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과 파수꾼
- 작성자 구포대교
- 작성일 202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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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하늘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창문에 부딪친 빗물은 먼지를 씻겨내며 미끄러졌다.
“큰일인걸.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아.”
운전석에 앉은 종석이 말했다. 와이퍼가 불쑥 나타나더니 창을 닦기 시작했다. 빗줄기와 와이퍼의 소리로 내부는 순식간에 산만해졌다. 그리고 나성은, 작은 점이 되는 기분이었다. 시끄러운 도시 한가운데서 홀로 옹송그리는 기분이었다. 비로 이루어진 대도시였다.
차는 안개로 둘러싸인 고속도로를 달렸다. 나성은 유리창에 머릴 기대 자동차의 떨림을 고스란히 느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져두었다. 분위기를 환기할 겸 튼 라디오에선 게스트로 온 아이돌의 신간 홍보가 열심이었고 나성은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굴렸다. 아직도 한 시간을 더 달려야만 했다. 마침 휴대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제보자였다. 그 사람은 시내의 한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말했고, 나성은 약간 늦어질 수 있음에 양해를 구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종석이 입을 열었다.
“그러게 내가 가지 말자고 했잖아.”
종석은 나성의 매니저 겸 카메라맨이었다. 그보다 앞서,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유튜버로서 수입을 벌기 시작할 무렵의 나성은 그를 찾아온 종석을 동업자로 맞이해줬다.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라는 말이 지닌 효험은 강력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성은 종석의 제안을 재고할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종석의 성격은 퍽 껄끄러운 편이었다. 가령 지금의 상황과도 같이.
“역시 백반집을 가는 게 맞았어.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비도 오고. 그칠 기미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산에 가겠다는 거야? 당장 더 나은 선택지가 보이는데 굳이 이런 깡촌까지 기어 들어가야 되는 이유가 나는 납득이 안 되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평소에는 잘만 있다가도 한 번 도화선에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폭발해버렸다. 아직 사춘기가 끝나지 않은 듯한 성격은 어른이 된 종석이 버려야 할 부분이었다. 그의 마음은 정말이지 사춘기 소년의 그것과도 비슷해서 가만히 내버려두면 혼자 안정을 되찾고는 했다.
“방금은 미안했다, 야.”
종석 역시도 자신의 문제를 분명 인지하고 있을 테지만, 무릇 문제라는 건 인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은 나성이 감내해야만 할 부분이었다.
자동차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바닷가로 향했다. 약속시간을 30분가량 초과해서 그들은 겨우 카페에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잇, 괜찮습니다, 팬입니다.”
따위의 대화들로 제보자는 두 사람을 맞았다. 제보자는 나성과 반갑게 인사를 한 뒤, 어색하게 뒤따라온 종석과 악수를 나누었다. 종석은 언제까지나 카메라 뒤의 사람이었으므로 시청자들은 그를 잘 알지 못했다. 따라서 대화의 주도권은 언제나 나성이 쥐었다. 따뜻한 커피 세 잔을 테이블 위에 두고, 나성과 제보자는 마주앉았다. 종석은 나성의 옆에 앉았고, 나성을 올려다보는 각도의 카메라를 테이블에 설치했다. 녹화가 시작되자 대화가 시작되었다.
“제가 메일을 보낸 까닭은 다름 아닌......산에서 집도 없이 홀로 거주하는 한 노인 때문입니다.”
나성은 이미 메일을 통해 내용을 아는 제보를 처음 듣는 것인 양, 혹은 처음 듣는 것보다 더욱 표정변화를 보이며 들었다. 내용의 얼개는 어렵지 않았다.
제보자의 부모가 사는 어촌의 뒤로 작은 산이 하나 있는데, 그곳을 등산하는 사람들이 종종 거지보다 못한 차림으로 배회하는 한 노인을 목격했다. 목격은 단발성이 아니라 몇 달 동안 주기적으로 이어져왔고, 그 노숙자에 대한 이야기는 어촌 주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번졌다. 당연한 순리로 경찰이 동원되어 산을 수색한 적이 두어 번 있었지만 번번이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되었는가 싶을 때면 또다시 노인이 목격되고는 했다. 그 대목에서 공포감을 느끼는 주민들도 발생했으며 노인을 붙잡고 대화를 시도하려는 이들도 다수였다. 성공하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거짓된 제보가 아니라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경찰도 해결하지 못한 일이란 관점에서 각종 제보를 받아 직접 취재를 나서는 ‘한나성유튜브’에게는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10분가량의 인터뷰가 끝나고, 나성은 카메라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제보자 분과 한 번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와, 이거 정말 보통 일이 아닌데요? 어디 한 번 제가 열심히! 파헤쳐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성과 종석은 마을 근처의 해변에 주차를 하고 그 안에서 숙면을 취했다. 운전석과 조수석을 제외한 뒷자리에는 의자대신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근처 시내의 모텔에서라도 잘 수 있었지만 나성은 초창기부터 차에서만 자 왔다. 그것이 시청자들에게 더 흥미롭게 다가간단 이유가 컸다.
