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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랑했다는 말과 같다

  • 작성자 방백
  • 작성일 2026-07-30
  • 조회수 657

얼어붙은 호수의 경관은 새하얗고 텅 비어 보인다. 그러나 비었다는 것이 정말 텅 빈 것일까? 이 물음에서부터 김이듬 시인의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를 읽어볼 것이다.


 여기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빈 방이 하나 있다고 치자.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우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방, 혹은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방을 보며 흔히 ‘빈’이라는 묘사를 붙인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다. 사물의 관점에서 다시 방을 보았을 때, 주름 지지 않은 이불과 고요한 침대, 먼지 쌓인 책상과 마룻바닥, 잘 개어진 옷과 닫힌 옷장 등 많은 물건이 들어찬 방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을 세계의 주체로 두고 본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권력을 잡고 있으며, 주류라고 칭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언어로 설명되며, 이때 인간 아닌 ‘그밖의 것’들은 ‘원래 없었던 것’ 같이 묻혀 버린다. ‘그밖의 것’들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를 주류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그 안에 남아 있던 비주류는 ‘있으나 없는 것’처럼 지워진다.

 이 시집에서는 등장 인물이 ‘너’, ‘나’, ‘친구’ 혹은 일상적인 직업, 화자와 가까운 특징을 지닌 인물 정도에 그치는 여타 시집들에 비해 더 다양한 사회적 위치나 직업, 특징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한 재해의 상황들을 언급하며 그 속에서 피해를 입은 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고, 특정 사물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을 연상시키도록 한다.

  “폭풍”/“기근”/“역병”/“전쟁”, “동남아”에서 온 “가사도우미”, “생리대/초콜릿 바/담배/술”과 같이 값싼 물건과 생활 필수품을 훔쳐 곧 “감옥”으로 “떨어지”게 될 “도둑”, “사람”에게 죽은 “사람”과 “자기 혈육”에게 죽은 “가족”과 “마스크”가 “없”어 “승차를 거부”당한 “누추하게 젖은 사람”, “몽골인 노동자들”, “죽어 있”는 “식물”에서 떠오르는 방치된 사람들과 “태어났고 평범하게 성장했고 온순했으며 살해당한 소녀”와 “식물이 죽고 나서야” “그 식물의 이름을 알게 되”는 세상의 무관심함에 놓여 있는 사람들, “거리 곳곳의 무장군인들과 탱크”, “고독사”, 태어나 자라기만 해도 “천벌 받아도 싼 존재”처럼 목이 베어지는 풀과 “애지중지하는 화초와 나무에게 피해만 끼치는” “잡초 같다는 얘길 듣곤”하는 “너”와 “숨을 데가 없어”져 “새”에게 쪼아 먹히는 “지렁이”의 처지와 같은 사람들, “지금이 가장 불행한 시절일 것도 같은” “노인”들, “가자지구에 억류 중인 이스라엘 인질”이나 “초강진 쓰나미에 침수된 항구도시”나 “거대한 화산재 기둥”과 “폭우”/“산사태”로 피해 본 지역, 화재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 “잿더미와 폐기물로 남은 생활을 걱정”하는 사람, “자연에는 암수 외에도 성이 있다”는 말처럼 인간의 단어인 “남자”와 “여자”에 속할 수 없는 간성의 사람들, “반지하”에 사는 “너”, “집시”와 같은 사람, “극단적 선택을 앞둔 사람들”, “정교수”와 “부교수”가 아니라서 “아버지 장례식”에 “화환”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직업의 차이만으로도 사람들의 인정에 기댈 수 없어 냉대받는 “겸임교수나 강사”같은 사람들, “아픈 사람들”과 “암에 걸린 지인”과 “위궤양을 앓는 연극배우”와 “낙태 수술하고 온 아가씨”, “딸이 도망 중에 적에게 붙잡혀 팔려갈 위기”에서는 “딸을 죽이”는 게 더 낫다고 믿는 “아버지”와 자신의 “빚 때문에 남은 가족이 고통 속에 살게 될까 봐 걱정되어 가족을 죽이”는 사람과 “다리와 등, 머리, 눈, 손, 신장, 자궁, 그리고 혀까지 망가”졌음에도 “산 사람은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그럼에도, 세상 끝까지 몰려 있는 것 같음에도 아직 “사랑하는” 사람이 “도망치”기를, 죽지 않고 죽이지 않고 삶을 더 걸어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시집 안에 있다.*

 위와 같이 시집에서 다루는, 세상의 관점에서 ‘비주류’인 이들, 설 자리가 없는 이들을 이 비평에서 사회적 소수자(사회적 약자)라고 통칭하고자 한다.

 사회적 소수자를 칭할 때 소수자는 단순 숫자의 적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현 시대의 권력에서 밀려나 있으며, 차별적 대우를 받는 이들을 뜻한다. 세상의 관점에서 밀려나 있는 이들, 주류의 관점에서 보이지 않는 이들, ‘원래 없었던 것’ 같은 이들을 말하는 것이 이 시집이다.



  • 1.‘얼어붙은 호수’ 지나가기

      

 시집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며 설명하기 위해서 가장 마지막으로 수록된 시편인 <입동 무렵>을 먼저 살펴보려고 한다.


 폐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 년 중 며칠이라도


 문을

 닫아걸고 싶었을 것이다

 호수는


 수면이 온통 물이라서

 비가 오면 비를 받고

 바람 불면 물결치기 바빴다

 빵 부스러기나 쓰레기를 던져 넣어도 막을 수 없었다

 첨벙첨벙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새와 구름과 측백나무까지

 사방에서 투신하는 그것들을 사랑했다

 단지 얼비치는 그림자인 줄 모르고

 내부는 언제나 번잡했다


 찬란했던 수련 군락도 다정했던 청둥오리떼도 한때였다


 시에서 “호수”는 주류의 세상에서 밀려난 것들이 들어오는 외곽의 세상이자, ‘너’의 “내면”이다. “수면이 온통 문이라서”라는 말과 같이 이 호수의 표면은 물로 이뤄져 있기에, 누구나 들어오기 쉬운 ‘열린 문’과 같다. 하지만 화자는 이 ‘열린 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며, 오히려 “호수는” “폐쇄하고 싶었을 것이다/일년 중 며칠이라도” “문을/닫아걸고 싶었을 것이다”라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호수에는 “비”가 오고, “바람” 불고, “빵 부스러기”나 “쓰레기”가 던져져도 “막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호수 안에 들어오고, “새와 구름과 측백나무”까지 몸을 던진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밀려난 이 존재들은 “투신”하듯 ‘너’의 “내면”에 들어와 박히고 때문에 “호수”는 언제나 평온하지 못하며 “물결치기 바빴”다.

