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아래
- 작성자 서벽
- 작성일 202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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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 사는 생물들은 언제나 바다를 그리워하지만 그 바닷물에 잠긴 순간 되돌아갈 수 없다.
-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1화>
육지에 터를 내리고 사는 인간으로서는 바다로 발을 내딛는 순간은 언제나 낯섦과 동시에 닿은 적 없는 세계를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바다는 제 품에 안은 이들은 한없이 부드러이 끌어안아 주지만 그 밖의 이방인에겐 자비롭지 않다. 수면 아래서 아가미를 펄럭이며 유유히 살아가는 생물들과 달리, 인간에게는 약하게 부풀고 가라앉는 폐뿐이기에 그곳으로 발을 내딛기 위해서는 반드시 번거로운 과정을 필요로 한다. 우선 제 몸의 열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딱 달라붙는 웻슈트를 걸치는 것은 복잡한 관문을 향한 첫 발걸음이다. 그 다음으로 애석한 몸이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가라앉기 위한 무게추를 몸에 매달아야만 한다. 현실에서도 바닷속에서도 떠오르기 위해서는 우선 가라앉아야만 하는 것이다. 부력조절기를 등에 메다는 순간 휘청이는 몸을 가누는 것 또한 온전히 인간의 몫이며, 동시에 육지의 공기를 끌어 담은 공기통을 매달고 부들거리는 다리를 치켜세우는 것 또한 바다를 향한 처절한 인간의 몸부림 중 하나이다. 그 모든 관문을 뚫고선 인간은 마치 하나의 돌덩이가 된 듯한 기분으로 바다를 바라본다. 어쩌면 정말로 별반 다를 것 없는 처지일 텐데도, 그들은 해맑은 웃음과 함께 레귤레이터를 입에 문다. 이내 서로의 버디를 향해 일종의 사인을 주고받은 그들은 기어코 바다를 향해 뛰어든다. 철썩이는 파도를 뒤로하고는, 단지 크게 부푼 심장과 어떠한 맹목적인 갈망만을 지닌 채로. 그러니 육지에 사는 생물들은 언제나 바다를 그리워하지만, 그 바닷물에 잠긴 순간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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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에 잠기는 순간은 해선에게는 썩 유쾌하지 않다. 차디찬 물기가 제 몸에 한껏 달라붙는 감각이며 새파란 빛으로 가득한 아래를 바라보면 어딘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가 스쿠버 다이빙에 빠져든 것 또한 그 이유에 있었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느낌. 그 괴리감에는 어딘가 모든 걸 잊게 해주는 마법이 담겨있는 듯했기에. 핀을 가볍게 흔든 해선은 제 앞에 선 버디를 향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준은 조금씩 아래를 향해 두 발을 걷어찼다. 그의 등 위를 커다란 만타 가오리가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해선은 옅게 웃으며 그를 따라 아래로 가라앉았다. 닿지 않을 것만 같다는 생각과 달리 바닥은 몇 번의 발짓만으로도 도달할 수 있다. 형형색색의 산호초가 빛이 가려진 바닥을 화려하게 밝히는 그곳에는, 곳곳에 숨어든 작은 생물들이 조금씩 움직이며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청 푸른 빛에 은은한 어둠이 내리깔린 그곳, 그러니 즉 바다의 작은 심연인 그곳에 도달하고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볼 수 있다. 공중을 향해 가벼이 몸을 뉜 준은 그녀에게 검지를 들어 올려 손짓했다. 해선은 가벼이 몸을 돌려 새로운 바다의 내면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머금은 채 일렁이는 수면 아래로 떼를 지어 움직이는 잭피쉬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더하고 있었다. 자그만 니모가 해선의 뺨을 스치며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그 모든 모습들은 결국 그녀의 모든 과거와 미래, 어쩌면 현실까지도 단단히 붙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해선은 인공적인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시며 푸른 세계를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세상을 떠다니는 바다거북과 군청색 물고기 떼. 피부를 감싸는 부드러운 압력과 함께 해선은 점차 바다에 빠져들었다. 한 시간 가까이 준의 가이드를 따라 움직인 그녀는 눈에 띄게 줄어든 산소 게이지를 확인하며 그를 향해 사인을 보냈다. 짧은 탐험을 뒤로한 그들은 아쉬움이 들어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두 발을 힘껏 차 본래의 세계를 향한 귀환을 시작한다. 부력조절기에 공기를 넣은 그들은 들어올 때와 같이 숨을 들이켜곤 서서히 솟구치며 작별을 고한다. 옅은 호흡을 내쉬며 수면 위로 올라온 해선은 레귤레이터를 뱉어내고는 폐 안 가득 지구의 온기를 탐닉했다. 그러자 바다로부터 내쫓긴 그녀는 이내 폐부를 감싸 쥐는 산소와 함께 다시금 잊을 수 없는 과거에 붙들리는 것이었다.
미크로네시아의 밤은 축축한 열기로 가득하다. 미지근하게 식은 바닷바람이 이마를 스치지만 그마저도 온전히 더위를 씻겨내려 주지는 못한다. 해선은 반쯤 잠겨있는 듯한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젖은 나무 냄새와 함께 잭 다니엘스를 들이켰다. 이곳을 휴양지로 정한 건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언제나 계획적으로 행동했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언제나 자유분방했던 언니처럼 저 역시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몰랐다. 여하간 그녀는 비록 이곳이 쩍쩍 들러붙는 더위로 가득한 곳이라도 아무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마저도 발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뛰어들던 그녀를 닮은 듯했기에. 해선은 왁자지껄한 사람들 속에서 간간이 옅은 한숨과 웃음을 토해내며 천천히 위스키를 들이켰다. 목구멍을 지나는 짜릿한 감각이 꽤 좋았다.
