운 사이를 틈타 x 씨에게 키스를 시도했고, x 씨는 자신이 재차 거부해도 여드름투성이의 역겨운 면상을 들이미는 그를 어쩔 수 없이 주먹과 발로 구타했다. 아마 이 사건은 남동생의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이 ‘귀신 들린 미친년’으로 확정되는 데 적잖은 역할을 했을 거라고, x 씨는 회고했다) 불쾌함과 섭섭함이 없지 않았지만 과거에 자신이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남동생의 심정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x 씨는 이에 대해 직접 따지거나 하진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때 말을 꺼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남동생이 자신을 지칭하기 위해 썼던 ‘표현’에 우리의 x 씨가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예의 사건, 두 번째 죽음을 경험하고 이 사건의 기묘한 점에 대해 파헤치던 중이었다. 남동생의 친구에게 그 모욕적인 별명을 전해 들었을 때, x 씨는 다만 남동생이 어릴 적 당했던 것을 그대로 되갚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가짜’와 ‘짝퉁’ 사이의 명백한 유사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죽음은 x 씨에게 남동생의 표현이 단순한 패러디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품게 했다. x 씨를 사로잡은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자신에게 남동생이 ‘가짜’였듯이, 남동생에게도 자신이 ‘짝퉁’이었다면?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가짜인 남동생을 가리켜 “새끼 트롤”이라고 한 데 반해, 남동생은 짝퉁인 자신을 가리켜 “귀신 들린 미친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차이에는 생각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을지도 몰랐다.

 x 씨가 추측한 바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시점은 어린 x 씨가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바로 그날이었다. 아직 ‘미운 네 살’이라는 관습적 상상력, 혹은 상식적인 형상의 네 살배기와 다소 동떨어진 면모를 보여주던 x 씨는, 그날 일 때문에 늦게까지 집을 비운 두 부모 대신 집을 지키고 있었다. 문제는 돌아오기로 한 시간이 한참이 지날 때까지 부모에게 소식이 없었으며, x 씨는 슬슬 배가 고파졌다는 점이다. 두 부모가 같이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던 탓에 x 씨의 집 냉동실에는 x 씨가 혼자 밥을 먹어야 할 때를 대비해 x 씨의 한 끼 분량으로 랩에 소분해 놓은 밥들이 있었다. 물론 실제로 이를 x 씨가 직접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일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 어머니가 새로 밥을 하기 귀찮을 때 대여섯 개를 꺼내 데워서 가족 식사용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어쨌든 x 씨는 그 냉동 밥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것이 이와 같은 상황을 위해 마련해둔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x 씨는 분명 나이에 비해 총명했다. x 씨는 식사용 테이블에서 의자 하나를 끌고 와 냉장고 앞에 세우고 그 위에 올라섰다. 영재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똑똑한 네 살배기였던 x 씨는 자신이 비슷한 나이대의 남들보다 똑똑하다는 사실 역시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냉동실에서 냉동 밥을 꺼내 그릇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았다(실제로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몇 번 그 일을 해보기도 했다). 따라서 어린 x 씨가 아직 알지 못했던 것은 자신이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된 이후까지 자주 몸을 휘청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 자신이 다른 부분에서의 탁월함과 별개로 일상에서의 주의 집중력 따위가 유달리 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네 다리의 균형이 맞지 않는 의자 위에 서서 냉동실 안으로 손을 뻗다가 이내 중심을 잃고 의자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 x 씨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닫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시선은 위쪽을 향했고, 허우적거렸던 팔에 쓸려 냉동실 바깥으로 굴러나온 세 덩이의 냉동 밥이 먼 옛날 공룡을 멸종시켰다는 운석들처럼 제 위로, 제 얼굴을 향해 곧장 쏟아지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해요. 저는 그날 분명히 죽었어요. 아마 그게 첫 번째였을 거예요.”

 잠시 정적이 흐르고, 혼몽한 정신으로 고개를 든 x 씨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낯선 남자아이였다. 남자아이는 어기적어기적 x 씨에게 다가왔고, 이렇게 말했다. “누나, 누나, 아파?”


