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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과 파수꾼

  • 작성자 구포대교
  • 작성일 2025-11-28
  • 조회수 532

 잿빛 하늘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창문에 부딪친 빗물은 먼지를 씻겨내며 미끄러졌다.

 “큰일인걸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아.”

 운전석에 앉은 종석이 말했다와이퍼가 불쑥 나타나더니 창을 닦기 시작했다빗줄기와 와이퍼의 소리로 내부는 순식간에 산만해졌다그리고 나성은작은 점이 되는 기분이었다시끄러운 도시 한가운데서 홀로 옹송그리는 기분이었다비로 이루어진 대도시였다.

 

 차는 안개로 둘러싸인 고속도로를 달렸다나성은 유리창에 머릴 기대 자동차의 떨림을 고스란히 느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져두었다분위기를 환기할 겸 튼 라디오에선 게스트로 온 아이돌의 신간 홍보가 열심이었고 나성은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굴렸다아직도 한 시간을 더 달려야만 했다마침 휴대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제보자였다그 사람은 시내의 한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말했고나성은 약간 늦어질 수 있음에 양해를 구했다전화가 끊기자마자 종석이 입을 열었다.

 “그러게 내가 가지 말자고 했잖아.”

 종석은 나성의 매니저 겸 카메라맨이었다그보다 앞서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유튜버로서 수입을 벌기 시작할 무렵의 나성은 그를 찾아온 종석을 동업자로 맞이해줬다친구 좋다는 게 뭐냐라는 말이 지닌 효험은 강력했다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성은 종석의 제안을 재고할 것이었다아닌 게 아니라 종석의 성격은 퍽 껄끄러운 편이었다가령 지금의 상황과도 같이.

 “역시 백반집을 가는 게 맞았어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비도 오고그칠 기미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산에 가겠다는 거야당장 더 나은 선택지가 보이는데 굳이 이런 깡촌까지 기어 들어가야 되는 이유가 나는 납득이 안 되는데?”

 이것이 문제였다평소에는 잘만 있다가도 한 번 도화선에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폭발해버렸다아직 사춘기가 끝나지 않은 듯한 성격은 어른이 된 종석이 버려야 할 부분이었다그의 마음은 정말이지 사춘기 소년의 그것과도 비슷해서 가만히 내버려두면 혼자 안정을 되찾고는 했다.

 “방금은 미안했다.”

 종석 역시도 자신의 문제를 분명 인지하고 있을 테지만무릇 문제라는 건 인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당장은 나성이 감내해야만 할 부분이었다.

 

 자동차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바닷가로 향했다약속시간을 30분가량 초과해서 그들은 겨우 카페에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잇괜찮습니다팬입니다.” 
 따위의 대화들로 제보자는 두 사람을 맞았다제보자는 나성과 반갑게 인사를 한 뒤어색하게 뒤따라온 종석과 악수를 나누었다종석은 언제까지나 카메라 뒤의 사람이었으므로 시청자들은 그를 잘 알지 못했다따라서 대화의 주도권은 언제나 나성이 쥐었다따뜻한 커피 세 잔을 테이블 위에 두고나성과 제보자는 마주앉았다종석은 나성의 옆에 앉았고나성을 올려다보는 각도의 카메라를 테이블에 설치했다녹화가 시작되자 대화가 시작되었다.

 “제가 메일을 보낸 까닭은 다름 아닌......산에서 집도 없이 홀로 거주하는 한 노인 때문입니다.”

 나성은 이미 메일을 통해 내용을 아는 제보를 처음 듣는 것인 양혹은 처음 듣는 것보다 더욱 표정변화를 보이며 들었다내용의 얼개는 어렵지 않았다.

 제보자의 부모가 사는 어촌의 뒤로 작은 산이 하나 있는데그곳을 등산하는 사람들이 종종 거지보다 못한 차림으로 배회하는 한 노인을 목격했다목격은 단발성이 아니라 몇 달 동안 주기적으로 이어져왔고그 노숙자에 대한 이야기는 어촌 주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번졌다당연한 순리로 경찰이 동원되어 산을 수색한 적이 두어 번 있었지만 번번이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말았다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되었는가 싶을 때면 또다시 노인이 목격되고는 했다그 대목에서 공포감을 느끼는 주민들도 발생했으며 노인을 붙잡고 대화를 시도하려는 이들도 다수였다성공하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거짓된 제보가 아니라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었다경찰도 해결하지 못한 일이란 관점에서 각종 제보를 받아 직접 취재를 나서는 한나성유튜브에게는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10분가량의 인터뷰가 끝나고나성은 카메라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제보자 분과 한 번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이거 정말 보통 일이 아닌데요어디 한 번 제가 열심히파헤쳐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성과 종석은 마을 근처의 해변에 주차를 하고 그 안에서 숙면을 취했다운전석과 조수석을 제외한 뒷자리에는 의자대신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근처 시내의 모텔에서라도 잘 수 있었지만 나성은 초창기부터 차에서만 자 왔다그것이 시청자들에게 더 흥미롭게 다가간단 이유가 컸다.

