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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여기 있습니까(1회)

  • 작성일 2026-08-31

아직 여기 있습니까


박세회




신들 중 하나가 대를 이어 집안을 허무니,

랍다코스로부터 꼬인 매듭은 풀릴 길이 없구나.


-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中




2011년 4월 5일




 나루미는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 차림에 카디건만 걸치고 현관문을 나선다. 볕이 잘 드는 곳에선 벌써 성마른 벚꽃이 핀 계절, 이른 아침의 맨션엔 한기가 돈다. 실외용 슬리퍼를 신고 손을 비비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우편물 함을 열어 가득 찬 신문 뭉치들을 집어 든다. 그녀의 엄마 아케미는 주요 일간지 네 개와 간사이 지방지 하나를 구독한다. 그것들의 물리적인 양은 대단하다. 언젠가 한번은 하루에 오는 신문의 무게를 조리용 저울에 달아보았는데 1킬로그램이 넘었다. 다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아사히 신문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는 전단지를 뽑아 든다. 역 앞 한큐 오아시스에서 참치 중뱃살을 할인 중이다. 신문 뭉치들을 카디건 앞섶에 모으고 팔짱을 낀다.

 문이 열리자 한 남자가 내린다. 그녀는 남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남자는 그녀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인다. 이른 아침 출근하는 그 남자와는 이런 식으로 종종 마주치곤 하지만 대화를 나눠본 적은 거의 없다. 무역회사에 다닌다는 얘기는 아케미에게 들었고, 이름은 우편함에서 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8층에 다다른다. 그녀가 신문을 가져오는 이 모든 과정은 기차가 역에 서고 역을 떠나듯 자연스럽다.

 현관에 들어선 그녀는 마오의 방이 있는 복도를 지나 몸을 떨며 뛰어간다. 맨발이 닿은 마룻바닥이 차다. 식탁 옆에 서서 잠시 거실을 본다. 흔하디흔한 방 세 개짜리 밭 전자 형태의 맨션인 나루미네 집의 거실은 대단하다. 누구라도 그 거실에 들어선다면 그곳이 특별한 공간이라는 걸 깨달을 것이다. 그곳엔 시간이 쌓여 있다. 한 달 치씩 노끈으로 단단하게 묶고 연월의 표식을 붙인 신문의 더미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하루 1킬로그램이 넘는 일간지 다섯 종이 한 달 치씩 묶이고, 반년 치가 넘는 묶음들이 하나의 더미를 이루고, 그렇게 모인 더미들이 지우네가 사라진 15년 동안 숲처럼 쌓였다.

 더미의 높이는 대체로 비슷하지만, 월드컵이나 올림픽이 있는 해, 북조선이 유독 미사일을 많이 쏘아 올린 해에는 조금 더 높다. 그런 의미를 생각해 보면 동시대 미술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제목은 ‘사건의 무게’.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나루미네 맨션의 바닥에 고목처럼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녀는 복도까지 침범한 더미들을 피해 부엌 식탁에 앉는다. 식탁 옆 바닥에는 간밤에 아케미가 묶어 표식을 붙인 지난달 치의 묶음이 아직 어느 더미에도 오르지 못한 채 놓여 있다. 다른 달의 묶음들보다 눈에 띄게 두껍다. 나루미는 빈 자리에 오늘 치 신문을 내려놓는다. 1면에는 어제보다 조금 늘어난 숫자와 그것과 비슷하게 조금 줄어든 숫자가 실려 있다. 연예면을 펼친다.

 아리가또.

 이미 부엌에 있던 아케미가 그녀 쪽을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그녀는 소분된 낫토의 포장을 벗기고 밥 위에 날달걀을 올린다. 간장소스를 뿌린 뒤, 밥을 비비며 신문을 본다.

 에? 유리코 상이 정지해 있던 승용차를 들이받았네.

 유리코?

 쇼와의 여왕 유리코.

 그 사람이 아직도 운전을 해?

 아케미는 밥그릇을 들고 자리에 앉아 다른 신문을 펼치며 말한다.

 늙은 거랑은 상관없다니까. 얼마 전에 사토 료도 그랬잖아. 다들 운전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짧은 외침이 들린다.

 아얏.

 마오가 신문 더미에 발을 찧은 모양이다.

 이것들 좀 치워버리면 안 될까? 일본에서 이런 걸 쌓아 두는 건 우리 집뿐일 거야.

 마오의 투정에 나루미가 쏘아붙이듯 답한다.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될까?

 마오가 신문 더미에 발가락을 찧고, 신문을 치워버릴 수 없느냐고 묻고, 나루미는 되묻지 말라고 되묻는다. 아침의 의식과도 같은 대화.

 빨리 먹고, 나갈 준비를 해야지.

 서두를 필요가 있나?

 마오가 밥을 입에 욱여넣은 채 씹으며 말을 잇는다. 

 나도 가고 싶다. 어째서 고등학교는 대학교보다 학기를 일찍 시작하는 거지?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하는 건 대학생인데?

 대학생은 학교도 멀고, 수업 과제도 보통이 아니라고. 좀 봐줘야지.

 아직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가보지 않아도 그런 것쯤은 알아. 더 큰 학생이니까. 대학생. 

 아케미가 마오를 보며 말한다.

 학교 끝나면 경찰서로 와.

 싫어. 경찰서엔 안 갈 거야.

 나루미가 눈을 살짝 치켜 뜨며 묻는다. 

 어째서?

 아빠 얼굴 기억나지 않으니까. 애들이랑 학교 끝나고 아메무라에 가기로 했어. 치 짱이 워커를 사고 싶대.

 나루미는 마오에게 한마디해 주고 싶지만, 딱히 할 말이 없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각자의 밥그릇을 씻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식탁을 치운다. 마치 잘 만들어진 기계식 시계의 무브먼트 파트처럼. 아케미의 전화벨이 울린다. 그녀가 전화기를 들고 방 쪽으로 향하고 목소리가 멀어진다. 두 사람이 정리를 끝내자, 통화를 마친 아케미가 돌아와 말한다.

 오노데라 상이 2시 반까지 와달라네.

 나는 어차피 못 가는 시간이네. 아직 수업 중일 때야.

 마오가 말한다. 

 우린 딱 좋네. 입학식 끝나고 점심 먹고 가면 맞을 것 같아.

 나루미가 답한다.


 우메다까지 15분, 우메다에서 다시 20분. 입학식이 열리는 시립 체육관은 거리로는 가깝지만, 시내를 거쳐 돌아가야 해서 시간이 꽤 걸린다. 나루미가 합격한 시립대학은 한참 남쪽인 스미요시구에 있지만,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의 행사를 할 때는 시립 체육관을 빌려 쓴다. 그만한 인원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대학 캠퍼스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앞섶에 작은 주름 장식이 달린 셔츠에 검은 치마 정장을 입었고, 아케미는 단정한 짙은 남색 치마에 검은색 가을 외투를 걸쳤다. 역에서 멈출 때마다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내려야 할 때가 되자 전철 안에는 온통 검은색뿐이다.