[계속]



불시에 사로잡히기

―42



 “하지만 제가 보기에, 여러분이 그 해답을 좋아하실 것 같지 않습니다.” 깊은 생각이 덧붙였다.

 “상관없어. 우리는 알아야겠어! 당장!” 푸흐그가 말했다.

 “당장이요?” 컴퓨터가 물었다.

 “그래! 당장…”

 “좋습니다.” 컴퓨터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두 사람은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견디기 힘들 정도의 긴장감이 흘렀다.

 “정말 좋아하지 않으실걸요.” 깊은 생각이 말했다.

 “말해줘!”

 “그러죠.” 깊은 생각이 말했다. “위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해답은…!”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은…” 깊은 생각이 말했다.

 “해답은…!”

 “그 해답은…” 깊은 생각이 말을 멈췄다.

 “해답은…!!!”5)



 이 이야기는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고 있었던 과거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나머지 한 사람이 이 이야기를 발설하는지 여부를 포함하여 두 사람이 함께 시작했던 그 어떤 종류의 일에도 다시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어떤 확신은 이를 전해 듣는 이로 하여금 죽음을, 오로지 죽음을 통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하게끔 한다. 돌이킬 수 없이 완결된 사건, 취소될 수 없는 약속이 죽음 말고 무엇이 있을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설령 순례자가 아닐지라도, 우리의 글을 순서대로 따라오기만 했다면, 당신 역시 이제 알리라) 죽음 역시 취소될 수 있다. 죽음 역시 확신을 온전한 확신으로 만들어주는 조건이 되기엔 한없이 모자라다. 그림자 신의 숭엄한 진리는 확신을 구성하는 모든 선명한 진실 위로 드리운 막막한 베일과 같다. 순례자라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가능한 모든 진실 위에는 언제나 미소한 미지가, 그러나 수렴하는 무한급수의 관점으로 볼 때 무한히 거대한 미지가, 먼 훗날 모든 진실(그러나 다시 먼 훗날, 그것이 모든 진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질 그 어떤 진실들)이 밝혀진 후에야 진정한 의미가 밝혀질 약간의 미스터리가 드리워 있다는 것을. 그 웃음은 우리 중 누군가 그저 어색한 침묵이 불편해 꺼내는 얘기라는 듯 심드렁한 말투로 며칠 전 보았다는 다니엘 콴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6)에 등장하는 악당, 차원을 넘나들며 학살을 자행하는 초월적인 존재 ‘조부 투파키’에 대한 얘기를 꺼낸 탓에 터져 나왔다. 조부 투파키가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는 모르겠으나(영화에 정확한 수치가 언급되었을 수도 있지만, 예의 얘기를 꺼낸 이, 즉 우리 중 유일하게 그 영화를 본 적 있는 이가 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려나 영상만 봤을 땐 그가 차원을 옮겨 다니면서 하는 일이라곤 집요할 정도로 같은 얼굴을 한 여러 세계의 주민(자연히 영화 속의 거의 모든 배우는 일인 다역을 맡았다)을 죽이는 일이었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우리는 다만 심드렁한 얼굴로, 별 쓸데없는 얘기를 다 한다는 식으로 반응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잠시 후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모종의 상상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이 상상은 당시, 그러니까 『안내서』를 만드는 내내 우리가 공유하고 있었던 작은 유희였는데, 그 무렵 어쩌면 상상 너머의 진실을 알고 있어야 마땅한 단 한 명의 사람조차, 우리로 하여금 상상의 유희에 빠져들게 했던 예의 과거의 당사자조차 그것을 너무나 떠들어댄 탓에, 혹은 지나치게 떠들어대는 와중에도 그것의 진실이라 말할 것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탓에, 이미 그것을 ‘상상’의 방식으로밖에 회상할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림자 신조차 진정한 진실, 진실 그 자체만을 가리키는 진실의 시원에 대해는 아는 바가 없으리. 확실한 것은, 아무려나 이 이야기(오직 그 자신일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이야기)는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고 있었던 과거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관계였는지, 예컨대 연인이었는지 친구였는지, 친인척 관계였거나 사제지간이었는지, 아니면 그 모두는 아니었는지 이야기는 알려주지 않았다. 이야기는 두 사람이 마주친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짧게 회고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짧은 회고 속에 나타나는 두 사람의 특정한 양태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가 앞서 제시된 다섯 가지 가능성 중 하나이거나, 이 가능성과 거의 동일한 의미라고 봐도 무방할 몇 가지 베리에이션 중 하나이리라는 사실 정도는 유추해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수영장에 있었다. 