 이렇게 밀려난 존재들, 사회적 소수자들은 사실 ‘너’의 삶에서 ‘너’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은 아니다. 우리가 나 아닌 사회적 약자들의 소식을 어딘가에서 “다큐멘터리”로(<이 세상에 없는 것>), “뉴스”로(<에튀드>), 입담으로(<에튀드> 中 “할머니가 말한다/전쟁 중에서 결혼하고 피난 중에도 아기를 낳았다고”) 전해듣는 것처럼. 이 존재들은 ‘너’에게 “얼비치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야기, 실제 존재가 아닌 “그림자”일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림자라도 ‘너’의 내부는 “언제나 번잡”해진다. “한때” “찬란했던 수련 군락”과 “다정했던 청둥오리떼”의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은 사라진 지 오래며, ‘너’는 외로운 “그림자”들을 너무 많이 마주했고 그것들을 ‘너’ 자신 안에 모두 담았다. 

 해당 시가 시집의 마지막 시편인 것을 고려했을 때, 시에서 말하는 ‘너’는 곧 김이듬 시인이자, 독자이고, 시집에 등장했던 시의 상황을 모두 겪은 화자라고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렇기에 호수에 던져지는 것들과, 비치는 그림자들은 세상에서 비주류이고, 방치되고,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사회적 약자들인 것이다. 


 문득 호수는 고마웠을 것이다

 몰아닥친 한파가


 그날 밤 호수는 얼어붙었다

 이튿날 폭설까지 쏟아져 호수는 새하얗게 뒤덮였다


 바깥에서는 전혀 호수 내부가 보이지 않았을 때

 호수는 투명하게 내면을 응시하는 듯했다


 비로소 무문관이 되어

 자기 안에 서식하는 침묵을 보았다

 스스로 수질을 살폈고

 시꺼매진 바닥에 기겁했다


  세상의 어둡고 슬픈 면을 오래 바라보며 너무 괴로워한 사람은 감정의 과부화를 막기 위해 무감각해지기도 한다. ‘너’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몰아닥친 “한파”에 “고마”워하며, 수면의 ‘열린 문’을 얼리고, 그 위에 호수가 있지 않았던 것처럼 ”새하얗게 뒤덮“는다. 그 모습은 세상의 이면에 상처받아 스스로의 내면을 걸어 잠그는 사람, 혹은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세상과 자신의 연결을 단절했을 때 이를 다행이라 여기는 상처 입은 사람 같다. 하지만 ‘너’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 세상의 “그림자”까지 예민하게 감각하던 시선은 바깥으로 향한 “문”이 꽝꽝 얼어 닫힌 순간, 자신의 내면인 “호수”로 향하고, 그 안을 “응시”할 수 있게 된다. 미처 말하지 못한, 세상이 들어주는 목소리가 되지 못했던, 호수 아래 가라앉은 비주류의 이야기들은 “침묵”으로 차곡차곡 쌓여 “시꺼매진 바닥”과 “기겁”스러운 “수질”로 썩어갔다. 

 삶 속에서 우리는 세상의 슬프고, 외롭고, 방치된 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접한다. 그것을 “무신경”(<봄날 정경>)하게 여기거나 한 번 듣고 쉽게 잊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를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고 깊이 생각하게 되는 사람도 존재한다. ‘너’는 세상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럴 수밖에 없는 후자의 사람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괴로웠다. 하지만 반강제로 문이 닫힐 때, 그는 타인을 “살폈”던 다정한 시선을 스스로에게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다


 걸어왔다

 너는

 저만치 호수를 밟고


 그는 많은 일을 겪었지만,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림자”와 “얼어붙”은 “호수”에 얽매여 멈춰서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직시했고, 그 슬픈 내면의 호수를 그저, 걸어왔다.

 그것은 어떻게 이성적으로, 효율적으로, 요령껏 한 일이 아니다. “기억나지 않”을(<입동 무렵>) 정도로 힘들게. 하얗게 “잊어”버릴(<봄날 정경>) 정도로 묵묵하게 그냥, 걸어온 것이다. <봄날 정경>에서 “숲”과 “마을”이 “불타는” 힘든 상황을 경험한 뒤,  “삶을 각오하지 않”고서도 살아가는 화자처럼 말이다. 

 삶을 그저 걸어가는 태도는 <동경 게스트하우스>에서도 나타난다. “문 앞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던 노인”이 문득 화자에게 묻는다. “이봐, 여길 나가면 어디로 갈 건가?” 그 대답에 화자는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저는 갈 데가 있습니다”라 하며 이 너머를 기약한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의심하면서도 살아가고 있다.

 그런 시편들을 지나, 마지막 시 <입동 무렵>에 선 ‘너’가 보인다. 썩은 바닥의 호수와, 바깥으로 열린 문을 걸어 잠그는 겨울의 “폭설”을 “저만치 밟고”서, 또 다른 방식으로 “너는” ‘너’인 채 “걸어왔”다.

 김이듬 시인은 이렇듯 삶을 각오하지 않고,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살아가야 하는 비주류의 사람들, 사회적 소수자들을 바라본다. 그들과 같은 위치의 시선을 보내며 그들의 삶을 담담히 써내리고 있다. 



     2. ‘끝에서’ 시작하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의식주 중 하나인 주거, 집. 집은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이며,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든든한 “피난처”이자(<불탄 집 아래>)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준다. 단순 몸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넘어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아 주는 것이다.

 3부에서 전반적으로 등장하는 “집”과 집이 “불탄”다는 이미지는 사전적 의미의 화재민 뿐만 아니라 사회의 관심 안에 속하지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며, 마음 둘 곳 없는 사람들의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1, 2, 4부에 비해 3부에서는 노골적으로 피해 입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이미지를 그려 가기 때문이다. 