밤사이 빗방울들은 세차게 지붕을 두들겼고 나성은 그로부터 안락함을 찾았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 또한 이불인 듯 포근하게 느꼈다. 자연은 그 어떤 고급 이불이나 베개보다 더 커다랗고 안정감 있는 최고의 침구류임이 분명하다 생각하며 나성은 아침 6시에 눈을 떴다. 새벽에 비가 멎은 하늘은 어스름의 베일을 조금씩 벗어가며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밤사이 비를 잔뜩 머금은 바다는 힘껏 파도치며 땅을 넘보는 중이었다.
나성은 주차장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꿈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이 나왔다.
제보의 그 노인이라고는 말 할 수 없었다. 주름만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메마른 눈동자가 나성을 관통했다. 나성은 갈라지는 땅의 틈 사이로 추락했다. 메마른 갈색의 뿌리 사이에서 나성은 갈증에 휩싸였다. 그는 땅 속에서 익사했다.
깜깜한 암흑 속에서 황금빛 강이 한 줄기 뻗어나갔다.
찬란한, 빛.
그리고 알람소리.
그런, 황당한 꿈이었다. 흔치 않기에, 더욱 무서운 꿈이었다. 나성은 그 꿈의 내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종석과 아침 식사로 컵라면을 끓여먹을 때조차 꿈의 내용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공중화장실 세면대에서 찬물로 세수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이것은 일이다. 그것은 꿈이다. 꿈에 불과하다.
나성은 마을의 뒷산을 향해, 어촌마을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아직 7시가 채 되지 않았지만 마을은 막 깨어난 사람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나와 어수선했다. 대부분들이 5, 60대를 넘긴 어른들이었다. 나성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걸었고 종석이 그의 뒷모습을 촬영했다.
“어디 방송국에서 왔나벼?”
말을 걸어오는, 나름 젊은 축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남자와 인터뷰를 가지기도 했다.
“어휴, 말도 마요 말도 마. 여기 그 양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어, 모르는 사람이.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중략)......그러니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참 신통방통한 사람일세. 그 양반을 찾아간다고요? 허, 원 참. 고생들 하시네, 고생들 하셔. 비도 와서 다 젖었을 텐데 산을 타면 위험하지.”
“아, 네. 최대한 조심할 생각입니다. 그보다, 그 사람을 보신 적 있으세요?”
그 순간 옆에서 구경하던, 나이를 더 먹어 보이는 파마머리의 여자가 거들었다.
“왕나무를 찾아가봐. 거기서 본 사람들이 많으니까.”
“왕나무요?”
나성의 반문에는 다시 남자가 대답했다.
“아, 산에 가면 엄청 커다란 나무가 있거든? 한 눈에 보자마자 알 수 있을 거요. 그게 우리 마을 최고 명물인데......(중략)......그렇게 해서 데크 길로 가다보면 언젠가 볼 수 있다니까요. 특별한 날 아니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긴 하는디, 나물 캐러 다니는 아지매들도 다 넘어 다니곤 하니까, 크게 문제는 없을 거요.”
“알겠습니다. 귀중한 인터뷰 감사합니다.”
산의 들머리는 새나 벌레들의 소리로 시끄러웠다. 어수선한, 아침의 소리였다. 데크길은 계단이 아닌 비탈이라 크게 힘들이지 않고 등반할 수 있을 성싶었다. 나성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봉우리의 해발고도가 500m가 채 되지 않는 작은 산이었다.
“바닥이 미끄러워서, 조심해야 됩니다, 하. 그래도, 후, 오랜만에 등산이라, 하, 좋네요.”
나성의 입은 오래 쉬는 일이 없었다. 유튜버란 끊임없이 오디오를 채울 의무가 있는 직업이었다. 편집으로 날아갈 말들이 8할이었지만, 나성은 헐떡이면서도 어떻게든 입을 움직였다. 카메라는 뒤엉킨 붉은색과 갈색, 파랑색들을 녹화했다. 단풍이 진 무수한 나무들에도 푸른 하늘은 사이사이 새어 들어왔다. 가지들은 볕을 잘게 부숴 흩뿌렸다. 바람이 차가웠다.
“곧 있으면 정상인데, 헉, 아직도 그 왕나무는, 후, 나오지 않네요. 일단은, 계속 올라가보겠습니다. 하아.”
카메라를 향한 말 그대로 나성은 계속 올랐다.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불과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상임을 알리는, 봉우리의 이름이 음각된 비석이 있었고 일찍이 등정을 나온 마을 주민들이 꽤 많았다.