수영장에는 두 사람뿐이었고, 수영장은 도심에서 차를 타고 이삼십 분은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이 층 높이의 별장 뒤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삼십 분이, 정말 일반적인 차량이 이삼십 분 동안 도로교통표준법을 지키는 선에서 일정한 속력으로 움직였을 때 얻을 수 있는 추정 거리를 기준으로 얻은 것인지, 혹은 종종 차를 타고 이동할 바엔 조금 힘들더라도 걸어가는 게 낫겠다 싶은 미로 같은 골목을, 그러나 조금도 헤매지 않고, 최신 업데이트가 완료된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가장 빠른 경로를 따라 이동했을 때를 기준으로 한 것인지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구태여 밝히지 않았다) 두 사람이 그처럼 사적이고 사적인, 은밀하며, 두 사람의 관계에 따라 불온하기까지 해 보이는 만남을 자주 가져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날의 경우, 수영장에서 적잖은 시간을 함께 보냈음에도, 한 사람은 끝내 수영복을 입지 않았고, 그 탓에 다른 한 사람은 혼자 수영복을 입고 몇 차례 헤엄치는 둥 마는 둥 했을 뿐이며, 물에서 나온 뒤론 종일 선베드에 누워 비치타월을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고 했다(물론 우리는 그가 왜 이런 의미 없는 정황에 대해 매번 공을 들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선베드에 누워 있었던 사람이 햇볕을 가리기 위해 잠시 비치타월을 눈 위까지 올려놓았다가 그대로 선잠에 들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선잠 속에서 그는 몇 가지 기이한 꿈을 꿨는데, 잠에서 깬 후까지 기억에 남은 것은 한 가지 수에 대한 것이었다. (당신이 예리한 독자라면, 이 진술을 통해 이 이야기의 전달자가 수영복을 입고 있었던 쪽이라는 추측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숙련된 순례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날카로운 통찰력의 소유자인 당신, 그러나 아쉽게도 당신의 추측에는 오류가 있다. 이후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확인하게 되겠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수영복을 입고 있었던 쪽은 예의 꿈에 대해 나머지 한쪽에게 털어놓기 때문이다. 혈기왕성한 당신이여, 숙련된 순례자가 되려면 날카로운 통찰력은 물론 홀로 앞지르는 추론의 독주를 붙들 끈기와 겸허히 열린 귀 역시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러나 그가, 이후 오랜 시간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예의 꿈에 (마땅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나중 일이다. 당시만 해도 눈을 뜨는 순간 곧바로 햇볕 속에서 산산이 부서지며 흩어지는 꿈의 잔해를 그러모으기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다른 한 사람의 호들갑이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이내 그는 자신을 깨운 이가 가리킨 방향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얼마 안 가 그들 자신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또한 두 사람이 일일이 세어본 바로 무리의 수는 정확히 마흔 명이었다. 두 사람은 한창 손님이 몰릴 시간의 고깃집 현관에서 자신의 신발을 찾을 때처럼, 기이할 정도로 명확하게 짝지어진 모습의 스무 쌍의 커플(‘커플’은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관용적인 수사인지 실질적인 의미를 띤 표현인지는 모호하다)을 보며 언뜻 경이감처럼도 느껴지는 얕은 거부감을 느꼈다. 그들 커플은 하나같이 본래 수영장에 있었던 그들, 다시 말해 두 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얼마 있지 않아 알게 되는데, 이들 커플 중 어떤 커플도 두 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진 않았다. 간단한 예시를 들어보자. 이 마흔 명의 사람 중 수영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총 여덟뿐이었다. 그나마도 커플 양쪽이 수영복을 입고 있었던 경우와 수영복을 입고 있었던 쪽이 그들과 반대였던 경우를 제외하면 셋이 남았는데, 이 중 수영복의 종류가 같은 것은 한 커플뿐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이 그 스무 쌍의 기이한 방문자를 보고 그 방문객들이 자신들의 도플갱어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던 것은 오로지 얼굴 때문이었다. 아아, 지금껏 얼마나 많은 이가 ‘얼굴’을 한 존재의 가장 특징적인 지표로 오인해 왔는지. 함부로 이런 추측을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얼굴을 통해 타자를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이 중에 그림자 신에 대해 알고 있었던 사람, 적어도 진지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사건이 있기 전부터 그들, 본래 수영장에 있었던 쪽인 두 사람은 이미 적잖은 시간 순례자로 살아온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그들조차, 그 스무 쌍의 도플갱어가 그들에게 일으키는 아득한 현기증, 마네킹들처럼 하나의 긴 진열대를 이루고 있는 각기 다른 옷차림의 몸뚱이들 위로 늘어선 몰개성한 얼굴들이 그들에게 가한 인지적 충격이란 쉽게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들의 얼굴 역시 하나하나 뜯어보자면 분명 적잖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사로운 차이들은 마치 마흔 개의 각기 조금씩 다른 역사를 가진 객차가, 벌판을 가로지르는 레일 위에서 하나의 야간열차로 자연스럽게 수렴되듯, 그렇게 흩어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어쩌면 연달아 구토했고, 스무 쌍의 그들은 하나같이 이해한다는 듯 자비로운 표정으로 그들이 충격에서 헤어나오길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그들이 진정되자 이 기이한 방문객들은 자신들이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었다.7) 예상할 수 있다시피 방문객들은, 본래 수영장에 있었던 그들이 그렇듯, 순례자였다. 