 1, 2, 4부에서는 부정적 이미지가 3부에 비해 적으며, 나타나는 부정적 이미지들도 대체로, 화자의 감정과 깊이 이어지지 못하는 등 시의 지배적인 정서를 휘어잡진 못한다. 1부의 <에튀드>에선 “폭풍과 기근, 역병”이 등장하지만 “아무것도 깨지지 않았다”고 하며 부정적 이미지가 금방 사그라든다. “전쟁”, “피난” 등의 단어 이후에도 바로 “결혼”과 “아기를 낳았”다는 말, “살아 있으면 만난다”는 등의 미래를 기약하는 밝은 표현이 뒤따른다.


 리앤: 너무 귀엽지 않니? 쪼끄맣고 말라서 귀여워. 마닐라에서 왔대.

 조: 일은 잘해? 귀엽긴 하다.

 제이든: 쉿, 듣겠다.

 리앤: 쟤는 한국말 전혀 몰라. 그래서 편하잖아. 맘대로 얘기해도 돼.


 (......)


 일터에서 너는 영어만 쓴다. 너는 편하고 귀여워야 하니까.


 (......)


 다소 종속적이며 위협적이지 않은 대상에게도 “아, 귀여워” 그런다고. 내가 어디서 읽은 내용을 들려줬다.


 -귀여운 여인 中


 “마닐라”에서 온 “가사도우미”인 “너”가 겪는, 은근한 무시와 미묘한 평가의 불쾌함 또한 ‘너’의 이야기로 그칠 뿐. 화자는 그것을 직접 체험하거나 진심으로 공감하진 못한다.

 2부의 첫 시인 <첫눈은 매년 첫눈이 된다> 또한 그렇다. ‘나’의 “가방 안에는 새 마스크 한 장이 있”었음에도 화자는 “그것을 얼른 꺼내어” “승차를 거부” 당한 “그에게 주지 못”한다. <풀은 노래한다>의 “제초”되는 “풀”과 “잡초 같다는 얘길 듣곤”하는 “너”, “숨을 데가 없어”져 쪼아 먹히는 “지렁이” 등의 이야기는 2부에서 가장 부정적인 정서를 전달하는 시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적 약자인 인물들이 직접 등장, 언급되는 3부에 비하여 비유적이다.

 4부에서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가는 <동경 게스트하우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는 <상주의 지혜>, 아버지의 유해를 모신 “납골당”에 방문하는 <송년> 세 편의 시가 마치 하나로 이어진 이야기인 듯 읽히며,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화자가 직접 경험하며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부정적 정서가 시를 지배하긴 하나, 이 또한 3부에 비하여 4부에선, 끝나지 않을 듯한 슬픔과 비애와 고통을 얘기하는 시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다. 가족이 가족을 살해하는 등의 끔찍한 이미지들이 연달아 등장하는 <빌러비드>도 충격적인 이미지 속 화자의 목소리를 잘 들어 보면 “가족을 죽이지 마세요”, “아버지, 산 사람은 살 수 있다고요”, “도망치세요, 사랑하는 아버지”라 말하는 등 괴로움 다음의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

 반면 3부는 희망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편이 부정적 정서가 장악하는 다른 시들에 비하여 훨씬 적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벗어날 도움을 받거나 줄 수 없으며(<봄날 정경>), 아이에 대한 책임을 여성 혼자 지고(<그때보다 지금이 나은지>), 세상에서 소외당하는(<오지의 건축물>) 등의 사회적 약자들의 모습을 반복해서 그려내고 있다. 고통과 힘듦을 견뎌내는 부정적 상황의 화자가 3부 대부분의 시편들을 강하게 끌고 가고 있다.

 이쯤에서 시집의 제목을 한 번 보자.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에서의 “미움”이 어디를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이 느껴진다. “타들어 가는 해마저 저주하다가/넘어져 울”게 되는(<봄날 정경>) 감정의 이름은 무엇일까? 절망적인 상황을 버티는 사회적 소수자들,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서 하나의 감정을 떼어낼 수 있다면 ‘세상을 향한 미움’이 보일 것이다. 3부를 읽어가는 동안 독자인 우리는 시집 제목의 “미움”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즐거운 사람에게 봄날이 오면>과 <불탄 집 아래>의 순서를 바꾸어 읽으면 그것이 더 명확해진다.

 <불탄 집 아래>의 ‘나’는 “그을릴 새도 없이 불타올라/산산이 부서진 세계”에서 “나의 피난처였던 해안 낭떠러지 끝 집”을 잃은 상태이다. 그런 ‘나’를 “땅(대지, 가이아)”인 ‘너’가 바라보며 “타인의 파멸에 상대적으로 쾌감을 느끼는 사람”처럼 “마구 웃”는다. 하지만 사실 “괄호 안에 묶”인 ‘너(땅)’의 대사는 “확실”히 “땅이 말”한 것은 아니다. 그저 집을 잃은 ‘나’가 그렇게 “지레짐작한” 것이다.

 

 타인의 파멸에 상대적으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을 쳐다보듯

 나는 땅을 치며 말했다

 그때 땅이 꿈틀거리며 마구 웃었기에

 하려던 말을 괄호 안에 묶었다


 (......)


 확실하다

 땅은 말하지 않았다


 잿더미 속을 뒹굴며 나는

 미쳐 가며

 아무도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우긴다

 지레짐작한다


 -<불탄 집 아래> 中


  그렇다면 난해하게만 읽히던 3부의 첫 시, <즐거운 사람에게 봄날이 오면>도 조금씩 이해된다. 두 시의 화자를 같은 인물로 두었을 때, “더 많은 생명체”가 생동하는 “봄날” 모습과 반대로 화자의 집은 불탔으며, 화자는 힘겨운 계절을 보내고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에 거의 “미쳐” 내가 이렇게 불행한 이유는 누군가 나의 “집”이 “불탄” 것을(<불탄 집 아래>) 바라고, “좋”아하는 게 아닐까 여기는 중인 것이다.