“애인 있어요?”
그때 야자수가 흔들리는 소리 사이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낯에 함께했던 자신의 버디이자 스쿠버 다이빙 강사였다. 이름이 준이라고 했던가. 해선은 그의 이름을 입 안에 굴리고는 픽 웃으며 답했다.
“아뇨. 그럴만한 여유가 없어서요.”
“여긴 휴양지인걸요?”
그런가. 해선은 자연스레 제 옆에 다가와 앉는 그를 흘깃 바라보며 잔 속의 호박빛 액체를 입에 담았다. 부드러운 오크 향이 코끝을 가볍게 스쳤다. 휴양지라…, 글쎄.
“글쎄요. 여기라고 반드시 희망이 찾아오는 건 아니니까요.”
“희망이라, 글쎄요. 좀 비관적인 타입?”
준은 그녀의 말투를 따라 하고는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바텐더를 불러 자신과 똑같은 위스키를 주문한 그를 바라보며 해선은 답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웃음을 속으로 삼켜대면서.
“네, 뭐. 그렇죠. 애인 있으세요?”
“아뇨.”
“왜요? 마음에 여유가 많아 보이시는데.”
“아, 하하. 착각이에요. 아주 단단히 착각하셨네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에 여유 따윈 없죠.”
해선 자신으로서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준은 참지 못한 웃음을 크게 터트리며 길게 늘어진 눈을 찡그러트렸다. 아무래도 그는 오늘 자신을 놀리는 데에 재미를 찾을 듯했다. 소금기 어린 바람이 그들 사이를 선회하며 식혀지지 않는 열기를 더듬었다. 해선은 밤바다 위로 번지는 조명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박해선이라고 했죠? 한국인은 오랜만이네요. 여긴 시골이라 다들 잘 안 오던데. 어쨌든 반가워요.”
“준. 한국인인가요?”
“네.”
“근데 왜 영어만 쓰는 거예요?”
해선은 그제야 어딘가 친숙하게 들려왔던 그의 뉘앙스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는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유리잔을 들어 올린 채 음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했다. 이내 예의 옅은 웃음을 터트린 그는 고동색 눈동자를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다 잊어버려서 말이죠. 아주 새하얗게, 잊어버렸죠.”
그 말을 하는 준의 표정이 어딘가 씁쓸한 기색을 띠기에 해선은 고개를 틀었다. 짠바람에 식어가는 위스키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그녀는 타인의 알지 못할 내면을 파헤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목구멍을 태우는 열기를 따라 태연히 말했다.
“오래되셨나 봐요. 여기 온 지.”
“음, 아뇨. 아니, 6년이면 오래된 걸까요?”
너털웃음을 짓는 그를 바라보던 해선은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
“그사이에 잊어버렸다고요?”
“네. 정확히는 잊어야 했던 걸지도 모르죠.”
“이상한 사람이시네요.”
“그런 말 자주 들어요.”
그는 어깨에 닿을 만큼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을 닫았다. 습기로 흐릿해진 네온사인이 그의 머리 위를 맴돌며 아른거렸다. 그들은 이내 서서히 미크로네시아의 밤에 녹아들었다. 외국에서 만난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점이 찝찝하기는 했지만 해선은 이곳의 바다를 사랑하는 만큼 오늘은 누그러진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몇 시간 전 그와 함께했던 여정을 나눌 때면 푸른 잔상이 느리게 따라붙었다. 기억하지 못할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멀어진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해선은 다 식어버린 위스키를 천천히 머금었다. 준도 전보다 편해진 모습으로 그녀 옆에 늘어지듯 앉아있었다.
“바다를 좋아하시나요?”
해선은 이명 같은 파도 소리를 들으려 애쓰며 물었다. 답은 침묵을 한참 동안 맴돌다 가볍게 튀어나왔다.
“글쎄요.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요? 아무래도…, 회피에 가깝죠. 그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색다른 곳이 필요했거든요. 그게 전부죠. 그래요, 제 생각엔 단지 그뿐이에요.”
회피. 해선은 감히 내뱉을 수 없는 단어를 제 안으로 집어삼켰다. 곰곰이 그의 말을 회상하던 그녀는 이내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쓸어내렸다.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선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고는 조금 전 들은 그의 이름을 내뱉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만 가야겠어요. 내일 또 봬요. 안녕. 준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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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선은 언제나 바다를 사랑했다. 언제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다가서는 짠 바닷내음도 그렇지만, 자신의 이름에 해선(解船)이라는 또 다른 뜻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그녀는 늘 부연 파도가 쓸려내려가는 것을 바라볼 때면 저 멀리 수평선 아래에서 배가 출범하는 듯한 환상이 보여오는 듯했다. 그 모습에 언젠가는 선장이 될 거라고, 그런 다짐을 했던 것도 같고. 여하간 자신의 이름마저 바다로 엮어낸 그 어린아이의 다짐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앉아 있었다. 더는 떨쳐낼 수 없듯이. 늘 바다로 나아가는 뱃머리 아래 다닥다닥 들러붙어 있던 따개비처럼.