다만 그들과 방문객들 사이 차이가 있었는데, 방문객들은 놀랍게도 다수의 사람이 동시에 그림자 신에게 삼켜지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그들처럼, 방문객들 역시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을 알아낸 후 두 사람은 함께 세계를 건너다니며 다른 세계 속의 자신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그렇게 해보면 어떨까,라는 흥미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사람이 늘어나자, 이들에겐 하나의 목적이 생겼다. 방문객들은 가능한 모든 ‘자신들’을 만날 생각이었다. 죽음으로 인해서건 그림자 신에게 삼켜져서건,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할 때 본래 이동하는 존재와 ‘닮은 존재’가 있는 세계로밖에 이동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당시에 이미 순례자들 사이 상식으로 퍼져 있었다. 방문객들이 파헤치고 싶은 것은 첫째로 ‘닮은 존재’라는 부정확한 정의의 실체였고, 둘째로 세계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총체 그 자체의 크기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전이나 이후에나 그 같은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하나의 삼켜짐’이 언제나 한 존재만을 대상으로 발생한다는 전제는 확고부동했다. 두 명의 순례자가 같은 탐구를 위해 그림자 신에게 삼켜진다고 할 때, 앞서 삼켜진 쪽과 뒤에 삼켜진 쪽이 같은 세계에 도착할 가능성은 희박했으며, 최악의 경우 두 사람은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설령 누군가 이 과감한 탐구를 위해 그림자 신에게 삼켜지는 일을 아무리 많이 반복한다 할지라도 그는 평생 적게는 서너 세계, 많게는 일곱 세계라는, 이미 알려진 세계들의 수와 비교하자면 처량하기까지 한 소박한 유사성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우울한 울타리를 더듬으며 가능성의 알량한 테두리를 측정하는 데 평생을 탕진해버린 끈질긴 순례자 모두에게 축복을!) 따라서 다수가 동시에, 또한 몇 차례의 시도가 증명해냈듯 같은 세계로 이동할 수 있는 방문객들의 방법이 가진 이점은 명확했다. 처음 이동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과 닮은 ‘존재들’이 있는 세계로 이동했다. 이후 한 쌍의 ‘두 사람’과 함께하게 된 이들은, 두 쌍의 ‘두 사람’이 동시에 이동했음에도 그들이 도착한 다른 세계는 두 쌍의 ‘두 사람’과 ‘닮은 두 사람’이 있는 세계라는 사실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이후의 반복된 이동을 통해서 더 확실해졌는데, 그럼에도 아직 이 ‘닮은 두 사람’이 같이 이동한 ‘두 사람들 모두와 닮은 두 사람’인지, 혹은 ‘두 사람들 중 한 쌍의 두 사람과만 닮은 두 사람’인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남은 것은 반복뿐이었다. 이 반복 과정에서 뜻이 맞은 ‘두 사람’을 더 많이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했다. 가능한 한 많은 세계의 ‘두 사람’이 합류할수록, ‘두 사람과 닮은 다른 두 사람’이 있는 세계의 경우의 수가 줄어들 것이었다. 이는 ‘닮은 존재’라는 조건이 허락하는 한, 이들의 이동이 기존의 순례자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아득한 차이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듯 방문객은 이미 스무 쌍을 이루고 있었다. 많은 세계의 ‘우리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해줬다고, 어떤 세계에서건 ‘우리 두 사람’은 모험적인 순례자였다고, 방문객들의 대표 중 한 사람이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그렇다면 이때 그들, 수영장에서 원대한 계획을 가진 이 스무 쌍의 도플갱어를 마주친 예의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다행히, 다시 구토하는 등의 추태는 없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은 각기 적어도 한 번 이상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되는데) 함께하자는 방문객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이는 그들이 특별히 모험적인 순례자가 아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회고하기 전, 방문객들의 대표 중 한 사람이 앞서 이를 보증해주었다. 방문객들이 그림자 신을 찾으러 간다며 수영장을 떠나고 나서야, 그들은 그들이 방문객들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음을 깨닫고 경악했다. 방문객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가능한 한 많은 세계의 ‘두 사람’을 모으며, 동시에 가능한 한 많은 세계의 ‘두 사람’을 지워 경우의 수를 줄여나가는 것. 모으는 일에 실패했다 할지라도 지우는 방법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양심을 믿었던 걸까? 그건 아니었다. 많은 명확하지 않은 사실 중, 그것만은 명확했다.

