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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집에서 온 소식: 영화와 나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5-01-22
  • 조회수 766

얼마간 영화를 보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기말고사 준비가 한창이었고, 내외로는 연말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정신없이 하루 이틀을 보내니 평생을 함께 할 것 같던 영화와 텍스트들을 자연스레 멀리하게 되었고, 그렇게 영화관에 가지 않은지 어엇 두 달이 넘게 되었다.

이따금 구세군종을 울리는 사람들을 지나쳤고, 광화문 광장에서 사랑의 열매탑을 바라보며 아,아, 벌써 이렇게 한 달이 지나는구나, 생각할 뿐이다. 

그러다가도 창 밖으로 눈이 내리면 그제서야 어느새 겨울이 왔다는 것을 실감한다. 영화는 언제 보지, 하는 생각과 함께. 


영화가 없는 일상은 내가 없는 일상이었다. 영화란 블랙박스에서 어떠한 사건을 이미지화시킨 후, 그것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화(또는 왜곡)하는 속성을 띄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영화가 인화해낸 시간 아래서 시점과 상황을 바라보며 새로운 사건을 경험한다. 나는 그것이 보여주는 새로운 시선들과 경험을 마주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가상적 경험을 통해 나를 사유할 수 없었다. 일상에서 시간은 항상 일정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영화를 보던 때의 감각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래서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따분하고, 어느 정도 쓸쓸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참에, 오래간만에 휴대폰을 확인하니 내 앞으로 여러 메일들이 와있었다. 대게는 광고성 메일들이었지만, 전부 영화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읽어보니 몇몇은 서독제에서 발송된 영화제 기금 연명메일과 현재 진행 중인 영화제의 뉴스레터에 관한 것이었고, 또 다른 것들은 구독 중인 영화 관련 웹진들과 예술극장에서 온 회원메일들이었다. 글들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읽으며, 그곳에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지금은 이런 영화가 나왔나 보군요, 하며 뿌옇게 흩어져가던 영화를 향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는 문득, 이런 내 모습이 꼭 샹탈 아커만이 1975년 만든 장편영화 <집에서 온 소식>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에서 온 소식> - 샹탈과 나

<집에서 온 소식>은 샹탈 아커만이 뉴욕으로 이주하고나서 자신의 어머니와 나눈 편지의 대화문을 중심으로 만든 실험영화로, 이 영화에는 사건이나 인물같은 그 어떤 극적인 요소도 등장하지 않고, 프랑스에서 날아온 어머니의 편지를 읽는 아커만의 나레이션과 함께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건물들이 뻗어난 뉴욕시의 단편적인 일상만 보이는 것이 전부다. 




* 영화 속 보여지는 뉴욕의 풍경 (아무 이야기도 없이 계속 비슷한 쇼트들이 이어진다)


영화는 시작부터 ‘가족들은 네가 너무 보고 싶어'라고 (샹탈의 입을 빌려 어머니의 편지 속 한 문장을) 말하지만, 정작 스크린에는 사람 없이 황량한 도로만 보일 뿐이고, 엄마는 계속해서 딸(샹탈 아커만)에게 안부를 묻지만 딸의 답장은 결코 들리지 않는다. 대신 딸을 향한 엄마의 막연한 그리움과 공허만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샹탈은 그런 엄마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입으로 읽는다. 

딸이 영화 내내 엄마가 자신을 그리워하며 써 내려간 글을 자신의 목소리로 읽는 행위에는, 자연스레 타자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녀(엄마)와 연대/공감하려는 행위가 내제되어있다. 

그래서인지 엄마가 샹탈에게 ‘네가 너무 보고 싶다.’라고 말할 때, 샹탈은 그것을 자신의 목소리로 되읽으며 마치 엄마의 자리에서 그녀와 똑같은 심정으로, ‘엄마 나도 당신이 그리워요’,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이 영화에서 엄마가 보낸 편지에 대한 샹탈의 답장은 들리지 않지만, 이것을 자신의 목소리로 읽는 행위 자체가 엄마에게 보내는 답장이지는 않을까.