 밤사이 빗방울들은 세차게 지붕을 두들겼고 나성은 그로부터 안락함을 찾았다희미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 또한 이불인 듯 포근하게 느꼈다자연은 그 어떤 고급 이불이나 베개보다 더 커다랗고 안정감 있는 최고의 침구류임이 분명하다 생각하며 나성은 아침 6시에 눈을 떴다새벽에 비가 멎은 하늘은 어스름의 베일을 조금씩 벗어가며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밤사이 비를 잔뜩 머금은 바다는 힘껏 파도치며 땅을 넘보는 중이었다.

 나성은 주차장에서바다를 바라보며스스로를 바라보고 있었다꿈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이 나왔다.

 제보의 그 노인이라고는 말 할 수 없었다주름만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메마른 눈동자가 나성을 관통했다나성은 갈라지는 땅의 틈 사이로 추락했다메마른 갈색의 뿌리 사이에서 나성은 갈증에 휩싸였다그는 땅 속에서 익사했다.

 깜깜한 암흑 속에서 황금빛 강이 한 줄기 뻗어나갔다.

 찬란한.

 그리고 알람소리.

 그런황당한 꿈이었다흔치 않기에더욱 무서운 꿈이었다나성은 그 꿈의 내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종석과 아침 식사로 컵라면을 끓여먹을 때조차 꿈의 내용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는 공중화장실 세면대에서 찬물로 세수하며 정신을 다잡았다이것은 일이다그것은 꿈이다꿈에 불과하다.

 나성은 마을의 뒷산을 향해어촌마을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아직 7시가 채 되지 않았지만 마을은 막 깨어난 사람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나와 어수선했다대부분들이 5, 60대를 넘긴 어른들이었다나성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걸었고 종석이 그의 뒷모습을 촬영했다.

 “어디 방송국에서 왔나벼?”

 말을 걸어오는나름 젊은 축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남자와 인터뷰를 가지기도 했다.

 “어휴말도 마요 말도 마여기 그 양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어모르는 사람이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중략)......그러니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참 신통방통한 사람일세그 양반을 찾아간다고요원 참고생들 하시네고생들 하셔비도 와서 다 젖었을 텐데 산을 타면 위험하지.”

 “최대한 조심할 생각입니다그보다그 사람을 보신 적 있으세요?”

 그 순간 옆에서 구경하던나이를 더 먹어 보이는 파마머리의 여자가 거들었다.

 “왕나무를 찾아가봐거기서 본 사람들이 많으니까.”

 “왕나무요?” 

 나성의 반문에는 다시 남자가 대답했다.

 “산에 가면 엄청 커다란 나무가 있거든한 눈에 보자마자 알 수 있을 거요그게 우리 마을 최고 명물인데......(중략)......그렇게 해서 데크 길로 가다보면 언젠가 볼 수 있다니까요특별한 날 아니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긴 하는디나물 캐러 다니는 아지매들도 다 넘어 다니곤 하니까크게 문제는 없을 거요.”

 “알겠습니다귀중한 인터뷰 감사합니다.”

 

 산의 들머리는 새나 벌레들의 소리로 시끄러웠다어수선한아침의 소리였다데크길은 계단이 아닌 비탈이라 크게 힘들이지 않고 등반할 수 있을 성싶었다나성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봉우리의 해발고도가 500m가 채 되지 않는 작은 산이었다.

 “바닥이 미끄러워서조심해야 됩니다그래도오랜만에 등산이라좋네요.”

 나성의 입은 오래 쉬는 일이 없었다유튜버란 끊임없이 오디오를 채울 의무가 있는 직업이었다편집으로 날아갈 말들이 8할이었지만나성은 헐떡이면서도 어떻게든 입을 움직였다카메라는 뒤엉킨 붉은색과 갈색파랑색들을 녹화했다단풍이 진 무수한 나무들에도 푸른 하늘은 사이사이 새어 들어왔다가지들은 볕을 잘게 부숴 흩뿌렸다바람이 차가웠다.

 “곧 있으면 정상인데아직도 그 왕나무는나오지 않네요일단은계속 올라가보겠습니다하아.”

 카메라를 향한 말 그대로 나성은 계속 올랐다정상에 도달할 때까지불과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정상임을 알리는봉우리의 이름이 음각된 비석이 있었고 일찍이 등정을 나온 마을 주민들이 꽤 많았다.

 “왠지 모르게시골의 시간은 조금일찍 돌아가는 것 같아요해 뜬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우리보다 먼저 나온 사람들이 있어조금 더 성실해져야겠다고 또 느끼네요.”

 종석의 카메라는 잠시간 정상에서의 전망을 녹화했다나성은 카메라와 나란히 선채로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다바다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구성하며 춤을 췄다하늘은 잿빛의 먹구름과 푸른색으로 나뉘었다나성은 그 풍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이따금씩 마주치는 자연의 위대함은 인간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곤 했다나성은 10분 간 녹화를 멈춘 후 깊이 호흡했다.