 아무려나 운이 좋았던 것인지 방문객들이 마흔 명의 살인마로 돌변하는 대신 조용히 수영장을 떠나자, 곧이어 거대한 허무감이 그들을 덮쳐왔다. 그들은 그 기이한 만남이 그들에게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앗아갔음을, 적어도 그 중요한 것을 더는 중요하게 여기지 못하도록 더럽혀 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들의 머릿속엔 하나의 거대한 행렬을 이룬, 한 마리 거대한 지네 괴물을 연상케 하는 스무 쌍의 ‘얼굴들’이 지워지지 않은 낙인처럼 자리 잡았다. 그들은 의욕을 잃고 우울해졌다. 하고 싶었거나 하려 했던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아마 그들은 그대로 동반 자살을 할 수도 있었으리라. 어쩌면 방문객들이 구태여 살인이라는 수고를 치르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8)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그것을 정말로 원하지 않았을지언정,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방문객들을 따라 위대한 원정의 일부가 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예의 스무 쌍 중에는 그런 판단으로 동행이 된 케이스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마 다섯 쌍을 넘긴 즈음부터는 그렇지 않은 케이스가 없었을 거라고, 지금 우리 꼴을 보면 딱 답이 나온다고 당시 그들은 생각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런 푸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분위기를 바꿔보려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떠오르는 대로 아무 소리나 지껄인 것인지, 한 사람이 방금 떠올랐다며 한 가지 농담을 던졌다. 그리 웃긴 농담은 아니었으므로, 누구도 웃지 않았다. 아무려나, 그것이 그들이 『안내서』 프로젝트에 대해 나눈 첫 번째 대화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것은 웃기지 않았고, 또 누구도 억지로 웃어주지 않았으므로, 농담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 침묵이 흘렀고, 그들은 다시 죽고 싶어졌다. 수영복을 입고 있었던 쪽이, 선잠을 자던 중에 꿨던 꿈에 대해 다시 떠올린 것은 그때였다. 많은 디테일이 한낮의 선명함 속에서 삼켜져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였지만, 꿈의 대략적인 줄거리, 얼개라면 분명히 기억났다. 그는 꿈속에서도 수영장에서처럼 예의 다른 한 사람과 함께였고, 그들은 미로처럼 꼬인 도심의 골목, 혹은 무수히 갈라지는 복도와 문을 통과하며 그 반대편에 적힌 문패를 확인하기 전까진 그것이 복도인지 방인지 알아볼 수조차 없는 기이한 방들로 미로를 이룬 바깥 없는 거대한 건축물 안을 헤매고 있었다. 어떤 숫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찾았어?” 수영복을 입지 않았으며, 결국 그날 내내 한 번도 수영장 물에 들어가지 않은 쪽이 물었다. “아니,” 수영복을 입었고 물에 들어갔다 나왔으나, 몸이며 머리카락이며 이미 한참 전에 다 마른 탓에 마치 아직 수영장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처럼 보이는 쪽, 요컨대 꿈을 꾼 쪽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기억났어. 뭘 찾았는지. 42였어.” “42?” “응, 42였어.” 마땅히, 이때 두 사람이 떠올린 것은 자신들을 찾아온 스무 쌍의 자신들이었다. “정말이야, 42였어.” 농담이라는 듯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구기며(그러나 보기에 따라서 그것은 복받치는 모종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표정처럼도 보였는데), 꿈을 꾼 쪽은 반복했다. 여전히 웃기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농담이었다. 그렇기에, 웃지 않았을 뿐, 그들은 조금도 진지해지지 않았다. 기이한 만남이 그들에게 남겨놓은 진지함은 그 이상 커지지 않았다. 커지기는커녕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농담을 주고받은 덕이었다. 얼마 후, 그들은 정말로 농담을 주고받은 사람들처럼 웃었다. 정말로 모두 농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농담에는, 『안내서』 프로젝트라거나 42를 찾아 미로를 헤매는 꿈 따위에는 아직 조금도 운명론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 않았다. 정말로 그랬다. 그들이 거기서 운명론의 그림자를 발견하기 전까진, 아직 그 무엇도 운명론적이지 않았다. 그날, 그들은 죽지 않았다.

