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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감정으로 풀어낸 전쟁의 참상, 이반의 어린시절

  • 작성자 유로치카
  • 작성일 2023-05-15
  • 조회수 2,638

해당 비평글은 영화에 대한 결말과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혹 영화를 시청하기를 고려중 이시라면, 다시한번 재고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전쟁은 끔찍하다. 이루어지는 무자비한 폭력은 때로는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기도 하다. 서민들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 무리 속에는 아이들이 있다. 그들이 보는 학살은 어떻게 보이는가. 이반의 어린시절은 그러한 시선을 중립적이면서 때로는 강하게 비판한다.


전쟁이 바꾼 모든 것들

혼란스러운 전쟁터, 한 참호에 어린 소년이 있다. 그는 신분도, 이름도 밝히지 않는다. 단지 어딘가로 연락을 해달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의 이름은 이반. 10살의 소년으로 그는 독일군 진영에 침투해 정보를 수집하는 소련군의 정찰병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편 그의 연락을 받고 찾아온 콜린 대위, 그와 마치 친구인 것 마냥 다정한 대화들이 오간다. 그라즈노프 대령은 그런 이반을 군사학교에 보내려 하였지만 이반은 거절한채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임무를 맏고 다시 전선으로 뛰어든다. 이반은 사실 양부모와 누이동생을 잃었다. 심적으로 피폐해진 이반은 깊은 우울증 상태에 빠져 있었으나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 오로지 독일군에게 복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독일군의 군복을 보며 울분을 토하듯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소비에트 연방이 독일 나치에게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반은 돌아오지 않았다. 베를린을 점령한 뒤, 갈트세프는 나치의 사무실을 뒤졌고, 그곳에서 이반의 기록을 발견한다. 이반의 죽음을 알림과 동시에 영화는 이반과 여동생이 바닷가를 행복한 모습으로 달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혼란스러운 환경 속 작은 빛

영화는 전쟁의 참상을 간접적으로 알리고 있지만, 또한 어린아이가 양육에 있어서 그들이 성장하는 데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소년 연쇄 살인마 다머 제프리의 경우, 어렸을 적 부모님의 이혼 및 기타 환경적인 요소들이 작용하여 결국 주변의 남자들을 살해하고 식인을 하기까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에 대해 알고 싶다면 위키피디아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문서 열람 시 그의 행적에 주의 바람) 이처럼 환경은 인간에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영화 속 주인공 이반은 어린 10살의 소년이다.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고 행복하게 살았어야 할 아이는 소련군의 첩자가 되어 선혈이 낭자한 전장을 누비다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었다. 어머니가 죽고, 누이동생을 잃은 소년. 그 여리고 작은 소년의 마음은 망가진 지 오래다. 그런 그를 이용한 것은 정부도 어른들도 아닌 그 소년 자신이라는 사실이 더욱더 절망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가 군사학교에 갔다고 해서 이전보다 나은 생활을 하였을까?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이것 역시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군사학교와 첩자 둘 다 그에게는 버겁고 힘든 고난일 것이다. 무엇이 이 작은 아이를 국가에 충성하는 하나의 병사이자 소모품으로 만들었나. 영화 속에서의 이반은 지나치게 열정적이다. 또한 나서서 국가가 택한 이 중 하나가 되고 싶어 한다. 그 누구도 이 어린아이가 적군의 위치를 알려주고 지도를 그려오는 등의 일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존재는 그가 죽고 나서야 비로써 알려진다. 이마저도 기록이 존재하지 않거나 발견되지 않았다면 전쟁이 끝난 후 남겨진 이들은 그를 평생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반과 같은 아이들은 수없이 많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창백한 시선의 끝은

이반의 어린 시절은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특유의 분위기가 생기기 전 만들어진 영화이다. 따라서 약간의 긴장감과 빠른 리듬감을 영화에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흑백 영화는 다른 색감들이 가득한 영화와는 달리 보이는 부분이 한정되어 있어서 영화의 분위기나 조명의 사용 등에 대해 서술하려면 꽤 많은 숙련도를 요구할 수 있다. 또한 이 영화 역시 겨울빛과 마찬가지로 음악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영화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대사로 그 영화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꽤 중요하게 여겨진다. 중요한 정보들을 기록하는 연필의 서걱거리는 소리, 종이의 펄럭임, 바다와 모래사장의 고요한 소리는 영화의 유일한 힐링 요소로 작용한다. 이반의 주변인들, 그들이 바라보는 때로는 따뜻하고 애정 깊은 시선과 말들은 어린아이를 돌보는 모성애보단 전우애에 가깝게 들리는 것이 무척이나 야릇*하다. 당연하게 여겨져야 할 요소들이 이곳에서는 이질적으로 작용한다는 것 역시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또, 영화 내에서 전투와 같은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이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울하면서 피폐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은 감독의 능력과 재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 속 자작나무들의 무늬는 마치 그 속의 등장인물들을 지켜보는 듯하다.


