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풍화가 당신을 떠난 세계의 하루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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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버렸다고 기억할 때, 그것은 사실이다. 내가 너를 버렸던 것 조차 아니라고 네가 슬프게 말할 때,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버림 받은 것이라고 네가 생각할 때, 도대체 누가 지금 네 곁에 남아있는가?" - 『기다림 망각』 (모리스 블랑쇼, 1962)
여름의 더위가 아물지 않은 작년 초가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베르나르 뷔페 회고전을 다녀왔다. 한때는 미술학도였으나 이제는 붓을 꺾고 꽤 긴 시간 영화와 일탈을 벌여온 사람으로서,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고는 하는데, 특히 그것이 학교에서 얼핏 들어본 이름이라거나, 관념적인 이론 내부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중에서도 베르나르 뷔페는, 근현대 국외작가를 향한 화단의 협소한 연구와 담론으로 인해, 국내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그에 대한 논의가 중단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던 작가였다. 뷔페에 대한 대부분의 글들이 이번 전시회 시기를 내외로 갑작스레 여러 지면에 발표되었다는 것과, 같은 시기 열린 뭉크 전시회의 방문객에 비해 뷔페 전시회의 객들이 눈에 띄게 적었다는 사실이 그 반증일 것이다.
더군다나 베르나르 뷔페 회고전 현판에는 대놓고 ‘피카소가 질투한’ 화가라거나 현대미술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작가라는 둥, 다소 보편적이고 신화적인 문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쉽사리 수긍하기 어려운 수식어들이었다. 그 수식들의 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선 뷔페의 작품들이 어떤 의미를 지닌 채, 어느 위치에 놓여있는지 말해보아야 할 것이다.
뷔페의 풍화
요컨대 뷔페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작가의 심상을 가장 직관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때로는 날카롭고, 어쩔때는 정갈하며, 움푹 파여있는 감각적인 선들은 캔버스에 선을 긋고 있던 뷔페의 심상을 가늠케한다. 보다 명료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나열해서 비교해보는 편이 더욱 효과적일 듯 하다.
(1) 청년기 1948년 (당시 뷔페 나이 20세)
(왼쪽부터) <가오리와 물통 (1948)> , <닭 (1948)>, <생선이 있는 정물(1948)>
(2) 중년기 1970년대 (당시 뷔페 나이 40세 중반)
(왼쪽부터) <생트로페, 라 퐁쉬 지구 (1972)>, <로스포르당, 소나무 뒤에서 본 성당 (1975)>, <빌랑드리 성 (1976)>
(1)은 청소년 시절에서 청년 시절까지 그린 그림들이고, (2)의 경우는 그의 작품이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중장년기의 작품들이다.
그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여의고 뷔페 혼자 살아가야 했던 불행했던 유년시절 그린 그림들, 가령 (1) 의 작품들은 난잡한 선들이 캔버스를 뒤덮고 있고, 무미건조한 색감과 왜곡된 정물들이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곳에 그어진 거친 선들은 마치 당시 고독과 연민에 빠져있던 뷔페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반면 그가 사회적으로 유명 화가로 떠올랐을 시기의 작품들 (2)은 대부분 초기에 비해 비교적 단조롭게 정리된 선들과 정물화같은 일반적인 색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작품들에 그어진 선들은 부동할 것처럼 단단하고 두꺼워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도록 한다. 그것은 초기에 비해 외려 산뜻하고 정갈한 감각을 불러일으켜서 이 시기 그가 심적으로 차분한 생활을 보냈다는 것을 짐작 하도록 한다. (그러나 60년대의 뷔페는 마냥 행복했던 것 같지는 않다. <광대>와 <자화상>에 무수하게 분포한 거친 선들은 뷔페가 자신의 사회적 명성과 반대되게 오히려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뷔페에게 ‘그림 그리기 행위’란 자신이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그 스스로 투명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상태와 존재를 기록하는 과정이었으며, 그의 작품들이 다양한 선들과 조화를 이루어서, 종국에 하나의 풍화를 지닌 작품이 되었을 때, 그것은 곧 뷔페의 치열한 자기존재의 성찰적 결과물에 다름 아니었다.
