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대중 앞에 놓인 카타르시스성 폭력-드라마 '참교육'을 중심으로

  • 작성자 송희찬
  • 작성일 2026-06-29
  • 조회수 681

대부분의 한국 고전 산문들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을 띄고 있다당장 홍길동전과 장화홍련전의 결말을 두고 비교해봐도 그렇다두 작품 모두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복을 받는 결말이다이러한 구성 방식과 결말은 한국 근대 이전의 소설들 속에서 주를 이뤘다그러나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는 한국 고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현재도 상업 소설인 웹소설상업 드라마상업 영화 등 대중적인 이야기 플롯에서 자주 등장한다이는 일종의 모티프다이런 모티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한다그중 인과응보권선징악이라는 모티프는 전 세대에 걸쳐 과거에서 현재까지 매체와 서술 방식을 변주하며 계속 나타난다특히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상업 드라마라는 이름으로 권선징악과 관련된 모티프가 자주 나타난다.

 

상업 드라마에서 권선징악인과응보를 보여주는 드라마 중 일부는 복수라는 장르를 내세우기도 한다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김순옥의 아내의 유혹’, ‘펜트하우스’, sbs 시리즈 드라마 모범택시’, ‘열혈사제’ 등을 들 수 있다이런 복수극도 개인에 이야기만을 하는 드라마와 개인을 넘어 사회까지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드라마로 나눌 수 있다이로 볼 때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복수로 그려진다고 볼 수 있다반면 모범택시’ 시리즈, ‘열혈사제’ 시리즈는 개인과 개인을 넘어 현실 사회 문제도 건드리는 복수극이다따라서 열혈사제와 모범택시’ 시리즈는 각종 사회 문제를 시리즈별로 이야기하여 그려낸다반면, ‘아내의 유혹은 구은재와 신애리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복수를 그려내고 있다.

 

이런 차이점은 각각 드라마의 결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악역인 신애리와 정교빈이 죽음으로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극이 마무리된다그러나 주인공인 구은재는 그들이 받은 벌을 보고도 행복해하지는 않는다구은재는 신애리에게 피해를 받은 피해자기도 하지만그녀에게 신애리는 친구이자 가족이기 때문이다그렇기에 복수의 성공이 결코 행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역으로 한때 악역이었던 애리를 용서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결말을 맺는다반면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 실현으로 복수를 진행하는 모범택시’ 시리즈와 같은 드라마는 무지개 운수라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집단이 사회 문제를 대표하는 사건을 해결하는 식으로 에피소드별 결말을 맺는다그 과정은 복수극과 복수 대행 서비스 안에 맞춰서 폭력적이고역지사지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해결된다그 과정에서 시청자는 악인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벌하는 모습을 보며 고양된 감정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하지만이런 카타르시스 안에는 사회정의라는 이름에 감춰진 폭력이 존재한다이를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참교육이다.

 

참교육은 본래참된 교육이라는 뜻으로 선생이나 어른이 진정으로 학생들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을 뜻한다현재까지도 교육 현장에서 교사들이 지향해야 하는 교육이 바로 참교육이다하지만현재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통시적이고 사회적으로 쓰이는 의미는 본래와 많이 달라졌다현재 이 단어가 쓰이는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선인이 악인을 폭력으로 응징할 때대중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카타르시스 장면이 나왔을 때 쓰인다즉 이는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본래의 의미를 잃어가며 응징으로 뜻이 좁혀졌다고 할 수 있다이는 곧 문맥에 의해 단어의 의미가 감염되었다라고 볼 수 있다특히 문맥의 감염 현상을 가속화 시킨 데에는 디지털 숏폼의 발전을 빼놓을 수 없다.