 

 곧 그들은 다시 이동했다올라온 산의 뒷면을 타고 내려갔다밭과 도로와 건물이 어지러진 시골의 풍경을 완상하며그들은 그렇게고목과 맞닥뜨렸다주민들이 말하던 왕나무였다.

나성은 어째서 그 고목을 왕나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누구도 저 고목이 왕나무라 알려주진 않았지만 보자마자 그것이 왕나무임을 알았다는 지점에서 더 왈가왈부할 게 없었다다른 나무들을 아득히 초월하는 거목이 산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나성은 저 근처에서 발견되곤 한다는 노숙자에 대해서 망각했다그저 저 나무로 가고자 하는 마음만이 요동쳤다.

 “빨리 가자.”

 나성은 망설이지 않고 난간을 넘었다사람들이 많이 넘나들어 근처는 위험하진 않았다나성과 종석은 고목을 향해 쾌속으로 전진했다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인형人形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다만 가을을 무색하게 만드는 녹색 잎들과 그 아래로 고인 그림자뿐나성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닌 올려다봐야 되는 거목에게서 일말의 공포를 느꼈다그러면서도 시선을 뗄 수는 없었다나성으로서는 쉽게 느껴보지 못한경외라는 이름의 감정이었다.

 “일단이 근처를 수색하면서 그 사람을 찾아보시죠?”

 나성이 고목을 마주한 채로 계속 침묵하자 기어코 종석이 말했다나성은 딴 세상에 갔다 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면서 고갤 끄덕였다.

 “그러면......저랑 카메라맨이랑 나눠져서 따로따로 수색해보는 걸로 할게요산이 그렇게까지 큰 것은 아니라 막 찾는 게 어려워보이진 않는데......예상보다 땅이 험해서 조심해야 될 것 같습니다.”

 

 나성의 말마따나 그들은 수색을 시작했다나성은 종석을 먼저 보낸 후그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오른손으로 휴대폰을 들며 촬영을 계속했다.

 “저 왕나무라는 것은 정말 신비롭네요보다보니 진짜 홀리는 줄 알았습니다참 나무들이란 게보다보면 대단한 것 같아요다 연세가 지긋지긋하신 분들인데 말이에요이런 분들을 보다보면 저도 거북목을 고쳐야지하는 다짐을하곤 합니다하하.”

 나성은 카메라 너머의 시청자들을 향해서 떠들었다속마음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은 이제 익숙해져버린 그의 습관이었다그렇게그는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야생은 아무렴 자유로운 동식물들의 영역이었고 그것들의 자유는 나성의 다리를 할퀴었다얇은 츄리닝 바지로는 거친 잔가지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어제의 비에 젖어버린 땅도 주의해야 했다살짝 미끄러지기만 해도 발목은 쉽게 접질리고 살짝 접질리기만 해도 산행은 극악의 도전이 되기 마련이다.

 30분 즈음 걸어도 진전은 많지 않았다한 시간 즈음 지났을 땐 회의감마저 들었다이런 방법으로 해서 노인을 찾아낼 수 있는가의문이 나성의 마음에 깃들었다그 순간 종석으로부터의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극적인 타이밍이라고도 할만 했다.

 “찾은 것 같아.”

 스피커 너머로 전달되는 현장의 긴박함이 나성을 덩달아 다급하게 만들었다그는 전화연결을 끊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다급함은 조심스러운 발걸음마저도 신속하게 하였고 올 때보다 곱절은 빠른 속도로 고목에 돌아왔다그리고 그곳에 종석의 뒷모습이 있었다.

 “여기야!”
 종석은 나성을 힐끔 뒤돌아본 후 다시 고목의 그림자 속으로 카메라를 돌렸다나성이 다가가보니 과연 그늘 아래 한 사람의 노인이 서 있었다과연지저분한 남자였다정돈되지 않은 하얀 머리칼과 무질서하게 뻗쳐있는 수염들그리고 주름들은 더러워 보이기까지 했다나성은 짐짓 두려움에 떨었다노인은 지저분한 행색임에도 나성을 바라보는 두 눈빛만큼은 총명했다오래도록 집 없이 살아왔을 것만 같은 모습이건만 두 눈동자만큼은 분명지성인의 것이었다보다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이종의 것 같은 총기가 깃들어 있었다나성은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정했다말이 통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피어오르는 동시에조금두려웠다.

 “안녕하세요?”

 나성은 고갯짓하며 인사하는 동시에 그에게로 다가갔다그가 다가가는 만큼 노인은 뒷걸음질 쳤다고목의 기둥에 밀착하다시피 붙어선 노인에나성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다가갔다가는위험할 수도 있었다노인의 오른손이 삽자루를 끌고 있었으므로나성은 멈춰선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는 방송 같은 거 하는 사람들인데요이곳에 살고 계신다고 해

 “찍지 마!”