이처럼 우리는 뷔페의 그림을 통해 그의 작품에 기록되고 표현되었던 그의 상태를 살펴볼 수 있다. 영화가 마치 쇼트의 연쇄로 인해 하나의 완전한 작품이 되는 것처럼, 뷔페 역시 무수히 많은 선(감정)들을 연쇄시키며 완전한 작품/풍화를 만들어냈다.
이같은 뷔페의 작품이 지닌 풍화성은, 마르셸 뒤샹 이후 현대 미술사조의 패러다임이 작품의 전체적인 풍화/이미지가 아니라 작품 근저에 숨어든 의도로 치환된 오늘날, 그의 작품들을 더욱 희소성있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곧 뷔페의 작품이 현대미술과 다소 불확실한 거리성을 두고 있다는 것을 감각케한다.
뷔페는 언제나 추상적인 사색을 요구하던 뒤샹과는 반대로 난폭한 선들이 일구어낸 전체적인 풍화를 통해 자신의 시선과 상태를 표현해냈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은 추상화가 아니라 ‘회화’의 범주에 속해있다고 분류하는 편이 알맞을 것이다. 그 것은 뷔페가 말년에 이를수록 정물의 이미지를 왜곡하고 사물을 추상화시켰던 ‘피카소’와 전혀 다른 위치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동시에, 그가 ‘현대미술’의 거장이라기 보단 오히려 근대미술(회화)과 현대미술(추상화)의 경계에서 두 미술사를 연결짓고 있던 마지막 보루라는 것을 현시한다.
뷔페와 나
전시회를 나오며 많은 관객들이 회고전 현판 앞에서 사진 찍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간혹 “피카소에 버금가는 사람이래”, “이 사람 그림 너무 아름답다, 그렇지?” 라는 식의 뷔페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부조리한 찬사들 역시 들을 수 있었다. 뷔페의 그림을 앞에 두고 아름답다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겨우 생계를 이어나가던 아이가 캔버스에 마구 그어낸 거친 선들을 보고 도대체 어떻게 “아름답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자신의 얼굴(자화상)에 스크래치를 내던 사람의 모습을 두고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떻게 형용 가능한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럴때면 동시대 미술에 대한 대중의 비평적 소비가 과거에 비해 그다지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몰려와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내 이런 식으로 관객성을 비난하고, 뷔페의 그림을 다 안다는 식으로 사고 한다는 것 자체가 비평적으로 그다지 타당한 행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 생각해보면, 사실 나 역시 뷔페의 그림을 어떻게 형용해야할지 모르는 것 같다는 의문 때문이리라. 난 뷔페를 두고 근대와 현대미술을 연결짓던 최후의 보루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 내가 그의 회고전에서 느꼈던 감흥을 설명하기엔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뷔페의 그림들을 보고 느꼈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참을 생각하다, 문득 뷔페의 작품이 건네주는 설명되지 않는 감흥이 미술을 대하는 나의 감정적인 태도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미술에 대해 말할때마다 드는 싱숭생숭한 감정. 이 복잡미묘한 감정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다소 장황한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이것은 종종 오늘처럼 미술에 대한 이야기, 미술비평 미래에의 대한 근심을 걱정할 때면 돌연 나에게로 찾아온다. 그것은 미술을 기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만들어내서, 미술에 관련된 이야기를 발화 할 때마다 (매우 불필요한) 자기검열을 수행시키고는 하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붓을 꺾은지가 언젠데 이제와 누군가의 작품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건 너무 기만적이지 않은가’,하는 식으로 특정 미술작품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일축시킨다. 그럴때면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미술을 등지고, 미술은 한참을 서있다가 나를 떠난다. 우리 관계는 아무것도 아닌게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미술을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 한때는 나도 미술을 사랑했다. 