 

대표적으로 드라마 모범택시’ 시리즈는 복수 대행 서비스라는 단어를 앞세우며 홍보를 했다그 결과 모범택시’ 시리즈가 방영될수록 많은 숏폼에서 무지개운수 기사인 김도기가 악인들을 폭력으로 벌하는 장면을 참교육이라는 단어 안에 포장하여 자극적으로 시청자들에게 전해졌다이런 응징 장면이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였기에 이후 이런 숏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또한 이러 카타르시스를 대중이 원하기에 폭력을 참교육으로 감싸는 상업적 드라마 역시 늘어나기 시작했다그중 이런 현상의 고점을 찍은 것이 바로 넷플릭스의 드라마 참교육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참교육과 관련된 뉴스숏폼담론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그러던 중 현재 경기도 교육감 당선인인 안민석은 경기교육감 인수위원회 출범식에서 드라마 참교육을 보고 다음과 같은 평을 했다. “무너진 교권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한 드라마” 더불어 그는 지난 6월 13일 본인의 페이스북에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교권을 지키는 '참교육 시즌2'를 경기도에서 구현해봤으면 좋겠다.”는 이야기하며 교권 보호국 신설에 대한 공개토론을 제안했다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갈리고 있다이렇게 두 이유로 갈리는 이유는 드라마 참교육이 교육 현장의 현실을 보여준 드라마이면서 대중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복수극오락 판타지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우선 드라마 참교육이 판타지 드라마이자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보여주는 것을 중점으로 두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을이야기할 수 있다첫째로는 본 작품에서 사건을 이끌고 가는 교권보호국이다교권보호국이란 드라마 속 교권 침해를 방지하고교사와 학생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생긴 교육부 산하 기구다이들은 교권 수호를 위한 활동을 위해 다양한 권한을 가진다. 드라마 속 교권보호국 설치법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1(설치 및 목적)

교권침해 현장에 대한 감독 및 계도를 목적으로 하며 교육부 장관 직속기관에 속한다.

5(감독관 임명)

현장감독관은 별도의 자격유무 상관없이 교육부장관의 권한으로 임명한다

8(감독관의 임무 수행 권한)

감독관의 현장 지도 및 사건조사를 위한 모든 행위는 타 기관과 법령으로부터 제약받지 않는다.

 

우선 5조를 보겠다. 5조에는 현장감독관은 별도의 자격유무 상관없이 교육부 장관의 권한으로 임명한다는 규정이다이 부분은 감독관과 관련되어 부정부패가 일어날 수 있으며 교육과 관련 없는 직종의 사람이 감독관이 될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드라마 속에서는 부정부패와 관련된 이야기는 따로 나오지는 않았지만교육계 직종이 아닌 사람이 교권을 보호하고 이를 위해 가해 학생들의 교육을 진행하는 경우는 드라마에서 계속 보인다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드라마의 두 축 중 하나인 임한림이다.

 