 한계까지 몰린 3부의 “세계”는 “산산이 부서”져 “겹겹의 잿더미"만(<불탄 집 아래>) 남은 듯 위태롭다. 모든 “집”이 “전소되어” “잿더미”만 남아 있는 “허허벌판”의 자리(<즐거운 사람에게 봄날이 오면>). 그러나 “땅(대지, 가이아)은/집이 불타서 좋기만 할까 나를 비웃고 있을까”?(<불탄 집 아래>)라는 질문이 남는다. 시는 미움으로만 향하지 않고, 새 방향으로 스스로 시선을 돌린다. 끝이라고 생각되는 그 자리에서 길은, ‘또다시 시작된다’는 시집의 단단한 목소리가 마침내 드러난다.


ㅡ


 <입동 무렵> 시에서 ‘너’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계기는 시에 등장하는 “비로소 무문관이 되어”라는 구절에 이르러 알 수 있다. 무문관은 ‘문이 없는 관문’이란 불교 용어로, 극한의 수행 처소를 부르는 단어이자, 스님들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작은 방에 홀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나오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 방식을 뜻한다.

 이런 단어의 의미에 따르면 <입동 무렵>에 나오는 “호수”의 “문”이 “한파”에 의해 닫혔을 때, 썩은 바닥과 함께 남아 있던 ‘너’가 ‘극한의 처소’에서 자신의 내면이 얼마나 곪아 있었는지 살피고 깨달을 수 있었다는, 그 과정이 수행과 같았음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무문관”의 의미는 이것이 다가 아니다.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에는 정해진 형상이나 일정한 길이 없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호수”의 수면, 즉 “문”이 닫혔을 때, 물리적으로 들어가거나 나올 수 있는 입구의 성질을 공유하는 “문”은 아니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문”이 열렸다는 앞선 해석이 강화된다. 문을 닫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단절, 끝을 의미하지만 이 시에서 ‘문을 닫다’는 행위는 동시에 자신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새로운 형태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단절’은 ‘열림’이 되고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김이듬 시인의 이 시선을 붙잡고서 시집을 읽다 보면, 과연 이것이 시집을 관통하는 요소들 중 하나라는 듯 몇 몇 시편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새벽은 더 이상 푸른 절벽이 아니고/밤은 더 이상 미완의 종말이 아니다”라는 <에튀드>, “시위 중”이어서 “광화문 광장을 지나갈 수 없었”던 “버스”가 “매번 정차했던 버스 정류장에 멈추지 않”아 “언제나 똑같았던 노선을 이탈”해 “다른 길로 달”렸지만 “재밌”고 “해방된 것 같”다던 “기사님”의 이야기가 담긴 <패터슨에게>, “끝인사 사양하고 가볍게 포옹하리라” “마지막 헤어짐이 마지막 만남이 되겠지” 말하는 <애프터눈 티>, “팔려갈 위기에 처해도” “빚 때문에 남은 가족이 고통 속에 살게” 되어도 “다리와 등, 머리, 눈, 손, 신장, 자궁 그리고 혀까지 망가”져도 “작업실이 불”타고 “빚 때문에 붙들려 가”고 “재투성이”로 살아도 “산 사람은 살 수 있다”고 말하던 <빌러버드>.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에서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것. 그것은 어느 세상에서나 통하는 ‘진리’와 같으며, ‘정해진 형상이나 일정한 길 없’는 ‘문’과 같다는 “무문관”의 단어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끝이라고 여겨진 문, 닫힌 문, 절망적인 현실은 포기하지 않았을 때 “무문관”의 형태로 새 길을 열어준다.

 그럼 이제 시집의 가장 첫 번째 시를 들여다 보자.

 

 아버지가 차던 오메가 시계인데

 바람 부는 골목에 서서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니

 오메가란 그리스 말로 끝, 종말이란 뜻이라고 나온다


 (......)


 나는 약이라고 부르고 시계방 주인들은 알 혹은 배터리라고 부르는 이 작고 둥근 것을 매만진다 다 닳은 세계를 손바닥에 놓고 본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없는 것> 中


 화자는 “아버지”의 “오메가 시계”를 들고 “시계 가계 주인”에게 찾아간다. “배터리”가 고장났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약(배터리)을 구”하고 싶었으나 “이제 어디서도 구할 수 없을” 거란 대답만 듣고 나온다. “오메가”란 “그리스 말로 끝, 종말”이란 뜻이다. 그러나 화자의 생각은 다르다. 모두가 고칠 수 없다고 말한 시계, 이름마저 “끝”이자 “종말”인 시계의 고장난 “배터리”를 두고, 화자는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완전한 “종말”을 생각해본 적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말한다. 끝에서 끝이 아닌, 다른 시작을 바라보려는 시(<이 세상에 없는 것>)가 “비로소 무문관이 되”는 시(<입동 무렵>)로 마무리 되는 시집인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더 있다. 아버지의 유품인 “시계”는 “세계”와 형태도 발음도 비슷하여, 시 속에서 좋은 운율을 만들어 낸다. 언뜻 보았을 때 다 닳은 시계는, 다 닳은 하나의 세계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이를 넘어 한 가지 떠올릴 점이 있다면 “시계”의 본래 성질이다.

 “시계”는  인간의 기준에서 만들어 낸 ‘시간을 표시하는 도구’이다. 즉, ‘시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시계”가 고장나도 계속 흘러간다. 그저, 묵묵하게. “세계”는 “시계”가 고장났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 흘러간다. 그에 따라 계절은 다시 돌아온다. 그저, 묵묵하게. 멈추지 않고 계속될 뿐이다. “끝”은 진짜 끝이 ‘아니다’. <입동 무렵>의 ‘얼어붙은 호수’를  “걸어왔”던, ‘삶을 그저 걸어가는 사람’처럼 말이다.



     3.  ‘원래 없었던 존재’ 바라보기


 서두에 말했던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빈 방’은 텅 비어 있지 않다. ‘얼어붙은 호수’는 텅 비어 있지 않다. 사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빈 방’은 가득 찬 방이며, 눈 덮인 호수 내부엔 수많은 ‘비주류’가 고요히 썩어가고 있다. 주류의 시선에서 밀려나 “원래 없었던 것” 취급되는 존재들. 사회적 소수자들.