가장 순수한 눈이 전하는 진실

전쟁이라는 소재를 어린아이와 그 주변 사람들로 풀어내고 해석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 제작한 컴 앤 씨라는 영화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컴 앤 씨보다는 극단적이지 않다. 트라우마를 안겨줄 수는 있지만, 정적에서 비롯되는 연출은 컴 앤 씨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이반의 어린 시절의 경우 위에서 언급했듯이 흑백 영화고, 잔인하거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연출 등이 없이 적절히 표현했지만, 컴 앤 씨의 경우 그러한 것들을 고려했지만 좀 더 극단적인 연출을 위해 문제가 되는 소재까지도 사용했다. 이러한 점에서 두 영화는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해당 영화를 제작하게 한 영화사는 소련의 모스 필름인데 당시의 강압적인 상황과 검열에도 불구하고 이런 훌륭한 영화가 완성되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이 영화를 더 보면 요즘 시대에 등장하는 영화, 전쟁이나 자극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따라서 상당히 지루하고 전개와 결말 또한 마음에 들지 않을 확률도 높다. 또 다른 단점은 영화가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보니 전쟁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라면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왜 싸우고 이토록 희생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영화는 그 정도로 자세한 세계사 지식을 요구하지 않고, 수업 시간에 1·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간단히라도 배웠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 이것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역시 전쟁을 겪었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비도덕적이고 무지성 한 이들의 발걸음은 그들보다 약한 국가로 이어졌다. 수많은 어린아이, 여성들, 노약자들의 눈물을 보았다. 제 1·2차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이들의 잔인함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어쩌면 지금도 이반과 같은 아이들이 전장에 나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정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제의 친구가, 자식이 이반이 될지도 모르는 국가에 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그 절망감이 이곳까지 전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이쯤에서 이 영화를 생각하며 전쟁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고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깊은 우물은 낮에도 그 수면에서 별을 볼 수 있단다. 그 어떤 별이라도.


*야릇하다;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이 묘하고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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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7-31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 대상을 환원하지 않는 시선에 대하여

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 미빈
  • 2026-07-30
미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랑했다는 말과 같다

얼어붙은 호수의 경관은 새하얗고 텅 비어 보인다. 그러나 비었다는 것이 정말 텅 빈 것일까? 이 물음에서부터 김이듬 시인의 시집, 를 읽어볼 것이다. 여기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빈 방이 하나 있다고 치자.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우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방, 혹은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방을 보며 흔히 ‘빈’이라는 묘사를 붙인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다. 사물의 관점에서 다시 방을 보았을 때, 주름 지지 않은 이불과 고요한 침대, 먼지 쌓인 책상과 마룻바닥, 잘 개어진 옷과 닫힌 옷장 등 많은 물건이 들어찬 방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을 세계의 주체로 두고 본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권력을 잡고 있으며, 주류라고 칭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언어로 설명되며, 이때 인간 아닌 ‘그밖의 것’들은 ‘원래 없었던 것’ 같이 묻혀 버린다. ‘그밖의 것’들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를 주류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그 안에 남아 있던 비주류는 ‘있으나 없는 것’처럼 지워진다. 이 시집에서는 등장 인물이 ‘너’, ‘나’, ‘친구’ 혹은 일상적인 직업, 화자와 가까운 특징을 지닌 인물 정도에 그치는 여타 시집들에 비해 더 다양한 사회적 위치나 직업, 특징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한 재해의 상황들을 언급하며 그 속에서 피해를 입은 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고, 특정 사물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을 연상시키도록 한다. “폭풍”/“기근”/“역병”/“전쟁”, “동남아”에서 온 “가사도우미”, “생리대/초콜릿 바/담배/술”과 같이 값싼 물건과 생활 필수품을 훔쳐 곧 “감옥”으로 “떨어지”게 될 “도둑”, “사람”에게 죽은 “사람”과 “자기 혈육”에게 죽은 “가족”과 “마스크”가 “없”어 “승차를 거부”당한 “누추하게 젖은 사람”, “몽골인 노동자들”, “죽어 있”는 “식물”에서 떠오르는 방치된 사람들과 “태어났고 평범하게 성장했고 온순했으며 살해당한 소녀”와 “식물이 죽고 나서야” “그 식물의 이름을 알게 되”는 세상의 무관심함에 놓여 있는 사람들, “거리 곳곳의 무장군인들과 탱크”, “고독사”, 태어나