 나루미는 검은 정장들의 행렬을 따라 걷는다. 학내 방송국에서 나온 카메라 앞에서 입학 소감을 말하고 있는 낯선 슈트들을 지나쳐 메인 게이트로 들어서자 나무 패널 바닥 위에 수많은 의자가 가지런하게 직사각형 대형으로 깔려 있다. 이윽고 신입생들과 그 가족들이 몰려든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 의자에 앉아 있는 건 장관이다. 입학 안내문 어디에도 입학식 복장에 대한 규정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검은 정장을 입고 있다. 그녀 자신 또한 검은 정장을 입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점이 의아하다. 자세히 보니 모두가 검은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친족으로 보이는 여성 중에는 옅은 푸른빛을 띤 기모노 차림도 있고, 짙은 감색과 어두운 남색도 간간이 섞여 보인다. 

 그렇게 뭔가를 찾고 있는 나루미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온다.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 가듯 회색 후드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동쪽 분단 중간쯤에 앉아 있다. 그녀는 모두가 검은 정장을 입고 온 걸 의아해했으면서도 회색 후드티셔츠를 입은 남자에게서만은 멀어지고 싶다. 그와 거리를 두기 위해 먼 서쪽 분단 끝에 앉는다. 아케미가 뒤쪽에 준비된 학부모 좌석으로 향하자 나루미의 옆에 앉은 여자가 말을 건다.

 장관이지?

 그렇네.

 처음 본 사람이 동갑말을 쓰는 게 어색하다. 그러나 같은 말투로 대답한다.

 어째서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똑같을까? 나도 검은 정장이지만.

 나도 같은 생각을 잠시 했었어. 마치 까마귀들 같아.

 까아악! 까아악!

 여자가 익살스러운 소리를 내며 말을 잇는다.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를 골랐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네.

 나루미가 자신의 셔츠에 달린 장식을 손으로 만져본다. 여자는 주름으로 무늬만 잡은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난 다카우치 게이코야. 법학부. 정말 옛날 이름이지?

 나도 만만치 않게 흔한 이름이야. 사회학과. 아라이 나루미.

 둘은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을 뿐인 이 인연이 평생 이어지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가까운 미래에 두 사람이 어떤 일로 잠시 멀어졌을 때 나루미의 가슴이 전에 없이 처참하게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도. 정각이 되자 장내 방송이 개식을 알린다.

 식에 앞서, 지난달 도호쿠 지방 태평양 연안 지진으로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1분간 묵념을 올리겠습니다.

 수천 개의 의자가 일제히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나고, 이내 체육관 전체가 조용해진다. 나루미도 고개를 숙인다. 어디선가 정말로 까마귀가 운다. 까아악. 옆에서 게이코가 침을 삼키는 기척이 전해진다. 1분은 생각보다 길다. 고개를 들자 목덜미가 조금 뻣뻣하다.


 입학식을 마친 나루미와 아케미는 사진을 찍고, 아레나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경기장을 오가는 뜨내기들을 위한 그 식당에선 마치 편의점에서 파는 듯한 돈부리가 나온다. 식당에서 나온 두 사람은 오노데라 경부보를 만나기 위해 니시카와 경찰서로 향한다. 거리는 멀지 않지만 한큐선으로 갈아타고 역에서 내려 그곳까지 걸어가는 데는 한 시간 가까이가 걸린다. 다행히 갈아탄 객차 안은 한산하고 두 사람은 나란히 앉는다.

 출근 시간이라면 고생이었을 거야.

 아케미가 말한다.

 전철을 타고 학교에 다녀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힘드네.

 이제 어른이니까.

 대답을 요하는 말은 아닌 듯해 나루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경찰서는 한산하다. 아케미가 민원실에서 번호표를 뽑고 형사과 연결을 요청하는 상담 신청서의 빈칸을 채운다. 민원실 한쪽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화면은 어느 체육관 내부를 비춘다. 나무 마룻바닥 위에 흰 천에 덮인 것들이 가지런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늘어서 있고, 그 사이를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이따금 누군가가 멈춰 서서 몸을 굽힌다. 지난 한 달 동안 수 없이 봐온 장면. 나루미는 화면에서 눈을 돌린다.

 그때 민원실에 들어선 한 남자가 아케미를 발견하고 다가온다. 턱수염이 거뭇하게 솟아오른 남자는 구두인지 스니커즈인지 알 수 없는 신발을 신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구두의 외피와 운동화의 밑창을 억지로 기워 만든 것 같은 형태다. 나루미는 작년에도 같은 신발을 신은 이 남자를 만났다.

 아케미 상. 이런 서류는 안 쓰셔도 괜찮아요. 그냥 저한테 전화를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 남자는 오노데라 경부보다. 그래, 맞아. 더비 슈즈형 스니커, 줄여서 더비 스니커 혹은 레자 스니커. 나루미는 그 신발의 이름을 떠올리며 작은 기쁨을 느낀다. 그것이 오늘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일지도 모른다.

 아녜요. 안 그래도 번거로우실 텐데요.

 오노데라 경부보가 아케미와 나루미를 이끌고 계단을 오른다. 이제는 익숙하지만, 오래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경찰서의 적막함이 낯설었다. 경찰서라고 하면 막연히 인상이 험악한 남자들이 술에 취해 고함을 질러대는 장면이 떠오르지만, 복도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키보드의 타건음뿐이다. 번호가 붙은 접견실로 두 사람을 안내하고 자리를 권한 뒤, 오노데라 경부보는 어딘가로 나간다. 잠시 후 그는 자신보다 상관인 듯한 제복 차림의 남자와 함께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들어온다. 함께 들어선 남자는 제복을 입고, 계급장이 달린 모자를 썼다.

 아케미 상. 좋은 아침입니다. 아니, 꼭 좋은 아침은 아니군요. 1년 만입니다.

 안녕하세요. 경부님.

 나루미도 왔구나.

 나루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남자는 오노데라 경부보보다 더 낯이 익지만, 이름은 기억에 없다.

 그런데 올해는 행려사망자가 작년보다 더 많습니다. 힘든 시간이 조금 더 길어져 죄송합니다.

 늙은 남자가 말한다.

 아뇨 아뇨. 매번 귀찮게 해드려 저희 쪽이 죄송하지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루미는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두꺼운 서류철을 바라본다. 그것은 검은 인조가죽 덮개로 싸여 있다. 그녀는 그 안에 담긴 이미지들을 상상하며 지금 당장 이 방에서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천천히 확인하시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여기 오노데라 군이 안내할 겁니다.

 늙은 남자가 나가고 나자 오노데라 경부보가 두 사람의 앞에 앉는다. 오노데라가 행려사망인대조부라 적힌 서류철 쪽으로 손을 뻗다 말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지난달에는 보셨어야 했는데, 올해는 도호쿠로 차출된 인원이 많아서 대조부 정리가 늦어졌습니다.

 아녜요. 그런 말씀 마세요. 죄송하실 일이 아니잖아요. 그쪽 일이 훨씬 급하지요. 저희 같은 경우야 뭐……. 이쪽은 사실 실종이 확실한 것도 아니니까요.