 “이 골목에는 출생 신고하지 않은 아이들이 많습니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고 나이가 차도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유령처럼......“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아시아 저 골목은 여기와 닮았다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몸을 거래하는

 나는 약이라고 부르고 시계방 주인들은 알 혹은 배터리라고 부르는 이 작고 둥근 것을 매만진다 다 닳은 세계를 손바닥에 놓고 본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


 -<이 세상에 없는 것> 中


 시집의 첫 시에서 이미 말하고 있었다. 사회의 보호 바깥을 전전하는 ‘비주류’의 이들을 말이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보호받지 못하고, “유령처럼” “세상에 없는 사람들” 취급되고, 사회의 시선 아래서조차 몸 둘 데 없는 ‘사회적 소수자’들. 그러나 여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정말 존재’한다. 이토록 가득 차고, 썩어 가라앉아 있기도 한 세계의 일부를 어떻게 ‘깨끗이 비워져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몸”은 “배터리”와 같다. “시계”가 작동한다는 것은 ‘실존하는 시간’이 ‘눈에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없는” 취급을 받는 사람들은 ‘실존하는 자신’이 ‘눈에 보이도록’ 하는 무언가, “몸”, 사회가 원하는 ‘껍질’을 찾아 헤매고(“거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같다. 실제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에도 “끝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다 소모된” “배터리”를 가진 “시계”와 실제로 ‘존재’함에도 “끝났다”는 말을 듣는 주류의 시선에서 “사라진” “몸”을 가진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김이듬 시인은 계속 얘기한다.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 그 말대로 해당 시 이후의 시집은 온통,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사회적 소수자를 찾아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며 ‘떠돌아’ 다닌 길과 같았다.



     4.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랑했다’는 것과 같다

  

 모두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늘, 시작되는 것을 찾아내는 김이듬 시인의 시선은 너무나도 다정하고 슬프다. 시집의 3부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미움”의 정서. 세상의 그늘진 부분을 바라볼 때 끓어오르는 “미움”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는  그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말하는 시집을 쓸 수 있었을까. 이 고통은 미움으로만 이겨냈다곤 설명할 수 없다. “내면”이 썩어드는(<입동 무렵>) 괴로운 바라봄을 끝까지 이어가고, 무너지지 않은 채 지속하여 “걸어”온(<입동 무렵>) 동력을 어떻게 미움뿐이었다고 말할까.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미움이 없어 분노가 없어 관심과 눈치도 없이 봄이 지나갔다 지나고 보니 봄이었다 올리브유로 비누 만들기만큼 쉽게 지나갔다


 (.......)


 나의 집은 황무지가 되었다 풀들이 불에 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나는 벽돌만 한 비누를 집어 던지지 않았다

 

 자연은 좋겠다 폭풍이든 초대형 산불이든 지진이든 일으켜도 자연을 벌하지 않으니까 대부분 인재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하니까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유학 가기 전엔 매일 다퉜던 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동생이 공원 공중화장실에서 얼굴이 벌개가지고 울면서 나왔다

 유머를 잃어버렸지만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을 보냈다 내 동생은 남자처럼 보이지만 여자다 키가 백팔십이고 머리를 허리까지 길렀다 이렇게 설명해 봤자 그 아주머니는 남자가 왜 여자 화장실에 들어오냐고 소리쳤다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내 탓이오라고 말하지 말라며 나는 동생을 다독였다 자연에는 암수 외에도 성이 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향기로웠다 봄이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표제작) 中

 

 해당 표제작은 3부에 수록되어 있다. 3부에서 묘사하는 “봄”은 전반적으로 화자에게 절망과 고통을 주는 계절이었다. 하지만 이 시와 <초봄 대피소>만큼은 3부에 들어가 있음에도 “봄”을 부정적으로만 묘사하진 않는다. 심지어 표제작의 화자는 스스로 “봄”을 긍정적으로 서술하기까지 한다.

 <불탄 집 아래> 시의 화자는 3부의 “봄날”에 집이 탔으므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 하지만 후엔 진술을 바꾸어 “땅(대지, 가이아)은” “좋기만 할까”, “나를 비웃고 싶었을까”라며 상황을 제대로 바라본다. “미움”이 향할 대상은 “땅(자연)”이 아니라는 인식을 간직한 채, 다음 수록된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의 시로 넘어가는 것이다. 

 본래 탓하던 이(땅=자연)가 없어진 화자는 “자연은 좋겠다” “자연을 벌하지 않으니까”라고 생각하지만, 이전처럼 누군가를 “미워하”진 “않”는다. 그러자 “한 계절(봄)”은 “비누 만들기만큼 쉽게 지나갔”으며, “미워하지 않”았기에, “한 계절(봄)”을 지나가며 응어리진 감정의 “비누를 집어 던지지”도 “않았”다.

 기뻐야만, 웃어야만, 여유가 있어야만 “사랑하”는 중인 것은 아니다. 온 마음 가득히 “미워”하던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미움을 극복할만한 더 큰 힘, 더 크고 긍정적인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이었기에 미움을 넘어 기쁨을 찾을 정도로 여유가 있진 못했지만, 그래서, “유머를 잃어버렸지만”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며 분명 “사랑하”고 있었다.


 ‘간성’이라는 것은 선천적으로 염색체, 생식샘, 성 호르몬, 성기 등에서 전형적인 여성 남성의 신체 정의에 규정되지 않는 성징을 가진 사람이다. 이 때문에 여아 또는 남아로 신고되었으나 자라면서  호르몬 등 신체 특징이 신고된 성별과 다르게 드러나는 경우도 존재한다.

 “남자처럼 보이지만 여자”인 “동생”은 “키가 백팔십”인 등 일반적인 남성과 비슷한 체형을 지녔지만, 여성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외형 고정관념인 “머리를 허리까지 길렀”다는 구절에서 그가 사회 속에서 여성으로 신고되어 자랐구나를 유추해볼 수 있다. “자연에는 암수 외에도 성이 있”다. 인간이 정의한 “여자”와 “남자”의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생식 특징 말이다. “아주머니”는 “남자처럼 보이”는 “동생”에게 “남자가 왜 여자 화장실에 들어오냐고 소리쳤”지만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화자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을 지냈다. 그 안에서 “봄”의 “향기로”움까지 느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사랑”의 힘이었다.