미크로네시아의 하늘은 오늘도 결점 없이 푸르다. 겹겹이 쌓인 층운형 구름이 이따금 거센 햇빛을 막아주고, 아직 채 달아오르지 않은 모래사장의 미지근함이 발아래를 스쳐 지나갔다. 해선은 몸을 휘감는 바닷바람을 느끼며 선착장으로 들어섰다. 어제와 같이 새빨간 핀을 들고 서 있는 준현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다이브 포인트로 이동하는 배 안은 털털거리는 모터 소리로 가득 찼다. 청록빛 물살을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배는 어쩌면 수평선까지 닿을 수 있을 듯하다. 해선은 등에서 느껴지는 육중한 무게감을 뒤로한 채 저 먼 바다를 응시했다. 물렁거리는 파도는 어떤 해도 끼치지 못할 것만 같음에도, 자신은 여전히 바다를 알지 못했다. 해진은 바다를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기에 그토록 사랑했던 것인가. 그래서….
닿을 수 없는 물음을 내뱉는 건 언제나 해선의 몫이었다. 그러니 슬픔은 늘 파도처럼 몰려와 해선을 집어삼키는 것이었다. 물렁거리는 것만 같던 그것은 어느덧 온몸에 들러붙어 생채기를 냈다. 발버둥 친다고 해서 단번에 수면 위로 올라갈 수는 없다. 그 무엇도. 찬란한 햇빛조차도 결코 침잠하는 파도 아래를 꿰뚫고 고요한 물속으로 들어올 수 없듯이. 나갈 수 없는 온몸은 이내 호흡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채 가라앉는다. 서서히 점점, 아주 조금씩. 다만 심해는 끌려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물들어 갈 뿐이었다. 수채화 속 물감같이. 에메랄드빛 바다로부터 빛 한 점 없는 아득한 공간에 도래할 때까지.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그곳으로.
바다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은 아무리 경험한대도 적응할 수 없다. 숨을 내쉬어도 제 것이 아닌 호흡이 밀려드는 감각도, 뿌옇게 가려진 시야를 닦는 손길도 전부. 오늘은 해풍이 조금 불어 수면이 부서지듯 아른거렸다. 어제와 같이 바다를 탐험한 그들은 또다시 상승을 위한 여정을 시작한 참이었다.
준현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인 해선은 그를 따라 몸을 돌려 핀을 찼다. 그때 뒤에서 무언가 자신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해선은 수면을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발아래를 살폈다. 그곳에는 형형색색의 산호초와 잿빛 바닥이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위치한 해선의 샛노란 핀. 아. 핀 스트랩이었다. 근처의 산호와 달리 높게 자라난 산호가 그것을 옭아매고 있었다. 해선은 흔들거리던 다리를 멈춰 세웠다. 지금이라도 스트랩을 끊고 그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저를 가지 말라는 듯이 끌어당기는 이곳이 아늑했다. 저 수면 바깥의 세상보다도. 그러니 어쩌면 이곳에서….
탁. 무언가 끊어져 내라는 소리에 해선은 반쯤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새에 돌아온 준현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자그만 다이빙 나이프를 손에 쥔 채로. 아. 해선은 그제야 자신이 바닷속에 들어와 있음을 알아차렸다. 정확히는, 자신은 되돌아가야 하는 신세임을. 해선 대신 스트랩을 끊어낸 준현은 허벅지에 나이프를 꽂아 넣고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번에야말로 핀을 흔들어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그들은 그제야 제대로 된 상승을 시작했다. 수면 위로 솟구쳐 나가는 동안 해선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중요한 거예요?”
수면 위로 올라온 준현이 잠수경을 벗으며 해선에게 물었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축 늘어져 그의 어깨에 달라붙어 있었다. 해선은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히 답했다.
“아뇨.”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누군가와 닮아있다고, 그런 멈출 수 없는 생각을 하면서.
“다행이네요.”
그 말을 끝으로 준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전부 알고 있다는 듯이. 해선은 끊어져 버린 스트랩처럼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뭉개지는 듯한 감각을 애써 내리눌렀다. 가슴께를 맴도는 물살이 차가웠다.
해선은 조금 이르게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해가 지기 직전의 하늘은 푸르던 낯과 달리 온통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어르스름한 구름이 수평선 너머로 색색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아직 어둠이 도래하기엔 오래였다. 저녁을 함께하는 이들이 나누는 정겨운 대화 소리가 침묵뿐인 해선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는 어제와 똑같이 호박색 액체를 입 안으로 넘겼다. 목을 스치는 단맛 사이로 어딘가 씁쓸함이 맴돌았다.
“안녕. 해선씨.”
익숙하고도 낯선 목소리였다. 해선은 낯선 도시에서 들려오는 모국어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준현이 있었다. 언제부터 제 옆에 앉아있었는지는 몰라도 줄어든 잔을 보자니 꽤 오랫동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싶었다. 해선은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어 기억하시네요.”
“네. 갑자기 떠올랐죠. 뭐, 지금은 금세 잊어버렸지만?”
익숙하게 내뱉던 조금 전과 달리 그는 또다시 영어를 쓰고 있었다. 해선은 열기가 천천히 식어가는 저녁 속에서 그를 향해 물었다.
“쓰고 싶지 않은 건가요?”
“쓰고 싶지 않다기보단, 정말 익숙해져 버렸거든요. 이곳에. 전 모든 금방 잊어버리는 성격이라. 이상한가요?”
“아뇨. 그냥…, 한국어도 잘 어울려서요.”
“하하. 고마워요.”
해선은 그가 어떤 답을 했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 인연은 스쳐 지나갈 테고, 그런 인연이야말로 무엇이든 내뱉을 수 있겠지만, 동시에 그 무엇도 서로에게서 알아낼 수 없을 테였기에. 해선은 물 위에 길게 드리운 붉은 햇살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열기는 끝없이 타올라 공기를 가득 데웠다.