1) 플라톤, 『파이드로스』, 조대호 옮김, 문예출판사, 2008, 58~59쪽.

2) 그들이 태어났던 시대와 문화의 양식을 고려할 때 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여명기의 위인 중에서도 가장 혁명적이었던 이들조차 오로지 인간만이 육체와 분리된 ‘혼’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나름의 세력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인본주의 순례자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 같은 어리석음의 흔적은 지금까지 남아 순례자들이 그림자 신의 숭엄한 진리를 이해하는 데 수차례 걸림돌이 되었다. 어리석음은 대체로 힘이 강하고, 강한 힘은 인간을 매혹하는 가장 원초적인 환상 중 하나이다.

3) 물론 종종 이런 합의는 도전을 받는다. 도전자들의 주장은 대개 이렇다. “설령 그것이 혼이라 할지라도, 그림자 신의 은총 없이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를 넘나드는 권능은 오로지 그림자 신의 몫이다. 따라서 혼은 오히려 ‘튕겨 나간다.’ 세계는 혼을 밀어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육체라는 장력을 잃은 혼은 세계로부터 ‘추방당한다.’ 중요한 것은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모든 세계의 바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추방당한 혼’은, 마치 문밖으로 쫓겨난 불청객이 무(無)로 떨어지는 대신 낡고 음습한 어느 호텔의 복도라든가 삭막한 대로변이라는 또 하나의 ‘닫힌 공간’에 다다르듯, ‘결과적으로’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하나의 세계로 이동하는 모양이 되는 것이다.” 다소 논쟁적인 영역인 만큼 그들의 논리에 정면으로 반박할 생각은 없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들의 의견이 꽤 그럴듯한 가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가 더 명확해지기 위해선, 세계들이 ‘혼을 밀어내는 성질’을 가졌다면(밝혀진 바로, 몸뚱이를 잃은 혼의 세계-이동에는 예외가 없으므로) 어째서 문밖으로 쫓겨난 예의 불청객이 다음 세계에서 재차 쫓겨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지, 몸뚱이를 잃은 혼은 왜 언제나 단 한 번의 세계-이동만을 경험하는지에 대해 더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4) H. P. 러브크래프트, 「시간의 그림자」, 『러브크래프트 전집 2』, 정진영 옮김, 황금가지, 379~380쪽.