 오노데라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다문다. 그리고 잠시 눈을 내렸다가 든다.

 천천히 보세요.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나루미는 방금 지나간 아케미의 말을 뒤늦게 붙잡는다. 실종이 확실한 것도 아니니까요. 겸양의 말투에 실려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말. 나루미는 그 말을 마음의 어디에 두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유예한다. 책을 건네받은 아케미가 표지를 넘기자 진분홍색 소국 사진이 인쇄된 페이지가 나온다. 언제나 소국 사진이 첫 페이지에 실려 있다. 추도의 뜻이리라 짐작은 하지만 어째서 하얀색이 아니라 진분홍인지는 알 수 없다. 매년 같은 사진을 쓰지는 않는 듯, 진분홍 소국이 작년의 그것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한 장을 더 넘기자 바스락거릴 만큼 건조한 단어들이 거기에 나열되어 있다.


 정리 번호 하나마키 22-1. 발견일 헤이세이 22년 8월 21일. 사망 추정일 동년 8월 17일. 발견 장소 이와테현 하나마키시 고다 제8지할 사부로 제방 안쪽. 성별 남. 추정 연령 60세 이상. 신장 167cm. 치과 소견 상악 11∼12번 레진 충전. 23∼26번 금속 크라운. 27∼28번 결손. 하악 48번 결손. 36∼38번 금속 크라운.

 한 장을 더 넘기자 그 행려사망자의 소지품 목록이 나온다.

 검정 보스턴백. 백색 폴로셔츠. 백색 야구 모자, 뉴욕 양키스. 검정 가죽 장지갑. 세면도구. 목록 아래로는 소지품 사진이 늘어서 있다. 기호였던 것들이 실체로 다가오는 일은 갑작스럽다. 축축하게 젖고 군데군데 누르스름하게 물든 백색 폴로셔츠였던 것. 흙이 잔뜩 묻은 검정 보스턴백이었던 것. 가방 안에 들어 있었던 듯 바스락하게 말라 있는 하얀 야구 모자였던 것. 정면 가운데가 아닌 옆에 붙어 있는 NY 마크. 마크 위로 검붉은 얼룩이 번져 있다. 누군가가 언젠가는 고심해서 골랐을 물건들이다, 라고 나루미는 짐작한다.

 한 장 더 넘기자 그것들을 골랐을 남자였던 것의 사진이 나온다. 정면과 측면. 같은 얼굴을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무적인 기록. 플래시에 지워진 눈. 풍화되었다가 다시 젖어 부서진 머리칼. 손등의 점. 잿빛 구름처럼 번진 손등의 점. 나루미는 침을 삼킨다. 침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가 자신에게만 들리기를 바라면서.

 다시 한 장을 넘긴다.

 후쿠오카 22-1. 발견일 헤이세이 22년 3월 31일. 사망 추정일 동년 3월경. 발견 장소 후쿠오카현 야메시 호시노무라 이시와리다케 산기슭. 성별 남. 추정 연령 30∼40대. 체격 중간 체형. 혈액형 A. 신장 165∼170cm. 후드가 달린 점퍼. 검정 데님바지. 초록색 가로줄 무늬 흰색 스웨터. 검은색 긴팔 셔츠. 검은색 가죽 벨트. 275mm 등산화. 치과 소견 좌상 7, 6번 결손. 우상 6, 7번 결손. 좌하 7, 6, 5번 결손. 우하 6, 7번 결손.

 행려인의 정보는 발견된 장소의 행정이 정한 방식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적힌다. 후쿠오카현의 치과 기록은 하나마키의 것보다 자세하지 않다. 어느 현에서 발견되느냐에 따라 어떤 것은 기록되고 어떤 것은 기록되지 않는다. 같은 치아의 자리라도 번호가 다르게 붙여진다.

 지우네 상은 키가 180cm나 됐으니까. 일본 사람 중엔 그렇게 큰 사람이 잘 없단 말이지.

 아케미가 말한다.

 아케미 상. 그래서 저희가 부전을 붙여두었습니다.

 오노데라가 대조부 위쪽에 붙은 핑크색 메모지를 가리킨다.

 이 포스트잇 말인가요?

 예. 급하게 작업하느라 색상이 조금 부적절한 것 같긴 하지만요.

 그런 뜻은 아니에요. 하지만……. 천천히 전부 볼게요. 그러고 싶어요. 시간만 괜찮으시다면요.

 그럼요. 괜찮습니다.

 아케미는 허리를 곧게 펴고 자세를 단정히 가다듬은 뒤 다시 책장을 넘긴다.

 가나가와현이, 나가노현이, 시즈오카현이 넘어간다. 40∼50세의 여성. 50∼70세의 남성. 60세 이상으로 추정되는 남성이었던 것. 나루미는 죽은 인간의 사진을 지나치게 많이 봤다고 생각한다. 검은색 다운재킷. 갈색 카디건. 감청색 슬랙스. 합성피혁 단화. 더비 스니커. 회색 스웨트팬츠. 갈색 샌들. 문고판 책. 트렁크 팬티 네 본. 호프 담배 두 갑, 한 갑은 개봉. 얼굴이 긴 편. 광대가 나온 편. 이마가 벗겨짐. 좌상악 8, 7번 결손. 우하악 6, 7번 결손. 레진 충전. 크라운 캡 결손.

 결손. 결손. 결손.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아케미의 손이 빨라진다. 결손. 결손. 결손. 비슷하고 다른 정보들이 염불처럼 반복된다. 나루미의 머릿속에선 눈에 읽히는 정보들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기 위해 뒤엉키다가 결국 실패한다. 그리고 한 문장만이 겨우 남는다. 올해로 마흔다섯 살. 신장 180cm. 아라이 지우네. 결손.


 나루미는 아라이 지우네가 사라진 날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아니다. 어쩌면 사라졌다는 건 나루미 쪽으로 치우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아라이 지우네는 나루미와 엄마 아케미가 기다리는 집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지우네가 돌아오지 않은 날, 나루미는 유치원에서 돌아와 하루 종일 들떠 있던 자신을 기억한다. 애니메이션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방영되는 날이었다. 연인 마모루가 악의 조직 섀도우 갤럭티카의 손에 죽은 줄도 모른 채 그를 기다려온 우사기. 그녀가 섀도우 갤럭티카와의 마지막 싸움을 통해 진실과 마주하는 회차였다. 그날 나루미는 가장 예쁜 원피스를 입은 채 한 손에는 세일러문이 쓰는 요술봉 장난감을 들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변신 장난감과 과자 광고를 보며 기다리다, 마침내 떠오르는 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한 주제가가 들리자 나루미는 거실을 뛰어다니며 춤을 췄다. 저녁거리가 차려진 식탁에는 아무도 없었고, 아직 걷지도 못하는 마오는 담요에 싸인 채 울고 있었다.

