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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부서진 문장을 짊어진 우리는

  • 작성자 아기호랑이
  • 작성일 2025-10-04
  • 조회수 244

언젠가부터 시간이 지날수록 문자는 투명해지고 단어의 의미만이 흐릿하게 남아 문장을 이룬다. 오래된 문자는 유리와도 같아서 잘 보이지 않더라도 상당한 무게를 감내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짊어져야 해. 내가 언젠가 경에게 말했던가. 경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무엇을 짊어져야 하는지 물었고, 나 역시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나는 작가가 아니다. 빛바랜 유리와도 같은 문장이 몇 년간 나를 옥죄었다. 


글을 쓰지 못하는 날이 반복될수록 깊어지는 회의감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한 문단을 넘지 못하는 글감과 뒤를 이어가지 못한 채 단절된 문장. 한번 흐름을 놓친 글은 방치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죽어간다. 자신을 갉아먹으며 연명하는 문장의 단면은 거칠고 해리하다. 때로 글자의 모서리는 날카롭게 갈려 알게 모르게 무의식에서 빠져나와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자꾸만 심장을 찔러대는지 마음에는 숭숭 구멍이 난다. 


글쓰기로는 메꿀 수 없는 성질의 공허함. 한구석에 뚫린 틈새로 더는 자라나지 않는 열정이 흘러 나가고, 지독한 무기력감에 빠져 시간을 죽이는 날에는 생각한다. 글 쓰며 얻는 것이 의구심뿐이라면 나는 더 이상 작가 하기 싫어요. 그러나 나는 이 생각마저 문장으로 직조하는 존재. 나를 괴롭히는 문장 앞으로 다가가 문장의 양 끝을 움켜쥔다. 녹슨 단어가 손에 찰과상을 입히고 손가락은 핏기에 젖어 무감각해진다. 주어와 서술어를 붙잡고 문장을 내리친다. ‘나는’, ‘작가가’, ‘아니다’. 


부서진 문장은 사라지지 않고 파편을 남긴다. 때로는 문장보다 단어 하나가 심장을 더욱 깊게 파고든다. 내가 문장을 이어가지 못하고 끝내 분쇄하여 단어로 조각조각 흩어져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누가 그런 것을 문학이라 불러줄까. 부서진 나의 언어로는 더 이상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또다시 문장을 내리친다면 글을 쓸 때 내 마음이 아팠던 이유가 되어줄까. 


부서진 문장을 짊어지고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경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완전한 문장을 가지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데? 나는 문장을 만드는 것만큼 문장을 부수는 데 익숙한 사람. 조각난 단어들이 잠들어있는 마음속을 헤집으며 손에 잡히는 어휘를 집어 든다. 나의 심장에서 나온 단어는 유리 파편과도 같아 조심해서 만지지 않으면 상처가 난다. 그러나 나는 어떤 어휘도 부드럽게 다룰 마음이 없고, 피 묻은 손으로 경에게 깨진 단어를 던진다. ‘뭐가 달라지나’, ‘잘 쓴다고’, ‘글 좀’. 나의 언어는 경의 목을 가르는 흉터를 남긴다. 경의 얼굴도 내 손과 같은 색으로 물들어 간다. 


투명했던 마음은 유리처럼 쉽게 깨져 어느덧 불투명한 단면을 수없이 생성해 내고. 아껴 읽던 옛 시집이 끈적한 콜라병과 함께 분리수거장에서 발견될 때 산산이 부서지던 순수한 열정은. 


쓰레기 더미에서 낡은 시집을 끄집어내고 함께 탈출한 콜라병을 발로 걷어찬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기억이 구른다. 


그날 이후로 경은 콜라를 마시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사이다를 건넸다. 그는 나를 피하며 내가 주는 무엇도 마시지 않으려 했다. 같은 상황이 두어 번 반복되자, 경은 나에게 화를 냈다. 말하지 않고도 화를 냈다. 메모장의 필체만으로 그것이 나에 대한 경고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으레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경은 그 후로도 며칠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그에게 물었다. 왜 말을 하지 않는 거야? 경이 울었다. 흐느끼지 않고도 눈물을 흘렸다. 경의 갈라진 목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를 듣고 알았다. 경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나보다 늦게 문학에 입문한 경은 목소리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 마음을 다잡고 글쓰기에 전념했다. 경은 생각이 많은 사람. 말을 할 수 없으니, 모든 생각을 글로 표출하고 있나. 다만 경의 언어는 내게 전해지지 못한다. 부서진 문장을 짊어지고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그런 언어는 경만의 것. 경은 목소리가 참 좋았는데. 그날 경의 목소리가 거슬렸던가. 그래서 내게 주어진 가장 거친 단어를 골라 그에게 던졌나. 내가 가질 수 없었던, 경만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나는 선망했고 한때 경시했다. 이제 그의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다. 