“그래서, 아까 왜 그런 거예요? 아,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정말로 궁금해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해선을 향해 그는 손바닥을 흔들었다. 내리깔린 속눈썹 사이로 들이밀어진 손을 바라보던 해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그냥 눈을 떴을 때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 있잖아요. 그냥 그랬던 거뿐이에요. 올라가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고. 그냥, 아주 잠깐….”
산호가 자신을 옭아매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해선은 지금껏 오직 그 순간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해선조차도 그곳에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흐릿하고도 분명한 그 감각이 온몸을 에워쌌다는 것만은 떠올릴 수 있었다. 부유하는 몸을 가볍게 쓸어주던 그 감각. 일종의 아늑함, 혹은 안온함같은.
“못 죽는 거죠? 안 죽는 게 아니라.”
“네?”
해선은 뜬금없는 준현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침잠해 있었다.
“왠지 해선씨는 죽지 못해 살아 계신 것 같아서. 아닌가요?”
“어떨 것, 같아요?”
“글쎄요. 우선 저는 그래요.”
해선의 어물쩍한 대답에 그는 어깨를 들썩였다. 해선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뿐. 그의 질문에 그녀는 마음의 깊은 곳 어딘가가 일렁이는 듯한 느낌에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래서, 이젠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어요? 왜 여기에 왔는지.”
“…무언가를 찾고 있어요. 실체 없는 무언가를.”
“그걸 찾으면 뭐가 이루어지나요?”
해선은 입을 달싹거리다가는 다시금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붉게 녹아내린 수평선에 더 이상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었다. 어둠에 잠기기 직전의 노을이 하릴없이 수면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이루어진다라…. 글쎄요. 그렇다기보단 그저 이유를 찾고 싶어서요. 그런 일들이 있잖아요. 아무리 찾아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그래서예요.”
해선은 단지 휴식을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누구도 자신을 모르는 곳, 그리고 동시에 누구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곳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자신이 품은 감정의 진실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기에.
“말해주지 않을래요? 때로는 내뱉어야만 풀어낼 수 있는 일들도 있죠.”
준현은 변함없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그 물음이 그와의 첫 만남에서 나누었던 대화와 같이, 시답잖은 이야기인 것처럼. 때문에 해선은 깊게 침묵하려다가도 결국 입을 열고야 마는 것이었다. 어쩌면 정말 쉽게 잊혀질 인연이라면…. 입안에 가득한 씁쓸함이 어서 그 말을 뱉어내라며 종용하는 듯했다. 해선은 결국 그것을 토해냈다.
“…음. 언니가 있었어요. 2살 차이 나는 언니가."
생각보다 말은 가볍게 튀어나왔다. 해선이 몇 번이고 삼켜냈던 말이었음에도. 이내 한숨과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지금은 없지만. 무게 잡으려는 건 아닌데, 자살했거든요. 물론 지금은 그다지 슬프지 않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마모된 것 같아요. 결국 시간이 답이었던 거겠죠.”
어떤 죽음에는 소리가 없다. 단지 그 의지만이 죽음 속에 단단히 남아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연기로 가득 채워진 방과 침묵. 그 사이를 뚫고 나오던 해진의 의지를 그녀는 기억했다. 아마도 앞으로도 여전히 잊지 못할 테고.
“그래도 미련은 남았죠?”
“…네.”
사람은 살면서 그 어떤 일이 되었든 반드시 미련을 남기곤 한다. 후회는 하지 않더라도. 깨끗이 잊히지 못하고 바다 위의 해무처럼 부옇게 기억을 맴도는, 그런 감정들이 해선에게도 있었다.
“언니는 스쿠버 다이빙을 좋아했어요. 저는 그걸 보고 따라 하게 된 거였고요."
지금은 해선에겐 없어서는 안될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서도, 해진이 아니었다면 해선은 결코 바다로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었다. 망설임 하나 없이 뛰어들던 해진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결코.
"그래서인지 지금 와서는 그런 상상을 해요. 차라리, 바닷속에서 죽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차라리 언니가 좋아하던 그 바닷속에서, 늘 푸른 그곳에서 유영하듯 숨을 거두었다면 차라리, 미련은 좀 없었을까 해서.”
바닷속을 파헤치던 샛노란 머리카락을 기억했다. 해진은 언제나 자신만의 신념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신념의 중심에는 언제나 바다가 있었다. 그래서 해선은 그녀의 끝도 분명 바다일 거라고 생각했다. 허무한 침묵뿐인 죽음이 아니라, 어떤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런 끝이 아니라, 분명 한없이 푸르른 그 바닷속에서 결말을 맞이할 테라고. 바보같이 착각했었다.
“언니가 죽기 일주일 전에 그런 말을 했어요. 어디든 상관없으니 같이 바다 여행 가자고. 차라리 그때 같이 여행을 갔더라면 원하던 죽음을 맞이했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죽고 싶었을 테니까요. 무엇보다.”
미처 말하지 못했던 진심이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그런 진심. 해선은 준현이 곁에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말을 내뱉고 있었다. 돌아본 그의 얼굴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로, 다만 그녀가 아닌 저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짠 내를 머금은 바람이 그의 머리를 펄럭였다. 해선은 흐트러지는 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는 눈을 감았다. 답은 서서히 흘러나왔다. 마치 밀물처럼. 그녀 자신조차 의식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천천히.