 아케미가 어딘가로 자꾸 전화를 걸었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그러나 나루미는 그런 것들을 이상하게 여길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그날 나루미의 머릿속에는 죽은 치바 상이 우사기에게로 어떻게든 돌아와야 한다는 염원만이 가득했다. 달빛 전사 츠키노 우사기, 좀 촐랑거리는 16세 고등학교 1학년, 사랑과 정의의 전사가 마모루와 재회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과 함께 ‘문라이트 전설’의 전주가 흘렀고, 나루미는 이미 울고 있었다. 그날의 환희 속에 아빠의 부재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바다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어느 겨울의 새벽 와타리시 마치초의 바닷가를 찾아 방파제로 향하던 낚시꾼 둘이 외길을 막고 있는 지우네 소유의 빨간 저스티를 발견했다는 얘기를 들은 건, 중학교 때였다. 낚시꾼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할 법한 행동을 했다. 상향등을 켜서 신호를 보내고 대답이 없자 경적을 울렸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웬 얼토당토않은 인간이 차를 저따위로 세워두고 자고 있나 보다 생각한 두 사람 중 보조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는 차 밖으로 나가 뭔가를 살피는 일은 당연히 보조석에 얻어 탄 자신의 몫이었다고 진술했다. 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열쇠가 꽂힌 채로 시동은 꺼져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차량 운전석이 뒤로 젖혀져 있었다는 점 정도였다. 나루미는 아케미가 처음으로 자신을 경찰서에 데리고 갔던 날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로 매년. 이맘때면 나루미는 아케미와 함께 그해에 발간된 행려사망인대조부를 살펴본다.


 다행이야. 

 두꺼운 서류철의 마지막 장을 덮은 아케미가 중얼거린다.

 아빠는 없네.

 나루미가 대답한다.

 응.

 나루미는 언젠가 올해에는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봄에 내린 대동강의 눈

 



 사랑의 다른 이름은 감사다. 저는 오늘도 제 아내 아키코 상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어제는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인 듯한 눈이 대동강 변에 내렸습니다. 올겨울은 시작부터 유난히 추웠지요. 제 집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대동강은 12월엔 걸어서 건널 수 있을 만큼 단단해져 있었습니다. 얼음 안에 갇힌 기포의 무늬가 물결을 그리며 퍼져 있는 모습을 보며 흑백의 오로라를 연상했습니다. 물이라는 것은 얼어붙는 그 순간에도 어딘가로 흘러가는 모양을 띠고 있구나, 라고 놀라워하면서도……. 어찌 되었든 어서 봄이 되어 얼어붙은 이 강이 다시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요.

 자정의 니혼진무라는 포르말린에 갇힌 표본처럼 고요했고, 저는 그 고요 속에서 곧 있을 유럽 챔피언스리그 8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 풋볼클럽의 두 번째 맞대결을 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였습니다. 이 두 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도 나란히 선두를 다투는 앙숙이니,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무대에서 다시 만난 이 준준결승이 그야말로 사활을 건 명승부가 될 거라는 생각에 며칠 전부터 손을 꼽아가며 기다리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상 탓인지 텔레비전을 켜니 노이즈가 잔뜩 끼더군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잠자리에 들었던 아키코 상이 방에서 나왔습니다. 그녀는 저 따위와는 달리 생활력이 무척 강하고, 어떤 문제 상황이든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이 뛰어난 신세대 여성입니다. 그녀는 “잠깐 있어봐요”라며 잠옷 바람에 파카를 걸치더니 절연 장갑을 두 손에 끼고 부츠를 신더군요.

 저희 집은 단층에 평지붕을 인 주택으로 위성안테나가 설치된 지붕에 올라가려면 가파른 옥외계단을 통해야 합니다. 심약한 저로서는 단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한 곳이지요. 그러나 그녀는 용감했습니다. 인터넷이 안 될 때도, 텔레비전이 말썽을 부릴 때도 그녀가 나서서 모두 해결했지요. 게다가 어제는 눈까지 온 날이었으니, 더욱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잘 나오면 소리쳐 줘요’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가 밖으로 향한 뒤 몇 번이고 ‘캉캉’하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아마도 잘 돌아가지 않는 안테나를 렌치로 때려 돌리는 소리인 듯했습니다.

 나를 위해 북조선까지 와준 그녀에게는 지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말이지 감사한 것뿐입니다. 그녀와 처음 만난 것은 한 연합 학회의 모임에서였지만, 첫 데이트를 한 것은 이케부쿠로 파르코에 있는 루프톱 비어 가든이었습니다. 초여름이었지요. 세계동시혁명을 믿던 우리였지만, 그날만은 그녀와 당시에 유행하는 비어 가든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생맥주를 한잔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빠르지 않게 걷는데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날씨를 비집고 당도한 비어 가든에서 시원한 생맥주의 첫 모금을 들이켰던 바로 그 순간 우리의 두 눈은 마주쳤습니다. 그때 저는 이미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석 달 뒤 단체의 지령에 따라 쓰바메 호를 타고 북조선으로 건너와 육체 수련에 매진하던 순간에도 저는 몇 번이나 그날 마주쳤던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렸습니다. 거사를 시행하기 전 다시는 그녀와 파르코의 비어 가든에 갈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아마 저는 단체의 지령을 따라야 할지 망설였을 겁니다. 물론 고민한 끝에는 같은 결론에 다다랐을 것으로 확신합니다만. 제게 다행인 것은 그녀가 어떻게든 이곳으로 건너와 줬기에, 지금의 우리가 대동강맥주를 함께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겠지요. 

 많은 사람이 제 아내가 납치된 것으로 오해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일에 관해서라면 1980년대 마이니치의 주필로 이름을 날렸던 소카베 하나미치 씨가 직접 몇 번이나 니혼진무라를 찾아 저희를 인터뷰하고 이를 묶어낸 대담집 『종국』에 자세히 해명되어 있으니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키코 상이 옥상으로 올라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텔레비전 화면의 안개가 걷히고 하얀 점들이 사라지더니 드디어 일본 방송의 화면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챔피언스리그의 중계는 아직 시작 전이었고, 종래의 뉴스 방송들이었지요. 제 신호를 들은 그녀는 옥상에서 내려오더니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파카를 벗고 장갑과 렌치를 원래 있던 공구함에 챙겨 넣고는 침실로 사라졌습니다. 그녀 역시 이제 조금씩 허리가 굽어가고 있지만, 아직 저보다는 훨씬 당당한 뒷모습이었습니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또 잠시 감상에 빠졌으나 이내 챔피언스리그의 중계방송이 시작되어 편지를 쓰는 지금에야 그때의 고마운 감정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남조선의 프리미어리거 박지성 군은 지난겨울 다리를 다쳐 한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습니다만, 이날은 선발로 나섰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응원하게 되더군요. 맨체스터의 선제골이 터졌을 때 옆집에서 탄식이 새어 나오는 걸 들었습니다. 아마도 첼시를 응원하는 다케베 군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후반 들어 첼시의 드로그바 군이 한 골을 만회해 경기장이 술렁이는 듯했으나, 킥오프 직후 박지성 군이 다시 골을 넣어 달아났지요. 남조선의 사내가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침착하게 골을 밀어 넣는 모습을, 그의 고향과 이어진 반도의 땅에서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결과는 2 대 1, 유나이티드의 승리. 이로써 유나이티드는 두 경기 합계로 첼시를 제치고 준결승에 올랐다는 걸 다시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이 역사적인 경기를 볼 수 있게 해준 아내에게 늘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그럼 또 안부를 전할 날을 기다리며

