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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의 유서

  • 작성자 신현
  • 작성일 2025-03-24
  • 조회수 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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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께서 이것을 보고 계시다는 것은 제가 거기에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단순한 방 청소로는 발견할 수 없을 만한 위치에 숨겨 두었으니 아마 저를 앞에 두고 읽으실 일은 없을 거라 믿습니다. 어머니께서 글을 읽고 계시는 현재, 저는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게지요.


 혹자는 저더러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산 사람의 물음이 지금의 저에게까지 닿지 않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렇게 물을 것을 알기에, 저는 미리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한 치의 후회도 없습니다. 단언합니다. 나는 내가 후회하지 않았음과, 내가 후회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또 혹자는 내게 물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런 선택을 하였니, 하고 말입니다. 

 거기에 또 내가 낱낱이 답한다면 나는 싸구려 기계처럼 변하고 말 테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평생을 기계가 되는 법을 배우며 살았는데 이제 와서 사람 행세를 하기도 귀찮고 하여, 나는 또 대답을 하고 맙니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니, 사람보다 하등한 존재.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 비둘기, 새싹, 길가에 지나다니는 개미. 보통의 자들보다 열등한 나는 내가 무엇을 닮았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나는 죽고 맙니다. 내가 살아가기에 세상은 지나치게 크고 넓습니다.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숨을 쉬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으니 그만 폐가 굳어버립니다.


 나는 과히 아름답고 정교한 방을 배정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왜 그러한 방에 소속되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압니다. 왜 스스로 그곳에 있는지, 나를 제외한 전부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경탄할 만한 자들입니다.

 나는 내가 왜 나와 다른 방을 쓰는 자들과 다투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채로 학교로 갑니다. 학교에 가면 나는 나와 다른 방을 쓰는 자들, 이를테면 성적이 낮거나 떠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을 무시해야 합니다.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깔보고 화내고 하면서, 나에게도 권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들을 따라 버립니다. 


 학교에서 나오면 나는 또 거리를 걷습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곤 합니다. 그들은 또 누구랄 것 없이 서로를 헐뜯고 싸우고 손가락질합니다. 다들 그러하니 나도 그렇게 해야 하는 줄은 압니다만, 어리석은 나로서는 조금 더 본질적인 이유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다들 똑똑한 자들입니다.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모든 것을 이해하니까요.


 거리를 걷다 보면 집에 도착합니다. 나에게는 집이 가장 어려운 곳입니다. 세상은 그렇게나 시끄러운 곳임에도, 집은 사랑으로 넘칩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이 진정 사랑하는 것이 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께서 사랑하시는 것이 남들처럼 똑똑한 척 연기하는 나인지 아니면 그저 어리석은 나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어머니께서 어리석은 나를 사랑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골똘히 생각해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어리석은 나를 사랑하실 리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나와 달리 아주 똑똑한 사람이니까요. 

 그렇다면 어머니께서 한없이 베풀어주는 사랑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나는 문득 그것이 궁금해집니다. 왜 남을 헐뜯어야 하는지, 무시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면 영영 알지 못하는 나 같은 것이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은 있을까요. 혹시 나는 이 영리한 세상에 잘못 던져진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살아가야 할 바보들의 세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우울해집니다. 그러나 생각을 접으려고만 하면 도리어 상념이 짙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나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들, 이를테면 우리 반 반장 같은 사람을 생각하곤 합니다. 

 반장은 참으로 머리가 좋은 아이입니다. 반장은 나의 들리지 않는 한쪽 귀를 잘 놀립니다. 나는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까닭을 모르니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듣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은 그가 내 들리지 않는 귀에 대고 박수를 쳤습니다. 내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잘 들리지 않으니 시끄럽게 하여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의 심오한 말에 탄복하고 말았습니다. 나 같은 것은 감히 이해할 수도 없는 행동입니다. 그러니 나는 바보입니다.