 노인이 소리쳤다위협적이지 않은기껏해야 노인의 고성이었지만 어째선지 나성은 선 채로 굳었다두려움이 그의 발목을 힘껏 움켜쥐었다분노에 차 씩씩거리는 노인의 눈빛이 이글거렸다나성은 하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종석에게 말했다.

 “일단은 끄자종석아촬영은 인터뷰 후에 해도 되니까......”

 종석이 순순히 나성의 말에 따른 건 노인의 적대로 인한 긴급촬영중단은 분명 영상으로 써먹기 좋은 자극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평소와 달리 나성은 촬영의 득실을 고려하지 못했다노인에게 집중할 따름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노인을 직시했다의중을 알 수 없는 깊고 어두운 눈동자나성이 다시 한 번 물어도 노인은 다시 한 번 소리쳤다같은 내용의 문답단 한 번의 외침이었는데도 노인은 호흡이 거칠어지는 등 힘겨워보였다희뜩이는 눈동자와 대비되게 허약해 보이는 몸이었다나성의 곁에 붙어 선 종석이 말했다.

 “아무리 봐도 대화가 안 될 것 같은데.”

 나성은 고갤 저었다그들은 이미 대화중이었다번득이는 노인의 눈길과 자신의 눈길을 이으며나성은 그렇게 믿었다대화는 말로써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알려주십시오이 나무에 대해서.”

 나성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말했다무언가 말을 해야 된다는 압박감 속에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 저것이었다그의 뒤엉킨 머릿속에는 어느새 늙은 고목이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질문을 받은 노인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나성은 생각했다지금까지는 나성이 그의 눈을 응시했지만 이제는 그 방향이 달랐다기어코 노인은 입을 열었고고성이 아닌 말이 바깥으로 나왔다.

 “나무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나 이전의 어른들보다도 훨씬 오래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모든 역사보다도 오래되었다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냐?”

 차분한 노인의 목소리는 미성이었다지켜보는 사람들에게방금 전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키 힘든 것이었다나성은 꽤 분위기가 느슨해진 듯해 다시금 질문했다.

 “선생님께서는 계속 여기서 사시는 건가요?”
 “.......나에 대해서라면 그다지 할 말이 없다.”

 “성함이라도 안 될까요?”
 노인은 입을 굳게 다문 채로 나성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그림자의 바깥으로 걸어나가는 노인의 발걸음은 고요했다그리고 빨랐다어느새 종석에게 다가간 노인은 빠르게 팔을 휘둘렀고어느새 카메라는 땅바닥을 굴렀다양해는 일절 없는 일방적인 폭행종석이 황급히 카메라를 주워 보더니 험악하게 으르렁거렸다.

 “깨졌어못 쓰겠군.”

 “찍고 있던 거야?”

 “그게 나의 역할이니까.”

 나성은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일이 잘 풀릴 것 같다가도 이 모양 이 꼴이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일단은 진정해봐내가 얘기해볼 테니까.”

 나성은 또 언제 터질지 모를 종석을 물러나게 한 뒤노인을 돌아보았다언제는 안 그랬냐는 듯 분노 어린 표정이 나성을 쏘아보고 있었다.

 “선생님이것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뭐죠?”

 노인은 소리치지 않았다차분한 어조로또박또박 말했다.

 “이것을 기록하지 마그래서는 안 돼.”

 나성이 입술을 달싹이며 다시 말을 꺼내려하자 노인은 재차 입을 열었다.

 “나무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누구도 이 나무를 가질 수 없어!”

 나성은 역시 맛이 간 사람이로군.” 말하며 중얼거리는 종석을 무시하며 노인의 말을 곱씹었다. ‘누구의 것도 아니다.’ 역시나 이 고목의 존재가 수상했다다른 나무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는가혼자만 다른 부피의 세월을 관통한 것처럼 보였다나성도종석도고목을 처음 봤을 때는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것으로부터 풍기는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되었다일개 나무에게 경외를 느낌은 아무래도 보편적이지 않았다나성은 그것이 신이 내린 나무라 해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노인의 정체 같은 건 갈피도 잡을 수 없는 미궁으로 빠졌다하물며 그가 악을 써가며 지키려하는 거목 한 그루의 정체는 더할 나위 없는 미지였다나성의 마음속에선참으로 오래간만에 호기심이 영상욕심을 앞질렀다.

 “도대체 이 나무는 뭐라 말이죠아무리 봐도 그냥 나무가 아닙니다저도저 친구도보자마자 홀렸단 말입니다선생님께서는 뭘 알고 계신 건지...부디 설명 좀 해주십시오!”

 노인은 나성의 말에 잠시간 움직임을 멈추더니이내 고목 아래의 그림자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그리고 주저앉았다돌출 된 뿌리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고목에 등을 기댄 모습이 꽤 편안해보였다.

 “나도 아는 것이 많지 않다많은 것들을 이미 알려줬어.”

 나성은 노인이 더 말하기까지 침묵하며 기다렸다.

 “예전에는 열매도 열리곤 했지.”
 나성은 당황하며 고목의 가지를 올려다보았다설마 과일나무라도 되었단 말인가올려다본 고목의 처마는 가을을 무안하게 만드는 짙은 초록이었다.