“왠지 모르게, 시골의 시간은 조금, 일찍 돌아가는 것 같아요. 해 뜬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우리보다 먼저 나온 사람들이 있어. 와. 조금 더 성실해져야겠다고 또 느끼네요.”
종석의 카메라는 잠시간 정상에서의 전망을 녹화했다. 나성은 카메라와 나란히 선채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구성하며 춤을 췄다. 하늘은 잿빛의 먹구름과 푸른색으로 나뉘었다. 나성은 그 풍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이따금씩 마주치는 자연의 위대함은 인간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곤 했다. 나성은 10분 간 녹화를 멈춘 후 깊이 호흡했다.
곧 그들은 다시 이동했다. 올라온 산의 뒷면을 타고 내려갔다. 밭과 도로와 건물이 어지러진 시골의 풍경을 완상하며, 그들은 그렇게, 고목과 맞닥뜨렸다. 주민들이 말하던 왕나무였다.
나성은 어째서 그 고목을 왕나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구도 저 고목이 왕나무라 알려주진 않았지만 보자마자 그것이 왕나무임을 알았다는 지점에서 더 왈가왈부할 게 없었다. 다른 나무들을 아득히 초월하는 거목이 산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나성은 저 근처에서 발견되곤 한다는 노숙자에 대해서 망각했다. 그저 저 나무로 가고자 하는 마음만이 요동쳤다.
“빨리 가자.”
나성은 망설이지 않고 난간을 넘었다. 사람들이 많이 넘나들어 근처는 위험하진 않았다. 나성과 종석은 고목을 향해 쾌속으로 전진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인형人形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가을을 무색하게 만드는 녹색 잎들과 그 아래로 고인 그림자뿐. 나성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닌 올려다봐야 되는 거목에게서 일말의 공포를 느꼈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뗄 수는 없었다. 나성으로서는 쉽게 느껴보지 못한, 경외라는 이름의 감정이었다.
“일단, 이 근처를 수색하면서 그 사람을 찾아보시죠?”
나성이 고목을 마주한 채로 계속 침묵하자 기어코 종석이 말했다. 나성은 딴 세상에 갔다 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면서 고갤 끄덕였다.
“아, 네. 그러면, 음......저랑 카메라맨이랑 나눠져서 따로따로 수색해보는 걸로 할게요. 산이 그렇게까지 큰 것은 아니라 막 찾는 게 어려워보이진 않는데......예상보다 땅이 험해서 조심해야 될 것 같습니다.”
나성의 말마따나 그들은 수색을 시작했다. 나성은 종석을 먼저 보낸 후, 그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들며 촬영을 계속했다.
“저 왕나무라는 것은 정말 신비롭네요. 보다보니 진짜 홀리는 줄 알았습니다. 참 나무들이란 게, 보다보면 대단한 것 같아요. 다 연세가 지긋지긋하신 분들인데 말이에요. 이런 분들을 보다보면 저도 거북목을 고쳐야지, 하는 다짐을, 네, 하곤 합니다. 하하.”
나성은 카메라 너머의 시청자들을 향해서 떠들었다. 속마음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은 이제 익숙해져버린 그의 습관이었다. 그렇게, 그는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야생은 아무렴 자유로운 동식물들의 영역이었고 그것들의 자유는 나성의 다리를 할퀴었다. 얇은 츄리닝 바지로는 거친 잔가지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어제의 비에 젖어버린 땅도 주의해야 했다. 살짝 미끄러지기만 해도 발목은 쉽게 접질리고 살짝 접질리기만 해도 산행은 극악의 도전이 되기 마련이다.
30분 즈음 걸어도 진전은 많지 않았다. 한 시간 즈음 지났을 땐 회의감마저 들었다. 이런 방법으로 해서 노인을 찾아낼 수 있는가, 의문이 나성의 마음에 깃들었다. 그 순간 종석으로부터의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극적인 타이밍이라고도 할만 했다.
“찾은 것 같아.”
스피커 너머로 전달되는 현장의 긴박함이 나성을 덩달아 다급하게 만들었다. 그는 전화연결을 끊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다급함은 조심스러운 발걸음마저도 신속하게 하였고 올 때보다 곱절은 빠른 속도로 고목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 종석의 뒷모습이 있었다.
“여기야!”
종석은 나성을 힐끔 뒤돌아본 후 다시 고목의 그림자 속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나성이 다가가보니 과연 그늘 아래 한 사람의 노인이 서 있었다. 과연, 지저분한 남자였다. 정돈되지 않은 하얀 머리칼과 무질서하게 뻗쳐있는 수염들, 그리고 주름들은 더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성은 짐짓 두려움에 떨었다. 노인은 지저분한 행색임에도 나성을 바라보는 두 눈빛만큼은 총명했다. 오래도록 집 없이 살아왔을 것만 같은 모습이건만 두 눈동자만큼은 분명, 지성인의 것이었다. 보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이종의 것 같은 총기가 깃들어 있었다. 나성은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정했다. 말이 통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피어오르는 동시에, 조금, 두려웠다.
