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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凴)(2회)

  • 작성일 2026-09-30

빙(憑)


이서영



9. 유리창 밖에 서 있기




 깊은 잠에 들었다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이 삽시간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 있었다. 갑자기 시야가 환해지나 싶더니만, 조금 전까지 있던 반지하방의 축축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파도가 새하얗게 부서졌다. 사람들은 아득할 정도로 환한 햇살을 받으며 해변 여기저기에 누워 있고, 달리기를 하고, 수영을 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이번엔 꽤 오래된 것 같은 고즈넉한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아름다운 돌담들과 돌을 끼워 넣어 만든 예쁜 도로들. 젊었을 적 자주 해외여행을 다닐 무렵에는 유럽에서 만난 적도 있는 듯한 풍경이었다. 고개를 위로 돌렸다가 다시 내리자 흰 꽃이 잔뜩 피어 있는 아름다운 숲이 등장했다.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흔들리며 떨어졌고, 과일을 따는 사람도 보였다. 장면은 끝도 없이 겹쳐져 있었다. 한곳에서 대도시와 해변, 정원과 숲, 높은 산과 고대도시를 함께 만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팔목께에 어슴푸레하게 알파벳과 숫자가 보였다. DDC-008. 기태가 말했던대로, 더미 데이터 컨퍼머의 약자인 모양이었다. 이 세계 안에서 돌아다니는 평범한 아바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더미 데이터가 특수한 접속 경로로 들어온 DDC들에게는 보인다고 했었지. 겹쳐진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무슨 일인지 완전하게 이해했다. 출소하고 나서는 익숙하게 해온 일이었다. 그래, 청소부구먼. 직접 청소를 하는 게 아니라 청소해야 할 물건과 아닌 물건을 구분해서 마킹을 한다는 점에서는 폐지 줍는 사람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상태로 계속 나이 들면서 70쯤 되면 폐지도 주워야겠지, 생각해 본 적도 있었는데. 실제 폐지보다 사이버 폐지를 먼저 줍게 되다니. 약간 헛웃음이 나왔다. 여기 접속해 있는 사람들에겐 이렇게 다른 세계가 중층적으로 간섭하듯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꼭 여기가 아니라 원래 세상도 그런 법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기 위해선 일정한 가림막이 필요하다. 가림막을 아무것도 제공받지 못한 사람들이 만나는 세상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중층적 미스터리 같은 것이지.

 귓전에 AI로 만든 거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DDC는 초점 고정을 할 수 있습니다. 더미 데이터용으로 초점 고정을 시행해 주세요. 초점을 고정하겠다고 생각하고 한 점을 바라보면 초점이 고정됩니다.”

 AI가 시키는 대로 한 점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천천히 모든 세계의 인상이 걷히기 시작했다. 마치 어두운 밤 퇴근길에 버스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내 얼굴과 세상의 생김새가 겹쳐 보이지만, 한곳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다른 하나의 시계는 천천히 잦아드는 걸 느끼면서 집에 돌아오던 수많은 시간을 떠올렸다. 남은 것은 겹쳐져서 한 덩어리가 되어 보이는 아득한 한 뭉텅이의 배경들, 업무 시간을 파악할 수 있도록 계속 떠 있게끔 설정된 시계, 그 가운데 불쑥 솟아 있는 반투명한 더미 데이터들이었다.

 더미 데이터란 녀석들은 전반적으로 클레이 덩어리처럼 생겼지만, 나름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진 생김새였다. 검은 눈이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박혀 있는 녀석도 있었고, 흰 우유를 섞은 과일주스처럼 맛있어 보이는 녀석도 있었다. 조금 전까지 모든 시계를 다 보았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녀석들이 세상의 뒤편에 숨어 있던 요괴들처럼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이름이 더미 데이터라고는 해도, 누군가가 이미 사용한 로그였다. 사람의 삶을 타고 세상에 내려놓아진 거란 점을 생각해 보면, 정말로 재활용 쓰레기와 비슷했다. 사이버 폐지를 줍기 위해 수레를 끌고 골목골목을 누비는 스스로를 떠올리니 괜히 우스웠다. 우습다고 생각하자마자 당황했다. 미소를 지어보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미소를 짓는 것도 얼굴 근육이 없으면 불가능하단 걸 깨닫자 조금 어이가 없었다. 저 가상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 근육은 아마 표정까지 읽을 수 있도록 잘 구현되어 있을 텐데. 조금 억울한 기분도 들었지만, 접속해서 돈을 쓰는 이들과 돈을 버는 이들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AI로 된 목소리가 또 가볍게 안내를 했다.

 “더미 데이터에 태그를 진행하십시오. 열람은 기록되므로, 더미 데이터를 열람하지 마십시오.”

 열람은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툭, 롤리팝처럼 보이는 더미 데이터가 또 불쑥 튀어나왔다. 접속을 마치고 떠나는 이들이 저장하지 않는 데이터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갑작스러운 모양으로 남았다. 눈에 보이는 덩어리들에 DD 태그를 달았다.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가만히 대었다가 놓으니 DD라는 글씨가 퍽 무성의한 폰트로 튀어 올랐다. 역시나, 업무 공간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돈 쓸 필요가 없는 것들은 알아볼 수만 있도록 간단하게 되어 있었다. 종이 비슷한 재질도 없고, 그냥 흰 바탕에 검은 글씨만 보였다. 검은 눈이 있는 데이터, 과일주스 같은 데이터, 파란 하늘이 보이던 데이터, 온갖 데이터에 DD를 표시하던 와중에, 설명 들었던 그 데이터가 눈에 띄었다.

 기태는 노트를 꺼내서 그림까지 그리면서 설명했었다.

 “이런 모양으로 뭐가 떨어진 자국처럼 보일 거거든. 근데 자국처럼 보여서 헷갈리기에는 색깔이 특이해서 아주 잘 보일 거야.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먼저 체크해야 되어서, 미안하지만 남들보다 빨리 돌아다니긴 해야 해. 몸이 빨리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 나이가 있다고 해도 누나만큼 성실한 사람이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거야. DDC가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라서,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일이기도 하거든.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하면 돼.”

 기태가 그렸던 얼룩은 기태 말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생김새였다. 얼룩은 마치 검붉은색으로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핏자국. 저주라도 걸린 핏자국처럼 보였다. 나는 오른쪽 손가락 대신 왼쪽 손가락을 데이터에 가져다 댔다. 기태는 내가 들어오는 접속 경로를 따로 세팅해 두어서 왼쪽 손가락을 대면 자기 회사의 태그가 함께 표시될 거라고 했었다. 이번에는 Inert라는 글자도 떠올랐다. DD가 무성의해 보이는 글자였다면, Inert는 아주 작고, 잘 안 보이는 색으로 표시되었다.

 나는 Inert라는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비활성화된 데이터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한번 웃을 수도 없는 이 몸도 비활성화된 데이터와 크게 다르진 않아 보였다. 데이터에서 잠깐 고개를 들어 사람들이 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는 하늘과 밤하늘이 중첩되어 기묘하게 아름다운 모양으로 찬란했다.