어느 겨울밤, 방 한구석에서 나에게 날아온 영화 메일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영화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 역시 그러한 지점들이 퍽 나와 닮아서 그랬던 것만 같다. (영화관과 영화인들 영화라는 것으로 통속시킬 수 없겠으나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영화는 나에게 메일을 보낸다. 영화가 나를 부르고 있다. 그가 나를 부를 때, 나는 영화에게 달려가고 싶다. 서로가 서로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고 있는데, 마치 셰익 스피어의 어느 희곡들 마냥 우리를 둘러싼 울타리와 방해물들 때문에 나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사랑을 하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 그 무엇보다 강력한 확신이 나에 곁에서 계속 함께하는데, 그 확신은 행위되지 못하고 내 속에서 썩어 들어갈 뿐이다. 그런 상태에 놓인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서 발화된 감정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감정을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버리고, 묻혀버린 감정은 그 사람의 내면 더욱 깊숙히 파고 들어가 결국은 그자를 이루고 있는 알맹이까지를 철저히 붕괴시킨다. 상사병이나 향수 같은 것들이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 

영화 속에는 그러한 애증의 형태가 엄마를 향해있는데, 그것은 단지 서두에서 서술한 것처럼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여지는 그리움 뿐 아니라, 이미지와와 사운드로 이루어져 있는 영화의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더욱 기시적으로 드러난다. 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영화의 형식에 대해 더욱 면밀히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유령의 눈과 불안한 풍경들

이 영화는 극영화가 아니고, 다큐멘터리도 아니며, 더군다나 이야기(와 이야기를 하는 화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그저 계속해서 밤거리, 지하철, 식당, 도로 등 서로 아무 연관성이 없는 도시의 이미지들을 한 곳에 모아두고 있으며, 이 장소-이미지들은 그 어떤 유기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 (물론 ‘뉴욕시’라는 풍경의 장소로 통일될 수 있지만, 영화에서는 ‘뉴욕시’라는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이나 의도가 보이지 않으므로 이것을 ‘뉴욕시’로 통일시키는 건 사이비 비평의 한 단면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사건이 없기 때문에 윤리가 없고, 윤리가 없기 때문에 시선도 없다. 말 그대로 영화적 자아의 상실. 어쩌면 그저 어딘지 모를 장소를 정처없이 배회하는 유령의 눈만이 이 영화를 이루고 있지는 않은가. 

이때 드는 질문. 그렇다면 영화는 왜 이런 유령의 눈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이 해답을 샹탈이 집을 떠났다는 사실을 보고 쉽게 알 수 있다. 

‘집'이란 단지 풍경에 불과한 장소일 뿐 아니라 그것이 자고 나란 ‘시간'과 ‘뿌리', 또는 가족으로 통용되는 ‘사람’,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간적 의의 역시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면, ‘샹탈'이 집을 떠났을 때 마주한 것은 단지 집을 향한 막연한 그리움이 아니라 자신을 일구어낸 모든 것들을 몰수당할 위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집을 떠난 자에게, 또는 사랑을 잃은 자에게 자아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 영화장면 1 - 식당 앞에 서성거리는 한명의 행인 

(영화는 자아를 잃은 것 마냥 이 행인이 누구이며, 왜 이 식당 앞을 서성거리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란 본래 이미지와 이미지의 조합(몽타주) 임을 상기해 본다면, <집에서 온 소식> 같은 아무 연관성 없는 이미지들의 조합은 결코 영화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유기적 이미지들에게 유기성을 부여하고, 몽타주가 될 수 없는 것을 몽타주로 성립시키고 있는 것 있다면, 그건 바로 다름 아닌 어머니의 편지(와 그것을 입으로 말하는 샹탈)이다. 