 “이제는 나지 않는 겁니까?”

 “그리 된지 오래 됐지참 맛있었어.”

 “사과나 오렌지 같은 걸까요?”
 “틀려딱히 이름은 없다이 나무에서만 나는 열매였거든.”

 나성은 미지의 열매에 대한 궁금증을 미뤄두고 대화가 오가는 지금의 기세를 타 다시 질문했다.

 “선생님은 여기 사시는 건가요?”
 “그렇지.”

 “불편하진 않고요?”

 나성으로서는 중요하지도 않은가볍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노인은 자못 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례하구나나무는 정말로 풍부하다최근엔 조금 덜할지 몰라도 한때 이곳은 정말 풍족했어.”

 “죄송합니다제가 실수를 한
 “가라!”

노인은 다시 한 번 고성을 터뜨렸다워낙 갑작스러웠던 탓에 말이 끊긴 나성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기까지 했다노인의 눈길이 나성을 찌를 듯 했다.

 “이 산에서 당장 꺼져라그리고 오늘 본 것을 모두 잊어.”

 “하지만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른손으로 삽을 질질 끌며나성과 종석에게로 다가왔다노여운 표정으로금방이라도 휘두를 듯이나성은 그를 바라보며 공포에 휩싸였다지금 노인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어느새 부턴가 그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빛났다아까 전보다도비정상적일 정도로.

 나성은 당장 떠날 수밖에 없었다.

 

까만 검정 위로 금빛 강이 가로질렀다.

까만 검정은조각났다찬란하게.

황금시대의 황금 왕좌 위로 초라한 죄인이 앉았다.

조각난 검정들은 또 다시

분 열 하 고 분 열 하 고

왕좌의 위로 쏟아진다.

죄인이 된 지배자짊어진다.

 

 나성은 헐떡이며 눈을 떴다모텔이었다시간이 지나며 점층적으로 기억이 재건되었다고목을 두고 떠나는 하산과 조수석에서 바라본 바다와 카메라의 메모리를 복구한 후 종석과 기뻐하던 순간들이 점점으로 기억났다종석은 담배라도 피러 간 모양인지 방에 없었다아침이라고 부르기에는 뻔뻔한 9나성은 잠시 방을 서성이다다시 침대로 뛰어들었다전날 그를 지나간 폭풍의 잔해가 오늘 서서히 드리웠다너무 깊은 잠은 두통을 불러올 수 있단 사실을 나성은 기억했다마침 혼자였고 자연스레 그는 꿈을 상기하는 데 열중했다분명 비현실적이었지만 꿈을 바라보는혹은추체험하는 감각이 극히도 생생했다황금이 그의 몸을 조각내는 듯했고 부서진 검정은 한없이 영롱했다사라져갔다어쩐지고목 아래의 그림자가 연상되는 검정이었다나성은 문득검정색의 작은 원탁을 바라보았다종석의 카메라가 놓여있었다고목의 모습을그 아래 노인의 모습을 담은 상자나성은 문득카메라를 집어 들었다그에게 있어서 영상은 생계수단이었다어제 메모리를 복구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분명 그랬는데나성은 카메라를 부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꿈 속의 죄인이 그의 영혼에게 속삭였다담아서는 안 된다기록해서는 안 된다소유해서는 안 된다나성은 바닥으로 카메라를 세차게 던졌다파편들이 내팽개쳐지고나성은 다시 주워들고던졌다완전히 부서질 때까지나무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그는 노인의 말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나성은 바깥으로 나섰다가을의 오전은 차갑다가을하늘은 높고 공활하게 그를 굽어보았다그는 인도를 걸었다어제의 산으로 향하는 도보였다시내로부터 그곳까지 걸어가기에는 먼 거리였지만 나성은 사고를 거치지 않고 행동했다시간이 조금 흘러 전화벨이 울려도 받지 않았다그는 휴대폰의 전원을 꺼놓은 채로 걸었다그는 생각했다아직 그곳에 고목이 있을까지난 밤 사이 없어졌다면 그게 이상한 것일 테지만나성은 그런 불안감에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고목은 그 누구의 것도 되어서는 안 되지만나만큼은 그것을 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6시간이 지났다정오라기에는 뻔뻔한 오후였고높고 공활한 가을하늘은 볕을 퍼부었다찬바람과 따신 햇빛의 조화는 산뜻했고 나성은 예의 들머리 앞에 서 있었다비탈을 타고 미끄러지는 가을바람그 건조한 바람만큼산은 어제보다 말라 있었다진흙이 흙이 되고 낙엽들은 서서히 몸을 오므렸다나성은 데크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커다란 고목을 발견하고는 간단히 난간을 뛰넘었다걸음이 점점 빨라졌다그는 경사면 위를 빠르게 질러 고목 앞으로 다다랐다어제와 다름없는 자태나성은 나무의 늙은 껍질과 손을 맞댔다고목의 박동을 헤아렸다푸른 심장은 느리게숨을 쉬었다.