10. 새까만 발바닥




 연주는 금세 잠에 곯아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손을 뻗어 뺨을 쿡 눌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렇게 연주 얼굴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 연주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빴다. 매일같이 연주가 나가서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오로지 침대를 지키고만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눈 밑은 많이 꺼져 있었고, 늘어진 뺨은 어떻게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세월을 그대로 통과하고 있었다. 열일곱 살 때와는 여러 가지가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2년 전, 그렇게 오랜만에 연락했을 때도 연주는 헐레벌떡 달려와서 날 구해주었지. 이상한 사이였다. 연주를 보고 있으면 자꾸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한 번도 날 그렇게 달려와서 구해준 적이 없었지만, 연주와 엄마의 시선은 이상할 정도로 꼭 닮아 있었다.

 연주가 날 구해준 건 두 번이었다. 첫 번째는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은 죽을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112도 119도 아니고 어째서 연주였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남편은 그날따라 평소보다 짜증이 늘어 있었다.

 결혼은 그 시기 안에는 무조건 해야 한다는 엄마의 주문에 따라 급하게 치렀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결혼정보회사에서 확인한 것은 나는 나이 빼고는 별다른 매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나이를 더 많이 먹게 되면 지금보다도 매력이 없는 사람이 되겠지. 내 몸에 실린 걸귀에 대해 엄마가 늘 쫓아다니던 무당의 처방은 간결했다.

 “걸귀는 몸에 들은 게 없어서 그래. 일반적으로 처먹어서는 절대로 풀리는 문제가 아니야. 결혼해서 아래 입으로 뭘 처먹고, 빨리 임신이라도 하면 한이 해소가 되어서 풀릴 거다.”

 엄마가 급하게 결혼시킨 남자는 나보다 스무 살이 많았다. 그가 나를 선택한 이유는 오로지 임신 때문이었다.

 결혼식을 마친 첫날밤, 웨딩 카를 타고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옷부터 벗겼다. 욕망에 도취한 사람이 타인의 몸을 탐닉해서 옷을 벗기는 그런 행위는 아니었다. 귀찮긴 하지만, 필요한 일을 해치운다는 업무적 태도에 가까웠다. 귀찮은 드레스를 대충 벗기고, 브래지어는 풀지도 않고 팬티만 벗긴 채 그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내 몸 안으로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그가 눈을 꼭 감고 있었기에, 나는 내 몸 위에서 위아래로 움직이는 남자의 얼굴을 꼼꼼하게 뜯어볼 수 있었다. 분명 오전에 함께 웨딩 숍에서 메이크업까지 마쳤는데도, 남자의 화장은 얼룩덜룩하게 다 지워져 있었다. 화장만 지워진 게 아니라, 그새 턱수염이 비쭉하게 자라 있었다. 한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슬쩍 눈을 뜨더니 짜증스럽게 옆에 있던 이불을 홱 잡아당겼다. 머리부터 덮이는 이불 속에서 남자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존나 못생겼네.”

 남자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아직 뽑지 못한 실핀이 머리를 감싼 이불에 눌려서 두피를 찔러댔다. 사정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고, 나는 몸을 일으켜서 천천히 실핀을 뽑았다. 울컥, 밑에서 생리 때처럼 비릿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이런 밤이 수도 없이 반복되었지만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지 않은 지 2년쯤 지났을 때 처음 남편이 주먹질을 했다. 뺨으로 손바닥이 날아왔을 때는 깜짝 놀랐다. 엄마가 날 때리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힘이었다. 맞는 힘에 밀려서 날아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천천히 뺨이 얼얼하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짜증 섞인 말투로 남편이 말을 이어갔다.

 “뚱뚱해 가지고, 몸이 비틀거리기는 하네?”

 내 몸의 두께는 남편에게 폭력의 변명이 되어주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 맞아서 기별이나 가겠느냐, 때릴 데가 없기는커녕, 때려도 충격이나 갈지 모르겠다, 샌드백도 너처럼 푹신하면 의미가 없다, 그런 말을 지껄이며 내게 주먹과 발을 휘둘렀다. 입을 꼭 다물고 폭력을 참아낼수록 강도는 심해져 갔다. 한밤중,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해 볼까 생각했던 밤도 있었다.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남편의 베갯잇에 부적이나 넣게 되겠지,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걸귀는 해결되지 않았다. 빨리 임신이 되지 않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몸에 뭔가를 실어야지 문제가 해결되는데, 위로도 아래로도 처먹기만 할 뿐, 내 몸은 아무것도 싣지 못했다.

 발길질은 대중없이 날아왔다. 명치로 내갈겨졌다가, 엎어진 머리통으로 쏟아지기도 했다. 입안에 발이 들어오는가 싶더니만, 곧바로 허리께에 격통이 느껴졌다. 남편이 잠깐 숨을 돌리느라 베란다로 나가서 담배를 물고 씨근덕대고 있을 때, 급하게 휴대폰을 눌렀다. 연주를 검색한 건 아니었다. 그날 오전에 연주에게 전화를 걸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냥, 뭐하나 궁금해서, 로 말을 꺼내는 내 목소리를 연주는 차갑게 무질렀다.

 “나 진짜 바쁘거든. 별일 없으면 나중에 통화하자.”

 연주가 전화를 받았는지, 아닌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남편은 금방 돌아왔고, 나는 휴대폰을 던지듯이 소파 아래로 밀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이 구타는 이어졌다. 너 같은 년을, 내가 왜 굳이, 온갖 욕설 사이로 번개처럼 통증이 쏟아졌다. 무엇으로 맞고 있는지도 나중엔 알 수 없었다. 정신을 까무룩 잃어버릴 때쯤, 다급하게 벨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내 머리채를 잡고 방 안으로 던져 넣었다. 비스듬히 열린 방문 틈으로, 골프채를 양손으로 쥐고서 떨고 있는 연주가 보였다. 때리는 소리를 다 녹음했다고 외치고 있었다. 연주는 빙빙, 아주 어설프게 골프채를 휘두르며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새되게 외쳤다.

 “율이 어딨어!”

 나는 거의 기다시피 방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릎이 꺾여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연주는 한 손으로 골프채를 든 채 덜덜 떨며 나를 부축했다. 피가 연주의 옷에도 번지는 게 느껴졌다. 안 되는데. 신발도 제대로 챙겨 신지 못하고, 연주와 나는 허겁지겁 그 집을 빠져나왔다. 골프채를 내던지고 택시를 잡기 위해 한밤의 서울 거리에 연주가 손을 흔들 때에야, 발바닥에 닿고 있다는 게 신발 밑창이 아니라 아스팔트라는 걸 알아차렸다. 응급실에 도착해서도 나는 자꾸 발을 숨기고 싶었다. 새까맣게 되었을 발바닥이 이상하게 피투성이가 된 몸보다도 부끄러웠다.

 연주는 아주 평화롭게 잠든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가만히 연주의 양말 한 짝을 벗겨서 주름진 발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발바닥 피부도 많이 얇아진 것처럼 보였다. 발뒤꿈치에 하얗게 옹이가 진 게 보였다. 아스팔트에 닿기에는 약해 보였지만, 옹이가 진 부분은 강해 보이기도 했다. 깨끗한 발이었다.