딸은 엄마의 편지를 받았으나, 그건 어디까지 텍스트로만 존재할 뿐이다. 영화란 (다시 한번 영화에 대해 정의하는 것을 용서키 바란다) 사운드와 이미지의 조합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그곳에 텍스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다시 말해, <집에서 온 편지> 속 엄마는 반-영화적 텍스트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녀는 영화에서 언제까지나 불완전한 존재다. 그렇기에 샹탈이 자신의 목소리로 엄마의 편지를 읽고 있는 것은, 마치 사운드와 스크린으로 이루어진 영화 속에서 흐릿해져가는 엄마의 (텍스트적) 존재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필사처럼 읽힌다. 그녀의 존재가 텍스트에서 사운드로 이항 된다면, 엄마의 존재는 영화에 깃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대사(사운드)가 엄마가 보낸 편지의 내용이라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이 사운드는 오직 엄마의 자리이며, 그녀는 영화 상영 내내 보이지 않은 상태로 우리 곁에 존재하므로 ‘물질적'이지 않고, 영적인 존재다. (이때 비로소 영화는 ‘보이는 것'에 안주하던 스크린에서 ‘추상'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며, 영화 이상의 무언가로 재탄생한다.)

샹탈은 이 영적인 존재의 자취를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자신의 목소리로 읽으며 그것을 살리기 위해 애쓰고, 동시에 그 영적인 존재는 샹탈의 목소리에 의해 비유기적인 영화 속 이미지들을 가로지르며 그 이미지들이 연관성을 맺도록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영화 속 엄마의 존재야말로 이 비유기적인 이미지들이 하나의 영화가 되도록 하는 창조적 기적의 수단이며, 또는 여기에서 엄마란 샹탈의 목소리에 의지한 채로 존재하는 영체이기 때문에, 샹탈이 자신의 어머니의 편지를 읽는 행위에 내재되어있는 ‘이해’라는 관념이 영화를 작동하도록 만드는 동력처럼 보인다. 그 동력에서 샹탈은 어머니의 편지에 의해 향수와 자아상실로부터 안정감을 되찾고, 어머니는 샹탈의 목소리에 기대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 즉, 영화는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엄마와 샹탈의 존재를 한 곳으로 끌어들이고, 이 불완전한 두 생명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둘은 영화 속에서 이해라는 관념 아래 서로 연대하는 동시에, 서로 공생하는 관계다. 영화는 이 공생관계가 유지되는 내부의 공간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본질은 불안한 객체들이 서로 끈끈히 연대할 수 있도록 하는 공생적 유속성(혹은 유속적 공생성)에 있다.



* 영화 장면 2 - 연인들이 지하철에서 서로 껴안으며 공생하고 있는 모습을 자아낸다


공생적 유속성 - 영화와 나

이런 공생적 유속성은 영화를 사랑하는 시네필들에게도 어느 정도 대입이 가능한데, 나는 여기서 이전에 기고했던 <시네필: 노숙자들의 도시와 유령의 집을 찾아서> 속 한 문장을 번형하여 인용하고 싶다. 

“그들은 영화관에 들어가는 순간, 조명이 꺼진다.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처럼 뻗어 나와 스크린을 비추는 빛들을 보고 그것에 의지한다. 영화는 자신을 기억해 줄 관객들에게 의지한다. 그러면서 영화와 관객은 서로 공생할 수 있다" 


한가지 문제점이라면, 샹탈은 어머니와 별거한 이후에도 그녀의 편지를 읽으며 서로 공존한 것과는 다르게, 영화와 관객은, 누군가가 직접 영화관에 가지 않는 이상, ‘공존'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관계는 무척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나는 계속 영화를 생각하는 것이, 나와 그것의 즉자적인 공존이 아니라, 그저 흘러간 것을 그리워하는 일종의 회상에 남짓한 일시적(또는 잠재적)인 공존임을 받아들이고 만다. 이것은 그야말로 그리움. 그것이 나를 찾아오고, 나 역시 그것이 보고 싶어 오래간 머릿 속에 복기하면, 이 순간 난 마치 행위되기 이전의 <집에서 온 소식>처럼 존재한다. 이 글을 쓰며, 그것과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서로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볼 때, 그건 그 나름대로 나만의 <집에서 온 소식>이 된다. (이때 이 글은 텍스트로 쓰여진 반-영화적 산물이 아닌가? 어쩌면 난 샹탈과 반대로 영화를 죽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그것과 유속적 공생을 하게 된다(그 마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찰나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공생적 유속성을 두고 무조건적인 긍정으로 받아들여서만은 안될 것이다. 