너무도 사랑해서, 열시간씩 의자에 앉아 선을 그었고, 손이 망가져도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바꿔 말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적어도 그 모든 것을 하기 전까지는, 나는 미술을 좋아했었다고. 나는 분명 열시간 씩 의자에 앉아 이젤에 발을 걸치고 선을 긋기 전까지만 해도 미술을 좋아했다. 다만 내가 미술을 통해 원한 건 그런게 아니었다. 따분한 정물을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는게 아니었고, 연필을 깎다 손이 망가지는 것 역시 아니었다. 하루종일을 낡은 조명에 의지한 채 미술실에 사는 건 이제 막 초등학교를 나온 아이에겐 너무 가혹하다. 그림을 그리면 항상 듣게되는 합평이란 이름의 상처. 사랑하는 것을 배우며 듣게 된 비난에 가까운 비판들은, 뜨겁게 타오르던 심장에 물을 적시고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의문을 갖게 한다. 내가 그것을 너무도 사랑해서 하게 된 일들은, 내가 그것을 너무나 끔찍이 여기도록 만들었다. 자정이 가까운 어느 깊은 밤, 미술실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저절로 알게 되었던 거 같다. 더 이상 미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그날밤 집에 돌아와 부모님 앞에서 울고불며 난장을 친 끝에, 그 끔찍한 곳으로부터 도망쳤다.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우리의 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감정은 갑작스레 솟아올라, 한때는 너무 사랑했던 것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이 미술에 대해 함구하기를 종용하고, 동시에 무고하다는 순결 역시 솟아올라 그것에 대해 입을 열고자 하는 마음을 부추긴다. 내가 미술에 대해 언급하기를 이렇게 꺼리는 까닭은, 사랑했던 것을 배신했다는 배덕감이 미술을 향한 지식을 표출하고자 하는 지적 욕망을 잡아먹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여전히 미술에 대한 이 마음은, 조금 더 복합적인 것 같다.
그것은 미술을 관둘 때 더 이상 그림은 눈에도 두지 않을 것처럼 생각했으면서도, 이렇게 간간히 회고전과 특별전에 방문하는 것처럼, 모순적이고 역설적이며, 어딘가 뒤틀려있다. 난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형용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내가 느끼는 그 감정들은 언뜻 뷔페의 것과 비슷해보인다.
그림을 사랑하던 뷔페는 캔버스 위에 거칠고 난폭한 선들을 그어버렸다. 그 선들은 대부분 부모님의 부재, 친구의 부고, 자신의 몰락 등에 의해 더욱 강렬한 생명력을 얻었고, 그의 그림이 스타일리시해질수록 뷔페의 이름은 더욱 가치를 얻었다. 슬픔이 행복이 되는 역설. 혹은, 행복이 슬픔이 되는 역설. 이 역설은 내가 미술을 사랑해서 행위했던 행동들이 돌연 나에게 칼이 되어 돌아왔던 것처럼, 매우 모순적이다. 뷔페의 대표작 <광대>나 <자화상> 속 담겨있는 우중충한 우울함 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 역시 완전히 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 뷔페의 작품과 닮아있다는 인상이 드는 까닭 또한 그래서 아닐까?
다른 이의 그림전도 아니고 굳이 뷔페 회고전에 다녀와 오래간 묵혀온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던 건, 아마 그가 만들어낸 작품의 풍화가 표출하고 있던 심정이 나의 것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의 그림은 언젠가 내가 느끼고 있는, 그러나 저 기억 저편에서 망각하고 있던 역사적 감각을 물질적으로 소환시켜 놓았고, 그것과 직접적으로 감응하도록 했다. 그의 그림을 보고 내가 직접적으로 마주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하지만 난 뷔페의 회고전에서 겪은 이 감정적 경험들이 미술과 나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뷔페는 자신이 죽기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 거친 선들을 숨기지 못했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우울한 과거와 신경적인 기억들이 뷔페를 괴롭혔고, 죽음의 순간까지도 그것은 뷔페의 곁에서 함께 했다. 이 과거와는 결코 이별할 수 없다. 발생해버린 과거는 우주가 촉발시킨 하나의 사건일지 모르겠으나, 그 과거를 특정한 순간 떠올리고 불러들이는 건 자신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과거는 우리가 거리를 두고 해결할 수 있는 타자가 아니라, 우리의 핏줄에 토착되어 도저히 거리를 벌릴 수 없는 자신의 또 다른 마음이다.