“안녕하세요?”
나성은 고갯짓하며 인사하는 동시에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다가가는 만큼 노인은 뒷걸음질 쳤다. 고목의 기둥에 밀착하다시피 붙어선 노인에, 나성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다가갔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었다. 노인의 오른손이 삽자루를 끌고 있었으므로. 나성은 멈춰선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는 방송 같은 거 하는 사람들인데요. 이곳에 살고 계신다고 해―”
“찍지 마!”
노인이 소리쳤다. 위협적이지 않은, 기껏해야 노인의 고성이었지만 어째선지 나성은 선 채로 굳었다. 두려움이 그의 발목을 힘껏 움켜쥐었다. 분노에 차 씩씩거리는 노인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나성은 하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종석에게 말했다.
“일단은 끄자, 종석아. 촬영은 인터뷰 후에 해도 되니까......”
종석이 순순히 나성의 말에 따른 건 ‘노인의 적대로 인한 긴급촬영중단’은 분명 영상으로 써먹기 좋은 자극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나성은 촬영의 득실을 고려하지 못했다. 노인에게 집중할 따름.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노인을 직시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깊고 어두운 눈동자. 나성이 다시 한 번 물어도 노인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같은 내용의 문답. 단 한 번의 외침이었는데도 노인은 호흡이 거칠어지는 등 힘겨워보였다. 희뜩이는 눈동자와 대비되게 허약해 보이는 몸이었다. 나성의 곁에 붙어 선 종석이 말했다.
“아무리 봐도 대화가 안 될 것 같은데.”
나성은 고갤 저었다. 그들은 이미 대화중이었다. 번득이는 노인의 눈길과 자신의 눈길을 이으며, 나성은 그렇게 믿었다. 대화는 말로써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알려주십시오. 이 나무에 대해서.”
나성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말했다. 무언가 말을 해야 된다는 압박감 속에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 저것이었다. 그의 뒤엉킨 머릿속에는 어느새 늙은 고목이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질문을 받은 노인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나성은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나성이 그의 눈을 응시했지만 이제는 그 방향이 달랐다. 기어코 노인은 입을 열었고, 고성이 아닌 말이 바깥으로 나왔다.
“나무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 나 이전의 어른들보다도 훨씬 오래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 모든 역사보다도 오래되었다.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냐?”
차분한 노인의 목소리는 미성이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방금 전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키 힘든 것이었다. 나성은 꽤 분위기가 느슨해진 듯해 다시금 질문했다.
“선생님께서는 계속 여기서 사시는 건가요?”
“.......나에 대해서라면 그다지 할 말이 없다.”
“아, 성함이라도 안 될까요?”
노인은 입을 굳게 다문 채로 나성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림자의 바깥으로 걸어나가는 노인의 발걸음은 고요했다. 그리고 빨랐다. 어느새 종석에게 다가간 노인은 빠르게 팔을 휘둘렀고, 어느새 카메라는 땅바닥을 굴렀다. 양해는 일절 없는 일방적인 폭행. 종석이 황급히 카메라를 주워 보더니 험악하게 으르렁거렸다.
“깨졌어. 못 쓰겠군.”
“찍고 있던 거야?”
“그게 나의 역할이니까.”
나성은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일이 잘 풀릴 것 같다가도 이 모양 이 꼴이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일단은 진정해봐. 내가 얘기해볼 테니까.”
나성은 또 언제 터질지 모를 종석을 물러나게 한 뒤, 노인을 돌아보았다. 언제는 안 그랬냐는 듯 분노 어린 표정이 나성을 쏘아보고 있었다.
“선생님. 이것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뭐죠?”
노인은 소리치지 않았다. 차분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것을 기록하지 마. 그래서는 안 돼.”
나성이 입술을 달싹이며 다시 말을 꺼내려하자 노인은 재차 입을 열었다.
“나무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누구도 이 나무를 가질 수 없어!”
나성은 “역시 맛이 간 사람이로군.” 말하며 중얼거리는 종석을 무시하며 노인의 말을 곱씹었다. ‘누구의 것도 아니다.’ 역시나 이 고목의 존재가 수상했다. 다른 나무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는가. 혼자만 다른 부피의 세월을 관통한 것처럼 보였다. 나성도, 종석도, 고목을 처음 봤을 때는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것으로부터 풍기는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일개 나무에게 경외를 느낌은 아무래도 보편적이지 않았다. 나성은 그것이 신이 내린 나무라 해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노인의 정체 같은 건 갈피도 잡을 수 없는 미궁으로 빠졌다. 하물며 그가 악을 써가며 지키려하는 거목 한 그루의 정체는 더할 나위 없는 미지였다. 나성의 마음속에선, 참으로 오래간만에 호기심이 영상욕심을 앞질렀다.