자신과 어머니가 서로 공생하는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샹탈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어찌 되었나? 그녀는 우울증에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던가. 

여기에는 ‘나'라는 존재를 지탱하던 타자가 무너짐으로써, ‘나’ 역시 심연으로 떨어지게 되는 끝없는 두려움이 머물고 있다. 공존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서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적어도 서로가 맞잡은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공생의 형태는 무척 아름다운 것이지만, 어느 하나가 사라지면 그와 함께 존재하던 나의 실존적인 형태 역시 변질되기에 그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생성은 항시 긴장을 가지고 경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국에 망가지는 건 나도 타자도 아닌 ‘우리'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통해 살아간다. 영화를 보며 그것과 소통하고, 영화를 보고 세상과 사람을 알아간다. 그렇게 내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8년을 살았는데, 아니, 정확히는 영화를 보며 알아가는 그 과정이 좋았는데, 이제 그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나를 망가트리고 싶지 않다. 영화 역시 망가트리고 싶지 않다. 필자는 여지껏 영화와 내가 그것과 하나라는 마음으로 너무 일방적으로 영화를 내 안에 집어넣고 이야기 해왔다. 그러나 엄마의 편지나 샹탈의 목소리 그 중 어느 하나 없었다면 단일한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했을 <집에서 온 소식>을 떠올리며, 타자는 나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만 타자는 서로가 서로를 껴앉으며 안정감을 되찾고 나아가도록하는 존재다.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폴로스는 언젠가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영화를 원합니다, 영화도 당신을 원하고 있습니까?”

영화를 원하냐는 전자의 질문에 난 거침없다. 그러나 후자 앞에서는 머뭇거리게 될 뿐이다.

 영화도 나를 원할까? 나는 나를 돌아보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를 도구화하고 싶지 않다. 내가 그것과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 더 많은 시선들과 가능성들이 언젠가 우리 앞에 확장되어 주어지지는 않을까. 우리는 거리를 벌려야 서로가 서로에게 더 유효하고 아름다운 존재다. 비단 영화 뿐 아니라 모든 관계가 그렇다.


영화는 샹탈이 배를 타고 뉴욕을 벗어나 고향으로 가는 것으로 끝난다. 그때 아커만이 느낀 그 감정들은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확실한건 그녀가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곳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은 샹탈을 원했을까? 영화는 샹탈이 왜 하필 그 시기 그 장소로 떠나야 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오래간 고대해왔던 꿈처럼, 자욱한 안개 속에서 점점 흐릿해져가는 뉴욕을 보여줄 뿐이다. 

 나 역시 정말 오래간만에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곳, 영화관으로 가려고 한다. 그곳의 주인이 나를 원하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영화, 당신과 함께 진중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 단지 메일함에 쌓인 편지 꾸러미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다만 걱정하지 않길 바란다. 이번에는 나를 위해서 가는게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어느 때처럼 두 팔을 벌리고 당신을 껴안으려해도 당황하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우리가 어떻게 멀어져야할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아름답게 멀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수는 있다. 지금 이곳에서 행위되고있는 글쓰기가 바로 그런 것이고, 영화관에서의 관람이 또 다른 그런 것이다. 그러니 부디 오늘 만나면 우리가 함께 살아갈 모색할 방안을 찾아보자. 

눈이 내리는 밤이었고, 영화가 상영되고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샹탈이 집으로 향하던 것처럼, 그러나 약간은 다소 새로운 감회로 영화관으로 나섰다. 



* 영화의 마지막 장면 - 샹탈이 멀어져가는 뉴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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