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망령과 죽음의 골짜기에서 -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와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를 중심으로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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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속 유령을 찾아서
조명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세면대. 세수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중기에게 오래전 망각하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어떤 남자가 강압적으로 묻는다.
“○○○ 어딨어?!”
중기는 떨리는 손을 허공에 뻗은 채 세면대를 벗어나 빛이 새어오는 문 틈으로 다가간다. 귓가에 울리던 폭력적인 소리는 더욱 크게 증폭된다. 과거의 소음이 현재를 장악해버린다. 김응수 감독의 1998년 영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의 한 장면이다.
영화는 불혹에 접어든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오래간만에 만나 시간을 보내는 내용을 담고있다. 언뜻보기에 애틋하고 향수어린 감각이 묻어있을 것 같은 줄거리이지만, 영화를 보게되면 정작 그런 것들과는 다소 거리가 먼 영화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오히려 위에서 서술한 세면대 장면을 보면 몸서리 처질 정도로 오싹하기까지 하다. 도대체 아름다워야할 이 장면이 이토록 소름돋게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를 살펴 보기 위해 우선 세면대 장면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아야할 듯 싶다. 영화는 80년대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학생들의 현재(90년 대)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한국을 떠나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데, 중기라는 인물은 군사독재시절 운동권으로서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동료에 대해 자백해버려 그의 죽음에 선험적으로 일조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세면대 장면에서 모습을 드리우는 과거의 소음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잊혀지지 않는 그 죄책감(혹은 시대가 남긴 트라우마)이라는 유령적 존재가 우리의 일상에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대 운동권들이 겪어야했던 ‘물고문'이라는 시대적 폭력의 상흔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장면이 이토록 섬짓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망각하고 있던 과거(를 재현시키는 소음)가 세수를 하려는 일상적인 순간에 불쑥 찾아와 현재를 장악해버렸다는 것에 있다. 요컨데 오랜 시간이 흘러버린 과거는 - 우리의 기억을 통해 왜곡된 생태로 현실에 개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 그 자체로는 더 이상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에, ‘유령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발생한 영화 속 사건(중기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백하는 사건)이 특정 쇼트를 통해 물리적인 이미지로 보여지지 않고, 오직 인물들의 언급, 또는 비명, 목소리 같은 청각(사운드)에 의해 전개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이 유령적인 존재는 우리에게 물질적인 방식을 통해 직접적으로 다가 올 수 없다. 반면 그것이 간접적으로 우리 현실에 침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과거가 무의식 중에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마치 유령처럼 어느 순간 비물질적으로 우리의 현실에 다가온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적어도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에서 만큼은) 과거가 현재에 소환되면, 현재의 지반을 이루고 있는 무수히 많은 과거의 층위 중 하나가 현재의 표부와 뒤섞이며 현재(의 상태)는 위태롭게 변질되어 버린다. 일상적이었던 것은 “비일상적”인 것이 되고, 우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해왔던 현재의 모든 것은 어색한 것이 되어버리는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덮쳐온다. 이곳에는 가늠할 수 없는 카오스가 머물고 있다. 세면대 장면이 이토록 무섭게 다가오는 건 우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해오던 일상이 유령적 존재에 의해 어지럽혀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 속 죽음의 골짜기
이 유령적 존재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불가리아 독립 운동가들이 마주해야했던 현실을 다룬 빈카 젤라즈코바(binka zhelyazkova)의 1957년 영화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Life Flows Quietly By…)>에서 더욱 확장된 채 우리 앞에 주어진다.