5) 더글러스 애덤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여행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여행서(합본)』, 김선형·권진아 옮김, 책세상, 2005, 197쪽.

6) 요새는 젊은 순례자 사이에선 이처럼 멀티버스 개념을 활용한 영화가 등장할 때면, 그 감독이 순례자인지 아닌지를 추측해보는 것이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은 모양이다. 본래 황당한 문화를 만들고 유쾌한 놀이를 발명해내는 것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이니만큼 적절한 선만 지킨다면 그들의 문화에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놀이는 어디까지나 놀이일 때에 유쾌하다. (이후 이에 대해 짧게나마 언급할 기회가 있을 텐데) 많은 신화와 전설 또는 과학적이거나 철학적인 가설들이 그렇듯 멀티버스 역시 그림자 신과 그를 둘러싼 많은 신비로부터 영향을 받아 탄생한 개념인 것은 사실이나, 현재의 멀티버스 개념을 원용하거나 전유하는 모든 창작물이 순례자의 손을 거친 것이라 오해해선 곤란하다. 보통 이 같은 추측을 지탱하는 근간이란 개념적 오용이다. 그림자 신의 숭엄한 진리가 예측 불가할 정도로 현란한 진리의 휘광을 흩뿌리는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많은 순례자가 오랜 세월을 들여 쌓아 올린 진리의 탑을 함부로 훼손해도 된다는 사실을 의미하진 않는다. 순례자여, 부디 무분별한 오용과 급진적인 혁신을 구분하라.

7) 당신은 어쩌면 이들이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에 대해 호기심이 들었으리라. 만약 당신이 훌륭한 순례자라면, 다시 말해 몽상만이 우리에게 선사해주는 한없는 자유로움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이들의 대화 방식이 실제로 어땠는지 말해주지 않기를, 앞서 자주 그랬듯 이에 대해서도 우리는 들은 바가 없다고 말해주길 바라겠지만, 그렇다면 미안한 일이다. 우리는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들과 대화했는지 잘 안다. 실망스럽게도, 이들의 대화 방식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마흔 명으로 이루어진 합창단처럼 합을 맞춰 같은 목소리를 낸다거나, 마치 하나의 사고 회로를 구성하는 마흔 개의 시냅스처럼 마흔 개의 입이 불규칙적으로 열리고 닫히며 하나의 목소리를 구성한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 비루하고도 천박한 현실이여!) 이들은 평범하게 대표 격의 두 사람이 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식으로, 그러다 종종 바로잡아야 할 내용이 있으면 나머지 서른여덟 명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어 정정하는 식으로 대화했다. 그나마도 대표를 신중하게 선정했거나 그들 사이의 정보 교류가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나머지 쪽이 끼어든 횟수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럴 바엔 두 명의 대표가 말하는 동안, 나머지 쪽이 코러스가 되어준다거나 하는 편이 더 재밌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방문객들은 그런 소극을 꾸미기엔 너무 진지했다.