“도대체 이 나무는 뭐라 말이죠? 아무리 봐도 그냥 나무가 아닙니다. 저도, 저 친구도, 보자마자 홀렸단 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뭘 알고 계신 건지...부디 설명 좀 해주십시오!”
노인은 나성의 말에 잠시간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내 고목 아래의 그림자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주저앉았다. 돌출 된 뿌리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고목에 등을 기댄 모습이 꽤 편안해보였다.
“나도 아는 것이 많지 않다. 많은 것들을 이미 알려줬어.”
나성은 노인이 더 말하기까지 침묵하며 기다렸다.
“예전에는 열매도 열리곤 했지.”
나성은 당황하며 고목의 가지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과일나무라도 되었단 말인가. 올려다본 고목의 처마는 가을을 무안하게 만드는 짙은 초록이었다.
“이제는 나지 않는 겁니까?”
“그리 된지 오래 됐지. 참 맛있었어.”
“사과나 오렌지 같은 걸까요?”
“틀려. 딱히 이름은 없다. 이 나무에서만 나는 열매였거든.”
나성은 미지의 열매에 대한 궁금증을 미뤄두고 대화가 오가는 지금의 기세를 타 다시 질문했다.
“선생님은 여기 사시는 건가요?”
“그렇지, 뭐.”
“불편하진 않고요?”
나성으로서는 중요하지도 않은,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노인은 자못 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례하구나! 나무는 정말로 풍부하다. 최근엔 조금 덜할지 몰라도 한때 이곳은 정말 풍족했어.”
“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한―”
“가라!”
노인은 다시 한 번 고성을 터뜨렸다. 워낙 갑작스러웠던 탓에 말이 끊긴 나성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기까지 했다. 노인의 눈길이 나성을 찌를 듯 했다.
“이 산에서 당장 꺼져라. 그리고 오늘 본 것을 모두 잊어.”
“하지만―”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른손으로 삽을 질질 끌며, 나성과 종석에게로 다가왔다. 노여운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휘두를 듯이. 나성은 그를 바라보며 공포에 휩싸였다. 지금 노인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어느새 부턴가 그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빛났다. 아까 전보다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나성은 당장 떠날 수밖에 없었다.
까만 검정 위로 금빛 강이 가로질렀다.
까만 검정은, 조각났다. 찬란하게.
황금시대의 황금 왕좌 위로 초라한 죄인이 앉았다.
조각난 검정들은 또 다시
분 열 하 고 분 열 하 고
왕좌의 위로 쏟아진다.
죄인이 된 지배자, 짊어진다.
나성은 헐떡이며 눈을 떴다. 모텔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점층적으로 기억이 재건되었다. 고목을 두고 떠나는 하산과 조수석에서 바라본 바다와 카메라의 메모리를 복구한 후 종석과 기뻐하던 순간들이 점. 점. 점으로 기억났다. 종석은 담배라도 피러 간 모양인지 방에 없었다. 아침이라고 부르기에는 뻔뻔한 9시. 나성은 잠시 방을 서성이다, 다시 침대로 뛰어들었다. 전날 그를 지나간 폭풍의 잔해가 오늘 서서히 드리웠다. 너무 깊은 잠은 두통을 불러올 수 있단 사실을 나성은 기억했다. 마침 혼자였고 자연스레 그는 꿈을 상기하는 데 열중했다. 분명 비현실적이었지만 꿈을 바라보는, 혹은, 추체험하는 감각이 극히도 생생했다. 황금이 그의 몸을 조각내는 듯했고 부서진 검정은 한없이 영롱했다, 사라져갔다. 어쩐지, 고목 아래의 그림자가 연상되는 검정이었다. 나성은 문득, 검정색의 작은 원탁을 바라보았다. 종석의 카메라가 놓여있었다. 고목의 모습을, 그 아래 노인의 모습을 담은 상자. 나성은 문득,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그에게 있어서 영상은 생계수단이었다. 어제 메모리를 복구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분명 그랬는데, 나성은 카메라를 부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꿈 속의 죄인이 그의 영혼에게 속삭였다. 담아서는 안 된다. 기록해서는 안 된다. 소유해서는 안 된다. 나성은 바닥으로 카메라를 세차게 던졌다. 파편들이 내팽개쳐지고, 나성은 다시 주워들고, 던졌다. 완전히 부서질 때까지. 나무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는 노인의 말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나성은 바깥으로 나섰다. 가을의 오전은 차갑다. 가을하늘은 높고 공활하게 그를 굽어보았다. 그는 인도를 걸었다. 