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단단한 마음을 너에게
- 작성자 송희찬
- 작성일 2025-08-21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691
(글에 들어가기 전
** 부분은 제목 사진 혹은, 프로필 사진을 참고해 주세요)
지난 2024년 나에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여느 때와 같던, 평범한 연도인 줄 알았는데. 그해 나는 자의와 타의로 인해,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9월에 자퇴했다. 자퇴를 한 계기를 묻는다면, 건강 문제라는 단어로 답하지만, 세세하게 말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내 문제가 하나의 사이클 문제가 아니라, 복합적인 문제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나는 2022년도 10월부터 원인 모를 기침을 앓아왔다. 끝없는 기침으로 동네 의원을 밥 먹듯 다녔다. 의사는 그런 나를 보고, 약한 약부터, 독한 약까지, 기침과 관련된 약을 모두 사용했다. 그런 그의 노력에도, 기침은 호전되지 않아, 대학 병원 소아 청소년과 교수들, 정신과 의사까지 만났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진단을 했다. 소아 청소년과 교수 중 한 명은, 천식이라 보고, 다른 한 명은 기관지가 민감한 것, 정신과 의사는 기침 틱으로 내 병명을 진단했다. 그래서 나는 알레르기 약 {싱귤레어}, 기관지 확장제 {심비코트}, 틱 약을 모두 혼합해서 먹었다. 그래서인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기관지 한쪽에서 끙끙거리며, 내 생활을 조여왔다.
사실 고등학교 진학 및 졸업은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침 때문에, 내가 수업을 듣기 힘들뿐더러, 반 친구들에게도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1학기까지는 반 친구들이 아무 말 없이 나를 대해줬다. 나 역시 친구들의 배려에 보답하고 싶어, 더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고, 기침을 최대한 참아 보려고 했다. 하지만, 넘치는 물을 누르면 누를수록 물이 빠지는 게 아닌, 쌓이는 것처럼 기침 역시 해소되지 않고, 내 의식으로 눌려 쌓여갔다.
지난 8월 누르고 있었던 게 터진 걸까? 감기가 들어온 이후부터, 내 기침은 갈비뼈에도 금이 갔던, 2022년의 기침과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이명, 두통 등 자잘한 잔병들이 나를 학교 밖으로 몰아세웠다. 아무 도 나에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내가 내는 기침 소리 때문에 보이는 눈치가 보였고 이는 나를 조여왔다. 이를 본 담임 교사인 과학 선생님께서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나에게 자퇴를 권유했다.
"선생님은 희찬이 한 명의 선생님이 아니니까. 2학년이 돼서도 이렇게 기침이 나오면, 자퇴해야 할 확률이 커질 거야?"
그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는 듯 보였다. 혹여나, 논리에 빈틈이 있더라도, 그 빈틈 역시 나를 감정적으로 조여왔기에, 빈틈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빈 곳이 없었기에 나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자퇴를 선택하는 방법밖에. 그렇기에 나는 9월 10일 오후, 자퇴 서류에 서명했다. 단지 미안함과 원망 그리고 이해만이 몸을 따라, 학교 밖을 나왔다.
자퇴하고 난 뒤, 9월과 10월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단지 갑자기 속이 뜨거워지고, 기관지가 사람을 만나기를 거부하는 기침만 나 올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시, 소설, 수필, 비평을 계속 쓴 뒤 글틴에 올리고, 가보지 않은 곳을 떠나보는 등 경험을 확장 했다. 그렇기에 글은 계속 써졌지만, 기침 때문에 몸이 힘들었다.
