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계절성 우울
- 작성자 김희수
- 작성일 20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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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일조량 변화로 인해 봄에 계절성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우울이란 단어는 제법 멋진데 뒤에 증이 붙어서 우울증이 되면 좀 뭐랄까, 그 어둡고 암담한 분위기를 잃는 듯했다. 그래서 서진은 우울은 좋아도 우울증은 별로 안 좋아했다.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 병이고 얼마나 아픈지 알아도, 우울증은 가짜 같기만 했다. 우울한 병, 단순히 많이 우울한 병...병 같지 않다.
질병이라기보단 그냥 기분 상태 같았다.
서진은 텅 빈 골대를 향해 공을 찼다. 공은 매섭게 날아가서 그대로 골대에 들어갔다. 실린 힘에 비해 맥없는 골이었다. 골키퍼가 없으니 당연하다 해도 할 말은 없었지만, 서진은 조금 짜증이 났다. 경기를 뛸 땐 열심히 차도 잘 안 들어가더니, 경기가 아니면 대충 차도 다 들어간다.
답지 않은 생각이지만 삶 같다.
노력하면 남들보다 훨씬 잘하지만 같은 일을 하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금방 밀려나게 된다. 노력이나 절박함의 차이라면 아쉽지라도 않지, 단순 재능 차이면 화가 난다.
서진은 승승장구라는 단어를 싫어했다.
봄이 시작했을 무렵 자라나기 시작한 우울은 슬슬 절정을 찍고 있었고, 그와 같이 봄도 끝나가고 있었다. 서진은 어떤 식으로든 곧 결말이 올 거라 생각했다.
시간은 늦었고 골키퍼 없는 골대처럼 운동장도 비었다. 학교에 남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운동장에는 서진 한 명뿐이었다. 그는 흙바닥을 몇 번 차다가 교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나가고 싶은데 또 움직이고 싶지는 않다. 공이라도 찰까 싶었지만 또 골대는 너무 멀었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평소랑은 조금 다르다. 몸은 힘들지 않았지만 그냥 움직이기가 싫었다. 그래서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사실은 일부러 힘을 빼서 앉았다. 하지만 눕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까맣기만 한 하늘이 꼴 보기 싫어서였다.
별이라도 있었다면 하늘을 열심히 보았겠지만 서울의 하늘은 너무 삭막했다. 사람들은 밤하늘을 바다에 비유하곤 했지만 서진의 생각에 밤하늘은 사막에 더 가까웠다. 시커먼 모래가 묻어나는 죽음의 땅 같은 것.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사막의 진주, 오아시스는 마시면 안 된다. 박테리아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
서진은 한참 있다가 바람에 등 떠밀려 집으로 향했다. 긍정이 꼭 좋은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긍정만 남은 해맑음은 공허한 것이다.
다만 그건 보기에는 좋을 수 있었다. 알기 싫은 걸 무시하고 사는 삶은 즐거운 법이었다.
서진은 공부를 했다.
책을 펴고 글자를 외우고 문제를 풀었다. 정신적 감성이 거세된 공부는 그처럼 단순해져 있다-단순하지 않은 것은 그 현학적인 내용뿐이다.
"으."
습관적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시간은 가질 않는다. 반복작업을 점심시간 절반 동안 했다. 나름대로 노력해서 하는 공부였다. 짜증이 다시 밀려올 무렵 예정된 상담이 떠올랐다. 주기적으로 있는 담임과의 상담이었다. 서진은 조금 일찍 가기로 하고 책을 덮었다. 담임이 있는 교무실은 멀지 않았다. 문을 통해 나가서 다른 문으로 또 들어갔다. 서진은 그게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서진이 왔구나."
담임은 놀라울 만큼 담임 같은 사람이라서 아무런 감흥이 안 드는 인물이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본인 직업에 열과 성을 다해 임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로 보이기도 했다.
"그래, 요즘 무슨 일은 없니?"
담임은 이미 질문들을 준비해놨는지 대뜸 물었다. 아마 그 질문들은 모든 학생들에게 동일할 것이고 어떤 얼빠진 놈이 죽고싶다는 소리라도 하지 않는 이상 질문의 흐름에 변화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서진은 그런 얼빠진 놈이 되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봄이 되어 느껴지는 미묘한 우울감에 대해 누구에게라도 얘기해보고 싶어서였다.
"어...요즘 들어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해요."
담임은 별다른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겠지만 능숙하게 대처했다.
"그래? 어떻게 이상하니?"
"그냥 좀 우울한 것 같아요."
담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종이에 뭐라고 쓱쓱 적었다. 서진은 앞으로 귀찮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갑자기 모든 게 의미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거 있잖아요, 사회의 타락이나 자본주의의 폐해 같은 거. 원래는 신경도 안 썼는데 요즘엔 너무 공감이 가요."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생각이 든 거니?"
"어...공부하거나 시험 보거나 그럴 때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싶은지 오래됐는데, 요즘에 공부량이 늘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전에도 이런 적이 있니?"