 그러다 보면 생각은 담임선생님에게로 흘러갑니다. 선생님 역시 진정 똑똑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늘 나 같이 공부 잘하는 아이가 좋은 학교를 노려보지 못할 것 있냐며 나를 훈계하십니다. 그렇게 책을 들여다보면서 거기서 배운 것 하나 없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만, 내가 책에서 배운 것들, 이를테면 정의로운 마음이나 서로 돕는 행위 같은 것들을 등뒤로 감춰버립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들, 어떻게 하면 나보다 못한 자들을 무시할 수 있는지를 다시 마음속에 채웁니다만, 잘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나는 영영 그 가르침을 따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나는 불구입니까? 아아, 두렵습니다. 세상에 제대로 엮여 살아가지 못할 것이 정말로 두렵습니다. 나는 바보인 데다 겁쟁이이기까지 합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흘러가고 나면, 나는 더욱 의기소침해집니다. 이런 나를 어머니께서 사랑하실 이유가 더더욱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모습을 더듬어 봅니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나와는 하나도 닮지 않은 똑똑한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나 자신이 더욱 초라해집니다. 어머니는 내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거침없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엄숙한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 머리는 점점 아수라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게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그 생각은 어제 어머니께서 나의 새파란 눈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에 절정에 달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내 눈은 우리나라의 일반적이라는 사람들과 달리 아주 시퍼렇지 않습니까. 어머니께서는 내 눈을 두고, 시간이 지나면 다들 예쁘다고 할 테니 지금의 조소는 견디라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외계인이라고 놀리는 것일 뿐이니, 나중에 배로 갚아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까닭을 모릅니다.

 어머니, 나는 일시의 괴상한 눈과 또 일시의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눈은 언제나 사물을 보는 눈일 뿐, 예쁜 것도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어째서 검고 갈색인 눈들은 아무 지적도 당하지 않으면서, 나는 양면으로 입에 오르내려야 하는 것입니까.


 어머니, 세상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그것은 내가 파란 눈에 왼손잡이에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아여서가 아니라, 그저 내 마음이 한없이 좁은 까닭일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다른 영리한 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탄합니다. 아아, 내가 조금 더 똑똑했더라면, 저들의 비웃음과 경멸의 이유를 알았을 텐데. 그랬다면 나는 그들에게 오히려 감사할지도 모릅니다. 설마 사람이 되어서, 악의를 가지고 나에게 그런 말을 하였겠습니까. 아마 나를 위해서 쓴소리를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어리석어,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내게, 내 머리가 성능이 좋아 가르친 것을 금방 외우고 계산도 빠르니 커서 배 곯지는 않겠다 합니다. 한 귀 들리지 않는 것이 무엇이 대수냐고. 왼손잡이인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파란 눈은 오히려 이득이 될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그들이 하는 행동을 모방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까닭도 방법도 모르는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들과 같았던 적이 없는데, 그들은 그들과 같은 나만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 나는 이제 바보들의 세상을 향해 갑니다. 그 세상은 아마 백 배로 어리석을지언정, 백 배로 즐거울 것입니다. 어머니, 나는 어리석은 탓에 세상에 단 한 조각의 발자국도 남기지 못하지만 나를 제외한 똑똑한 사람들은 수십 수백 발자국이고 남기고 가겠지요. 그래서 세상은 그들의 신발 자국으로 뒤덮이겠지요. 아아, 본래의 하얗고 깨끗하던 세상이!