어제의 산으로 향하는 도보였다. 시내로부터 그곳까지 걸어가기에는 먼 거리였지만 나성은 사고를 거치지 않고 행동했다. 시간이 조금 흘러 전화벨이 울려도 받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의 전원을 꺼놓은 채로 걸었다. 그는 생각했다. 아직 그곳에 고목이 있을까. 지난 밤 사이 없어졌다면 그게 이상한 것일 테지만, 나성은 그런 불안감에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고목은 그 누구의 것도 되어서는 안 되지만, 나만큼은 그것을 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6시간이 지났다. 정오라기에는 뻔뻔한 오후였고, 높고 공활한 가을하늘은 볕을 퍼부었다. 찬바람과 따신 햇빛의 조화는 산뜻했고 나성은 예의 들머리 앞에 서 있었다. 비탈을 타고 미끄러지는 가을바람, 그 건조한 바람만큼, 산은 어제보다 말라 있었다. 진흙이 흙이 되고 낙엽들은 서서히 몸을 오므렸다. 나성은 데크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커다란 고목을 발견하고는 간단히 난간을 뛰넘었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는 경사면 위를 빠르게 질러 고목 앞으로 다다랐다. 어제와 다름없는 자태. 나성은 나무의 늙은 껍질과 손을 맞댔다. 고목의 박동을 헤아렸다. 푸른 심장은 느리게, 숨을 쉬었다.
어느덧 하늘마저 단풍이 지듯 노을이 번졌다. 시간은 저녁을 빠르게 달려 나갔다. 나성은 고목에 기대서서 몇분 간 경관을 감상했다. 뒤이어, 시야의 틀 안으로 소년이 나타났다. 다른 호칭은 생각할 수 없는 전형적인, 소년.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아저씨?”
“......내가 묻고 싶네. 넌 왜 여기 있니? 위험한데 말이야.”
노인이 아님에 실망하며 나성은 걸어 나갔다. 초등학생 저학년으로도, 고학년으로도 보이는 모습이었다. 소년은 말했다.
“전 정찰이거든요. 파수꾼을 확인하러 온 거에요.”
“파수꾼? 노인을 말하는 거니?”
“맞아요. 삽을 들고 다니죠.”
나성은 미심쩍게 소년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어째서 파수꾼으로 불리는지는 알지 못했다. 여러모로 수상했다.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건지 알려줄 수 있겠니.”
“별 거 아니에요. 이 나무의 수액이 정-말 귀한 거거든요. 그래서 계속 훔치려 시도하는데, 파수꾼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는 거죠. 오늘은 총공격을 할 거에요. 순순히 비켜주질 않으니 그러는 수밖에 없겠죠.”
“이 나무의 수액을 훔치려하다니, 못된 녀석이구나. 썩 돌아가라.”
나성은 고목에게 해로워 보이는 소년에의 적개심이 치밀었다. 욕지거리라도 뱉고 싶었단 생각이었지만 차마 아이에게 그러지는 못 했다. 그래서일까, 소년은 물러나지 않았다.
“뭐, 상관없어요. 어차피 전 정찰이니까. 수액을 훔치는 본대는 밤에 올 거예요. 낮에는 너무 눈부시니까.”
“......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나성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땀이 맺힌 목덜미를 바람이 훑고 지나가면 온몸의 털이 한 올 한 올 곤두섰다. 가을의 저녁은 짧았다. 시간이 노을을 한 겹씩 벗길 때마다 검푸른 하늘이 드러났다. 하늘의 더께 사이로 창백한 달과 별이 걸렸다.
“곧 있으면 시간이 돼요. 모두가 얼굴을 감추고 달려들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면 안 될까?”
“안 돼요. 시간이 다 됐거든요. 한 가지 조언해드리자면, 여기서 떠나가세요. 계속 여기에 있다간 다칠 거예요.”
다칠지도 모른다, 가 아닌 다칠 것이다, 라는 경고가 나성을 섬뜩하게 찔렀다. 소년은 마른 가지가 무성한 비탈을 거침없이 달리더니 마법처럼 시야에서 사라졌고, 나성은 소년이 사라진 방향으로 선 채, 머뭇거렸다. 직전의 일들을 믿기 어려웠다. 소년과의 마주, 소년과의 대화, 소년과의 이별.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길도 아닌 곳으로 달려 나가더니, 어디로 사라졌는가! 지끈, 또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나성은 몸을 돌려 고목과 마주한 채 고민했다. 이곳에 남으면 위험하다. 소년이 그렇게 말했고 나성은 그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뚜렷한 근거는 없이. 비현실적인 이 상황 자체가 근거로 받아들여졌다. 나성은 가만히, 몇 분간 상념에 잠겼다.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끝끝내 판단을 내렸다. 떠나자.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고목을 두고 떠나기가, 몸서리 쳐질 듯 싫었다. 그러나 당장은 안위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그런 고로, 나성은 하산을 시작했다.