 2011년 4월 14일

 조선의 수도 평양에서 요시토모 겐페이 근언





2011년 4월 21일




 수업이 끝나고, 나루미는 학교 서쪽 게이트에서 가까운 아비코초 역 쪽으로 향한다. 역 앞에는 비토루즈가 있다. 비토루즈는 비틀즈의 가타가나 표기를 다시 영어로 음차해 Beat loose로 쓴다. 바에 들어서기 전 쇼윈도에 비친 얼굴을 본다. 낮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다. 후드가 달린 마운틴파카를 살짝 덮은 긴 머리카락이 아침보다 좀 더 자연스럽게 헝클어졌고,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든다. 해 질 녘의 공기가 낮보다 차갑다. 봄은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가게에 들어서자 도어 벨이 울리고 바에 앉은 사람들이 나루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바를 사이에 두고 한 남자가 마스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 사이에는 처음 보는 카메라가 놓여 있다. 와쿠이다. 입학식에 회색 후드티셔츠를 입고 왔던 바로 그 남자. 사진부에 입부한 뒤 첫 환영회에서 와쿠이를 발견하고 나루미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소리를 내며 놀랐다. 와쿠이가 사진부에 입부할 걸 알았더라면 나루미는 입부를 고민했을 것이다. 결과는 지금과 다르지 않았겠지만. 스툴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두 사람이 그녀를 쳐다본다.

 수업이 좀 늦게 끝났나 봐.

 마스터가 생맥주를 따르며 말한다.

 잔은 꼭 홀더 위에 놔줘. 자꾸 물 자국이 생기거든.

 시라이시 선배, 근데 이건 뭐예요?

 나루미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카메라를 가리키며 사진부의 오비인 마스터에게 묻는다.

 M3.

 와쿠이는 늘 그렇게 짧게 대답한다. 질문을 하는 일도 좀처럼 없다. 그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며, 미남이라고도 할 수는 있는 얼굴을 가졌지만, 어쩐지 말을 늘 아끼는 그 태도 탓에 옹졸하고 갑갑한 느낌을 남긴다. 늘 짙은 검정 바지에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카디건을 걸친다. 평일 오후에 자신의 거실에서 음악감상을 즐기는 부자 중년이 입을 것만 같은 옷차림이다. 카디건도 티셔츠도 검정과 감색 사이 어딘가로 조금씩 바뀌는 듯하지만, 색상표라도 대조해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수도. 이쯤 되니 와쿠이가 입학식 때 평소에도 입지 않는 후줄근한 후드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던 것은 일종의 항의의 표시였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대체 누구에게?

 라이카의 M3야. 1950년대에 출시된 라이카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의 상징 같은 모델이지. 전 세계에 20만 대나 있을까? 이 구하기 어려운 걸 와쿠이 군이 가져와서 구경하던 참이야.

 시라이시가 와쿠이의 무뚝뚝한 대답을 보충한다. 졸업하고도 부실에 얼굴을 비추는 그가 역 앞에 바를 차린 뒤로, 비토루즈는 자연스럽게 사진부의 두 번째 부실이 되었다.

 나루미는 와쿠이의 카메라가 마음에 든다. 은은한 무광택의 은색 트림이 잘 가공된 가죽 보디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단정하다.

 이런 건 비싸겠죠?

 그럼. 적어도 15만 엔은 줘야 할 걸?

 후아!

 나루미가 큰 소리를 내자 와쿠이의 얼굴이 붉어진다.

 우리 집 아저씨가 쓰던 것일 뿐이야.

 나루미는 와쿠이의 대답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읽는다. 좋은 것을 가진 걸 부끄러워하는 아이구나. 나루미는 생각한다.

 사진을 찍는 아버지라니 멋있네.

 전혀. 그냥 사진을 찍는 척을 하고 싶었을 뿐일걸? 그 사람은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른 채 돈을 벌어버렸거든.

 나루미는 와쿠이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모습을 처음 본다.

 나루미는? 사진부에 들어왔으니 카메라를 구해야지.

 시라이시가 말한다.

 있어요. 집에. 아주 오래전에 아빠가 쓰던 게.

 쓰던 거?

 와쿠이가 묻는다.

 응, 지금은 안 쓰거든. 근데, 와쿠이는 그래서 그걸로 뭘 찍을 거야?

 글쎄. 그런 생각까지는 안 해봤는데.

 토마손은 어때? 저걸 찾는 게 꽤 재밌다고.

 시라이시가 토마손을 얘기하자 세 사람은 모두 뒤쪽을 돌아본다.

 바의 뒤쪽, 비토루즈의 가장 긴 벽에는 사진이 여러 장 걸려 있다. 어째서 있는지 모르겠는 구조물들, 어떤 이유에서든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것들을 담은 사진들. 이를테면 한 사진 속 건물의 2층 외벽에는 문이 나 있다. 그러나 문은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다. 그 문을 열고 한 발을 내디디면 그대로 추락할 뿐. 또 다른 사진에 있는 옥상에는 시멘트 계단이 있다. 다만 계단은 허공에서 끝난다. 계단의 끝까지 올라간 뒤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내려오는 것뿐이다. 또 다른 사진에는 계단 두 개를 이어 붙인 듯한 모양의 육교가 있다. 인도의 한가운데서 시작된 이 육교는 차도를 가로지르지 않고 그대로 인도로 내려선다. 이 육교를 건너면 처음의 자리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같은 길 위다.

 나루미는 시라이시가 찍은 그 사진들을 좋아한다. 개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스타코 스타일로 거칠게 마감된 주택 외벽에 덩그러니 달린 수도꼭지다. 아마도 예전엔 수도꼭지가 달린 쪽이 다른 건물의 내부였을 것이다. 언젠가 안이었던 벽은 밖이 되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수도꼭지를 철거하지 않은 채 흰색 페인트를 칠했다. 수도꼭지 끝에 탁한 눈물처럼 허연 페인트 방울이 맺혀 있다.

 토마손을 찾으러 출사를 가보자는 거지. 와쿠이도 알지? 나도 펜탁스를 새로 하나 장만했거든. 빨리 필름을 넣고 찍어보고 싶단 말이지.

 와쿠이는 아무 대답 없이 일어나 사진들을 살펴본다.

 선배. 여긴 어디였어요?

 아마 히메지였을 거야.

 그런데, 이건 토마손이 아니지 않나요? 이 기둥들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차가 인도로 들이닥치는 걸 막아주는 거 아녜요?

 와쿠이가 말한다.