영화는 은신처가 발각된 불가리아 독립 운동가들이 어느 골짜기에서 소련군과 치열한 공세를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전세가 기울고, 패배할 위기에 놓이자, 독립단체의 수장인 젤료는 자신의 가족들과 동지들을 동굴에 숨기고 희생하려한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동료 벨코는 젤료 대신 자신을 희생하고,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젤료는 자신이 간접적으로 동료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빠지게 된다. 그 죄책감은 과거의 유령이 되어 벨료에게 찾아오고, 결코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유령은 어느 오전, 방 안에 홀로남은 벨료 옆에 지독하리만치 쓸쓸하게 펄럭거리고 있는 커튼이 되고, 시장으로 당선된 벨료의 강요로 인해 시청에서 제작되고 있는 “젤료”의 동상이기도 하며, 종국에는 죄책감에 못이긴 벨료가 자신의 머리에 겨눈 총구가 되기도 한다. 이 죄책감이라는 ‘과거의 유령’은 어느 방식으로든 우리 곁에 머문다. 그렇기에 이 유령은 일상을 배회하고 있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속 유령과 같은 성질을 띄고 있다고 말해 볼 수 있다.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가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속성의 유령을 불러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부, 젤료의 희생 덕분에 현재를 살아가게된 이들이 영화의 시작점이자 첫 장면의 배경이 되었던 골짜기에 모여 앉아 이제는 고인이 된 젤료를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옛 동료들이 서로 눈빛을 확인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먹구름이 몰려와 비가 쏟아붇고, 이내 벨료의 목소리가 천둥번개처럼 골짜기에 울려퍼진다. 죽은 벨료는 소음이 되어 그들의 시간에 찾아온다. 과거의 소음이 현재를 장악한다.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 속 유령은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동일한 방식으로 소음(또는 청각)의 형태를 두룬 채 현실에 침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순간 젤료는 비로소 ‘청각’이라는 현실(적 감각)에 깃들들므로서 현재에 부활하게 된다.
위에서 설명한 두 장면(-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속 세면대 장면과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 속 골짜기 장면-)은 유령을 현실로 불러온다는 점에서 일종의 ‘엑소시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는데, 특히 죽은 젤료를 회상하기(또는 부활시키기) 위해 동료들이 하나같이 무언가를 결심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각자의 자리가 이미 정해져있는 것 처럼 둘러앉아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 속 한 장면은 유령을 현세에 불러들이는 일반적인 구마행위의 의례적 형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령의 얼굴과 엑소시즘의 관습적 행태: 본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서
사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를 통해 발견된 죄책감과 엑소시즘이란 키워드는 무수히 많은 영화매체들을 통해 다뤄진 바 있기에 우리에게 있어 그다지 어색할 것이 아니다. 당장만 보아도 죄책감과 유령이 맞닿아 있는 영화들, 가령 친구에게 모질게 굴었던 마음이 응어리진 죄책감으로 남아 친구의 죽음을 부정하고 영화를 통해 다시 부활시켰던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그리고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동일한 방식으로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 혹은 그 반대로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자신을 살해한 의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빙의된 소녀가 등장했던 마이크 드 레온의 <암흑> (또는 <엑소시즘>, <비틀쥬스>,<컨져링>, <전설의 고향> 그 외의 무수한 공포영화) 등을 떠올려본다면, 죄책감과 엑소시즘은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광범위하게 뻗어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굳이 왜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를 살펴보아야만 했을까?
두 영화가 일반적인 영화들로부터 지니는 특수성은 어떤 것일까?
요컨대 무수히 많은 엑소시즘 영화들에서 유령은 ‘이미지(혹은 쇼트)’라고 불리는 시각/물리적 육체를 부여받는 반면,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 속 유령(들)에게는 그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앞서 언급했던 두 영화와 일반적인 영화 간의 특수성이 발견된다.
<너와 나> 속 세미와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리타에게는 육체가 있다. 그들은 모두 죽은 이들이지만, 타자와 손을 맞잡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타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 그것은 마이크 드 레온의 영화 <암흑>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속 언니는 ‘동생의 육신’이라는 이미지/물리적 존재에 빙의한다. 그 빙의체를 보고 아버지는 공포에 흽쌓여 ‘땀’이라는 물리적 체액을 흘린다. 이 역시 명백히 무언가를 보고 반응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본 무수히 많은 공포 영화 속 타자의 몸에 빙의한 채 몸부림치는 유령과 표정, 그리고 그 유령을 보고 공포감에 휩쌓인 인물들을 떠올려보라.
장면 1 -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 속 이미 세상을 떠난 배티가 리타와 손을 맞잡고 있다
장면 2 - 조현철의 영화 <너와 나> 속 이미 세상을 떠난 세미가 하은을 바라보고 있다
장면 3 - 마이크 드 레온의 영화 <암흑> 속 죽은 여동생이 테레사에게 빙의하고 난 이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엑소시즘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유령들에게는 타자를 마주하고 지을 수 있는 표정과 얼굴이 있다. 그러나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처럼, 청각(사운드)에 깃든 유령에게는 그런 얼굴이 없다. 이 유령은 얼(굴)이 없기 때문에 타자를 보고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없고,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없기에 우리로서는 그것의 상태와 정체 또한 알 길이 없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에 등장하는 유령은 형태가 뚜렷치 않고 추상적이기에 언제라도 흩어질 듯 불완전한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존재들은 왜 불완전한 상태여야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답 해보기 위해서는 지금의 논의를 잠시 중단하고, 두 영화를 또 다른 방식으로 우회하여 바라보아야 할 듯 싶다.
