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B
- 작성자 지존
- 작성일 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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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빠르게 지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잠에 드는 사람도 아니었다. 체질이라는 선천적인 비극이 그의 한평생을 덮치고 있었기 때문에, 밤중의 열차 안에서도 그는 피로의 고통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구매한 표는 지나치게 저렴했고, 악바리 운행의 진수를 교시하는 열차는 지나치게 낡아 있었다. 직물 시트는 먼지가 잔뜩 묵은 데다 고릿한 얼룩이 선객을 자처하고 있었다. 좌석의 불결한 관리 수준은 몸을 눕히고픈 충동으로부터 실행력을 앗아갔다. 애초에 그가 택한 일반 객실은 누울 만큼의 공간을 확보하기도 마땅치 않은 크기였다.
오늘 종일 치러야 했던 곤욕을 회상하노라면 그는 이가 갈렸다. 경찰에 연행되는 바람에 타려던 특급 급행열차는 결제까지 마치고도 떠나보내야 했다. 우매한 공권력은 해가 저물도록 그를 잡아 둔 끝에야 멋대로 씌운 혐의를 벗겨 내고 응당한 자유를 되돌려 주었다.
그를 풀어주던 경찰은 그저 한마디를 웅얼거렸다.
‘오해였습니다.’
그건 분명 사과가 아니었다. 망할 작자는 오히려 아깝다는 기색이었다. 어떻게 되먹은 일처리 정신인지. 그래, 위로금을 지급한다든가 하는 일말의 성의도 당연하다는 양 생략됐다. 온갖 절차를 늘어뜨리고 진행됐던 굼뜬 취조와는 참으로 대비되는 신속한 종결이었다.
한적해진 역에서 그는 부랴부랴 새 열차 편을 알아보아야 했고, 황혼녘의 철도역은 구시대적 승차감을 자랑하는 퇴물 단 하나의 선택지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는 후회 또는 분노하기는커녕 앞서 벌어진 일을 되감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뻣뻣이 절전된 그는 좌석 등받이에 얌전히 상체를 기대어 뿌연 창문 너머의 역동적인 어둠을 멍하니 주목할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 황폐한 농원을 가로지르던 열차는 언제부터인가 아무런 형체도 분간할 수 없는 풍경을 선사하고 있었다. 경유하는 고장의 영화관에 걸린 개봉작을 확인한다거나 벌판에 듬성듬성 등장하는 나무를 셈하는 유희도 막혀 버렸다. 아쉽게 된 대로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단조로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비교적 낮은 온도의 공기가 그의 적막에 유입되었다. 경미한 변화를 감지한 그는 기민하게 시야를 재확보했다. 문이 스륵 열렸고, 누군가 문틈으로 구두코를 디밀었다. 웬 여자가 객실에 성큼 들어와 곧장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갑작스레 출현한 목전의 여자를 찬찬히 훑었다. 생기가 부족한 인상임에도 뚜렷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검은 모발은 부드럽게 굽은 직모였고, 윤기와 탄력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었다. 흐뭇하게 뻗은 눈매에 담긴 검푸른 눈동자는 짙은 그림자가 진 바다를 연상케 했다. 흰 피부는 비록 심히 창백한 감이 있었으나 장인의 수제 사탕처럼 매끈한 동시에 신선한 윤기가 흘렀다. 야릇한 기품을 갖춘 기묘한 여자였다.
물론 상대를 단숨에 홀리는 매력을 풍긴다 해도 구태여 비좁은 객실에 합석하려는 만행은 참작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긴 흑발의 미녀이기 전에 고상한 태도의 불청객이었다. 게다가 꺼림칙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여자의 명품 코르사주 같은 외관에서 휘몰아치는 독한 소용돌이가 적당히 덥혀진 실내의 밤공기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예리한 그의 살갗에는 곤두서도록 거슬리는 감각이었다. 안 그래도 충분히 좁아터진 객실을 이용하는 사정은 고려도 않고 여자는 살갑게 입을 열었다.
