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이지 않은 현대극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비판론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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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현대를 감지하는가?
무엇을 보고 ‘현대(적)’이라고 느끼는가?
요컨대 영화에서 현대가 드러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오늘날 끊임없이 속기되고 있는 사회적 논의들이 될 수도 있고(퀴어 영화, 정치 영화의 경우), 우리의 오늘날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21세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 영화가 ‘현대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오늘날 우리와 맞닿아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양식에서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스마트폰의 존재일 것이다. 문득 21세기 영화의 책무는 스마트폰을 어색하지 않게 사용하는 것이라는 유운성 평론가의 진단(「터칭 스페이스: 스마트휴먼의 몸짓과 장소」)이 떠오른다. 집과 직장, 학교 같은 일상적 공간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할 일이 아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소통과 표현(전화 및 SNS 기능)을 간단히 대체할 수 있는 오늘날, 현대는 스마트폰을 통해 형체를 드러낸다.
현대극을 차용한 영화들 ― 그렇기에 현대를 보여줘야만 하는 영화들 ― 은 감독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스마트폰을 드러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 앤더슨이 휴대폰을 드러내는 방식
폴 토마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펀치 드렁크 러브> 이후 무려 23년 만에 현대를 배경으로 한 그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주목해 볼 만하다. 한 때 현대극을 찍지 않는 이유에 대해 “스마트폰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한 앤더슨의 대답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 스마트폰을 담는 방식을 23년간의 연구 끝에 깨닫고 만든 진정 ‘현대적인 영화’인 것일까?
영화에는 스마트폰에 대한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윌라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수녀원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윌라가 소지하고 있던 휴대폰으로 인해 위치가 추적당하자, 한 아나키스트 단원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휴대폰을 던진다. 카메라는 고속도로 밖에서 외부로 떨어져 나가는 휴대폰을 포착한다. 앤더슨은 이 장면을 굳이 자동차(내부)와 고속도로(외부)라는 개별적 공간으로 분활하므로서, 마지막 쇼트에서 외부로 떨어진 스마트폰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영화 내부(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자동차)에서 영화와 전혀 관련 없는 외부로 버려져 산산조각 난 휴대폰의 풍경이다.
이 파괴된 휴대폰, 다시 말해 파괴된 현대성이야말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스마트폰을 영화 외부로 밀어내려는 시도들이 보인다. 툭하면 휴대폰에 부착된 위치추적 기능을 사용, 또는 회피하기 위해 휴대폰이 있냐 없냐 묻는 등장인물들의 질문은 영화가 휴대폰의 진위여부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특히 위치추적을 빌미로 휴대폰을 치우기 위해 애쓰고 있는 영화를 보게 되면, 앤더슨이 휴대폰을 거슬리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스마트폰을 변방으로 치워버리기 위해 애쓰는 까닭을 고민해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앤더슨이 고전영화를 현대영화로 전이하려는 감독이라는 사실은 일찍이 논의된 바 있다. 특히 그가 일방적으로 모방하려 했던 울트먼과 스콜세이지의 영화에 휴대폰이 있었다면, 모든 영화적 사건들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외적으로 유명한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스콜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 속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에게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트래비스는 사이버 추적을 통해 아이리스의 부모님을 찾아내거나, 범죄 조직의 증거를 수집해 고발함으로써 그 어떤 물리적 폭력 없이 사건을 끝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순된 형태를 보여줬던 성매매 업소의 학살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트래비스는 정의의 사도랍시고 학살극을 자행한 자신의 어긋남을 인지 조차 못했을 것이다. 스콜세이지에게 휴대폰이 있었다면,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시늉으로 윤리적 죽음을 자인했던 트래비스의 모습은 결코 포착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논리는 앤더슨의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원 배틀 에프터 어나더>는 휴대폰을 치워버려야만 비로소 현대 영화에서 서부 추적극이라는 고전 영화의 외양을 뒤집어 쓸 수 있다. 