그러던 지난 11월이었다. 그때부터는 학교 밖 청소년 센터를 다니며, 검정고시 준비와 자기 계발을 했다. 그 당시 내가 배우던 것은 켈리그라피, 마음을 쓰는 손 글씨였다. 다른 수업과 달리 이론보다는 만들기 위주,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렇기에 캘리그래피 수업의 활동 목표는 "글에 자신만의 개성과 마음을 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글씨 쓰기 연습할 때, 내 자작 시의 일부를 쓰고, 나만의 방식으로 글을 붓팬 자국을 남겼다. 삐뚤삐뚤하고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그래서일까? 강사님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희찬이, 글을 보면 특색이 보여요. " 잘 썼다는 말이 아닌 특색만 남은 글씨체, 그게 내 글씨였고, 그 당시 나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
그렇게 지내던, 그해 11월은 글틴에 내가 많이 들어오지 못한 날이다. 글틴을 시작한 23년도 7월 이후부터는 하루에 서너 번 씩 글틴에 들어와 글을 읽어나, 글을 올렸지만, 그달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글을 쓰려고 하면, 심장이 꽉 조여 오거나, 울렁거리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글을 쓴 이후로,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마치, 쑤셔 넣었던 감정이 하나씩 새어 나오는 듯 글을 쓰기가 무서워졌다. 그와 동시에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같은 생각들이 머리를 덮쳐서 그런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나 스스로 판단했다.
그렇게 내 감정을 다스릴 수 없는 시간을 정신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내 주변 사람들과 상황은 날 글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대표적으로 글틴 동료들, 선배들이 그 예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들 중 글을 계속 쓸 수 있게 만든 사람은 작년 글틴 멘토들. 특히 글틴 선배이자, 멘토이신 김선오 멘토님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소설 김병운 멘토님 이후, 처음으로 내 글에 멘토링을 달아준 멘토님이다. 그래서일까? 내 성장을 가장 오랫동안 봤던 사람이자, 글틴에서 내 글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일 것이다.(현재까지 올린 글이 595편 그중 절반은 시고, 시의 약 7~80% 는 23년도부터 25년도 2월까지 올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묘하게 그에 대해 내적 유대감이 생겼고, 멘토링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는 나뿐만 아닌 것 같았다. 그 이유는 2024년도 10월에 썼던 시인 <돌핀 공터>의 멘토링 때문이다.
"희찬 님, 잘 지내고 있나요? 11월에는 시가 한 편도 올라오지 않았네요. 어디서든 시와 함께하고 있기를 바라요. 언제 돌아오든 기다리고 있을게요. 희찬 님 시를 읽는 일, 희찬 님의 마음을 알고 느끼고 희찬 님이 시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발명해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저에게도 큰 기쁨이라는 사실 알아주기를요."
***<돌핀 공터:김선오 멘토님 멘토링 中 일부>
내가 10월에 쓴 시 중 그가 담당한 멘토링의 대다수는 응원의 말이 많았다. 그의 응원과 진심 어린 멘토링은 쓰기와 감정에 지쳐있던 나에게 다시 써야 하는 이유를 열어줬다. 딱딱한 컴퓨터 글씨여도 그 단단함을 부숴 버리는 감정의 밀도가 다시 나를 쓰게 했다.
오늘을 쓰기 위해 17년을 붙잡았나 봐
나는 이름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
종착지 없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지
****<내일 쓰기 中>
그의 멘토링이 만들어낸 용기는 쓰기에 대한 사유를 만들었고, 11월 21일 시 게시판에 <내일 쓰기>라는 제목으로 시 한 편을 올렸다. 시 안에는 9월부터 11월까지 내 몸 안에서 넘쳐나는 것들. 학교, 글쓰기, 또래 친구, 미래 등에 대한 미련 같은 것들이 글 안에 담겨있다.
켈리그라피를 하면서, 내가 눌렀던 감정을 종이 위에 옮기고, 딱딱해 보이는 컴퓨터 자판으로 단단하게 눌린 감정을 적어 내려갔다. 나를 꾹 누르며. 감정을 펼쳤다. 그리고 그 안에는 글틴 선배들, 동료들, 멘토가 있었다.