“캘러니 렐러드라고 해요.” 가냘픈 체형과 어울리는 음성이 날아들었다. 살얼음에 금이 가는 높고 혼미한 어조였다. 다짜고짜 이루어진 자기소개는 그의 무관심 위에 용케도 우뚝 섰다. 통성명을 요청하는 형식이었다. 그는 여자의 의도를 침묵으로 지르밟았다.
“우연히 만난 분의 이름을 여쭈어도 될까요?”
“그러세요.”
일순 정적이 도래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엗젤이요.”
본명이 아니었다. 근사한 가명도 못 됐다. 태생이 허구인 가짜 이름 따위는 근사할 수 없다는 주관이 있었다. 그럼에도 지나가는 누군가 이름을 물으면 그는 가명을 댔다. 버릇이었다. 버릇에 특별한 이유가 붙지는 않는 법이었다.
렐러드는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엗젤이라, 어린 제가 즐긴 드라마의 등장인물과 동명이인이시군요.”
“그런가요? 드라마는 문외한입니다. 텔레비전은 제가 성인이 될 무렵에야 보급되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후에는 미디어에 일절 관심을 할애하지 않았죠.”
그가 사용하는 고유명사가 드라마 촌극의 나부랭이와 동일하다는 정보는 즉석 작명가로서의 자존심을 꽤나 갉아먹었다. 그전에 ‘엗젤’이라는 작명이 우연하게 겹칠 수 있나 하는 의아함이 스쳤다.
“좋아요, 엗젤 씨. 몹시 지쳐 보이시는걸요. 원인이 따로 있으신 건가요?”
“오. 망할 직장이죠.” 저절로 ‘직장’에 들어간 강세가 단어에 밑줄을 직직 그었다.
그의 자유에 거대한 묘비를 세우고, 묘비 아래에 처참하게 짓눌려 있는 자유의 산송장마저 들들 볶는 원흉. 그때의 변화는 엗젤 인생의 찬란한 1막을 무너뜨리고서 그 잔해의 재조합으로 이루어진 2막을 터 주었다. 모든 직장인의 처지가 그렇듯 그는 가히 비탄할 만했다. 달리 무엇이 그를 괴로이 할까?
그래, 이 순간에는 그를 무의미한 물음으로 덥석 무는 렐러드가 또다른 요소로 작용할 수 있었다. 엗젤이 불쾌한 기색을 팍팍 내놓았건만 상대는 눈치를 반듯하게 접고 자리한 모양이었다.
엗젤은 게슴츠레하게 미간을 구기고 발치에 아무렇게나 던져 두었던 슈트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이대로 헐거운 금속 손잡이를 잡은 다음 객실을 박차고 나갈 의향도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피로가 우세했다. 그는 슈트 케이스를 열어젖히고 귀마개를 챙겼나, 하는 그의 희망을 검증했다. 하지만 아무리 수색이 요란할지언정 내용물은 정직했고, 주인을 낙담시키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엗젤은 경비조차 현지에서 조달하는 위인이었다. 그나마 귀마개를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은 발견했는데, 어지간히 감정을 치닫게 하지 않으면 사용하기 곤란했다.
“저런, 이 기차에 오른 것도 업무의 일환이신가요?” 렐러드는 꿋꿋이 질문을 계속했다. 흐늘거리는 웃음의 빛이 만면을 흐릿하게 덮고 있었다. 그것마저도 괜스레 엗젤을 언짢게 했다.
“그렇달까요. 장거리 이동을 일상적으로 요구하는 직종이라서요.” 이쯤 말동무가 되어주었으면 족한 줄 알라고 쏘아붙이는 어조였다. 아무래도 캘러니 렐러드는 포기를 배울 필요가 있었다.
“음, 어느 역에서 내리시나요?” 안타깝게도 엗젤의 비언어적 신호는 모조리 튕겨 나갔다. 무료한 기찻길을 덜 견디겠다는 결정에서 기반한 변덕치고 집념이 놀라우리만치 끈덕졌다. 동기는 쉬이 추측할 수 있었지만 원동력이 의문스러운 부분이었다.