 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그런 종류의 토마손을 아타고 타입이라고 하는데, 이 아타고 타입이 진정한 토마손인지 아닌지를 두고 의견이 갈리지.

 아타고 타입? 아타고 신사 할 때 그 아타고?

 나루미가 묻는다.

 응. 바로 그 도쿄에 있는 아타고 산에서 온 이름이야. 토마손의 창시자인 오쓰지 가쓰히코 일행이 신바시에서 아타고 산으로 걸어가던 길에 저런 의미 불명의 기둥 1호를 발견했거든. 그래서 뜬금없이 우뚝 솟아 있는 것들을 아타고 타입이라고 불러.

 우리가 아는 그 오쓰지 가쓰히코?

 와쿠이가 묻는다.

 맞아. 바로 그 전위예술가가 토마손이라는 개념의 창시자야. 본래의 건축적 의도를 상실한 무용한 건축의 흔적들. 그런 것들에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미국에서 고액 연봉을 주고 데려왔으나 영 안타를 못 쳐서 방출해야만 했던 야구 선수 게리 토마손의 이름을 붙였지. 재밌는 건 아타고 산 꼭대기에 있는 신사야. 목조 가옥들로 빽빽했던 에도에 불이 나 도시가 통째로 타버릴 것을 우려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부를 열면서 불을 막아주는 신을 아타고 산 위에 모셨지. 그런데 정작 그 신사는 에도 대화재 때도, 관동대지진 때도, 미군의 공습 때도 화염에 휩싸였어. 불이 나지 않도록 빌기 위해 지은 신사가 실은 가장 자주 불에 탄 거야. 아타고 신사 그 자체에도 토마손적인 면이 있다고 해야 할까?

 의견이 갈리는 이유는요?

 토마손을 정의하는 방식 때문이지. 요즘은 조금만 성에 안 차는 물건이면 죄다 토마손이라고 불러버리지만, 원래는 그런 말이 아니야. 유용했다가 무용해진 용무용의 서사가 있어야 토마손이지. 저 수도꼭지를 봐. 예전에는 분명 물이 나왔겠지만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잖아. 한때는 쓸모 있었으나 이제는 목적을 잃었어야만 비싼 몸값을 주고 데려왔지만 아무 활약도 못 한 토마손과 완벽하게 겹친다는 거지. 그러니까 저 수도꼭지는 100%의 토마손이야.

 너무해. 게리 토마손은 자기 이름이 이렇게 쓰이는 걸 알까?

 나루미가 묻는다.

 안다면 화를 내기보다는 슬퍼할 거야. 현역일 때부터 헛스윙을 하도 많이 해서 수입산 선풍기로 놀림을 받았다고 하니까. 하여튼 다시 돌아와서, 저기 저 사진에 있는 아타고 타입은 어떨까? 실은 주민들이 불법 주차를 막으려고 일부러 설치한 거래. 아타고 신사에 불이 났을 때 소방차가 들어오려면 길이 트여 있어야 해서가 아니었을까, 라고 추측만 하고 있어. 물론 지금은 아무도 인도까지 침범해 가며 주차하지 않아. 그랬다간 단속카메라에 찍혀 곧장 벌금이 날아올 테니까. 그래도 저기 주차를 못 하게 막는다는 목적만큼은 아직 살아 있는 셈이지. 토마손 포럼 웹사이트에서 누가 이런 말을 했어. 단속카메라가 있는 곳의 아타고 타입은 토마손이지만, 카메라가 없는 골목의 아타고 타입은 아직 토마손이 아니다. 즉 아타고 타입은 과도기적 토마손이다. 정말 멋진 말이지.

 나루미는 잔에 가득 담긴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와쿠이를 본다. 토마손이니 아타고 타입이니 하는 세계에 한층 깊숙이 진입하고 있는 듯, 그의 눈은 시라이시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다.

 토마손을 찍는 사람들에게 오사카는 천국이야. 오사카 사람들은 상인 기질이 강하고 셈이 정확해. 그래서 무언가를 철거하는 데 드는 돈이나 수고가 그 값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철제 계단쯤이야 2층에 매달아 둔 채로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거든.

 아케미는 더는 예전처럼 신문을 샅샅이 읽거나 꼼꼼히 스크랩하지 않는다. 한두 기사쯤 오려내고 대충 넘긴 뒤 접어서 쌓아둘 뿐. 어쩌면 나루미가 더 열심히 보는지도 모르겠다. 나루미 역시 아사히 신문과 오사카 신문을 제외하면 보지 않는다. 어떤 신문들은 빳빳하게, 배달되어 온 그대로 구겨진 자국 하나 없이 더미로 엮인다. 과도기적 토마손화. 순수 토마손으로의 이행 단계. 나루미가 이런 공상을 하고 있는 사이, 와쿠이가 눈앞에 손바닥을 흔들어 나루미를 부른다. 키가 큰 와쿠이는 손도 커서 나루미의 얼굴을 다 가릴 정도다.

 이번 주말 어때?

 뭐가?

 출사 말야. 선배 말대로 이쿠노구로 가는 거 어때?

 이쿠노? 왜 하필 거기야?

 시라이시가 끼어들어 설명한다.

 오사카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이 많은 동네거든. 버려진 주택도 가장 많고.

 그런 거라면 차라리 가마가사키에 가지 그래요?

 거긴 오래된 정도가 아니라 위험하다고.

 시라이시가 안주 없이 맥주를 들이켜는 나루미 앞에 마른 보리멸을 놓으며 말한다. 그때 종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어이, 게이코!

 시라이시가 반긴다. 그녀는 작은 꽃이 프린트된 원피스에 짧은 흰색 가죽 재킷을 걸치고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가죽 부츠를 신고 있다. 모두 나루미는 처음 보는 옷들이다. 자연스러운 갈색 머리와 하얀 피부가 무척 잘 어울린다. 그녀는 어깨에 멘 가방을 빈자리에 던져두고 나루미의 옆에 앉는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토마손?

 토마손? 그게 뭔데?

 시라이시가 게이코에게 토마손에 대해 설명한다. 게이코는 이쿠노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흥미를 보인다. 보리멸을 먹고 맥주를 마신다. 이쿠노에 토마손을 찍으러 가자던 이야기는 전후의 가난과 가마가사키 폭동으로 화제가 옮겨 가는 사이 잊힌다. 너무 늦기 전에 나루미는 게이코와 먼저 일어선다.

 언제부턴가 종종 비토루즈에서 자연스럽게 게이코를 만나 함께 전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스기모토초 역에서 타는 편이 더 빠르지만, 게이코와 10분가량을 걸어 아비코 역에서 미도스지센을 탔다. 게이코가 미도스지센을 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루미는 게이코와 아비코 역으로 향한다. 완연한 밤. 두 사람은 열차에 나란히 앉는다.

 나루미 짱, 와쿠이 군이랑 이쿠노에 갈 거야?

 아니. 그냥 얘기 중에 나온 말이야. 그 애랑 둘이 어딘가로 가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왜? 재밌을 것 같은데? 떡볶이도 먹고 치지미도 먹고.