고목에게서 멀어질수록 흩어졌던 정신이 모여드는 느낌이었다. 늦게나마 종석의 생각이 났다. 나성은 휴대폰의 전원을 켜자 종석으로부터의 부재중 전화들, 메시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벌써 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사과 한 마디로는 넘어가지 못하리란 직감에 나성은 벌써부터 골치 아팠다. 어쩌다 난 이곳에 있는 걸까. 원초적인 질문은 그를 오랜 과거로 호출했다. 기자라는 꿈을 꿨던 고등학생 시절, 어떤 꿈을 꾸든 성적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무력감. 나성은 유튜브의 도약과 함께, 접어뒀던 꿈을 다시 펼쳤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으나 3학년으로 올라선 후 입장은 급속도로 변했다. 기어코 대학의 문턱 앞에 서버린 것이었다. 무렵에 그는 사실상 공부를 포기한 상태였고, 보다, 촬영이 재밌었다. 꾸준하게 쌓인 영상이 100개가 넘었다 구독자들도 꽤 많았다. 유튜브의 인기는 나날이 상승했다. 제보를 받아 직접 취재를 하는 ‘한나성유튜브’는 그렇게 완성 되었고 실종된 강아지를 찾아다주는 영상으로 인기를 얻어 그의 삶을 책임지게 되었다. 나성은 기뻤고,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통장으로 쌓이는 돈을 볼 때마다 자랑스러운 동시에 더 큰 돈을 원했고 반복적으로 촬영했으며, 어느새 원동력이 바뀐 동시에 그는 지쳤고, 지쳤다. 작금에 이르기 전까지도 그는 지쳐 있었다.
나성은 카메라를 부쉈다. 내리막길 위에 멈춰 서서, 몸을 돌렸다. 햇빛의 잔상만이 남은 밤의 목전이었다. 그는 고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호기심이 그를 이끌었다. 최초의 원동력을 되찾았다.
나성은 다시 난간을 넘었다. 하늘은 무서운 속도로 까매졌다. 세상이 까매졌다. 전기가 돌지 않는 산은 순결한 밤의 어둠을 머금었다. 나성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긁히는 등 공격을 받으면서 걸었다. 최선을 다해 조심해도 발걸음은 영 느려지지 않았다. 멈춰 섰을 때는, 깨달은 후였다. 순간 나성은 방향을 잊었다. 시각은 무용했고 그는 대신, 청각에 신경을 기울였다. 산 속의 밤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무수한 속살거림이 사위에 있었다. 바람이 수풀을 흐트러뜨리는 소리, 이름 모를 벌레들의 울음소리, 같은 것들로 밤은 호흡했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발소리. 나성은 짧은 보폭으로 낙엽을 밟고 달리는 소리를 들었다. 소년이 말한, 수액을 훔치러 온다던 본대. 나성은 여러 개로 분열하는 보폭의 소릴 들었다. 여럿이었다. 밤 속의 그림자들은 보이지도 고요하지도 않게 움직였다. 짐승처럼. 모든 보폭들은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어둠 속 어디선가 빛이 반작였다. 반사광이었다. 누군가가 쇠붙이를 들고 있었다. 나성은 노인의 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노인이 저곳에 있었다. 곧 살육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성은 그 익숙지 않은 소리에 상상을 덧대며 상황을 유추했다. 노인이 습격자들의 머리통을 삽으로 내려찍는, 그런 상황을 떠올렸다. 나성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충돌의 소리는 명확하지만 비명소리는 한 줌도 없었다.
그림자들의 기척이 나성에게서 점점 가까워졌다. 나성은 그들이 일으키는 바람마저도 느껴지는 듯했다. 충돌은 한순간이었다. 보이지 않던 그림자는 한순간에 실체로 나타나 그의 등을 들이받았다. 의도적이라기보다 밤의 어둠이 빚은 사고였다. 부딪친 습격자는 나성에겐 하등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몸을 일으켜 달려 나갔고, 나성만이 비탈을 구르며 신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습격자들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나성을 뛰어넘었다. 그는 한 폭의 시야를 가로지르는 그림자들을 보았다. 하나. 둘. 셋. 끊이질 않았다. 살육의 소리도, 마찬가지로.