“데드버리, 종착역이죠.”
렐러드의 물음표 공세는 필시 특정한 감정으로 시동이 걸린 것이었다. 엗젤 입장에서는 그 감정을 지루함 이상으로 유추할 수 없었으나, 그다지 큰 궁금증도 아니었다. 사실 그보다는 어쩜 눈을 절대 깜빡이지 않을 수 있는 건지 듣고 싶었다. 촉촉한 눈망울에서 나타나는 동세의 결여는 소름이 끼쳤다. 대놓고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이제 엗젤은 금이 간 창문에 눈길을 고정시켜 상대와의 접촉을 최소화시키고 있었다. 퉁명스러운 화법이나 따가운 눈초리가 상황 종료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면 정제된 무관심으로 일관할 심산이었다. 조금도 청결하지 않은 창문은 이런저런 흠집과 더불어 굵직하게 갈라진 자국으로 존재감이 만만찮았다.
“데드버리라… 저는 빌라우드로 간답니다.”
화사하게 자랐을 맞은편의 숙녀는 예상했던 대로 데드버리라 하는 살벌한 사막 개척지에 알음알음이가 없었다. 엗젤 자신도 어째서 그딴 황무지가 개척 사업의 무대로 선정되었는지 영 와닿지 않았다. 그나저나 빌라우드는 왜인지 모르게 친숙한 지명이었다. 엗젤은 그 대목에서 집중도가 상승하는 의외의 경험을 했다. 렐러드의 의지가 얼떨결에 보상받은 셈이었다. 흔히 접할 법한 낱말의 조합이라서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아마 예전에 그가 방문한 적이 있는 지방이라 사려되었다. 엗젤은 이곳저곳을 바쁘게 휘젓는 일개미였다.
“실은 제 고향이에요.” 고향을 언급하는 렐러드의 입꼬리는 애틋하게 휘어졌다. 성인 여성의 성숙한 정서가 설렘을 통해 정겨운 옛날로 회귀하는 드문 광경이었다. 렐러드가 보여준 향수는 옅은 온기가 감도는 한편 오래된 시름에 잠겨 있기도 했다. 순수한 반가움을 매번 울적하게 물들이는 쓰디쓴 슬픔이 스며들어 있었다.
“빌라우드는 어떤 동네였나요?” 당긴 방아쇠가 탄환을 뱉듯 혀가 풀리고 말이 뛰쳐나갔다. 자각의 통제를 뿌리치는 질문이었다. 엄지는 여태 쥐고 있던 손잡이를 무의식적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알아차렸다. 그만큼 민감한 남자였으니까.
렐러드는 살포시 웃으며 엗젤의 흥미에 호감을 표했다. 처음으로 엗젤 측에서 튼 화제였다, 렐러드가 살포한 미끼를 문 모양새긴 했어도. 렐러드는 당초부터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빌라우드는 단정했어요. 평온하고 잔잔했죠. 주민 수가 적었고, 대부분 교양과 매너를 겸비한 이들이었던 덕분일 거예요. 깔끔한 가로수나 깨끗하게 포장된 도로. 아, 당시에 전 온 세상이 그런 줄로만 알았답니다. 모두가 맵시롭지만 소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어요. 저희 가족도 그랬고요.”
렐러드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분포권을 묘사했고, 엗젤에게도 빌라우드의 어렴풋한 윤곽이 그려졌다. 수수하면서도 산뜻한 주택가가 상상이라기에는 과할 정도로 구체화되어 전달되었다. 어느새 엗젤은 렐러드의 감상에 동조하고 있었다. 렐러드가 기어코 그의 경계를 허물었다.
“유복한 집안이었어요, 저희는.” 렐러드의 고운 낯에는 서서히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농수에 잠긴 안광이 멀리 어딘가를 향했다.
“과거형이군요.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걸까요?”
“아하하, 풍비박산 났으니까요. 이제 저를 제외하고 살아 있는 가족은 없답니다.”
“불상사를 겪으신 건지?”