밥과 윌라에게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부녀는 서로 떨어져 있어도 언제든 연락하며 쉽게 재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마트폰은 지금의 우리가 직접 만날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을 연결해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앤더슨이 원하는 것이 서로가 단절된 상태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고전 추적극의 세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옛 영화사를 오늘의 영화와 잇고자 해온 앤더슨에게 스마트폰은 그 시도를 위협하는 거대한 장애물이다. 앤더슨에게 밥과 윌라는 결코 ‘현대적’이어서는 안 되는, 다시 말해 휴대폰을 소지해서는 안 되는 인물들이다. 그렇기에 아버지와 딸의 소통을 막기 아버지는 옛 암호조차 잊어버린 술주정뱅이가 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휴대폰을 영화에서 제거하기 위해 인물을 희생시키는 앤더슨의 태도는 때로 편협하고 과격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군인들이 이탈리아 이민자 주둔지를 급습하는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장면에서 한 직원은 휴대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자신이 철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군인과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군인의 고함 소리에 고개를 든 직원은 그제야 유리창 너머의 군인들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도망간다. 이 장면 연출에는 꽤 어색한 지점이 있는데, 군인들이 모여 긴장감이 한껏 고조된 상태에서, 직원이 무감각하게 휴대폰을 하는 쇼트가 어색하게 끼어 영화가 쌓아 올린 긴장감을 무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긴장감이 다시 발생하는 건 직원이 스마트폰에서 눈을 돌리고 다급한 눈동자로 군대를 훑으며 도망치는 순간이다. 직원이 휴대폰을 보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정체되어 있던 영화가, 휴대폰에서 눈을 떼자 다시 전개된다.
앤더슨이 여지껏 영화의 흐름에 변태적인 집착을 가지고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영화들(<조디악>, <매그놀리아>)을 만들어 왔다면, 긴장감을 순식간에 흩어내 버린 이 장면은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만큼이나 매우 어색하고 갑작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휴대폰이 앤더슨 영화의 흐름을 무너뜨렸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휴대폰을 멀리하므로서 망가진 긴장감을 다시 복구시켰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휴대폰이 없어야 영화가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원 배틀 에프터>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앤더슨과 (비)앤더슨적인 것들의 사투
요컨대 스마트폰이 간단한 터치 몇 번으로 대부분의 운동성을 최소화시킨다는 사실은 심심찮게 논의되어 왔다. 고전영화들이 여지껏 과장된 몸짓과 운동성을 통해 긴장감을 이끌어내어 왔다면(무성영화의 경우), 앤더슨에게 스마트폰은 과잉되고 불필요한 운동성을 소거시키며 반-영화적인 행위성을 생산하는 도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 작고 간단한 터치 몇 번으로 모든 일을 대체할 수 있는 도구라는 사실은 오늘날 운동성이 그만큼 소극적이고 최소한의 것으로 퇴화되었다는 것을 환기시켜 준다. <원 배틀 에프터 어나더>가 액션영화 같지 않다면, 그것은 (감독이 원하든 원치 않든) 스마트폰의 편의성을 영화 내부에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휴대폰을 거부하는 앤더슨과 휴대폰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는 앤더슨의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밥과 록조 대령은 각각 휴대폰을 거부하는 앤더슨과, 휴대폰을 차용한 앤더슨의 모습을 보여준다.
윌라를 찾기 위한 록조 대령의 추격전은 스마트폰에 포착된 추적기능을 통해 손쉽게 끝난다. 영화 속에서 대령은 뛰거나 달리지 않는다. 그는 시종일관 차를 타고 이동하며, 기껏 움직인다고 해봤자 군인처럼 근엄 스럽게 걸을 뿐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없는 밥은 다르다. 그는 딸을 찾기 위해 밤거리를 달리고, 거친 숨으로 건물 옥상을 뛰어넘으며, 병원을 가로지른다. 록조와 밥 모두 딸을 찾기 위한 똑같은 과정을 스마트폰’이라는 도구로 인해 다른 방식으로 거치고 셈이다.
앤더슨이 여지껏 <마스터>, <펀치 드렁크 러브>, <팬텀 스레드>, <데어 윌 비 블러드> 등 자신의 영화 전반에서 양자와 양녀를 지닌 인물들을 다루어왔음을 염두에 둔다면, 밥과 록조 대령 역시 양녀(윌라)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앤더슨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밥 퍼거슨이 완전한 앤더슨의 인물이라면, 록조 대령은 밥에 비해 근소하게 ‘반(counter intention)앤더슨적’이고, '비(非)앤더슨적'인 인물이다. 여기서 ‘비앤더슨적’이란 ‘고전’을 고집하던 앤더슨과는 다르게, ‘현대적’이라는 것을 뜻하고, ‘반앤더슨적’이라는 것은 앤더슨의 영화적 경향, 작가론에 무의식적으로 반하는 경향 - 마치 스마트폰을 영화에서 밀어내려는 앤더슨과 반대로 스마트폰을 적극 사용하는 록조 대령처럼 - 을 뜻한다.