11. 더미 데이터 바이오메트릭스




 평범하게 레드선에 접속했을 때와 가장 다른 점은 DD와 DDC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DDC라는 게 있다는 건 자현도 알고 있었다. DDC란 말은 멸칭인 동시에 최저 사회선이었다. 돈이 없어서 못 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DDC라도 하던가, 라고 말할 수 있었다. 도저히 회사 못 다니겠다고 소리칠 때, 에라, 이러느니 밖에서 DDC라도 하겠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DDC를 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지원3팀에 들어와서 가장 재미있는 건 DDC를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재미있다고 말하기엔 제대로 보이는 것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을 잘 알아보려면 공간이 켜져 있으면 안 되니, 감찰을 하면서 공간은 다 꺼야 했다. 사람들의 투명도도 조절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투명도를 일정하게 올리고 나면, 애초에 반투명하게 보이도록 디자인된 DDC들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렴풋하게 인간 형상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DDC 아바타 디자인은 그렇게 섬세하진 않은 듯했다. 눈 코 입을 구별하기도 어려웠고, 키도 다 비슷해 보였다. DDC의 키를 정해서 뽑진 않을 테니, 아마 일하기 쉬운 표준 아바타가 규정되어 있는 거겠지. DDC를 좀 더 잘 보려고 투명도를 올려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애초에 DDC는 투명도 조정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어쨌든 관리직이니 DDC의 업무 상태를 관리해서 인사팀 보고라도 하면 되는가 보다, DDC들 ID라도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개별 ID 코드를 찾는 게 너무 어려워서 관뒀다. 인사팀에 보고도 불가능했다. DDC는 인사팀 소속이 아니라 시설팀 소속이었다. 말하자면 인건비가 아니라 사업비로 분류되어 있는 인력이었다. 분류 번호표는 있었다. 001부터 999까지 무작위로 부여된 분류 번호표였다. DDC는 일한 만큼 시스템이 계수해서 월급이 부여되는, 완전히 유연화된 일자리였다. 원한다면 새벽에 들어와서 일을 해도 상관없었고, 하루에 1시간만 일을 해도 상관없었다. 주 16시간 이상만 일을 하면 기준 충족이었다. 더미 데이터를 처리한 만큼만 월급을 받으니, 열심히 일하고 싶은 사람들은 죽도록 열심히 일하면 되고, 적당히 용돈벌이만 하고 싶으면 대충대충 일해도 됐다. 레드선 측에서도 퇴근하고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자리, 청년층이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잠깐 쉬었다 가는 일자리 정도로 DDC를 홍보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많이 일하는지 어떤지는 별개겠지만.

 결국 DDC는 개별적 움직임이라기보단 하나의 거대한 파도 같은 거였다. 개별 DDC를 하나씩 인지하고 잘 일하는지 감찰하는 지원3팀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정말, 매일이 놀라울 만큼 지겨웠다. 잠도 못 자는데 볼 수 있는 것도 없고, 끊임없이 졸음은 밀려왔다. 점심을 먹으러 갈 때면, 같은 팀에 있는 누군가에게 잠깐 자기 화면을 공유해 주고 다녀와야 했다. 즉, 누군가의 점심 식사를 위해서는 나도 공유를 받아줘야 한다는 뜻이다. 세 명씩 공유를 위한 점심 식사 조가 짜여 있었다. 같은 팀의 그 누구와도 함께 점심을 먹을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남한테 일을 떠넘기고 왔으니 길게 여유를 즐길 수도 없었다. 구내식당에서는 다른 팀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왁자지껄 떠들면서 밥을 먹는 모습을 텔레비전 보듯 구경하며 밥을 먹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일자리에 들어왔다는 걸 조금 받아들일 즈음, 점심시간에 맞춰 팀장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

 “그래도 돼요?”

 “내 화면도 시간 맞춰서 공유 맡겨놨어.”

 누군가가 두 배로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밥을 먹으면서 얘기해 보니, 팀장은 가끔씩 돌아가면서 팀원들과 대화도 하고, 고충 처리 비슷한 것도 하는 모양이었다. 역시 내 고민이란 마땅히 신입 감찰자라면 누구나 겪는 거라서, 팀장은 지겨워 미치겠다는 내 하소연에 대답할 말을 이미 다 가지고 있었다. 이게 힘들다, 저게 힘들다, 온갖 투덜거림을 스쿼시처럼 툭툭 쳐내던 끝에 나는 DDC에 대한 얘기를 불쑥 꺼냈다.

 “그리고 DDC가 감찰이 가능한 거예요? 반투명한데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걸 어떻게 감찰해요.”

 아무렇지 않게 입과 식판 사이를 오가던 팀장의 젓가락이 잠깐 멈췄다.

 “누군지를 왜 몰라.”

 “다 반투명하잖아요, 얼굴도 없고. 그걸 어떻게 알아요.”

 “너, 필적 확인이라는 거 들어봤어?”

 “네? 글씨체로 본인 확인하는 거요?”

 “그래. 그게 된다고 생각해?”

 “당연히 되죠.”

 “근데 왜 누군지를 몰라.”

 “네?”

 팀장은 젓가락을 한 짝씩 나눠 들고서 지휘봉을 흔들 듯이 흔들면서 말을 이어갔다.

 “사람은 말이야, 온갖 것에 다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어. 살인을 하고 나서 아무 흔적을 안 남겼는데 CCTV에 잡힌 뒷모습 걸음걸이가 너무 그 사람이라서 잡히기도 하는 게 사람이라고. 키스트로크 바이오메트릭스라는 건 들어봤냐?”

 “그건 또 뭐예요.”

 “타이핑을 할 때 사람이 가지는 버릇이라는 게 있다는 거지. 그래서 비밀번호가 설령 맞았다고 해도, 그 사람이 평소에 누르는 속도나 방식으로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기술이야. 그, 요즘에는 보안에서 다 쓰이고 있다고.”

 “그게…… 왜요?”

 “DDC가 구분이 안 되면, 감찰을 열심히 안 한 거지. 가만 봐봐. DD 태그 하나 붙이는 데에도 각자 스타일이 엄청 다르다고. 우리는 거기다가 전부 뉴로모픽으로 읽어서 진행되는 거잖냐. 사람마다 물건에 손가락을 어떻게 누르는지, 붙일 때 어떤 식으로 붙이는지가 얼마나 다른데. 나중에 모든 DDC를 구분할 수 있게 되면 그것도 아주 흥미롭고 뿌듯하다, 너?”

 “너무 심심하다 보니까 변태 같은 버릇까지 생기신 거 아니에요?”

 “어허. DDC의 업무가 생각보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구먼. 기본적으로 인물 코드가 더미 데이터를 열람 못 하도록 막고 있기는 하지만, 코드라는 건 언제 문제가 생길지 모르는 거야. 개발팀에서 최선을 다하기야 할 것이고, 여러 가지로 방어 장치를 마련해 뒀겠지만, 남이 사용한 더미 데이터는 기본적으로 뭐가 있을지 모르고 위험한 거라고.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하루 종일 살면서 괴롭고 힘든 일을 겪잖아? 그 괴롭고 힘든 일을 깨끗하게 씻어내 주는 게 뭐야.”

 “술……?”

 “하이고. 잠이지. 잠을 자면서 시냅스의 연결 부위가 줄어들고, 불필요한 정보들을 끊어내고, 노폐물을 청소하는 거야. 그럼 자는 동안 노폐물이 뭔지 확실히 알아야 될 거 아니냐. 바로 그 역할을 DDC들이 하는 거라고. DDC가 이 시스템의 잠이고, 꿈이란 말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의식 위에 있는 건 아니라도, 의식 위에서 이 세계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잠을 관장하는 거야. 멋있지 않냐?”