“음…, 정말로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싶었을 수도 있죠. 어찌되었건 가장 사랑하던 곳이니까. 그렇게 사랑하던 곳에서 숨이 멎기를 바랐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바다를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빠져 죽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오히려 두려웠을지도 모르죠. 한없이 좋아하던 걸 증오하게 되는 것도 아주 간단한 일이라.”
“정말, 그럴까요?”
해선은 그의 답에 의문을 숨기지 못하곤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가 그렇다고 말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물론 준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닫았지만. 그러니 결국 그의 말은 어떤 위로도 동정도 아니었다. 단지 해선에게 어떤 선택지를 건넨 것이었다. 여지껏 곁에 두고도 알지 못했던 선택지를.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만이 그들을 감쌌다. 이따금 파도 소리가 곁에 맴돌았지만 그마저도 이명처럼 흩어져 버렸다. 해선은 이미 텅 비어버린 잔을 굴리며 침잠해 있었다. 미지근한 온기가 손바닥을 맴돌았다. 준현이 입을 연 건 그로부터 몇 번이고 한숨을 내뱉은 후였다.
“바다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태초에 우리가 나고 자랐던 곳으로 가듯이. 어쩌면 순리 같은 그런 걸 경험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이 있죠.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
그는 확신이 서지 않은 듯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 해방되고 싶어 한다는 거겠죠. 불안한 현실로부터 혹은 미련한 과거로부터. 바다는 자비로우니까요. 그 무엇이 되었든 품어줄 수 있죠.”
해선은 그의 고동빛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었다. 한숨을 집어삼킨 그는 잔잔해진 말투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다만 해선씨가 기억해야 하는 건, 중독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바다는 단번에 커다란 파도를 불러올 수 있으니까요. 틈 없이 자유롭다가도 단번에 집어삼켜 버리고야 말죠. 그렇게 인간은 가라앉는 거예요. 아주 조금씩, 고여가듯이. 그러니 잊지 마세요. 이 세상에는 그 무엇도 온전히 옳고, 동시에 완전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그 말을 끝맺는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저 온전히 오랫동안 간직해 온 어떠한 신념을 내뱉듯 올곧은 눈빛만이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어둠에 가라앉은 푸르름이 그의 머리 위를 옅게 밝혔다.
“말이 길었네요. 이만 갈게요. 안녕. 해선씨.”
준현은 말을 끝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선은 무언가 내뱉으려는 듯 입을 어물거렸으나 결국 아무것도 내뱉지 못했다.
“아.”
그때 떠나려는 듯 손을 흔들던 준현이 해선에게 한 발짝 다가와 속삭였다.
“그리고 있죠, 우리는 때로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
해선은 바다를 동경했다. 정확히는 가라앉은 그 세계에 사는 이들을. 근원 중의 근원. 세계의 시작점을 정착지로 삼고 있는 생물들을. 그들은 태초부터 햇빛을 본 적이 없기에 갈망할 필요도 없었다. 부질없는 것들에 목맬 필요도. 다만 그들에겐 끝없이 펼쳐진 자유와 숨 없는 어둠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었다.
해선은 해진의 죽음 이후 자신은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자신이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는 몰라도, 분명 그리될 것이라고. 오만한 다짐이었다. 동시에 속죄 같은 것이었다. 앞으로도 평생 끊어내지 못할. 해선은 어젯밤 내내 준현의 말을 곱씹었다. 이제는 소금처럼 자그맣게 쪼개져 버릴 만큼. 아주 여러 번. 메마른 입안에서 어째선지 짠 바닷냄새가 났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동시에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았다. 아직은. 어쩌면 그의 당부를 기억하는 동안은.
때아닌 폭우가 온종일 쏟아지고 있었다. 보통은 소나기 같은 비가 불쑥 찾아와 사라지고는 한다는데, 오늘은 해가 사라진 지금까지도 멈출 생각 없이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해진은 오후 내내 숙소에만 틀어박혀 있던 몸을 일으켜 작은 벤치에 나와 앉았다. 눈앞을 가득 메우는 희뿌연 잔상이 사라질 틈 없이 떠올랐다. 해선은 습기를 잔뜩 머금은 벤치에 등을 기대곤 눈을 감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푸르던 하늘이 가물가물했다. 마치 동요하는 자신의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해선은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담배를 꺼내 들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탁하는 불꽃이 튀었다. 이내 쓰린 열기가 폐를 감싸 안았다.
머리를 텅 비운 감각을 만끽하고 있을 참이었다. 저 멀리 숙소 뒤편에서 익숙한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해선은 멍하니 숨을 들이마시며 그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담배 좋아해요?”
“음. 조금요. 자주 피지는 않아요.”
준현은 제 입에 물린 불꽃을 보고는 두 눈가를 조금 찡그러트렸다. 해선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연기를 뱉어내며 답했다. 싫어하는 건가. 해선은 반쯤 남은 불씨를 비벼껐다.
“하나만 줘요.”
“담배 피워요?”
“가끔은.”
의아함을 숨기지 못한 해선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준현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집어넣으려던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그에게 두 개 남은 담배를 하나 넘겨준 해선은 라이터를 들어 올렸다. 그때 제 곁에서 불꽃이 튀며 익숙한 연기가 밀려들었다.
“오래된 거네요.”
해선은 그의 손에 들린 라이터를 보며 말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새빨간 라이터였다. 담배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었는데.
“네. 제건 아니고. 형 거예요.”
그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해선은 그저 묵묵히 입안을 맴도는 연기를 들이켰다. 허공을 응시하는 두 눈빛이 맞닿지 못한 채 흔들거렸다. 피어오르는 연기만이 그들 주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있잖아요.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어떤 사람을 좋아해요?”
