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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

  • 작성자 지존
  • 작성일 2025-09-01
  • 조회수 443

 손, 니니기노미코토가 하계에 내려온 일을 오오야마츠미는 기쁘게 여겼다. 대대로 미와 영속을 더불어 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는 천손에게 두 딸을 시집보냈는데, 나란히 니니기의 동반자를 자처한 이들은 꽃의 신 코노하나사쿠야히메와 바위의 신 이와나가히메였다.


 그러나 니니기는 둘을 모두 아내 삼는 대신 미모의 코노하나사쿠야히메만을 취하고, 이와나가히메는 추하다는 이유로 곧장 돌려보냈다.


 오오야마츠미는 진노하여 니니기의 어리석은 행동을 꾸짖었다.


 ‘이와나가히메가 있어 바위와 같이 영원하고, 코노하나사쿠야히메가 있어 꽃과 같이 번영할 수 있기에 나는 여식을 나란히 바쳤다. 만일 둘을 함께 맞아들였다면 천손은 피고 지지 않는 영광에 싸이었을 것이다. 천손의 선택으로 후생은 눈부시게 피어나되 찰나에 쇠하여 질 운명이다.’


 이리하여 영원을 내친 천손 내리의 생은 그저 피고 지는 꽃을 닮게 되었다.


 이것을 인간의 삶이 꽃처럼 덧없는 세계의 시발점이라고 한다.


—자네가 오늘의 호위군! 잘 부탁하네.


 혼란의 시대란 어느 때보다도 인간에게 꽃을 영사한다. 진득한 윤곽이 말라붙어 인간을 뜻이라는 하찮은 이름으로 낙화시키고 차안의 기저에 깔아 정도(正道)라 하는 길을 수놓는다. 헤아릴 길이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쌓인 꽃을 길로 착각하기에 이르기 전까지 난분분한 낙화는 멈추지 않는다.


—최근 막부 타도니 존왕이니, 당치도 않은 망발로 나 같은 중역을 베려는 불한당이 판쳐서 말이지. 자네처럼 실력 있는 검객을 호위로 붙이지 않고서는 안심이 되질 않아.


 여느 평화 속에서든 꽃이 지듯 어느 혼란 속에서나 꽃은 핀다. 지기 위해서라고 해도 지는 인간은 저무는 꽃답게 열매를 맺는다. 누구라도 원한을 쉬이 맺는 세상이다. 원한이 열매와 같이 맺히고 따이는 치열한 순환의 현장이다.


—이거 원, 외출도 편안히 못하겠다니까.


 사법성의 고위 관료로 재직하는 고용인은 능청을 피우며 말을 걸어왔다. 명백히 자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아니꼬운 거드름이었다. 살집을 내두르는 피둥피둥한 풍채로 시름을 연기해 봤자 목숨을 위협 받고 있다는 느낌은 결코 닿지 못한다. 아직이라고 할까, 정적이 우선적으로 노릴 재목이 못 됐다. 물론 있기나 하다면.


 나는 솜씨가 좋아서 막부의 고위 인사를 호위해 달라는 비싼 요청도 금세 쇄도했다. 실력을 향한 감탄이 싫지도 않았고, 칼잡이人斬り(ひときり) 노릇은 즐거웠다. 보수를 받고 인명을 해치는 상벌의 역로만큼 뒤집힌 채 굳건한 질서도 나의 기꺼운 발견도 없었다. 무엇보다 고향을 한참 벗어난 내가 에도에서 대성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아, 그래그래. 이쪽은 내 참모 사다토시일세. 동행할 예정이니, 유사시에는 이쪽의 안전도 부탁해.


 고용인이 설렁설렁 가리킨 자리로 눈길을 보내자 어느새 조용히 합류한 남자가 작게 허리를 숙였다.


 과연 참모 같다는 인상의 남자였다. 20대 후반으로 추정됐지만 꽉 찬 고뇌로부터 긁어 쌓은 연륜이 젊음을 앗아간 지 오래였다. 예리하게 째진 눈매는 그을음처럼 묻은 피로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번뜩였다.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고, 희귀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서방 세계에는 널리 보급됐다고 주워들었으나 본국에서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복식일진대 차림이 익숙해 보였다.