ㅡ

 시집의 제목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이다. 처음 이 제목을 본 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지나”가게 된 “한 계절”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며 “한 계절”의 의미에 집중했었다. 하지만 이 시집을 다 읽고 난 지금은 “한 계절”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봄”은 분명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으나, 그것은 “봄(자연)”의 잘못이 아니었다. “봄”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었으며, 그 시간 속에서 화자는 “사랑” 또한 깨달았다. 내게 혹독했던 “한 계절”은 봄 아닌 무엇이든 될 수 있었기에, 내게 사랑을 일깨워준 계절 또한 봄 아닌 무엇이든 될 수 있었기에 “한 계절”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계절이든, 어떤 일이 있었든.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지나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지나갔다”고 말할 때 보통은 그 ‘지나간 것’에 신경을 쓰지만, 시집을 읽은 우리는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자리, 이미 도착한 그 계절 너머의 ‘다음 계절’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시편인 <입동 무렵>을 지나쳐 마주한 겨울. 여기서도 우리는 결국 괴로워하고, 사랑할 것이다. 겨울을 지나가면 봄이 오고, 그럼에도 삶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또 상처를 받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계절을 겪어내다 보면. 주류의 시선은 비주류를 지워낼 것이고, 우리는  시집의 끈질긴 시선처럼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그들을 내면으로 받아들이며,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과 아픔 속에서도 “미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살아남”았(<초봄 대피소>)으니까. 그리고 “반드시 손반죽해야 하는 이 피자처럼 내 삶의 두께도 내 손으로 만들어야 하기에”(<마르게리따>), “도망치세요”라고 “아버지”의 등을 떠미는 이유는 괴로운 삶과 죽음의 무게를 재고 있는 아버지라도 “사랑하“기(<빌러비드>)때문에. “여성”, “남성”의 한계 끝에서 새 길을 찾는 마음은 ‘미워하지 않는 사랑’(<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이니까.

 



 마을 사람들이 대피소에 모였다


 초봄 철창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대형 풍력 발전기도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냐고 물었으나

 돌아보면 뭐하냐는 답변과 헛웃음뿐


 바람 부는 언덕 절벽에

 불탄 집을 두고 피신한 이들

 대부분이 노인


 지금이 가장 불행한 시절일 것도 같은데

 남은 날들이 별로 길 것 같지 않은데


 슬픈 농담인지

 고맙다

 행복하다고 한다


 살아남은 목숨들은

 생애 깊이 사무친다


 속절없이

 사랑한다


 -김이듬,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中 <초봄 대피소>







ㅡ

*순서대로 <에튀드>, <귀여운 여인>, <덜 떨어진 사람>, <첫눈은 매년 첫눈이 된다>, <좋아하는 일>, <똑같은 식물이 아니다>, <조감도>, <나의 이방인2>, <풀은 노래한다>, <초봄 대피소>, <여름 야유회 준비>, <봄날 정경>, <오지의 건축물>,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넌 아직 재밌니>, <마르게리따>, <폭우가 우울을 부르지 않을 때>, <상주의 지혜>, <사월>, <빌러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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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벽
  • 202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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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벽
  • 2026-08-21
지상에서 맞는 환상적인 삶

은유게임이란, 아무 단어를 제시어로 던졌을 때 그 단어의 본질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유의어와 반의어를 말하는 것으로 최근 친구들과 하기 시작한 게임이다. 얼마 전, 혼자 은유게임을 하다가 ‘상실’을 제시어로 던졌다. 곰곰히 생각하다보니 삶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이 단어는 분명 게임의 답이 맞는데, 유의어와 반의어 중 어느 쪽에 두어야 할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러던 중 문득, 좋은 은유는 어느 쪽의 말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이 찾아왔다. 삶은 상실과 유사한 말이 될 수도 있고, 상실과 반대인 말이 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같은 성질’과, ‘다른 성질’을 넘어선 본질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상실과 삶은 본질적인 ‘성질’을 공유하고 있다. 만질 수 없지만 존재하고, 보지 못하지만 느낄 수 있는 것. 잃음과 얻음이 한 판의 유리장처럼 서로 붙어 있어 떨어트릴 수 없는 것. 한 쪽을 바라볼 때 다른 쪽이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삶과 상실의 동일한 면이었다. 그렇기에 삶은 즉, 상실이 될 수 있다. 삶은 상실이라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 상실을 통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또 얻어간다. 임선우 작가의 소설집, 을 읽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상실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햇빛에 비춰 보는 다각면의 보석처럼 여러 인물들과 상황 속에서, 환상적인 장치 속에서 세심하게 어루만지고 있는 것일까? 소설은, ‘상실’이라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궁금증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평을 쓰고자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상실이 삶이고, 삶이 상실이라면, 결국 그게 무엇인지 정의내리는 건 큰 의미가 없지 않을까? 우리가 카페에 앉아 유리창의 얼룩을 바라보고 있더라도, 멀리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결국 반대편의 거리를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인의 시선에서, 생의 목표하는 지점들은,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한 것이 아니라 사실 긴 터널과 같이 이어져 있다. 소설집에서 사용되는 환상적인 장치들은, 독자가 익숙하다고 여겼던 세상과 몰입하는 것을 계속해서 깨트리며, 독자로 하여금 소설 속 인물들과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독자를 타자화시키면서, 독자는 인물들이 목표하는 띄엄띄엄한 지점들이, 멀리서 보았을 때 전부 이어져 있다고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촉수에 닿으면 인간이고 동물이고 전부 해파리로 변”하는 “변종 해파리”의 출현은, 인물의 상황이 실화가 아닌, ‘지어낸 이야기’임을 끊임없이 자각하도록 만든다. 그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수’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 히키코모리가 된 사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도둑질을 하다가 해파리 변신 대행업체를 찾아간 사건은, 삶의 의미를 다시 깨닫는 소설의 마지막 결론을 위한 하나의 수순처럼 느껴진다. 즉, 이 소설집에서 나타나는 ‘상실’은 ‘환상’과 결합하는 순간 ‘잃었다’는 의미보다 ‘생겨남’의 의미로 연결되게 된다. “변종 해파리”의 출현 전까지, ‘수’의 ‘현실적인’ 상황들(히키코모리, 아버지의 돌아가심,