어린 나와 경이 시집의 여백에 남겨두었던 작은 글귀들을 살펴본다.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경이 첫 소설을 쓰고 내게 보여줬던 날, 경은 문학을 넘어 무엇을 사랑하려 했을까. 우리는 경의 소설에서 함께할 수 있었고, 나의 소설에서 사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경의 소설을 더 좋아했다. 경은 나를 첫 번째 독자로 삼았지만, 나는 내가 쓴 글을 경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경이 옛 시집을 살펴보았다면 아마 그곳에 나의 글이 담겨있기 때문이겠지. 내가 경의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만큼 경은 나의 글을 그리워했을까. 


경은 내게 글쓰기의 밝은 면만을 보여주었다. 내가 보는 경은 글을 쓰며 항상 행복했다. 경의 그러한 모습에 다시 글을 써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글을 이어가지 못하는 내가 점차 초라해지면서 문장을 부수기에 이르렀다. 나는 경의 앞에서 절필을 선언했다. 그때 경은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문학으로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어, 글쓰기 힘들다며 반항하는 내 자신마저도’. 경도 글쓰기를 힘들어했나. 그렇다면 나는 경에게 어떠한 위로도 되지 못했다. 


옛 시집에 써둔 시 한 편이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한 페이지가 찢어져 있고. 거칠게 구겨진 흔적. 경의 짓인가. 경은 과거와 달라진 나를 보며 실망했나. 경 앞에서 절필 선언을 하지 말아야 했다. 나는 학교에서 아무도 모르게 경의 가방에 옛 시집을 집어넣었다. 


다음날 시집은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찢어진 책장의 맞은편에 적힌 경의 날카로운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썼던 시 어디 갔냐고. 나는 한동안 아무런 답변도 남길 수 없었다. 


나와 경이 함께 썼던 시. 글보다 일찍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의 영원을 다짐했던 우리의 당찬 시. ‘손가락을 잘라 / 피로 물든 글을 쓰면 / 깎이는 내 수명만큼 / 글은 더 오래 살아남을까’. 질문하고도 답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시. 이제는 답이 보인다. 내가 펜을 꺾었을 때, 영원한 글쓰기를 다짐한 경과의 약속은 깨졌다. 나는 언젠가 시집을 읽다가 해당 시를 도려냈다. 나는 죽어버린 나의 글보다 오래 살 것이고, 경은 자신의 글보다 오래 살 수 없을 것이다. 경의 문장은 살아있다. 나는 그의 문장을 사랑한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파괴했고, 그만큼 경은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경은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경은 나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나 한 살 많은 언니가 되었다. 나는 경을 언니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 언니처럼 대해주지도 못했다. 나와 경은 서로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어야 했다. 소설 속 인물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의 실체는 모두 허구이므로 홀로서기는 불가능했다. 경은 내게 힘이 되어줄 때가 많았는데, 같은 상황에서 나만 경에게 부담이 되었나. 경은 나를 짊어지고 어디까지 가려고 했을까. 경은 이런 나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비가 오는 날이면 경은 나를 테라스에 앉혀놓고 글을 썼다. 옅게 깔린 숨결 사이에서 차를 마셨다. 나는 온화한 사람이 되어 맑게 사랑받고 싶었다. 경의 온몸을 따스하게 채우는 차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찢어진 옛 시, 나와 경의 약속을 복기해본다. 두 번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먼지 쌓인 펜을 든다. 그러나 나의 펜 끝에서 흘러나오는 단어들은 아직 누군가의 심장에 박혀서 숨이 막힐 정도로 아픈 이야기. 결국 나는 새로운 글은 쓰지 못하고. 해가 질 때까지 펜을 놓지 않는 경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잠들었다. 경은 나의 머릿결을 쓰다듬고. 내가 눈을 떴을 때 경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은 내게 말없이 편지를 쥐여주었다. 


너마저 멀어지면 난 어떻게 살아. 나는 너랑 함께 있고 싶어서 문학을 시작했는데. 


돌아서려는 경을 부른다. 경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경의 상처가 벌어지고 경은 순간적으로 눈을 감는다. 경을 바라본다. 나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경은 목을 손으로 가린다. 입 모양으로 아무것도 아니야, 소곤대면서. 나는 경 앞에 선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쉰다. 나는 경에게 옛 시를 돌려준다. 경은 감았던 눈을 떠서 나의 다짐을 읽는다. 경이 나를 안는다. 경의 심박이 내게 전해진다. 떨리는 손으로 경의 어깨를 감싼다. 경은 내게 기대어 운다. 




시 <나는 나의 글보다 일찍 죽길 바란다>, 수필 <젖는 마음>의 일부 구절을 인용 및 변형하여 본문에 수록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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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기호랑이
  • 202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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