나성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눈은 밤에 적응하여 주변의 윤곽을 인지했다. 무수한 잔가지들 너머로, 가까운 곳에 고목이 보였고 쇠붙이를 휘두르는 하나의 움직임이 보였다. 비명도 기합도 없이 시체들이 덧쌓이고 있었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그는 비틀대며 걸어가다 위쪽에서 굴러온 육신에 걸려 넘어졌다. 습격자의 몸 위로 엎어졌다. 그 따스하고 물컹한 감각에, 나성은 식겁했다. 아직은 온기가 남아있는, 그것은 시체였다. 나성의 입에서 힘없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는 급하게 발버둥 치듯 일어서려 했다. 사람의 몸을 밟고 선 몸은 위태로웠고 굴러온 시체가 다시 한 번 그를 넘어뜨렸다. 주변은 무수한 시체들로 가득했다. 나성은 의도치 않게 어느 시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노인의 얼굴이었다. 그가 익히 알고 있던, 노인의 얼굴이었다. 시체의 얼굴을 한, 노인의 얼굴이었다.
나성은 기겁하며 고갤 돌렸다.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더 높은 곳의 누군가는 여전히 쇠붙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쏟아지는 습격자들만큼이나, 파수꾼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나성의 눈이 산을 나뒹구는 시체들을 훑었다. 시체들의 체형은 모조리 같았다. 호기심이란 이름의 천진스런 악마는 나성의 눈길을 시체의 얼굴로 끌어당겼다. 모든 곳에 노인의 얼굴이 있었다. 죽어버린, 시꺼먼 눈동자들이 무수했다. 나성의 마지막 이성 한 가닥이 사라졌다.
그는 미친 듯이 달렸다. 아니, 미친 채로 달렸다. 그는 무작정 노인의 시체들을 밟고 달렸다. 그도 모르는 사이 그는 고목 앞이었고 삽을 휘두르며 습격자들을 도륙 내는 파수꾼의 앞이었다.
나성은 살아 움직이는 습격자들을 보았다. 노인의 것이 아닌 까맣고 충일한 모발과 보다 큰 키, 재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그들을 보았다. 습격자들은 삽을 얻어맞아 죽어가며 듬성듬성 두피가 휑한 흰머리가 되었고 쭈글쭈글한 피부로 변해갔다.
문득, 파수꾼의 고개가 움직였다.
눈길과 눈길이 일직선상에서 만났다. 어둠은 눈길을 막지 못했다. 파수꾼의 눈길은 야행성 짐승의 것처럼 영롱했다. 나성의 눈동자 속에는, 반짝이는 눈을 한 노인의 초상이 담겼다.
그는 도망쳤다.
그의 기억은 온전하지 않다. 다만 그가 겪었던 사건이 기록되는 일은 없었다. 나성이 되찾아간 산에는 시체 한 구 발견할 수 없었다. 노인은 여전히도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지만 나성만은 노인을 볼 수 없었다.
종석과의 관계는 어긋났다가 또 봉합되는 식으로 여전히 반복되었다. 나성에겐 아무렴 상관없었다. 시간을 거듭할수록 그날의 사건이 실재 했던가 의구심이 생길 때면 그도 모르는 사이 그가 휘갈겨 써놨던 일기를 펼쳤다. 언젠가 다시 그곳으로 향할 것이다. 이번에는 카메라를 들고서. 취재의 목적이 감춰진 비밀만은 아니었다. 그는 푸른 고목을 지키기 위해 카메라를 들 것이다,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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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포대교
- 2025-11-25
이곳의 눈은 내린다기보다는 솟아오르는 편이라 썩 즐겁지 만은 않다. 다만 유리막 바깥의 세상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약간의 위안이 되기는 했다. 다만 여전히 즐겁지 만은 않다. 그들이 나를 관찰할 때 나는 손을 흔든다. 그들이 나를 흔들면 나는 조금 어지롭고 이 세상마저도 어지럽다. 지구본을 닮은 유리는 겨울을 흉내 낸다 박제된 겨울은 흔들릴수록 촘촘해진다 그리고 저 너머의 서랍 위에는 가을이 박제되어 있다. 붉은 단풍보다는 샛노란 은행 한 닢 유리는 부자유를 포장하여 애정을 듬뿍 받고 이따금씩은 스스로마저 가둬두게 한다. 유리공예공은 만물을 박탈한다. 또 어떤 유리는 그 투명도가 너무도 높아서 인지할 수조차 없다. 그 어떤 인간이라도 인지할 수 없어서 다룰 수조차 없다. 실은 그들의 손가락에서 비롯된 것이면서도 누구도 자각하지 못하며 지금의 영화를 방부한다 말하지만 하릴없는 유리막 속에서는 늙은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다. 박제의 끝은 방치이고 둥근 세상도 언젠가 방치된 채 우주의 한구석을 구르겠지
- 구포대교
- 2025-10-26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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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도입부는 <소년이 온다> 오마주하신건가요?? 너무 잘 읽었슴다!
@선 혁 소년이온다 오마주는 없어요..읽어주셔서 감사함니다
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