 팀장은 DDC들이 하나하나 뇌세포를 청소하는 청소부들이라면서 그 청소부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자세히 보면 다 보일 거라고 침이 마르도록 얘기하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팀장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멋진 거 같기도 했다. 조금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면서 다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각각 DDC들이 조금씩 다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DDC는 미끄러지듯 데이터 사이를 빠르게 돌아다녔고, 어떤 DDC는 모든 태그를 대각선으로 붙여놓았다. 저렇게 붙이면 나중에 코딩할 때 제대로 읽히나. 팀장이 얘기한 콘솔 사이드 바도 한번 들여다보았다. 각 DDC마다 태그할 때 파형이 다르게 기록된다고 했다. 구불구불한 선을 봐서는 무슨 말인지 알아먹기는 쉽지 않았다. 접속해 있는 DDC들의 파형을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문득 흔들림이 거의 없는 파형 하나에 시선이 가닿았다. DDC-008. DDC-008이 있는 화면을 바라보니, 약간 등을 둥글게 구부린 반투명한 몸체는 진짜로 풀을 써서 태그를 붙이는 것처럼 꽤 긴 시간 동안 더미 데이터에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DDC가 몸을 일으키는 걸 보고서, 나는 다른 DDC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12. 사람 책 다시 쓰기




 처음에는 순전한 실수였다. 손가락만 가져다 대면 태그가 붙는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괜히 조금 오래 손가락을 대고 있기도 했다. 마치 진짜 종이를 풀로 붙이는 것처럼, 태그를 붙인 자리를 몇 번 더 쓰다듬기도 했다. 실수는 정말 우연하게 발생했다. 여느 때처럼 태그를 붙인 자리를 쓰다듬다가, 쑥, 더미 데이터 안으로 손가락이 빠져버린 것이었다. 하얗게 반짝거리는 알갱이가 잔뜩 붙어 있는 더미 데이터였다.

 손가락이 푹 들어가자마자 눈앞에 느닷없는 세계가 훌쩍 펼쳐졌다. 더미 데이터에 붙어 있던 하얀 알갱이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눈부신 백사장이었다. 발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모래가 비단 같았다. 어떤 바닷가에서도 이렇게 자잘한 모래를 밟아본 적이 없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백사장 바깥으로 엷은 푸른색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바다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가만히 보니, 나는 맨발이었고 노란색 비키니 차림이었다. 이 나이에 이런 차림은…… 가슴을 만져보았다. 가슴에 손을 대자마자 깜짝 놀라 몇 번씩 더 주물러봤다. 30대 때처럼 팽팽하게 올라붙어 있었다.

 나와 다른 사람이라서 얼굴이 다른가, 더듬더듬 몸을 살펴보았지만 분명 젊었을 때의 몸처럼 느껴졌다. 엄지발가락 발톱이 살짝 굽은 내성 발톱이라는 것까지 나 같았다. 젊었을 적에 이런 적이 있었던가. 젊을 때는 여행도 많이 다니고, 잘 놀았으니까, 그때 있었던 기억일까. 그런데 대체 이 기억이 왜 갑자기 지금 끌려 나와서 날 다시 한번 기억 속으로 밀어 넣는단 말인가. 나는 멍하니 해변을 둘러보았다. 해변은 프라이빗 비치인지, 이 멋진 풍광에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걸 보면 분명 여름인 거 같은데.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풍경 속에서 저 멀리 기태가 아이들을 데리고 오고 있었다. 언젠가 여행 가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은 파란 줄무늬 수영복이었다. 한 명은 아빠 손을 붙잡고, 다른 한 명은 앞으로 쏟아질 듯 내달리며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나에겐 아이가 없다. 평생 한 번도 임신한 적이 없다. 젊었을 때는 자궁내피임장치를 계속 사용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마땅히 임신할 수 없을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저 아이들이 내 아이라는 걸 나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엄마가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올랐다. 나는 팔을 벌려 나에게 쏟아지듯 달려오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다른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기태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꿈결처럼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백사장에 있는 선베드에 아이와 함께 나란히 누워 눈을 감았다. 햇볕이 눈꺼풀 위에 아롱거리는 게, 눈을 감고 있어도 느껴졌다. 모든 것이 완벽한 한나절이었다.

 어릴 적에 읽었던 금오신화였나, 아무튼 옛날이야기에서 꿈속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은 서로 다르다고 했던가. 틀림없이 한나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틀림없이 내 남편이었던 기태, 그리고 두 아이와 물에 뛰어들고 모래 장난도 치고, 느긋하게 책도 읽고, 싸 온 도시락도 까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 모든 기억이 까마득하게 멀어지고 나니, 시야에 늘 떠 있던 하얀색 숫자들이 떠올랐다. 고작 5분이 지나 있었다. 부서지던 파도가 손에 잡힐 만큼 생생한데, 그 모든 게 없는 일이라니. 나는 손으로 허공을 더듬거렸다. 분명 나에게 있던 기억이었다. 나는 분명히 아이가 있었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평행우주의 내가 가진 기억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눈앞에 놓인 DD라는 글자를 바라보았다.

 내겐 아직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나이 예순두 살에 노안은 좀 왔지만 벌써 치매가 왔을 리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남긴 더미 데이터를 열람한 것이 틀림없었다. 열람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지만, 실수로, 정말 실수로 열람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기억은 내 기억이 아니고, 누군가가 이 메타버스의 세계에서 경험하고 버린 기억이다. 내 기억일 리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판단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나는 그곳에 있었고, 그 기억은 아주 오랜 과거에 내가 직접 겪었던 기억인 것 같았다. 지금 새롭게 경험한 게 아니었다. 기억은 생생했고, 감정도 선명했다. DD 태그를 붙여나가는 동안 마음속에서 기억은 점점 자리를 잘 잡아나갔다. 해변에서 나와서는 사롱을 걸쳤다. 기태가 사롱을 내 어깨에 걸쳐주었고, 약간 추워서 사롱을 몸에 돌돌 말았던 기억이 났다. 그러고 나서 올 인클루시브 호텔에 들어갔잖아. 호텔 방에서……. 어, 아이들은, 어디로 갔지?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불분명했다. 아이들을…… 그래, 올 인클루시브 호텔이니까 어딘가에 맡겨뒀을 거야. 빌리지 내에 아이들을 위한 미니 클럽이 있었던 거 같았다. 우리 아이들은 거기에서 놀고, 나와 기태는 라운지에서 칵테일을 마셨다. 섹스 온 더 비치를 시키자 기태가 좀 전에 비치에서 나왔는데 아쉽다며 깔깔대고 놀렸던 기억이 났다. 짓궂기는. 하지만 나는 분명 아이를 가진 적이 없었다. 도대체 이 기억은 어디에서 어떻게 된 기억일까. 하지만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기억이었던 건 분명했다. 어떻게 이런 기억을 잊고 살았지. 나는 그 잠깐의 기억을 끊임없이 곱씹으면서 남은 일을 기계적으로 해나갔다. DD, Inert, 붙어나가는 글자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느껴졌다. 내게는 잊고 있었던 기억이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야 그 기억을, 내 진짜 삶을 되찾은 것이었다.