렐러드는 숨을 골랐다. 사연을 가다듬는 동작이었다. “죽었답니다, 다 같이.”
엗젤의 팔등에 진득한 교부가 일었다. 생판 남의 과거지사에 그는 충실하게 자극되고 있었다.
“그날은 제 아홉 번째 생일이었어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답니다. 아버지의 귀가가 약간 지체되는 바람에 케이크 커팅식은 미뤄졌고, 저는 아버지도 기다릴 겸 거실에서 야심한 시각까지 예의 드라마를 틀었죠. 생일을 맞은 주인공에게 베푸는 어머니의 자비였다고나 할까요. 제게 버금가는 애정으로 본방송을 사수하던 여동생도 덩달아 특혜를 누렸답니다.”
“여동생은 썩 당신을 닮지 않았죠?” 엗젤은 근거도 없이 그렇다는 확신이 섰다.
“자매지만 저희는 판이했죠… 옛날 텔레비전은 잡음이 심했어요. 그래서 어디선가 자잘하게 나는 소리를 우리는 단순 기계음으로 치부하고 넘겼던 거에요. 그 소리가 조금 선명해졌다 싶자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도 했고요. 전 케이크를 자를 생각에 신이 나서 더 이상 한눈을 팔지 않게 되었어요. 중요한 건 제 생일 축하였으니까요.”
“촛불을 꺼트린 초를 다 뽑고 케이크에 칼을 들이밀던 때였어요. 저희 어머니가 쓰러지셨죠. 총격을 당하신 거예요. 제 앞에 철퍼덕, 사람 몸에 난 구멍을 처음 봤죠.”
“현관에 낯선 남자가 서 있었어요. 연기를 뿜는 총을 들고서 말이에요. 어떻게 들키지 않고 침입했는지 아직도 내막은 풀리지 않았어요. 무작정 집안으로 들어와 온 가족을 살해했다는 사실만 투명하죠.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려던 아버지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벌어진 채 굳은 입 구멍에 권총 아가리를 밀어넣었어요. 다음 발을 그 안에 쐈어요. 부모님을 여읜 거예요, 그렇게.”
“지지대가 꺾인 허수아비처럼 근육이 수축되어 마찬가지로 쓰러진 아버지를 뒤로하고 그놈은 저희에게 다가왔어요. 제 동생은 힘이 풀린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갔어요. 전화기를 찾으려던 거였겠죠. 영특한 아이답게요. 하지만 침입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동생의 의도를 간파했어요. 벌벌 떨며 치켜든 동생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구둣발로 짓밟았죠. 몇 번이나, 몇 번이고 바닥에 내려찍었어요. 터지는 순간까지요. 빌어먹을 텔레비전은 참극이 전개되는 내내 켜져 있었어요.”
“저는 생존했죠, 보시다시피. 동생이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틈을 타 지하실로 내려갔어요. 지하실에는 통로가 있어서, 뒤뜰로 나갈 수 있었거든요. 뭐, 비명을 참고, 도망을 쳤고… 이웃들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그 뒤는 뻔하죠. 하룻밤 사이 셋을 죽인 사람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무능한 경찰은 갈피도 잡지 못했어요. 신원 미상자의 추적이야 예사 불가능이잖아요?”
“어쩌겠나요. 렐러드 가의 비극은 미제 사건으로 그쳤어요. 빌라우드가 고수하는 평온의 눈엣가시가 된 전 기숙 여학교로 멀리멀리 보내졌답니다. 그곳에서 불우한 학창 시절을 마쳐야 했는데, 이건 다른 이야기가 되겠네요.”
“여하튼 그런 사정이랍니다. 너무 담담하게 들렸나요? 고통도 되는 기억이지만… 제 삶의 일부를 영영 무시할 순 없더라고요. 제가 되돌아가는 까닭이랍니다. 과거를 정리하려고 해요.”
엗젤은 한동안 말없이 멀뚱한 표정으로 렐러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밀려드는 정보를 탁탁 입력할 경황이 없어 보였다. 렐러드는 여유롭게 시간을 주었다. 곰곰이 뇌를 더듬던 엗젤이 마침내 대화로 복귀했다.