 뭐, 껍데기를 어떻게 꾸몄건 나와 일반이다. 막부가 능력을 산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막부가 몰락하는 날 이자는 어찌 될까 하는 생각을 눈빛으로 흩뿌렸다. 빳빳한 눈초리로 응수하던 남자는 구긴 미간 주름을 깊이며 입을 열었다.


—네 검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 몫을 해내지 못한다면 각오해 둬라.


 대쪽 같은 목소리가 날이 서 있었다. 어조는 엄중했지만, 애석하게도 위협적이지 못했다.


—걱정은 접어 둬. 목숨을 날려서라도 지켜 드리겠으니.


 능글스러운 대꾸였다. 남자는 다시 입술을 위아래로 꾹 짓누르는 진지하고 지루한 상태로 돌아갔다.


 일행을 태운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한한 시간에 감사한 일이었다. 기름진 관료 나리가 도축되지 않도록 무사히 다른 우리에 집어 넣어 주는 것이 이번 임무의 전부였다. 목적지까지 마차가 달리는 동안 고용인은 자신이 어찌나 고상한 태생으로 막부를 열렬히 섬기며 윗선의 인정을 받고 있는지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허영과 과시, 듣는 둥 마는 둥 정색으로 적당히 흘려보내던 나는 더 나은 관심의 대상을 구했다. 옆에 앉은 남자는 묵묵히 종잇장을 들여다보기가 열심이었다. 업무에 집중하는 듯한 자세를 지키고 있었다.


 자랑도 질렸는지, 잠시 교첩을 하겠다며 고상하게 양해를 구한 직후 고용인은 곯아떨어졌다.


—그야말로 막부의 개… 아니, 돼지군.

—네놈! 말을 삼가라!


 발끈한 남자가 작색하고 나를 따갑게 쏘아보았다.


—흥, 똑같이 생각하는 주제에 언행 운운은. 아까부터 서류를 읽는 척하면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무시하려고 애쓰던데?

—뭐…!

—한 장에 계속 고정된 시선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줄 알았나? 뭐, 그러는 기분은 헤아려 주지.

—고작 고용된 칼잡이人斬り 주제에 뭘 안다고….

—‘고작’ 검객에게라도 의존하지 않고서는 캄캄한 앞날을 조금도 각오할 수 없는 절박한 등화라고는 하겠는데, 너희의 막부가.


 움찔. 정직하게 정곡을 찔린 반응이었다.


—너도 선고된 죽음 앞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막부가 목줄을 던져 채운 개에 불과하지.


 선명한 도발까지 남자는 받아치지 못했다. 입을 다물고, 무거운 침묵에 빠졌던 남자는 잠시간의 정적을 거쳐 혀를 뗐다.


—죽음이라……. 확실히 그렇지, 막부는 머지않아 유신지사에 의해 쓰러지고 만다. 그때는 새 형태의 정부가 이 나라를 외세에 뒤지지 않는 공고한 세력으로 바꿔주기를 바랄 뿐이다.


 결국 막부는 쓰러진다.

 그리고 막부의 죽음을 발화점으로 일본은 타오른다.

 필시 최후의 막부가 될 에도 정권은 뒷걸음질로 격변의 질긴 도화선을 태우고 있었다.


 예상보다 현국을 바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탄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 또한 약속된 동란의 서막을 배열하는 날실의 위치에 있었다. 단지 날실, 씨실의 운동에 튕겨 나갈 한낱 한 가닥으로 얽혀 있다고 해도. 언뜻 남자는 무기력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의 통찰력을 상정하면 지당했다. 그럼에도 단정하고 굳센 입매는 달리 전하고 있었다. 남자에게는 망조의 업화로 흐트러지지 않는 기개가 담겨 있었다.


 나는 시름에 잠긴 남자의 옆태에서 드러나는 꼿꼿한 목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발굽이 한창 흙길을 박차던 중 바퀴가 갑작스럽게 끼익거렸다. 공포에 질린 말들의 비명은 마부의 날선 외침으로 이어졌고, 선지피가 창문에 퍼지며 마차는 덜컥 멈추었다.


—뭐… 뭐지?!

—호오, 역시 습격당했나?

—암살자…! 그것도 여럿인 모양인데…….