해선은 끝이 타들어 가는 불꽃을 바라보다가는 고개를 돌렸다. 장난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선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요. 딱히…, 좋아하고 싫어하고가 없어서요. 준현씨는요?”
“저는…, 그런 사람을 좋아해요. 누군가 자신을 파헤치기를 기다리는 사람을. 겉은 텅 비어있고 그러니 더욱 초라해 보이는 그런 사람을 갈망하죠. 그리고 그런 사람은 결국, 비틀려 있기 마련이라. 이상한가요?”
누군가 들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만한 말이었지만 해선은 신경쓰지 않았다. 단지….
“아뇨. 저도 뭐, 엇비슷해요.”
비틀려 있는 사람이라. 해선은 지금까지의 그의 말을 떠올렸다. 준현은 누구보다도 낙천적인 사람 같다가도 이따금 의미를 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사람이었다. 마치 평소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그녀는 침묵 속에서 속삭이듯 내뱉었다.
“준현씨는 가끔 보면 허무주의자 같네요.”
“제가요?”
“네. 뭐랄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요.”
텅 비어있는 사람. 그래 그게 맞았다. 하릴 없이 웃음 짓다가도 그는 분명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게 그 당부를 내뱉을 때에도, 끊어진 스트랩에 대해 물었을때에도. 마치 이곳에 처음부터 발을 들이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있죠. 전 삶을 좀 대충 살고 싶어요.”
“왜요?”
그는 소리 없는 웃음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음. 사람들이 쉽게 망각하는 게 있어요. 하나는 결국 삶은 끝난다는 거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삶은 결국 단 한 번뿐이라는 거죠."
단한번 뿐인 인생. 해선은 그의 말을 입에 굴렸다. 익숙하고도 낯선 말이었다.
"그러니 삶을 너무 소중히 여겨도 못써요. 아끼고 아껴봤자 끝내 부질없어지고야 말죠. 단지 그뿐이에요. 제 생각은.”
해선은 입술을 스치는 씁쓸함을 머금으며 그의 말을 들었다. 어쩐지 정말로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전 제가 허무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 삶을 그다지도 초라하게 생각하지도 아껴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최대한 하고 싶은 걸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슬픔도 후회도 결국 영원하진 못하니까요. 삶이 끝나면 결국 그들도 숨을 거두고야 말 테니.”
아. 그런 거였나. 해선은 그제야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제게 조언하던 그 눈빛도. 익숙한 듯 낯선 얼굴도. 전부 그의 신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저는, 해선씨가 내버려 두셨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마음이 어딘가로 향하도록. 때때로는 멍하니, 바다 아래를 부유하는 해파리처럼요.”
그리고 해선은 결국, 그와 같은 사람을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곳에 깊이 뿌리내린 채 차마 뱉어낼 수 없는 신념을 가진 그런 사람을. 바보 같대도, 그녀와 닮아있어서.
“준현씨는요?”
“저요? 제 얘기가 궁금하세요?”
“네. 알고 싶어요.”
“전…, 제 얘기를 잘하는 편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듣고 싶은가요?”
해선은 답하지 않은 채 그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준현은 왜인지 찡그린 표정으로 목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끝이 거의 타들어 가는 담배를 내려놓고는 그에게 물었다.
“이곳엔 어쩌다가 오게 된 거예요?”
“저는….”
그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자꾸만 입을 어물거렸다. 내뱉을 단어를 찾는 것처럼. 해선은 묵묵히 그의 답을 기다렸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토해냈다.
“도망쳐 왔어요. 그래요, 도망쳐 왔죠. 어언 6년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의 얼굴을 마주보지는 않았지만 해선은 분명 그가 처음보는 얼굴을 하고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때보다도 초라한 목소리였다. 평소에 옅은 웃음을 달고 다니는 그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낯선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기를 바란 적은 없어요. 그렇지만…. 무턱대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죽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말이 길어졌네요. 어쨌든, 그뿐이에요. 저는 도망쳐 왔어요. 무언가로부터.”
해선은 짐짓 그에게도 어떠한 사연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대꾸하지 않았음에도 준현은 멈출 수 없는 듯 말을 이었다.
“…저한테는, 형이 있었어요. 공교롭게도 6살 차이였죠. 그러니까 딱 지금의 제 나이의 형이 있었어요. 물론 뭐 죽어버렸지만. 화재였어요. 뻔하디뻔한 가스 화재요.”
해선은 다 타버린 담배를 발로 짓이기고는 벤치에 기댔다. 옆을 바라보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았다. 어설픈 위로도, 동정도. 그가 제게 그랬듯. 준현은 그게 정답이라는 듯 짧은 한숨과 함께 그의 내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형이 저를 던졌어요. 있는 힘껏. 그땐 형이 그렇게 힘을 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그런 힘이 어디서 났는지는 몰라도 단번에 몸이 기울어지더라고요."
준현은 정말로 단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토해냈다. 6년이 지났음에도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수용할수도, 누군가를 용서할수도 없었고.
"그렇게 추락했죠. 8층 아래로. 눈을 감지는 못했어요. 무서웠거든요. 이대로 두 번 다시 보지 못할까봐. 매정하게도 하늘은 푸르더라고요. 그 어느 때보다도. 한순간에 멀어졌어요. 깨진 창밖으로부터 공중으로 낙하하기까지는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났죠.”