근래들어 나도 글틴 졸업과 더불어, 청소년이라는 십 대의 순간을 졸업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다 나에게는 앞으로 2년 정도 밖에 안 남았다. 어쩌면, 조금 더 빠를 수도 있고. 그래서일까 "좋은 어른은 누굴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무작정 나를 펼치거나, 나를 누르기만 했을 뿐 누군가를 위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작년에 답을 찾은 것 같다. 글틴 멘토링으로부터. 김선오 시인으로부터.
후배에게 보내는 선배의 따뜻하고 단단한 언어로 타인을 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내가 찾고 내가 찾은 좋은 어른인 것 같다. 그렇기에 나도 김선오 시인처럼 졸업 후 글틴에 돌아와 따뜻하고, 단단한 언어로 누군가의 길을 열어 주고, 응원하고 싶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살아갈 여러 시간 속에서 *사는 게 좋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선배에게 받은 이 마음을 후배에게도 전하고 싶다.
*김이듬 <후배에게> 인용
***링크 김선오 멘토 멘토링 및 <돌핀 공터> 시
/board.es?mid=a30804000000&bid=0021&act=view&ord=B&list_no=102944&nPage=1&c_page=
****링크 <내일 쓰기> 전문
/board.es?mid=a30804000000&bid=0021&act=view&ord=B&list_no=103375&nPage=1&c_page=
추천 콘텐츠
* 걸어온 이야기는 하고 싶은데, 발에 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저에게 발이란 무턱대고 걸어서, 땅과 마주하는 일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아요. 이걸 굳은살이라고 해야 할까요? 오랫동안 천천히 무감각해지는 발의 이야기는 굳은살투성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괜찮지만, 당신들은 괜찮겠어요? 제 발이 지나온 이야기가 약간 아플 수도 있을 거예요.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궁금하다면 보여드리겠습니다. 다만 눈은 조금 아플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나는 분명, 경고했다. ** 그러나 사람들은 각자의 굳은살 이야기가 뭐 그렇게 듣고 싶은지, 아니면 공감받고 싶은지 눈을 크게 뜨고 눈과 눈을 마주치며 스쳐 지난다. 사실 관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걷고 있는 길에 바람이 꽤 차갑다. 강원도 산간의 겨울은 역시 눈도 많이 내리고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골바람이 도시의 골바람과 다른 매서움을 가지고 있다. 작년에, 삼촌 내외와 가까운 강원도 산간으로 이사를 왔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현실에서 일종의 도피를 경험하고 싶었기에. 도시에서 살며, 들이마셨던 공기와 먼지를 이삿짐과 함께 털털 털어내고 시작한 산골 생활이라 우리 가족은 이사 가기 전까지 즐거운 것들을 상상했다. 엄마와 나의 건강 회복과 농촌에 들어가면 받을 수 있는 여러 혜택. 하지만, 시골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텃세가 심하다던데. 그래도 의지할 수 있는 한 식구가 주변에 사니까, 기댈 수 있는 식구가 없었던, 도시보다는 괜찮을 것 같다는 믿음과 희망이 가득했다. <리틀 포레스트>와 같은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엄마와 나는 손을 잡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짐들은 언제 다 풀고 정리할까. 우린 서로 웃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버릴 건 버리고, 나눌 건 나누고, 가져갈 건 가져가기 위해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였다. 어느 정도 정리가 다 됐다. 이제, 이사 가기 전, 감사했던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만 남았다. 학교 다녔을 때 쉼터가 되어준 친구. 내 휴대폰에는 그들의 이름을 이름으로 저장해 두지 않았다. 성과 이름을 같이 붙여 놓으면, 차가운 느낌이 들어서. 