 퇴근하고 눈을 뜨니, 집에선 여전히 쿰쿰한 오줌 냄새가 났다. 율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진짜로 하루 종일 수영을 하고 온 사람처럼 급격한 허기가 느껴졌다. 기태와 아이들과 함께 있던 그 바닷가에서는 과일과 스테이크를 먹었었지. 적당하게 핏기가 남은 스테이크가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난 다음부터는 통장에 상당히 여유가 생겼다. 나는 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율, 스테이크 먹을래?”

 율은 육중한 몸을 침대에서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13. 바다 맛 거품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스테이크를 먹자고 했던 날부터였던가. 설거지를 하면서 노래를 하던 날부터였던가. 연주는 좀 달라져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간단한 달리기라도 하고 오던 습관은 저 출근 즉시 곯아떨어지는 일을 하고 나서 없어진 지 오래였다. 젊었을 적에 회사를 다닐 때도 가능하면 여가 시간을 지키면서 어떻게든 운동할 시간을 확보하던 연주였는데, 이 지경이 되고 나서도 절대로 운동을 놓지 않던 사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휴대폰부터 만지작거리더니 목뒤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곧장 기절하듯 잠들어버리곤 했다. 더 이상한 건, 잠에서 깨고 나서는 저녁 식사 정도만 하고는 다시 잠들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연주는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지켜본 연주는 평생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더 이상한 건, 시선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연주는 내게 말을 걸었지만, 날 바라보지 않았다. 식탁에 나란히 앉아서도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확연히 깊어진 눈으로 멍하니 손과 입만 움직였다. 음식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고, 일상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은근슬쩍 날 비난하지도 않았고, 우리 엄마와 똑같은 그 찌르는 듯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뻔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인생을 방치하는 것의 혐오스러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도리어 어느 순간부터 자기 인생을 어딘가에 던지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노래를 부르던 날은 정말로 이상했다. 한 번도 못 들어본 이상한 말이었다.

 “어느 나라 노래야?”

 “미국, 하와이.”

 “하와이?”

 “하와이어야.”

 내가 알기로는 연주는 하와이어를 할 줄 몰랐다. 하와이에 가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하와이어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하와이어뿐만이 아니었다. 불쑥, 못 들어본 말을 뱉는 날들이 늘었다. 어느 나라 말이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독일어, 쿠르드어, 타밀어, 어느 나라 말이라고 말을 해주긴 했지만 도대체 그 말을 어떻게 할 줄 아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뜻이야?”

 “방금 말한 거?”

 “응. 길게 들렸는데.”

 “나는 새로운 동반자와 함께 발리로 떠났다는 뜻이야.”

 안녕하세요, 사랑해, 감사합니다 같은 일반적인 말이 아니었다. 그 정도야 나도 대충 주워들어서 알고 있었다. 구텐 탁, 이히 리베 디히. 하지만 연주의 말들은 언제나 길고 복잡했다.

 “독일어를 배웠었어?”

 “그랬나? 아닌 거 같은데.”

 “그럼 그 말은 어떻게 할 줄 아는 거야?”

 “그냥, 예전에 말한 적이 있어서.”

 좀 더 캐물어 볼까 하면, 어김없이 연주는 입을 다물었다. 연주의 삶 전부를 내가 안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연주가 있었다. 연주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였고,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에서 웬만한 사람들이 알만한 유명한 기업에 취직을 했다. 마케팅을 맡았다고 들었다. 일 욕심이 있는 아이라, 열심히 일을 했고 꽤 높은 자리까지 승진도 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얻어맞고, 이혼을 할 동안 연주는 연애도 하지 않았다. 회사 후배와 함께 신기술 관련 동업을 한다고 들었는데, 뭔가 그 사업이 잘못되었는지 연주는 재판을 받았고 감옥에 다녀왔다.

 감옥에 간 이후로 한동안 연락이 끊겼었다. 나 역시 굳이 연주를 찾으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친구니, 굳이 찾지 않으려는 것도 내 딴에는 배려였다. 그사이 내 휴대폰 번호는 몇 번 바뀌었고, 연주 역시도 그랬으리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게는 친구가 많지 않았다. 적은 친구나마, 나이가 들면서 없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건만 아니었으면 굳이 연주를 찾으려고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연주와 나는 공유하는 기억이 많았다. 우정이라는 것이 늘 아름답기만 하진 않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우리는 여하간 친구였다. 연주에게는 어떨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나는 세상에서 엄마 다음으로 연주에 대해서 많이 알았다. 연주가 싫어하는 음식, 좋아하는 옷 스타일, 회사에서 싫어하는 것, 자주 가는 카페, 아침의 루틴, 어릴 때부터 마음 쓰여 하던 것들, 정확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아마도 이게 연주의 콤플렉스가 아닐까 짐작되는 것들까지. 나는 내가 연주를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주도 나를 알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나를 찾으러 그 밤중에 걸어 나왔겠지. 나는 아무렴,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밤, 맥도날드에서 연주에게 전화를 했던 건 확신에 찬 선택은 아니었다. 더 이상은 갈 곳이 없었고, 죽기 전에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이었다. 기억나는 번호라고는 오로지 연주의 번호뿐이었기 때문이다. 연주의 번호는 쉬웠다. 연속되는 글자가 많았고, 식별 번호를 제외하고는 숫자가 세 개밖에 없었다. 우리는 열일곱 살에 서로를 처음 알았다. 한참 머리가 팽팽 돌아가던 열일곱 살에 외운 번호는 쉽게 잊히지 않았다. 적어도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 연주는 그때 쓰던 번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를 걸 때는, 정말로 연주가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조금 양상이 달랐다. 그는 나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폭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다. 술에 취하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머리를 벽에 짓찧거나 입을 꼭 다물고 알 수 없는 비명 같은 걸 지르곤 했다. 소리가 되지 못하는 비명들을 들으면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평생을 사람들에게 정신 나갔다는 말만 듣고 살았는데, 내가 이러다 정신 나가겠다고 느낀 건 또 처음이었다.

 연주는 나를 두 번 씻겼다. 결혼했던 그 남자에게 맞다가 죽을 뻔했던 그날, 응급실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나를 욕실에 밀어 넣었다. 연주가 뜨거운 물을 틀어줬지만,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옷도 벗지 못한 채 욕조 안에 털썩 주저앉았다.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아무 말 없이 맞고만 있는 나를 보던 연주는 한숨을 푹 쉬고는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이 오래 묵힌 기름때를 벗기듯 몸 여기저기로 빈틈없이 침투했다. 늘어진 가슴 아래로 뜨거운 물이 고였다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접힌 뱃살에도 물이 따뜻하게 고였다. 처음엔 몸을 공격당하는 기분이었지만, 머지않아 뜨거운 물이 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스팔트를 밟고 걸어온 발바닥에서 검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왈칵 울음이 터졌다. 연주는 나에게 어떤 다정한 말도 건네지 않았다. 꼭 끌어안아 주거나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거품을 충분히 낸 샤워 타월로 내 몸을 벅벅 씻어 내릴 뿐이었다.