—여기 얌전히 있어라. 움직이지 마.

—몇 놈이나 도사리고 있는지도 불분명한데… 혼자 감당하기 턱없는 싸움이다!


 남자는 생명의 위협에 굳은 채로도 용케 버럭 외쳤다.


—그래, 그래. 입 다물고 맡겨라.


 천천히 문을 열고 흥얼거리며 마차에서 내리면, 가소로운 살기를 휘감은 대여섯이 나를 허접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너희는 완전히 포위돼 있다. 순순히 요인을 넘겨라.

—직접 데려갈 실력은 어딨나? 어서 오라고.


 나는 빼든 검을 까딱거렸다. 세 명이 일제히 덤벼들었지만 실력의 구멍은 물량으로 꿰맬 크기가 아니었다. 모두 군더더기 넘치는 움직임이었다. 죽으러 오는 속도가 지루하리만치 느렸다.


 일획에 두 목을 갈랐다. 붉은 균열이 거침없이 일어났다. 


 지저분하게 분리된 육괴는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흉한 꽃잎과 같이 휘날렸다. 어설프게 금이 간 목은 덜렁거리다가 선혈이 쏟아지면서 찢겨 나가는데, 날을 끝까지 디밀지 않는 것이 비단 하수의 작품이라는 표시는 아니다. 실력보다는 기호를 나타내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깔끔한 일처리는 사양이라는 짓궂은 칼잡이도 널려 있다. 나라든가. 그야 머리 따위 말쑥하게 날려봤자 절경이 못 된다.


 남은 한 명은 눈앞의 살풍경에 당황하고, 엉성한 발도를 뒤늦게 시도했다. 그 틈을 타 배에 검을 번쩍여 주었다. 햇살을 머금은 피가 끊긴 목숨 대신 줄기차게 발악했다. 공기 중에서 지느러미처럼 퍼덕였다.


 적당히 정리하고 뒤를 돌았더니, 제멋대로 마차를 이탈한 남자가 아직 살아 있는 녀석을 대면하고 있었다. 낭도를 쥐고, 쥔 손을 덜덜 떨면서. 의외로 인상적인 행동력이었다. 조용해서 더 괘씸하다는 생각이었다.


 안에 있으래도.


—죽어라!

 암살자가 소리쳤다. 이러겠노라고 예고를 하는 한심한 발언이지만, 본질을 살피자면 기합에 가까웠다.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북돋아 주기 위한 구호였다.


 나는 순간 몸을 앞으로 뺐다.

 그리고 팔을 가볍게 베였다.


 결코 유의미한 상처는 아니었다. 처음으로 입힌 타격 덕분에 놈 낯에 서린 희망의 기색을 천천히 읽을 여유까지 있었다. 빈틈투성이 범부의 입에 검을 밀어넣고, 비웃어 주며, 식도를 쪼갰다.


 암살자는 고깃점을 푹푹 내지르다 뚝 쓰러졌고, 가공되는 류큐치쿠를 연상시키는 그 우스운 꼴에 놀랐는지 남자는 아연실색해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두 명도 순조롭게 날로 다져서 죽여 버렸다.


 ‘제 몫을 해내’고, 어안이 벙벙한 그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그만 일어서 주실까. 아무래도 참모가 있을 곳은 책상이다.

—…면목이 없군. 소문대로 명검이다. 훌륭한 솜씨였어.

—누가 괜히 끼어들려고 하니 좀 스쳐 버렸지만.


 반쯤 농담으로 중얼거리고 찢어진 소매를 확인하자 옷자락에 피가 배어 있었다. 입금이 되면 한 벌 새로 장만할까, 실없이 웃었는데 남자는 흠칫하고 유난이었다.


—이건… 괜찮은 건가?

—음? 찰과상이다. 아무렇지도 않아.

—가당치도 않다. 덧나면 어쩔 셈이지? 화농이 생길지도 몰라.


 화농이 무엇인가 갸웃했다. 남자는 상의 안쪽에서 네모나고 하얀 천을 꺼내 내 팔에 두르기 시작했다. 뻣뻣한 손길이 필시 이자에게 익숙치 않은 행위임을 암시했다. 닿은 손가락으로부터 펜을 잡아 얻은 신선한 종류의 굳은살을 느꼈다.