그들을 각각 ‘아침의 햇살’과 ‘늦 밤의 달빛’으로. 저장해 뒀다. 그들이 언제 시간이 될지 모르지만, 이사 가기 전에는 연락이 왔으면 좋을 것 텐데. 나는 확신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떤 것이든 ‘할 텐데’라고 말끝을 흐리기에. 모든 일이 ‘텐데’로 끝났다. 이번에도 그렇고, 저번에도, 그 이전에도 그렇고. 확신이 없었기에, 그들에게 만나자고 했던 카톡 메시지는 다른 광고성 문자들로 인해 내려갈 공간까지 내려갔다. 그런, 나랑 반대로 엄마는 최근까지도 동생네 어린이집 학부모 모임에도 빠짐없이 잘 나갔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사람을 만나는데 거리감이 적었다. 다만, 그만큼 한 공간에 뭉쳐 있지 않으면 그들과의 관계가 금방 흐지부지하게 끝난다는 것. 엄마는 조동모임에는 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유겠지. 조동 친구들은 산후조리원에서 나온 뒤, 아이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유지되는 관계
- 송희찬
- 2026-01-25
가습기와 에어컨을 모두 끈 채로, 맞이하는 여름은 생각보다 더 덥고, 꿉꿉하다. 습기가 가득 찬 여름의 공기, 나무와 바람이 만약 신이라면, 지금, 이 날씨를 견디는 우리를 보며 신이 날 것 같다. 축축한 벽지와 눅눅한 얼굴과 몸, 그들이 원하는 게 인간의 벌이라면, 인간은 살아가면서 그 벌을 모두 맞이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사후 그들을 만난데도 나는 떳떳하다. 이번 여름은 작년 여름보다 더 한 것들을 안고 살아야 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세대에서, 사람 한 명 한 명 더 깊은 곳으로 추락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방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생각보다 차갑다. 여름인데, 이런 바람은 여름과 어울리지 않지만, 바람은 바람이다. 내가 공부를 싫어하는 것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수능 대비 대신, 글만 쓰는 것도 결국 나지만, 책임은 언제나 두렵다. 그러니까, 노트북을 들고 재빨리 거실로 나가자.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손은 휴대폰을 넘기고 있다. 이 쇼츠 하나만 더 보고 공부하는 거다. 그래, 딱 하나만 더 보고. 더 더워지기 전에 공부를 해야지 하면서도, 공부를 끝없이 밀어냈다. 손에 땀이 고이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앞 골목에서 집 쪽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현재 시각 14시다. 동생 희열의 하교 시간이 점차 다가온다. 그때부터 기침이 나도 모르게 갈비뼈를 짓누르고 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거부 반응. 오늘도 하루의 대다수를 휴대폰에 다 썼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언제나 빨리 학교를 나간다. 그러면서도 매일 학교를 빠지고 싶다고 희열이는 이야기한다. 물론, 내가 학교를 쉬기에 그 아이 입장에서는 내가 그렇게 보이겠지. 그러나 그에게도 지금 상황이 나쁘지마는 아닐 거다. 엄마, 아빠 출근해도 집에서 항상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로. 그래도, 내가 미워 보일 수도 있을까. 아직 어리니까, 그런 상황은 일단 내버려두고 옷이나 껴 입자. 언제부터 녹아갔는지 모르는 벽지 위에 걸린 옷을 꺼내 입으며, 인간이면서 인간 다워 보이려고 했다. 그게 방과 후가 끝난 희열과 본인의 자식들을 데리러 오는 부모들에 대한 일종의 예의이자 안심이기에. 기침과 함께 튀어나오는 아쉬움을 감추기 위해, 홀스를 입에 물고 흰색 마스크를 입가에 걸쳤다. 이제, 날 그저 학부모 같은 청소년으로 봐 줄 수 있겠지. 오늘도, 작년 여름처럼 습기가 창문을 적셨고, 도로에는 물웅덩이가 깊게 파여 있다. 인공적으로 다시 타임 루프 한 것도 아니면서. 감기기가 아닌 기침이 작년 초 학교를 다닐 때와 비슷했다. 그러나, 딱 하나 다른 점이 있다. 나를 잡을 수 있는 타인은 없지만, 유일한 내가 나를 잡을 수 있는 것. 최대한 배에 힘을 주고, 원조 고등학교에서 열공을 하고 있을 나를 지지한 친구들과 나를 고교에서 내 쫓은 친구와 선생님의 얼굴에 대하여 올해는 어떻게 지낼지 생각한다. 그들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 자체가 나도 모르게 마음으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을 미화하거나, 좋은 추억을 꺼내 되새김질