 두 번째로 연주가 나를 씻기던 날, 나는 그날을 연주가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했었다. 궁금한 마음은 그냥 속에서 맴돌다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연주가 쓰러져 일을 하는 동안,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연주가 새로 사 놓은 비누를 보았다. 비누 포장지가 세면대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다. 미네랄이 가득한 바다 소금 비누라고 쓰여 있었다. 비누를 문질러서 손 위에 거품을 가득 내보았다. 묘하게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연주는 확실히 좀 이상해져 있었다. 손에 묻은 거품을 씻어내고 돌아와서 레드선에 들어간 연주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잠든 것처럼 보였지만, 어떻게 보면 눈만 감고 있을 뿐이지 깨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만약에 연주에게서까지 쫓겨나면 어디로 가야 하지. 잠깐 생각을 이어가다 멈췄다. 이런 생각을 오래 해도 답이 없다는 것 정도가 60년이 넘게 사는 동안 얻은 거의 유일한 깨달음이었다.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서 드러누웠다. 반지하방에는 햇빛이 자주 들지 않아, 언제든 다시 잠들 수 있었다.





14. 리듬을 읽을 줄 아는 사람




 신입의 가장 큰 기쁨은 발전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거라고, 대학생 때 읽었던 자기 계발서의 내용이 기억났다. 요즘은,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울 때 생각을 종종 했다. 혹은 영어를 처음 배울 때라거나. DDC들의 파형은 음악 같기도 했고, 언어처럼도 보였다. DDC들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걸 안 다음부터는, 특이한 파형을 보여주는 DDC가 있으면 프로필을 뒤져보기도 했다.

 재미있게 생각하고 있는 DDC가 서너 명 정도 있었다. 다른 DDC에 비해서 노동시간이 많지 않은데, 그에 비해 엄청난 DD 처리 속도를 자랑하는 DDC-364는 아주 재미있는 케이스였다. 30대 후반 남자였다. 이력서에는 무슨 연극배우로 일했었다는 이력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레드선에서 선전하는 대로 자신의 꿈을 찾으면서 더미 데이터 처리를 통해 가볍게 돈을 버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항상 데이터에 태그를 대각선으로 하는 DDC-203도 재미있었다. 오프라인에서 만났다고 생각하면, 스테이플러를 항상 대각선으로 찍는 사람이랑 비슷한 걸까. 203이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대각선으로 된 DD가 남아 있었다.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저 대각선의 특이한 패턴이 경쾌하게 느껴져서 기억에 남았다.

 속도가 유난히 느렸지만, 자기 눈앞에 있는 더미 데이터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표시하는 꼼꼼한 DDC-008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DDC였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속도가 더 느렸지만, 조금씩 속도가 더 빨라지는 걸 보고 있자면, 서바이벌 프로그램 출연자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응원하게 되곤 했다. 프로필을 보았더니 008은 무려 62세 여성이었다. 할머니, 까지는 아니지만 할줌마, 정도 되겠지. 프로필을 찾아본 다음부터는 008이 나타나면 내심 마음속으로 응원을 하게 되곤 했다.

 008이 다른 DDC와 다른 점은 또 있었다. DDC 자체가 언제든 접속해서 일하고 퇴근도 자유로운 일자리다 보니, 다른 DDC의 출근 시간대는 아주 자유롭고 불규칙했는데 008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008은 9시가 되면 정확하게 출근해서, 6시가 되면 정확하게 퇴근했다. 심지어 점심시간까지 칼같이 지켰다. 1시에 함께 다시 필드로 복귀한 008을 보고 있자면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프로필에 따르면 꽤 오래 대기업 홍보부 부장 출신이었다. 이렇게 좋은 직장에서 어쩌다 DDC까지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긴 시간 출퇴근을 해온 삶이 계속 습관처럼 일에 반영되는 모양이었다.

 아직까지 빠르게 알아보기 어려운 건, 모니터에 비치는 지진계 같은 스파이크 래스터였다. 지금 언급한 세 명의 파형은 확실히 남들과 좀 다른 구석이 있었다. 매번 접속 때마다 줄 순서는 뒤바뀌었다. 오늘은 203이 있던 자리에 내일은 095가 있기도 했다. 그나마 방금 언급한 세 명은 동시접속 했을 때 가장 알아보기 편한 파형들이었다. 타닥타닥, 엇박으로 뜀박질을 하는 것 같은 364, 경쾌하게 파도타기를 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203, 꼼꼼하게 바늘로 홈질을 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008. 천천히 홈질이나 박음질을 하는 것 같은 익숙한 파형이 드러나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면서 화면으로 가까이 가게 되곤 했다.

 팀장을 만날 수 있는 건 퇴근길 정도였다. 원래 관리직이라는 게 다 그런 거라며, 너 말고 다른 애들한테도 돌아가면서 한 번씩 사준다는 맥주를 얻어먹던 날이었다. 얘기하신 파형을 막상 확인하다 보니 너무 재미있다고 신나서 떠들어대다가, 문득 계속 의문이었던 점이 떠올랐다.

 “굉장히 파형이 고른 사람이 하나 있거든요.”

 “어, 그런 사람들 있지. 보통 침착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야. DDC에 많지 않다고.”

 “근데 가끔, 좀 이상해지거든요.”

 “그래, 그렇겠지.”

 “뭐가요?”

 “이상해진다며. 평소 같지 않은 거 아니야? 좀 별다르게 튀어 보이고.”

 “네, 맞아요! 근데 그러다가 또…….”

 “평소처럼 돌아오고.”

 “그러니까요! 왜 그러는 거예요? DD 태그를 붙이는 거랑 관련이 있나?”

 “DD를 버리기 전에 한번 써보는 거랑 관련이 있지, 보통은.”

 “써본다고요?”

 “더미가 되면 데이터가 어떻게 처리되지?”

 최선을 다해 매뉴얼에 있는 내용을 떠올렸다.

 “서명, 서명이 없어지죠.”

 “그래. 자기도 지금까지 저장해 놓은 데이터들 있을 거 아니야. 나중에 다시 재생 안 해보는 사람이 태반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소중한 추억 어쩌고 하면서 저장해 두잖아?”

 “그렇죠…….”

 “그럼 저장 안 된 데이터는 어디로 가.”

 “그야, 더미 데이터…….”

 “재생할 수 있겠어, 없겠어.”

 “재생이…… 안 되죠. 남이 쓴 더미 데이터를 어떻게 재생해요.”

 “그거야 정상 루트로 접속한 사람들 얘기지. DDC는 노동자잖아. 비용이 인건비가 아니라 사업비에서 책정되는 거 못 봤어?”

 “아?”

 “DDC는 죄다 재생할 수 있다 이거야.”

 “아니, 근데 그럼 안 되는 거잖아요.”

 “뭐, 안 하는 DDC도 있기야 하겠지만, 한번 시작해 보면 쉽지가 않아요. 레드선에서 보통 뭐하니. 노가다 해? 페이퍼워크 해? 복사기 돌려?”

 “아니죠, 보통…… 놀죠. 일하는 사람도 있기야 하겠지만, 조금 다른 종류고.”

 “그치. 그럼 저기서 재생하는 남의 더미 데이터들이 다 뭐겠어.”

 “…… 신나겠네.”

 “일부러 재생하려고 한 게 아닌 사람들도, 한번 재생해 보면 그 맛을 못 끊는다는 거 아니냐. DDC 하는 사람 중에 그거 때문에 하는 사람도 꽤 있을걸?”