  • 방백
  • 2026-08-20
친애하는 프란츠 요제프에게  

멸망요제프. 마침내 그대가 실종된 지 100년이다. 그리고 그 말은, 멸망을 선언하고도 100년이 지났다는 거다. 날카로운 쇠바퀴 소리와 함께 철로 위로 기관차의 육중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증기기관이 내뿜은 흰 증기에 승강장은 서서히 부옇게 뒤덮였다. 뮐러는 인파 속에 파묻힌 채 옅은 입김을 내뱉었다. 이내 텁텁한 공기가 그의 폐부를 가볍게 감싸 올렸다. 그는 두꺼운 외투를 여민 이들을 뚫고 가장 구석진 좌석에 가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객들을 모두 실은 기관차는 느릿한 숨을 몰아쉬며 철길을 기어나갔다. 초겨울의 한기가 객차 안의 이들이 내뱉는 숨에 데워지고 있었다. 뮐러는 까끌거리는 코트를 벗어 선반 위에 올려놓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쾰른을 떠나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사실은 그로서는 바라지 않던 것이었는데, 이방인의 감각을 느끼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서야 무료한 삶을 즐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언제나 요제프와의 일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예외였지만. 어느새 몇 장만을 남겨둔 노트를 펼치자 어젯밤 적어둔 문장이 나타났다. 그는 요제프에게 닿지 못할 편지를 쓸 때면 언제나 멸망이라는 단어를 쓰고는 했는데 이것보다 더욱이 적합한 단어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또 호라이즌 이야기인가?”덜컹거리는 창문에 기대어 편지를 쓰고 있자니 맞은 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뮐러가 고개를 들자 빼빼 마른 노인은 그가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한 듯 비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백 년째 저 이야기더군.”노인이 옆자리 청년이 펼친 신문을 턱짓했다. 뮐러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뮐러를 훑어보며 답을 기다리던 노인은 그가 마땅한 반응을 주지 않자 입을 다물었다. 뮐러는 노인 옆에 앉은 청년을 흘겨봤다. 그는 창가 구석에 끼워진 신문을 펼치고 있었는데, 읽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시간을 때우는 것으로 보였다.[호라이즌 IV, 국제 분쟁으로 중단]청년의 신문에서 그 익숙한 타이틀을 본 뮐러는 이내 노트를 덮어두고는 좌석 구석에서 신문을 꺼내 들었다. 지겨운 실패를 알리는 소식을 뒤로한 채 한 장을 넘기자 한면을 가득 채운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호라이즌 프로젝트] 프란츠 요제프 실종 100주년 노화 억제제 ACS(Aging Control System)를 개발한 과학자이자 우주비행사인 프란츠 요제프의 실종 사건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프란츠 요제프는 전 인류의 화성 이주 계획인 호라이즌 프로젝트의 핵심 연구원으로 참여했으며, 우주비행사 디트리히 위버와 발터 크루거와 함께 호라이즌 유인 탐사선에 탑승한 후 교신 두절과 함께 정상 궤도 밖으로 사라졌다. 당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호라이즌 프로젝트. 뮐러는 그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자신의 몸 어딘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화성에 인공도시를 건설한다는 방대한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 멸망의 불씨가 막 고개를 들어 올릴 때였다. 치솟는 기온과 대기근, 도시를 집어삼키던 수십 미터의 쓰나미. 다만 이러한 전례 없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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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놀이

사랑하면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짖는 개 목줄을 의자에 둔 채로 영화관을 나왔다 함께 하얀 혼잣말을 키웠다 카페 사장님이 주인 없다며 주신 스카프는 다재다능하다 두 개의 목을 쥐는 한 줌의 손이거나 터그 놀이*에 쓰이기도 한다 영화는 둘을 위한 산책길 개의 발자국을 지우는 등 뒤의 그림자 언덕이 빙판처럼 얼어도 흰 바람이 옷 안으로 들이쳤고 틈 날 때마다 물던 꼬리에는 스카프를 둘렀다 스크린 속 배우가 눈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머리와 발이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검은 눈이 영화를 말끔하게 가렸다고 말했기에 상처 없이 흰 빛을 문 개가 돌아왔다 쓰다듬으면 더 놀자고 짖었다 물린 구멍마다 같은 혼잣말이 쏟아졌다 *반려견이 장난감이나 줄을 물고 있을 때 사람이 반대쪽을 잡고 서로 당기며 노는 줄다리기 형태의 놀이

  • 양현서
  • 2026-08-02
위성

혜유암센터 1층 접수 데스크 앞, 3년 전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은 나를 단박에 알아봤다. 그새 살이 좀 빠지고 목에 닿지 않도록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도 그랬다. 의아한 얼굴로 차트 기록을 몇 차례 클릭하던 직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이내 입술은 다시 살짝 올라간 모양으로 돌아왔지만, 눈에 담긴 빛은 여전했다. 완치 후 전이나 재발은 흔한 경우였으므로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상황 역시 유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나를 기억하는 건 아마도 3년 전 같은 자리에 앉아 비슷한 문답을 이어가던 때에 실신할 정도로 울었기 때문이겠지. 그때는 곧 죽을 사람처럼 누워있던 엄마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울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여전히 엄마의 과거 병력을 적어 넣어야 하는 칸은 한없이 모자랐으므로. “여긴 참 똑같다. 그치.” 엄마도 같은 날을 떠올리고 있는지 코를 훌쩍이며 부지런히 볼펜을 놀리는 내게 슬며시 물어왔다. 엄마는 내가 당신 때문에 우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이젠 그런 걸로 잔소리할 기운도 없는 건지 별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내가 이래서….” 로 시작하는 익숙한 반복을 흘려들으며 더 많은 눈물을 쏟아야 하는데, 엄마가 조용해서 나도 더 울 수가 없었다. 마지막 줄을 적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전보다 두세 줄 늘어 난 병명이 종이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었다. 엄마가 보지 못하도록 손을 움직이면서도 소용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구태여 읽지 않아도 나보다 훨씬 잘 알고 있겠지. 겪어봤다는 건 그런 거니까. 엄마는 꼭 봄에 아팠다. 새롭게 피는 것들이 쉬이 도드라지는 계절에 오는 끝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때마다 지겨울 정도로 우는 새벽을 보내야 했다. 눈물이 하도 쏟아져서, 도무지 멈추질 않아서 울면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흐르는 것들을 닦아가며 밀린 일을 하다 머쓱해하고, 다시 울기를 반복하다 보면 아침은 여지없이 밝아왔다. ‘죽고 싶어'가 ‘죽을 거야'로 바뀌는 그 시간도 흘렀다. 엄마가 아픈데도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시간은 흐른다는 것. 그리고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은 양 구는 나를 마주치는 것. 가장 잔인한 건 언제나 그런 종류였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늘 바쁘게 움직였다. 엄마와 함께, 아니면 엄마에게 무언가를 권하는 방식으로. 때로는 그것보다, 더 열심히 혼자. 엄마의 손을 잡은 채 몇 시간씩 황톳길을 걷고 병원에 있거나 퇴원한 엄마에게 아침저녁으로 전화하고 일기 쓰기를 제안하고…. 그 와중에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독립 서점을 열고 매일 거기로 출근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자조적인 웃음을 짓자, 제이는 내 앞에서 한 번도 짓지 않았던 표정을 했다. 입술을 일자로 구기는, 웃는 것도 찌푸리는 것도 아닌. 거기에 담긴 말을 읽어낼 수 없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분명하게 지나와서 알고 있는 시절의 얼굴인데도. 그러니까 나도 언젠가 꼭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을 텐데도 그랬다. 간호사의 표정을 보면서, 3년 전 이맘때와 제이까지 떠올리지 않을

