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읽기
- 작성자 드시코
- 작성일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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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행동은 글로 적힐 수 있다. 혹은 글로 적히지 않을 수도 있다.
오렌지를 나무에서 딴 후 껍질을 까 입에 넣는다. 씹는다. 이것은 한 개인의 행위로 볼 수 있다. 주어가 없어도 문장이 된다.
규모가 큰 것을 적거나 역사를 기술할 때에는 반드시 관념적이게 되는 것일까? 예컨대 역사책들은 주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혹은 'OO국이 쇠퇴했다', '성장했다'. '번영을 누렸다' 라고 쓰지만 도대체 누가 번영을 누렸다는 것인가.. 한 나라 안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쇠퇴'라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눈부시게 발전했다'라고 쓴다면 그 '눈부신' 밝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한 거대한 공동체의 일대기를 쓸 때에 (그 공동체가 실은 개인들의 합이란 것을 감안하지 않고 주로 쓰인다.) 이런 '개인'의 행위를 서술하는 데에 적합한 단어들 말고 공동체 전용 단어는 없다. A나라가 번영했다는 사실은 어떤 한 개인( 아마 'A나라' 라는 이름을 가진)이 번영했다는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리고 쓰기도 어렵다. A나라에 세 사람이 살고 있었다면 세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씩 (동시에 세 줄을 읽을 순 없으니 순서대로) 써야 할 것이고,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만연한 의인화는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가? 먼저 이것은 그 공동체가 실재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 축구 팀은 단지 같은 유니폼을 입기로 약속한 것일 뿐이다. 만약 'A축구팀이 승리를 차지했다', 'A축구팀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라고 쓴다면 언어의 힘은 읽는 이에게 혹은 듣는 이에게 그 팀에 속해 있는 선수들을 'A축구팀'으로 단순화하게 한다. '우리 반', '우리 학교', '우리 나라'도 같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나아가다 보면 (도대체 어디로 나는 '나아가고' 있단 말인가? 나는 강물 위를 떠다니는 나룻 사공이란 말인가?) '우리'라는 말마저 부정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정말 그러하다. 이것은 약속 혹은 확인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그들' 혹은 '너와 나' 같은 다른 말로 바뀔 수 있다.
언어는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과 어떤 것을 구별지어야만 한다. 두 원숭이가 언어를 처음 만드는 선사 시대 환경을 가정해 본다면 그것을 주로 야생 동물이나 식물의 '특성'을 묘사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성별' 그리고 대화의 주가 되는 '사람'과 '그 외'의 구별이다. 고유 명사는 제외하고 형용사를 보면, 도마뱀은 '빠르다', 거북이는 '느리다', 저 돌은 '크다'. 나무가 '높다' 등이 있다. 성격에 관련된 것도 그러하다. '교활한', '나쁜', '친절한', '아름다운' 등도 진화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유행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렇듯 언어가 단지 목청이 내는 소리의 조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유행하는 소리'는 같은 집단임을 확인하는 신호로 보인다. 오늘날 유행하는 '야르' (이것의 의미는 알지 못한다.) 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고 모든 단어들도 그렇다. 단어는 관계 속에서 상대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공동체 행위의 서술로 돌아가 보면, 문제는 이때의 서술이 매우 관념적이게 된다는 것이다. '눈부시게 발전한 A나라'라고 쓴다면 그 '눈부심'이란 어느 정도의 밝기이고 '발전'이라는 말은 어떤 행위를 포함하는가? 발전이라는 말은 몹시 모호하다. 발전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발전'은 '시간이 흐름'과 '달라짐', '더 나아짐' 이 세 의미를 '합친' 말로 보인다. 의미가 분산되기에 명확한 행위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언어는 체화되는 듯하다. '거미다.'라고 했을 때 '강아지가 어디에 있어?' 라고 반문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미'라는 단어가 주는 소리 그리고 글자의 모양은 뇌가 이미 기억하는 것일 테고 그것과 관련된 일생의 모든 기억(스파이더맨, 타란툴라, 할로윈, 징그러움, 벌레, 에프킬라, 휴지, 잡아야 해)이 그 말에 '응축'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이 '에프킬라'의 의미를 가질지, (나는 방구석에서 거미를 보았다.) 혹은 신화적인 '스파이더맨'의 의미를 가질지, (P는 거미에게 물렸고 다음날 자신의 신체 능력이 향상된 것을 느꼈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낼지(잭 오 랜턴이 가득한 어두운 들판에서 거미들이 꿈틀거렸다)는 앞뒤 단어들과의 조합, 맥락에 달려 있다.