 어머니, 언젠가 이 세상이 새카매지고 나면, 나는 바보의 세상에서 그것을 관망하다가 환히 웃으며 말하겠습니다. 어머니, 나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지만 그것이 사랑인 줄 모르는 어린아이입니다. 어쩌면 나는 어머니의 배에서 자라 세상에 태어나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곳은 나의 세상이 아닌 겁니다. 나는 그곳에서 어떠한 사랑도 받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어머니, 나는 어머니에게서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만, 그중 어떤 것도 품지 못하였습니다. 머리가 있다면 깊이 숙이겠으나, 그 시점에 내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기어코 내 손에 단 하나도 남기지 않아야 상쾌한 줄 아는 바보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만 확실히 알아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나는 그것만 안다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세상 모두가 내게 보낸 사랑보다도, 나는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설령 어머니가 그러하지 않았다 해도 나는 괜찮지마는-다만 지금보다 조금 더 초라해질 뿐입니다. 절대 어머니를 탓하거나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세상을 끝내는 마당에 조금쯤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이런 나라도 사랑하였습니까?


 나는 단 한 순간에라도, 어머니의 딸이었습니까?







-내 딸의 유서

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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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8-17
눈보라 놀이

사랑하면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짖는 개 목줄을 의자에 둔 채로 영화관을 나왔다 함께 하얀 혼잣말을 키웠다 카페 사장님이 주인 없다며 주신 스카프는 다재다능하다 두 개의 목을 쥐는 한 줌의 손이거나 터그 놀이*에 쓰이기도 한다 영화는 둘을 위한 산책길 개의 발자국을 지우는 등 뒤의 그림자 언덕이 빙판처럼 얼어도 흰 바람이 옷 안으로 들이쳤고 틈 날 때마다 물던 꼬리에는 스카프를 둘렀다 스크린 속 배우가 눈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머리와 발이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검은 눈이 영화를 말끔하게 가렸다고 말했기에 상처 없이 흰 빛을 문 개가 돌아왔다 쓰다듬으면 더 놀자고 짖었다 물린 구멍마다 같은 혼잣말이 쏟아졌다 *반려견이 장난감이나 줄을 물고 있을 때 사람이 반대쪽을 잡고 서로 당기며 노는 줄다리기 형태의 놀이

  • 양현서
  • 2026-08-02
위성

혜유암센터 1층 접수 데스크 앞, 3년 전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은 나를 단박에 알아봤다. 그새 살이 좀 빠지고 목에 닿지 않도록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도 그랬다. 의아한 얼굴로 차트 기록을 몇 차례 클릭하던 직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이내 입술은 다시 살짝 올라간 모양으로 돌아왔지만, 눈에 담긴 빛은 여전했다. 완치 후 전이나 재발은 흔한 경우였으므로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상황 역시 유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나를 기억하는 건 아마도 3년 전 같은 자리에 앉아 비슷한 문답을 이어가던 때에 실신할 정도로 울었기 때문이겠지. 그때는 곧 죽을 사람처럼 누워있던 엄마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울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여전히 엄마의 과거 병력을 적어 넣어야 하는 칸은 한없이 모자랐으므로. “여긴 참 똑같다. 그치.” 엄마도 같은 날을 떠올리고 있는지 코를 훌쩍이며 부지런히 볼펜을 놀리는 내게 슬며시 물어왔다. 엄마는 내가 당신 때문에 우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이젠 그런 걸로 잔소리할 기운도 없는 건지 별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내가 이래서….” 로 시작하는 익숙한 반복을 흘려들으며 더 많은 눈물을 쏟아야 하는데, 엄마가 조용해서 나도 더 울 수가 없었다. 마지막 줄을 적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전보다 두세 줄 늘어 난 병명이 종이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었다. 엄마가 보지 못하도록 손을 움직이면서도 소용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구태여 읽지 않아도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겠지. 겪어봤다는 건 그런 거니까. 엄마는 꼭 봄에 아팠다. 새롭게 피는 것들이 쉬이 도드라지는 계절에 오는 끝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때마다 지겨울 정도로 우는 새벽을 보내야 했다. 눈물이 하도 쏟아져서, 도무지 멈추질 않아서 울면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흐르는 것들을 닦아가며 밀린 일을 하다 머쓱해하고, 다시 울기를 반복하다 보면 아침은 여지없이 밝아왔다. ‘죽고 싶어'가 ‘죽을 거야'로 바뀌는 그 시간도 흘렀다. 엄마가 아픈데도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시간은 흐른다는 것. 그리고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은 양 구는 나를 마주치는 것. 가장 잔인한 건 언제나 그런 종류였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늘 바쁘게 움직였다. 엄마와 함께, 아니면 엄마에게 무언가를 권하는 방식으로. 때로는 그것보다, 더 열심히 혼자. 엄마의 손을 잡은 채 몇 시간씩 황톳길을 걷고 병원에 있거나 퇴원한 엄마에게 아침저녁으로 전화하고 일기 쓰기를 제안하고…. 그 와중에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독립 서점을 열고 매일 거기로 출근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자조적인 웃음을 짓자, 제이는 내 앞에서 한 번도 짓지 않았던 표정을 했다. 입술을 일자로 구기는, 웃는 것도 찌푸리는 것도 아닌. 거기에 담긴 말을 읽어낼 수 없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분명하게 지나와서 알고 있는 시절의 얼굴인데도. 그러니까 나도 언젠가 꼭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을 텐데도 그랬다. 간호사의 표정을 보면서, 3년 전 이맘때와 제이까지 떠올리지 않을