임한림은 드라마 속에서 특전사 출신이라는 것만이 강조됐다그녀의 교육방식은 청소년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교육 방식이 아닌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전사 방식의 교육과 가까웠다그녀는 나화진과 함께 폭력을 사용하여 교육했으며한 사람의 잘못을 집단 전체의 잘못처럼 보여지는 연대 책임 형식의 처벌 교육을 했다이는 전형적인 교육의 방식이 아니다이건 폭력적 교화의 방식이다이는 임한림과 나화진 같이 교육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교육자교육부 산하 감독관이라는 명분으로 교육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뜻하며 옳바른 교육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는 명백히 교권을 보호하면서 학생의 공교육을 수호한다는 것과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이로인해 교권 보호국 설치법은 진정한 교육을 실행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로 볼 조항은 8조다. 8조에 따르면 교권보호국이 교권보호와 교육을 위해 행해지는 그 어떤 행위도 타 기관에 법령으로부터 제약받지 않는다고 나온다이 말은 교권 보호와 교육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해져도 된다는 것이다그렇기에 그들이 행하는 폭력사생활 침해 등은 그 어떤 법적 책임도 받지 않는다실제 드라마에서는 가해 학생들에 대하여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응징할 때 폭력을 사용하고피해 선생님을 돕고 가해자를 벌하기 위해서 해킹과 사생활 침해를 한다. 가해자들을 벌하기 위해서 또 교육하기 위해서 하는 범법적인 행위라지만이를 행정기관인 경찰이 아닌 교육부 산하 기구에서 한다는 것은 법치주의를 위협하며권력분립을 위협하는 것이다그렇기에 교권보호국은 위헌을 띄는 기구이기에 실제로 구현될 수 없는 판타지적 요소이며이로 인해 진행되는 드라마 참교육은 단순 오락과 카타르시스를 중요시하는 복수극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참교육이라는 제목이 현실에서 쓰이는 참된 교육과 멀기 때문이다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본래 참교육은 참된 교육이라는 뜻으로 쓰였다또한 현재 학교 교육 현장에서도 참된 교육을 참교육이라 쓰이며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에서도 본래 의미에 참교육을 슬로건으로 가지고 있다반면 드라마 속 참교육은 현재 대중적으로 쓰이는 의미에 가깝다. 그렇기에 드라마에서는 악인을 벌하면 학교에 평화가 찾아오는 식의 연출이 나온다이를 위해 구운하이택 고등학교 가해자 학생들이 개과천선 하는 것 같은 묘사가 대표적이다이는 교권 보호국의 교육방식이 맞다는 것을 시청자에게 보여주는 장치로도 쓰였다하지만 이는 학교 현장의 복잡한 문제를 단선적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문제를 보여준다실제로 학생의 문제는 학생으로만 끝나지 않고학부모선생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사회 모두에 걸쳐 나타난다그렇기에 한 사람을 폭력적으로 응징하는 교육방식이 결코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동시에 참된 교육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없다또한 이런 단선적인 해결방식은 피해자에게 행해지는 2차 가해로 이어지며이는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을 재생산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드라마 참교육은 참된 교육이라는 이면 아래에 숨겨진 폭력적인 카타르시스를 그럴싸하게 현실과 현재라는 상황에 감싸 폭력을 정당화하는 드라마이며허구성이 강한 대중 픽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다왜 이렇게 사람들이 허구성이 강하고폭력적인 카타르시스에 열광하는지와 참교육의 의미가 왜 이렇게 변질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확인해봐야 한다.

 

언어 의미의 특징 중에는 사회에 특징을 부여하는 사회성과 사회적 심리를 바탕으로 탄생하는 심리성이 있다이 두 특징은 의미 변화에서 대부분 동시에 나타난다이런 관점에서 참교육이라는 단어와 드라마를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 학교 폭력촉법소년 그리고 교권 침해가 번번이 일어나고이에 대한 처벌이 피해자나 교육자 그리고 대한민국 사회를 살아가는 국민에게 완전히 다가오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렇기에 참교육과 같은 드라마가 계속 나오는 것이며,  이와 관련된 담론이 계속 나오는 이유가 된다.

 

사회는 언어를 만들고언어는 현대인들의 욕망을 담는 모티프의 모티브가 된다그렇기에 드라마 참교육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회 문제는 현실에 와닿으며이로써 드라마의 의의는 다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며 잘 만들어진 드라마라고도 이야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를 단기간 안에 현실로 가지고 온다면 문제가 된다드라마는 사회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드라마가 사회는 될 수 없다드라마 속 카타르시스를 이루는 폭력과 응징이 현실로 나오게 된다면그것은 폭력의 재생산으로 이루어진다따라서 우리는 대중 산업 문화를 볼 때 우리가 너무 폭력적인 카타르시스를 원하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동시에 우리가 원하는 욕망이 무엇이며현실에서 이 욕망을 어떻게 정당한 방식으로 바꿀 수 있는지 생각해 보며 사회를 바라보고 문화를 바라봐야 한다그것이 참교육이 말하고 싶은 불편한 현실이 아닐까.