  • 방백
  • 2026-07-30
말을 읽기

어떤 행동은 글로 적힐 수 있다. 혹은 글로 적히지 않을 수도 있다. 오렌지를 나무에서 딴 후 껍질을 까 입에 넣는다. 씹는다. 이것은 한 개인의 행위로 볼 수 있다. 주어가 없어도 문장이 된다. 규모가 큰 것을 적거나 역사를 기술할 때에는 반드시 관념적이게 되는 것일까? 예컨대 역사책들은 주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혹은 'OO국이 쇠퇴했다', '성장했다'. '번영을 누렸다' 라고 쓰지만 도대체 누가 번영을 누렸다는 것인가.. 한 나라 안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쇠퇴'라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눈부시게 발전했다'라고 쓴다면 그 '눈부신' 밝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한 거대한 공동체의 일대기를 쓸 때에 (그 공동체가 실은 개인들의 합이란 것을 감안하지 않고 주로 쓰인다.) 이런 '개인'의 행위를 서술하는 데에 적합한 단어들 말고 공동체 전용 단어는 없다. A나라가 번영했다는 사실은 어떤 한 개인( 아마 'A나라' 라는 이름을 가진)이 번영했다는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리고 쓰기도 어렵다. A나라에 세 사람이 살고 있었다면 세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씩 (동시에 세 줄을 읽을 순 없으니 순서대로) 써야 할 것이고,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만연한 의인화는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가? 먼저 이것은 그 공동체가 실재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 축구 팀은 단지 같은 유니폼을 입기로 약속한 것일 뿐이다. 만약 'A축구팀이 승리를 차지했다', 'A축구팀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라고 쓴다면 언어의 힘은 읽는 이에게 혹은 듣는 이에게 그 팀에 속해 있는 선수들을 'A축구팀'으로 단순화하게 한다. '우리 반', '우리 학교', '우리 나라'도 같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나아가다 보면 (도대체 어디로 나는 '나아가고' 있단 말인가? 나는 강물 위를 떠다니는 나룻 사공이란 말인가?) '우리'라는 말마저 부정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정말 그러하다. 이것은 약속 혹은 확인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그들' 혹은 '너와 나' 같은 다른 말로 바뀔 수 있다. 언어는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것과 어떤 것을 구별지어야만 한다. 두 원숭이가 언어를 처음 만드는 선사 시대 환경을 가정해 본다면 그것을 주로 야생 동물이나 식물의 '특성'을 묘사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성별' 그리고 대화의 주가 되는 '사람'과 '그 외'의 구별이다. 고유 명사는 제외하고 형용사를 보면, 도마뱀은 '빠르다', 거북이는 '느리다', 저 돌은 '크다'. 나무가 '높다' 등이 있다. 성격에 관련된 것도 그러하다. '교활한', '나쁜', '친절한', '아름다운' 등도 진화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유행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렇듯 언어가 단지 목청이 내는 소리의 조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유행하는 소리'는 같은 집단임을 확인하는 신호로 보인다. 오늘날 유행하는 '야르' (이것의 의미는 알지 못한다.)

  • 드시코
  • 2026-07-29
새벽이 팽창하고 있어!

울고 싶었어 그다지 기쁘지도 않았는데 슬프고 싶었지 아무려나 흔들리고 휘청이다 피곤에 못 이겨 쓰러지듯 자고 싶었어 잠은 천장에 얼씬대고 침대는 안 맞는 옷처럼 불편했지 투명한 손이 두 눈을 꾹꾹 눌러도 정신은 꺼지지 않고 찌그러지기만 할뿐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고 창밖으로는 포탄이 비처럼 쏟아지거나 비행기와 비행기가 공중에서 맞부딪쳐 해보다 눈부신 불꽃을 흐트리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불타는 양이 한 마리 눈물 흘리는 양이 한 마리 백 마리 천 마리 양들의 세계에 운석이 떨어져 모두 멸종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포개진 양털 속에서 숨 막혀 풍선처럼 떠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요한 밤 저 시계의 맥박을 부러뜨리고 내 가슴팍을 찔러야지

  • 구포대교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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