망령의 존재와 위험성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눈 여겨볼 만하다.
두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각기 다른 사회 운동(불가리아의 독립 /5.18 민주화운동)의 주된 당사자이자 피해자-그들은 조국을 위해 청춘을 희생했지만, 정작 그들이 지켜낸 조국은 그들의 말로에 멀리 떨어져 있다-들이며, 자신들의 동료를 희생시켰다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고통스러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동료의 거처를 불어 팔아넘겼다는 죄책감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실책으로 동료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죄책감(<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에 휩싸여 있다. 특히 동료의 희생/죽음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중기와 젤료는 동일인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은 옛 동료나 사회로부터 소외/버림받은 채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죄책감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두 영화 속에서 표명되고 있는 정치-사회의 끝에는 언제나 국가나 공동체의 화합이 아니라 개인의 책무가 머물고 있다. 이 책무는 해방군이라는 공동체의 리더로서, 동료 대신 내가 희생했어야 한다는 후회, 친우와 나라는 정치적 관계 속에서 침묵했어야 했다는 후회로 맴돌아 과거를 현재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발생한 과거를 바꾸기 위한 불가능한 시도이며, 회귀하고자 하는 망상에 불과하기에,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 속 등장하는 유령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적 존재가 아니라, 불가능을 가능으로 믿게 하는 망상적인 존재, 즉 망령이다.
이 망령은 개인이 세상을 뒤바꾸기 위해 만든 존재이기에, 불완전하게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상과 후회에 휩싸여 있는 이들은, 여전히 과거로의 회귀가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 망령을 현실에 소환하고, 불완전한 과거(의 소리)와 일상을 함께 하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속 중기처럼, 그것과 함께 생을 살아간다. 동시에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그들은 그 회귀 욕구가 가능함을 깨닫고, 죄책감이라는 망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죽음에 다가서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 속 벨료와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의 기웅이다. 그들은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다. 벨료의 경우, 죄책감이라는 과거에 붙잡혀 자신의 이마에 총구를 대고, 기웅은 오래전 “트로츠키주의자”였던 과거를 떠내 보내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자”임을 자처하다 극의 후반에 이르러 갑작스레 자살한다. 특히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속 기웅 경우, 과거(의 망령)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이미 예견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망령은 종국에 어떤 방식으로든 찾아와 현실을 전복시키고 우리에게 죽음을 종용한다.
과거의 망령이 우리를 찾아오면 현실은 부정 당하고, 불완전한 존재에 의해 유린 당하다 죽음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죽음은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순식간에 우리를 먹어 치우고 마리라. 우리는 우리를 구속시키려 드는 네크로필리아적 마음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불)완전한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 작금의 한국과, 망령 곁에서
이 망령과 네크로필리아적 마음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과 동떨어져있다는 판단은 섯부른 일처럼 느껴진다.
한때 들뢰즈는 어느 강연에서 “(영화에서) 목소리는 대기 중으로 증발하고, 이미지만이 남는다”고 말했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는 대기 중으로 증발하지 못하고 대지에 갇혀 있는 목소리들에 관한 영화다. 증발하지 못한 소리들이 계속해서 현재와 일상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현재에 잔존하는 소리들이야말로 과거와 현재를 전복시키는 매개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망령 역시 증발하지 못한 소리들을 통해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래 한국에서는 증발하지 못한 것들이 유독 많이 보였다. 특히 최근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12.3 계엄령, 촛불집회, 태극기집회, 항공 사고, 법원 점거 폭동 등) 은 그 과거의 망령을 다시 현재로 끌어오고 있지 않았던가? 그것이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과거의 특정 참상과 사고들(군부독재시절과 민주화운동, 그리고 세월호 등)을 연상시키고, 비슷한 사회적 반응들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계속해서 결코 반복되어선 안 될 과거가 현재에 찾아오고 있는 것만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온라인 상에서는 참사로 인해 소중한 이들을 잃은 유족들을 향한 조롱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고, 어느 밤 기습적으로 선포된 계엄령과 국회를 둘러싼 군부는 마치 7080 군부독재시절을 떠올리도록 한다.
한 때 수백만, 수천만 국민이 군부의 위협 아래 광장에 모여 “독재타도”라고 외치던 목소리가, 또는 어떤 참상이 발생한 이 후 울부짖던 유족의 울음소리가, 저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80년대에 들릴 법한 목소리들이 여전히 길거리에서도 유효한 까닭은 무얼까?