—이걸로 지혈해 둬라. 임시 방편이다.


 메마른 인상치곤 섬세한 태도였다. 사다토시가 천을 단단히 동여매려 노심하는 얼마 간 나는 걱정도 성실한 그의 얼굴을 가만 보고 있었다.


—…우선은 목적지까지 마저 이동하도록 할까.


 마차의 손상은 심각하지 않았다. 널브러진 마부의 시체를 걷어차고 마부석에 걸터앉았다. 힘겨워하지만 다리 멀쩡하게 살아 있는 말의 고삐를 잡아챘다. 야생마를 몰던 향토의 기억으로 마차를 선도해, 어떻게든 목적지까지 무탈하게 도착했다.


—후야, 십년감수했군. 검객을 고용해 두길 잘했다니까. 다음에도 자넬 불러야겠어. 보수는 사다토시에게 받아가게.


 깨우고 나서야 태평하게 내린 고용인은 뒤뚱뒤뚱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수고했다. 약속한 대로의 보수는 여기.


 무정하게 들리는 특유의 말투였지만 그의 감정은 아까 충분히 구경한 터였다. 사다토시는 가죽 재질의 가방을 정중하게 건넸다. 양복과 마찬가지로 신문물 축에 드는 물건이었다. 


—이 천조각은 돌려주지 않아도 되나?

—손수건이라고 하지. 갚을 필요는 없다. 피가 멎을 때까지 대고 있도록 해.

—음후후…, 막부에 빌붙자는 개끼리 힘내 보자고.

—그딴 참견은 사양이다. 네놈은 원한에 당하지 않게 조심해야 할 테지.

—…그러고 보니, 이름을 듣지 못했군.

—아아. 야부세토. 야부세토 토키츠네다.

—그렇군…. 그럼.


 묵언으로 기약을 남기고, 사다토시는 걸음을 옮겨 멀어졌다.

 재미있는 남자를 만났구나. 감상을 곱씹으면서 가방을 들고 귀로에 올랐다.


 지하에서는 천혜의 온천수가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토지는 왕성한 작물로 풍요를 다산했다.  마치 작금의 난세를 비웃는 경치였다.

 불꽃으로 물든 단풍이 실바람을 타는 현란한 움직임도 미현하기만 한 막말(幕末) 늦가을이었다.


보름 전 여기서 호위를 부탁했던 키요자네 사다토시다. 야부세토라는 검객을 다시 고용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그런 녀석도 있었군.

—이제는 여기서 부탁할 수 없게 되었나?

—그렇지. 정확히는 이제 어느 가게에 가더라도 부탁할 수 없어.

—무슨 뜻이지?

—소문으로는 말이야, 유신 측의 칼잡이人斬り에게 당해 임무를 실패한 모양이야. 눈이 베이는 치명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네. 죽은 건 그놈이 호위했어야 하는 요인이겠지. 정말, 우리 신용을 떨어뜨리려고 작정한 거야.


 칼잡이人斬り를 알선하는 그 가게 주인은 질색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표독스러운 안면이 불만으로 자글자글했다.


—그렇구나. 유감이군. 현재는 요양 중이라는 건가? 부디 회복해서 새로운 삶을 찾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담담히 유감을 표하는 나를 향해 주인은 눈가 근육을 씰룩였다. 어이없다, 아니, 황당하다는 수준의 뒤틀린 표정이었다.


—형씨, 이 바닥 사정을 전혀 모르네.


 그러더니 나를 위아래로 한번 훑었다. 이내 무언가 스스로 납득한 눈치가 되어서는 고개를 위로 젖혀 후 하는 한숨을 불었다.


—칼잡이人斬り는 말이지, 나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시점에서 이미 시든 거야. 눈을 뜰 수도 없는 병신을 치료해서 뭘 하겠어? 약값이 아깝지. 대접은 기껏해야 근처 산에 버려두고 보내 주는 거야. 직접 목숨을 거두지는 않는 거지. 뭐어, 솔직하자면 그러는 것도 낭비라서겠지만.


 설명을 마친 주인은 야부세토와 마찰이라도 있었는지 통쾌하게 실실거렸다. 시큰거리는 불쾌감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게 지금 막부의 방식이라는 거군…….