  • listener J
  • 2026-07-31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 대상을 환원하지 않는 시선에 대하여

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 미빈
  • 2026-07-30
미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랑했다는 말과 같다

얼어붙은 호수의 경관은 새하얗고 텅 비어 보인다. 그러나 비었다는 것이 정말 텅 빈 것일까? 이 물음에서부터 김이듬 시인의 시집, 를 읽어볼 것이다. 여기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빈 방이 하나 있다고 치자.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우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방, 혹은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방을 보며 흔히 ‘빈’이라는 묘사를 붙인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다. 사물의 관점에서 다시 방을 보았을 때, 주름 지지 않은 이불과 고요한 침대, 먼지 쌓인 책상과 마룻바닥, 잘 개어진 옷과 닫힌 옷장 등 많은 물건이 들어찬 방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을 세계의 주체로 두고 본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권력을 잡고 있으며, 주류라고 칭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언어로 설명되며, 이때 인간 아닌 ‘그밖의 것’들은 ‘원래 없었던 것’ 같이 묻혀 버린다. ‘그밖의 것’들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를 주류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그 안에 남아 있던 비주류는 ‘있으나 없는 것’처럼 지워진다. 이 시집에서는 등장 인물이 ‘너’, ‘나’, ‘친구’ 혹은 일상적인 직업, 화자와 가까운 특징을 지닌 인물 정도에 그치는 여타 시집들에 비해 더 다양한 사회적 위치나 직업, 특징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한 재해의 상황들을 언급하며 그 속에서 피해를 입은 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고, 특정 사물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을 연상시키도록 한다. “폭풍”/“기근”/“역병”/“전쟁”, “동남아”에서 온 “가사도우미”, “생리대/초콜릿 바/담배/술”과 같이 값싼 물건과 생활 필수품을 훔쳐 곧 “감옥”으로 “떨어지”게 될 “도둑”, “사람”에게 죽은 “사람”과 “자기 혈육”에게 죽은 “가족”과 “마스크”가 “없”어 “승차를 거부”당한 “누추하게 젖은 사람”, “몽골인 노동자들”, “죽어 있”는 “식물”에서 떠오르는 방치된 사람들과 “태어났고 평범하게 성장했고 온순했으며 살해당한 소녀”와 “식물이 죽고 나서야” “그 식물의 이름을 알게 되”는 세상의 무관심함에 놓여 있는 사람들, “거리 곳곳의 무장군인들과 탱크”, “고독사”, 태어나