 어느덧 하늘마저 단풍이 지듯 노을이 번졌다시간은 저녁을 빠르게 달려 나갔다나성은 고목에 기대서서 몇분 간 경관을 감상했다뒤이어시야의 틀 안으로 소년이 나타났다다른 호칭은 생각할 수 없는 전형적인소년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여기서 뭐하세요아저씨?”
 “......내가 묻고 싶네넌 왜 여기 있니위험한데 말이야.”

 노인이 아님에 실망하며 나성은 걸어 나갔다초등학생 저학년으로도고학년으로도 보이는 모습이었다소년은 말했다.

 “전 정찰이거든요파수꾼을 확인하러 온 거에요.”

 “파수꾼노인을 말하는 거니?”

 “맞아요삽을 들고 다니죠.”

 나성은 미심쩍게 소년을 바라보았다노인이 어째서 파수꾼으로 불리는지는 알지 못했다여러모로 수상했다.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건지 알려줄 수 있겠니.”

 “별 거 아니에요이 나무의 수액이 정-말 귀한 거거든요그래서 계속 훔치려 시도하는데파수꾼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는 거죠오늘은 총공격을 할 거에요순순히 비켜주질 않으니 그러는 수밖에 없겠죠.”

 “이 나무의 수액을 훔치려하다니못된 녀석이구나썩 돌아가라.”

 나성은 고목에게 해로워 보이는 소년에의 적개심이 치밀었다욕지거리라도 뱉고 싶었단 생각이었지만 차마 아이에게 그러지는 못 했다그래서일까소년은 물러나지 않았다.

 “상관없어요어차피 전 정찰이니까수액을 훔치는 본대는 밤에 올 거예요낮에는 너무 눈부시니까.”

 “......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나성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땀이 맺힌 목덜미를 바람이 훑고 지나가면 온몸의 털이 한 올 한 올 곤두섰다. 가을의 저녁은 짧았다시간이 노을을 한 겹씩 벗길 때마다 검푸른 하늘이 드러났다하늘의 더께 사이로 창백한 달과 별이 걸렸다.

 “곧 있으면 시간이 돼요모두가 얼굴을 감추고 달려들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면 안 될까?”
 “안 돼요시간이 다 됐거든요한 가지 조언해드리자면여기서 떠나가세요계속 여기에 있다간 다칠 거예요.”

 다칠지도 모른다가 아닌 다칠 것이다라는 경고가 나성을 섬뜩하게 찔렀다소년은 마른 가지가 무성한 비탈을 거침없이 달리더니 마법처럼 시야에서 사라졌고나성은 소년이 사라진 방향으로 선 채머뭇거렸다직전의 일들을 믿기 어려웠다소년과의 마주소년과의 대화소년과의 이별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길도 아닌 곳으로 달려 나가더니어디로 사라졌는가지끈또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나성은 몸을 돌려 고목과 마주한 채 고민했다이곳에 남으면 위험하다소년이 그렇게 말했고 나성은 그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뚜렷한 근거는 없이비현실적인 이 상황 자체가 근거로 받아들여졌다나성은 가만히몇 분간 상념에 잠겼다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그리고 그는 끝끝내 판단을 내렸다떠나자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목을 두고 떠나기가몸서리 쳐질 듯 싫었다그러나 당장은 안위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으로그런 고로나성은 하산을 시작했다.

 

 고목에게서 멀어질수록 흩어졌던 정신이 모여드는 느낌이었다늦게나마 종석의 생각이 났다나성은 휴대폰의 전원을 켜자 종석으로부터의 부재중 전화들메시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벌써 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사과 한 마디로는 넘어가지 못하리란 직감에 나성은 벌써부터 골치 아팠다어쩌다 난 이곳에 있는 걸까원초적인 질문은 그를 오랜 과거로 호출했다기자라는 꿈을 꿨던 고등학생 시절어떤 꿈을 꾸든 성적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무력감나성은 유튜브의 도약과 함께접어뒀던 꿈을 다시 펼쳤다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으나 3학년으로 올라선 후 입장은 급속도로 변했다기어코 대학의 문턱 앞에 서버린 것이었다무렵에 그는 사실상 공부를 포기한 상태였고보다촬영이 재밌었다꾸준하게 쌓인 영상이 100개가 넘었다 구독자들도 꽤 많았다유튜브의 인기는 나날이 상승했다제보를 받아 직접 취재를 하는 한나성유튜브는 그렇게 완성 되었고 실종된 강아지를 찾아다주는 영상으로 인기를 얻어 그의 삶을 책임지게 되었다나성은 기뻤고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통장으로 쌓이는 돈을 볼 때마다 자랑스러운 동시에 더 큰 돈을 원했고 반복적으로 촬영했으며어느새 원동력이 바뀐 동시에 그는 지쳤고지쳤다작금에 이르기 전까지도 그는 지쳐 있었다.