- 송희찬
- 2025-12-23
*주의: 본문에는 이물 표현이 있습니다. 식사하시면서 보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며칠 전, 고등학생 시절 친구를 만났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6개월 전이었지. 못 본 지 반년 동안 그와 나는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그는 2학년 1.2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모두 마쳐 고3을 마주해 있고, 나는 검정고시와 수시 합격 그리고 수능을 치르는 등의 경험과 성취를 이루어 냈다. 그래, 우리 모두 올 한 해 수고했지. 또한 내년에도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온 힘을 다해 뒤척이겠지. 그런 뒤척임이 한 해 한 해 쌓이며, 우린 나이를 먹어갔다. 그러다 보니, 금세 열아홉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청소년이 유효한 시간이 1년밖에 남지 않게 됐다. 일 년, 일 년 지날 때마다 몸은 매해 바뀌었다. 키와 몸무게가 늘기도 하지만, 어릴 때 좋아했던, 매운 음식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해지는 등 체질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특히 작년에는 그 변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평소에 즐겨 먹던 얼큰한 찌개와 매콤한 닭발을 몇 입 먹지 않았는데, 먹은 뒤에 속이 끓거나, 변을 자주 보는 등의 행위가 심해졌고, 매운 음식을 거부하게 됐다. 그렇기에 옛날에 바라보지도 않았던, 사리곰탕과 튀김우동이 제일 좋아하는 라면으로 변했다. 계속 이러다가, 이들조차 맵다고 느끼면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매운 것도 못 먹는 맵질이 어른이 되는지 해가 거듭될수록 음식에 대한 걱정이 커진다. 하지만, 매운 음식과 반대로 어릴 적 못 먹었던 비빔밥은 한 해가 지날수록 고추장, 다시 먹을 수 있게 됐다. 내가 지금 껏 비빔밥을 먹지 못한 이유는 네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트라우마. 평범했던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급식으로 비빔밥을 먹었던 그날 급식이 속에서 얹혀 기절했다. 나는 태권도에 들어가자마자 출입문에서 토를 내뱉고, 나도 모르게 쓰러져 버렸다. 일종의 침묵, 어쩌면 소란스러운 환경에서의 고요만이 내 몸을 짓눌렀다. 그런 짓누름에 눈은 점점 감겼다. 어둠이다. 어렸을 때 나는 어둠을 참 무서워했는데, 그 당시에는 어둠이 무섭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편안한 휴식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얼마나 어둠 속에서 쉬었을까?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구급 대원들이 있었고, 태권도 학원 원장이었던, 위층의 미술 선생님과 태권도 사범님 등 학원 관계자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그중 가장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미술 선생님의 질문. "희찬아, 100까지 세어볼까?" 그녀의 질문에 몇 까지 세었을까? 한 사십까지는 말했던 것 같지만, 결국 100까지 세지 못했다. "그다음에는 모르겠어요." 사실, 내가 숫자 100까지 셀 수 있는지 궁금해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내가 다시 정신을 잃지 못하게 집중할 수 있는 것을 찾은 거겠지. 이후 몇 가지 질문을 받은 뒤, 나는 앰뷸런스를 타고 태권도 사범님과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것이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다. 그러나, 이는 그 상황의 마지막은 아니었다. 이후, 각종 검사를 받았다. 뇌파와 CT 등 뇌에 문
- 송희찬
- 2025-12-19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