  • 방백
  • 2026-07-30
말을 읽기

어떤 행동은 글로 적힐 수 있다. 혹은 글로 적히지 않을 수도 있다. 오렌지를 나무에서 딴 후 껍질을 까 입에 넣는다. 씹는다. 이것은 한 개인의 행위로 볼 수 있다. 주어가 없어도 문장이 된다. 규모가 큰 것을 적거나 역사를 기술할 때에는 반드시 관념적이게 되는 것일까? 예컨대 역사책들은 주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혹은 'OO국이 쇠퇴했다', '성장했다'. '번영을 누렸다' 라고 쓰지만 도대체 누가 번영을 누렸다는 것인가.. 한 나라 안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쇠퇴'라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눈부시게 발전했다'라고 쓴다면 그 '눈부신' 밝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한 거대한 공동체의 일대기를 쓸 때에 (그 공동체가 실은 개인들의 합이란 것을 감안하지 않고 주로 쓰인다.) 이런 '개인'의 행위를 서술하는 데에 적합한 단어들 말고 공동체 전용 단어는 없다. A나라가 번영했다는 사실은 어떤 한 개인( 아마 'A나라' 라는 이름을 가진)이 번영했다는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리고 쓰기도 어렵다. A나라에 세 사람이 살고 있었다면 세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씩 (동시에 세 줄을 읽을 순 없으니 순서대로) 써야 할 것이고,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만연한 의인화는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가? 먼저 이것은 그 공동체가 실재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 축구 팀은 단지 같은 유니폼을 입기로 약속한 것일 뿐이다. 만약 'A축구팀이 승리를 차지했다', 'A축구팀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라고 쓴다면 언어의 힘은 읽는 이에게 혹은 듣는 이에게 그 팀에 속해 있는 선수들을 'A축구팀'으로 단순화하게 한다. '우리 반', '우리 학교', '우리 나라'도 같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나아가다 보면 (도대체 어디로 나는 '나아가고' 있단 말인가? 나는 강물 위를 떠다니는 나룻 사공이란 말인가?) '우리'라는 말마저 부정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정말 그러하다. 이것은 약속 혹은 확인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그들' 혹은 '너와 나' 같은 다른 말로 바뀔 수 있다. 언어는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과 어떤 것을 구별지어야만 한다. 두 원숭이가 언어를 처음 만드는 선사 시대 환경을 가정해 본다면 그것을 주로 야생 동물이나 식물의 '특성'을 묘사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성별' 그리고 대화의 주가 되는 '사람'과 '그 외'의 구별이다. 고유 명사는 제외하고 형용사를 보면, 도마뱀은 '빠르다', 거북이는 '느리다', 저 돌은 '크다'. 나무가 '높다' 등이 있다. 성격에 관련된 것도 그러하다. '교활한', '나쁜', '친절한', '아름다운' 등도 진화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유행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렇듯 언어가 단지 목청이 내는 소리의 조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유행하는 소리'는 같은 집단임을 확인하는 신호로 보인다. 오늘날 유행하는 '야르' (이것의 의미는 알지 못한다.)

  • 드시코
  • 2026-07-29
새벽이 팽창하고 있어!

울고 싶었어 그다지 기쁘지도 않았는데 슬프고 싶었지 아무려나 흔들리고 휘청이다 피곤에 못 이겨 쓰러지듯 자고 싶었어 잠은 천장에 얼씬대고 침대는 안 맞는 옷처럼 불편했지 투명한 손이 두 눈을 꾹꾹 눌러도 정신은 꺼지지 않고 찌그러지기만 할뿐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고 창밖으로는 포탄이 비처럼 쏟아지거나 비행기와 비행기가 공중에서 맞부딪쳐 해보다 눈부신 불꽃을 흐트리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불타는 양이 한 마리 눈물 흘리는 양이 한 마리 백 마리 천 마리 양들의 세계에 운석이 떨어져 모두 멸종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포개진 양털 속에서 숨 막혀 풍선처럼 떠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요한 밤 저 시계의 맥박을 부러뜨리고 내 가슴팍을 찔러야지

  • 구포대교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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