—야부세토도 규슈보다 남쪽 어딘가 출신이라던데, 그 못난 녀석처럼 돈 벌겠다고 촌구석에서 기어나온 놈들로 내지가 득실댄다고. 그러다 팔이나 불알이나, 하여튼 소중한 몸뚱이 일부를 숭덩숭덩 잘려서 사라지는 떨거지 천지야. 눈은 약과라지만, 엄격한 세계거든.”


 얹힌 응어리가 저릿하게 퍼져 나갔다. 심장에 깊숙이 스며드는 감각은, 어째서인지 통증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자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됐다. 다른 적임자를 알아보지.


 거슬리는 비웃음을 흘리는 주인에게 짤막하게 대꾸하고 가게를 나섰다.


 그날, 멋대로 뛰어든 나를 그자가 살린 것만은 참이다.

 또 한 명의 칼잡이가 쓸모를 다한 존재로 낙화했다 할지라도, 야부세토 토키츠네는 헛되게 시들지 않았다.

 그것만이 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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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면

삼촌이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몹시 슬퍼하셨다. 그해 여름 방학은 시름에 잠긴 아버지를 따라 삼촌의 집으로 향했다. 유족은 떠난 가족의 흔적을 모아 오는 막중한 임무를 띤다고, 칙칙한 옷을 입히던 가정부 아주머니가 그랬다. 그렇게 매년 떠나는 해외여행은 삼촌의 물건을 정리하는 침울한 유품 원정으로 대체되었다. 그곳까지는 차 안에서 질릴 때까지 졸고도 더 있어야 하는 먼 길이었다. 이전에 나를 데리고 방문한 적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정작 삼촌네를 찾아가게 된 날 나는 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운전대를 잡는 옆태가 이미 독한 슬픔으로 젖어 있어서, 금방이라도 울어 버리겠다 싶은 불안감이 차를 모는 내내 공기를 꽉꽉 눌렀다. 삼촌은 과묵한 남자였다. 행동은 조용하고, 딱딱했고, 기분은 읽히는 법이 없었다. 만사 관심을 두지 않는 무심한 인상이었다. 감정이 굳은 근육으로부터 자유로운지도 의문이었다. 닫힌 채로 메말라 있는 삼촌의 입은 그런 궁금증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눈. 삼촌이 죽은 지금 괜히 무안해지는 감상이지만, 어둠으로 뒤덮인 그 눈에 스치는 순간마다 살갗을 걷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인간의 눈이라면 자연히 서리는 정기가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묘한 인간의 표본이라 해도 좋았다. 아버지에게는 그런 삼촌이 참 존경스러운 형이었던 듯했다. 정확히는 이복형이지만, 둘의 관계에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아버지에게 있어 관계의 출발선에 지나지 않았다. 삼촌도 나름 아버지를 아꼈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아버지 대의 복잡한 가정 형편 속에서도 여태 친분을 유지한 사이였다. 곁에서 지켜보는 나도 가끔 아버지가 삼촌의 미소를 옅게나마 자아내는 신비를 목격했다. 삼촌은 웃고 있어도 어딘가 쓸쓸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비록 떨어져 지내느라 삼촌이 형 노릇을 할 시간이 적었다고는 해도, 아버지에게는 따뜻한 인상을 남긴 일화들이 있을 터였다. 단지 그건 삼촌에 대해 내가 느낄 몫이 아닐 뿐이었다. 그날 오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삼촌의 집에 발을 디뎠다. 도착한 교외의 주택은 정갈하지만 단조로웠다. 주변의 생명이라고는 이파리를 죄다 잃은 비리비리한 나무가 다였고, 정면으로는 일직선 도로가 조용히 펼쳐져 있었다. 스쳐 지나가면서나 보고 말 지루한 풍경, 하얀 몸을 하고 옅은 햇살을 담담하게 받아내는 삼촌의 집은 세상으로부터 은신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위치 선정이 묘한 삼촌다웠다. 실내로 거침없이 들어서는 아버지를 나는 조심스레 뒤따랐다. 현관문 너머 일자로 곧게 뻗은 복도 끝에는 맨들맨들한 계단이 보였다. 마른 공기가 온 집안에 감돌고 있었다. 정말이지 생활감이 증발한 집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아무래도 계획이 있으셨던 아버지는 거실로 직행했고, 뒷모습을 끔벅끔벅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2층으로 올라갔다. 분업 정신이라도 발동한 걸까. 목적지는 삼촌의 서재였다. 삼촌이 읽은 책이나 사용한 만년필이 있으면 챙기고 싶었다. 서재 안쪽 벽은 창문이 넓게 나 있었고, 계단보다도 맨들맨들한 책상이