“캘러니라고 부릅시다… 캘러니 양, 그게 여름이었나요?”
“한창 여름이었죠.”
엗젤은 그제서야 기억을 완벽히 복구했다.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의 근원을 이해하자 전율이 흘렀다.
“또 무시 못할 게 뭔지 압니까?” 엗젤의 목소리는 낮고 몽롱했다. 하지만 맑게 팽창된 눈은 반대로 매우 또렷했다. 마치 충격이 그를 한 대 후려쳐서 피로를 지운 양 그는 꿈결 속에서 말하면서도 실상을 직관하는 양면적인 모습이었다.
“운명이에요.” 속삭임은 엗젤 스스로 의도한 말투가 아닌 듯했다. 그는 깨달음을 읊조리는 운명의 교도가 되어 있었고 새어 나온 깨달음은 운명의 예찬이었다. “…운명적이에요.”
“뭐가요?”
그리고 그는 총을 쏘았다.
묵직하지만 재빠른 45구경의 위력이 캘러니 렐러드의 목 정중앙을 관통하고 문간에 박혔다. 렐러드의 가녀린 숨결은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희미한 길을 그리는 연기가 객실을 휘감았다. 여태 쥐고 있느라 미지근하게 달아오른 총신의 온기를 발사된 여파로 방출된 열이 덮어썼다. 이곳은 다시금 엗젤만의 공간이 되어 후끈한 적막을 되찾았다.
“죽으러 돌아왔잖아.”
그는 그윽한 눈길로 화를 자초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갈증을 해소하는 한마디와 함께 신발코로 생명이 이탈한 여자의 창백한 뺨을 툭 쳤다. 전율이 가시자 성취감이 엄습했다. 허탈하게 놓친 미완성 작업물을 운명적으로 맞닥뜨렸고, 찝찝한 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작업의 단계를 ‘완성’으로 조정할 수 있었다. 오늘에서야 찍은 마침표에 그는 급속도로 후련해졌다. 드디어 응어리를 분쇄했다. 그간의 주럽도 싹 씻긴 기분에 그답지 않게 노래라도 부를 수 있었다.
엗젤은 렐러드의 식은 어깨를 붙들고 두상에 손을 얹어 쭉 밀어당겼다. 질긴 근육 조직은 피자 치즈만큼이나 쭈욱 늘어나다 그와의 팽팽한 대치 끝에 뚜둑, 뚜둑 난잡하게 끊겼다. 다행히도 시체가 경직되기 전이었던지라 수월하게 기념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걸 얼마나 하고 싶었게.” 그의 놀라운 완력으로 분리된 머리는 한 손에 클러치 백처럼 들렸다. “난 네가 이렇게 예쁘게 클 줄 알았다니까.”
“쯥, 예정보다 일찍 하차해야겠는걸.” 기념품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누른 엗젤은 창문을 돌아보았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아까보다도 깊은 어둠이 덧그려져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었다.
“일정이 꼬일 거야. 그렇다고 당신을 원망하진 않을게.”
“착각하진 마, 당신은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당신 얼굴에 서렸던 공포는 근사했어.” 안광에 번쩍 서린 이채가 짜증과 피로를 불어 치웠다.
엗젤은 균열의 교차로에 주먹을 질렀다. 부실한 창문은 일격에 산산이 깨졌다. 그는 이런 타격감을 갈구하던 참이었다.
뚫린 창문 너머는 모든 형체가 검게 변해 휘몰아치는 고요한 혼란의 장관이었다. 엗젤은 마구 헝클어진 머리에 손을 짚었다. 몰아치는 바람 탓이었다. 가끔 정돈하는 방식에 변주를 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그는 짚은 손에 힘을 실으면서 두피를 쓸어넘겼다.
그는 창틀에 가뿐히 올라탔고, 귓가에 쓱 화창한 미소를 걸고서는 어둠 속으로 뛰어내렸다.
“아차, 내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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