8) 사실 당시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이 얼마간의 유예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그들은 끝내 입을 열어 얘기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유예는 몇 번 주어지도록 정해져 있을까? 한 번? 아니면 두 번? 기분에 따라 다를지도 모른다. 그들이 다시 그 스무 쌍의 도플갱어, 혹은 그새 쌍을 늘린 예의 위대한 원정대를 마주했을 때 그저 그날의 온도나 습도, 햇볕이 기울어진 정도가 그럴 만한 기분을 불러일으킨 탓에 그들이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그들은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다 보면, 그저 알게 되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라고 훗날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수차례 들려주게 되는 이는 생각했다. “한 사람이 이후에 자신이 하게 될 행동에 대해 그렇듯.” 그렇게 덧붙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이는 헐거운 믿음이다. 그날의 기이한 만남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날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그런 헐거운 믿음을 믿을 수 있는 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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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신을 탐구하는 순례자를 위한 안내서(1회)

그림자 신을 탐구하는 순례자를 위한 안내서 강대호 열기 ―처음 순례에 오른 이들을 위한 서론과 생략해도 좋을 몇 가지 조언 물러가라, 잡종 개들아! 길에서 비켜라, 내 햇볕에서 비켜서라. 악마의 수도사들아! 너희들은 여기 엉덩이를 흔들며 내 포도주를 고발하고 내 통에 오줌을 싸러 왔느냐?1) 안타까운 일이나 비관하지는 말기를―보통이라면 전 생애를 통틀어 몇 번 일어나지 않는 경우인 탓에, 그림자 신이 제 위로 미끄러져2) 지나갈 때면 누구나 먼저 하늘을 올려다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그림자 신에 대한 비교적 신실한 믿음과 왕성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조차) 하늘 어디에도 해를 가릴 만한 구름은커녕 이렇다 할 비행체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뒤에야 자신이 방금 놓쳐버린 것이 다신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신비임을 깨닫는다. 만약 당신이 어느 천장 아래 있었다면, 예컨대 커튼을 친 채 환하게 불을 켜놓은 작은 골방 안이었거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인파로 가득한 한낮의 기차역 대합실에 있었다면, 그저 짧은 정전이라 생각했을지도―그랬다면 대합실의 많은 사람, 말똥한 표정으로 멈춰 서서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히 창백한 흰 빛을 뿌려대고 있는 천장의 조명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낯선 얼굴들, 당신으로 하여금 모든 내벽이 거울로만 이루어진 미로 속에 들어온 듯한 착시와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수한 환영을 통해 당신은 자신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되었을 수도……. 그렇게 당신도 모르게, 이렇다 할 분류명을 얻지 못해 기억의 거대한 창고 가장 깊숙한 곳에 아무렇게나 넣어둔 그저 그런 과거가 되어버린 어느 날, 당신은 이미 한 번, 어쩌면 더 많이 은총의 순간을 지나쳐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천장이 제대로 된 조명 하나 달리지 않은 다락의 얇은 나무판자였다면, 은총의 순간 당신이 손전등에 의지해 그 켜켜이 쌓인 다락의 어둠 속에서 정말로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그런 추억의 물건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면―당신은 옅은 어둠 위에 한 겹의 어둠을 더 드리운 그 불가능한 천막에 대해 짧은 경이와 호기심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그림자 신이 땅 위를 미끄러지는 속력은 가공할 정도이고, 당신이 설령 남다르게 눈치와 행동이 빠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생긴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을 즈음 그림자 신은 이미 곁을 떠났을 것이다. 운이 좋아 당신이 막막한 평야, 정말이지 막막한 탓에 저 멀리 지평선이 펼쳐진 모양만으로 지구의 형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추론인지 헛소리인지를 쏟아내며 투닥거리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마음을 진정 헤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장엄한 평면 위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면, 당신은 지평선 너머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는 그림자 신의 우아한 뒤꽁무니나마 잠시 눈에 담을 수 있었을지도. 그러나 은총은 이미 떠났으리니. 당신의 손에 음속으로 주파할 수 있는 전투기의 조종간이 쥐여 있다 하더라도, 떠나간 은총을 뒤쫓으려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현대 기술은

  • 강대호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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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신을 탐구하는 순례자를 위한 안내서

"그림자는 함께 걷는다. 거기 그것이 없을 때조차." 이름 모를 순례자가 남긴 격언.

  • 강대호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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