 지치미?

 치지미! 한국식 오코노미야키래. 나도 먹어본 적은 없어. 얼마 전에 츠요폰1)이 『샤베쿠리 007』에 나와서 먹는 걸 봤는데, 정말 맛있어 보이더라. 안에 생선 살이 들어 있는 것도 있고, 호박이 든 것도 있어.

 게이코 짱도 가려고? 

 같이 가면 좋지. 시라이시 선배도 같이 더 좋고. 어때? 떡볶이 먹고, 치지미도 먹고. 토마손이 뭔진 잘 모르겠지만 말야.

 치지미!

 나루미는 조금 크게 소리를 낸 자신에게 놀란다.

 치지미! 치지미! 까아악! 까아악!

 게이코가 뜬금없이 까마귀 소리를 낸다. 그녀의 낯선 활력이 나루미에게 옮겨붙어 번진다. 옆 칸에서 누군가 흘끗 보지만, 신경 쓰지 않고 큰 소리로 웃는다. 열차의 안내 방송이 흐른다.

 내가 세팅해 볼게. 나한테 맡겨.

 게이코가 자리에서 휙 몸을 일으키더니 손을 흔들며 문밖으로 사라진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는다. 메일을 먼저 보낸 것도 게이코, 점심을 같이 먹자고 연락한 것도 게이코, 어디선가 발견한 사진부의 안내문을 알려준 것도 게이코. 생각해 보니 망설이던 나루미를 사진부로 끌고 간 것도 게이코였다. 게이코가 없었다면 나루미의 대학 생활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사진부의 환영회가 있었던 그날, 나루미는 스기모토초 역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봄밤의 공기는 겨울의 낮만큼 차가웠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루미 짱, 잠깐만.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던 게이코가 숨을 골랐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었다. 게이코가 문득 나루미의 보스턴백 지퍼 쪽을 가만히 보며 말했다.

 그거.

 응?

 그 키 링 말이야. 혹시 새턴?

 나루미는 게이코가 가리키는 쪽을 내려다봤다. 가방 지퍼 고리에는 아크릴로 만든 긴 낫 모양의 보라색 키 링이 달려 있었다. 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 긴 날 끝에 별 모양 장식이 붙어 있는 세일러 새턴의 무기, 사이렌스 그레이브. 나루미는 그게 거기 달려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인조가죽에 버버리 패턴의 천을 입힌 이 학생용 가방을 샀을 때 달아두었던 키 링. 그날 어른스러운 토트백을 멘 게이코 앞에서 나루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세일러 새턴 맞구나!

 게이코가 외쳤다.

 새턴 좋아해?

 응.

 왜?

 나루미는 잠깐 걸음을 늦췄다. 새턴이 왜 좋을까? 미치광이 과학자 토모에 교수의 딸이라서? 아버지가 어둠과 맺은 계약 때문에 제 몸에 악을 품고 자란 병약한 소녀라서? 학교에 친구 하나 없던 그 애가 실은 세상의 파멸과 부활을 한 손에 쥔 전사라서? 어둡고 조용하고 머리카락마저 보라색이라서? 홀연히 나타나 낫을 한 번 내리긋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는 침묵의 메시아이기 때문에?

 혼자라서?

 나루미가 대답했다.

 게이코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우라누스!

 역시.

 역시 미남이 좋다고 할까?

 나루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우라누스. 하늘을 달리는 사람.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는 얼굴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가장 차갑게 움직이는 전사. 우라누스는 새턴이 각성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새턴을 희생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의 선택. 그리고 새턴은 그걸 알고 있었지.

 그래도 우라누스와 새턴은 결국 함께잖아?

 나루미가 말했다.

 응. 그랬지.


 그랬구나. 두 사람이 아비코 역에서 미도스지센을 함께 타기 시작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구나. 기억을 떠올리며 가방의 지퍼를 살짝 쥐어본다. 낫 모양의 키 링이 손가락 끝에 닿는다. 그때 머리 뒤에서 쿵쿵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자 게이코가 열차 유리창을 두드리며 웃고 있다. 뒤를 돌아보며 나루미가 웃는다. 게이코가 입 모양으로 말한다.

 가자, 토마손.

 나루미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진다. 아이팟 나노를 플레이하자 밴드 미나모의 노래가 귓가에 울린다. 나루미는 고등학교 때부터 미나모파로 유명했다. 한 반에 한두 명, 보컬인 미즈시마 상의 연수정 같은 목소리에 사로잡힌 친구들이 있었다. 늘 최신 유행가들을 열심히 찾아 듣는 마오가 한번은 나루미더러 미나모 자폐라고 해서 상처를 받았던 적도. 미즈시마 상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장난에 정신이 팔린 채 비구름에 실려 낯선 도시로 떠내려가는 고양이처럼 의식을 잠시 꺼뜨린다. 몇 정거장을 지나 한신 선으로 갈아타고, 역에서 내려 연립주택과 공장 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을 10여 분 걸어 집에 도착하는 사이에 그녀의 마음은 마치 선승처럼 고요해진다.

 다녀왔습니다.

 대답은 없지만, 아케미와 마오의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이 거실 텔레비전 앞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

 이번에는 마오가 쓰기로 했어.

 잠옷으로 갈아입는 사이 아케미가 큰 소리로 말한다.

 근데, 나는 이런 건 써본 적이 없는데?

 뒤를 잇는 마오의 투정.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이니까.

 나는 괜찮아. 그런데 읽는 사람들이 괜찮을까? 엄마랑 언니는 괜찮겠어?

 응. 그럼. 마오가 쓰면 아빠가 좋아할 거야.

 나루미가 거실로 나오는 동안 잠시 아무 말이 없다. 그 침묵의 틈으로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지나간다. 아나운서는 쓰나미 피해 지역에서 외국인 절도단이 기승을 부린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뭐라고 써?

 마오가 묻는다.

 야마모토 미호는 살아 있다.

 아케미가 말한다.

 엄마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생각해. 키미코 씨 얘기 들었잖아. 평양에서 미호를 본 사람이 있다잖아.

 잠옷으로 갈아입은 나루미가 두 사람의 옆에 앉는다.

 그렇지만, 평양에서 미호를 봤다는 건 오래전 얘기잖아. 그사이에 죽었을 수도 있고.

 나루미는 마오의 속을 알 수 없다. 누가 그걸 몰라. 누가 그걸 모르냐고.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마오 짱. 일단 쓰자.

 마오가 붓을 들고 피켓에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텔레비전 화면이 스튜디오에서 피난소의 체육관으로 바뀐다. 담요를 두른 사람들의 등 너머로 자막이 지나간다. 정부, 근거 없는 소문에 주의 당부.

 저거, 아니래.

 붓끝을 세운 채로 마오가 말한다.

 뭐가?

 저 도둑 얘기. 소문 아니래. 정말이래. 트위터에서 실제로 본 사람이 있어. 밤에 쓰나미로 무너진 집에 들어가는 도둑을 봤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정부가 아니라고 하잖아.