준현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듯 에어 매트에 뼈가 부러져 버렸다며 말을 덧붙였다. 물론 누구도 웃음을 내비칠 순 없었지만. 소용이 없음을 알아차린 그도 마찬가지였고.
“저는 더 이상 불을 봐도 두렵지 않아요. 그런데 그게 오히려 저를 비참하게 하죠. 이젠 전부 나아졌다는 것만 같아서. 사실은 회복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죠. 나 따위가 감히. 뭐 그런 기분으로?”
준현은 새빨간 라이터를 손에 쥐고는 굴렸다.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열기를 기억해 내려 애쓰면서. 그 모습에 해선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말했잖아요. 우리는 때로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근데 왜 그러고 있어요.”
“그럴 수 없으니까요. 언제나 남에게 말해주는 건 쉽지만 실천하는 건 어렵죠. 어쩌면 저는 남이 제가 바라는 걸 이루어 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아니, 분명 그래요. 기다리고 있어요. 계속.”
해선은 좋은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준현 또한 그걸 바라지도 않을 테였고. 그렇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가 제게 해준 말을 돌려줄 뿐이었다.
“있잖아요. 우린 결코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되돌아갈 순 없을 거예요.”
“그렇죠. 완전한 회복이란 건 없으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코 나아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파도에 휩쓸린 바위가 서서히 침식되어 가듯이. 아무리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견뎌내어도. 도무지 되돌릴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있다.
“네. 그렇지만.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해요. 나아지진 않더라도 더 이상 가라앉지도 않는 날이 올 거라고요. 물론 저도 그렇게 긍정적인 사람은 아니지만요. 언젠가 죽고야 말 테고, 원하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만, 그 죽음조차도 정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있어요. 아직은."
해선은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이상 떨리지 않았다.
"준현씨도…, 죽지 못한 거잖아요? 그러니 저도 내버려 두셨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마음이 어딘가로 향하도록. 바다 아래를 부유하는 해파리처럼요.”
파도에 깎아내려진 바위는 한없이 작아진다. 바다 아래로 가라앉듯이. 그러나 결코 소멸되지는 않는다. 한없이 작아지고 작아지더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해선은 어릴 적 손에 쥐었던 조그만 바위 조각들을 떠올렸다. 더 이상 누구도 상처입히지 못할 만큼, 매끄럽고 부드러운 그것들을. 단지 그런 것이다. 깎아내려져도 여전히 의미 있는 것들이 있기에.
“그러니, 준현씨도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어요.”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시는군요.”
“사람은 원래 듣고 싶은 말을 남에게 해주더라고요.”
준현은 여지껏 타인에게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 주면서도 되돌려받지 못했다. 그저 깎아내려 간 채로 웃음 지을 뿐이었다.
“해선씨는 참, 낙관적인 사람이에요.”
깎아내려 가는 줄도 모르고 줄곧 자신만을 채워주었던 그 사람. 해선은 어쩌면 준현이 해진과 무척 닮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었거든요.”
“저도요.”
어느덧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던 빗방울이 사그라들었다. 여린 물기가 두 뺨을 적셨다. 어디선가 부서져 내리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준현은 속눈썹에 내려앉은 푸르름을 떨쳐내지 않은 채 말했다.
“아마 내일은…, 맑을 거예요. 그러길 바라야죠. 바다를 탐험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으니.”
-
그들은 두 발을 박차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야를 가리는 옅은 포말이 사라지고 나면 곧이어 수면 아래의 세상이 몸을 드러낸다. 흐린 햇빛을 받고 번쩍이는 그런 세상이. 바다는 이내 낯선 이방인을 제 안으로 부드러이 받아들인다. 해선은 준현을 따라 가벼이 유영하며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내 그들은 바다의 작은 심연에 도달하고서야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볼 수 있다. 공중을 향해 몸을 뉜 준은 그녀에게 검지를 들어 올려 손짓했다. 해선은 가벼이 몸을 돌려 바다의 내면을 바라보았다. 만타 가오리와 바다거북, 그리고 형형색색의 산호초 위를 맴도는 수십 마리의 생물들까지. 해선은 온통 새푸른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우린 앞으로도 많은 날을 헤매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겠지. 새푸른 바닷속을 유영하는 해파리처럼, 정해진 도착점 하나 없이 그곳을 떠돌아다닐 것이다. 때로는 잔잔하고 푸르른 바다 아래에서, 때로는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는 수면 위에서. 심연과 겉을 맴돌고 또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반드시 번거로운 과정을 필요했다. 메마른 몸을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뛰어드는 것부터, 빛조차 닿지 못할 곳으로 나아가기까지. 현실에서도 바닷속에서도 떠오르기 위해서는 우선 가라앉아야만 하기에. 그러나 만일 심연에 도달할지라도, 빛조차 우리를 감싸주지 못할지라도 여전히 그곳에 살아 숨 쉬는 이들이 있다. 단지 떠돌아다니기 위해 삶을 이겨내는 이들이, 그런 이들이 있기에. 그 자유와 어둠. 해선은 그것들이야말로 자신을 진정으로 감싸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발을 박차고 수면을 향해 솟구치는 과정은 다이버에게 단지 귀환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고 다시 그 아래 심연으로 가라앉을 수 있으며 그것을 두려워하는 다이버는 없다. 오직 심연까지 가라앉아 본 이들만이 그토록 바라던 세계를 마주할 수 있다. 뒤를 돌아보아도 여전히 끝없이 푸르른, 그런 세상을.