'문학' 은 단어의 재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 단어를 새로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야야호한 후 뱌고우에서 뫄의쳐누를 눤 후 재메재하였다.' 같은 것은 절창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이것에는 (쓴 사람이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했을지라도) 공감 가능한 의미가 없다. 글쓴이가 '해석 용지'를 주어 해석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문학에서는 현재 '사건의 전개' 혹은 기록을 넘어 발음되는 느낌 등 다른 요소들도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는 자주 시도되지 않을 것이다.
문학에서는 여러 문장들이 늘어놓아져 있고, 단어는 단어와 모여 맥락을 형성하고 심상이 된다. 그 심상은 다른 문장과 만나 또 다른 맥락을 형성하고, 이것이 이어진다. 단어가 만들어 내는 경우의 수는 몹시 많다. 따라서 세밀하게 쓸 수록 심상은 선명해지고 모습은 구체화된다. 반면에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그 자체만 이용한다면 무수히 많은 가능성 앞에 놓이게 된다. 사실상 '사랑'과 '하다'라는 두 말을 합친 '사랑해'는 전 지구인이 언제나 사용 가능하다. '나는 당신을 아주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어요.'는 어느 연서에나 사용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2025년 7월 16일 당신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사랑하기 시작했어요.'라고 쓴다면 구체화되어, 다른 편지에 사용할 수 없게 된다.
하늘이 보인다.
이때 하늘은 노을이 지고 있을 수도 있고 어두운 밤일 수도 있다. '하늘'이라는 단어가 이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보인다. 어두컴컴한데 비행기 불빛 멀리서 반짝거린다.
이렇게 쓰면 더 이상 노을이 지고 있을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글을 쓸 때는 마치 이렇게 해야 하는 것 같다. 그림을 그리듯 세밀한 묘사가 필요한 부분은 많이 쓰고 대기 원근법처럼 모호한 부분은 대강 몇 문장으로 쓴다. 그러나 이 또한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른다. 이 사실은 나를 밤하늘 아래 바다 한가운데에 떠돌게 한다.
그렇다면 독자 개개인의 해석은 어떻게 이 심상 사이에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만약 이런 글이 있다면 독자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이 옆 사람에게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은 떠나 버렸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제시되지 않은 정보가 너무 많다. '사람'이라는 다의적인 단어로 어떻게든 가치 판단을 하려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있었다 착한 사람이 옆 사람에게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은 듣지도 않고 떠나 버렸다.'
이때는 '다른 사람'을 (조금 작위적이지만) 비판할 여지가 조금 생긴다. 그러나 여전히 온당치 못하다. 착한 사람이 무슨 말을 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있었다 언제나 선행을 하는 착한 사람이 말했다. '난 널 사랑해.' 다른 사람은 그 얼굴에 침을 뱉고 떠나 버렸다. 착한 사람은 슬퍼서 울었다.'
이때 착한 사람의 편을 들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침을 뱉는' 행위는 모욕적이다. '울었다'라는 말은 동정심을 유발한다. 하지만 '여전히' 착한 사람이 정말 착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이 예시에서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을 사실상 작가가 '빚는' 사실에 대해 어떤 아리송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작가가 그 글을 쓰지 않았다면 이야기 속 인물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부적 가치 판단(독서 토론)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어라, 이게 무슨 말이지.
위 말은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등장 인물에게 읽는 이는 자신을 이입하거나 공감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단어는 단어 그 자체로 읽히지 않는다. '국가가 눈부시게 발전한다.'라는 것은 납득이 된다. 그런 개인적인 관념 속에서는 영토가 유기체처럼 커지거나 반짝 빛나는 알 수 없는 형상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을 '납득'이라고 말하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간다. 이와 같은 모호한 읽기의 방식 때문에 이런 문장도 가능해진다.
'아무도 없는데 두 사람이 말을 한다.'
이것은 불가능한 문장인데 쓰였다. 이럴 때 이 두 사람을 '투명인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문장을 쓴 사람은 두 사람이 '투명인간'이라고 쓰지 않았다. 독자가 부족한 정보를 '납득 가능한' 것으로 보완하기 위해 자신의 가정을 덧붙인 것이다. 독자는 사실상,
'아무도 없는데 두 사람이 말을 한다. 사실 두 사람은 투명인간이었고 (화자의 눈에) 그래서 안 보였다.' 라는 문장을 읽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이렇게 다의적인 '문학'이라는 분야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자신의 삶에 투영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인간의 심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하다.
'눈부시게 발전했다'라는 문장을 한 글에서 읽고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생각하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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