 “아니, 근데 금지되어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럼 아예 시스템상으로…….”

 “너, 레드선에서 제일 돈 많이 들어가는 시스템이 뭔 줄 아냐?”

 “감각 구현 아니에요?”

 “사람마다 감각이 다 다르다고. 어떤 사람은 혀가 예민하고, 어떤 사람은 촉각이 예민하고, 사람마다 뇌 구조랑 이런 게 다 다른데, 뉴로모픽으로 그걸 구현하려면 얼마나 빡세겠어. 그럼 들어오는 문을 잘 만들어야 될 거 아니야. 제대로 구현될 수 있게.”

 “서명이 돈이 많이 들어가요?”

 “당연하지. 사람 뇌를 구현해 놓은 거잖아. 죄다 개별적으로 작동해야 되고. 근데, 그걸 그냥 더미 데이터 치우려고 고용한 DDC한테 주겠니, 너 같으면?”

 “허……. 그치만 그럼 뭔가 제재가 필요하지 않나? 괜찮아요?”

 “너무 상세한 거까지 다 신경 쓰려고 하지 마. 자기 할 일만 충실히 하는 것도 회사원의 미덕이다, 너.”

 자현은 눈앞에 있는 생맥주를 한입 크게 들이켰다.

 “네…… 근데요, 팀장님. 다음번에 면담할 거면 저희 퇴근하고 레드선 안에서 보면 안 돼요? 저 실물 맥주 마시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팀장이 기가 막힌다는 듯 눈을 치켜뜨고 나를 들여다봤다.

 “하, 요즘 애들이란.”





15. 메타버스는 평평해서 자꾸 걸어 나가면




 더미 데이터에 DD 태그를 붙이려는 순간, 손이 닿지를 않았다. 뭔가 시스템의 오류인가 싶었는데, 아무리 데이터에 닿으려고 해도, 투명한 막 같은 게 사이에서 없어지질 않았다. 손을 계속 뻗다가 포기했다. 좀 이상한 일이네, 생각했다. 그거 말고도 손이 닿는 데이터야 많았으니까. 다른 데이터에 다시 DD를 붙였다. 퇴근 후에 시스템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보고할까 하다가 관뒀다. 데이터 읽기는 금지된다고 분명 쓰여 있었는데, 야금야금 읽은 데이터가 벌써 다섯 개가 넘어갔다. 너무 많이 읽어대서 시스템의) 주의를 받은 걸지도 모른다. 그만 읽어야겠다고 최근엔 더 많이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뭐가 뭔지 구분하기가 너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기억은 바뀌었다. 기억이 바뀐다는 건 삶을 구성하는 아주 큰 줄기가 바뀐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뭐가 새로 들어온 기억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아름다운 기억 쪽이 새로 침습된 기억일 거라는 판단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믿을 순 없었다. 내 인생에도 당연히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다. 그걸 깨닫기 위해 종종 찬장을 열어 예쁜 볼을 쓰다듬었다. 기태와 결혼을 앞두고 백화점에 신혼살림을 꾸리러 갔을 때 산 볼이었다. 여자들은 이상한 데에 돈을 쓰려고 한다며 기태는 날 비웃었지만, 나는 기태와 함께 나란히 놓고 수프를 떠먹을 볼이 필요하다고 투덜거렸었지. 그때 입었던 파란 스커트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스커트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아무튼, 내게도 아름다운 기억이 분명 있었다. 그 모든 기억이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기억이 무엇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질 것은 자명했다. 아름다운 것들을 향유하고 싶다고 해도, 슬슬 조절이 필요했다.

 태그를 붙여놓은 더미 데이터들은 아침이 되면 어딘가로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어차피 다 버려지는 거라면 내가 한번 읽는 게 뭐 그렇게 큰일이냐고 생각한 적도 있긴 했지만, 기억이 바뀌는 건 정말이지 큰일이었다. 그래도 커다란 아몬드가 박힌 퍼지처럼 보이는 더미 데이터는 진짜 한번 눌러보고 싶기는 했었다. 별거 아니고, 그냥 먹는 기억일 거 같은데. 하지만 열심히 참아냈다. 율의 말에 따르면, 이 일을 시작한 이후 내가 잠을 자면서 악몽을 많이 꾸는 것 같다고도 했다. 율의 말대로 이상한 꿈을 꾸다가 신음하면서 잠에서 깬 적도 적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기억을 어떻게든 몸이 기존 기억에 욱여넣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 걸 다 생각하면 아무리 읽고 싶어도 더미 데이터를 읽는 건 참아야만 했다.

 그사이에 기태가 얘기한 핏자국이 묻은 더미 데이터를 또 발견했다. 얼른 왼손으로 Inert를 붙였다. 여러 데이터를 읽었지만, Inert가 붙은 데이터는 읽어볼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데이터 근처에서부터 썩 유쾌하지 않은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데이터에 기운이라고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정말로 그랬다.

 꽤 많은 더미 데이터는 근처에 다가갔을 때 작은 웃음소리라던가, 꽃향기 같은 게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향기가 났다거나, 웃음소리가 들렸다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접했을 때 느끼는 몸의 반응 같은 게 따라오는 것이었다. 아직 읽기도 전에 예고편을 느끼는 것처럼, 이 데이터들과 내 몸(물론 이 세계에서 나에게 몸은 없기 때문에 이상한 말이지만)이 미세하게 결합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참지 못하고 손가락을 푹, 데이터 안에 넣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Inert를 붙이려고 할 때면 달랐다. 오싹하는 감각이 저도 모르게 스몄다. 최대한 몸이 닿지 않도록 애쓰면서 왼손을 가져다 댔다. 아무튼 돈을 두 배나 받는 건 포기할 수 없었으니, Inert를 붙이는 것도 DD를 붙이는 것만큼 열심히 하긴 했지만 Inert 데이터에는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늘 따라붙었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투명한 벽을 느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벽이 올라온다고 해서 다른 더미 데이터에도 접근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더미 데이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면서 열심히 DD를 붙이다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일하는 곳에서 상당히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세계에는 분명 공간이 구현되어 있는데, 내가 어느 공간에서 일하는지를 들여다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남들이 보는 세계처럼 되어 있지 않으니, 저 겹쳐진 배경들 속에서 내가 어디 서 있는지를 감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냥 눈앞에 더미 데이터가 있으면 열심히 DD를 붙이고, 그러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접속을 종료해 왔다. 그런데 배경이 내가 평소에 보던 것과 약간 달라진 거 같았다. 겹쳐져 있는 배경들이었지만 어렴풋하게 공간에 대한 감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왜 이 투명한 벽들이 올라오는 거지. 일하는 공간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건가. 이 이상 현상이 뭘 의미하는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투명한 막으로 막힌 건너편에서 실루엣만 가진 DDC들이 종횡무진 돌아다니면서 DD 태그를 붙여대는 걸 보았다. 말하자면 직장 동료들이지만 얼굴 한 번 마주한 적이 없는 이들이, 멀리에서 보니 약간은 구분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장소에서 붙인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어차피 이 세계는 넓지 않은가. 어딘가에서 본 말로는 레드선 안에 구현된 실감할 수 있는 대지가 미국 텍사스주만큼 된다고 하던데. 텍사스주면 한국의 열 배는 되는 크기다. 적어도 여기서 DD 태그를 붙이면서 다 돌아다닐 수도 없는 크기인 건 분명했다. 만약 내가 뭔가 큰 오류를 저지른 거라면 접속을 끊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굳이 일하는 장소를 옮겨줄 이유는 없었다. 아마도 배정이 바뀐 모양이었다. 한쪽에서 너무 많은 데이터를 읽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잘리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디에서 일하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눈을 뜨면 오줌 냄새가 나는 집으로 돌아가게 될 텐데.