수면 아래에는 언제나 닿을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이들이 있다. 심연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런 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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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유암센터 1층 접수 데스크 앞, 3년 전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은 나를 단박에 알아봤다. 그새 살이 좀 빠지고 목에 닿지 않도록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도 그랬다. 의아한 얼굴로 차트 기록을 몇 차례 클릭하던 직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이내 입술은 다시 살짝 올라간 모양으로 돌아왔지만, 눈에 담긴 빛은 여전했다. 완치 후 전이나 재발은 흔한 경우였으므로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상황 역시 유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나를 기억하는 건 아마도 3년 전 같은 자리에 앉아 비슷한 문답을 이어가던 때에 실신할 정도로 울었기 때문이겠지. 그때는 곧 죽을 사람처럼 누워있던 엄마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울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여전히 엄마의 과거 병력을 적어 넣어야 하는 칸은 한없이 모자랐으므로. “여긴 참 똑같다. 그치.” 엄마도 같은 날을 떠올리고 있는지 코를 훌쩍이며 부지런히 볼펜을 놀리는 내게 슬며시 물어왔다. 엄마는 내가 당신 때문에 우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이젠 그런 걸로 잔소리할 기운도 없는 건지 별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내가 이래서….” 로 시작하는 익숙한 반복을 흘려들으며 더 많은 눈물을 쏟아야 하는데, 엄마가 조용해서 나도 더 울 수가 없었다. 마지막 줄을 적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전보다 두세 줄 늘어 난 병명이 종이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었다. 엄마가 보지 못하도록 손을 움직이면서도 소용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구태여 읽지 않아도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겠지. 겪어봤다는 건 그런 거니까. 엄마는 꼭 봄에 아팠다. 새롭게 피는 것들이 쉬이 도드라지는 계절에 오는 끝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때마다 지겨울 정도로 우는 새벽을 보내야 했다. 눈물이 하도 쏟아져서, 도무지 멈추질 않아서 울면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흐르는 것들을 닦아가며 밀린 일을 하다 머쓱해하고, 다시 울기를 반복하다 보면 아침은 여지없이 밝아왔다. ‘죽고 싶어'가 ‘죽을 거야'로 바뀌는 그 시간도 흘렀다. 엄마가 아픈데도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시간은 흐른다는 것. 그리고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은 양 구는 나를 마주치는 것. 가장 잔인한 건 언제나 그런 종류였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늘 바쁘게 움직였다. 엄마와 함께, 아니면 엄마에게 무언가를 권하는 방식으로. 때로는 그것보다, 더 열심히 혼자. 엄마의 손을 잡은 채 몇 시간씩 황톳길을 걷고 병원에 있거나 퇴원한 엄마에게 아침저녁으로 전화하고 일기 쓰기를 제안하고…. 그 와중에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독립 서점을 열고 매일 거기로 출근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자조적인 웃음을 짓자, 제이는 내 앞에서 한 번도 짓지 않았던 표정을 했다. 입술을 일자로 구기는, 웃는 것도 찌푸리는 것도 아닌. 거기에 담긴 말을 읽어낼 수 없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분명하게 지나와서 알고 있는 시절의 얼굴인데도. 그러니까 나도 언젠가 꼭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을 텐데도 그랬다. 간호사의 표정을 보면서, 3년 전 이맘때와 제이까지 떠올리지 않을
- listener J
- 2026-07-31
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 미빈
- 2026-07-30
얼어붙은 호수의 경관은 새하얗고 텅 비어 보인다. 그러나 비었다는 것이 정말 텅 빈 것일까? 이 물음에서부터 김이듬 시인의 시집, 를 읽어볼 것이다. 여기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빈 방이 하나 있다고 치자.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우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방, 혹은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방을 보며 흔히 ‘빈’이라는 묘사를 붙인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다. 사물의 관점에서 다시 방을 보았을 때, 주름 지지 않은 이불과 고요한 침대, 먼지 쌓인 책상과 마룻바닥, 잘 개어진 옷과 닫힌 옷장 등 많은 물건이 들어찬 방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을 세계의 주체로 두고 본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권력을 잡고 있으며, 주류라고 칭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언어로 설명되며, 이때 인간 아닌 ‘그밖의 것’들은 ‘원래 없었던 것’ 같이 묻혀 버린다. ‘그밖의 것’들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를 주류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그 안에 남아 있던 비주류는 ‘있으나 없는 것’처럼 지워진다. 이 시집에서는 등장 인물이 ‘너’, ‘나’, ‘친구’ 혹은 일상적인 직업, 화자와 가까운 특징을 지닌 인물 정도에 그치는 여타 시집들에 비해 더 다양한 사회적 위치나 직업, 특징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한 재해의 상황들을 언급하며 그 속에서 피해를 입은 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고, 특정 사물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을 연상시키도록 한다. “폭풍”/“기근”/“역병”/“전쟁”, “동남아”에서 온 “가사도우미”, “생리대/초콜릿 바/담배/술”과 같이 값싼 물건과 생활 필수품을 훔쳐 곧 “감옥”으로 “떨어지”게 될 “도둑”, “사람”에게 죽은 “사람”과 “자기 혈육”에게 죽은 “가족”과 “마스크”가 “없”어 “승차를 거부”당한 “누추하게 젖은 사람”, “몽골인 노동자들”, “죽어 있”는 “식물”에서 떠오르는 방치된 사람들과 “태어났고 평범하게 성장했고 온순했으며 살해당한 소녀”와 “식물이 죽고 나서야” “그 식물의 이름을 알게 되”는 세상의 무관심함에 놓여 있는 사람들, “거리 곳곳의 무장군인들과 탱크”, “고독사”, 태어나
- 방백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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