  • listener J
  • 2026-07-31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 대상을 환원하지 않는 시선에 대하여

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 미빈
  • 2026-07-30
말을 읽기

어떤 행동은 글로 적힐 수 있다. 혹은 글로 적히지 않을 수도 있다. 오렌지를 나무에서 딴 후 껍질을 까 입에 넣는다. 씹는다. 이것은 한 개인의 행위로 볼 수 있다. 주어가 없어도 문장이 된다. 규모가 큰 것을 적거나 역사를 기술할 때에는 반드시 관념적이게 되는 것일까? 예컨대 역사책들은 주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혹은 'OO국이 쇠퇴했다', '성장했다'. '번영을 누렸다' 라고 쓰지만 도대체 누가 번영을 누렸다는 것인가.. 한 나라 안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쇠퇴'라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눈부시게 발전했다'라고 쓴다면 그 '눈부신' 밝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한 거대한 공동체의 일대기를 쓸 때에 (그 공동체가 실은 개인들의 합이란 것을 감안하지 않고 주로 쓰인다.) 이런 '개인'의 행위를 서술하는 데에 적합한 단어들 말고 공동체 전용 단어는 없다. A나라가 번영했다는 사실은 어떤 한 개인( 아마 'A나라' 라는 이름을 가진)이 번영했다는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리고 쓰기도 어렵다. A나라에 세 사람이 살고 있었다면 세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씩 (동시에 세 줄을 읽을 순 없으니 순서대로) 써야 할 것이고,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만연한 의인화는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가? 먼저 이것은 그 공동체가 실재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 축구 팀은 단지 같은 유니폼을 입기로 약속한 것일 뿐이다. 만약 'A축구팀이 승리를 차지했다', 'A축구팀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라고 쓴다면 언어의 힘은 읽는 이에게 혹은 듣는 이에게 그 팀에 속해 있는 선수들을 'A축구팀'으로 단순화하게 한다. '우리 반', '우리 학교', '우리 나라'도 같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나아가다 보면 (도대체 어디로 나는 '나아가고' 있단 말인가? 나는 강물 위를 떠다니는 나룻 사공이란 말인가?) '우리'라는 말마저 부정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정말 그러하다. 이것은 약속 혹은 확인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그들' 혹은 '너와 나' 같은 다른 말로 바뀔 수 있다. 언어는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과 어떤 것을 구별지어야만 한다. 두 원숭이가 언어를 처음 만드는 선사 시대 환경을 가정해 본다면 그것을 주로 야생 동물이나 식물의 '특성'을 묘사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성별' 그리고 대화의 주가 되는 '사람'과 '그 외'의 구별이다. 고유 명사는 제외하고 형용사를 보면, 도마뱀은 '빠르다', 거북이는 '느리다', 저 돌은 '크다'. 나무가 '높다' 등이 있다. 성격에 관련된 것도 그러하다. '교활한', '나쁜', '친절한', '아름다운' 등도 진화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유행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렇듯 언어가 단지 목청이 내는 소리의 조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유행하는 소리'는 같은 집단임을 확인하는 신호로 보인다. 오늘날 유행하는 '야르' (이것의 의미는 알지 못한다.)

  • 드시코
  • 2026-07-29
새벽이 팽창하고 있어!

울고 싶었어 그다지 기쁘지도 않았는데 슬프고 싶었지 아무려나 흔들리고 휘청이다 피곤에 못 이겨 쓰러지듯 자고 싶었어 잠은 천장에 얼씬대고 침대는 안 맞는 옷처럼 불편했지 투명한 손이 두 눈을 꾹꾹 눌러도 정신은 꺼지지 않고 찌그러지기만 할뿐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고 창밖으로는 포탄이 비처럼 쏟아지거나 비행기와 비행기가 공중에서 맞부딪쳐 해보다 눈부신 불꽃을 흐트리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불타는 양이 한 마리 눈물 흘리는 양이 한 마리 백 마리 천 마리 양들의 세계에 운석이 떨어져 모두 멸종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포개진 양털 속에서 숨 막혀 풍선처럼 떠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요한 밤 저 시계의 맥박을 부러뜨리고 내 가슴팍을 찔러야지

  • 구포대교
  • 2026-07-14
울림

턱을 괴고 책에 한쪽을 넘기는데 비둘기가 앞에 있는 일은 턱을 괴고 있던 우울이 고개를 들게 하는 일 비둘기는 바닥을 쪼아먹는데 딱딱한 돌바닥이 혓바닥을 내밀고 나는 페이지를 넘기지만 작가의 작디작은 성대의 울림이 귀로 솟구친다 바람 불으니 나뭇잎 소리 들려오고 너는 왜 여기 왔니 물으니 비둘기의 목구멍에선 작가의 작은 울림이 새어 나왔다 비둘기에게 뭐라고? 안들려 물으니 푸드득 달아나는 일 비둘기는 푸드득 달아나고 남은 것은 책장 사이의 작은 울림 다시 돌아와 책이 되어 짧은 순간 너는 거기 있었고 우울은 턱을 괴던 손을 풀고 연필을 든다 입안에서 작은 날갯짓이 들린다

  • 고래
  • 202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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