 나는 오늘 퇴근하면 기태에게 따로 연락해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DD를 붙여나갔다. 한참 튀어나오는 데이터마다 DD와 Inert를 붙이다가 뭔지 모를 오싹한 느낌에 정신을 차린 건 4시간이나 더 지난 다음이었다. 이상하게 겹쳐진 부분 없이 세상이 또렷하게 보였다. 오래된 벽돌 건물들처럼 보이는 풍경이었다. 더 큰 문제는 접속이었다. 분명히 점심 먹으러 갈 시간이 되었는데, 접속이 끊어지질 않았다. 나는 전원 버튼을 몇 번씩이나 눌러댔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원래 일하던 곳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16. 미간을 찌푸리며 미간을 들여다보기




 배가 고팠다. 벌써 돌아와서 부엌에 서 있어야 할 연주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연주의 앞에 섰다. 실제로 잠에 든 게 아니니 깨울 수가 없었다. 몸을 흔든다고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고.

 회사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나는 고개를 숙여 연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거 같던 연주의 얼굴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이제야 알게 된 거지만, 사람의 얼굴은 자신이 살아온 생김새대로 자리 잡게 마련이었다. 그걸 일찍 알았더라면 좀 더 많은 실수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전남편은 눈매가 섬뜩하게 올라가 있었다. 분명히 평범하게 올라간 눈매가 아니었다. 이를 악물고 주먹질을 하는 버릇이 그런 눈매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 이후에 또다시 주먹질을 당하면서 하게 되었다.

 연주는 엄마와 많이 닮았다. 한쪽 얼굴과 다른 쪽 얼굴이 다르게 늙은 거 같은 모양이었다. 왼쪽 얼굴은 오른쪽 얼굴보다 더 빨리 늙었다. 한쪽 입꼬리에만 주름이 깊었고, 눈가도 마찬가지였다. 감옥에 다녀온 연주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때, 어릴 적 연주에게서 내가 편안함을 느꼈던 건, 아마도 연주가 엄마랑 같은 얼굴로 늙어갈 걸 알았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오랫동안 외면해 왔지만, 이제는 거울을 볼 때면 자신의 얼굴이 늙은 방식도 구체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땅한 생김새였다. 연주나 엄마와 같이 비대칭적인 주름도 없었고, 전남편이나 최근 헤어진 그 사람처럼 관자놀이가 일그러진 것 같은 이상한 눈매도 없었다. 살짝 내려앉은 거 같은 눈꺼풀, 어디에도 긴장된 구석이 보이지 않는 기이하게 매끈한 얼굴. 하지만 탄력은 남들과 똑같이 사라졌고, 표정 없이 얼굴은 여기저기 처져 있었다. 오로지 살아 있는 것 같은 부분은 미간뿐이었다. 나이 60이 되도록 자신과 같은 미간을 가진 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다.

 도망치기 전, 마지막으로 살던 고시원에서 드디어 그런 여자들을 만났다. 아무 표정이 없이도 슬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슬픈 표정으로 그녀들은 부지런하게 살았다. 간병인을 하면서 보통은 병원에서 먹고 자고, 가끔 고시원에 돌아오는 여자들이 있었다. 새벽부터 나가서 어딘가에서 청소를 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몸에서 락스 냄새가 나서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슬픈 표정을 한 나 같은 여자는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몸으로 폭력을 받아내는 것만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나와 다르게 그 여자들은 얼굴 여기저기에 표정이 있게 늙어갔다. 지금도 찌푸리고, 웃고, 화를 내고 있겠지.

 하지만 연주의 얼굴은 분명히 달랐다. 평소에 연주가 짓는 표정이 아니었다.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본 연주의 얼굴은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치켜든 얼굴이었다. 나에게만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아니겠지만, 나에게 가장 많이 이런 표정을 지을 거라고는 예상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게 저런 표정을 짓지 않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눈썹 안쪽이 올라가는 표정보다는 바깥쪽이 올라가는 표정이 나았다.

 안쪽이 올라가는 사람들은 마음을 위로했고, 다정하게 말했다. 남편에게 맞았다고 했을 때, 우울증을 오래 앓았다고 했을 때, 엄마가 내게 걸귀가 들려서 그렇다고 했다고 했을 때, 안쪽 눈썹이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깥쪽이 올라가는 사람들은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했지만, 안쪽이 올라가는 사람들은 날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안쪽이 올라가는 사람들과는 끊임없이 멀어져 왔다.

 연주의 눈썹이 움직였다. 안쪽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다. 눈썹이 아래로 내려오고, 광대가 올라갔다. 큰 미소였다. 하지만 입술이 세게 짓눌렸다. 환한 미소를 짓고 싶지만, 지어선 안 되는 것 같은 얼굴. 턱끝이 자글자글 뭉쳤다. 연주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연주는 경멸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언가 숨기는 끔찍한 얼굴이 연주의 표정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번엔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눈꺼풀이 파들파들 떨리더니, 입이 위아래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연주의 표정이 온갖 모양으로 바뀌어갔다. 뭔가 문제가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연주를 잡아먹고 있었다. 나는 황급하게 연주를 흔들어봤다.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옆으로 툭, 쓰러졌을 뿐이었다. 충전 중인 연주의 휴대폰을 들어봤지만 레드선 로고만 뜬 화면은 아무것도 건드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화면에는 위험하니까 휴대폰을 조종하지 말라는 경고까지 떠 있었다.

 새로운 기술은 내게 가장 관심이 없는 주제 중 하나였다. 남들이 그 기술에 한참 익숙해지고, 내게도 그 기술이 흘러올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그 기술에 발을 들여놓았다. 레드선이라는 게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검색창에 레드선을 쳤다.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이 화면을 빼곡하게 채웠다. 뉴런, 신호, 뉴로모픽, 감각 구현, 메타버스, SNS……. 내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SNS는 2020년대 중반에 쓴 트위터가 끝이었다. 그것도 관둔 이후로는 어떤 SNS도 써본 적이 없었다. 응급실, 응급실에 가야 하나.

 응급실에서 받아줄까? 레드선에서는 여러 감각 구현이 진행된다고 되어 있었다. 응급실에 가도, 그냥 신문물에 적응하지 못하는 할머니 취급만 받고 돌아올 거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구로, 누군가를 데리고 이동하는 게 가능이나 할까. 마지막으로 몸무게를 쟀을 때, 98kg이 넘었던 기억이 났다. 이제는 혼자서 걷는 것조차 자신이 없었다. 나는 주저앉아서 연주의 손을 잡아보았다. 연주는 나와 손을 잡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애들 모두가 자기 단짝의 손을 붙잡고 다니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그랬다. 연주가 내 손을 잡아준 건, 단 두 번뿐이었다. 손을 잡건 말건, 그사이에도 연주의 표정은 변화무쌍하게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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