예술의 전당에서 빠져나온 이른 오후, 초가을의 바람은 햇살에 데워지고 있었고, 난 그 햇살 속을 걸었다. 5년 전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미술을 등지고 걷고 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이제 우리는 그 어떤 애증으로도 묶여있지 않으니깐. 하지만 여전히 먼 과거가 불러들인 이 응어리진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 속 무겁게 가라앉아 그것을 생각하도록 한다.
요컨데 어떤 관계는 그저 과거로 남겨두어야 더욱 아름답다. 나는 미술이 내게 그런 존재이길 바란다. 그래서 언젠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관계도 부식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걸음을 옮겨나갔다. 가로수길을 가로질러 버스에 몸을 실었고, 난 그곳을 떠났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다보면, 언젠가 미술과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을 망각하게 될 것이고, 종국엔 풍화가 나를 떠나간 세계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미술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처럼 회화 같은 하루가 나의 곁에 함께 하고 있지만, 이 마저 잊어버리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내가 기억하던 세계의 풍화는 점점 옅어질 것이다. 난 이런 하루하루가 나를 떠나는 그런 세계를, 또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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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자
- 2025-05-21
올 연초 글틴 뒹굴뒹굴 게시판에서 김희수, 이형규, 강완 등 소설 게시판과 시 게시판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여러 글티너들을 필두로 ‘글틴 오픈 채팅방'이 개설되었다. 오픈 채팅방 개설소식을 확인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건 글틴을 졸업하고 어딘가에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선노아였다. 1년 전 즈음 선노아와 글틴 오픈 채팅방을 만든 적 있는데, 그 채팅방은 사람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활발한 대화가 오가지도 않았기 때문에 한달만에 파산했다는 아픈 기억이 나를 건드린 것이었다. 그래서 이 채팅방 역시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너무나도 섯부르게 짐작하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너무 궁금하지 않나. 올해와 작년에는 셀수없이 많은 글티너들이 유입되었다. 과연 이들이 정말 과거와 같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들은 글에 대한 열정이 있지 않을까? 이 의심을 무너뜨린건 이형규와 김희수, 강완 모두 장원 수상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글은 동시대 여느 작품들에 비해 고민과 생각이 유려하게 들어있다. 그래서 머뭇거리기를 멈추고 필자 역시 동시대 청소년들과 활발한 담론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오픈 채팅방에 들어갔고, 놀랍게도 그곳에서 선노아, 모모코, 조민준부터 난바다, 데카당, 방백, 눈금실린더, 송희찬 기능사 등, 반가운 이름들을 다시 보며 서로의 취향과 일상같은 사소한 것들을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문학과 예술의 책무에 대한 마냥 가볍지많은 않은 대화들을 이어나갔다. 그 중에서도 채팅방의 주를 차지하고 있던 것은 글티너들을 통한 합평과, 글틴에 대한 이야기들- 가령 한땐 멘토님들께서 뒹굴뒹굴 게시판에 자주 등장하셨다거나, 이런 글들이 있었고, 합평을 해달라거나 지금은 어느 게시판의 누구누구의 글이 좋다 같은 것들 - 이 대부분이었는데, 나 스스로 그런 대화문들을 읽어나가며 과연 청소년들에게 글틴이란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그렇기에 장기적이지는 않지만 비교적 꾸준히 글틴에 글을 기고해왔던 필진으로서 글틴에 글을 기고한다는 것의 의미를 상정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누군가 글틴의 수식어를 묻는다면 말하고 싶은 건 오직 한가지, ‘국내 유일 청소년 웹진’ 이라는 것이다.‘웹진'이라는 이름 덕분인지 이 곳은 여느 공모전처럼 글을 투고했다고해서 그 글이 폐기되거나 잊혀지지 않는다. 이 곳은 우리가 글을 쓰면 그 글이 힘들게 수확한 비료처럼 밑거름이 되는 곳이고, 또 우리가 쓴 글의 질이 아무리 낮다고해도 그것을 읽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장소다. 