 나성은 카메라를 부쉈다내리막길 위에 멈춰 서서몸을 돌렸다햇빛의 잔상만이 남은 밤의 목전이었다그는 고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호기심이 그를 이끌었다최초의 원동력을 되찾았다.

 

 나성은 다시 난간을 넘었다하늘은 무서운 속도로 까매졌다세상이 까매졌다전기가 돌지 않는 산은 순결한 밤의 어둠을 머금었다나성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긁히는 등 공격을 받으면서 걸었다최선을 다해 조심해도 발걸음은 영 느려지지 않았다멈춰 섰을 때는깨달은 후였다순간 나성은 방향을 잊었다시각은 무용했고 그는 대신청각에 신경을 기울였다산 속의 밤은 꽤나 소란스러웠다무수한 속살거림이 사위에 있었다바람이 수풀을 흐트러뜨리는 소리이름 모를 벌레들의 울음소리같은 것들로 밤은 호흡했다그리고 뒤이어지는 발소리나성은 짧은 보폭으로 낙엽을 밟고 달리는 소리를 들었다소년이 말한수액을 훔치러 온다던 본대나성은 여러 개로 분열하는 보폭의 소릴 들었다여럿이었다밤 속의 그림자들은 보이지도 고요하지도 않게 움직였다짐승처럼모든 보폭들은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어둠 속 어디선가 빛이 반작였다반사광이었다누군가가 쇠붙이를 들고 있었다나성은 노인의 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노인이 저곳에 있었다곧 살육의 소리가 들려왔다나성은 그 익숙지 않은 소리에 상상을 덧대며 상황을 유추했다노인이 습격자들의 머리통을 삽으로 내려찍는그런 상황을 떠올렸다나성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충돌의 소리는 명확하지만 비명소리는 한 줌도 없었다.

 그림자들의 기척이 나성에게서 점점 가까워졌다나성은 그들이 일으키는 바람마저도 느껴지는 듯했다충돌은 한순간이었다보이지 않던 그림자는 한순간에 실체로 나타나 그의 등을 들이받았다의도적이라기보다 밤의 어둠이 빚은 사고였다부딪친 습격자는 나성에겐 하등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몸을 일으켜 달려 나갔고나성만이 비탈을 구르며 신음했다그러거나 말거나 습격자들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나성을 뛰어넘었다그는 한 폭의 시야를 가로지르는 그림자들을 보았다하나끊이질 않았다살육의 소리도마찬가지로.

나성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어느새 눈은 밤에 적응하여 주변의 윤곽을 인지했다무수한 잔가지들 너머로가까운 곳에 고목이 보였고 쇠붙이를 휘두르는 하나의 움직임이 보였다비명도 기합도 없이 시체들이 덧쌓이고 있었다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그는 비틀대며 걸어가다 위쪽에서 굴러온 육신에 걸려 넘어졌다습격자의 몸 위로 엎어졌다그 따스하고 물컹한 감각에나성은 식겁했다아직은 온기가 남아있는그것은 시체였다나성의 입에서 힘없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는 급하게 발버둥 치듯 일어서려 했다사람의 몸을 밟고 선 몸은 위태로웠고 굴러온 시체가 다시 한 번 그를 넘어뜨렸다주변은 무수한 시체들로 가득했다나성은 의도치 않게 어느 시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노인의 얼굴이었다그가 익히 알고 있던노인의 얼굴이었다시체의 얼굴을 한노인의 얼굴이었다.

 나성은 기겁하며 고갤 돌렸다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더 높은 곳의 누군가는 여전히 쇠붙이를 휘두르고 있었다쏟아지는 습격자들만큼이나파수꾼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나성의 눈이 산을 나뒹구는 시체들을 훑었다시체들의 체형은 모조리 같았다호기심이란 이름의 천진스런 악마는 나성의 눈길을 시체의 얼굴로 끌어당겼다모든 곳에 노인의 얼굴이 있었다죽어버린시꺼먼 눈동자들이 무수했다나성의 마지막 이성 한 가닥이 사라졌다.

 그는 미친 듯이 달렸다아니미친 채로 달렸다그는 무작정 노인의 시체들을 밟고 달렸다그도 모르는 사이 그는 고목 앞이었고 삽을 휘두르며 습격자들을 도륙 내는 파수꾼의 앞이었다.

나성은 살아 움직이는 습격자들을 보았다노인의 것이 아닌 까맣고 충일한 모발과 보다 큰 키재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그들을 보았다습격자들은 삽을 얻어맞아 죽어가며 듬성듬성 두피가 휑한 흰머리가 되었고 쭈글쭈글한 피부로 변해갔다.

 문득파수꾼의 고개가 움직였다.

 눈길과 눈길이 일직선상에서 만났다어둠은 눈길을 막지 못했다파수꾼의 눈길은 야행성 짐승의 것처럼 영롱했다나성의 눈동자 속에는반짝이는 눈을 한 노인의 초상이 담겼다.

 그는 도망쳤다.