 정부가 다 알 수는 없잖아. 본 사람이 있다니까.

 본 것만으로 그 도둑이 외국인인 줄을 어떻게 알아?

 마오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피켓으로 고개를 숙이며 묻는다.

 미호 상의 호는 어떤 한자지?

 나루미가 답한다.

 쌀의 이삭이라고 할 때의 호.

 이삭? 이렇게 쓰는 건가?

 가운데 가로획이 하나 들어가야지.

 아케미가 눈살을 찌푸린다.

 마오 짱. 얘기하면서 쓰니까 글자가 삐뚤어지잖아.

 나루미는 마오의 글씨를 본다. 도저히 봐줄 수 없을 만큼 못났다.





지진의 봄




 평양에도 봄이 왔습니다. 모란봉 기슭에는 진달래가 한창이고, 대동강의 버드나무는 연둣빛 실을 물 위에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아침에 창을 열면 흙냄새가 올라옵니다. 계절의 냄새는 어디나 비슷하다는 것을 저는 이 나라에 와서 처음 배웠습니다.

 몇몇 분께서 지적하신 대로, 저는 지난 글들에서 축구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습니다. 누구도 아스널의 수비나 반페르시의 발목 따위를 걱정하지 않던 시점이었습니다. 지금이 축구 이야기나 하고 있을 때냐. 맞는 말씀입니다.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그 글을 쓰던 밤,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3월 12일 아침, 이곳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일본 동북부에 강한 지진이 있었다는 몇 줄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또 흔들렸구나, 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나라는 원래가 자주 흔들리는 나라니까요. 그리고 며칠 뒤, 한 단파방송에서 아나운서가 읽어주는 숫자를 들었습니다. 1만을 넘어서는 숫자였습니다. 아나운서는 그 숫자를 읽다가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전파 저편의 그 짧은 침묵이, 어떤 영상보다 많은 것을 제 눈앞에 펼쳐놓았습니다.

 그러고도 저는 축구 이야기를 써서 올렸습니다. 몰랐던 척을 하려던 것이 아닙니다. 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이것도 정직한 말은 아니군요. 쓰기 시작하면 무엇을 쓰게 될지 무서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공이 선을 넘었느니 넘지 않았느니 하는 이야기 뒤에 숨었습니다. 예순을 넘긴 남자가 숨기에 축구란 참 좋은 곳입니다.

 이곳에 일본의 소식은 늦게, 그리고 조각조각 도착합니다. 제게는 일본 신문을 읽는 것이 허락되어 있습니다만, 신문은 빨라야 열흘, 늦으면 3주가 걸려서 옵니다. 한 번에 일주일 치가 오기도 하고, 어떤 날짜는 영영 건너뛰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 3월은 이상한 달이 되었습니다. 신문 묶음이 도착할 때마다 지진과 쓰나미 피해자의 숫자는 규칙도 경향도 없는 생명체처럼 이상한 형태로 자랐습니다. 일본에 있었다면 하루하루 이어졌을 충격을, 저는 몇 번에 나누어 불규칙하게 받은 셈입니다. 이시노마키, 게센누마, 리쿠젠타카타, 미나미산리쿠. 일본을 떠나기 전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 마을들의 이름을, 저는 이번에 처음 배웠습니다.

 소식이 퍼진 뒤, 우리 마을의 일본인들은 밤이면 한방에 모여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40년 넘게 서로 말을 아끼며 살아온 사이입니다만, 그런 밤에는 아낄 말조차 없었습니다. 같은 대학에 다녔던 니시무라 상이 복도에서 문득 저를 불러 세우더니 격식을 갖춘 문장으로 위로를 건넸습니다. 조의를 표합니다, 라고요. 저는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고 답했습니다. 그러고는 저 역시 그를 따라 말했습니다. 조의를 표합니다, 라고요. 이 마을에는 쓰바메호를 타고 온 일곱 명이 가족처럼 모여 살고 있습니다. 한때는 마을이 북적일 만큼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이제 남은 것은 저희뿐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이들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지요. 혈통주의에 입각한 일본의 국적법에 의하면 그 아이들은 엄연히 일본인이니까요. 아이들의 귀환에 힘써 주신 고이즈미 총리께는 지금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여튼. 저희 일곱은 서로가 서로에게 조의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서로의 슬픔에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저는 저희의 애도가 공증받았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며칠 늦게 도착한 신문에서 센바쓰, 그러니까 봄의 고교야구 기사를 읽었습니다. 대회가 열렸더군요. 개회식에서 선수 선서를 한 주장이 16년 전 한신 대지진이 있던 해에 태어났다고 하지요. 그 아이는 살아 있는 목숨에 감사하며 전심전력으로 정정당당히 싸우겠노라 선서했다고 합니다. 저는 연구실에서 혼자 그 기사를 읽었습니다. 지진 기사들을 읽으면서는 끝내 마르던 눈이, 야구 기사 앞에서는 쉽게 젖었습니다. 참으로 저다운 일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느냐고. 41년 전 비행기를 빼앗아 이 땅으로 건너온 남자가, 제 발로 조국을 버린 남자가 무슨 낯으로 그 땅을 애도하느냐고. 맞는 물음입니다. 저는 그 물음에 드릴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알게 되었습니다. 자격 없는 슬픔도 슬픔이어서, 어떻게든 애도하지 않으면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요.

 젊은 분들이 밤 버스를 타고 도호쿠로 가 진흙을 퍼낸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저 역시 삽을 들 수 있다면 들고 싶습니다. 이 얼마나 염치없는 마음인가요. 그래도 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 역시 고장 난 마음을 수리할 방법이 없어서입니다. 지난 일요일 새벽에는 대동강 강변에 나가 동쪽을 향해 잠시 서 있었습니다. 물론 이 행위를 기도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게 비는 것인지 저도 모르니까요. 그저 해 뜨는 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대동강은 서쪽 바다로 흘러갑니다. 이 나라에서 저는 강물 한 줄기조차 그곳으로 흘려보낼 수가 없습니다.

 프로야구는 4월 12일에야 개막했다고 들었습니다. 선수들이 나서서 개막을 미루자고 했다지요. 전기 사정 때문에 야간경기도 줄인다고요. 어두워지기 전에 끝내야 하는 야구란 어떤 것일지, 저는 그 광경을 상상하는 것으로 올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센다이의 구단은 당분간 제 구장을 쓰지 못한다더군요. 그 팀이 이기는 날에는 그 도시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따듯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계신 곳의 봄이 부디 예년과 같기를, 더는 아무 일도 없는 무료한 봄이기를 빕니다. 지루함이 얼마나 큰 복인지 이번에 배웠습니다. 답글은 전부 읽고 있습니다. 욕도 읽고 있습니다. 욕이라도 고향의 말이라 반갑다는 것 역시 이 나라에 와서 배운 것 중 하나입니다.


 대동강의 봄에

 2011년 4월 21일

 애도의 자격 없는 요시토모 겐페이 근언


1)당시 SMAP의 멤버였던 쿠사나기 츠요시(草彅剛)의 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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