뒹굴뒹굴 게시판에서는 활발한 담론들이 이루어지고 커뮤니티가 생겨난다. 이곳에선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할 수도 있고, 한해 동안 기고된 작품들을 꼽아 문학상을 상정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글틴은 청소년들이 서로의 미래를 도모하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자그마한 ‘문단’. 그 자체다. 많은 청소년 작가(혹은 작가를 지망하는 청소년)들이 등단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글틴은 우리들이 꿈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실제로 이름만 들어도 쉽
- 화자
- 2025-03-18
얼마간 영화를 보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기말고사 준비가 한창이었고, 내외로는 연말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정신없이 하루 이틀을 보내니 평생을 함께 할 것 같던 영화와 텍스트들을 자연스레 멀리하게 되었고, 그렇게 영화관에 가지 않은지 어엇 두 달이 넘게 되었다.이따금 구세군종을 울리는 사람들을 지나쳤고, 광화문 광장에서 사랑의 열매탑을 바라보며 아,아, 벌써 이렇게 한 달이 지나는구나, 생각할 뿐이다. 그러다가도 창 밖으로 눈이 내리면 그제서야 어느새 겨울이 왔다는 것을 실감한다. 영화는 언제 보지, 하는 생각과 함께. 영화가 없는 일상은 내가 없는 일상이었다. 영화란 블랙박스에서 어떠한 사건을 이미지화시킨 후, 그것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화(또는 왜곡)하는 속성을 띄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영화가 인화해낸 시간 아래서 시점과 상황을 바라보며 새로운 사건을 경험한다. 나는 그것이 보여주는 새로운 시선들과 경험을 마주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가상적 경험을 통해 나를 사유할 수 없었다. 일상에서 시간은 항상 일정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영화를 보던 때의 감각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래서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그렇게 따분하고, 어느 정도 쓸쓸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참에, 오래간만에 휴대폰을 확인하니 내 앞으로 여러 메일들이 와있었다. 대게는 광고성 메일들이었지만, 전부 영화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읽어보니 몇몇은 서독제에서 발송된 영화제 기금 연명메일과 현재 진행 중인 영화제의 뉴스레터에 관한 것이었고, 또 다른 것들은 구독 중인 영화 관련 웹진들과 예술극장에서 온 회원메일들이었다. 글들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읽으며, 그곳에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지금은 이런 영화가 나왔나 보군요, 하며 뿌옇게 흩어져가던 영화를 향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는 문득, 이런 내 모습이 꼭 샹탈 아커만이 1975년 만든 장편영화 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 샹탈과 나은 샹탈 아커만이 뉴욕으로 이주하고나서 자신의 어머니와 나눈 편지의 대화문을 중심으로 만든 실험영화로, 이 영화에는 사건이나 인물같은 그 어떤 극적인 요소도 등장하지 않고, 프랑스에서 날아온 어머니의 편지를 읽는 아커만의 나레이션과 함께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건물들이 뻗어난 뉴욕시의 단편적인 일상만 보이는 것이 전부다. * 영화 속 보여지는 뉴욕의 풍경 (아무 이야기도 없이 계속 비슷한 쇼트들이 이어진다)영화는 시작부터 ‘가족들은 네가 너무 보고 싶어'라고 (샹탈의 입을 빌려 어머니의 편지 속 한 문장을) 말하지만, 정작 스크린에는 사람 없이 황량한 도로만 보일 뿐이고, 엄마는 계속해서 딸(샹탈 아커만)에게 안부를 묻지만 딸의 답장은 결코 들리지 않는다. 대신 딸을 향한 엄마의 막연한 그리움과 공허만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샹탈은 그런 엄마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입으로 읽는다. 딸이 영화 내내 엄마가 자신을 그리워하며 써 내려간 글을 자신의 목소리로 읽는 행위에는, 자연스레 타자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녀(엄마)와 연대/공감하
- 화자
- 202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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