"없진 않은데 오래가진 않았어요."
"음, 선생님 생각에는...봄에 일조량이 줄어들어서 우울감이 심해진다고 하더라고. 그냥 봄 타는 거 아닐까? 그리고 다른 애들도 다들 힘들어하는데, 요즘이 힘든 시기이지 않니. 어차피 지나야 하니까 힘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네."
학교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 더 했지만 형식적인 질문뿐이었다.
상담은 조용히 끝났다.
서진은 공을 뻥 찼다.
골키퍼는 여전히 없었고 공은 휑한 골대를 향해 날아갔다. 그런데 이번엔 공이 들어가지 않았다. 골대를 맞고 옆으로 굴러갔다. 어이없는 실수였다. 거리도 가까웠는데. 그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근래 들어 익숙해진 무기력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런 무기력은 언제나 있었다. 밝은 서진의 성격과 그의 노력이 가렸을 뿐, 언제나, 그리고 서진만이 아니라 주변 친구들에게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하늘을 보았다.
지금은 밤이 아니다. 잠시 뒤 축구 경기가 있다.
골대 앞에는 서진 혼자였지만 운동장 곳곳에는 연습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서진의 발걸음이 경기 시작지점을 향했다. 팀을 나누는 조끼를 입고 신발을 축구화로 갈아신었다. 축구화의 기분 좋은 딱딱함이 느껴졌다.
"준비."
삐이익-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대기를 찢었다. 경기 시작은 지체되지 않았다.
서진은 움직이는 공을 향해 달렸다. 등번호 7번이 13번에게 패스하고, 그게 바로 서진에게 왔다. 그는 침착했다. 그답지 않개 흥분하지 않았다. 조금 드리블하다가 안전하게 9번에게 패스했다. 하지만 9번에게 벌써 세 명이 붙어 있었다. 그는 공을 빼앗기는 걸 막아 보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공이 상대편에게 넘어간다.
다음으로 받은 상대편 4번은 후진기어 따윈 없는지 드리블을 하다가 그대로 공을 중거리 슛을 날려 버렸다. 제법 정확했지만 키퍼에게 막혔다.
키퍼가 공을 던진다.
서진은 그것을 받아 바로 6번에게 패스했다. 공을 보며 적당히 뛰어다니다 공을 받고, 드리블하고 패스하기를 반복한다. 이따금씩 공은 운동장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골킥이니 뭐니 하는 축구 용어들이 귓가를 스쳤다. 서진은 별로 웃음이 나지도 않았고 집중이 잘 되지도 않았다. 무기력이 그의 어깨를 잡고 자꾸만 바닥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그의 발은 점점 무거워졌다.
공이 온다.
공은 저 혼자 이리저리 튕기면서 경기장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 와중에 발에 채이고 채이면서 흙이 묻고 다시 떨어지길 반복했다.
축구는 계속 뺏고 빼앗는 행위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틈이 나면 공이 골대에 들어가는 거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심리전이나 기술들은 화려했지만 결국 그들의 목적은 같았다. 골대 안에 공 집어넣기. 의미가 넘치는 행동이다.
서진은 달리다가 중간에 멈췄다. 공은 멀었고 거기까지 달릴 의지가 떨어졌다.
그때, 누군가 공을 크게 걷어낸다.
운동장 반을 넘게 날은 공이 서진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그의 몸에 새겨진 반사신경이 자동적으로 서진을 움직였다. 공을 받았는데 앞이 텅 비었다. 거의 확실히 골을 넣는다.
하지만 서진은 공을 드리블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7번이 옆에 있다.
그는 갈등했다. 골을 넣어야 하긴 하는데 하고 싶지 않다. 골대가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은 높아지는데 의지는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결국 서진은 7번에게 패스했다.
7번은 곧바로 슛을 날려 골을 넣었다.
삐익-
전반전이 끝났다.
경기는 서진의 팀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다만 서진은 전처럼 즐겁지는 않았다.
경기는 작은 사건이 되었고 시간은 유수처럼 맥없이 흘렀다. 힘없이 굴러가는 축구공 같기도 했다.
이 주 정도 뒤, 서진은 담임의 추천으로 상담을 받았다.
거기서 서진은 똑같은 진단을 받았다.
"계절성 우울인 것 같으니까, 조금 기다려 볼까?"
그 말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무기력함은 줄어들었다.
아주 전부터 그런 무기력이 있었던 것은 거짓이었을까. 아니면 무기력함을 극복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체념이 무기력을 없애 준 것이었을까.
분명 서진은 마음속에 텅 빈 곳울 발견했었는데,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메워진 게 아니라 찾을 수 없게 된 느낌이다.
그래서 서진은 그냥 그걸 계절성 우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나중에 우울이 돌아와도, 그것은 계절 탓일 것이었다.
계정 탓이 아니어도, 우울은 어차피 왔다가 다시 떠날 테니까. 서진은 언제나처럼 해맑게, 그냥저냥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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