추천 콘텐츠

위성

혜유암센터 1층 접수 데스크 앞, 3년 전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은 나를 단박에 알아봤다. 그새 살이 좀 빠지고 목에 닿지 않도록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도 그랬다. 의아한 얼굴로 차트 기록을 몇 차례 클릭하던 직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이내 입술은 다시 살짝 올라간 모양으로 돌아왔지만, 눈에 담긴 빛은 여전했다. 완치 후 전이나 재발은 흔한 경우였으므로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상황 역시 유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나를 기억하는 건 아마도 3년 전 같은 자리에 앉아 비슷한 문답을 이어가던 때에 실신할 정도로 울었기 때문이겠지. 그때는 곧 죽을 사람처럼 누워있던 엄마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울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여전히 엄마의 과거 병력을 적어 넣어야 하는 칸은 한없이 모자랐으므로. “여긴 참 똑같다. 그치.” 엄마도 같은 날을 떠올리고 있는지 코를 훌쩍이며 부지런히 볼펜을 놀리는 내게 슬며시 물어왔다. 엄마는 내가 당신 때문에 우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이젠 그런 걸로 잔소리할 기운도 없는 건지 별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내가 이래서….” 로 시작하는 익숙한 반복을 흘려들으며 더 많은 눈물을 쏟아야 하는데, 엄마가 조용해서 나도 더 울 수가 없었다. 마지막 줄을 적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전보다 두세 줄 늘어 난 병명이 종이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었다. 엄마가 보지 못하도록 손을 움직이면서도 소용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구태여 읽지 않아도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겠지. 겪어봤다는 건 그런 거니까. 엄마는 꼭 봄에 아팠다. 새롭게 피는 것들이 쉬이 도드라지는 계절에 오는 끝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때마다 지겨울 정도로 우는 새벽을 보내야 했다. 눈물이 하도 쏟아져서, 도무지 멈추질 않아서 울면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흐르는 것들을 닦아가며 밀린 일을 하다 머쓱해하고, 다시 울기를 반복하다 보면 아침은 여지없이 밝아왔다. ‘죽고 싶어'가 ‘죽을 거야'로 바뀌는 그 시간도 흘렀다. 엄마가 아픈데도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시간은 흐른다는 것. 그리고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은 양 구는 나를 마주치는 것. 가장 잔인한 건 언제나 그런 종류였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늘 바쁘게 움직였다. 엄마와 함께, 아니면 엄마에게 무언가를 권하는 방식으로. 때로는 그것보다, 더 열심히 혼자. 엄마의 손을 잡은 채 몇 시간씩 황톳길을 걷고 병원에 있거나 퇴원한 엄마에게 아침저녁으로 전화하고 일기 쓰기를 제안하고…. 그 와중에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독립 서점을 열고 매일 거기로 출근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자조적인 웃음을 짓자, 제이는 내 앞에서 한 번도 짓지 않았던 표정을 했다. 입술을 일자로 구기는, 웃는 것도 찌푸리는 것도 아닌. 거기에 담긴 말을 읽어낼 수 없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분명하게 지나와서 알고 있는 시절의 얼굴인데도. 그러니까 나도 언젠가 꼭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을 텐데도 그랬다. 간호사의 표정을 보면서, 3년 전 이맘때와 제이까지 떠올리지 않을

  • listener J
  • 2026-07-31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 대상을 환원하지 않는 시선에 대하여

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 미빈
  • 2026-07-30
미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랑했다는 말과 같다