그만 들려야 할 법한 외침이 아직까지 들리는 이유는 도대체 무얼까?
빅토르 에리세의 단편영화 <아나, 3분 남았어요>에서, 아나는 세상의 불행과 참사들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사실 죽은 이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껴요”
죽어야 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외쳐지고 있다.
이처럼 도달하지 못한 목소리들은 (죽어/지나버린)세기를 건너뛰어 세상을 배회하다가 현실에 찾아온다. 다른 한편에선, 목소리를 듣지 못한(혹은 듣지 않은) 이들과,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뱉는 이들이 계속 충돌한다. 이들 중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검토를 요구하기에 섣부르게 단정 지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가지는, 목소리를 듣지 않는 이상, 목소리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고요한 인생의 흐름에서>처럼 우리의 일상에 돌연 찾아와 우리를 괴롭힐 것이며, 과거는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란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들려오는 외침과 아우성, 무수한 소리들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소리들을 끌어안고 해결해서, 증발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과거의 망령이 비로소 (소멸이 아닌) 증발을 할 수 있다. 모든 화합과 유예는 다가오는 목소리를 튕겨내지 않고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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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자
- 2025-03-26
"내가 너를 버렸다고 기억할 때, 그것은 사실이다. 내가 너를 버렸던 것 조차 아니라고 네가 슬프게 말할 때,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버림 받은 것이라고 네가 생각할 때, 도대체 누가 지금 네 곁에 남아있는가?" - 『기다림 망각』 (모리스 블랑쇼, 1962)여름의 더위가 아물지 않은 작년 초가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베르나르 뷔페 회고전을 다녀왔다. 한때는 미술학도였으나 이제는 붓을 꺾고 꽤 긴 시간 영화와 일탈을 벌여온 사람으로서,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고는 하는데, 특히 그것이 학교에서 얼핏 들어본 이름이라거나, 관념적인 이론 내부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중에서도 베르나르 뷔페는, 근현대 국외작가를 향한 화단의 협소한 연구와 담론으로 인해, 국내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그에 대한 논의가 중단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던 작가였다. 뷔페에 대한 대부분의 글들이 이번 전시회 시기를 내외로 갑작스레 여러 지면에 발표되었다는 것과, 같은 시기 열린 뭉크 전시회의 방문객에 비해 뷔페 전시회의 객들이 눈에 띄게 적었다는 사실이 그 반증일 것이다. 더군다나 베르나르 뷔페 회고전 현판에는 대놓고 ‘피카소가 질투한’ 화가라거나 현대미술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작가라는 둥, 다소 보편적이고 신화적인 문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쉽사리 수긍하기 어려운 수식어들이었다. 그 수식들의 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선 뷔페의 작품들이 어떤 의미를 지닌 채, 어느 위치에 놓여있는지 말해보아야 할 것이다. 뷔페의 풍화요컨대 뷔페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작가의 심상을 가장 직관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때로는 날카롭고, 어쩔때는 정갈하며, 움푹 파여있는 감각적인 선들은 캔버스에 선을 긋고 있던 뷔페의 심상을 가늠케한다. 보다 명료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나열해서 비교해보는 편이 더욱 효과적일 듯 하다.(1) 청년기 1948년 (당시 뷔페 나이 20세) (왼쪽부터) , , (2) 중년기 1970년대 (당시 뷔페 나이 40세 중반) (왼쪽부터) , , (1)은 청소년 시절에서 청년 시절까지 그린 그림들이고, (2)의 경우는 그의 작품이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중장년기의 작품들이다. 그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여의고 뷔페 혼자 살아가야 했던 불행했던 유년시절 그린 그림들, 가령 (1) 의 작품들은 난잡한 선들이 캔버스를 뒤덮고 있고, 무미건조한 색감과 왜곡된 정물들이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곳에 그어진 거친 선들은 마치 당시 고독과 연민에 빠져있던 뷔페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반면 그가 사회적으로 유명 화가로 떠올랐을 시기의 작품들 (2)은 대부분 초기에 비해 비교적 단조롭게 정리된 선들과 정물화같은 일반적인 색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작품들에 그어진 선들은 부동할 것처럼 단단하고 두꺼워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도록 한다. 그것은 초기에 비해 외려 산뜻하고 정갈한 감각을 불러일으켜서 이 시
- 화자
- 2025-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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