 

 그의 기억은 온전하지 않다다만 그가 겪었던 사건이 기록되는 일은 없었다나성이 되찾아간 산에는 시체 한 구 발견할 수 없었다노인은 여전히도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지만 나성만은 노인을 볼 수 없었다.

 종석과의 관계는 어긋났다가 또 봉합되는 식으로 여전히 반복되었다나성에겐 아무렴 상관없었다시간을 거듭할수록 그날의 사건이 실재 했던가 의구심이 생길 때면 그도 모르는 사이 그가 휘갈겨 써놨던 일기를 펼쳤다언젠가 다시 그곳으로 향할 것이다이번에는 카메라를 들고서취재의 목적이 감춰진 비밀만은 아니었다그는 푸른 고목을 지키기 위해 카메라를 들 것이다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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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문

지하철은 돌아옵니다. 다음 열차에는 자리가 비어있을지 몰라요.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내리는 사람도 있을 테니 말예요. 정 못 믿으시겠다면, 좋아요. 저기 구석의 김노인이 보이시나요? 그도 한때는 지하철을 타고 세상을 돌던 사람이었죠. 그러나 지금의 처지를 보세요. 할 줄 아는 거라곤 두 손을 모으고 엎드리는 것밖에 없죠. 아, 지하철이 돌아오는군요. 문이 열립니다. 이런, 이번에도 당신을 위한 자리는 없군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지하철은 돌아옵니다. 역사가 속삭인다 스크린도어 너머의 통로는 깜깜하다. 철도는 회색으로 남아있다. 유리 너머를 들여다볼 때면 끝없는 선로에 아득해지고, 또, 새어 들어오는 시취. 윽! 어제는 몇 명이 떨어졌을까, 세는 사람이 없어 아는 사람이 없다. 역사의 위대한 헌장을 새기는 사람만 있다. 반복되는 속삭임은 날카롭게 인간을 음각한다, 한땐 새하얬던 살갗을 파먹으며, 지하철은 돌아옵니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는 형은 기어코 지하철에 올라타 떠났다. 빼빼마른 아저씨를 끄집어낸 후 사람들 사이에 꽉꽉 눌려지며, 형은 잠시나마 기뻐보였다. 문이 닫힙니다. 문이 닫힙니다. 더 이상 형은 날 보지 못했다. 밝은 세계의 유리창은 스스로만을 비추고, 어두운 세계의 유리창은 밝은 면을 여과없이 투과한다. 시선은 일방적이다. 열차 안은 정말, 따뜻해 보이지. 찬 몸을 끌어안고 그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는 행동한다. 역사는 속삭인다. 아기의 소리가 들려온다. 산모의 소리가 들려온다. 자주. 이 사람들은 이 어두운 곳에서 무슨 생각으로 아이를 낳는 걸까. 그래도 아기의 울음소리는 잠시나마 역사의 속삭임을 덮는다. 사람들은 잠시나마 기쁘다. 축복한다. 태어난 한 사람의 부피만큼 누군가는 땅을 잃는다. 누군가는 벼랑으로 몰려난다. 스크린도어는 쉽게 열린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이렇게 추운 걸까? 체온은 공기로까지 번지지 않고,

  • 구포대교
  • 2025-11-25
스노우볼 속 스노우맨의 사념

이곳의 눈은 내린다기보다는 솟아오르는 편이라 썩 즐겁지 만은 않다. 다만 유리막 바깥의 세상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약간의 위안이 되기는 했다. 다만 여전히 즐겁지 만은 않다. 그들이 나를 관찰할 때 나는 손을 흔든다. 그들이 나를 흔들면 나는 조금 어지롭고 이 세상마저도 어지럽다. 지구본을 닮은 유리는 겨울을 흉내 낸다 박제된 겨울은 흔들릴수록 촘촘해진다 그리고 저 너머의 서랍 위에는 가을이 박제되어 있다. 붉은 단풍보다는 샛노란 은행 한 닢 유리는 부자유를 포장하여 애정을 듬뿍 받고 이따금씩은 스스로마저 가둬두게 한다. 유리공예공은 만물을 박탈한다. 또 어떤 유리는 그 투명도가 너무도 높아서 인지할 수조차 없다. 그 어떤 인간이라도 인지할 수 없어서 다룰 수조차 없다. 실은 그들의 손가락에서 비롯된 것이면서도 누구도 자각하지 못하며 지금의 영화를 방부한다 말하지만 하릴없는 유리막 속에서는 늙은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다. 박제의 끝은 방치이고 둥근 세상도 언젠가 방치된 채 우주의 한구석을 구르겠지

  • 구포대교
  • 202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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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 혁

    도입부는 <소년이 온다> 오마주하신건가요?? 너무 잘 읽었슴다!

    • 2026-01-03 14:08:43
    선 혁
    0 / 1500
    • 구포대교

      @선 혁 소년이온다 오마주는 없어요..읽어주셔서 감사함니다

      • 2026-01-03 17:41:27
      구포대교
      0 / 1500
    • 선 혁

      • 2026-01-06 14:47:28
      선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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