얼어붙은 호수의 경관은 새하얗고 텅 비어 보인다. 그러나 비었다는 것이 정말 텅 빈 것일까? 이 물음에서부터 김이듬 시인의 시집, 를 읽어볼 것이다. 여기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빈 방이 하나 있다고 치자.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우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방, 혹은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방을 보며 흔히 ‘빈’이라는 묘사를 붙인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다. 사물의 관점에서 다시 방을 보았을 때, 주름 지지 않은 이불과 고요한 침대, 먼지 쌓인 책상과 마룻바닥, 잘 개어진 옷과 닫힌 옷장 등 많은 물건이 들어찬 방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을 세계의 주체로 두고 본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권력을 잡고 있으며, 주류라고 칭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언어로 설명되며, 이때 인간 아닌 ‘그밖의 것’들은 ‘원래 없었던 것’ 같이 묻혀 버린다. ‘그밖의 것’들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를 주류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그 안에 남아 있던 비주류는 ‘있으나 없는 것’처럼 지워진다. 이 시집에서는 등장 인물이 ‘너’, ‘나’, ‘친구’ 혹은 일상적인 직업, 화자와 가까운 특징을 지닌 인물 정도에 그치는 여타 시집들에 비해 더 다양한 사회적 위치나 직업, 특징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한 재해의 상황들을 언급하며 그 속에서 피해를 입은 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고, 특정 사물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을 연상시키도록 한다. “폭풍”/“기근”/“역병”/“전쟁”, “동남아”에서 온 “가사도우미”, “생리대/초콜릿 바/담배/술”과 같이 값싼 물건과 생활 필수품을 훔쳐 곧 “감옥”으로 “떨어지”게 될 “도둑”, “사람”에게 죽은 “사람”과 “자기 혈육”에게 죽은 “가족”과 “마스크”가 “없”어 “승차를 거부”당한 “누추하게 젖은 사람”, “몽골인 노동자들”, “죽어 있”는 “식물”에서 떠오르는 방치된 사람들과 “태어났고 평범하게 성장했고 온순했으며 살해당한 소녀”와 “식물이 죽고 나서야” “그 식물의 이름을 알게 되”는 세상의 무관심함에 놓여 있는 사람들, “거리 곳곳의 무장군인들과 탱크”, “고독사”, 태어나

  • 방백
  • 2026-07-30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 방백
    공감합니다

    드라마는 사회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만, 드라마가 사회가 될 수는 없다는 마지막 문장이 정말 정말 좋다. 이 드라마가 확산된 뒤 마치 잘못을 저지르면 개인의 사적 제지(폭력)이 가해질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옅은 안개처럼 조금씩 퍼지는 것 같아 마음이 뒤숭숭했거든. 게다가 그런 우려를 충분히 할 수 있고, 고려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정당화하는 드라마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건 자신의 권위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것으로 느껴져. 참교육이라는 웹툰의 원작 자체에도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드라마화 된다고 했을 당시 정말 말이 많았고, 지금도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이 갈리고 있지. 네가 쓴 글이 현 시점 우리에게 꼭 필요한 비평이라고 생각해. 물론 드라마, 픽션은 말 그대로 픽션인 만큼 어떤 설정을 사용해도 상관 없는 것처럼 보여. 하지만 네가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재미(카타르시스)를 위해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든 아무 문제 없는 걸까? 난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문화예술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명목 아래 아무런 비판을 피해갈 수 없는 건 아니야. 하나의 작품이 사회에 일으킬 파장을 창작자가 충분히 고려해야만 하지. ’교육‘이라는 주제는 사람을 바르게 성장시킨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는데, 현재 통용적으로 사용되는 ’참교육‘은 성장과 교화라는 이름을 달고선 폭력으로 사람들을 응징하고 있어. 벌을 주는 거지. 이것을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법과 감옥이 해야 할 역할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월권하는 행위 같아. 더불어 잘못된 일이 아님에도 반드시 벌(폭력)을 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극단적으로 일을 해결해버린다는 점도 잘못되었지.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이번 참교육 드라마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에 더 빠르게 넓게 확산되는 것 같아 정말 안타까워. ‘교육’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 교육과 가장 가까이 있는 청소년들에게 비판받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주는 것 같아. 글틴에서 활동하는 청소년들과 글틴의 글을 읽는 사람들만큼이라도 네 비평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ㅎㅎ 좋은 글 고마워.

    • 2026-07-20 11:04:44
    방백 공감합니다
    0 / 1500
    • 송희찬

      방백 항상 고마워^.^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앞으로도 노력할게~^.^~

      • 2026-07-20 10:37:50
      송희찬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