윌라가 양녀라는 사실도 모르고 친딸처럼 키어온 밥은 앤더슨적일 수 있지만,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윌라가 자신의 친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록조 대령은 앤더슨적일 수 없다. 동시에, 술주정뱅이가 된 채 집에 박혀 1966년도에 공개된 ‘알제리 전투’를 관람하는 밥과, 매일 집을 나와 망원경으로 현대적인 세상을 들여다보는 록조의 모습은 각각 고전과 현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밥이 '고전적-앤더슨적'인 인물이라면, 록조 대령은 '현대적-비/반앤더슨적' 인물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밥 퍼거슨과 록조 대령의 오랜 사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휴대폰을 두고 치열하게 싸우는 ‘앤더슨(고전)’과 ‘비앤더슨(현대)’의 치열한 사투의 풍경처럼 보인다. 이 사투 끝에서 승리한 것은 고전영화의 외양을 둘러싼 밥이다. 밥은 양녀에게 "내가 너의 아빠다!"라고 외치고, 딸은 아빠에게 안긴다. 이 장면은 고전영화(밥)의 승리를 당당히 선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섞연찮은 지점들을 느끼게 한다.
부당적인 자기모순과 프로파간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이 영화가 인물을 폐인으로 만들어서라도 현대성을 회피하겠다는 독자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의 진정한 문제는, 밥과 윌라의 승리가 ‘정신승리’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밥은 윌라의 친부가 아니기에, “내가 너의 아빠다!”라고 외치던 그의 말은 결코 성립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더슨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현실을 끌어 앉는다. 딸을 향한 정열적인 사랑으로 인해 밥은 윌라의 아빠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을 경계해야 한다. 앤더슨이 전달하고자 하는 사랑은, 오늘날 고전영화의 형식을 따라하기 위해 휴대폰을 창 밖으로 던져버리고, ‘역시 고전영화야’하는 식으로 특정한 관념을 찬양하는 장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 스마트폰으로 인해 모든 것들이 유용해졌는데도, 앤더슨은 그 사실에 불복하고 휴대폰을 영화 속에서 계속해서 밀어내며 고전영화를 감싸고 있다. 이 사랑의 가장 큰 문제는 앤더슨이 휴대폰이 없는 고전적인 장소에서 고전영화를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현대적인 장소에서 고전영화를 찬양하는 것과 고전적인 장소에서 고전영화를 찬양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가 현대와 고전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면, 후자의 경우는 관계를 살펴볼 여지가 없기에 일반적인 사이비적 자기세뇌와 다르지 않다. 이것은 우물 안 개구리와 다를 바 없다. 고전적인 밥이 휴대폰 없는 고전 세계에서 승리하는 이야기를 다룬 <원 배틀 에프터 어나더>는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비 영화처럼 보인다.
영화의 미래를 위하여
앤더슨은 영화 속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팻말을 쓰는 트럼프 추종자들과, 그와 비슷한 말을 하는 영화 속 인물을 냉혈한 악당으로 묘사하고, 이 영화에 인종차별과 이민 문제를 끌어들이며, 동시대 트럼프 정부와 보수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정작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고 외치는 이들과 ‘고전 영화를 다시 위대하게’라고 외치는 앤더슨 사이에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휴대폰(현대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앤더슨은 그 스스로 이 영화에서 비판했던 보수-우월주의자가 되어버릴 뿐이다. <원 배틀 어나더 애프터>는 ‘현대극’이라는 거짓된 장르로 치장하고 있는 구시대의 전유물이자, 고전에 대한 어느 보수 우월주의자의 우아하고 격정적인 헌사다.
오늘날 영화에 필요한 것은 고전에 대한 우월의식이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세계를 영화에 담아내려는 정신이다. 일방적으로 고전을 찬양하고 있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원 배틀 에프터 어나더>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이들, 그리고 영화의 미래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끊임없이 부정당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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