  • 지존
  • 2025-06-30
UB

그는 빠르게 지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잠에 드는 사람도 아니었다. 체질이라는 선천적인 비극이 그의 한평생을 덮치고 있었기 때문에, 밤중의 열차 안에서도 그는 피로의 고통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구매한 표는 지나치게 저렴했고, 악바리 운행의 진수를 교시하는 열차는 지나치게 낡아 있었다. 직물 시트는 먼지가 잔뜩 묵은 데다 고릿한 얼룩이 선객을 자처하고 있었다. 좌석의 불결한 관리 수준은 몸을 눕히고픈 충동으로부터 실행력을 앗아갔다. 애초에 그가 택한 일반 객실은 누울 만큼의 공간을 확보하기도 마땅치 않은 크기였다. 오늘 종일 치러야 했던 곤욕을 회상하노라면 그는 이가 갈렸다. 경찰에 연행되는 바람에 타려던 특급 급행열차는 결제까지 마치고도 떠나보내야 했다. 우매한 공권력은 해가 저물도록 그를 잡아 둔 끝에야 멋대로 씌운 혐의를 벗겨 내고 응당한 자유를 되돌려 주었다. 그를 풀어주던 경찰은 그저 한마디를 웅얼거렸다. ‘오해였습니다.’ 그건 분명 사과가 아니었다. 망할 작자는 오히려 아깝다는 기색이었다. 어떻게 되먹은 일처리 정신인지. 그래, 위로금을 지급한다든가 하는 일말의 성의도 당연하다는 양 생략됐다. 온갖 절차를 늘어뜨리고 진행됐던 굼뜬 취조와는 참으로 대비되는 신속한 종결이었다. 한적해진 역에서 그는 부랴부랴 새 열차 편을 알아보아야 했고, 황혼녘의 철도역은 구시대적 승차감을 자랑하는 퇴물 단 하나의 선택지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는 후회 또는 분노하기는커녕 앞서 벌어진 일을 되감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뻣뻣이 절전된 그는 좌석 등받이에 얌전히 상체를 기대어 뿌연 창문 너머의 역동적인 어둠을 멍하니 주목할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 황폐한 농원을 가로지르던 열차는 언제부터인가 아무런 형체도 분간할 수 없는 풍경을 선사하고 있었다. 경유하는 고장의 영화관에 걸린 개봉작을 확인한다거나 벌판에 듬성듬성 등장하는 나무를 셈하는 유희도 막혀 버렸다. 아쉽게 된 대로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단조로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비교적 낮은 온도의 공기가 그의 적막에 유입되었다. 경미한 변화를 감지한 그는 기민하게 시야를 재확보했다. 문이 스륵 열렸고, 누군가 문틈으로 구두코를 디밀었다. 웬 여자가 객실에 성큼 들어와 곧장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갑작스레 출현한 목전의 여자를 찬찬히 훑었다. 생기가 부족한 인상임에도 뚜렷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검은 모발은 부드럽게 굽은 직모였고, 윤기와 탄력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었다. 흐뭇하게 뻗은 눈매에 담긴 검푸른 눈동자는 짙은 그림자가 진 바다를 연상케 했다. 흰 피부는 비록 심히 창백한 감이 있었으나 장인의 수제 사탕처럼 매끈한 동시에 신선한 윤기가 흘렀다. 야릇한 기품을 갖춘 기묘한 여자였다. 물론 상대를 단숨에 홀리는 매력을 풍긴다 해도 구태여 비좁은 객실에 합석하려는 만행은 참작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긴 흑발의 미녀이기 전에 고상한 태도의 불청객이었다. 게다가 꺼림칙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여자의 명품 코르사주 같은 외관에서 휘몰아치는 독한 소용돌이가 적

  • 지존
  • 2025-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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